4세기에서 7세기까지 융성했던 힌두교의 굽타왕조가 쇠퇴하자 인도에서는 작은 왕국들로 이루어진 봉건시대가 시작된다. 그 후 8세기부터 이슬람교가 서서히 침투하다가 드디어 16세기에 북인도에서 이슬람의 무굴제국이 탄생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지역을 다스리던 바부르(Babur)는 1526년에 아그라에 입성하면서 무굴제국을 일으켰는데, 장자상속제가 확립되지 못해서 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골육상쟁의 피를 불렀다.
바부르의 장남 후마윤은 왕이 된 뒤 아편과 점성술 등에 탐닉하다 아프간 출신들의 장군과 동생들에게 한때 축출되었다. 그는 페르시아로 망명했다가 후일 다시 왕권을 되찾았으나 이내 죽는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 대제(위대한 인물이란 뜻)는 위대한 군주였으나 말년에 아들 제항기르(세계를 장악한 자)가 반란을 일으킨다. 제항기르는 패한 후 오르차로 도망갔다가 훗날 아버지가 죽자 왕이 된다. 이런 집안의 내력은 계속 반복되어서 제항기르의 아들 샤 자한(세계의 왕) 역시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한 후 아버지가 죽은 뒤 왕이 된다.
이때 왕위 다툼에서 장인 아사프 칸이 자신을 지지해 왕이 되었으니 처가가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라 왕비 뭄타즈 마할은 미모와 지혜를 겸비해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이 부인이 출산 도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샤 자한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죽은 이듬해인 1632년부터 약 22년간 그녀의 묘인 타지 마할을 만들었다. 인부 20여만명이 동원되었는데, 이란 출신의 건축가가 설계하고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중국 등에서 기술자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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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포트 입구(왼쪽), 아그라의 주택가에서 자유롭게 사는 원숭이들 |
순백의 대리석과 거기에 새겨진 꽃과 잎 문양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이런 것을 만드느라 샤 자한은 국고를 탕진했다. 또 동원된 백성들은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결국 말기에 장남에게 왕권을 양위하려던 샤 자한은 3남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쫓겨났고, 타지 마할에서 약 2㎞ 떨어진 아그라 포트에 갇히게 된다. 원래 선대에 성으로 만들어진 것을 샤 자한이 궁으로 개조했는데, 그 안의 무삼만 부르지(포로의 탑)에 자신이 갇힌 것이다.
그곳에 서면 멀리 타지 마할이 보인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가 얼마나 미웠던지 도망가지 못하도록 성 앞의 야무나 강에 악어를 풀어놓았고, 여름에는 짠맛 나는 우물물만 마시게 했다. 결국 샤 자한은 8년 동안 멀리 왕비의 묘를 사무치게 바라보다 죽었고, 소원대로 타지 마할의 왕비 옆에 안치되었다.
아버지를 그토록 학대하며 왕권을 유지한 아우랑제브는 알람기르(세계의 정복자)란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 작은 세계의 정복자는 형과 동생도 죽여버렸다. 그러나 선대에서 그런 것처럼, 그도 아들 아크바르의 반란을 겪은 후 병을 앓다가 죽는다.
그 후 무굴제국은 자식들의 내분으로 급속히 쇠퇴하면서 영국 세력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1774년 인도에 영국의 초대 총독이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영국 식민지가 된 것이다.
아크바르 대제(위대한 인물), 제항기르(세계를 장악한 자), 샤 자한(세계의 왕), 알람기르(세계의 정복자)…. 거대한 칭호를 갖고 거대한 꿈을 꾸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집안대대로 골육상쟁의 비극을 맛보았던 그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세월이 흐른 지금, 어느 누구도 그들의 헛된 야망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허망한 역사와 골육상쟁 속에서 피어난 한 여인에 대한 극진한 사랑만이 가슴에 남아, 그 기억을 되살리며 바라보는 타지 마할은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런 역사를 몰라도 단지 건축미에 감동하는 이들도 있다. 또 타지 마할의 대리석 계단에 앉아 햇볕을 쬐며 사랑하는 연인에게 엽서를 쓰는 이들도 있다. 거창한 역사를 되새기며 건축물을 돌아보는 재미도 있지만, 이렇게 시공 속에 드리워진 순수한 아름다움에 푹 젖어 있노라면 사진 몇 장 찍고 휘돌아본 후 떠나는 여행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기쁨이 샘솟는다. 타지마할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볼수록 수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인류의 보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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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무삼만 부르지(포로의 탑)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아그라 포트의 무삼만 부르지(포로의 탑), 입구에서 본 타지마할, 타지마할의 여행자 |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현재 아그라의 타지 마할 주변에는 인도인들이 하는 한국 음식점들이 많이 생겼다. 간판에는 한글이 쓰여 있고, 한글 메뉴판은 물론 상인들도 간단한 한국어는 다 할 줄 알았다. 그만큼 성수기인 겨울철에 한국 여행자들이 많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오므라이스를 제외하고는 보통 30분에서 1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주문을 하면 그때마다 밀가루나 야채를 사러 종업원이 시장으로 뛰어가고, 부엌에는 휴대용 가스버너 하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손님들은 모두 배가 고파 괴로워하지만 주인은 “우리는 항상 싱싱한 음식을 제공한다”고 외쳐댔다. 그런데 나중에 ‘인도 100배 즐기기’라는 인도 가이드 북 저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화덕에 구웠다는 ‘탄두리 치킨’ 맛이 영 이상해서 주방을 확인해보자고 하니 절대로 공개 못 한다고 해서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아마도 닭고기가 아니라 까마귀나 비둘기 고기가 아닐까’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글쎄 직접 증거가 없으니 확실치는 않겠지만, 진정 닭고기라면 주인은 뽑힌 닭털을 당당히 보여주면 되었을 텐데 왜 결사적으로 주방을 공개하지 않은 것일까? 이 소리를 듣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인도는 이래저래 수많은 얘기가 생산되는 곳이다.
여행 정보
뉴델리에서 아그라까지 가는 기차가 많다. 보통 2∼3시간 걸린다. 버스도 많이 있다. 여행자들은 대개 타지 갠즈 지역에 많이 묵는다. 타지 마할 바로 옆에 있고 숙박비가 5000∼ 6000원 정도로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이클 릭샤나 오토 릭샤 운전사들이 이끄는 상점에 갔다가 바가지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의 옥상 식당에서 과일을 먹다 원숭이에게 순식간에 뺏기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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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근처의 한국 식당(왼쪽), 타지마할에 새겨진 문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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