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서북부에는 사프란볼루(Safranbolu)란 마을이 있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이어지던 실크로드의 경유지답게 여인의 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하맘(터키 전통 목욕탕)의 둥근 지붕과 모스크, 그리고 고즈넉한 전통 가옥들이 어울어져 뭔가 아기자기한 비밀들이 잔뜩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포근한 분위기의 마을이다.
이곳에는 18세기와 19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부자들이 살았고, 그들이 살던 전통 가옥들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원래 사프란볼루가 유명하게 된 것은 사프란꽃 때문이었다. 사프란꽃은 유럽 남부와 터키가 원산지로, 노란색이란 뜻을 지닌 아랍어 자파란(zafaran)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사프란꽃이 많이 피는데 9월과 10월의 밤에만 피고, 씨를 4만개 뿌리면 단 한 개의 씨앗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그만큼 귀했던 사프란은 최고급 염색제, 약재, 향신료 등으로 쓰였다. 또 인도나 그리스에서는 최음제나 우울증 치료제로도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관광객들이 사프란볼루를 찾는 이유는 전통 목조가옥들을 보기 위해서다. 높고 낮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에는 시냇물처럼 마을을 돌고 도는 돌길이 펼쳐져 있고, 길을 따라 전통 목조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가옥들은 거의 다 2, 3층인데, 특이한 것은 창문이 많다는 것으로 하나만 있으면 될 만한 넓이에 보통 두 세 개의 창문이 있다.
전통 가옥들의 목재는 대부분 전나무, 소나무, 호두나무, 미루나무 등인데, 이 마을에는 전통 가옥이 약 2000여채가 들어서 있고, 그 가운데 800여채는 고가옥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 카라우즈밀러 하우스, 뭄타즐라 저택, 카이마카믈라 하우스 등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특히 18세기 무렵에 세워진 카이마카믈라 하우스는 1979년에 국유화해 현재 박물관이 되어 있다. 1층은 정원과 카페이고, 2층에는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4∼5개 정도가 있다. 수많은 창문들을 따라 밑으로 길게 나무 소파를 놓고 그 위에 카펫을 깔아 놓았는데, 터키의 전통 가옥은 남녀가 유별했으며 방들의 기능이 분화되어 있었다. 남자 손님들이 놀던 응접실에는 음식을 먹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남자들의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고, 여자들끼리 놀던 방에는 놀이를 하는 여자들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다. 또 하녀들이 기거하는 방,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방들이 따로 있다. 3층에는 아이들방, 주방 등이 있는데 터키인들은 전통적으로 대가족제도여서 식구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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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목조가옥들(왼쪽),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
이런 전통 가옥들에는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고 그 중에서 일부는 펜션, 호텔, 정원이 딸린 낭만적인 카페와 음식점 혹은 기념품 상점 등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런 가옥에서 묵을 수 있는데, 목조가옥이라 계단이나 마루를 걸을 때면 삐걱거려서 마치 일본의 전통 여관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을에는 대장간과 공방도 있어서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중심지를 벗어나면 물 흐르는 계곡과 산 언덕에 수많은 가옥들이 들어서 있고, 더 나아가면 집과 나무가 사라지고 풀만 가득한 밋밋한 구릉 같은 산이 끝없이 펼쳐져서 문득, 세상을 멀리 떠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곳은 보러 가는 곳이 아니라 느끼러 가는 곳이다. 저물녘 마음의 긴장을 풀고 목욕탕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석탄 냄새를 맡고, 현지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받아가며 홀로 골목길을 걷노라면 문득 먼 과거의 실크로드를 오가던 나그네가 된 것만 같다.
곳곳에 숨어 있는 거리의 카페에서는 낭만적인 민요풍의 터키 노래가 흘러나오고, 늦은밤 여관의 창가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면, 온갖 세상 시름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렇게 잠시 세상을 이탈하는 순간이야말로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인데, 사프란볼루는 잠깐이나마 그맛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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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여행자 노린 범죄 조심
이곳은 관광지인 이스탄불, 에페스, 카파도키아만큼 붐비지 않아서 한적한 마을 분위기와 푸근한 인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점점 여행자들의 발길이 잦아질수록 조금씩 오염되는 현상도 보인다. 외국 여행자들이 많이 들르는 식당의 종업원들은 내국인들에게는 그러지 않으나 외국 여행자들에게는 은근히 팁을 바라고, 점점 돈에 민감해지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들도 생기고 있다. 또한 현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가 차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보니 외딴곳에 놓여진 채 모든 것을 털린 외국 여행자들도 생긴다.
얼마 전 한국 학생이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안타깝게 변을 당한 적도 있는데, 종종 약을 먹고 털리는 여행자들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터키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외국 여행자를 가장한 범죄자들의 소행도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물론 터키인 대부분은 친절하고 정이 많다. 그런 좋은 분위기에서 악의를 가진 사람을 가려내기란 더욱 힘든데, 자신이 다시 찾아갈 수 없는 낯선 곳이나 유흥업소 등에 갈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런 사고는 세계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으로, 어딜 가든 안전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늘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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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갈 경우 직접 오토가르(버스터미널)로 가서 표를 사야 한다. 메트로 혹은 귀벤이라는 버스 회사에서 운행하는데 7시45분, 10시30분, 17시, 23시30분에 출발하고 약 7시간이 걸린다. 앙카라에서 갈 경우 약 4시간 소요. 사프란볼루에는 뉴사프란볼루(크란쾨이)와 올드 사프란볼루가 있는데, 관광객들이 가는 곳은 올드 사프란볼루다. 버스에서 내려 근처의 아스마 마켓까지 걸어간 후, 거기서 올드 마켓까지 가는 돌무시(미니버스)를 타면 된다. 약 2km 거리에 5분 정도 걸린다.
숙박비가 10달러에서 약 40달러 정도 되는 전통 가옥을 개조한 숙소들이 많이 있다. 사프란볼루에 가면 로쿰이란 것을 먹어볼 만한다. 과일, 너트 등이 들어 있는 매우 달고 고소한 젤리의 일종인데 사프란볼루의 로쿰은 맛있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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