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같은 코엑스주차장 고객만 골탕

기사입력 2008-05-20 07:16


전시컨벤션센터이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한 서울 삼성동 코엑스(COEX). 하루 평균 14만명, 주말에는 25만명이 이곳을 다녀가는 서울 명소지만 미로 같은 주차장으로 시민을 골탕 먹이는 애물단지이기도 하다.

윤 모씨는 지난 11일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이하 코엑스 호텔)에 들른 뒤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주차안내원에게 무료 주차권을 내밀었다가 낭패를 봤다. 해당 주차장은 코엑스 전용 주차장이기에 호텔에서 발급해 준 주차권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처음부터 호텔에서 운영하는 주차장에 차를 대야 했다는 핀잔까지 들었다. 같은 지하공간이지만 코엑스와 코엑스 호텔은 운영 주체가 달라 주차장도 구분돼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직접 코엑스 4번 게이트를 따라 코엑스 호텔 주차장을 찾아가려 했으나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코엑스 전용 주차장이었다. 안내표지판을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도저히 찾기 힘든 구조였다.

주차안내원은 "10명에 1명꼴로 길을 잘못 들어오는 예가 있다"며 되돌아가는 길을 알려줬다.

1층으로 다시 올라와서 찾아간 코엑스 호텔 주차장. 이번에는 비싼 주차비에 깜짝 놀랐다. 주차비가 30분에 4500원, 10분 추가에 1500원인 것. 앞서 찾아간 코엑스 전용 주차장 주차비(30분에 2000원, 추가 15분에 1000원)보다 두 배나 비쌌다. 코엑스에 입주한 업체별로 따로 주차장을 쓰면서 주차비도 달리 받고 있는 것이다. 18만㎡(5만6000평) 규모인 코엑스에는 모두 10개 주차출입구가 있으며 이 중 5개만 코엑스 전용 주차장으로 통한다. 코엑스 호텔 두 곳, 현대백화점, 도심공항터미널, 오크우드호텔 등으로 통하는 주차출입구는 다르다.

이에 따라 주차비를 놓고 시민과 안내원 간에 크고 작은 실랑이가 발생하기도 한다. 김 모씨는 "코엑스 호텔인지 모르고 잠시 주차했다가 4500원을 내고 오면서 주차안내원과 심하게 다퉜다"며 "같은 지하인데 통로도 다르고 주차비도 천차만별인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이처럼 분쟁이 발생하다 보니 주차비를 더러 깎아 주는 예도 있다고 했다. 이곳에선 주차해 둔 차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워낙 넓은 데다 안내표지판도 복잡해 주차 장소 표지를 잘 외워 두지 않으면 헤매기 일쑤다.

코엑스 관계자는 "코엑스가 복합단지다 보니 사람들이 급한 마음에 차를 몰고오다 보면 주차하면서 헷갈리거나 주차해 둔 장소를 잊어버리기도 한다"며 "주차장 진입로에 설치된 안내표시를 잘 확인하고 주차장에서는 위치확인시스템을 활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by 100명 2008. 5. 20. 08:39

전염성 가스괴저병 확산… 구조대원 200여명 매몰

기사입력 2008-05-20 03:36
中지진 2차피해 현실화

대지진의 피해지인 중국 쓰촨(四川)성에서 지난 3일 사이에 200여명의 구조대원이 파손된 도로를 복구하다 갑자기 무너진 진흙더미에 깔려 매몰됐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쓰촨성의 교통부 간부는 "이류(泥流ㆍ진흙사태)로 구조대원들의 인명 피해가 생겼다"고 말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반관영 중국신문사도 "진앙인 원촨(汶川)과 가까운 리(理)현에서 도로를 복구하던 인민해방군 158명이 악천후와 여진으로 사상했다"고 보도했다.

구조대의 매몰과 함께 20, 21일 피해지역에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내릴 것으로 예고돼 구호에 적지 않은 차질이 예상된다.

피해지역에는 전염병이 발생해 2차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다. 신경보(新京報)는 18일 오후 6시 현재 가스괴저병 환자 58명이 쓰촨성 성도 청두(成都)의 화시(華西)병원, 쓰촨성인민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피해지역의 기온이 25~30도로 올라간 데다 다른 병원에도 비슷한 증상의 환자가 많아 전염병의 확산 가능성도 높아졌다. 가스괴저병은 법정 전염병은 아니지만 상처를 통해 전염되며 일단 감염되면 급속히 번져 사망률이 높다.

중국 정부는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19~21일을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이에 따라 19일 오전 4시 58분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조기 게양식을 거행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의 공공 건물과 각국의 중국 공관에 조기를 내걸었다.

조기 게양은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소속 미군 폭격기가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을 폭격, 공관원 3명이 숨진 이후 처음이다. 19일 오후 2시 28분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비롯해 13억 중국인이 3분 동안 묵념을 올렸다.

중국 전역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자동차, 기차, 선박도 운행을 멈추고 희생자를 추모하며 경적을 울렸다. 중국 정부는 애도기간 동안 올림픽 성화봉송을 중단했으며 상하이, 선전 증시의 주식 거래도 3분간 금지하고 공공장소의 오락활동도 전면 중단했다.
by 100명 2008. 5. 20. 08:31

전염병이어 광견병도 비상

기사입력 2008-05-20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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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전염병 비상이 걸린 중국 지진지역에 광견병 창궐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예방접종센터마다 개에 물려 주사를 맞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김승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멘양 시내에 있는 한 광견병 예방접종센터.

양쪽 팔을 개에 물린 70대 노인이 급히 들어 옵니다.

상처 부위엔 개 이빨 자국이 뚜렷합니다.

[인터뷰:구쯔이, 멘양 주민]
"먹을 것을 땅에 떨어뜨려 주으려고 하는데 개가 덮쳐들어 물었습니다."

베이촨에서 사는 50대 여인도 떠돌이 개에게 무릎을 물렸습니다.

[인터뷰:저우하오잉, 베이촨 주민]
"14일에 아이를 데리러 산길을 가는데 개가 갑자기 덮쳐들어 물었습니다."

엄지 발가락을 물린 여인이 있는가 하면 종아리를 물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허벅지를 물린 한 꼬마는 울부짖으며 예방접종센터를 찾습니다.

멘양 시 안에는 이러한 예방접종센터가 4곳 있습니다.

지진 발생 이후 7일동안 이곳을 찾는 개에 물린 환자는 무려 300명이 넘습니다.

[인터뷰:양시우화, 광견병 예방전문 의사]
"평소에는 환자가 하루에 20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40여 명 됩니다."

스팡 시의 한 예방접종센터 역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견병 예방접종을 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중국 예방당국은 지진으로 주인을 잃은 개가 크게 늘면서 광견병도 함께 급중할수 있다며 광견병 주의보를 내렸습니다.

지진 피해지역에 전염병 비상이 걸린 가운데 광견병으로 인한 피해도 우려되고 있습니다.
by 100명 2008. 5. 20. 08:30

희망 잃지 않고 구조 되기만 기다렸는데 끝내..

기사입력 2008-05-19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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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매몰자 구조현장에선 극적인 구조소식이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죽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종훈 기자입니다.

<기자>

무너진 빌딩 아래 깔려 있는 한 중국인 남성이 구조대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그의 이름은 첸지안.

발견 당시 첸 씨는 이미 심하게 다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첸지 앙 : 나는 내 가족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강하게 버틸 것입니다.]

첸 씨의 요청에 따라 그의 아내와 전화 통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첸 지앙 : 내 삶에 큰 기대는 없지만 당신과 내가 삶을 함께 화목하게 보내게만 된다면 나는 만족한다.]

전화를 끊고 몇 시간 뒤 첸 씨는 구조대에 의해 구조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숨진 상태였습니다.

지진 피해자들에 대한 구조 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 당국은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수 공식집계가 3만 2천여 명까지 늘어났다고 밝혔습니다.

[참고]

중국 대지진 현장의 생존자들에게 '크러시 신드롬(Crush Syndrome· 압궤(壓潰)증후군)' 공포가 덮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7일 보도했다.

'크러시 신드롬'은 재난 현장에서 건물 잔해 등 무거운 물체에 깔린 탓에 산소 공급이 중단돼 근육조직 세포 등이 파괴된 상태에서, 갑자기 무거운 물체가 제거됐을 때 발생한다. 파괴된 세포에서 흘러나온 칼륨이나 미오글로빈(myoglobin) 단백질 등 독성 물질이 급속히 혈액 속으로 흘러들어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다.

서울 아산병원 응급의학과 임경수 교수는 "비정상적으로 칼륨 농도가 높아진 혈액이 심장으로 유입되면 부정맥으로, 단백질의 일종인 미오글로빈이 신장에 침착되면 급성 신부전으로 숨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대체로 재난 현장 생존자 중 약 10%가 이 '크러시 신드롬'으로 목숨을 잃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WP는 전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통해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by 100명 2008. 5. 20. 08:29

언색호 붕괴 위험...주민들은 몰라

기사입력 2008-05-20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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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지진으로 인한 산사태 등으로 만들어진 자연호수인 이른바 '언색호'가 붕괴위험에 처하면서 비상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주변 지역 주민들에게 제대로 통보조차 되지 않아 자칫 대재앙이 덮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쓰촨성 펑저우에서 서봉국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리포트]

쓰촨성 청두시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펑저우시 룽먼산 계곡 관광지구!

상류지점 4km를 앞두고는 출입이 통제됩니다.

바로 위쪽에 새로 생긴 자연호수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지진으로 인해 물의 흐름이 바뀌면서 생긴 자연호수인 '언색호'는 여진이 계속되면서 붕괴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인터뷰:마셩, 펑저우 룽먼산 치안관리원]
"언색호가 무너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반이 젖었고, 계속 산사태가 있어서..."

하지만 정작 계곡 하류의 주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언색호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터뷰:룽먼산지구 주민]
"위에 자연호수가 붕괴된다는데 들은 적이 있어요?"
"전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중국 당국은 주민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따라 일부 주민은 음식이나 생필품을 구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언색호가 무너질 경우 하류지역까지 여파가 미쳐 많게는 수만 명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쓰촨성 일대에는 모두 21곳의 언색호가 생겼으며 이 가운데 8곳은 붕괴 위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지질 전문가 등을 상주지키면서 감시하고 있습니다.

중국 측이 이처럼 언색호의 붕괴에 신경을 쓰는 것은, 30년 전 당산대지진때 1차 지진의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여진 등 이른바 2차 재앙으로 더많은 사상자를 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주민들은 이러한 위험을 알지 못한채 대재앙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습니다.
by 100명 2008. 5. 20. 08:27

중국판 ‘이산가족 찾기’ 방송 시작

[중앙일보 장세정.하현옥] 지진이 가져다 준 상처와 불안감은 발생 7일째인 19일에도 계속 이어졌다. 전국적인 추모 행사가 중국 각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불안감에 잠을 못 이루는 청두(成都) 지역 주민들은 삼국시대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에 몰려가 안전을 기원하면서 잠을 청하는 현상도 벌어졌다.

◇전국이 추모 바람=베이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열린 추모 행사는 지진 발생 당시의 시각인 오후 2시28분에 맞춰 진행됐다. 모든 차량은 운행을 중단했고 사이렌에 맞춰 3분 동안 희생자를 애도하는 묵념을 올리느라 13억 중국인들이 침묵했다.

같은 시간 중국의 당·정 최고지도부가 거주하는 중난하이(中南海) 화이런탕(懷仁堂) 앞에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25명이 검은 양복을 입고 도열해 있었다. 이들은 검은 넥타이를 매고 왼쪽 가슴에는 흰색 조화를 달고 있었다. 지진 현장을 시찰했던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도 미리 상경해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중국 관영 방송인 중국중앙방송(CC-TV)은 지진 참사로 인해 생겨난 이산가족을 찾아주기 위한 방송을 시작했다. 지진 피해 소식과 구호 활동을 전하는 중간 중간에 ‘가족찾기 핫라인(尋親熱線)’이란 코너를 운영해 헤어진 가족을 서로 연결해 주고 있다.

◇‘지진 고아’ 돌보기 나서=중국 당국은 18일 잉슈(映秀)마을 출신의 고아 140명을 쓰촨성 청두시의 한 대학 캠퍼스에 수용하고 이들에게 식료품과 갈아입을 옷 등을 지급했다. 그러나 밤이면 부모를 찾으며 울부짖는 등 이들을 돌보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상태. 언론 등에서도 고아가 된 어린이들의 입양 문제가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텐트촌 된 청두=여진이 계속되면서 거리에서 밤을 지새는 청두 시민이 늘고 있다. 18일 오전 광위안(廣元)시 서쪽 80㎞ 지점에서 규모 6.1의 강진이 발생해 청두에서도 진동을 느끼자 수천 명의 시민들이 대거 길거리로 나왔다. 청두 도심의 훙싱루(紅星路) 푸싱제(普行街)에도 텐트 수십 개가 늘어섰다. 12일 대지진 이후 17일 오후 8시까지 5210차례의 여진이 발생했다.

◇문화유적 피해 본격 조사=국가문물국은 20일부터 쓰촨과 충칭(重慶)·산시(陝西)·간쑤(甘肅) 등 일대의 문화유적 피해 조사에 나선다. 쓰촨성에만 국가보호급 문물 45점과 성(省) 단위 보호문물 59점이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대지진의 피해가 집중된 두장옌(都江堰)시에서는 2200여 년 전 전국시대에 건설된 농업용 대수로 유적이 파손됐다. 제갈량의 무후사도 일부 건물의 기둥이 부러졌으며 두보초당(杜甫草堂)의 건축물 10여 채가 붕괴됐다.

◇핵 시설은 안전=쓰촨성 주변의 핵 시설은 안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의 명보(明報)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마젠(馬健) 작전부 부부장의 말을 인용해 “지진 피해지역인 몐양(綿陽)에 있는 공정물리연구원 등 핵시설이 모두 무사하다”고 보도했다. 공정물리연구원은 중국의 원자탄과 수소폭탄을 연구·개발해 온 곳으로 원자로가 설치돼 있다.

by 100명 2008. 5. 20. 08:26

세계 불꽃축제






















































































by 100명 2008. 5. 19. 20:18

추억의 아름다움에 빠져.보세요

























by 100명 2008. 5. 19. 20:16
유머엽기.그리고 상식
쥐도 치매에 걸리면...


* 담배 연기가....?


* 내 것 들여다보기


* 남자들의 두뇌 구조


* 카 - 섹스


*신안 특허 팬티


* 새로 개발된 환경보호 차


*코끼리 화장실


* 돈방석(소원 아닙니까? 한 번 앉아 보시죠)


* 고민중...(먹어야하나? 말아야하나?)


* 사랑하는 남편의 첫 제삿날


* 이런 경우에는....? (골치 아픈 삼각관계)


* 어! 나하고 틀리네...!


* 세계 문신대회 대상작


* 이놈은 틀림없이 숫놈이야!!


* 나도 신호 대기중이야!


* 야! 잘 잡아!


* 순간 포착


* 자기야~ 죽으면 안돼!


* 최신 핵무기??


* 나참~ 미치겠네!!


* 비 올때는 이렇게~


* 봄, 가을, 겨울을 한꺼번에 만나면...


* 캥거루의 요염한 포즈


* 절대 균형


* 고추 말리기와 꼬추 말리기

>

* 알 몸


* 파리의 사랑


* 죽기전에 한모금 더...
by 100명 2008. 5. 19. 20:15

60년대 서울





























































































by 100명 2008. 5. 19. 20:12
박정희 대통령의 사랑편지모음







- 춘삼월 소묘 -

벚꽂은 지고 갈매기 너울너울 거울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영수 노송은 정정 정자는 우뚝 복숭아꽂 수를 놓아 그림이고야 여기가 경포대냐 고인도 찾더라니 거리가 동해냐 여기가 경포냐 백사장 푸른 솔밭 갈매기 날으도다. 춘삼월 긴긴날에 때가는 줄 모르도다. 바람은 솔솔 호수는 잔잔 저건너 봄사장에 갈매기떼 날아가네 우리도 노를저어 누벼 볼까나
1951년 4월 25일

-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
옥과도 같이 금과도 같이 아무리 혼탁한 세속에 젖을지언정 길이 빛나고 아름다와라.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화되어 한 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하고 완성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의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서 인생코스가 되어 주오.그대 편안히 잠자는 모습을 보고 이 밤이 다 가도록 새날이 오도록 나는 그대 옆에서 그대를 보고 앉아 행복한 이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1952년 7월 2일 밤

--한송이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상가(喪家)에는 무거운 침묵속에 씨롱 씨롱 씨롱 매미 소리만이 가신 님을 그리워하는 듯 팔월의 태양아래 붉게 물들인 백일홍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듯 한 송이 흰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아내만 혼자가고 나만 홀로 남았으니 단장의 이 슬픔을 어디다 호소하리.
1974년 8월 20일

추억의 흰 목련 ―遺芳千秋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던 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겨레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 모여서 빌었다오 가신 님 막을 길 없으니 부디 부디 잘 가오 편안히 가시오 영생극락하시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겨레를 지켜주소서
1974년 8월 31일 밤

불행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고 슬픈 자에게는 희망을 주고 가난한 자에는 사랑을 베풀고구석구석 다니며 보살피더니 이제 마지막 떠나니 이들 불우한 사람들은 그 따스한 손길을 어디서 찾아 보리 그 누구에게 극락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보살펴 주오 우아하고 소담스러운 한 송이 흰 목련이 말없이 소리없이 지고 가 버리니 꽃은 져도 향기만은 남아 있도다

당신이 먼 길을 떠나던 날
청와대 뜰에 붉게 피었던 백일홍과 숲속의 요란스러운 매미소리는 주인 잃은 슬픔을 애닯아하는 듯 다소곳이 흐느끼고 메아리쳤는데 이제 벌써 당신이 가고 한달 아침 이슬에 젖은 백일홍은 아직도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매미소리는 이제 지친 듯 북악산 골짜기로 사라져가고 가을빛이 서서히 뜰에 찾아 드니 세월이 빠름을 새삼 느끼게 되노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찾아 오고 가을이 가면 또 겨울이 찾아 오겠지만 당신은 언제 또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번 가면 다시 못오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아 이것이 천정(天定)의 섭리란 말인가 아 그대여, 어느때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이거 보세요' '어디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리.
1974년 9월 4일

- 당신이 그리우면 ―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마디 없오 잘 있었느냐는 인사 한마디 없오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애 당신도 잘 있었오 홀로 얼마나 외로왔겠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이 옆에 있다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 오겠오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 올테니 그럼 안녕!
1974년 9월 30일

-우주의 저 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밤은 깊어만 가고 초생달 밤하늘에 은빛의 별 슬픔을 안겨준 국민의 벗이여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바다에 해가 저물고 산 하늘의 새 날아가도다 세월은 유사같이 행복은 사라지고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1974년 11월 1일

-저도 바닷가에 혼자 앉아서 ―
똑딱배가 팔월의 바다를 미끄러듯 소리내며 지나간다 저멀리 수평선에 휜구름이 뭉개뭉개 불현 듯 미소짓는 그의 얼굴이 저 구름속에서 완연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이가 있는 곳에는 미치지 못한다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망연이 수평선을 바라본다 수평선 위에는 또 다시 일군의 꽃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흰 치마저고리 옷고름 나부끼면서 그의 모습은 저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다 느티나무 가지에서 매미소리 요란하다 푸른 바다 위에 갈매기 몇 마리가 훨훨 저건너 섬쪽으로 날아간다 비몽(比夢)? 사몽(似夢)? 수백년 묵은 팽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소리없이 스쳐간다 흰 치마저고리 나부끼면서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 그대.
1976년 8월 5일

비오는 저도의 오후
비가 내린다 그다지도 기다리던 단비가 바람도 거칠어졌다 매미소리도 멎어지고 청개구리소리 요란하다검푸른 저 바다에는 고깃배들이 귀로를 재촉하고 갈매기들도 제집을 찾아 날아간다 객사 창가에 홀로 앉아 저멀리 섬들을 바라보며 음반을 흘러나오는 옛노래를 들으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명상속에 지난날의 그 무엇을 찾으려고 끝없이 정처없이 비오는 저바다 저하늘을언제까지나 헤매어 보았도다
―1976년 8월 6일 -
by 100명 2008. 5. 19. 20:00

잊혀져가는 5.18광주사태









by 100명 2008. 5. 19. 19:59

남대문 동대문, 빛바랜 100년전 컬러 사진
원본: 진솔한 마음의벗


지난달 23일 도깨비뉴스에서 ‘남대문과 동대문, 꿈속에서 본 듯한…’이란 제목으로 소개했던 남대문 동대문의 옛날 흑백 사진이 컬러로 복원 됐습니다.
당시 소개했던 사진들은 1800년대 후반 또는 19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서울의 옛모습을 생생하게 카메라로 담아 독자들로부터 “우리 옛 선조들의 생활상이 한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생생하고 멋진 사진이네요.” 등등의 극찬을 받았었지요.

그런데 이 사진들을 완벽하게 컬러로 복원한 사진이 또 다시 올라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sky님이 지난 3일,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 올린 이 사진들은 수많은 네티즌들의 추천으로 ‘히트 갤러리’에 올라가 있습니다.

sky님은 “흑백사진을 포토샵을 이용해 컬러로 복원시켰는데 완전히 중노동이네요. 흑백사진의 출처는 도깨비뉴스의 ‘100년전 동대문 남대문’에서 가져 습니다”라고 짧게 설명한 뒤 컬러로 복원한 사진들을 올려 았고, 이후 네티즌들의 열띤 반응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오, 칼라로 보니까 진짜 생동감이 나네요.” “세밀한 작업의 흔적이 엿보입니다. 이런게 정말 히트 게시물이 아닐까요?” “저렇게 세밀하게 색깔을 입히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등등 많은 네티즌들이 sky님의 노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는 컬러사진을 흑백사진으로 바꾸는 것은 포토샵을 이용해 한번에 쉽게 적용할 수 있지만,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바꿀 때는 일일이 색칠을 해줘야하는 것인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sky님은 건물의 단청에 까지 세밀하게 색을 입혔습니다. 꼭 100년의 빛바랜 컬러 사진을 보는 것 같습니다.










by 100명 2008. 5. 19. 19:57
어찌 잊으랴 6.25戰爭

1950.11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 40군단

1950년 12월 3일 평양, 파괴된 대동강 철교에서 피란민들이 남하하고 있다.

(1953년도 푸리쳐상 수상 작품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1950. 12. 23.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피난민들.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951. 1. 9. 강릉, 1. 4 후퇴로 눈길에 다시 피난을 떠나고 있다.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포로수용소 전경

1951. 3. 4. 한강 부근 마을에서 아이들이

박격포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1951. 4. 4. 춘천, 북한강 유역

1951. 5. 10. 미군들이 중공군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

1951. 5. 29. 13세인 중공군 소년병.

1951. 7. 6. 서울, 폐허의 잿더미 속에 시장은 열리다.

1951. 7. 11. 서울, 서울시민들이 덕수궁에서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51. 7. 27. 문산, 정전회담 유엔군 측 한국인 옵서버들

(왼쪽부터 변영태, 손원일, 김정렬, 유재홍, 백선엽)

1951. 11. 27. 판문점 정전회담장에서 북한 측 장춘산 대표와

유엔군 측 머레이 대표가 지도를 펴고

휴전선 획정을 협의하고 있다.

1952. 12. 4.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뒤에 탄 사람이 클라크 주한 유엔사령관.

1953. 7. 26.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정전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1953. 5. 8. 정전회담 북한 측 남일 대표가

회담장을 떠나고 있다.

1953. 6. 11. 부산,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1953, 7. 27休 戰 協 定

1953, 7. 27休 戰 協 定

953. 7. 29. 미 해병대 병사들이 정전협정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1954년 2월16일 판문점에서 귀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설전을 벌이고 있는 북한측 대표.

가슴에 태극기와 양 팔뚝에 멸공,애국 이라는

글씨를 새긴 반공 포로

破壞된 서울驛

승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破壞된 光化門

破壞된 서울거리

破壞된 中央廳 일대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전쟁후의 피참한 생활

전쟁후의 피참한 생활

;;;;;;;;

6.25 動亂 參戰 犧牲者

美國軍은

전사자 33,665명

비전투 희생자 3,275을 포함하여

총 36,940명의 젊은 목岵?바쳤다.

또한 103,284건의 작전에서 92,134 명의 전상자를 냈으며

총 1,789,000명의 미군이 1950.6.25일부터

1953.7.27일까지 한국전쟁에 참전 했으며

아직도 8,176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韓國軍은

전사자 415,004명을 포함하여

총 1,312,836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U.N 軍은

전사자 3.094명을 포함 총 16,532명이 희생되었다.

戰 爭 紀念 館

2005 .6 .10 興南 撤收 紀念碑 除幕 (巨濟島)

by 100명 2008. 5. 19. 19:55

북한의 생활상


by 100명 2008. 5. 19. 19:54

조선 여인들의 사진

옛 여인들의 모습



항아리 이고 가는 촌부 1900년대



이완용의 부인 (1880년대)



명성황후 1890년대



조선여인의 전통복장 1890년대



1890년대초창기의 이화학당 학생들



한국 여인1895-1901년



가족사진1900년대



결혼 예복을 입은 신부 1902-1903년



귀족 1900년대



기생을 지도하는 여인 1900년대



양반댁 여자아이



"조선 말 일제시대, 장안에 이름을 날렸던 기생 장연홍" 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새하얀 한복에 양산을 들고 있는 모습, 짙은 눈썹에 순진해 보이는 눈,
도톰한 콧날과 작은 입술로 단아한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원래 개화기 조선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에 포함됐던 것이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의 모습이 한 네티즌의 눈에 띄어 여러 커뮤니티나 블로그사이트를 통해 보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실 여인 1900



윤비(순종비)와 궁중 여인들1900년대



이화학당의 소풍행렬 1908년



일반 부녀자의 모습 1900년대



일본 장교와 두 기녀 1901



젖가슴을 드러낸 기생 1900년대



중산층 가족사진



신식결혼 1910년대



이화학당 졸업생들 1911년



그 시절엔 아들을 낳은 여인들만이 젖을 밖으로 내놓을 특권이 있었습니다. 지금 배꼽을 밖으로 내놓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참 궁굼한 것도 많지요?
by 100명 2008. 5. 19. 19:51
중공군 종군 사진기자가 찍은 것으로 추측 됩니다.




함께 일하는 옛 전쟁터에서 다시 봄날이 왔다.



짚차를 타고 도주하던 미군 병사들(차 양쪽의 손을 든 사람들)을

  사로잡은 중공군 병사들.




중국 인민지원군의 시각으로 기록한 한국전쟁 사진집이 나왔다.

<영광스런 중국 인민지원군>(중국 해방군화보사, 1959년)의
사진과 사진설명을 따서 펴낸 [그들이 본 한국전쟁](눈빛출판사)이 그것.
원저는 중국 인민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그들의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홍보를 위한 시각이 다분하지만 압록강 도하,
그들에게 잡힌 미군포로, 인해전술때 불어제낀 날라리,
폭격을 피하기 위한 물밑다리 등 우리 쪽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전쟁의 나머지 반쪽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전쟁 끝 무렵 후방에서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에
뛰어들어 활동한 사실은 이채롭다.
전투가 없는 날 중공군 병사들이 민가 아낙네의 
봄 밭갈이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북한 위문단이 지원군 시공부대에 와서 화려한 공연을 펼쳤다.



전쟁이 끝난 뒤 재건사업에 투입된 중국군 병사들이 
북한 주민들과 함께 포탄 구덩이들을 메우고 있다.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장면.



북한 주민들이 포화를 무릅쓰고

지원군을 위해 밥과 물을 나르고 있다.



1951년초 눈 덮힌 강원도 횡성지역에서

진군 나팔소리에 맞춰 돌진하는 중국군 병사들.





김일성이 직접 중공군 1차 귀국 부대를 송별하고 있다.





한 노인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갓을

지원군에게 작별 선물로 주고 있다.





1951년초 서울에 입성한 중공군과 북한군 병사들이 
중앙청 앞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열차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중공군 귀국장병들을 환송하는 

북한 주민들.



북한의 한 노인이 지원군에게 길 안내를 하고 있다.





군대와 함께 출정한 중국 민간인 수송대의 우마차 행렬이 

눈밭 속에서 전쟁물자를 실어나르고 있다.
by 100명 2008. 5. 19. 19:51

세계에서 단 한장의 고귀한 사진



재판을 받고있는 어머니에 다가가 손을 잡고있는 아이의 모습.
5.16혁명 후 모든 범죄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서너살된 어린아이가 갑자기 방청석에서 죄수들이 서있는 곳으로
아장아장 걸어가더니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 어린아이와 엄마의 모습을 본 판사는
몇몇의 법조항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그 애는 얼른 손을 놓고 방청석으로 나갔다.
그 애는 죄수의 동생이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함께 데리고 왔는데
그만 엄마를 보자 쪼르르 엄마의 손을 잡으러 나갔던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사진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정범태작가의 1961년도 작품으로
1961년 10월 아사히신문 국제사진전에 출품되어
10걸작으로 뽑혔으며, 1962년에 평범사 발행 세계 사진연감에
수록되었으며, 다시 1967년 일본 평범사 간행 세계 사진연감에
10주년 특집 전10권 중에서 36장의 작품을 선정해
"기록 그 10년"에 세계굴지의 사진가와 함께 재수록됐다.

세계에서 가장 잘된 사진 36장 가운데 정범태작가의 작품이 들었던 것이다.

by 100명 2008. 5. 19. 19:49

카메라로 바라본 1950-1960년대


김한용 사진집. 눈빛발행 180쪽(40,000원)


지난 20세기는 인류의 문명발달사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와 진보가 이뤄졌던 세기로 기록되었다. 인류가 달에 깃발을 꽂은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이고, 증기기관차에서 시속 3~4백km의 초고속 열차로 운송수단이 바뀐 것도 1세기 안에 벌어졌다. 우리에게도 20세기는 가혹할 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근대화와 현대화를 한꺼번에 이뤄야 했고 세기의 중엽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그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야 했다.



이 책은 원로사진가 김한용(金漢鏞) 선생이 촬영한 1950~1960년대의 흑백사진 110여 점을 수록한 사진집이다. 전체 5부로 구성된 이 사진집은 한국전쟁 이후 전쟁의 참화를 딛고 희망을 일구어가는사람들의 모습과 현대화의 노정에 나선 도시의 변화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세종로, 태평로, 시청앞 등과 화신백화점, 동화백화점 등이 들어선 시가지와 극장 앞에 몰려든 사람들, 서서히 활기를 찾아가는 거리에서 사진가는 시련의 연대로 기록된 1950~1960년대의 또 다른 면모를 오늘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동구권의 어느 도시를 연상하게 하는 구형 자동차와 서구식 건물들이 간간이 늘어선 서울 시가지의 모습과 골목을 메웠을 아이들의 웃음소리에서 작가는 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한국인들의 의지와 희망을 본 듯 하다. 특히 이 사진집에는 1960년대 중반의 서울 모습을 촬영한 보기 드문 항공사진 14점이 수록되어 있다. 태평로, 종묘 일대 등 서울 도심과 영등포 여의도 일대, 한강대교, 워커힐, 태릉 육군사관학교 교정 등이 당시 L-19기에 올라타 서울을 내려다본 작가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 사진집을 통해 우리에게 ‘격세지감’을 선물하고 20세기의 한 단면을 보여준 80대 고령의 작가는 오늘도 당신의 사진연구소를 지키고 있다.


김한용이 바라본 1950-1960년대

박평종(사진평론가)

한국 광고사진의 개척자이자 해방 이후 한국 사단의 산증인인 김한용의 또 다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 한데 묶여 공개된다. 1950-60년대의 모습을 기록의 관점에서 촬영한 사진이 그것이다. 일부 공개된 사진들도 더러 있지만 그의 흑백사진 작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사진세계의 중요한 한 축을 새롭게 만나는 듯하다.
사실 이 사진들은 김한용의 사진세계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기록사진이 현시점에서 지니는 중량감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사진가 스스로에게 이 사진들은 요람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가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47년 국제보도연맹에 사진기자로 입사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959년 퇴사할 때까지 13년 동안 줄곧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해방 후의 과도기와 6·25전쟁, 전후 급속히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기록해 왔던 까닭에 이 사진들은 그야말로 그의 사진관(寫眞觀)을 형성시켰던 토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앞 로터리
1. 실제로 그는 광고사진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굳히고 있으면서도 최근까지 계속해서 명동과 인사동 등 서울 시내 곳곳을 누비며 초기의 사진작업을 이어 왔다. 1950-60년대의 모습을 기록한 그의 사진은 국제보도연맹 시절에 형성된 그의 작업 역량이 견실하게 축적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들은 동시대를 풍미했던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과 몇 가지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생활주의라는 기치를 내걸었던 임응식이나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신선회의 사진가들은 시대의 궁핍한 생활상과 혼탁한 사회상의 반영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둡고 암울한 사진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리얼리즘 사진으로 선회하기 이전 오랫동안 공모전 형식의 예술사진을 통해 사진 형식을 가꾸어 왔기 때문에 대상을 극적이고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데에 익숙해 있었다. 그 결과 1950-60년대의 리얼리즘 사진에는 암울함과 극적인 모습이 혼합된 형태로 남아 있다. 사진의 형식미를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때로는 암울한 모습을 정갈한 구도와 균형잡힌 공간 구성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상황을 미화시키는 경우도 종종 엿보인다.


한편 김한용은 국제보도연맹에서 활동하기 이전까지는 화가 수업을 받았을 뿐 본격적인 사진작업을 하지 않았다. 국제보도연맹에서 활동했던 사진가들의 대부분은 일제시대에 유행했던 공모전 사진 형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국제보도연맹은 1945년 11월에 창간호를 발행했다. 본격적인 사진 화보지였던 이 잡지의 초창기에 사진을 제공했던 김정래, 현일영, 임석제나 이후 간헐적으로 사진을 제공했던 임응식, 최계복, 이해선, 정인성, 이건중 등은 모두 공모전에서 입상 경력이 많았던 사진가였다. 물론 김한용도 1948년 국제보도연맹이 주최한 향토문화사진 공모전에서 입선한 이후, 1954년에는 아사히신문사 주최의 국제사진살롱에서도 입선한 경력이 있기는 하지만 이전까지는 공모전 형식의 사진에 깊숙이 침윤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의 사진에는 집요한 형식미가 야기하기 쉬운 작위성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또한 『국제보도』는 발행 목적을‘조선 문화운동에 가장 친한 동지가 되어 씩씩하게 뻗어 나가는 새 조선의 진정한 모습을 국외에 자랑도 하고 외국의 소식을 국내에 알려주어 신문화 건설을 촉진시키는 데 있다(『국제보도』 창간호, 1945년 11월호)’고 밝히고 있어, 국내의 빈궁하고 암울한 모습보다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제보도연맹의 이러한 성격은 김한용이 사진 활동을 펼쳐나가는 데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사진들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 전쟁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이며 활기에 넘친다.




고아 부산역 앞, 사진 1952
2. 그가 기록한 서울 시가는 전쟁의 참화를 말끔히 털어 버린 모습이다. 군데군데 전쟁의 흉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도심 내부는 빠르게 정돈되어 이것이 진정 수년 전만 하더라도 잿더미로 변해 있었던 그 도시인지 의아스러울 정도이다. 도시의 뼈대가 모조리 불타고 무너졌지만 천성이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민들레처럼 강인한 한국인들은 어느새 미래의 메트로폴리탄을 건설할 반석을 다지고 있었다. 불과 50년 전에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사람들에게 서울은 사람이 살기에 부적절한 도시처럼 보였다. 다름을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알았던 현자들을 제외하면 단순한 호기심에서 접근했던 이들에게 서울에는 왕궁만 있었다. 개항 시기에 서양사람들이 촬영한 서울 시가는 왕궁의 우아함에 대비되는 더럽고 초라한 모습이거나 개발이 필요한 전근대적 모습이 대부분이다. 한편 서양문물의 번식력을 일찍 배웠지만 한국 전통문화의 깊이를 동경했던 일본인들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조선을 연구했다. 하지만 대개는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해 한국의 열등함을 보여주는 도구로써 사진을 이용했다. 서울이 서양식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변모해 왔다고는 하지만 이 변모는 일본에 의해 주도된 것이어서 서양식이라 할 수도, 그렇다고 일본식이라 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변화였다. 이 변화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서양을 닮으려 했던 19세기의 일본과는 다른 경로를 밟아 온데다가 그나마 자주적이지도 못했다. 전통을 보존하면서 서양을 배운 일본과 달리 우리는 강제적으로 전통과 단절되면서 서양을 닮아갈 수밖에 없었다. 파손과 약탈의 역사로 점철된 왕궁과 각종 문화유적은 원형조차 찾아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된 경우가 태반이다. 해방 이후 전통을 복원할 기력조차 회복하기 전에 국토를 덮쳐 버린 전쟁은 이 단절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6·25전쟁은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인명과 재화의 피해라는 측면에서도 재난이었지만 한국 역사의 특수성과 맞물려 일제시대가 강요한 전통과의 단절을 가장 극한으로까지 몰고 갔다는 점에서 더욱 큰 비극이었다. 전통의 흔적을 찾아보려면 눈을 씻고 샅샅이 훑어보고 또 훑어보아야 보일 듯 말 듯할 만큼 원래의 서울을 보기란 어렵지만 이 도시는 갑작스런 단절에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하기야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만 사실 그 단절의 폐해는 빨리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단절은 단지 당황스럽고 적응이 쉽지 않을 따름이지만 생존이 우선인 상황에서 전통이란 여유에 속한다. 그래서 잿더미 속에서 느닷없이 솟아난 새로운 도시는 경이와도 같다. 일본식 가옥과 서양식 건물이 여기저기 섞여 있고, 도심의 하늘에 복잡하게 걸려 있는 전선 밑으로 지게꾼이 지나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국제극장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은 때이른 풍요의 상징이고, 폭격 맞아 폐허가 됐던 명동에 들어선 양복점과 서양식 간판들은 빠르게 진행되는 개발의 징표이다. 기껏해야 2층 목조건물로 들어차 있던 일본식 거리에 비하면 3층, 4층으로 올라가는 양식 건물은 익숙하지는 않아도 부에 가깝다. 한 시대의 풍경에는 전형적이라 할 만한 것이 있게 마련이다. 1950-60년대는 어쩌면 한 세기 이상에 걸쳐서야 나타날 수 있는 변화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졌던 까닭에 전형적인 모습을 쉽게 단정하기란 어렵다. 굳이 규정하자면 빠른 변화라고나 해야 할텐데, 변화란 상태가 아니라 흐름이어서 전후 관계를 같이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급속한 변화 속에는 항상 사라질 것과 새롭게 나타날 것이 같이 섞여 있다. 그 시대가 그랬음을 우리는 김한용의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 빠른 변화 때문에 급속하게 재건되는 서울에는 옛것과 새것이 기묘하게 혼재된 모습이다. 서울의 관문에는 한자와 영자로 된 현수막이 함께 걸려 있고, 복잡한 전선으로 얽힌 전신주 아래로는 손수레가 지나간다. 빠르게 복구된 서울역 앞에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전찻길이 있고 바로 옆으로는 국적 불명의 수입 승용차와 자전거, 달구지가 교차하며 지난다. 우리식 홍예문이 아니라 서양식 아치형으로 건축된 독립문 위로는 전차 통행을 위한 전선이 거미줄처럼 걸려 있다. 전쟁의 상처를 복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일제가 훼손시킨 전통을 복원해낸다는 생각보다는 빠르게 서양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어느새 서양문화는 멋지고 세련된 것으로 각인되어 도시의 중심가는 이 새로운 문화가 이식되는 장소로 변해 간다. 서양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유명 백화점이 현수막을 내걸어 광고하는 고급물품은 항상 미제이다. 서양에 이끌렸던 이들에게 서양문화는 모던한 것, 요컨대 멋지고 세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모던이 매혹적인 까닭은 거기에 무슨 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새것이었기 때문이다. 새것이라고 다 매혹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주어진 것이 불만스러울 때 새것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진이 보여주듯 그 시대 서울의 모던함을 구성하는 것은 도리스 데이 주연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충무로, 샤넬미용실과 파리양장점이 있는 명동, 외제 승용차가 굴러다니는 종로 등이다. 사실 이 사진들은 색만 바랬을 뿐 현재의 서울 모습과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건물이 더 웅장해지기는 했지만 이 도시에는 여전히 그 시대 사람들이 모던함에 대해 가졌던 열망이 변형된 형태로 연장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현재의 서울 모습에 대해 반추해 보도록 하는 각성제 역할도 같이하고 있다.



부산 국제시장 부근, 1953
3. 전쟁 이후의 1950-60년대를 기록한 대개의 사진가들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그 시대의 전형처럼 다루는 것이 상례였다. 이는 현실에 대한 왜곡도 아니고, 더구나 과거 서양인이나 일본인들이 조선의 모습을 기록할 때 그러했듯 조선인의 모습을 비하시켜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공모전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형식미만을 추구해 왔던 사진가들에게 전쟁이 던져 준 충격은 상상 외로 컸다. 일제시대부터 활동해 오던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종군사진반에 소속되어 전쟁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1950-60년대의 리얼리즘 사진은 현실과 유리된 채 프레임 속의 세계에만 안주하고 있었던 오랜 사진적 관행에 대한 자기비판의 성격도 있었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쟁의 참상이 사진가들의 숨은 본능을 일깨운 측면도 있다. 국제보도연맹의 사진기자로 서북전선을 넘나들었던 김한용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는 국제보도연맹이 처음부터 지향했던 것처럼 비참한 한국의 모습보다는 참화를 이겨내고 극복해 나가는 역동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처럼 보인다. 한편 도시 곳곳을 뒤적여 가며 기록한 그의 사진 속에는 지금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 시대 생활상의 면면이 농축되어 있다. 전쟁으로 인구 변화와 이동이 급격했던 탓에 인구조사와 신원확인은 도시 정비를 위해 시급히 요구되는 과제였을 것이다. 증명사진관과 도장가게가 늘어선 부산 거리, 일자리를 찾아 한 보따리씩 짐을 이고지고 상경하는 사람들, 아직 채 충분한 주거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거리에 세간을 늘어놓고 빨래를 말리는 사람들은 전후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복개되기 전의 청계천 다리 위로는 달구지와 자전거가 지나다니고, 만화경은 어른들에게도 흥밋거리이다.


그 시대만 하더라도 군중이 모이면 백의가 태반이어서 거리는 온통 흰 점들이 오물거리고, 플라스틱 바가지가 보급되기 이전인지라 한겨울에도 여인네는 진짜 바가지를 양 어깨에 주렁주렁 매달고 팔러 다닌다. 파괴된 건물을 새로 짓는 노동자나 하역인부들의 모습이 보여주듯 재건에 필요한 것은 노동이다. 거대한 세간을 지게에 져서 나르는 사람들, 손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오르는 사람들, 고되 보이지만 희망을 주는 노동이다. 시장은 사람들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상인들로 북적거린다. 운좋게 폭격을 피해 살아남은 지역에 상권이 형성되어 가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소규모 경제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이다. 꿀꿀이죽이라도 먹어 가며 겨우 연명해 온 사람들이 조금씩 일어서 꼼지락거린 것이 폐허였던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길가 김장시장에 산처럼 쌓인 배추더미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온다. 시장에 모인 산물은 풍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모두의 삶에 활력을 준다. 아직은 입을 것이 마땅치 않아 옛날 옷가지들을 대충 주워 입어 추위만 막을 정도로 초라하지만 마음만은 즐겁다. 불가에 옹기종기 모여 시린 발을 녹이면서 담소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다. 하지만 아무리 희망에 의지하여 일하더라도 당장의 역경은 사람을 힘들게 만든다. 모두가 정상치 이상을 일해야 하지만 항상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막일을 하는 지게꾼들은 비가 올 때는 건물 처마 밑에 앉아 비를 피하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담배를 피우거나, 무작정 주저앉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는 일거리가 많은 시장통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게꾼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앞일을 걱정해야 했다. 수심 많은 어른들에 비하면 아이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가난이 무엇인지, 미래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밝다. 항상 즐거워 웃고 있는 아이들은 작가에게 미래의 희망이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놀이기구나 장난감이 없어도 아이들은 마냥 행복해 한다. 골목 빙판에서 신발만 신고 미끄러져 내려와도 좋고, 팽이를 치거나 권투를 해도 좋다. 갑자기 대문을 밀어젖혀 누나가 아파 우는데도 동생의 표정은 해맑기 그지없다. 이 순박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전쟁의 상처는 하루빨리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청계천, 종로 일대, 1966
4. 광고사진가로 일평생을 걸어온 사진가에게서 기록의 범주에 속하는 사진만을 추출하여 거론하는 것은 그의 사진의 정수를 비껴가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본격적인 광고사진가로 선회하기 전까지 이 사진들은 그의 사진세계의 전부였다. 사실 한국사진의 역사 속에서 본격적인 기록의 언어가 등장하는 것은 1940년대 후반부터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이전까지의 한국사진은 편향성을 갖고 있었다. 초기의 초상사진 시대에서부터 1930-40년대의 예술사진에 이르기까지 기록의 언어는 신문사진의 형태나 산발적으로 펼쳐지는 개인적 관심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 사진의 예술성과 씨름하던 사진가들은 사진의 예술적 형식을 탐색해 나가는 동안 기록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해방 이후, 혹은 6·25전쟁 이후 등장하는 리얼리즘 형식의 사진은 그 시대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록의 언어에 속하지만 그 중의 상당수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 형식미를 추구하는 공모전 형태의 예술사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리얼리즘을 표방한 1950년대의 사진이 한동안 상당수의 사진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시대의 조류처럼 정착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차분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우아하고 균형잡힌 구도 속에 프레임을 재구성해내려는 태도로 대상에 접근했다. 공모전 입상만이 곧 사진가로서의 등용문이던 시대에 기록의 언어는 설자리가 없었고, 기록 작업을 했던 사진가들은 인쇄 매체를 제외하면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알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1950-60년대를 기록한 김한용의 사진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 가치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진가의 주관적인 시각이 밀도 있게 스며 있는 그 시대의 사진 기록이 매우 적었다는 점에서 일관된 관점하에 촬영된 이 사진들은 그와 동시대의 사진가들이 격변기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역사의 격변기란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어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힘들어도 그만큼 쉽게 잊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격변기이고, 손쉬운 망각으로부터 그 시대를 보존하기 위한 기록의 중요성도 커진다. 중요한 격변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망각은 느리게나마 진행되는 까닭에 미래를 준비하는 민족은 역사의 보존에 아낌없이 현재를 희생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서양의 경우 본격적인 기록이란 대개 국가 주도로 시행됐던 것이 보편적이다. 사진이 발명된 지 채 3년도 지나지 않은 1841년에 프랑스 정부는 전국 각지의 문화유적을 기록하기 위해 대규모 사진반을 조직했고, 1930년대의 미국 정부는 도시 기록과 농촌 기록을 위해 각각 HABS(Historic American Buildings Survey)와 FSA(Farm Security Administration)를 조직하여 수만 점에 달하는 사진 기록을 남겼다. 우리의 경우 이처럼 체계적인 대단위의 기록이 없었던 탓에 사진가 개개인의 개별적인 사진 기록은 질이나 시각의 다양성과 상관없이 모두 소중할 수밖에 없다. 1960년대 중반에 서울시의 의뢰를 받아 촬영한 그의 항공사진은 그런 점에서 무척 의미 있는 사례가 된다. 이미 1930년대에 문치장이 동아일보 신문기자의 신분으로 항공사진을 촬영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김한용의 서울시가 사진은 기획의 방대함이나 질에서 볼 때 후대에 물려줄 만한 소중한 시각자료이다. 서울 전역을 구획별로 나누어 꼼꼼하게 촬영한 이 사진들은 각 지역의 지형지물과 주요 건물들의 배치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상세한 부감도이자 그 시대의 도시환경을 생생하게 살필 수 있는 역사자료이기도 하다. 진정한 역사자료란 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겨져 있는 자료들이라고 어느 역사가가 언급한 적이 있지만, 다음 세대에 가치 있는 기록으로서의 사진이란 그런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게는 향수일지도 모르고, 되풀이 살고 싶지 않은 시대일지도 모르지만 다음 세대에게 이 사진들은 현재보다 더욱 값진 의미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이 사진들의 진정한 가치가 거기에 있다.



작가 약력
김한용(金漢鏞, Kim Han-Yong)은 1924년 평남 성천에서 태어나 1947년 국제보도연맹 소속 보도사진가로 사진에 입문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중에는 서부전선을 종군 취재하였으며, 1952년부터는 부산일보사 소속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부산 국제시장 화재와 피란지의 여러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해 보도하였다. 1954년 일본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한 국제사진살롱에 입선하였으며, 정부 환도와 함께 서울로 상경하여 국제보도연맹을 중심으로 사진활동을 계속하였다. 1959년 한국 최초의 광고사진 스튜디오인‘김한용사진연구소’를 창설하여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그는 한국 광고사진을 개척해 온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본격적으로 광고사진에 뛰어들기 전까지 정진해 온 흑백 기록사진 또한 한국사진사의 기념비적인 작업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이사장, 대한민국사진대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광고사진가협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으로 있다. 사진집으로는 『김한용작품집』(1984), 『얼』(호영출판사, 1993) 『석굴암』(눈빛, 1999), 『김한용작품집』(눈빛, 2003) 등이 있으며, <김한용 누드작품 초대전> <회갑기념 김한용 사진전>(디자인포장센터, 1984) <산수(傘水)기념 김한용 작품전>(조선일보미술관, 2003. 3) 등의 전시회를 가졌다.


서울 대흥동, 1958


부산 동래, 1953







정범태, 서울 동대문운동장 1965
by 100명 2008. 5. 19. 19:47
순종 장례식 담은 '어장의사진첩'(御葬儀寫眞帖)'
6월 10일은 일제에 항거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77년이 되는 날.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1874∼1926)의 인산(因山·왕실의 장례)일을 맞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날을 즈음해 당시 순종의 국장(國葬)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사진첩이 조선 왕실 후손에 의해 공개돼 관심을 끈다. ‘어장의사진첩(御葬儀寫眞帖)’이라는 제목의 사진첩에는 국장의 진행 과정과 능 조성 과정, 각계 인사의 참배와 장례 행렬, 각종 부장품 등 장례의 전 과정이 소상히 담겨 있다. 순종의 장례식 과정을 담은 사진 자료로는 1926년 조선 박문사가 간행한 ‘순종국장록(純宗國葬錄)이 있으나, 부장품과 장례에 쓰인 도구 등 세세한 부분에 초점을 맞춘 이 사진첩은 행사 진행과 왕실 모습 위주로 기록한 ‘순종국장록’과는 차별된다. 또 사진이 원본으로 남아있어 인쇄된 책에 비해 상태가 좋다. 이 사진첩은 의친왕(義親王·1877∼1955·순종의 동생)의 손자인 이혜원씨(48)가 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을 통해 언론에 공개한 것. 이씨는 이 사진첩을 작고한 백부 이해일씨(의친왕의 5남)로부터 물려받아 보관하고 있었다. 황 소장은 “경기 남양주시 유릉(순종의 능) 주변 문화재보호구역 관련 조사를 하던 중 정보를 얻어 이씨로부터 자료를 입수하게 됐다”고 밝혔다. 사진첩은 가로 42cm, 세로 29cm로 표지를 포함해 21장으로 구성됐다. 사진첩에는 101장의 사진이 남아 있으며, 몇 장은 떨어져 나갔다. 사진은 대부분 가로 14cm, 세로 9.5cm 크기이다.고 훈련원(현재 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거행된 영결식장 전경을 찍은 사진 1장만 가로 24cm, 세로 18cm의 큰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주체는 알 수 없고 일본 가나 문자가 섞인 한문 설명이 붙어 있다. 사진을 살펴본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왕실의 장례 절차를 일관되게 기록한 것으로 ‘의궤(儀軌·조선시대 왕실, 국가의 행사를 정리한 기록)’에 해당할 만한 사진 자료”라고 평가했다. 조선시대 장례를 전공한 국립민속박물관 정종수 민속연구과장은 “행렬의 전체 장면을 파노라마식으로 연결한 점은 순종국장록에 비해 돋보이는 부분이며, 장례의 세부 사항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26년 4월 25일 아침 6시15분, 평소 병약했던 조선 27대 임금이었던 순종(純宗.1874~1926, 재위 1907~10)이 52세를 일기로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신문은 '5백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고 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 왕조 5백19년의 막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 왕실장례행렬에 쓰이던 죽안마
▲ 돈화문 앞을 지나는 대여
▲ 훈련원 영결식장 전경
▲ 살곶이 다리를 건너는 장례행렬
▲ 유릉에 도착한 대여
▲ 장례를 끝내고 도농리를 지나 돌아오는 장면
▲ 방상시(장례 행렬에 따르는 탈)
▲ 어장의 사진첩 표지
▲ 성복(상복으로 갈아입고 제를 올림)
▲ 창덕궁 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
▲ 창덕궁 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
▲ 창덕궁 앞 풍경
▲ 조문객들
▲ 일본칙사. 창덕궁 희정당 앞 도착
▲ 일본칙사
▲ 유릉 전경
▲ 공사중인 유릉. `능상각`이라는 원뿔 모양의 덧집을 지은 후 능을 조성했다
▲ 장례용구들
▲ 대여(왕실의 상여)
▲ 부장품(도장 등)
▲ 부장품(도장 갑)
▲ 부장품(서책, 시전, 논어 등)
▲ 부장품(서책, 주역, 증보문헌비고)
▲ 부장품(패물 등)
▲ 부장품(패옥, 시계)
▲ 부장품(문방구)
▲ 부장품(기타)
▲ 유릉
▲ 순종의 관을 내리고 있다
▲ 유릉앞에서 전(장례전에 간단한 술과 과일을 올리는 예식)
▲ 살곶이다리 앞을 지나는 장례행렬
▲ 유릉의 우제(장례후 첫 제사)상
▲ 순명황후(순종의 부인)의 대여가 합장을 위해 유릉에 도착
▲ 죽산마를 태우는 장면
▲ 발인장면
by 100명 2008. 5. 19. 19:46
가슴 아픈 대형 사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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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8일에 일어났던 마포구 창천동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은 바로
서울특별시가 주관해서 지은 아파트의갑작스러운 붕괴였고,
33명의 사망자와 39명의 부상자를 낸 불상사였다.
당시 서울특별시장으로‘불도저’ 라는 별명을 지녔던 김현옥이
전시효과를 위해 자랑삼아 지었던 아파트의 붕괴였기에
그 충격과 파장은 클수밖에 없었다.

대연각 호텔 화재(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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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중구 충무로 대연각호텔 화재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재산피해와 인명피해를 낸 화재이다.
168명이 사망하였으며 68명이 부상 재산 피해는
당시 소방서 추정으로 8억 3820만원 이었다.
1층에서 폭발한 프로판 가스통에서 시작한 불길은
21층까지 번져 서울 시내 전 소방관과 미군의 도움과
대통령전용 헬기와 육군과 공군의 헬기까지 지원받았지만
10시간이 지난후에야 겨우 불길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구조를 요청하며 뜨거운 화염과 싸우는 투숙객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도되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이리역 폭파 (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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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11월22일 전북 이리시 이리역에서
화약을 운반중인 열차가 수송원의 실수로 폭발한 사건.
59명이 사망하고 1백30여명이 중경상

KAL기 폭파(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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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하여 공중폭파된 사건.

한국승객 93명과 외국승객 2명, 그리고 승무원 20명 등 115명이 전원 사망

서해 훼리호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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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의 침몰로 292명 사망

성수대교 붕괴(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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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29일 압구정동과 성수동의 성수교를 잇는
성수대교가 무너져내리는 사고가 발생 성수대교는
1979년 개통하였으나 부실시공이 문제가 되었다
사망 32명, 부상 17명 (등교길이라 무학여고 생들 피해가 많았음)
삼풍백화점 붕괴(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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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의
한 동이 1995년 6월 29일 오후 6시경에 붕괴된 사고.

사망 501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인명피해는 8 ·15광복 이후
가장 큰 인적 재해로 기록되었으며 재산상의 손해도 매우 컸다.

지상 5층, 지하 4층, 그리고 옥상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진 삼풍백화점은
1989년 말에 완공하였으나 설계 ·시공 ·유지관리의 잘못에 기인된 참사였다.
대구지하철 가스폭발(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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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당일 사고지역 동남편 대구백화점 상인점 신축공사를 위한
그라우팅 천공작업중 100mm 도시가스관이 파손되어 유출된 가스가
하수관을 통하여 지하철공사장으로 유입,
상당시간 체류후에 원인미상의 화인으로 점화 폭발
220명의 사상자 등 600여 억원의 피해


대한항공기 추락(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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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6일 새벽 2시30분 CNN을 통해 전해진 대한항공기 747여객기괌 추락사고.
승객 2백54명중 2백29명이 사망(신원 미확인 1백2명 포함)하고 25명 이 부상했다.
대구지하철 참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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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광역시 중구 성내동 중앙로역 구내에서 50대 남자가
플라스틱통에 들어 있는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바닥에 던져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린 대형참사로,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에 일어났다.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by 100명 2008. 5. 19. 19:44

조선 시대역대 들의 진기록 (제공:진창율/청호)

1] 32년간 세자로 있었던 임금은 순종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 임금은 2세때에 세자로 책봉되어 32년간을 세자신분으로 지냈다.

2] 죽어서 왕이 된 인물은

조선조에는 죽은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 다섯명인데

* 덕종은 세조[수양대군]의 아들로서 세조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인수대비의 남편이며 슬하에는 월산대군과 성종, 명숙공주 등 3명을 두었다.

* 원종은 선조의 5남으로 1627년에 왕으로 추존됨. 인조 등 4남을 둠.

* 진종은 영조의 아들로 사도세자와 4촌. 6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진종으로 추존.

* 장조는 유명한 사도세자로서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

부인은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음. 1899년 장조로 추존됨.

* 익종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

4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19세때[순조27년]대리청정으로 참정하였으나 4년만에 죽고

뒤에 익종으로 추존됨.

3]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왕은?

세종대왕이 18명으로 가장많고, 다음이 성종 16명, 2대정종이 15명 순이다

딸은 태종[이방원]이 17명이며, 성종이 12명, 중종과 선조가 11명 이었다.

4] 왕비를 가장많이 배출한 가문은?

*청주한씨가 1위[태조비:신의왕후],[덕종비:소혜왕후],[예종비:장순왕후],[성종비:공혜왕후]

[예종비:안순왕후], [인조비:인열왕후]로 가장많고

* 파평윤씨와 여흥민씨가 4명, 청송심씨와 안동김씨가 3명이다.

5] 왕비중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비는?

*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8남2녀를 낳았다.

성종의 제9비 숙의홍씨도 7남3녀로 공동1위이다.

6] 가장 짧은기간 재위한 임금은

12대 인종이며 재임기간 9개월이었다.

7]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은

21대 영조로서 51년 7개월로서 반세기동안 왕좌를 지켰다.

8] 가장 단명한 임금은 : [단종애사의 주인공 6대 단종으로서 17세에 사약을받고 죽음]

9] 가장 장수한 임금은 : [21대 영조로서 83세까지 장수했다]

10]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임금은

3대태종과 9대성종으로서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세종대왕은 6명이었다.

각종 최장기 기록들

1] 가장 오랫동안 벼슬에 있었던 인물은 ?

조선말엽의 정원용 으로서 20세에 급제하여 마지막 영의정을 지낼 때까지 72년간을 관직

있었으며 그는 지극히 검소하여 청백리에 올라있기도 하다.

2] 호조판서를 최장기간 지냈던 인물은?

영의정 정태화의 후손인 정홍순으로 무려 11년간을 호조판서로 재임한 유일무이한 인물.

그는 재정문제에 대한 당대 제일인자의 명성을 날렸다.

3] 벼슬의 꽃인 홍문관 대제학을 최장기간 역임한 인물은?

당대의 대문장가 서거정[달성서씨]로 23년간을 재임했다.

4] 가장 여러대의 임금을 보좌한 사람은?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7대의 임금을 보좌한 김세민[경주김씨]으로

70년동안 봉직하면서 7대의 임금을 보좌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5] 조선시대 역사 인물중 가장 장수한 인물은?

여중추부사 권황[안동]과 죽림칠현의 한사람인 홍유손으로 모두 99세까지 살았다.

6] 가장 귀양살이를 오래한 사람은 누구일까?

다산 정약용으로 28세때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종교문제로 19년간 강진에 유배됨.

7] 예조판서에 최장기간 봉직한 사람은?

범옹 신숙주로 무려 15년간 예조판서에 재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뛰어난 어문학자로서 7개국어에 능통했으며 외교문서는 거의 신숙주의 손을 거쳤다.

8]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가장 오래 재임한 인물은?

유명한 재상 황희정승으로 지속적으로 18년간을 재임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는 조선 제일의 청백리 관료이자 가장 대표적인 신하이다.

조선왕조 최다수의 기록들

1] 영의정을 가장 여러번 지낸 인물은?

최석정[전주최씨]으로 서 56세에 영의정이 된후 8번을 지냈다. 그는 소론의 영수이었다.

2] 이조판서를 가장 많이 역임한 사람은?

42세에 이조판서가 된 박종덕[반남박씨]으로서 무려 18번이나 이조판서에 올랐다.

관료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관직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어야 하는만큼 그는

공평한 인사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3] 당시 수도의 총책임자인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최다 역임한 인물은?

이가우[연안이씨]로서 34세에 급제한후 열번을 한성판윤에 올랐다.

4] 판서[장관]직을 통털어 가장 많이 지낸 인물은?

박종래로서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5조판서를 돌아가며 총 15회 지냈다.

5] 사법기관의 장이었던 사헌부 수장을 최다 지냈던 인물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된 권상하[안동권씨]이며 송시열의 수제자이다.

6] 책을 가장 많이 저술한 인물은 누구일까?

지봉유설의 저자 이민구[전주이씨] 24세에 장원급제한 사람으로서 문장이 뛰어나고

저술을 좋아해서 무려 40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7] 선비의 표상이자 관리들의 자존심인 호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은?

유명한 추사체의 창시자 김정희. 그는 약 200개의 호를 지어썼다. 완당,추사,노과,등등...

8] 임금에게 벼슬을 그만두겠다고하는 사직상소를 가장많이 올린 사람은?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는 37번이나 사직상소[사직서]를 올려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 최연소 기록들

1] 조선시대 통털어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15세의 이건창으로 1866년[고종3] 강화도 별시문과에 합격했다.[김종서는 16세에 합격]

2] 최연소 장원급제자는 ?

17세의 박호[밀양박씨]는 1584년[선조17]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임진왜란때 전사]

3] 무과출신 급제자중 최연소 인물은?

17세의 남이[의령남씨]1457년[세조3] 무과에 장원급제.[유자광의 모함으로 주살됨]

4] 최연소로 세자에 책봉된 인물은?

영조의아들 사도세자는 2세에 세자책봉 되었으나 그만 뒤주속에 갖혀죽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도세자는 10세에 결혼하여 최연소 결혼기록도 가지고 있다.

5] 최연소로 영의정이 된 인물은?

세종대왕의 손자인 이준[임영대군의아들]으로서 28세때 영의정에 특서됨.

6] 병조판서를 최연소로 역임한 인물은?

권람의 사위인 남이 27세에 병조판서가 됨.

7] 홍문관의 수장인 대제학을 최연소로 역임한 인물은?

만인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벼슬의꽃 홍문관 대제학에 한음 이덕형이 31세에 올랐다

조선왕조 최초의 기록들

1]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최초로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은?

평북 의주 출신인 이성하로서 고종11년에 영국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2]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은 누구인가?

정약용의 매부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3] 조선조 최초로 정승이 된 사람은?

조선개국 일등공신 배극렴이다. 그는 이성계보다 10살이 많았는데 개국후 처음으로

좌정승[문하 좌시중]이 되었다.

4] 조선왕조 도읍지 한성의 최초 한성판윤[서울시장]이 된 사람은?

성석린이 1395년에 초대 한성판윤부사로 임명되는 기록의 보유자가 됐다.

5] 과거급제를 하지 않고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은?

황희정승의 아들 황수신이다. 그는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6] 조선시대 최초로 일본에 대하여 상세하게 저술된 책은?

신숙주가 일본방문을 한후 저술한 [해동제국기]이다. 일본내막을 상세하게 적은 책으로

최초의 일본안내서가 되었다.

7] 족보는 고려시대에 이미 등장했으나, 현존하는 족보는 조선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는데..

세종5년에 간행된 문화유씨의 영락보라고 하는데 불행이도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최초의 족보는 1476년의 안동권씨세보로 알려져 있다.

by 100명 2008. 5. 19. 19:43

한국 지폐 변천사, 1902년부터 지금까지

지난 18일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새 은행권을 단계적으로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23년 만에 지폐의 모습이 바뀌게 됐다.

박 총재는 “최근 급증하는 위조지폐 문제의 시급성을 감안해 5천원권을 가장 먼저 발행하겠다”고 밝혔다.

내년 초에 새 5천원권이 먼저 나오고 2007년 상반기에 1만원권과 1천원권이 발행될 예정이다.

새로 나올 은행권의 크기는 OECD 회원국 지폐의 평균 크기(가로 147.8mm, 세로 71.mm)와 비슷하다.

가로 길이는 148mm이고, 세로 길이는 69mm부터 권종별로 각각 6mm씩 다르다.

또 1만원권을 제외하고 1천원권과 5천원권은 밝은 색상으로 바뀐다.

미디어다음은 지폐 도안이 바뀌는 시점에서 지난해 12월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화폐금융박물관’

도록을 통해 최근 100여 년 동안 우리나라의 지폐 도안 변천사를 돌아봤다.

일본에서 발행한 우리나라의 영문 국명이 ‘Corea’로 표기된 은행권(1902년)과 영국에 의뢰한 은행권에

그려진 서구적인 세종대왕과 이이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새로 바뀔 은행권에 새겨질 인물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고 있었지만 박 총재는 “도안 인물 교체는

여론수렴 과정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한은의 판단”이라며 도안 인물을

현재의 세종대왕, 이이, 이황으로 계속 유지하겠다며 논쟁을 일축했다

일본 제일은행과 은행권

1878년 부산에 지점을 낸 일본 제일은행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화폐를 조선에 유통시킴으로써 조선에 대한 화폐

침략의 선봉 역할을 했다. 이들은 1902년에 조선정부의 허락없이 제일은행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1902년 발행된 구권(사진 좌측)에는 당시 제일은행 총재인 시부사와 에이찌의 초상이 도안으로 사용되었으나

1908년에 발행된 신권(사진 우측)에는 화홍문, 주합루, 광화문과 같은 한국적 도안이 그려졌다.

위의 지폐를 보면 우리나라의 영문 국명이 ‘Corea’로 표기되어 있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9년 7월 ’한국은행 조례’를 공표하고 그 해 10월 최초의 중앙은행인 ‘(구)한국은행’을 설립했다.

(구)한국은행권은 한일합방 이후인 1910년 12월에 발행되었다. 위에서부터 일원권, 십원권, 오원권.

한국은행은 1950년 6월 설립되었다. 6.25전쟁 당시 최초의 한국은행권인 천원권과 백원권이 발행되어 기존에 사용하던

조선은행권이랑 함께 통용되었다. 천원권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으며, 백원권에는 광화문이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위에서부터 1950년에 발행된 천원권, 백원권.

1956년에 발행된 은행권을 보면 도안의 인물(이승만 전 대통령)이 중앙에 배치돼 있다.

그러나 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중에는 대통령의 초상이 두 쪽으로 찢어지거나 반으로 접혀져 중앙이

마모되는 등 보기 흉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독재자 이승만 대통령’을 욕되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초상을 중앙에 넣어 수모를 주는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자 결국 1958년에는 초상의 위치를 오른쪽으로 바꿨다. 위에서부터 신 백환권(1954), 오백환권(1956),

신 오백환권(1958)

1962년 5월 16일 발행된 백환권 지폐에는 일반인이 모델로 사용되었다. 국민들에게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아들이 저금통장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 지폐는 발행된 지 20여일 뒤인 6월 10일 제3차 통화조치 때 새로운 화폐가 발행되면서 폐기되었다.

1962년 긴급통화조치에 의해 한국은행은 500원권, 100원권, 50원권, 10원권, 5원권 및 1원권 등 6종의

새로운 은행권을 발행했다. 모두 영국에서 제조된 이 은행권에는 남대문, 독립문, 총석정 등 문화유산과

한국은행 휘장이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위에서부터 오백원권, 백원권, 오십원권.

1972년 한국은행은 앞면에는 석굴암을 뒷면에는 불국사를 그린 만원권을 발행키로 결정했으나

종교계의 거센 반발과 여론의 부정적 흐름에 따라 발행이 취소되었다. 위 사진 은행권(시쇄품)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명이 써있다.

위의 오천원권과 만원권에 등장하는 이이와 세종대왕의 모습은 갸름한 얼굴에 큰 눈과 오뚝한 코 등 서구적인 얼굴

생김을 하고 있다. 이는 당시 국내 기술로는 은행권의 원판을 제작할 수가 없어 영국의 은행권 제조회사인

토마스 델라루에 제작을 의뢰했는데 이때 영국인의 정서를 기준으로 콧날을 높이는 등 서구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위에서부터 오천원권(1972),만원권(1973), 오백원권(1973)

1980년대 이후 현용화폐의 형태가 완성되고 고급화가 이루어졌다.1983년 발행된 5천원권과 1만원권은 규격이나

색상, 재질, 도안에 있어 현용 은행권과 차이가 거의 없다.

이후 위, 변조 방지요소를 강화화면서 1만원권을 1994년과 2000년에 5천원권을 2002년에 각각 새로 발행했다.

위에서부터 만원권(1983), 오천원권(1983), 천원권(1983), 만원권(1994), 만원권(2000)

by 100명 2008. 5. 19. 19:42
KEDO 근무 사진작가가 본
북한 당국의감시와 위협 속에서
7년간 몰래 찍은 북한의 일상생활


★ . . . 金日成 우상화 행사장을 다녀오는 속후마을 아이들 . . .

사진작가 석임생(필명 리만근)씨는

1997~2004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진실 소속으로 북한 신포 경수로 건설현장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은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고난의 행군」 시기를 포함한다.
그는 북한에서 근무하는 동안 틈틈이

북한 사람들의 일상을 사진에 담아 두었다가,

얼마 전 「30년 사진인생, 7년간 북한을 담다」(시대정신 刊)를 펴냈다

★ . . . 북청 인근 남대천 제방의 비루먹은 소.

사료 없이 풀만 먹여 소를 키워 왔던 북한사람들은

鄭周永 현대그룹회장이 보내온 살찐 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 . . 메탄가스 이앙기로 모내기를 하는 모습.

지붕 위의 비닐주머니에 담긴 메탄가스로

이앙기를 가동한다 . . .

★ . . . 송진 채취를 위해 껍질을 벗겨 낸 소나무.

★. . . 북청 인근의 민둥산 . . .

6월이었지만 산은 사막처럼 황폐했다.


★ . . . 나무를 해 오는 어린이들 . . .

★ . . . 창문과 승강구에까지 승객들을 빼곡 태운
열차가 함남 북청 인근을 달리고 있다! . . .

★ . . . 함남 양화고개 아래 서호촌 차단소(검문소)에서
잠시 앉아 쉬고 있는 어린 형제 . . .

★ . . . 열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에서는
人力으로 짐을 운반하는 도루래가 운행된다 . . .

★ . . . 油類(유류)가 부족한 북한에서는

日帝시대 말처럼 목탄車가 많이 운행된다.

★ . . . 신북청-북청 간 덕성선에서는

2003년까지 증기기차가 운행됐다.

by 100명 2008. 5. 19. 19:41

1900년경 그때 그 시절

한강 나룻터 나룻배
비옷과 삿갓
회식
칼쓴 죄인들
옛 우편엽서
부산 자갈치 시장
장군~멍군/ 구경꾼
휴대용 젖병, 보온 젖병, 작난감 젖병
1900 년초 청계천
옛 친구
평양 시장
나들이 장옷
서울 골목
흥남 철수 작전
목재 운반 소
교통법 위반자들
부산 남포동 거리
빨래하는 아낙들
마님과 규수
새참 나르는 아낙
서당 선생님과 서동
소 달구지
젖먹이들
언니 동생
죄인들을 사진 찍었나
영도다리
성문 옆길- 소달구지
옹기장사
옹기장사
옹기장사
우물가에서 물깃는 머슴들
서울시민들
가족사진
신세계 백화점 1900년 초
서울 신사들


약초캐는 아낙들











개성 인삼밭
결혼 기념 사진
고무신 장사
고종황제 조카와 두 딸
골목안 시장
만원 기차
나무장사
나무장사
널뛰기
당나귀 탄 영감님
놋그릇 장사
당나귀
양반님 행차
한강 나룻
돼지 장사
찰○/ ○메치는 남정
마차
명성왕후?
by 100명 2008. 5. 19. 19:39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 30 편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원문을 따랐음.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시리즈로 #1 에서 #30까지 연재로 작성한것을 한 화면에 올렸습니다. 특히 6.25를 겪은 6학년세대들에게는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함 그대로입니다.이 자료는 "Oh My News" 에 박도(Park Do)기자가 올린글 소개입니다.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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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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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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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12. 북한군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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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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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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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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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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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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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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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7. 29. 야간 전투 후 주간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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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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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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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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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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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2. 금강철교


▲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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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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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 미국국립문서보관기록소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 박도





▲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
ⓒ 박도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박도
▲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 박도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 박도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
ⓒ 박도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 박도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 박도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
ⓒ 박도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 박도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
ⓒ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by 100명 2008. 5. 19. 19:36
화폐속의 인물


돈을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
지폐 속 주인공은 누구?
당신이 프랑스에 가서 구스타프 에펠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호주에 가서 넬리 멜바를 모른다고 말한다면
한국에서 세종대왕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돈을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_ 지폐 속에 새겨진 각국의 영웅들.


유로화 속 그림은 무슨 뜻?
유로화는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페인, 핀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그리스 등 유럽 연합에 가입돼 있는 12개국에서 사용한다. 유로화의 각 권종 앞면에는 문과 창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유럽의 열린 마음’을 의미한다. 5유로에는 그리스, 로마 건축 양식의 창문, 50유로에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문, 1백 유로에는 바로크 건축 양식의 문, 2백 유로에는 철과 유리 건축 양식의 문, 5백 유로에는 포스트 모던한 20세기 건축 양식의 문이 그려져 있다. 유로화 전 권종의 뒷면에는 다리와 유럽 지도가 있다.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인과의 ‘의사 소통 또는 관계’를 의미한다.

France_유로화를 사용하기 전까지 프랑스는 정치인을 지폐에 넣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건축가, 음악가 등의 예술가를 지폐에 소개했다.

■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


■ 에펠탑을 세운 건축가 구스타프 에펠.


Sweden_스웨덴은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 유럽 국가 중 하나. 지폐에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작가, 음악가, 과학자 등의 인물 초상이 새겨져 있다.

■ 식물분류학자 칼 폰 린네. 그녀 덕분에 이 세상 모든 식물들이 분류되고 이름이 붙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셀마 라겔뢰프.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닐스의 이상한 여행>의 작가.


England_영국의 모든 지폐 앞면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이, 뒷면에는 영국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 증기 기관차를 발명한 스티븐슨.


Italy_유로화를 쓰기 전까지 이탈리아의 지폐 앞면에는 인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장들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을 그린 화가 카라바조.


■ 의학자이자 교육학자인 마리아 몬테소리


Australia_호주의 지폐는 ‘남녀 평등의 원칙’을 충실히 따른다. 앞면에 여성의 인물 초상이 있으면 뒷면에는 남성을, 앞면에 남성 인물 초상이 있으면 뒷면에는 여성을 넣는다.

■ 앤드루 패터슨.‘춤추는 마틸다’를 작사한 시인이자 언론인.


■ 소프라노 가수 넬리 멜바. 안정된 맑은 음색의 미성과 폭넓은 음역, 정확한 가창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Norway_노르웨이의 지폐에는 자연학, 음악, 민속학, 건축, 문학 분야에서 유명한 인물들과 탐험가 등이 등장한다.

■ 소설가 운세트. ‘라브란스가(家)의 딸 크리스틴’ 등을 발표했으며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 표현파의 선구자 화가 뭉크.


Switzerland_스위스의 모든 지폐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특이하게도 도안 구성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돼 있다.

■ 20세기 건축계의 거장 르코르뷔지에. 그는 한국 근대 건축의 거목인 김중업의 스승이기도 하다.


Belgium_유로화 이전에 사용된 벨기에 화폐에는 20세기 문화 예술을 빛낸 벨기에 예술가들이 소개되어 있다.

■ 초현실주의의 대가 르네 마그리트.


China_중국 지폐는 모두 7권종으로 종류가 많은 편인데 거의 모든 지폐에 마오쩌둥의 인물 초상이 들어가 있다.

■ 공산 중국 건설한 전 국가주석 마오쩌둥.


Mexico_멕시코 지폐 앞면에는 멕시코의 독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 멕시코 국민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했던 베니토 후아레스 전 대통령.


■ 농민군 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파타.


America_미국 달러화 앞면에 들어간 인물 초상은 대통령, 장관 등 정치계 인물이 대부분.

■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India_인도 지폐에는 금액이 15개 언어로 표시돼 있다. 민족 화합을 위해 소수민족의 언어를 모두 표기하고 있는 것. 인도의 모든 도안에는 금세기 마지막 성자로 불리는 간디의 인물 초상이 들어가 있다.

■ 인도 독립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Japan_2004년 일본 조폐당국은 지폐의 인물 도안을 20년 만에 바꿨다. 1천 엔 권의 인물 초상은 일본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로, 5천 엔 권은 메이지 시대의 여성 소설가 하구치 이치요로 교체됐다. 그러나 1만 엔 권을 장식하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의 대명사 후쿠자와 유키치는 교체되지 않았다.

■ 계몽가이자 교육가, 게이오 대학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


Germany_유로화가 통용되기 전까지 독일 지폐 속에는 작가, 화가, 건축가, 철학자 등 문화 예술인과 학자들의 인물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 면역 효과를 입증한 의학자 에를리히.


■ 건축가 노이만.


■ 수학자 가우스.


Austria_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한때 유럽의 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화폐 단위는 실링. 지금은 유로화를 쓰고 있다.

■ 혈액형을 발견한 면역병리학자 란트슈타이너.


■ 고전음악을 완성한 모차르트.


New Zealand_뉴질랜드 지폐에는 탐험가, 사회운동가, 과학자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 원주민들의 교육 기회 확대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헌신한 사회운동가 아피라나 응가타.
by 100명 2008. 5. 19. 19:32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윗쪽의 긴 방파제로 육지와 연결되어있고,
오른 쪽 아래의 방파제는 소월미도로 연결되는 길입니다.

1950년 9월 14일 밤 2시
칠흑같은 어두움을 뚫고 19척의 선발함대가 종대로 줄을지어
팔미도의 등불을 신호삼아 인천 앞바다로 진입해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의 서막이 올려지는 순간이지요.


1950년9월 15일, 새벽 5시 정각.
공격개시명령을 받은함포의 포문이 열리고 코르세어 함재기들이
월미도를 향하여 날아가 격렬한 포격을 개시합니다.
그리고 해병대 병사들은 상륙용 주정으로 옮겨타기 시작하였
습니다.



새벽 6시 27분,
미 해병 제 1사단 5연대 3대대 병력이 17척의 상륙용주정에
분승하고 9대의 탱크를 실은 3대의 대형 상륙주정도 함께
월미도 해안(그린 비치)을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아래의 "코주부"장군이 작성한 작전도를 보아 주십시요.
"월미도"는 인천항을 외곽에서 둘러싸고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있는
섬으로서 육지와는 방파제로 연결되어있고, "소월미도"와도
작은 방파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의 제 1파는 바로 월미도...지금의 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어
있는 해변에 상륙하였는데 이 위치의 작전명은 "그린비치" 였습니다.


북한군이 쏘아대는 기관총 사격을 받으며 해안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1개 소대를 기관총이 날아오는 "소월미도"로 진격케하고 일부는
산 정상을 향하여 공격해 올라가며,다른 일부가 섬을 좌로 돌아서
인천시내와 연결된 방파제 입구까지 전진하여 인천 방향에서
몰려올지 모르는 북한군에 대한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이 방파제가 바로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도로이며 멀리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지금의 '대한제분'이 있는 위치로서 작전명"래드비치"...
금일 저녁의 상륙목표인 것입니다.


3대대의 주력은 바로 월미산 정상을 향하여 공격해 올라가서 섬에서
동굴을 파고 저항하던 북한군 병력을 섬멸합니다.
이 섬에는 약 400명의 북한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108명은
사살되고, 136명이 포로, 나머지 병력중 100여명은 동굴에서
저항하다가 매몰되어 사라졌습니다
.

미 해병이 월미도에 대한 소탕을 완료한 시간이 대략 오전 8시,
이제 그 유명한 인천의 간조로 인하여 바닷물이 멀리까지 빠져나가
저녁 때 물이 다시 들어올 때 까지 바다로부터의 지원은 없으므로
인천으로부터 북한군이 몰려오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진지를 구축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월미도에서 사살당한 북한군 시체들

오후 4시 45분 만조가 시작됨.
만조가 시작되자 미 해병대의 제 2파가 상륙을 개시하여
미 해병 제 5연대는 17시 33분에 북쪽해안(래드비치)..지금의
대한제분공장자리...에 상륙을 개시하고,
미 해병 제 1연대는 17시 32분에 인천항 남쪽 송도해안(불루비치)에
상륙을 감행합니다.



다시 작전도와 같이 미 해병 5연대의 1,2 대대와 자랑스러운
우리 해병 제 1해병연대 제3대대의 병력은 북쪽의 "래드비치"로
상륙했으며, 미 해병 1연대는 인천의 남측 송도 방향의 "불루비치"로
상륙을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한 눈으로 보여주는 항공 사진으로 보시지요.



9월 15일 저녁 5시 30분에 "래드비치"와 "불루비치"로 달려가는 상륙용
주정의 모습이 한눈에 보입니다.
월미도의 상황은 이미 끝나서 "래드비치"로 이어지는 방파제를 따라서
탱크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이며 '자유공원"을 폭격하는 미 해군의
코르세어 공격기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천에 침투해 있던 국군의 첩보조직은 자유공원에 4개소의 방공포대가
구축되어있음을 알려주었었죠.
당시의 인천의 외항과 내항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이는데 인천항은
교두보가 확보되면 대량으로 물량이 하역될 "옐로우 비치" 였습니다.



"래드 비치"로 달려가는 미 해병대...."래드 비치"는 방파제로
둘러쌓여 있으므로 이 사다리는 방파제를 올라가기 위하여 방파제의
높이에 맞추어 제주도에서 미리 준비해 온 것입니다.


과연! 사다리를 이용하여 방파제를 올라가고 있는 미 해병과 한국 해병대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이 때 인천 역 방향에서 기관총 사격이 날아오며
저항이 있었으나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서울 방향에서 달려오던 북한군 병력은 미군기의 워낙 거센 폭격에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상륙성공후 월미도에 접안하여 물자를 하역중인 LST 함들.





다음 날 아침 .."래드 비치"로 상륙한 한국 해병대 3대대 와
"블루 비치" 방향으로 상륙한 해병대 1대대의 병사들은 미
해병대의 병사들과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에 나서게 됩니다.

























생포된 북한군 포로들이 방파제에 모여있다.



9월 16일, 인천이 완전히 아군의 수중에 들어오자 인천항
(옐로우 비치)을 통하여 미 육군 제 7사단의 병력과 한국군
제 17연대의 병력이 상륙하여 서울로 공격할 준비를 갖춤
으로서 역사에 남는 인천상륙작전은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인천 시내에서의 북한군 포로색출








상륙작전의 성공 후 인천항(옐로우 비치)에 상륙한 맥아더 장군과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월미도 갯뻘에 상륙정들이 자리잡은 모습




9월 15일 오후, 월미도 상륙 후 해병대의 모습.
황폐해진 섬의 모습에서 격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노획된 북한군의 군수품을 태우는 미군




2차대전부터 베트남전까지 사용된 화염방사기
현대전에서는 무용지물인 무기이다.



인천 탈환 후 성공적인 상륙작전을 축하하는 맥아더 장군


인천을 탈환 한 후 아래로 내려간 7사단과 북진하는 유엔군이 오산에서 합류, 고립된 북한군은 산맥을 타고 북으로 도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천을 통해 안전하게 유엔군은 26일 서울로 입성, 28일 수복합니다.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의 부상자 수송(영등포 지역)





저격수에게 당한 병사





이국에서 죽어가야 했던 병사





1)충무공 높은 기상 이어 받들어 젊은화랑 맥박이 가슴에 뛴다 정의와 자유를 길이 지키려 해병은 굳세게 싸우고 있다 아~상륙전 진격의 싸움 삼군의 앞장서서 해병은 간다
2)날아라 전폭기야 울어라 함포 모함을 떠나면 배수진이다 빗발치는 탄막을 뚫고 헤치며 성난 바다 험산인들 두려 울소냐 아~상륙전 필승의 싸움 삼군의 앞장서서 해병은 간다
3)장하다 강한 신념 노도를 차고 불바다 헤쳐 나간 인천 상 륙전 중앙청 하늘 높이 올린 태극기 동포는 감격 속에 만 세불렀다 아~상륙전 정의의 싸움 삼군의 앞장서서 해병은 간다


(상륙작전의 노래)

첨부이미지

by 100명 2008. 5. 19. 19:31

다시볼수 없는 남대문

화재 5시간 전 숭례문! 애도를 표하며 무궁화를 받칩니다!




사진은 화재 발생 당일 오후 3시경 숭례문 모습.

(최영태 기자)










위의 사진은 화재 이전의 평화로운 남대문의 모습 사진이고 아래 사진은 금번의 화재로 인하여 불타고 있는 모습의 남대문 사진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by 100명 2008. 5. 19. 19:29
조선시대 최고의 그림




    [ 기방무사 (妓房無事) (1805) ]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 듯 하죠?
    아마도 방 안의 여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종과 사랑을 나누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 사내는 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린 듯 하구요.
    혜원의 춘화 중에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있답니다.


      [ 단오풍정(端午風情) (1805)]
      신윤복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죠.
      단오날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놀던 조선 시대
      여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놀이의 이유는 악귀를 물리치고자 하는
      액땜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
      소년들은 절간의 젊은 스님들 같은 데요,
      그 모습이 익살스럽습니다.

        [ 무녀신무(巫女神舞) (1805)]
        일반 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무당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빌고 있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혜원은 이렇게 흥미롭고 이색적인 생활의
        풍경을 화폭에 담길 즐겨하였지요.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기녀, 무녀 들입니다.
        여기서도 기녀의 붉은 의상은
        우리의 시선을 기녀에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 쌍검대무(雙劍對舞) (1805)]
          한 가운데서 긴 칼을 들고 춤을 추는 무녀를 중심으로
          악단과 양반, 기녀들이 둘러 앉아 있습니다.
          주변의 푸른 빛들과는 대조적으로
          무녀의 치마는 붉은 색이네요.
          덕분에 시선이 무녀들에게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역동적으로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보니 얼마나
          현란하게 춤을 추는 지 알 것 같아요.

            [ 연당의 여인 (1805)]
            평론가들에게 신윤복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연꽃이 활짝 핀 연못 을 바라보며 여인의 모습을
            시원하면서도 운치있게 그려내었습니다.
            생황을 불려는 듯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담뱃대를 든 채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이 여인은
            은퇴한 기생인 퇴기인 듯 합니다.
            순간의 모습을 잘 포착하여 깔끔하게 화면에 담아낸
            혜원의 솜씨가 놀랍습니다.


              [ 월야밀회(月夜密會) (1805)]
              달빛만 고요한 한 밤중에 인적 드문 길의 후미진 담장
              밑에서 한상의 남녀가 깊은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남자는 차림새로 보아 관청의 무관인 듯 하고,
              그 남자의 여인은 기생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만남을 한 켠에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이들의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인 듯 하구요.
              담장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화가의 시선이 재미있습니다.

                [ 월하정인(月下情人) (1805)]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양반인 듯 잘 차려 입은 남자가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네요.
                여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구요.
                배경은 간략히 묘사되어 있지만 대신 이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미루어 짐작되는 그네들의 감정은
                온 화폭이 모자라는 듯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왼쪽 담에는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라고 씌여 있습니다.

                  [ 주사거배(酒肆擧盃) (1805)]
                  주막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객들과
                  주모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그러나 여느 주막과는 다르게 주변의 기와집과
                  마당 안의 매화도 보이는 것이 양반들을 상대하기에도 손색없는
                  꽤 반듯한 집 같아 보입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도 선비와 양반들인 듯 하구요.
                  매우 일상적인 조선시대의 한 생활상입니다.

                    [ 주유청강(舟遊淸江) (1805)]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 선비들을 한량이라고 하죠.
                    그 한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나왔습니다.
                    조선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화면 위쪽에는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 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 청금상련(聽琴賞蓮) (1805) ]
                      연못가에서 세 남자가 기생을 데리고
                      유희를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옛 선비들은 기생들과 즐기는 놀이도
                      양반들이 지녀야 할 풍류로 생각하였기에,
                      당당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기녀들의 옷맵시나 선비들의 옷매무새,
                      가야금, 우아한 정원의 나무들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by 100명 2008. 5. 19. 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