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58>보르네오 섬 키나발루산
[세계일보 2006-04-28 01:42]

보르네오 섬 하면 제일 먼저 목제 가구가 떠오르지 않을까? 그만큼 원시림이 풍부한 곳이다. 관광객이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키나발루산(해발 4101m)이 있기 때문이다. 섬 남쪽은 인도네시아령의 칼리만탄주고, 북쪽은 말레이시아령으로 사라왁주와 사바주로 나뉘는데, 이 두 주 사이에 브루나이 왕국이 있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사바의 주도는 코타키나발루로 한때 이곳은 ‘아피’로 불렸다. 아피는 현지어로 불이란 뜻으로, 해적들이 자신들의 항해를 위해 이곳에 늘 횃불을 켜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타키나발루의 한적한 공항에 첫발을 딛는 순간 야자나무 숲에서 불어 오는 훈훈한 바람을 맞으면 문명과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시내에 들어서면 번듯한 호텔, 쇼핑센터, 피자 헛, 맥도널드 등이 보여 이미지와 현실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그렇더라도 이들만의 문화와 풍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박물관과 모스크 등 볼거리가 있고, 주변의 아름다운 섬들은 깨끗한 해변을 자랑하며 부둣가에는 각종 해산물을 파는 필리피노 시장이 있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저녁나절에는 길가에 빽빽이 들어선 가로수에 수백마리의 새들이 앉아 지저귀어서 마치 하늘이 조각 나는 것 같고, 낙조에 물든 바닷가 풍경은 환상적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모두들 음식점 앞에 늘어선 의자에 앉아 비디오로 방영되는 영화를 시청하거나 미국 프로레슬링 등을 시청해 마치 한국의 1960년대 풍경을 연상케 한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키나발루 산은 코타키나발루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나온다. 1년 연중 무더운 날씨의 보르네오섬이지만 이곳에 오면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온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들어가면 휴양지 같은 분위기다. 깔끔한 펜션, 고급 레스토랑이 산길 따라 들어서 있고 멀리 산의 모습이 보인다. 이곳은 매년 17만명이 방문하지만 그 중에서 10% 정도만 정상에 오르고, 대부분은 공원의 정취만 즐긴다고 한다. 그러나 키나발루산은 해발 4000m가 넘는 산 치고는 가장 오르기 쉬운 산으로 알려져 있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오른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입구에선 잎들이 넓적한 열대림과 그 사이에서 피어 오르는 뿌연 안개와 작은 폭포가 반겨준다. 그리고 한 30분쯤 걸어 올라가면 첫 번째 휴게소가 나오는데 그곳이 벌써 해발 2000m 정도다. 길 따라 적절하게 휴게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해발 3000m 정도가 넘으면 고소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이때부터는 천천히 걷는 수밖에 없다. 올라갈수록 떡갈나무, 밤나무 등 우리 눈에 익숙한 나무들이 보이고 피처 플랜트(Pitcher Plant)란 식물도 나온다. 벌레나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인데, 매우 큰 것은 지름 15∼20㎝로, 19세기에 어느 식물학자는 지름 30㎝짜리를 발견한 적도 있다. 그 안에 약 2.5ℓ의 물이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 쥐가 빠져 죽어 있었다고 한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종종 쉬면서 5시간 정도를 걸으면 해발 3272m에 있는 라반라타 산장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휴식 겸 하룻밤을 보내고 , 다음날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상을 향해 오른다. 해발 3668m부터는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거대한 바위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사실 북한산 백운대나 도봉산 포대능선에 비해 쉬운 길이지만 공기가 희박해 숨이 가쁘다. 어느샌가 동녘 하늘이 벌겋게 물들며 여명이 드러나면 세상은 거대한 구름바다에 파묻혀 있고, 출발한 지 2시간30분쯤 후에는 정상에 오른다. 키나발루산은 원주민 언어로 ‘영혼을 위한 안식처’라는데, 글자 그대로 세상을 떠나 안식처에 이른 기분이 든다. 코타키나발루와 키나발루산은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낯선 문화와 풍경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관광지다.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키나발루산은 혼자 올라갈 수가 없어서 홀로 갔던 나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과 조를 이뤄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3000m 정도부터는 말레이시아 가이드가 “플라한, 플라한(천천히, 천천히)”이라며 주의를 주었는데, 한국인인 나에게는 실실 웃으며 “빨리, 빨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연유가 있었다.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을 많이 상대해본 그는 자기가 “플라한”이라고 외쳐도 “빨리, 빨리”라며 부지런히 걸어가는 한국인들에게서 그 말을 배웠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성격이 급하기도 하지만 산악국가답게 등반을 많이 한 까닭에 키나발루산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일까?

키나발루산은 올라가는 길보다도 내려가는 길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올라오는 데만 익숙했던 근육이 내려가는 길에 적응이 잘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마라톤을 하는 말레이시아 중년 사내를 만났다. 해발 3272m의 라반라타 산장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기록이 1시간30분이라던가, 1시간40분이라던가…. 대단한 이였다.

◆여행 정보

키나발루산에 오르려면 미리 등반허가를 받아야 한다. 코타키나발루 시내에서 등반허가를 대행하는 사무실로 가도 되는데, 성수기에는 예약이 넘치므로 한국의 여행사를 통해 미리 받든가 패키지 투어에 참가하는 것이 좋다. 키나발루산 밑에는 산장, 펜션 등의 숙박업소가 많은 편이나 해발 3000m에 있는 숙소들은 예약하지 않으면 등반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 산에 식당이 있어 비상식량 외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상 부근은 늘 추우므로(초겨울 날씨) 스웨터와 윈드재킷 그리고 비가 종종 오므로 우의를 챙기는 것은 필수다. 침낭은 산 중턱에서 히터가 있는 숙소에서 잘 수 있다면 필요없다. 그렇지 않으면 관리소에서 빌릴 수도 있다. 가끔 기상 상태 급변으로 위험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근래에 일행보다 앞서가던 10대 중반의 서양 아이들이 갑자기 안개가 끼면서 길을 잃어 3일 만에 밀림 속에서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하니 방심은 금물이다.

by 100명 2007. 4. 13. 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