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남부에는 나짱(Nha Trang)이란 해변 도시가 있다. 베트남전쟁 시절 우리에게 영어식 발음인 나트랑으로 알려진 이 도시는 전쟁의 기억에서 멀어진 젊은이들에게는 감미로운 휴식처다. 쪽빛 해변의 코코넛나무 그늘에서 뒹굴며 마사지를 받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다 심심해지면 카이트서핑, 보트 서핑, 스노클링, 스쿠버 다이빙 등을 즐길 수 있는 흥겨운 관광지다.
그러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나짱이 먼 옛날 짬빠(Champa) 왕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에 눈길을 주게 된다.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해변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1번 국도를 타고 닌호아를 향해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하라(Hara)교와 썸벙(Xom Bong)교가 나온다. 이곳에는 혼쭝 해변이 있는데, 밤에만 바다로 나가고 낮에는 정박해 있는 어선들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엽서 같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하고 썸벙교를 건너면 왼쪽 산 위에 뽀나가르짬 탑(Thap Cham Po Nagar)이라는 힌두교 유적지가 나온다.
베트남의 중부지방은 먼 옛날부터 짬족이 일으킨 짬빠 왕국이 다스렸다. 짬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어계의 사람들로, 2세기 말 경 베트남 중부 지방에 나라를 세웠고 이 나라가 훗날 짬빠 왕국이 된다. 이들은 인도문화를 수용하며 힌두교를 믿었고 한때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앙코르 왕국을 공격해서, 앙코르 유적지에 있는 바이욘 사원의 벽에는 짬빠 왕국과의 전투가 부조로 새겨져 있을 정도다. 짬빠 왕국은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를 지배하며 14세기 중반까지도 비엣족이 다스리고 있던 북베트남과 치열하게 싸웠다. 짬족은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14세기 중반에는 남쪽의 메콩 델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나, 1428년 북베트남에서 레(Le·黎) 왕조가 새로 일으킨 다이비엣(Dai Viet·大越, 1428∼1788)에 침략당한다. 1470년에 다이비엣 군대는 짬빠 왕국을 침입해 왕을 생포했으며, 짬빠군 6만명을 살해하고 군민 3만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부터 짬빠 왕국은 다이비엣의 속국이 되었고, 나짱 부근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할 수 있었다.
|
◇뽀나가르짬 탑(왼쪽), 시장 풍경 |
그런데 다이비엣이 남북으로 분단되자 짬족은 1611년과 1653년에 남부 베트남을 다스리던 응우옌 왕조를 공격했으나 대패한다. 역사 속에서 패자의 설 자리란 그리 넓지 않았다. 짬족은 계속 남쪽으로 쫓겨갔고 응우옌 왕조는 점령지에 비엣족들을 이주시키며 더욱 세력을 다졌고 수도를 후에로 옮긴 후 18세기 중반에는 메콩 델타 지역까지 지배하게 된다. 그 후 응우옌 왕조의 응우옌 푹 아인(Nguyen Phuc Anh)이 1802년 전 베트남을 통일하자 짬빠 왕국은 완전히 소멸했고, 짬빠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현재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짬빠족이 소멸한 것처럼 그들의 유적지 또한 초라하기 그지없다. 계단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면 허물어진 탑들이 네 개 남아 있는데, 원래는 7, 8기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불교신자들이 와서 향 연기 자욱한 가운데 기도를 하고 있지만, 한쪽 발을 황소 난디(Nandi)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춤을 추는 힌두교의 죽음과 파괴의 신인 시바신상이 있는 등 짬빠 왕국의 흔적과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나짱은 베트남전을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1번 국도를 따라 북쪽의 닌호아 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지면 십자성 부대의 주둔지가 나온다. 색 바랜 원형의 초소 방호벽에는 탄흔이 곰보 자국처럼 나 있고 안에는 쓰레기와 말라비틀어진 똥들이 쌓여 있다. 계속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 정상에도 초소가 나오고, 고개를 넘어 계속 가면 한국군 십자성 부대의 사령부 건물이 나온다. 지금은 베트남군이 쓰고 있으며, 근처에는 연병장 터가 남아 있다. 십자성 부대는 병참부대로서 각 전투 부대에 군수품을 지원했고, 1965년 10월에 왔다가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이곳에 주둔했다.
나짱에는 이 외에도 나짱 대성당, 롱선사(Chua Long Son) 그리고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별장 등의 유적지가 있다. 현재 나짱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시원한 남국의 바람이 불어오는 맑고 깨끗한 해변과 그곳에서 즐기는 해양 스포츠다. 주변에는 머드 온천까지 있어 나짱에는 피곤한 여행자들이 여독을 풀며 한가한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정보
호찌민시에서 나짱까지는 기차를 타면 좀더 편하게 갈 수 있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달랏이나 므이네 등을 들려서 나짱으로 가는 오픈투어 버스를 이용한다. 호찌민에서 달랏이나 므이네를 거쳐 나짱까지 가는 오픈투어 버스를 이용하면 약 9∼10달러 정도가 들고, 12시간 정도 걸린다. 나짱 시내나 근교는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빌리면 편리하다. 해변을 중심으로 6, 7달러의 저렴한 숙소부터 15∼30달러 정도의 중급 숙소들이 많고, 물론 최고급 숙소들도 많다. 이곳은 바닷가답게 수많은 해물 요리를 즐길 수 있고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시며 밤을 즐길 수 있다. 나짱은 10∼12월이 우기이므로, 이 기간에는 많이 찾지 않는다. 하지만 우기에도 비는 밤이나 아침에 오며, 또 비를 즐기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이 시기에 여행을 떠나도 큰 지장은 없다.
■여행 에피소드
베트남에서는 생맥주를 비아 호이(Bia Hoi)라 부르는데, 나짱에도 비아 호이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다. 길바닥에 놓인 ‘목욕탕 의자’처럼 생긴 조그만 의자에 앉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데, 혼자 있던 나에게 옆에 앉았던 세 청년들이 알은 체를 했다. 이들은 모두 공장 노동자들로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 후 가끔 이같이 들러 술을 마시는데, 새끼손톱을 길게 기른 한 명은 클래식 기타를 잘 친다고 했다.
청년들의 술잔이 비어 있기에 1ℓ를 더 시켜서 같이 나눠 마신 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떠나며 계산하려고 하니 이 친구들이 자기들이 낸다며 말렸다. 서로 내겠다고 옥신각신하다가 주인 아주머니 손에 돈을 쥐어 주고 도망가는데, 비틀비틀 취한 채로 나를 쫓아온 청년이 기어코 내 주머니에 돈을 꽂아 주며 외쳤다. “깜옹(감사합니다).” 베트남에 가면 상혼에 물든 이들이 바가지를 씌워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지만, 이렇게 작은 인정을 베푸는 이들도 많아서 가면 갈수록 정이 드는 나라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