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세기경 이스라엘은 요동치고 있었다.
로마제국 지배 하에서 예수가 탄생했고, 종교적으로는 전통적인 제의를 중시하고 구약성서 글자 하나하나에 집착하던 사두개파, 평신도 운동으로 율법학자들이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바리새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금욕적인 공동생활을 하던 에세네파가 있었으며, 로마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급진 과격파 열심당원(Zealot)들도 생겨났다.
주로 유대교 하급 사제인 열심당원들은 폭력에 호소하는 열광적 애국자들이었는데, 로마뿐 아니라 로마에 타협적인 유대인 권력층·특권층도 공격을 했으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속에도 섞여 들었다고 한다.
이런 격변기에 헤롯이 죽고 얼마 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이나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 진정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던 유대교인들 모두 유대 땅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의 폭군 황제 네로는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를 유대인들이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탄압을 가했다. 늘 소요를 일으키고 메시아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로마로서는 항상 위험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서기 66년 이스라엘 땅에서 로마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로마군은 군대를 보내 진압했고, 서기 70년 마침내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다. 유대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로마군이 오랫동안 성을 포위하자 기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가족의 시신을 보고도 눈물을 흘릴 여력이 없었고, 너나 할 것 없이 도둑과 강도로 돌변했으며, 심지어 자기 아이를 구워 먹는 사람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결국 개전 당시 60만명이었던 예루살렘 인구 중 3개월 동안 죽은 자가 약 11만6000명이었고 포로가 약 9만7000명이었다. 그러나 열심당원을 비롯한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은 마사다(Masada) 요새로 후퇴해 저항을 계속했다.
마사다는 사해 옆에 우뚝 솟은 험한 요새다. 마사다는 해발 약 40m이지만 근처 땅 자체가 해발 -400m 정도이므로, 땅에서 보면 440m나 치솟은 절벽 위에 자리잡은 하늘의 요새다. 히브리어로 ‘바위의 성채’라는 뜻의 마사다는 기원전 2세기경 하스몬 왕조 때에 처음 요새로 사용되다가 헤롯왕이 기원전 37년에 재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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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근처의 팔레스타인인들(왼쪽), 사해 |
이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등산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험하다. 거대한 절벽에 구불구불 이어져 ‘뱀의 길’이라 불리는 조그만 길을 따라 1시간 동안 걸어 오르면 정상이 나온다. 정상은 남북이 약 600m, 동서가 약 300m, 전체 둘레가 1300m 정도의 꽤 넓은 평원이다. 헤롯은 이곳에 창고를 만들어 포도주·기름·대추야자 등을 저장해 놓았으며, 각종 프레스코화로 장식되고 목욕탕 시설이 갖춰진 멋진 궁궐을 지어 놓았다. 또 중앙의 땅은 비둘기 배설물과 인분을 이용해 경작했고, 마사다의 서쪽 골짜기에는 흘러드는 빗물 저장소를 12개나 만들었다. 물이 다 모이면 약 4000만ℓ나 되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열심당원을 비롯한 유대인들 약 1000명 정도는 마사다 요새에 올라가 항전하다가 서기 72년 로마군 약 1만명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험한 절벽길을 기어오를 수 없었던 로마군은 7개월에 걸쳐 서쪽 계곡을 메운 후 서서히 압박해 들어간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저항군 사령관은 “이 세상에 노예가 되는 것만큼 참기 힘든 벌은 없다. 스스로 용감하게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라며 집단 자결을 선언했다. 병사들은 자신의 가족을 먼저 죽인 후 제비로 뽑힌 열 명이 나머지 병사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열 명 중에서 또 제비로 뽑힌 한 명이 나머지 아홉 명을 죽인 후 마지막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두 960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이후에 로마 군인들이 마사다 요새에 올라와 이 기막힌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 참상은 지하 동굴에 몸을 숨겨 살아난 두 여인과 다섯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이 사실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전해진다. 그러나 그 진위에 대해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요세푸스는 처음에 유대편에서 전쟁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로마에 투항했다. ‘유대 전쟁사’ 저술 목적도 로마 측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설득하려는 데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극소수의 분파적 유대인과 일부 부패한 로마인 박해자에게 전쟁의 책임을 지웠다. 그렇다면 마사다 전투에서 실제는 로마군의 살육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요세푸스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끝까지 저항한 이들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저항을 극적으로 미화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기록에 의해 마사다 투쟁은 전 이스라엘인들에게 각인되었고, 더 이상 마사다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학생,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이 마사다를 찾고 있다.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마사다 근처에는 사해가 있다. 사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호수로 해발 -400m다. 염분 함유율이 35% 정도여서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사실은 호수지만 고대 히브리어에 호수란 말이 없어서 바다라 불리고, 염분이 높아 몸을 뉘어도 그냥 둥둥 뜰 정도라고 했다. 예전에 신문 해외토픽란에서 누워서 신문 보는 사람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사실일까?
마사다 구경을 마친 후 사해로 가자마자 수영복을 입고 호수로 걸어 들어갔는데 갑자기 밑이 푹 꺼져서 당황했다. 하지만 재빨리 몸을 누여 길게 뻗으니 신기하게도 몸이 둥둥 떴다. 고개를 약간 들어도 계속 뜨니, 베개라도 있으면 잠이라도 자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편안했다. 그러나 마음놓고 있다가 바람에 휩쓸려서 요르단 쪽으로 흘러가 국경 무단침입죄로 체포되는 이도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정보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사해를 거쳐 마사다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약 1시간30분 소요. 사해, 마사다, 쿰란, 제리코 등지를 돌아보는 투어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마사다 정상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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