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928년 전인 서기 79년, 폼페이 근처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하늘로 치솟으며 세상을 덮은 화산재와 분화구에서 솟구쳐 오른 시뻘건 용암이 평화롭던 도시를 덮치는 순간 폼페이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당대에는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폼페이의 비극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끔찍한 현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1700년 정도가 지난 후였다.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는데, 이것만으로도 당시 로마인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폼페이는 나폴리에서 얼마 안 떨어진 휴양지여서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을 살펴보면, 돌로 만들어진 집들은 웅장하고 정원은 널찍하다. 벽에는 프레스코 벽화가 보이고 대리석 바닥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그림들이 박혀 있다. 도시 중심부에는 시민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던 널찍한 광장과 아폴론 신전, 유피테르(제우스·주피터) 신전이 있다. 하늘의 신, 번개의 신인 유피테르는 유노(하늘의 여신, 다산의 여신), 미네르바(지혜와 예술의 여신)와 함께 로마인들의 3대 신. 신전에는 지금도 기둥들과 조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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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에 파묻혀 화석이 된 시신. |
로마인들은 신을 숭배했지만 금욕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었으며, 쾌락도 즐겼다. 이리저리 뻗은 골목길에는 화덕이 설치된 식당 터, 술 항아리가 갖춰진 술집들이 보인다. 온수와 냉수는 물론 증기까지 나오는 목욕탕도 있었으며, 공중 화장실도 있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술과 고기와 빵을 먹고 사치스러운 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긴 후 가끔은 창녀촌도 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침대가 있는 창녀의 집터가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현대인 못지않은 문화 생활도 누렸다. 연극과 음악회를 즐겼던 대극장과 소극장, 운동 경기를 하던 원형경기장도 있었다고 한다.
폼페이 유적지를 터벅터벅 걷다 보면 그때가 살기 좋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인구가 2만명밖에 안 되었으니 생활 환경도 쾌적했을 것이다. 먹고 마시며 운동하고 즐기다 신전에서 신을 향해 기도도 드렸을 것이다. 도시에는 이런 생활을 위한 시설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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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발견된 동상. |
그러나 구석 공터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인간 화석 앞에 서면 사람들은 말문이 막혀 버린다. 화산재에 질식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쓰러진 후 뜨거운 용암에 파묻혀 화석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서기 79년, 그 당시의 순간에 멈춰져 있다. 드러누운 사람, 엎어진 사람, 웅크린 사람…. 발버둥치다 쓰러진 그들의 모습에서 그날의 비참함을 상상하게 된다.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을까?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산재와 물밀듯이 밀려오는 붉은 용암을 보며 세상의 종말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가뜩이나 세상의 종말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도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건물들이 무너지고 거대한 쓰나미가 우리를 덮친다면, 혹은 난데없이 거대한 혜성이 날아와 지구에 부딪친다면 우리들 역시 갑자기 사라질 게 아닌가? 약 7000만년 전 순식간에 멸종해 버린 공룡들처럼 인간도 언젠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폼페이 유적지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풍요로운 인간의 삶도 자연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고, 갑자기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우리의 삶을 숙연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유적지가 이제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그때처럼 자연 재해가 아니라 수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에 의해 파손되고 있다 하니, 폼페이는 예나 지금이나 바람 잘 날이 없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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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발견된 동상. |
이탈리아는 북부와 남부의 사이가 좋지 않다. 일찌감치 공업이 발달한 북부는 소득이 높고, 사람들도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반면 농업이 주산업인 남부는 소득이 낮고 실업률도 높다. 또 가족들의 유대가 강한 편이다.
이같이 기질과 사회 환경이 다른 데다 통일 과정에서 북부 사람들이 나폴리 왕국을 비롯한 남부 사람들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서로 간 감정의 골이 상당히 깊다. 남부 사람들은 북부 사람들이 차고 건방지다고 싫어하고, 북부 사람들은 남부 사람들이 가난하고 거짓말을 잘 한다고 멀리한다. 밀라노 출신의 어떤 이탈리아인이 나폴리에 가면 도둑을 조심하라며 외국인인 나에게 동포를 흉볼 정도였다.
이 때문에 로마에서 나폴리로 가는 기차를 탄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기차 안의 풍경도 북이탈리아와 달랐다. 기차의 차장은 술 한 잔을 걸친 붉은 얼굴에다 제복의 윗 단추를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그는 웬 중년 사내와 마주 앉아 계속 즐겁게 얘기했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해 중년 사내에게 유스호스텔을 물어보자, 그 사내는 나를 먼저 에스프레소 커피점으로 데려갔다. 서서 마시는 서민적인 곳이었는데, 자기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에스프레소 커피를 대접한 후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유스호스텔에서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었기에 따라가지 않았지만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폴리는 다소 치안이 불안했지만, 이처럼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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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에서 폼페이까지는 기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폼페이를 구경한 후 기차를 타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로 유명한 해변 소렌토도 구경할 수 있다. 나폴리에서 일찍 떠나면 폼페이, 소렌토를 당일치기로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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