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2) 이집트 룩소르
[세계일보 2006-09-15 09:27]

기원전 3000년경부터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자살한 기원전 30년까지 약 3000년간 지속되었던 이집트 문명은 인류에게 중요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그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고왕국 시대(기원전 2650년∼2180년) 때 만들어진 피라미드들이지만,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신왕국 시대(기원전 1570년∼1069년)였다.

신왕국의 수도는 테베로, 현재의 룩소르를 말한다. 룩소르의 나일강 동편은 산 자들의 세계로, 예나 지금이나 상업과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다. 반면 해가 지는 서쪽의 황량한 계곡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수많은 파라오(이집트의 지배자)들의 무덤이 있어서 ‘왕가의 계곡’이라 불린다.

동쪽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은 카르나크 신전이다. 이곳은 룩소르의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2세 이래 역대 파라오들이 새로운 건축물을 계속 추가했는데, 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들이 늘어서 있는 통로를 통해 들어가면 아몬 라 신을 모시는 거대한 대신전과 대열주실이 나타난다. 둘레 15m, 높이 23m나 되는 거대한 기둥들이 134개가 들어선 대열주실에서는 누구나 까마득한 기둥을 쳐다보며 위대한 이집트 문명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아몬신은 원래 테베 지방의 사람들이 믿는 지방신으로 테베가 이집트의 중심지가 되면서 국가 신으로 등장하고, 후일 태양신 라신과 합쳐지면서 아몬 라 신이 된다.

나일 강변의 룩소르 신전도 역시 아몬 라 신을 모신 곳으로, 왼쪽에 오벨리스크가 있다.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한 기념탑으로, 오른쪽에 있던 것은 현재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있다. 계속 들어가면 거대한 람세스 2세(기원전 1279년∼1212년)의 좌상과 입상이 나타난다. 그는 나이 30세에 파라오에 즉위하여 67년간 이집트를 지배하며 대외 전쟁을 많이 치른 이집트의 위대한 왕이었다.

◇카르나크 신전 앞의 양 머리 스핑크스(왼쪽),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발굴된 옥좌에 새겨진 부조

배를 타고 나일강의 서편으로 건너가면 제일 먼저 높이가 20m인 거대한 석상 두 개를 보게 된다. 원래 아멘호테프 3세가 세운 신전의 입구에 세워졌었는데 정작 신전은 사라지고 석상만 남았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그리스의 영웅 멤논의 거상이라고 불렀다. 새벽이면 거대한 석상들이 울음소리를 냈는데, 죽은 멤논이 자신의 어머니인 여명의 여신 에오스를 부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석상의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진동 소리라고 한다.

이 근처에는 하트셉수트 장제전(葬祭殿)도 있다.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스 1세의 딸로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였다. 이집트 왕실은 피를 보존하기 위해 근친결혼을 해왔고, 또 왕가의 남자들은 왕가의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파라오의 위치에 오를 자격을 얻었는데, 친오빠나 남동생이 없었던 그녀는 이복동생인 투트모세스 2세와 결혼하지만, 남편이 일찍 죽자 이번에는 투트모세스 2세와 첩 사이에서 난 자식인 투트모세스 3세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하트셉수트는 어린 남편이며 아들뻘이었던 투트모세스 3세를 몰아내고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파라오 자리에 올랐다가 후일 투트모세스 3세에게 쫓겨나 죽게 되는 비운의 여자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위로는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계곡이 펼쳐진다. 여기에는 수많은 파라오들이 바위 속을 뚫고 묘를 만든 후, 스스로 미라가 되어 묻혔다. 그러나 후일 도굴꾼들에 의해 거의 다 파헤쳐졌는데, 유일하게 그대로 발굴된 것이 제18왕조 투탕카문의 무덤이었다. 1922년 11월 27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굴된 그 묘에는 호화로운 금박 장식의 나무관, 순금으로 만든 동물 머리 등 수많은 보물들과 함께 푸른 유리띠 무늬를 덧붙인 황금마스크를 쓴 투탕카문이 3300년 전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는 실권이 별로 없었던 불우한 파라오로, 어린 나이에 죽어서 초라한 곳에 묻혔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도굴꾼들의 눈에 띄지 않아 현대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부활을 꿈꾸며, 죽어서도 화려한 보물로 치장한 모든 파라오들은 그 욕심 때문에 안식을 취하지 못했다. 도굴꾼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해 파헤쳐진 그들의 미라는 이제 박물관에서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왕가의 계곡에 서면 세상의 모든 영광은 덧없으며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게 된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정보

카이로에서 룩소르까지는 대개 야간 열차를 타게 된다. 12시간 정도 걸리는데 종종 연착한다. 왕가의 계곡을 돌려면 차를 대절하는 게 좋은데, 건너가는 동안 호객꾼들이 달라붙는다. 체력이 좋다면 미리 자전거를 빌려서 배에 싣고 건너가 이용하는 것이 속 편하고 좋다. 햇살이 뜨거운 걸 예상해 아침 일찍 출발하고 모자, 선탠 크림, 물 준비는 필수다.

◆여행 에피소드

유명 관광지는 어디나 비슷하지만 이집트의 룩소르도 상인들이나 호객꾼들이 매우 거칠다. 배를 타고 나일강 서편으로 가는 동안 계속 차를 전세 내라며 달라붙는 호객꾼이 있었다. 왕가의 계곡은 매우 넓기에 차가 필요한데, 배가 서편에 도달할수록 협상 가격은 점점 떨어졌다. 같은 배에 탔던 미국 여인 둘과 함께 차를 빌렸는데 돌아다니는 동안 꽤 피곤했다. 이집트인 운전사, 계곡에서 손님들에게 접근하는 가이드, 어슬렁거리는 청년들이 미국 여인들에게 자꾸 치근거렸다. 폭력적이지는 않았지만 살을 은근히 만져보고 사진 찍자며 어깨동무하는 식의 치근거림이었다.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미국 여인들은 적당하게 처리를 했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겠지만 이집트의 유명 관광지에서는 여자들끼리 여행하려면 남자들보다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너무 겁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런 불편함과 고통을 처리하는 과정도 여행의 일부며, 그것을 극복한 후에 맛보는 기쁨이 더 값지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by 100명 2007. 4. 13. 1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