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87> 영국 바스
[세계일보 2007-01-12 09:39]

이런 일화가 전해질 만큼 목욕은 로마인들에게 중요했기에 로마인들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근사한 목욕탕들이 만들어졌다. 영국 잉글랜드 지방의 바스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55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는 잉글랜드 지방을 점령한 후 약 100년이 지난 서기 43년에 런던에서 서쪽으로 173㎞ 떨어진 유황 온천지에 커다란 목욕탕을 건설했고, 그로 인해 도시 이름도 목욕탕이란 뜻의 바스(Bath)가 되었다.

최초로 만들어진 로마 욕장(Roman Bath)은 바스를 감싸고 도는 에이번(Avon) 강 근처에 있다. 주변에서부터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영국 상류층들이 광천수를 맛보며 사교를 즐겼다는 펌프 룸(Pump Room)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 김이 서린 커다란 욕탕이 나온다. 탕 주변에는 그 당시 목욕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들과 함께 로마 시절 기둥과 조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러나 이곳은 로마인들이 오기 전부터 현지인 켈트족에게도 잘 알려진 온천지였다. 약 2400년 전, 유럽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건너온 켈트족은 수많은 부족국가로 나뉘어 살았는데, 그 중의 하나인 바스 지방의 도부니(Dobunni)족은 이 온천을 지하에서 강과 온천을 지배하는 치료의 여신 술리스(Sulis)와 소통할 수 있는 장소라고 믿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에 나오는 리어왕은 실존 인물인데, 전설에 따르면 리어왕의 아버지 블래더드(Bladud)는 왕자 시절에 한센병을 앓다가 기원전 863년에 이 온천의 물로 병을 고쳤다고 한다.

이같이 성스러운 온천을 대중 목욕탕으로 바꾼 게 로마인이었다. 로마인은 땅굴을 파서 통로와 방을 만들었으며, 온천을 이용한 중앙난방 시스템도 구축했다. 그리고 현지 부족들을 위해 거대한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사지를 받고 휴식을 취하며 철학적 토론을 즐겼다. 1세기쯤까지 남녀가 혼욕을 했지만, 2세기부터는 법으로 금지해서 남녀의 목욕 시간을 달리했다고 한다.

◇에이번강(왼쪽), 로마 욕장의 밀랍인형

이같이 평화스러운 풍경은 서기 60년쯤 현지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한때 사라졌다. 로마 군인들이 현지인 수천명을 죽였고 온천도 황폐됐다. 그 후 화해의 뜻으로 온천탕을 재건했으나 4세기 초 로마군이 철수한 이후 온천은 쇠락했고, 로마 침입 시 북쪽으로 쫓겨 갔던 켈트족 일파인 스콧족이 이곳을 공격하면서 서기 367년 바스는 초토화되었다. 그 후 부분적으로 복구되었으나 계속되는 침략과 인구 유입으로 바스의 욕탕도 진흙으로 뒤덮여 갔다. 중세에 수도사들이 다시 목욕을 즐기긴 했으나, 이 온천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옛 명성을 되찾게 된 것은 18세기부터다. 욕탕이 재건되면서 영국 상류층의 유흥지가 되었고 현재는 전 세계 여행자들이 찾아드는 관광지가 되었다.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온천수는 1만년 전의 빗물이 지하 약 4300m 정도까지 스며들어 그곳에서 가열된 후 천천히 솟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온천물은 1초에 13ℓ가 솟고 있으며, 43가지의 미네랄을 함유한 광천수로 관광객들에게 판매되고 있다.

바스의 매력은 온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지안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아름다워 18세기에는 영국에서 가장 멋있고 품위 있는 도시로 손꼽혔다. 바스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은 걷는 것이다. 도보 관광의 출발점은 로마 욕장이다. 로마 욕장에서 나오면 바로 근처에 바스 사원이 보이고, 북쪽 길을 따라 걸으면 그 당시 사교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무도회장(어셈블리 룸)이 있으며, 16세기부터의 의상을 전시한 의상 박물관(뮤지엄 오브 코스튬)이 있다. 또한 17세기에 만들어진 집들이 초승달 모양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로열 크레슨트(Royal Crescent)도 볼 만한 구경거리다.

걷다가 피곤하면 에이번 강변의 벤치에 앉아서 쉬기도 하고, 벼룩시장에서 사람들의 체취가 서린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사원 앞에서 젊은 연주자들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다. 그 순간, 바스는 단순히 보는 관광지를 넘어서 온갖 것을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온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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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를 찾았을 때는 6월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춥고 축축한 6월의 영국 날씨에 주눅이 들었던 나는 목욕탕을 연상시키는 바스에 가며 기대에 부풀었다. 이름에서부터 뜨근뜨근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러나 바스도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를 맞고 골목길 끝에 있는 낡은 유스호스텔을 찾아 한숨 자고 났을 때도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서머싯 몸의 소설 제목을 딴 ‘달과 6펜스’란 레스토랑에 갔다. 특색 없는 스테이크였지만 위스키를 마시다 문득 영국에서 왜 셰익스피어가 탄생했으며 뮤지컬·추리 소설·환상적인 동화 등이 꽃피웠는가를 깨달았다. 비가 오는 음산한 날씨에 난로를 쬐면서 위스키 한잔 마시다 보면 온갖 이야깃거리가 생각나지 않을까? 비 내리는 바스의 밤에는 이 같은 낭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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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까지는 런던의 패딩턴역에서 고속열차로 1시간30분 소요된다. 버스로는 약 3시간 걸린다. 저렴한 숙소를 원하는 여행자들은 바스 백패커스 호텔(Bath Backpackers Hotel)이란 곳으로 많이 간다. 기차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이며, 도미토리(집단숙소)가 9.5파운드(약 1만7000원)다. YMCA 인터내셔널 하우스는 중심지에 있는데, 싱글룸은 12.50파운드, 더블룸은 23파운드다. 도미토리는 10파운드. 식당은 여러 군데가 있는데 ‘달과 6펜스’에서는 5파운드 정도면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다.

by 100명 2007. 4. 13. 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