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나라에서 새해나 추수를 기념하는 의식의 중심에는 신(神)이 있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유교 문화권에서는 조상이 신을 대신한다. 유교에서 유독 효를 강조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열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던 공자(孔子)도 부모를 애절하게 그렸다. 공자 사당은 현재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 있다. 취푸는 노나라의 수도.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취푸에서 약 30㎞ 정도 떨어진 창평(昌平)의 취(聚)읍을 다스렸다. 숙량흘에게는 딸 아홉과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이 다리를 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새로운 아들을 원했던 숙량흘은 안씨(顔氏) 여자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야합이란 혼례를 올리지 않고 정을 통했다는 뜻이다. 당시 숙량흘의 나이는 66세였고, 안씨 집안의 여인 안징재(安徵在)는 채 20세가 되기 전이었다. 숙량흘과 안씨 여인은 취읍에서 2㎞ 정도 떨어진 니구산(尼丘山 해발 340m)에 가서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산의 조그만 동굴에서 공자를 낳는다. 기원전 551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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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묘(왼쪽), 공부가주 |
니구산은 취푸에서 동남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다. 가는 길에는 논길과 황량한 돌산이 보인다. 비교적 숲이 울창한 니구산에는 공자를 기리는 니산서원(尼山書院)과 관천정(觀川亭)이란 정자가 있다. 산 아래로 지원계(智源溪)라는 냇물이 흐르고, 멀리 기수(沂水)라는 강물도 지나간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산이지만 일설에는 숙량흘이 니구산의 이름을 따 공자의 이름을 구(丘)라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공자의 머리가 정수리 부분은 낮고 둘레는 높은 짱구 모양인데, 니구산의 형태가 이와 비슷하다는 게 이유였다고 한다.
니구산 밑에는 부자동(夫子洞)이란 조그만 동굴이 있는데, 중국 정부는 이곳이 공자의 출생지라며 주변 정비 작업을 벌이고 있다.
공자는 어린 시절을 외갓집이 있는 취푸에서 보내며 제사 놀이를 좋아했다. 17살이 되던 무렵 어머니를 여읜 공자는 19살에 결혼한다. 그는 노나라의 관리로 근무하며 끝없이 학문을 연마했고, 주나라의 문물과 제도, 예와 악에 대해서도 묻고 배웠다. 그러다가 55세 되던 해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다. 13년 동안 72명의 군주를 만나 설득했지만 ‘상갓집 개’처럼 박대를 받고 죽음의 위협에도 시달리다 68세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힘을 바탕으로 먹고 먹히는 춘추전국시대에 공자가 내세운 인(仁)의 철학은 설 곳이 없었다. 그는 저술에 힘쓰고 제자를 가르쳤으나 사랑하던 제자 안회(顔回)와 자로(子路)가 죽자 애통해하다가 5년 만인 기원전 479년에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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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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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푸 시내의 야시장 |
취푸에서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곳 중 하나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공묘(孔廟)다.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처음에 세웠고, 역대 제왕들이 건물들을 추가로 만들어 매우 웅장하다. 베이징의 자금성, 허베이(河北)성 청더(承德)의 피서산장과 함께 중국의 3대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불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형상화한 4개의 기둥과 영성문이 나온다. 여러 시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문을 계속 통과하다 보면 13개 비와 대성문(大成門)이 나오고,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것을 기념해서 세운 행단(杏壇)이란 정자가 나타난다. 그 뒤쪽에 있는 것이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구름과 승천하는 용이 새겨진 거대한 돌기둥이 있으며, 내부에 공자의 형상이 안치되어 있다.
대성전 오른쪽에는 공자가 원래 살던 집인 시례당(詩禮堂)이 있다. 이곳에서 공자는 아들에게 시와 예를 가르쳤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공자가 마셨다는 우물도 있고 그 옆에는 노벽(魯壁)도 있다. 진시황이 유생을 생매장하고 유교 경전들을 모두 불살랐을 당시 이 집에 살던 공자의 9대손이 몰래 유교 경전들을 이 벽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지금 있는 노벽은 그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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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푸 시내 풍경 |
공묘 오른쪽에는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던 공부(孔府)가 있고,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공림(孔林)이 있다. 울창한 숲길 옆에 있는 공자의 무덤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생각을 지배한 거인의 무덤답지 않게 단출하기 그지없다. 무덤 위로는 나무가 무성하고, 문화혁명 당시 수난을 당한 묘비에는 금이 가 있다. 왼쪽 옆에는 공자 사후 6년간 시묘살이를 한 제자 자공(子貢)을 기리는 집이 있고, 공자 묘의 오른쪽에는 아들인 공리(孔鯉)의 묘가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아래쪽에는 공자의 손자이며 ‘중용’의 저자인 자사(子思)의 묘가 있다.
공자의 무덤 앞에 서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생전에는 공자의 삶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고 세상의 박대를 당했으며 말년엔 애제자들을 둘이나 잃고 자신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사후에 많은 명성을 얻었고 그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해 살아 남았으니, 공자의 사상 못지않게 삶 자체도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공자 집안의 제사용 술 ‘공부가주’
>>여행 에피소드
취푸에는 공자 집안에서 제사용으로 썼던 공부가주(孔府家酒)라는 술이 있다. 39도짜리와 52도짜리가 있다. 대중음식점에서 두 가지를 마셔보니 39도짜리는 고량주 정도로 독했지만 술술 넘어갔다. 52도짜리는 목이 탔지만 약간 달콤한 맛이 났다. 39도짜리는 160㎖ 한 병이 한국 돈으로 1200원 정도, 52도짜리는 1800원 정도였다. 한번에 마시질 않고 여행 중 밤에 조금씩 마셨는데 뒤끝도 좋았다. 취푸를 비롯한 산둥성 전체에서 유명한 술이니 그 지역에 가면 한번 마셔볼 만하다.
>>여행 정보
산둥성의 성도 지난(濟南)까지 인천에서 직항이 있다. 지난에서 취푸까지는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취푸에서 니구산까지 택시비는 왕복 140위안(약 1만7000원) 정도. 시내에서 공묘, 공부 등은 걸어갈 수 있으나 공림까지는 미터기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 취푸 시내에는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를 기리는 사당인 안묘(顔廟), 공자가 흠모한 주나라 주공(周公)을 기리는 주공묘(周公廟)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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