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여인들 - 뭐가 있었나?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와 황후를 모시는 궁녀들의 사진.

궁녀들은 "관례전"의 애기나인은 연두 저고리에 진분홍 치마 또는 보라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고,

상궁과 그 외 나인은 제복과 같이 남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게 됩니다. 궁녀의 경우 젊을 때는 삼회장, 30-40대에는 옷고름과 끝 동만의 이회장을 하고, 이후에는 모시고 있는 상전을 위해 옷고름이라도 자주 고름을 달아 입었습니다. 당의는 나인의 경우 "남송색"이라 하여 빛바랜 연두색 같은 엷은색을 입습니다.

애기나인

생머리 혹은 사양머리 - 생각시란 지밀(각 궁방의 침실), 침방(궁중에서 침모들이 바느질 하던 곳), 숫방(수를 놓는 방)의 소녀 견습내인을 말하는데, 생머리를 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생각시의 '생'이란 처녀를 의미합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사양이라고 함) 즉 사양머리라고도 불리우는 생머리는 관례전, 소위 미성년의 처녀시절에 했던 머리형인데 뒤에서 머리를 둘로 가른 후 말아올려 자주색댕기를 드리는 형식입니다. 관례전에는 비빈, 공주의 경우도 이 머리를 했습니다. 다만 이들의 경우는 그 댕기의 감이나 그 위에 붙이는 장식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이할 것은 같은 생댕기라 해도 지밀내인의 경우만 댕기를 히프선까지 늘리고, 침방.숫방의 내인은 짧게 매는 것이 특색이었으며, 위의 세 처소외에 다른 처소의 소녀 내인들은 일반 여염소녀들 과 같이 한 가닥으로 길게 땋아 늘여서 끝에 짧은 댕기를 매는 땋은머리 형식을 취했습니다. 내인들의 불편한 잠자리 관례이후부터 상궁의로 봉궁봉책을 받기 이전까지를 소위 내인이라 칭합니다.

내인은 상하번 교대로 근무를 했기 때문에 비번으로 근무를 하지 않고 집에 머물를 때와 근무 를 할 때의 복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밀(침실)내인의 경우는 당번으로 침실에 올라갈 때 머리모양은 물론이고 복식도 그 형식에 차이가 있었으며, 또 당번이라 하더라도 아침 식전과 밤새우러 오후 네시경에 올라갈 때의 옷과 머리모양이 달랐습니다. 즉 아침 식전에는 내인으로서의 정장을 하게 되는데, 남치마에 옥색회장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긴 초록 곁마기(당의보다 가벼운 웃옷)을 입고 어여머리를 했습니다. 반면 오후의 번은 나이에 따라 분홍 저고리 혹은 연두 저고리를 입었으며, 머리모양은 자러 올라가는 것이 어서 약식으로 조짐머리를 하게 됩니다.

집에 내려와 쉴 때에는 의복은 나이에 따라 다양했으나 머리형식은 조짐 머리에 '첩지'를 꽂았으며, 지밀상궁(궁중 지밀에서 대전 내전을 모시는 상궁)들의 경우 아침저녁으로 갈라서 상하번의 당번제 근무를 했습니다. 상번으로 아침에 침전에 올라갈 때는 어여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근무일때는 숙직을 하는 것이라 조짐 머리를 했는데, 지밀에서의 근무는 비록 저녁때 올라가 '자러간다' 하여도 상궁들은 잘 수는 없었습니다. 왕은 자도 지밀상궁은 자면 큰일 납니다. 왕을 지켜줘야 됩니다.



◆ 내명부 소속 궁녀들의 품계

(통칭 중궁전 관할)

상궁(정 5 품) : 왕비를 인도하며, 상기와 전언을 통솔

상의(정 5 품) : 일상생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맡았으며, 전빈과 전찬을 통솔

상복(종 5 품) : 의복과 수로 무늬놓은 채장을 공급하고, 전의와 전식을 통솔

상식(종 5 품) : 음식과 반찬을 준비하였으며, 사선과 전약을 통솔

상침(정 6 품) : 왕이 옷을 입고 먹는 일을 진행하는 순서를 맡으며, 사설과 전등을 통솔

상공(정 6 품) : 여공의 과정을 맡았고, 사제와 전채를 통솔

상정(정 6 품) : 궁녀의 품행과 직무단속 및 죄를 다스림

상기(종 6 품) : 궁내의 문서와 장부의 출입을 담당

수규(종 6 품) → 세자궁 소속

수칙(종 6 품) → 세자궁 소속

전빈(정 7 품) : 손님 접대, 신하가 왕을 뵐 때 접대, 잔치 관장, 왕이 상을 주는 일 등을 맡음

전의(정 7 품) : 의복과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수식을 맡음

전선(정 7 품) : 음식을 삶고 졸여 간에 맞는 반찬을 만듦

전설(종 7 품) : 장막을 치고 돗자리를 준비하며 청소하는 일과 물건을 베풀어 놓은 일을 담당

전제(종 7 품) : 의복 제작

전언(종 7 품) :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구실 담당

장찬(종 7 품) → 세자궁 소속

장정(종 7 품) → 세자궁 소속

전찬(정 8 품) : 전빈과 같음

전식(정 8 품) : 머리를 감고 화장하는 일과 세수하고 머리빗는 일을 담당

전약(정 8 품) : 처방에 따라 약을 달임

전등(종 8 품) : 등불과 촛불을 맡음

전채(종 8 품) : 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음

전정(종 8 품) : 궁관의 질서를 바르게 하는 일을 도움

장서(종 8 품) → 세자궁 소속

장봉(종 8 품) → 세자궁 소속

주궁(정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상(정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각(정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변치(정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치(종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우(종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변궁(종 9 품) :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장장(종 9 품) → 세자궁 소속

장식(종 9 품) → 세자궁 소속

장의(종 9 품) → 세자궁 소속

◆ 기타(내명부에 속하지는 않음) ◆

무수리 : 각 처소에서 궁녀들이 부리던 계집종.

비자 : 궁 밖에 글월을 보내는 편지 배달을 하고 답장 받아 오는 일.

각심이 : 궁녀들 방에서 살림을 해주는 손님방 아이 또는 방자라 함.

의녀(여의) : 간단한 진맥이나 침술법을 가르치는 여인들로 출산때 조산부 노릇까지 하였고 궁중잔치에 춤을 추는 기생 역할도 하여서 일명 "약방기생"이라 불리웠고 여죄인을 잡아가는 등의 여순경 역할도 담당.


◆ 상궁의 종류 ◆


상궁은 직첩을 받으면 그날부터는 머리에 첩지(머리 가르마 가운데에 장식하는 것)를 달게 됩니다. 상궁이 되기 전은 항아(달 속에 있는 선녀)님이라 부르고 상궁이 되면 비로소 마마님이라 부르고 대접받게 되는데, 상궁 첩지를 받으면 궁안에 방을 하나씩 주어 따로 세간을 내주었습니다. 따로 밥짓고 빨래하는 하녀를 두고 살림을 하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을 각방서리라고 합니다.

㉠ 제조 상궁

제조상궁은 일명 큰방 상궁이라고 하여 수백 명의 궁녀 중 으뜸이 되는 상궁으로 권세와 권위가 대단하여 남자관리로 치면 영의정의 지위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제조상궁은 단 한사람이며, 자격은 궁녀 중에 연조가 오래되고 위품이 있고 인격이 높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학식이 많고 수많은 궁녀를 통솔할 수 있는 영도력이 있어야 하고 인물도 출중해야 됩니다. 제조상궁의 임무는 대전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대소 치산(살림살이)을 주관합니다. 제조상궁에 대한 음식대접은 임금님의 수라상과 가짓수를 같게 하고 분량만 적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큰방 상궁이 궁궐을 출입할 때는 세수간 나인과 비자가 따라 다녔습니다.

㉡ 부제조 상궁

부제조상궁은 제조상궁의 다음 자리로 일명 "아랫고 상궁"이라고도 하며 제조상궁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이어가게 됩니다. 보석과 의식주에 걸친 왕의 귀중품은 물론 수라에 쓰이는 반상기용인 은기, 자기 및 유기와 비단 등이 있는 아랫곳간의 물품들의 출납은 부제조 상궁의 담당이었습니다.

㉢ 대령 상궁

대령상궁은 일명 "지밀상궁"이라고 합니다. 항시 왕의 곁에서 어명을 받드는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데, 왕의 수족격입니다.

㉣ 보모 상궁

보모상궁은 왕자녀의 양육을 맡는 내인들 중의 총책임자입니다. 동궁에 두 명, 그밖의 궁에는 한 명씩 있는데, 왕자녀들은 어릴 때에 이들을 '아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왕의 부인인 후궁이 아닌 이상에야 궁녀들이 오를 수 있는 최의 품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왕의 유모인 "봉보부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봉보부인(종1품)이 되면, 외명부로 이전됩니다.

㉤ 시녀 상궁

시녀상궁은 궁중의 지밀에서 항시 봉사하면서 여러 가지 업무를 행했는데, 서적 등을 관장하고 글을 낭독하고 글의 정사(글 쓰는 것)를 맡고, 대소잔치의 내연에 좌우 찬례, 전도, 승인, 시위 등을 거행하고, 각 종실과 외척들의 집에 내리는 하사품에 관한 업무를 관장, 규찰하고 그릇과 기타를 다스리는 일 외에 대소 사우(따로 세운 사당집)를 총관하여 곡읍(소리내어 슬피움)도 하며, 왕비와 왕대비의 특사로 그 본댁(친정)에 어명을 받들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 일반상궁

이상의 상궁들 외에 뚜렷이 직함이 붙지 않은 일반상궁들이 각 처소마다 7, 8명씩 있어서 그 아래의 내인들을 총괄하고 처소마다의 모든 업무를 책임지기도 합니다. 상궁들은 존칭으로 '마마님'이라 불렀습니다.

◆ 내인의 종류 ◆

내인은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된 궁녀를 이르는 말입니다. 원칙으로는 소녀 때에 "견습여관"으로 들어와서 15년이 경과되어야 내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이 계신 대전 외에도 왕대비, 대왕대비, 동궁 그 밖의 왕자, 공주의 궁과 그리고 후궁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들까지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더욱이 왕의 사친의 사당을 지키는 이들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즉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을 "각전"이라 하고, 대군, 왕자, 공주, 옹주, 후궁, 신주를 모신 곳을 "각궁"이라 하여 궁인이라는 관리를 두었는데 바로 그들이 내인들입니다. 왕족들이 사는 궁들은 각기 사유재산과 그밖에 국가에서 내리는 공물을 가지고 완전히 독립세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 궁에 소속된 내인들은 물론 그 궁에서 보수를 받았습니다. 내인은 대전, 내전에 항시 사는 지밀내인과 침방, 수방 등에서 일하는 도청내인, 안소주방, 밖소주방, 생과방, 세답방, 세수간 등에서 일하는 처소내인으로 크게 나뉩니다.

㉠ 지밀 내인

'지밀'은 대궐에서 가장 지엄하고 중요한 곳으로 말 한마디 새어나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왕내외가 거처하는 궁궐 중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침전을 말하는데, 이들은 우선 왕과 왕비의 신변보호 및 기거, 침, 식, 의 등 일체의 시중과 물품관리 및 내시부, 내의원, 내선사들과 중요한 교섭을 담당했습니다.

㉡ 소주방 내인

수라간은 소주방이라고도 하며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뉩니다. 안소주방 내인은 왕, 왕비의 조석 수라상을 관장하며 주식에 따르는 각종 찬품을 맡았습니다. 밖소주방 내인은 궐내의 대소 잔치는 물론 윗분의 탄일에 잔치상을 차리며 차례, 고사 등도 담당해야 했습니다.

㉢ 생과방 내인

후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즉, 생과, 숙실과, 조과, 차, 화채, 죽 등을 만듭니다. 조석 수라상은 소주방내인을 도와서 거행하며 잔치음식의 다과류는 이 곳에서 관장했습니다.

㉣ 퇴선간 내인

지밀에 부속되어 있는 중간 부엌인 퇴선간에서 수라를 지으며 안소주방에서 운반한 음식을 다시 데워서 수라상에 올리고 수라상 물림을 담당했습니다.

※ 다모란

포도청에서 관원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찬모와도 같은데 실은 비밀리에 죄인들을 수색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여자경찰과 비슷한 존재입니다. 남자인 포졸들이 들어가기 힘든 여염집 안채나 기타 남성들이 하기 껄끄러운 잡스런 일들을 도맡아하기도 하고 그집의 식모나 여종들을 염탐해서 정보를 알아오거나 하는 일들을 도맡아했다고 합니다.



by 100명 2008. 5. 19. 19:26
하늘 아래 제일 서러웠던 소리꾼, 이화중선
[[오마이뉴스 김현 기자]
남원 광한루의 한 정경. 이곳은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 펼쳐진 곳이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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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도 생애가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흥할 때가 있으면 쇠할 때도 있다. 우리의 소리인 판소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판소리를 모르는 이는 없다. 노래는 몰라도 '판소리'란 이름은 알고 있고 소리꾼들의 노래를 어디서든 한두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모른다. 춘향이와 심청이는 알아도 그 노래는 모른다. 어렵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책 겉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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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리인 판소리가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던 시기를 뽑으라 하면 19세기부터 20세기 초가 아닌가 싶다. 이때 권삼득, 송흥록, 이날치, 김세종, 박유전, 정정렬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창들이 나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민중은 그들의 소리에 울고 웃으며 흥겨운 몸짓을 함께했다.

그런 판소리가 이젠 대중들에게 어렵고 먼 소리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판소리 발생 초기엔 쉽고 이해하기 쉬어 대중적인 음악으로 보편성을 띠었다. 그러다 점차 양반들이 향유하게 되고 왕실까지 판소리를 향유하면서 전차 어려워지기도 하고 예술성도 가미되면서 대중들로부터 멀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우리 판소리는 대중의 시대를 지나고 상실의 시대를 넘어 세계무대로 도약하고자 하고 있다. 가장 우리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듯 우리 판소리의 그 음악적 리듬과 예술성은 세계 어느 음악과도 견줄 수 있다 하겠다. 이런 판소리의 소리꾼을 찾고, 소리꾼들의 삶과 예술을 생생한 호흡으로 기록한 책이 있다. <한국의 소리, 세상을 깨우다>이다.

무덤가에서 귀곡성을 배운 송흥록

송흥록은 동편제를 만들었고 판소리의 중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근대적인 판소리 발성법과 지금의 진양조 장단을 완성했다. 또 송흥록은 통성이나 폭포성(호령성)을 판소리 기본성음으로 확립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소리를 '폭포소리', '비바람이 몰아치는 소리', '태풍에 나무 부러지는 소리', '천병만마가 몰려와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 등으로 이야기했다. 그만큼 그의 소리엔 박진감이 넘쳤다 한다.

그러면서도 진양조의 가락을 완성했듯 그의 소리는 애절하고도 슬퍼 만인을 울렸다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그가 진주 촉석루에서 귀곡성을 부를 땐 음산한 바람이 불면서 촛불이 일시에 꺼진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사람들은 그의 소리가 접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며 놀라워하고 이야기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웅포의 해넘이 풍경
익산시청

지난 1월에 해돋이와 해맞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익산 웅포에 간 적이 있다. 옛날보단 그 모습이 덜하겠지만 웅포는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다운 곳이다. 한때는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불렸을 만큼 번성했던 곳이 웅포다. 지금도 해마다 정초가 되면 이곳에서 해돋이 축제를 하곤 한다.

명창 송흥록이 묻혀 있는 입점리구룡목대숲. (책속에서)
랜덤하우스코리아
송흥록은 이곳 웅포에서 1800년 경 태어났다. 지금이야 웅포의 옛 영화는 지는 노을 속으로 스러졌지만 이곳에 가면 명창 송흥록을 만날 수 있다. 대밭 속에서다. 송흥록은 살아 대밭에서 귀곡성을 연마하더니 죽어서도 그 귀곡성을 연마하듯 대숲 한가운데 누워 있다.

송흥록의 무덤. 대숲에서 귀곡성을 익혔던 그는 죽어서도 대숲에 누워 있다. (책속에서)
랜덤하우스코리아
귀곡성과 관련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평소 귀곡성을 깨우치기 위해 애를 쓰던 송흥록에게 웬 아이가 찾아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아이를 따라 한 대숲 초당에서 그는 백발의 노인들을 만났는데 그때 노인들은 송 명창에게 <춘향가>를 부르게 했다.

노래가 끝나자 노인들은 귀곡성이 틀렸다며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다. 그리고 노인들이 따라준 술을 몇 잔 받아먹고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한 초분이었다. 그는 그때 기억을 더듬어 귀곡성을 창안하고 완성했다 한다.

하늘 아래 제일 서러웠던 소리꾼, 이화중선

"남원에는 광한루가 있고, 춘향이가 있다. 판소리가 있고, 명창이 있다. 우리가 광한루 난간에 기대어 춘향이나 심청이를 떠올릴 때면, 우리는 어느 박복한 여인을 떠올려야 한다. 저 건너 녹림 숲에 완월정이 들어서기 오래전, 근처 어느 술청에서 막걸리 사발에 술을 치던 한 어린 소녀를 아시는가. 자신의 서러운 노래로 고단한 겨레의 심금을 온통 울려놓은 그녀를 가억하시는가. 이화중선 그녀를."

남원은 춘향이의 고향이다. 그리고 판소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지금도 남원에 가면 여기저기서 소리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판소리가 무대 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주와 남원 등 전라도 일대에선 소리는 마당가에서 펼쳐지는 몸짓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화중선은 춘향이와 같은 애틋한 사랑도 없다. 삶이 춘향이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화려한 명성 뒤엔 슬픈 삶과 아픔이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생을 마쳤다. 이러한 이화중선의 삶을 극명하게 표현한 시가 있다. 서정주의 <바위옷>이다.

일정의 식민지 조선반도에 생겨나서

기생이 되어서, 남의 셋째 첩쯤 되어서,

목매달아서 그 모가지의 노래를 하늘에 담아버린

二十세기의 우리 여자 국창 이화중선.

- <바위옷> 중에서

명창 이화중선. 작은 키에서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만인을 열광케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늘 고달팠다 한다. (책 속에서)
이화중선은 판소리 명창으론 근대사회의 스타였다. 명창 임방울이 '쑥대머리'로 숱한 대중을 울렸다면 이화중선은 ‘추월만정’으로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늘 고달팠다.

청산유수 같은 거침없는 창법과 고운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지만 자신은 지지리도 복이 없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그녀는 3살에 어미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다 술집 부엌대기가 된다. 그녀는 거기서 소리를 배웠고 명성을 얻은 다음엔 자신의 기저귀 한 번 갈아주지 않은 의붓어미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생동안 소리를 했다.

그러다 결국은 여자로서의 행복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채 1944년 일본에서 공연을 마치고 이동하던 중에 배가 전복되어 익사하고 만다. 평생 바리데기처럼 살다가 생을 놓은 그녀를 두고 서정주 시인은 '하늘 아래선 제일로 서러웠던 노래 소리를' 하다가 간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화중선 그녀의 소리는 한과 삶이 함께했다. 화려한 명성 아래에서도 늘 외로웠고 고달팠다. 해서 그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목소리 하나만 주고 다른 복은 주지 않았다고.'

난 지금 심청가의 한 부분인 '추월만정'을 듣고 있다. 황후가 된 심청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애달픈 마음이 이화중선의 제자이면서 당대를 수놓았던 김소희 명창의 목소리로 마음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가을 달밤에 들어야 제격이겠지만 화려한 봄꽃 아래에서 듣는 맛도 그리 나쁘진 않다. 소리를 들으며 하늘 아래에서 제일로 서러웠던 노래 소리를 하다가 간 한 여인을 떠올려본다.
by 100명 2008. 5. 19. 19:25

세계를 바꾼 13장의 사진들

1. Omaha Beach, Normandy, France

포토 저널리스트의 잘못 찍은 사진


급박한 전투 속에서 잘못된 노출과 흔들린 초점으로 잘못 찍은 이 사진은 50년 후,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오마하 해변 전투씬의 필름효과에 모티브가 되었다.
2. Migrant Mother

세계대공황의 얼굴

대공황 당시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2,500명의 노동자 가족들 중 한 가족의 어머니를 찍은 이 사진으로 당시 미국의 정치가들을 자극하여 빠른 경기 부양정책을 펴게 하는데 기여했지만 사진의 여인은 끝내 찾지 못했다.


3. Federal Dead on the Field of Battle of First Day, Gettysburg, Pennsylvania

전장 자체를 옮겨놓은 사진


미국인들에게 전장의 참혹함을 보여준 무거운 전장 사진
아직까지 미국인이 꼽는 참혹한 전쟁 사진 1위에 선정되고 있다.

4. Murder of a Vietcong by Saigon Police Chief

전쟁은 끝났지만 인권이 파괴되는 사진

퓰리처 상으로 더 유명해졌다.
많은 세계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에 강한 회의를 느끼게 한 사진


5. V-J Day,Times Square, 1945, a.k.a. The Kiss

가장 아름다운 키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방송 후 유럽의 전장에서 태평양의 전장으로 향하게 될

병사들이 타임 스퀘어에서의 축제중 키스하는 장면.

6. Hindenburg

기술의 패배

탑승한 97명중 62명이 살아남았지만 당시의 최고급 운송수단의 추락으로 불붙기 쉬운 교통 수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린 사진


7. The Tetonss-Snake River

지구를 구한 사진

깨끗하고 선명한 이 풍경 사진은 1936년 미국 의회에 Canyon 보호를 위한 로비활동의 자료로 사용되어 국립공원 지정에 이바지 하였다.

8. The Corpse of Che Guevara

체 게바라의 살아있는 열정

체 게바라를 민중 혁명과 사회주의의 순교자로 만든 사진


9. Einstein with his Tongue Out

천재도 유머가 있다

천재에게도 유머가 있으며 비법하고 괴팍한 천재가 아닌 유머있는 한 사람을 표현하여

아인슈타인이 천재성과 함께 개성이 있음을 보여준 사진


10. Dali Atomicus

초현실적인 사실을 만들어낸 사진

"점프" 초상화는 적어도 7개의 생활 잡지표지에 실렸으며,

초상화 사진술의 새롭고 과격한 모험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1. Loch Ness Monster, The Surgeon's Photo

거짓의 사진

수중수색과 현지의 관광사업으로 수백만 달러를 쓰게한 한장의 사진.
하지만 장난감 잠수함 및 목재용 퍼티를 이용하여 만든 괴물로 밝여진 사진

12. Gandhi at his Spinning Wheel


20세기 유력한 인물인 인도의 지도자 간디의 마지막 초상 사진
이 사진 촬영 후 2년 뒤 간디는 암살 당했다.


13. Le Violon d'ingres

모델 사진위에 바이올린의 F홀을 그려넣어 재촬영한 기법으로

클래식 누드의 기원을 변고했다는 평가를 받는 사진.

by 100명 2008. 5. 19. 19:24

러 트리니티 성당, 화재 발생

俄罗斯圣彼得堡19世纪大教堂失火(组图)

俄罗斯圣彼得堡19世纪大教堂失火(组图)

俄罗斯圣彼得堡19世纪大教堂失火(组图)

俄罗斯圣彼得堡19世纪大教堂失火(组图)


25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19세기 문화유산인 트리니티 성당에서 화재가 발생

중앙돔이 불길에 휩싸여있다.

4시간여의 불길이 지속...원인은 아즉 조시중~~~

by 100명 2008. 5. 19. 19:22

주간지의 역사


(사진 왼쪽)
주간경향. 표지 모델은 배우 이승연씨다. 잡지는 그 시절의 자화상이다.
(사진 오른쪽) 브로마이드 화보, 햇병아리 연예인들은 이런 사진 실리는 게 꿈이었다. 예전엔 군인들의 철모 안에 많이 들어있던 사진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미친 듯 어떤 일에 몰두할 때가 있었다. 그 시작은 '만화책'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만화책에 빠져 살았다. 동네에 있는 만화 가게는 다 내 놀이터였다. 신간이 나오면 가장 먼저 봐야 직성이 풀릴 정도였다.

처음엔 돈을 지불하고 봤지만 나중엔 훑어보는 척하며 선 채로 다 봤다. 한 권을 다 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일 분이면 족했다. 고수가 된 후에는 돈을 내고 보는 만화책보다 공짜로 보는 게 더 많았다. 물론 자세히 봐야 할 만화가 있으면 집에 빌려와 몇 번이고 봤다.

만화책은 '읽기' 개념보다 '본다'는 개념이 강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내로 태어나 다섯수레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말을 제대로 실천한 셈이기도 했다.



당시 만화 가게는 만화책뿐 아니라 무협지나 잡지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는 만화책이 점차 시들해졌다. 함께 만화 가게를 드나들던 친구들 중 몇은 무협지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나는 잡지 쪽을 선택했다. 잡지는 손에 잡기만 해도 몸부터 후끈 달아오르는 매력이 있어 좋았다.

흔히 말하는 사춘기 시절은 궁금할 게 많은 나이였다. 세상살이에 대한 고민보다 요상하게 변하는 몸의 구조와 근원을 알 수 없는 콩닥거림이 고민이라면 고민의 대상이었다.

당시에 만난 잡지는 <주간경향>과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였다. 물론 <학원> 같은 고품격의 잡지도 섭렵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학원>지에서 '이가 빠진 동그라미'를 처음 읽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다.

누가 뭐래도 잡지는 그 시절 내 영혼을 살찌우는 비타민과 같았다. 셰익스피어의 전집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보다 영양가가 많고 재미있었다.





(사진 왼쪽)
선데이서울 표지. 늘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진 오른쪽)
주간경향 표지.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던 잡지, 그 시대를 대변했다. <정선 추억의 박물관 소장품>


나의 보물창고이며 가정교사...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잡지엔 내가 궁금해하던 것들이 가득했다. 당시의 잡지는 내게 있어 보물창고였으며, 가정교사와 다름없었다. 더구나 상상력까지 향상시켜주었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였다.

여성의 브래지어 한번 구경하지 못하고 사춘기를 맞은 탓에 어여쁜 여자의 몸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몽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는 누드 사진이나 수영복을 입은 탤런트의 사진이 암거래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대중가요 책이나 잡지 뒷면에 나오는 펜팔코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우리는 맘에 드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에게 편지를 썼으며 도시 여학생과 달콤한 연애도 꿈꾸었다.

한 친구는 멋진 가명을 만들어 펜팔코너에 내기도 했다. 당시 유행했던 가명은 '강준' 또는 '강민' 이런 식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친구에게 날아드는 편지를 돌려 읽었으며, 대신 답장을 써주기도 했다.







고교시절엔 단행본 시리즈로 나오던 '사랑의 체험수기'를 정독하면서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또 잡지에 나오는 체험수기인 '사랑의 십자로'나 '사랑의 메아리'를 탐독했으며, 수기의 사연처럼 우연히 다가오는 사랑이 내게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이 있다.

수기의 내용이 사실이던 지어낸 것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좋을 때라 모든 걸 소화할 수 있는 나이였으며, 그런 사연이 내게도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살았다. 하여 기차나 버스를 탈 때면 일부러 옆자리를 비워두고 여학생이 앉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으리라'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친구는 여자 뒤에서 표를 사거나 뒤를 따라붙기도 했다. 그 일이 어쩌다 성공이라도 하면 친구의 연애담을 듣기 위해 호빵이라도 입에 물려주어야 했다.



집에 소장하고 있는 잡지 <주간경향>에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사연이 나온다. 조금만 소개하자.

옆 자리에 한 젊은 남자가 앉았다. 차림새가 세련되지 못한 데 비해 핸섬한 얼굴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시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창가에 앉아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슬픈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느낌이었다.

버스가 군위읍을 벗어날 즈음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말을 굴곡없는 톤으로 독백하듯 꺼냈다.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거지만 수렁에 한번 다리가 빠지면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든 것 같잖아요? 아무리 자기 사진을 독려해도 인생은 자기 뜻과는 무관한 것이 너무도 많기도 하고…."

마치 인생의 달관자가 된 것처럼,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난 시종 미소로 대신했다.

- <주간경향> 1251호(1993년 5월 9일 발행) 독자의 체험수기 '사랑의 메아리' 중에서



지금 보면 문맥도 엉성하고 조금은 유치하달 수 있는 내용이지만, 당시만 해도 시간을 죽이며 상상력을 극대화 시키기에는 그만이었다.

어떤 희곡작가는 '사랑의 십자로'로 문단에 데뷔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실제 그는 고교 시절 '사랑의 체험수기'에 투고하여 실린 적이 있다고 했다.


1969년에 발행된 주간경향, 표지 모델은 당시 인기를 누리던 홍세미씨. 서울시립대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이다.


주간지의 역사는 1918년 9월에 창간된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발행된 주간지는 대중지가 아닌 순수문예지였으며, 1955년에 창간된 <주간희망(週刊希望)>이 비로소 대중과 함께하는 주간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68년 <선데이서울>의 등장으로 주간지의 역사가 다시 한번 바뀌게 된다. 그해 9월 22일 창간된 <선데이서울>은 1992년 12월 통권 119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당시 가격은 20원이었으며, 폐간될 당시의 가격은 2천원이었다.

뒤이어 발행된 <주간경향>은 1968년 11월 17일 창간하여 1995년 6월 1일 136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당대의 스타들이 표지를 장식하던 잡지는 패션이나 유행, 사회상 등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그 시절의 거울과 다름없다. 햇병아리 연예인은 <선데이서울>이나 <주간경향>에 얼굴을 비추어야만 연예인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당시 발행된 잡지들의 기사 제목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호텔에서 밀회를 즐기던 국회의원이 구설수에 오르는가 하면, 인기 여배우가 마약 파티를 즐겼다는 내용과 남편을 때리고 구속된 여의사의 기사가 세간의 입을 바쁘게 만들었다.



청소년에게 '필독서' 대중잡지... 이젠 추억으로만 존재

한때 대중잡지는 신군부 정권의 3S 정책에 힙입어 날개를 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대중잡지도 화려한 막을 내리게 된다.

이젠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대중잡지는 너무도 대중적이다 보니 남아있는 책자가 없다. 그로 인해 그렇게 흔하던 잡지가 요즘엔 박물관에 소장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청소년에게 '필독서'였던 대중잡지들, 하지만 일부 지식인들에겐 지나친 성적 표현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중잡지는 나른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하루의 긴장을 푸는 포장마차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유로 대중문화의 표상이었던 대중잡지도 우리가 살아온 역사임이 틀림없다.

이불 속에서 몰래 보던 잡지가 박물관에 유물로서 떳떳하게 소장되는 아이러니를 겪어야 하는 요즘 '내 마음의 박물관'에 있는 지난 추억이 새삼스럽다.

by 100명 2008. 5. 19. 19:21

구한말 아낙네들

by 100명 2008. 5. 19. 19:20

母子像이 들어갔던 화폐



1962년 5월 16일 발행된 백환권 지폐에는 일반인이 모델로 사용되었다.

국민들에게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아들이 저금통장

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 지폐는 발행된 지 20여일 뒤인 6월

10일 제3차 통화조치 때 새로운 화폐가 발행되면서 폐기되었다.

by 100명 2008. 5. 19. 19:20

한국 최초의 패션쇼 현장







[북데일리]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 노’. 자신의 에세이 <노라 노, 열정을 디자인하다>(황금나침반. 2007)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 현장을 생생히 추억해 눈길을 끌고 있다.

1959년 11월 29일 오후 2시 반도호텔에서 열린 당시의 상황을 그녀는 이렇게 회상한다.

“애달픈 바이올린 선율 속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스쳐가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난생 처음 보는 이벤트에 흥분했다. 마지막으로 그 해 최고 여배우상을 수상한 조미령 씨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등장했다.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책에 따르면 이 날 패션쇼가 “티켓도 없이 온 사람들이 입장시켜 달라고 아우성 칠 정도” 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노라 노 자신의 첫 번째 패션쇼이기도 했던 이날. 그녀는 당시의 느낌에 대해 “패션쇼가 시작 되는 순간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며 그날의 감동을 전했다.

한편 책에는 당시 패션쇼 현장 뿐 아니라 그녀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은 추억의 배우 등 다양한 사진이 실려 있다.

새롭게 공개된 우리나라 패션 역사의 한 순간을 감상해보자.

by 100명 2008. 5. 19. 19:19

독립운동가 50인의 초상화

러시아 작가
세르게이 예브게니예프 토고레프
모스코바 부기끄 영화대학 영화미술교수가 그린 초상화

고종황제(1852-1919). 조선 제26대왕
(?)
(명성황후의 초상화를 그린것 같음)
구연영(1864-1907). 항일애국지사, 이천수창의소 결성
구정서(1882-1907). 항일애국지사
김 구(1876-1949).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석
김 혁(1875-1939). 독립운동가, 성동사관학교 설립
김학규(1900-1967). 독립운동가
박준채(1914-2001). 광주학생독립운동
김좌진(1889-1930). 독립운동가, 북로군정서 총사령
김지섭(1884-1928). 독립운동가, 의열단
김창숙(1879-1962). 독립운동가, 교육가
김상옥(1890-1923). 독립운동가, 종로경찰서 폭파
남자현(1872-1933). 여성독립운동가, 여자교육회 설립
노백린(1873-1926).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군무총장
김동삼(1878-1937). 독립운동가
박은식(1859-1925).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민영환(1861-1905). 독립운동가, 순국지사
박재혁(1895-1921). 독립운동가, 의열단
백정기(1896-1934). 독립운동가, 흑색공포단조직
서재필(1866-1951). 독립운동가, 독립협회 창립
손병희(1861-1922). 독립운동가, 천도교지도자(제3대 교주)
송학선(1893-1927). 독립운동가
(?)
(?)
안중근(1878-1910). 독립운동가, 이등방문 저격
한용운(1879-1944).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편강렬(1892-1928). 독립운동가, 의성단 조직
한 징(1886-1944).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전명운(?-?). 독립운동가, 공립협회 활동
장인환(1876-1930). 독립운동가, 시티븐스 주살
신채호(1880-1936).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이종일(1858-1925). 독립운동가
이재명(1890-1910). 독립운동가, 공립협회 활동
이윤재(1888-1943).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이시영(1869-1953).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부통령
이시영(1882-1919). 독립운동가, 조선국권회복단 활동
이승만(1875-1965).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
이명하(1878-1920).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독립운동가, 권업회 활동
이봉창(1900-1932). 독립운동가, 한인애국단 활동
이범진(1852-1911). 항일애국지사, 초대 러시아 공사
이범석(1900-1972). 독립운동가
이동녕(1869-1940). 독립운동가,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 준(1858-1907). 항일애국지사, 비밀결사 개혁당
윤봉길(1908-1932). 독립운동가
유관순(1902-1920). 독립운동가
양기탁(1871-1938). 독립운동가, 언론인
안희제(1885-1943). 독립운동가, 대동청년단 조직
안창호(1878-1938).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회영(1867-1932). 독립운동가
by 100명 2008. 5. 19. 19:17

재밌는 옛날 신문 광고







































































by 100명 2008. 5. 19. 19:16

화성의 그랜드 캐니언, 8천 미터 깊이 계곡






by 100명 2008. 5. 19. 19:15

1950-70년대의 서울 풍경 *


1967 서울 마포




1971 <동심> 서울 염리동





이 사진을 기억하시는지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재판을 받고 있는 여인과
죄수복을 부여잡고 있는 어린아이. 5.16 쿠데타로 수립된 군사정부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열린군사재판의 한 장면.
이 사진은 1961년 10월 아사히신문 국제사진전에 출품되어 10대 걸작으로 선정됐고,
1962년에 '평범사' 발행 세계 사진연감에 수록되었고, 1967년 평범사가 선정한
'최근 10년간 가장 훌륭한 보도사진 36장'중 한장으로 선정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완전군장을 한 병사들 앞에 한 어머니가 가방을 놓고 서 있습니다.
어머니가 떡이라도 건네 줬는지 병사는 뭔가를 막 먹으려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런 아들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얘야 제발 살아
만 돌아 와 다오" 어머니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정범태 작가의 서울을 소재로 한 작품 (1950 -70년대)*



1955 <폐차 안에서의 함성> 서울 청량리




1955 <우유가루 배급 줄서기> 서울 만리동




1956 <말과 마부> 서울 만리동




1956 <열쇠장수> 서울 남대문 시장




1957 <생과 사> 서울 남대문 시장




1957 <북창시장> 서울 북창동




1959 <달동네> 서울 아현동




1960 <물지게 진 소녀> 서울 현석동




1961 <결정의 순간> 서울경기고등군법재판소




1964 <목마> 서울 공덕동




1965 서울 중림동




1965 <어머니와 아들> 서울 동대문운동장

by 100명 2008. 5. 19. 19:12

덕수궁의 꽃 으로 왔다 간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1912년 5월 25일 덕수궁.

이 날,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가 탄생합니다.


덕혜옹주의 돌 사진입니다

아버지 고종황제를 쏙 빼어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요.

일제 강점기 하에서 우울하게 지내던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를굉장히사랑하여

그녀를 낳은 궁녀 양씨에게 즉시 복녕당 당호를 내리고

태어난 다음날 아기를 보기 위해 복녕당으로 친림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행차했을때 덕혜옹주에게 젖을 먹이던 유모 변복동이

황제 앞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1916년에 고종황제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함녕전 옆의 즉조당을 개조해 만든 유치원인데,

이 사진에 있는 사람들 중 가운데 앉아 있는 소녀가 바로 덕혜옹주입니다.



황실 가족사진 -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고 있는 이 사진은 1918년 1월21일 촬영된 것이다. 당시 발행된 매일신보는 이 사진에 대해 모두 모여 함께 일본 요리로 식사를 한 후 찍은 사진이라고 전한다. 즉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는 가족사진인 것이다.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당의 차림의 덕혜옹주.

이 흑백 사진을 바탕으로 동강 권오창 화백이 아래의 진영을 그렸습니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일출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송별회 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고 전한다.



덕혜옹주와 동급생, 선생님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덕혜옹주(오른쪽)가 다른 학생들보다 높은 좌석에 앉아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서울대박물관 '마지막 황실,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살았던 덕혜 옹주가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일본 급우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이다. 뒤쪽에 학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5년 3월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 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교과서에 쓰여진 ‘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월께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고 있다. 일출 심상소학교는 서울 충무로 현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전용 학교였다. (1925년)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조선 내의 일본 거류민들을 위한 학교라서 덕혜옹주도 때때로 일본옷을 입곤 했습니다.



소녀 시절의 덕혜옹주.

명목상으로는 유학이었지만 반강제로 일본에 온 덕혜옹주는

오빠인 이은 황태자 부부의 거처에서 지내며 우울함을 달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순종황제가 붕어할 때마다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괴로워했고

이게 훗날 그녀를 정신병으로 몰고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얻은 스트레스도 그것에 일조했겠지만요


결혼식날의 덕혜옹주.

1931년 5월 8일에 덕혜옹주는대마도주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식을 합니다

사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양친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 다케유키는 그의 후견인인 구죠 공작(다이쇼 국왕의 왕비 사다코의 친정 오빠입니다.) 부부,

덕혜옹주는 이은 황태자 부부, 이런식으로 결혼식을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결혼은 일본에서 주도해 억지로 맺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남편 소 다케유키(종무지)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속 두 사람은 다정해 보입니다.

항간에는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못살게 굴어서 그녀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금슬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을 마사에라고 지을 정도였으니까요.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양쪽의 이름을 합한 의미를 지니는 이름이 바로 마사에(정혜)...)

하지만 대체 이렇듯 행복해보이는 부부가 왜 종국에 가서는 파경에 치달았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아무튼,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덕혜옹주는 정신병이 발병해 도쿄의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되고,

남편과의 관계도 끝납니다.

1951년 경에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서 처음 만난 김을한 기자는

(이 사람은 훗날 이은 황태자 부부와 덕혜옹주의 한국 귀국을 성사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웁니다.)

큰 충격을 받습니다.


감옥 모양으로 쇠창살이 쳐진, 아무도 없는 독방에, 11월인데도 맨발로 앉아 있는

중년의 여인이 되어버린 덕혜옹주.


나중에 김을한 기자가 동분서주하여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도움으로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서울에 도착합니다.

그때까지 생존해있던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은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렸고,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린 덕혜옹주를 본 모든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풀각시처럼 아름답던 소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신 상태에서 아래 사진을 보면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가 가시리라고 믿습니다.


부축을 받으며 창덕궁 낙선재로 들어가는 덕혜옹주.

이 때 순정효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덕혜옹주는

정신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놓아버린 상황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궁중 예법대로 절을 올려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마치 정상인이 행동하는 듯이 그랬으니까요.


덕혜옹주의 회갑날.

가장 왼쪽은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그녀 옆에 앉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저 할머니가... 바로...

'덕수궁의 꽃'이라고 불리던...

덕혜옹주...


왼쪽에서 두번째가 덕혜옹주입니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과 왕진 치료를 번갈아 하며 지내던 덕혜옹주.

그녀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며

상궁들의 도움을 받아 나들이를 하거나, 상궁들과 화투를 치기도 했습니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생전에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낙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 (얼마 전에 훙서한 회은황태손 이구, 이은 황태자의 아들.)

"나는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비전하는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를 가리킵니다)

"나는 낙선재 살고 싶어요"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합니다

덕수궁의 꽃으로 불리던 황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홍유릉 뒷편에 모셔집니다.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그녀 스스로도 정말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부부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의 곁으로...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대한 덕혜옹주지묘(大韓 德惠翁主之墓)"

by 100명 2008. 5. 19. 19:10
암울했던 일제치하

일본 731부대 군인들이 멀쩡한 사람을 해부하는 장면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피해자가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부릅 뜬 두 눈은 이자들의 만행을 잊지 말아 달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듯 합니다.

3·1절을 맞아 이같은 일제의 만행을 담은 사진 250여장이 실린 사진집이 발간됐습니다. '일본 관동군 731부대 한국인 희생자 진상규명위원회'(김창권 위원장)가 731부대의 만행 등을 담은 사진집 '씻기지 않는 고통과 아픔'(파란북)이라는 책입니다.

김창권 위원장이 98년부터 수집해 온 사진 250여장을 엮은 이 사진집에는 731부대, 남경대학살, 위안부 등과 관련된 미공개 자료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진집과 관련해 연합뉴스는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침략적 요새와 731부대의 건설, 남경 대학살, 731부대의 인체 실험과 그 이후의 진행과정, 종군 위안부의 실상 등을 차례대로 풀어가며 일본 제국주의가 역사에 남긴 흔적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일본군이 축조한 요새 지역 분포도


동녕요새 지하공사 입구



유분하요새 지하 공사장 통로


노동자 유골




남경 “영” 자 제1644부대 세균연구 건물 옛터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군의중장





일본군 남경 점령 후 12월17일 입성의식



방독면을 한 채 상해에 진입하는 일본군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남경 시민의 시체



일본군이 피살된 남경 군민의 시체를 장강(양쯔강)에빠트리고 있다




일본군에 의해 집단 살해된 무장 해제한 중국 군인과 남경 시민의 시체




일본군에 의해 피산된 중국인 시체가 있는 남경시내



본군이 남경 시민을 생매장 하고 있다




일본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포박당한 중국 사병과 난민을 찔러 죽인 후
다시 총검으로 찌르고 있다.



일본군에 의해 집단 학살된 남경 시민의 시체





남경의 3세 어린이가 일본군에 의해 총살 되었다





731부대의 백신, 혈청 연구개발, 생산 실험실 옛터





실외소독



의안 페스트 방역대원 출발 전 합동 사진






범죄의 증거를 소멸키 위해, 731부대는 후퇴 이전에 토기세균탄피는 산구반 밖으로 치웠다.
사진은 파손된 세균탄 조각.





“특수수송”피해자 왕진송의 정면사진




일본군 대련 헌병대 조장 삼미풍은 심덕룡 등 4인을 731부대로 압송했다.




731부대 인체실험 피해자 왕요헌




목단강시 독가스 사건중의 노동자 중강씨의 얼굴 부분 상처의 초기 상황




운남 세균전피해자 서생우




2003년 9얼 27일 다리절단 사진




현장해부




페스트 피해자



소썰매로 운송되는 동상실험 대상자들




동상 발생




1938년 1월 일본군이 남경에 개설한 위안소 앞 전경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중국 운남 등충현에 있는 조선인 위안부의 시체



북조선국적 일본위안부 - 박영심,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임신을 했다.




731부대 동상반 반장 요시무라히사또
다음은 이 책에 실린 서문입니다역사를 각인하여 기억하지 않는 민족은 그 역사의 오류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역사는 과거의 기억이며 오늘에 남긴 자국을 보여주면서 반성과 성찰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과거에 한정된 사건들이 아니며 오늘과의 대화이며 다가올 혹은 다가오는 미래를 설계하는 지혜와 철학을 제공해준다.

이 책은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가장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엄연한 역사의 사실, 관동 731 세균전 부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우리가 쉽게 ‘마루타’라고 부르는 생체실험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마루타’라는 어휘의 뜻이 ‘통나무’를 의미한다는 것은 그들의 만행이 단순한 제국주의 통치와 침략의 정치적 과정이 아니라 인간성을 조직적으로 훼손한 범죄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일본제국주의를 경험한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주변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사가 각인해야 할 학살(홀로코스트)의 경험이다.

유럽사회에서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집단 수용소와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은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 이 기억은 단순 피해자만의 아픔으로 한정되어 망각되지 않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역사 모든 구성원의 성찰의 과제로 철학의 근거로 살아있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한편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다른 역사 당사자들은 이 사실을 부정하고 의도적인 망각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2차대전의 가해자인 일본에 한정된 몰역사적 상황이 아니라, 역사의 피해자인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이 인간성에 대한 중대한 말살 행위가 단순히 우리의 영토 내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와 무관한 장소와 지나간 시간의 사건으로 그 망각의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유태인 학살의 세계인의 비극으로 기억되고 인권과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에 철학의 모태로 남아 있는 것에 비하여 동일한 시간에 자행된 만행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관대함의 용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이것은 과거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왜곡하고자 하는 엄연히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가해자들에 역사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고 또한 그들에 동참하는 또 다른 범죄 행위일지도 모른다.

지난간 시간과 떨어진 공간의 한정된 범위을 넘어 현시대의 의무로 미래의 과제로 기억을 현재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역사의 기억들을 하나 하나 다시 열어보고자 한다.

자료제공= 관동군 731부대 한국인 희생자 진상규명위원회 홍윤희 팀장▽ 관련기사- 일본 731부대 관련 사진집
by 100명 2008. 5. 19. 19:08

4-50년대의 보스들! 실존인물사진

Picture by hawond
한때 동대문을 영화계를 휩쓸고 있던 이정재

형을 기다리고 있는 이정재
재판을 받고 얼마시간이 흐르지 않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Picture by hawond
권력과 손을 잡은 김두한
박정희정군과 함께
Picture by hawond
구마적
Picture by hawond
신마적 (엄동욱)
Picture by hawond
마루오카 경감
Picture by hawond
유지광
Picture by hawond
하야시 조장(오야붕)
Picture by hawond
임화수 영화계를 발전도 시켰지만 배우들에겐 악마같은
존재였다 그 당시 배우들은 안맞아 본사람이 없었다 한다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Picture by hawond
김두한과 줄곧같이 했던 2인자 김영태 지금은 85세의
나이로 미국에 살고 있다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Picture by hawond
김두한이 이끌던 우미관 식구들

by 100명 2008. 5. 19. 19:07

6.25 전쟁의 귀중한 자료...

그동안 많은 6.25에 관한 사진을 보았지만

이 자료는 처음 접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귀중한 자료입니다...

마음'에 묻어둘수는 있어도, 잊어서는 않되겠지요?...

소장 혀셨다가 후세에물려 주십시요...

가신 님들의 명복을 다시한번 빌면서...

... ...튱성~!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대전역.
ⓒ2004 NARA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2004 NARA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2004 NARA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2004 NARA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2004 NARA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2004 NARA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2004 NARA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2004 NARA

▲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2004 NARA

▲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2004 NARA


▲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2004 NARA


▲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2004 NARA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2004 NARA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2004 NARA


▲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2004 NARA


▲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2004 NARA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2004 NARA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2004 NARA


▲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2004 NARA

▲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2004 NARA


▲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2004 NARA


▲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2004 NARA


▲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2004 NARA


▲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2004 NARA


▲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
ⓒ2004 NARA


▲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2004 NARA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2004 NARA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2004 NARA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2004 NARA

▲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2004 NARA




▲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2004 NARA




▲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2004 NARA




▲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2004 NARA




▲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2004 NARA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2004 NARA




▲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2004 NARA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2004 NARA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2004 NARA



▲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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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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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2004 NARA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2004 NARA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2004 NARA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2004 NARA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2004 NARA

▲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2004 NARA

▲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2004 NARA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2004 NARA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2004 NARA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2004 NARA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2004 NARA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2004 NARA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2004 NARA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2004 NARA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2004 NARA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2004 NARA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2004 NARA

▲ 1950. 8. 25. 부산 근교의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심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2004 NARA


▲ 1950. 8. 28. 유엔군에게 잡힌 북한측 포로.
ⓒ2004 NARA


▲ 1950. 9. 27.부산, 북한 측의 포로들을 임시 포로수용소로 데려가고 있다.
ⓒ2004 NARA


▲ 1950. 9. 29. 생포된 북한 측 포로들.
ⓒ2004 NARA


▲ 1950. 10. 영동, 생포한 북한 측 유격대원들.
ⓒ2004 NARA


▲ 1950. 11. 15. 영흥, 유엔군들이 생포한 유격대원들.
ⓒ2004 NARA


▲ 1951. 1. 16, 부산, 북한 측 여자포로들.

ⓒ2004 NARA



▲ 1951. 2. 26. 포로들이 임시 수용소로 실려와서 내리고 있다.
ⓒ2004 NARA


▲ 1951. 2. 26. 부산, 근교의 임시 포로수용소 전경.
ⓒ2004 NARA


▲ 1950. 3. 9. 유엔군들이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

ⓒ2004 NARA

▲ 1950. 3. 7. 미군이 중공군 포로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다.
ⓒ2004 NARA




▲ 1951. 5. 10. 미군들이 중공군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
ⓒ2004 박도




▲ 1951. 3. 10. 투항한 중공군.
ⓒ2004 NARA




▲ 1951. 5. 7. 거제포로수용소 전경.
ⓒ2004 NARA




▲ 1951. 5. 29. 화천, 중공군 포로들.
ⓒ2004 NARA



▲ 1951. 5. 29. 13세인 중공군 소년병.
ⓒ2004 NARA




▲ 1951. 6. 26.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예배를 보고 있다.
ⓒ2004 NARA




▲ 1953. 7. 27. 유엔군 측에서 송환되는 포로들에게 알리는 지시문.
ⓒ2004 NARA




▲ 1953. 10. 11. 북한측 포로가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면서 북으로 돌아가고

있다.

ⓒ2004 NARA




▲ 1954. 2. 16. 귀환을 거부하는 북한 측 포로를 북측 대표들이 설득하고 있다.

ⓒ2004 NARA

▲ 1951. 4. 3. 강대국이 그어놓은 원한의 38선. 이 38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던가.

ⓒ2004 NARA

▲ 1951. 1. 26. 미 전투기들이 북한군 진지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2004 NARA

▲ 1951. 7. 15. 미 전투기들이 원산 상공을 날고 있다.

ⓒ2004 NARA

▲ 1951. 10. 18. 미 전투기가 북한지역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2004 NARA

▲ 1951, 2. 23. 미 수송기에서 낙하산을 이용하여 보급품을 떨어뜨리고 있다.

ⓒ2004 NARA

▲ 1951. 3. 5. 한강 북쪽 북한군 진지에 폭격을 가하고 있다.

ⓒ2004 NARA

▲ 1951. 4. 2. 미 정찰기가 적진을 살피고 있다.

ⓒ2004 NARA

▲ 1950. 7. 10. 조치원 부근. 미군 트럭이 북한군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불타고 있다.

ⓒ2004 NARA

▲ 1950. 7. 16. 금강교 폭파 장면.

ⓒ2004 NARA

▲ 1950. 7. 21. 불타고 있는 대전 시가지.

by 100명 2008. 5. 19. 19:05

옛날 사진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 (1973)

일제의 항복과 광복

1945년 8월15일 일제의 항복소식을 듣고 거리로 나온 서울시민들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1974.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청충석 뒤쪽에서 뛰어나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으나 총탄이빗나가는 바람에 육영수여사의 머리에 명중절명했다.분명한건 특종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당일신문에는 게재되지 못하고 다음날에야 실렸다고함

손기정 선수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우승 (1936.8.9)

가슴이 아팟던것은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달려있었고 이름까지도 일본식인 기테이 손이여서 피지배민족의 서러움을 삼켜야했다

우리나라 첫 과학인공위성 우리별 1호 발사.(1992.8.11.)

국적위성인 우리별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됨에 따라 한국은 세계에서 위성을 보유한 22번째

나라가 됐다.

최신 컬러 TV 시판 1980.8.2.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선서 (1948.7.24 )

이승만 박사 영결식 1965.7.27.

하와이에 망명중이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65.7.19.운명했다.

7.27일이승만박사의 영결식을 마친 운구행렬이 시청앞 광장을 지나 국립묘지로 향하고있다.

코마네치 체조경기사상 첫 10점 만점 (1976.7.18.)

국산 자동차 (코로나)생산시작 1966.5월

새나라 자동차를 밀어내고 1966.신진자동차가 도오타의 기술제휴로 처음생산한 (코로나)자동차 당시 코로나는 우리나라 도로사정에 꼭알맞다는 평을 들으며 나오자 마자 폭발적인기를 얻음

그러나 중국이 대만과 국교를 맺고있는 나라와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이른봐 주은래 4원칙 을 발표하자 중국진출에 뜻을 둔 도요타자동차가 철수 기술과 부품공급이 꾾어지면서 생산이 중단됨

이후. 코티나.(현대).뉴크라운. (신진)시보레(새한 )등이 출시되었으나 인기를 끌지 못해 76년 현대에서 출고한 최초의 국산모델 승용차인 포니에게 그인기를 넘겨주었다.

5.16. 군사혁명 (1961.5.16.)

박정희 육군소장을 주축으로 한 일단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을 쓰러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미국제2차 세계대전말기 일본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1945.8.9

미국이 히로시마에이어 나가사키투하되었던 원자폭탄으로 한순간에 7만여명의 사상자가발생했다.5천여호의 가옥이 피해를 입었으며 10만여명이 이재민이 발생..그리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됨...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복싱 세게챔피언 1966.6.25.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WBA주니어 미들급 타이틀매치 에서 이탈리아의 벤베누티 선수를 누르고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된 김기수 선수가 다음날 서울시청앞에서 퍼레이드를 벌임.

인류 최초로 달에오르다 1969년 20일

by 100명 2008. 5. 19. 19:04

내셔널지오그래픽 선정 ‘2007 화제의 사진 Top 10’

1. 지난 2월 남극 대륙에서 발견된 무게 450kg의 거대 오징어.


2. 사람 손을 물어 뜯어 잘라낸 몸 길이 5m의 나일악어.


3. 지난 4월 알래스카에서 잡힌 100여 년 된 물고기.


4. 호주 태즈메이니아주 해변에서 죽은 채 발견된 8m 오징어 .


5.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희귀 고블린 상어로 일본에서 발견.


6. 40년만에 콜롬비아에서 다시 발견된 '웃는 모습'의 부쉬새.


7. 미국 오리건주에서 발견된 쥐라기 시대 악어 화석.


8. 지난 3월 발견된 새로운 종의 표범.


9. 2500만년 동안 호박 속에 보존되어 온 나무개구리. 멕시코에서 발견.


10. 약 250여 마리만 남아있는 희귀 올빼미.

by 100명 2008. 5. 19. 16:00

최악의 여성운전자 베스트 10

by 100명 2008. 5. 19. 15:38

피로 물들인 바다- 잔인한 포경

by 100명 2008. 5. 19. 15:35

긴머리


by 100명 2008. 5. 19. 15:25

2007웃겻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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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100명 2008. 5. 19. 15:24

말이 필요 없는 '황당무계' 화제의 사진들

스파이 부문/쉿 엿들을라


★...최고의 인간이 만든 장관 부문/동그랗게…더 동그랗게


★...최고의 거리 그림 부문/무섭다…끝없는 추락


★...최고의 보디 페인팅 부문/최고 열대어 부문 아닌감?


★...공포 특별상/완전무장한 군인도 아이들의 도발은 무서워...반전 어린이의 쉬야 공격 앞엔…


★...글로벌 특별상/몰려온다…지구온난화로 견디다 못한 물고기들이 시원한 육지를 찾아서?

by 100명 2008. 5. 19. 15:18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 메기 잡히다?

조금 오래된 뉴스입니다만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2007년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 중국발 뉴스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진과 함께 대략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花都芙蓉璋水?,每年都有好??人莫明溺水死亡。到最近有?高官的子弟?朋友一起到水?游水溺死亡,才???天秘密!
竟然是一?有三米多?,?有一米多?的吃人唐蚤!宰割唐蚤后,?人的??:在其?中竟然有人的骸骨!
由于事件影?大,?地政府?影??地的旅游,下令封?消息,但却有??的人用手机?拍的到捕?的吃人?!
?在水?已??禁有人下水,?恐?有?一?同?的唐蚤?在水中!

대략적인 내용은 매년 이상하게 저수지에서 물에 빠져 죽거나 실종하는 사람이 있어왔는데 그 원인이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물 속에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 메기가 있었고, 그 메기가 이번에 잡혔다고 합니다. 3미터 크기의 어마어마한 물고기로 뱃속을 갈라보니 사람의 일부도 발견되었으며, 아직 다른 거대식인 메기가 물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


물고기 등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사진을 보고 바로 아실 듯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원글을 올린 사람도 재미삼아 이야기를 지어내서 올리지 않았나 합니다.

네, 저 물고기는 바로 물고기 가운데 가장 크다고 알려진 고래 상어입니다. 해수어인데 담수쪽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 점은 신기합니다. 대략 10m이상까지 자라는 물고기이므로 3m정도라면 아직 어린, 다 자라지 않은 상태이군요.

고래 상어가 사람을 잡아 먹을 수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플랑크톤 등을 먹고 자라는 아주 순한 녀석입니다. 사람이 입속에 들어와도 씹어먹 을 수도 없을 듯. 아주 크다면 물을 들이마시는 동안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지만 3m정도의 다자라지 않은 고래상어라면 그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마도 사진 찍은 사람이 재미있으라고 사진과 함께 '괴담'을 만들어서 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고래상어는 길을 잃고 불행히도 저수지쪽으로 들어왔다가 인간의 손에 잡혀서 해체당하여 사람들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듯.






by 100명 2008. 5. 19. 15:13

'절세왕국' 롯데 해외법인 '눈총'

사업장은 러시아·中.. 본사는 조세피난처 네덜란드·홍콩에

롯데그룹이 조세피난처 지역에 잇따라 법인을 설립해 교묘하게 절세를 누리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19일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지난 15일 롯데쇼핑은 롯데건설이 100% 출자해 네덜란드에 법인을 설립했다. 또, 올해 1월에는 호텔롯데가 100% 출자해 네덜란드에 네덜란드홀딩스 현지법인을 설립했으며, 2월에는 롯데건설이 100% 출자해 홍콩에 현지법인을 만들어 계열회사에 추가시켰다.

롯데 측의 설명은 현지법상 대표자 없이도 설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네덜란드와 홍콩은 조세피난처에 속해 세제상의 우대조치뿐 아니라 외국 환관리법, 회사법 등의 규제가 완화되고 기업경영상의 장애요인이 적어 조세피난이 가능한 지역이다.

네덜란드는 특정기업이나 사업활동에 대해 세금상의 특전을 인정하고 있으며, 홍콩은 외국에서 들여온 소득에 전혀 과세하지 않거나 극히 낮은 세율을 부과하고 있는 나라다.

특히 롯데는 러시아에 백화점, 호텔과 비즈니스 센터 등을 설립해 사업행위를 영위하고 있으면서도 러시아가 아닌 네덜란드에 법인을 설립한다는 것은 절세를 누리기 위한 교묘한 수법을 노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또, 롯데는 중국 랴오닝(遼寧) 성 선양(瀋陽)에 10억 달러(약 1조500억 원)를 투자해 쇼핑몰과 호텔, 아파트, 오피스텔, 놀이시설 등으로 이뤄진 복합단지를 개발하기 위해 중국이 아닌 조세피난처 홍콩에 법인을 설립했다.

이 경우 중국 선양에서 벌인 들인 수익금은 중국이 아닌 홍콩에 법인이 설립됐기 때문에 홍콩에서 자금을 운영, 홍콩법에 따라 소득에 대한 과세를 전혀 내지 않거나 극히 낮은 세율만을 부과해 절세를 누릴 수 있다.

절세를 꾀한 롯데의 이같은 전략은 2004년 국내에서 미등기로 인한 몇십억원의 절세효과를 누린데 이은 것이다.

롯데는 당시 부산을 제외한 11개 점포에 대해 미등기 조작이라는 편법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부산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의 부산롯데백화점과 롯데마트 등 4곳의 미등기로 인한 46억원 절세를 누려 취약한 지자체 재정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눈총을 샀다.

업계 관계자는 "전형적인 내수기업 롯데가 국민에게 환원하는 것은 미흡하면서도 이러한 절세를 취해 배만 불리는 행태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며 "개인이 아니라 전 국민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대기업인 만큼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투명 경영을 위해 많은 점이 개선돼야할 기업"이라고 말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네덜란드 법인 설립은 러시아에 백화점 외에도 호텔, 건설 등 여러 측면에서 사업을 하다보니 자회사의 계열 법인들을 운영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홀딩스가 필요했다"며 "러시아가 법적으로 까다로운 국가이기 때문에 기업들에게 혜택을 주고 법적 규제가 완화된 국가인 네덜란드에 법인을 설립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네덜란드홀딩스의 경우 러시아에 진출한 사업들의 회사들을 관리하고 감독·운용하기 위해 설립됐다"며 "중국 선양의 대단지 복합쇼핑몰 사업 추진을 위해 현재 홍콩에 법인을 설립했지만 중국에 법인을 추가로 설립하지 않는 이상 선양의 사업 수익 등의 자금 운영은 홍콩에서 운용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세피난처 3가지 분류

① 택스 파라다이 스(tax paradise) : 조세를 거의 과하지 않는 나라로 바하마, 버뮤다, 케이맨 제도 등

② 택스 셸터(tax shelter) : 외국에 서 들여온 소득에 전혀 과세하지 않거나 극히 낮은 세율을 부 과하는 나라로 홍콩, 라이베리아, 파나마 등

③ 택스 리조트 (tax resort) : 특정기업이나 사업활동에 대해 세금상의 특전 을 인정하는 나라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스위스 등
by 100명 2008. 5. 19. 12:42

"소비자 구매시 인터넷 영향력 적어"

흔히들 구매할 때 인터넷을 활용하지만 정작 구매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뜻밖에 친구나 판매원보다 적었다고 AP통신이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비영리기관인 퓨인터넷앤드아메리칸라이프프로젝트(PIALP)가 지난해 8~9월 성인 2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음반ㆍ휴대폰ㆍ주택 등을 구입할 때 인터넷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이나 휴대폰 구입자의 10%, 음반 구입자의 7%만 인터넷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고 답했을 뿐이다.
 
PIALP의 존 호리건 부장은 소비자들이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호리건 부장은 "인터넷이 소비자들의 결정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지만 쓸 데 없는 대안을 없애고 좀더 나은 결정을 하도록 도와준다"며 구매 과정에서 인터넷이 나름대로 역할을 한다고 덧붙였다.
by 100명 2008. 5. 19. 12:34
군(軍) '제2 롯데월드' 허용할 듯
서울공항 새 활주로 등 검토… "李대통령 의중 반영"

국방부와 공군이 그동안 항공기 이착륙 안전 문제를 들어 강하게 반대해온 잠실 제2롯데월드 건립을 허용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군당국은 이를 위해 성남 서울공항에 새 활주로를 건설하거나 정찰기 등 일부 항공기를 다른 기지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높이 555m(112층)의 제2롯데월드는 그동안 서울공항의 항공기 이착륙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군당국의 반대로 인해, 번번이 건립 노력이 무산됐다. 군 당국이 입장을 바꿔 다각적으로 검토를 하는 데엔 이명박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소식통은 18일 "최근 이 대통령이 서울공항 운용방식을 개선해 제2롯데월드 건립 허용을 검토해 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다각적인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그렇다고 성남 서울공항은 이전할 수 없다는 것이 군 당국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

군 당국이 유력하게 검토 중인 방안에는 제2롯데월드와 충돌 가능성이 없는 새로운 방향의 활주로를 만드는 것과, 기존 활주로를 그대로 활용하되 수송기·정찰기 등은 다른 기지로 분산 배치하고 서울공항은 헬기 위주로 운용하는 것 등이 포함돼 있다.

소식통들은 어떤 경우든 수천억대의 돈이 드는데 군에선 롯데에서 모두 부담해주길 원하고 있지만, 롯데 측은 일부만 부담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비용 확보가 문제다. 또 이 대통령의 기업친화적인 정책 때문에 안보가 뒷전에 밀리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적지 않아 논란도 일고 있다.

by 100명 2008. 5. 19. 10:45

"천재가 인재로"…미얀마 군정에 국제사회 분노 폭발

서울=뉴시스】

사이클론 피해로 수 백만명의 희생자들이 발생했지만 여전히 국제 사회의 지원을 거부하고 있는 미얀마 군사정부의 인도주의적 위기에 따른 태만과 범죄에 대해 국제사회의 비난의 목소리가 극에 달하고 있다고 AFP 통신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이날 재난이 발생한 지 2주가 지나도록 해외원조를 거부하고 있는 미얀마 군부에 "200만명의 생존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강력히 비난했으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얀마에 가한 제재를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브라운 총리는 "자연 재해가 만든 미얀마의 끔찍한 상황이 태만으로 인해 인간이 만든 대재앙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국민을 비인간적으로 처우하고 있다"고 거세게 비난했다.

부시 대통령은 성명서를 통해 미얀마 군부에 가한 제재 조치를 1년 연장할 수 있다고 발표하며 "민주개혁을 반대하고 있는 미얀마에 대한 대규모 제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이 같은 제재 조치가 미국의 사이클론 구호 활동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까지 미얀마 내 사이클론으로 인한 사망자와 실종자는 약 13만4000명(7만7738명과 실종자 5만5917명)으로 집계됐으나 군부의 늦은 대처로 인한 기아와 질병의 확산은 더 많은 사망자들을 발생시킬 전망이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이들에게 지원되고 있는 구호품은 턱 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미얀마 군부는 지난해 좌절된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이끌었던 일부 참가자들을 임시 피난처로 삼은 수도원에서 몰아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긴급 구호물자를 실은 프랑스와 미국의 해군함은 미얀마 해안에 정박한 채 군부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국제 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모든 해외 긴급 구호 노력을 신속히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등 압력 수위를 높이고 있다.

46년 간 외부세력과 단절된 채 미얀마를 철권 통치해왔던 군부세력은 재앙에 대해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며 국제 재난 전문가들의 도움을 비롯한 외국의 구호노력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 구호단체들은 미얀마 군부가 자력으로 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며 이들에게 해외 구조팀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데스몬드 투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주교는 미얀마 군부의 이 같은 태도는 "자국민들에 전쟁을 선언하고 인도주의에 대항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브라운 총리와 부시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미얀마 군부의 저항에도 원조를 강력히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 서한을 보냈다.

이 같이 국제 사회의 비난과 압력이 점점 거세지자 미얀마 군부는 17일 최대 피해지역에 일부 각국 대사들과 구호팀의 출입을 처음으로 허용했다.

크리스 케이 유엔 세계식량프로그램 미얀마 책임자는 "미얀마 군부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어디까지 접근하는 것이 허용될지 불투명해 아직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말했다.

by 100명 2008. 5. 18. 18:59

웅크린 채 두 팔 뻗은 엄마 시신 아래 '산 아기' 발견

기사입력 2008-05-18 17:55
中 매몰자 구조현장, 기적의 생환소식 잇따라

[베이징=CBS 김주명 특파원] "우리도 포기하지 않는다"

쓰촨성 대지진 발생 이후 이 말은 최대 유행어가 되고 있다. 매몰자 구조현장에는 속속 기적의 생환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매몰자가 외부 도움없이 생존할 수 있다는 황금의 72시간이 지난 뒤에도 생존자 구출 소식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수만 명의 매몰자들이 숨진 채 발견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기적의 생존 소식에 중국 대륙이 흥분하고 있다. 18일 오전 9시15분, 대지진 발생 139시간 만에 베이촨(北川)현 병원 매몰현장에서는 탕슝이라는 남성이 극적으로 구조됐다. 그는 의식이 또렷했으며 피부 일부에 외상을 입은 채 구조되었다. 그의 부인도 지난 15일 매몰된 건물더미에서 극적으로 구조됐다.

17일 낮 1시쯤에는 스팡시 뤄쉐이(洛水)진에서 104세 된 할머니가 극적으로 구조됐다고 인민일보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이 할머니는 잘 듣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해 나머지 가족들을 찾지 못한 채 병원에서 보호받고 있다.

17일 밤 9시 16분에는 쓰촨(四川)성 두장옌(都江堰)시의 한 아파트 건물 잔해 속에서 61세 할머니가 러시아 구조대에 의해 매몰 127시간 만에 구조됐다.

이 할머니는 외국인 구조대에 의해 구출된 첫번째 생존자로 기록됐다. 현재 지진 피해현장에는 한국과 일본, 러시아, 싱가포르 등 4개국 구조대 237명이 생존자 구출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밖에 원촨현 잉슈진에서는 20대 남성 장위항(蔣雨航)씨가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서 11시간의 구조작업 끝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매몰된 지 123시간 만이었다.

특히 이 날은 장씨의 어머니 롱진위(龍金玉)가 구이저우(貴州)에서 지진 소식을 듣고 아들을 찾기 위해 현장에 도착한 날이었다. 중국 언론은 어머니의 사랑이 매몰된 자식을 구조하게 만들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밖에 스팡시 잉화진과 홍바이진에서도 매몰 120여 시간 만에 매몰자가 극적으로 구조됐다.

특히 갓난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아기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숨진 어머니의 사연에 많은 중국인들은 눈물을 짓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 베이촨현 폐허 속에서 구조대는 두 팔을 땅에 짚고 무릎을 꿇은 웅크린 자세로 숨을 거둔 20대 여성을 발견했다.

구조대가 이 여성의 시신을 들어올리자 그 밑에는 태어난 지 서너 달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아기 엄마는 떨어지는 건물더미 속에서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땅에 버틴 채 죽어간 것이다. 구조대가 아기를 발견했을 때 아기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기 옆에는 엄마의 휴대전화가 놓여있었다. 휴대전화의 액정 화면에는 “사랑하는 아가, 만일 네가 살아남게 된다면 엄마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꼭 기억하렴”이라는 문자가 남아 있었다.

중국인들은 지난 1976년 24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탕산(唐山) 대지진 당시 매몰됐던 광부 5명이 360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사실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후진타오 주석도 18일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백 배의 노력을 기울여서 생존자 구조에 만전을 기하라고 주문했다.

수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지진 참사 속에서 여전히 수만 명의 구조대는 생명의 기적을 믿으며 매몰된 건물 더미를 헤치고 있다.
by 100명 2008. 5. 18. 18:57

<중국 강진>지진으로 생긴 호수 붕괴 시작 수만명 대피

쓰촨성 일대 '언색호' 18개...'2차 재앙' 초비상

(청두.베이징=연합뉴스) 권영석 정주호 홍제성 특파원 = 중국 쓰촨(四川)성을 강타한 지진으로 산이 붕괴되면서 형성된 거대한 자연호수 둑이 18일 무너지면서 주민 수만명이 긴급 대피하는 등 '2차 재앙'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이날 "17일 오후 2시 현재 사망자는 쓰촨성 2만8천389명, 간쑤(甘肅)성 364명, 산시(陝西)성 109명 등 모두 2만8천881명이며 부상자는 19만8천347명"이라고 발표했다.

현재 쓰촨성 일대 지진 피해현장에 매몰된 주민들이 1만여명을 넘어서는 것을 감안하면 이번 대지진으로 인한 최종 사망자가 중국 정부의 당초 추산 대로 5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촨(汶川)현 잉슈(映秀)진에서 주민 57명이 구조되고 베이촨(北川)현 병원건물 더미에서 139시간 만에 생존자가 구조되는 등 생존자들이 잇따라 구조되고 있어 감동을 주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국제사회로부터 밀려오는 온정의 손길에 대해 공산당과 국무원을 대표해 지진 구조활동에 이바지한 외국 정부와 국제사회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 재해지역 덮칠 최대 '뇌관'은 언색호 = 쓰촨성 대지진 피해지역에 만들어진 자연호수 '언색호(堰塞湖)'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힘든 주민들에게 설상가상의 어려움을 가중하고 있다.

중국 국토자원부와 쓰촨성 수리청은 17일 지진으로 만들어진 자연호수 언색호가 베이촨(北川)현에 8개, 칭촨(靑川)현 5개, 스팡(什방<方+阜) 등 쓰촨성 일대에 18개에 달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언색호란 화산 용암 분출이나 지진 활동 등으로 산이 붕괴면서 강의 흐름을 막아 형성되는 자연호수로 영원불변의 고정된 호수가 아니라 침식이나 용해 등으로 쉽게 무너져 홍수를 유발할 수 있다.

문제는 이번 대지진 피해지역에 연일 비가 내리면서 호수 수위가 높아지고 연일 발생하는 여진으로 연약한 둑이 갈라지고 있어 주민들이 대지진에 이어 홍수에 매몰되는 2차 재앙의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이번 지진으로 광위안(廣元)시 칭촨(靑川)현에 만들어진 최대의 언색호가 18일 새벽 5시(현지시각)께부터 자연 붕괴를 시작하면서 물줄기가 터져나가자 하류지역 주민 3만명이 긴급 대피하고 있다.

이 언색호는 둑 높이만 무려 40∼50m에 달하며 평균 수위가 15-18m 정도고 상류 지역까지의 길이가 5∼7㎞에 이르며 저장하고 있는 물의 양이 500만∼700만㎥ 정도인 초대형 자연호수다.

전문가들은 이 언색호의 수위가 3m만 더 올라가면 하류지역 40㎞까지 5m 높이의 물길이 만들어질 것이라면서 하류지역에 사는 칭촨현 주민 등 3만명의 목숨을 위협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쓰촨성 수리청은 칭촨현과 베이촨현 등에 새로 만들어진 언색호마다 2명 이상의 전문가들을 상주시킨 채 인민해방군의 협조를 받아 정밀검사를 실시하면서 24시간 감시체제에 들어갔다.

쓰촨성 지질광산국은 긴급회의를 열고 쓰촨성 일대 언색호들이 5월 말이나 6월 초에 대부분 붕괴하면서 하류지역을 매몰할 위험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언색호 상류의 물을 빼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이에 앞서 쓰촨성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베이촨현 차핑(茶坪) 마을의 저수지 댐이 17일 수위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붕괴 조짐을 보이자 수천명의 주민들이 중상자 46명을 버린 채 고지대로 대피했다.

◇ 지진 생존자들 심리장애 일으켜 = 쓰촨성 지진 피해지역 현지에 파견된 정신과 의사들은 "심리장애를 일으키는 환자 대부분은 현재 의기소침과 분노, 근심, 죄책감, 자기의심, 불면증, 악몽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베이촨현 취산(曲山)초등학교에서 선생님 도움으로 살아난 초등학교 6학년 여자어린이 류샤오화(劉小樺)양은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어 전문가들이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류 양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건물 더미 속에서 학교를 탈출, 집으로 달려갔지만 할머니와 남동생은 이미 숨져 있었고 당시 부모는 류 양을 구하기 위해 학교로 달려가다 사망했다.

중국 위생부 소속 재난 심리치료 전문가인 자오궈츄(趙國秋) 박사는 "현재 이 어린이의 정신상태는 너무나 상처가 커 사랑하는 부모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소화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건물 더미 밑에서 구조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됐지만 좁은 공간에서 장시간 압박 당했을 때 일어나는 전신 장애인 `크래시(Crash) 증후군'으로 사망하는 생존자도 생기고 있다.

류샤오화양과 같은 학교인 베이촨현 취산초등학교 4학년생인 환췐옌(范泉<水변에艶>.10)양은 대지진 현장에서 매몰 57시간 만에 구조됐지만 매몰 후유증으로 구조 10분 만에 급사하고 말았다.

환양은 지진 발생 당시 3층짜리 학교 건물이 무너지면서 시멘트 더미에 갇혔다가 지난 14일 밤 구조대에 의해 발견됐으나 이근 병원으로 옮기려할 때 아쉽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크래시 증후군이 발생하면 근육조직에서 나온 미오글로빈이 요세관(尿細管)을 막아 급성신부전이, 혈액 중 칼륨이 증가해 심장근육 이상으로 부정맥이 생기며 처치가 늦을 경우 사망할 수 있다.

◇ 한국인 유학생 5명 무사 귀환 = 쓰촨성을 강타한 대지진 당시 진앙지 원촨(汶川)현 관광에 나섰다가 고립된 한국인 유학생 5명이 18일 무사히 쓰촨성 성도인 청두(成都)에 도착했다.

백준호(25.톈진외대 4년)씨 등 한국인 유학생 5명은 17일 임시 대피장소였던 원촨(汶川)현 잉슈(映秀)진에서 도보와 뱃길을 이용해 지진발생 지역을 빠져나와 밤 9시께 청두에 도착했다.

백씨는 18일 청두 한국총영사 관저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을 대표해 지진 발생 이후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걱정해주신 부모님과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6일 2주일 일정으로 중국 일주 배낭여행을 시작한 이들 유학생은 지난 12일 지진 발생 당시 산에서 굴러 떨어진 거대한 바위로 렌터카가 뒤집어지면서 기사가 숨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들은 차에서 기어나와 2, 3㎞를 마구 달리다 우연히 만난 현지 주민들과 나흘간 피난생활을 하다가 16일 낮 12시께 잉슈진에 도착해 구조활동을 벌이던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구조됐다.

by 100명 2008. 5. 18. 1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