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0>스콧 니어링 자서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질문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삶의 수단이나 목표가 비열하고 저급하다면, 그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으며 자존심을 유지할 수도 없다.》

지금 이 순간 근심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이 그 근심이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의 벗과 이웃들의 것이기도 하다면, 그러나 그 모든 근심을 뒤로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쯤 읽어야 할 책이 여기에 있다. 바로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삶을 실천했던 사람, 스콧 니어링. 그는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과 기호에 맞춰 살지 말고 자기 개성에 따라 살 것을 역설했고 그 역시 자신의 신념과 소신에 따라 단순하게, 치열하게, 저항하며 한 세기를 살았다. 자본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며 인간을 괴롭히는 권력으로부터, 그러한 사회가 조장하는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수반되는 조급함과 분주함으로부터,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좁은 지역으로 몰려드는 데서 생기는 복잡함과 혼란으로부터. 그것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나라에서 태어나 가장 비자본주의적으로 살았던 보기 드문 삶의 모습이었다.

자서전에서 잘 드러나듯 니어링의 삶에 대한 원칙은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지속적인 안락’보다 더욱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없으니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은 줄어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삶이란 일상적 긴장과 지혜로운 해결의 연속선이지 한참 고생하여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놓고 그 다음부터 안락하게 영위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가진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임을 늘 기억하며 살아갔던 그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 세계적 규모로 계획된 파괴와 살상이 서구 문명이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라면 서구 문명은 조금이라도 빨리 세계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서슴없이 말했던 니어링. 그는 아내 헬렌 니어링과의 시골 생활이 “이 폭력적인 미친 세상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제 정신을 갖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삶의 한 본보기”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그를 통해 스스로도 발견치 못했던 자신의 욕망마저 끄집어내고 만들어내는 도시의 달콤한 것들에 대하여 의심하였고, 그 속에서 무엇이 대안인지 고민하였으며, 나아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의 필요만을 취하기 위해 철저한 자급자족의 삶을 꾸려나갔고, ‘부의 덫’이 사회를 짓누르지 않는 공정한 분배의 공동체가 되기를 계획하고 실천한 사회주의자였으며, 하루 4시간 노동과 4시간 글쓰기와 4시간 친교활동을 지키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니어링. 그는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함으로써 진정한 웰빙은 철저한 웰두잉(well-doing)이 선행되어야 함을 몸으로 가르쳐 준 인물이었다.

허혜란 소설가·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by 100명 2007. 4. 13. 23:44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9>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 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낙오자의 만남… 이별… 그리고 용기

가수 신해철은 서태지의 음악에 대해 주류의 대열에서 뛰쳐나온 ‘낙오자’ 정서를 담고 있고, 자신의 음악은 주류를 비판하면서도 그 속에 머물러 있는 ‘비겁자’ 정서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에릭 호퍼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문득 서태지식 ‘낙오자’라는 규정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 책은 미국의 떠돌이 철학자 에릭 호퍼(1902∼1983)의 ‘트루스 이매진드(Truth Imagined)’를 완역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1941년 부두 노동자로 ‘정착’하기까지의 반생을 몇 가지 에피소드 중심으로 정리해 놓았기에 ‘자서전’으로 이름 붙이더라도 손색이 없다.

에릭 호퍼는 가난과 실명(글자를 익힌 뒤인 8세 때 실명하였으나 15세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했다고 한다) 등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행상과 떠돌이, 웨이터, 부두 노동자 등을 전전하면서 독학으로 철학 체계를 구축한 사상가다. 부두 노동자로 정착한 뒤 1951년 첫 저서 ‘맹신자들’을 비롯해 10여 권의 사회철학 저술을 남겼으며 81세로 사망하기 전해인 1982년 생애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돋보이는 점은 하층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처지에 대해 자기과장이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낙관주의적 허세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그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자서전의 내용은 대부분 저자가 떠돌아다니면서 마주친 수많은 인간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교수직 대신 고물상이 된 유대인 샤피로를 비롯해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대학생 헬렌, 유능한 일꾼 앤슬리, 저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유산을 사회에 환원한 농장주 쿤제 등 수많은 인물과의 만남과 이별이 저자의 경험을 살찌우고 있다. 저자로 하여금 단순한 떠돌이 노동자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고 독특한 사회철학자로 성장시킨 것은 독서열(떠돌이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저자는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과 아울러 떠돌아다니면서 만난 동시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었다.

물론 타인들의 삶에 대한 묘사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대부분 저자의 투철한 관찰력과 결합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으로 승화된다. 인상적인 대목은 저자가 자살 충동을 극복하고 방랑자로 살기로 결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센트로 임시수용소에서 겪은 경험이다.

공장과 감옥의 결합체와도 같은 그곳에 모인 수용자 200여 명이 대부분 ‘적응 불능자’임을 발견한 뒤, 저자는 이 적응 불능자야말로 새로운 개척자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제자리에 안주하는 게 보통이지만 약자에게 내재하는 자기혐오가 훨씬 더 강한 에너지를 부여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결별하고 자연을 넘어서게 하는 일탈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류에서 낙오해 ‘다르게’ 사는 삶이 서태지와 같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는 용기야말로 이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신승엽 문학평론가


by 100명 2007. 4. 13. 23:44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2>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 위대한 말을 남긴 미국의 흑인 해방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그는 1929년 애틀랜타의 중산층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스턴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집안 좋은 여자 성악가와 만나 결혼을 하고, 몽고메리의 덱스터 교회 목사가 된 그는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없애기 위해 험난한 삶을 택했다.

그 시절에 흑인들은 버스에서 백인과 함께 앉을 수 없었고, 운전자들은 흑인들을 검둥이, 검은 원숭이, 검은 젖소라 부르며 멸시했다. 또 흑인은 똑같은 돈을 내고도 백인처럼 식당의 카운터에 앉아서 먹을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던 중, 1955년 12월 1일 몽고메리에서 로사 파크스라는 흑인 여인이 버스 안에 앉아 있다가 흑백분리법을 위반한 죄로 체포된다. 이를 계기로 흑인들의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고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서”라며 동참한 흑인들은 작은 승리를 쟁취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 루서 킹은 그때부터 흑인의 인권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64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또한 흑인의 투표권 쟁취, 베트남전 반전 운동, 빈민운동 등을 벌이다가 1968년 4월 4일, 멤피스의 한 호텔에서 암살당한다.

이 자서전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서 현장의 구체적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마틴 루서 킹의 사상과 고뇌도 잘 보여 준다. 그의 중심에는 예수의 사랑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정신이 있었다. 이런 태도는 양심적인 백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미국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흑백 차별은 견고했다. 백인들은 집요하게 그를 방해했고 과격한 흑인들은 그를 온건 타협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생전에 마틴 루서 킹이 남긴 글을 편집한 이 자서전은 한 개인의 일생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과 미래를 생각하게 해 주는 소중한 책이다. 버스에서 같이 앉을 수 있는 권리, 투표권 등 당연해 보이는 기본권이 흑인들에게 제한된 나라가 민주주의 대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의 40년 전 상황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의 미국은?’이라는 의문이 남는다.

개인적으로 여행 중에 인종차별적인 시선 속에서 설움을 느껴 보았고, 모스크바에서 내 얼굴이 노랗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두르던 스킨헤드들과 싸웠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분노에 떨기도 하고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이 책은 40년 전 미국의 얘기를 넘어서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미 우리 땅에도 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과 혼혈인이 많아졌다. 우리와 함께 살아갈 이 생명들에 대해 우리는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이 책을 읽고 나면 ‘인종 차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악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된다.

이지상 여행칼럼니스트

by 100명 2007. 4. 13. 23:43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1>만화가의 길



‘아톰’이 나오기까지

《만화를 그리는 것도 죄가 되던 시절, 나는 애써 그린 만화를 들키지 않고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매일 아침 화장실 안쪽 벽에 그림을 바꿔 붙였다.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정확한 위치에 말이다.》

일본의 효고 현 다카라즈카에는 전철회사 한큐가 경영하는 곤충관이 있다. 곤충관 진열실의 오사무시(딱정벌레) 표본 책장에는 견학 온 학생들이 해 놓은 낙서가 있는데 거기에는 ‘데즈카’라고 적혀 있었다. 데즈카는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를 말하고, 벌레라는 뜻의 무시는 데즈카의 필명이었다. 일본에서 만화의 신으로 추앙받는 데즈카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데즈카는 무시라는 필명을 지은 배경을 설명하면서 밤만 되면 이상하게 활기가 넘쳐서 네온 불빛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오사무시가 만화가와 정말 비슷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꿈이라는 불빛을 찾아 날아갔던 만화가 데즈카. 그의 자서전 ‘만화가의 길’은 만화를 벗 삼아 열정적이며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던 데즈카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그가 1989년 2월 9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추억이나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만화가다운 필체로 풀어낸다.

데즈카는 192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오사카대 의학부 2학년 시절 ‘마이니치소학생신문’에 네 컷짜리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가로 데뷔했다.

그는 만화를 통해 당시 전쟁의 폐허 속에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어 했다. 그는 “재미없는 만화는 만화가 아니다.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 웃음이 되는 것. 이것이 만화가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음악, 발레, 무대, 영화, 천체, 곤충, 역사, 여행 등에 조예가 깊었지만 무엇보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사랑했다. 이러한 열정이 데즈카의 창작에 집약되어 펜과 종이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일을 했다고 그의 매니저는 회상한다.

책 속에는 그가 그렸던 ‘신보물섬’, ‘읽어버린 세계’, ‘메트로폴리스’, ‘리본의 기사’, ‘정글 대제’, ‘철완 아톰’ 등에 대한 숨은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2001년 오디세이’의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과의 인연, 미국 애니메이션의 왕 디즈니를 만났던 사연 등도 소개된다.

‘만화가의 길’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데즈카가 살았던 1950년대 일본의 사회상을 읽는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본 젊은이들의 꿈과 좌절 그리고 도전이 펼쳐지고 미국의 점령 속에서 가졌던 비참한 기억들은 고스란히 데즈카의 만화 속으로 스며든다. 지구인과 우주인의 알력 싸움, 이민족 사이의 분쟁, 인간과 동물 사이의 오해, 로봇과 인간의 비극 등은 그의 대표작 아톰의 테마를 형성한다.


책 제목처럼 이 자서전은 데즈카가 만화가로서 꿈꾸고 걸었던 하나의 길을 예시해 준다. 데즈카는 의학박사, 문필가, 프로듀서, 영화감독 등 다양한 일을 해 왔다. 그러나 어디에 글을 쓰든지 자신의 직업을 만화가라고 서슴없이 밝혔다고 한다.

만화를 사랑하고 만화가를 지망하는 학생은 물론 꿈을 꾸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이루어 가는 기쁨과 사명감을 일깨워줄 만한 책이다.

이동훈 장난감박물관 토이키노 기획이사

by 100명 2007. 4. 13. 23:43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4>영원한 청춘



《경영은 끊임없는 창의적 연구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경영이란 본래 그 가치가 매우 높은 예술적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영자는 종합예술가라 할 수 있다.》

초등중퇴 점원서 ‘경영의 신’으로

다신교를 믿는 로마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죽어서 신(神)이 됐다. 그러나 신전은 정치가와 군인들이 차지했고 상인들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도 상인의 지위는 마찬가지였으나,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1894∼1989)는 큰 발자취를 남기고 ‘경영의 신’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점원 생활을 시작한 마쓰시타는 1917년 23세에 ‘마쓰시타 전기제작소’를 설립한다. ‘회사 근무는 하루 일하면 하루치 급료를 주었으므로 쉬는 날은 밥을 먹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쉬더라도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연결 플러그, 자전거 램프 제조에 성공하면서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던 1932년 5월 5일 마쓰시타는 사업가로서의 사명이 ‘가난 극복, 물자를 풍족하게 생산해 사람들이 수돗물처럼 마음껏 쓰게 한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이날을 창업 기념일로 정한 뒤 250년간을 사명달성기간으로 정해 1기인 25년을 자신이 책임진다고 생각할 만큼 긴 호흡의 사고를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어려움 속에서 재기한 그는 1951년 승전국인 미국을 처음 방문해 그 풍요로움에 놀라면서도 마음을 열고 세계를 배운다.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전개한 마쓰시타는 네덜란드 필립스와 제휴하면서 1959년부터 다가온 무역과 외환 자유화의 물결을 앞장서 수용해 일본이 개방경제 체제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1973년엔 회장 직을 사임한 뒤 사회사상가이자 미래기획자로 변신한다. ‘민주주의는 번영주의’이지만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진정한 풍요로움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그는 21세기 아시아 시대에 대비한 인재를 기르기 위해 사재를 털어 1980년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을 설립했다. 이곳을 나온 200여 명의 졸업생은 국회의원 30명을 포함해 100여 명이 정치권으로 진출해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소년 시절, 배움이 적어 야학에서 가르치는 수학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마쓰시타가 무일푼으로 시작해 거대 기업을 일으키게 된 까닭은 제품이나 기술이 아니라 뛰어난 경영이었다. 인간을 이해하고 조직을 다룰 줄 알았던 그는 경영을 논리와 기법이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마쓰시타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끝없이 낮춤으로써 신의 경지에 올랐다.

‘나는 배운 것도 적고 재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가 경영을 잘한다거나 인재를 잘 활용한다고 평가한다.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짚이는 점이 있다. 내 눈에는 모든 직원이 나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직원들을 꾸짖을 때가 많았지만 속으로는 늘 상대방이 나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장사꾼은 돈을 남기지만 큰 상인은 사람을 남긴다. 경제와 정치를 넘나들면서 사람을 남기고 떠난 위대한 상인 마쓰시타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파트너


by 100명 2007. 4. 13. 23:42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3>마음의 진보



《영웅은 낡은 세상과 낡은 길을 버리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남의 괴물과 싸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괴물과 싸우고 자기의 미궁을 탐색하고 자신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삶에서 잃었던 것을 결국 찾아낼 수 있다.》

환속한 수녀, 종교의 본질을 만나다

여기,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한 소녀가 있다. 그녀는 17세가 되는 1962년 9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 가톨릭 수녀회의 수련원에 들어간다. “사방에서 신을 만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것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진보’ 저자인 영국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자신의 어린 날 결정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 위에 선 것인지를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60년대의 수녀회는 강압적인 규율, 불합리한 의례, 냉담한 악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수녀의 신분으로 옥스퍼드대 영문학과에 다니던 저자는 결국 7년 만에 수녀 서원을 철회해 달라는 청원을 넣는다. 수녀복을 벗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생활을 계속하지만 거식증, 불안 장애에 시달리며 자주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3년여에 걸쳐 정신과 의사의 상담치료를 받지만 자살 기도에까지 이르고 만다. 공교롭게도 박사 학위 과정을 통과하지 못해 교수가 되고자 하는 꿈도 좌절된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남들처럼 살고자 하는 삶은 시련의 연속이어서 나중에는 간질병 진단까지 받는다.

이 자서전은 저자가 예순 살을 넘긴 시점에서 썼다. 교수 직이 좌절된 뒤 그녀는 저술가로 살기 시작한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면서 바울로 마호메트 붓다 등 성인의 평전을 쓰고,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세 종교를 비교 분석하는 저서를 쓴다.

그러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의 정신적 삶이란 나선형 계단 같은 것임을. 계단의 모서리마다에서 어둠과 좌절을 만나지만, 그 과정을 묵묵히 살아내다 보면 모르는 새에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음을. 그녀는 나선형의 계단을 인간 마음이 진보하는 상징의 형태로 설명한다. 그리하여 이 책을 쓰는 시점에서 이윽고 알아차린다. 그 고난스럽고 다단했던 생이 결국은 소녀 시절의 소망, “사방에서 신을 만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에 다가가는 것이었음을.

암스트롱의 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인식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면서 의존성을 버리는 일이다. 그녀는 수녀원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절대적 힘을 지닌 초월적 존재가 자신을 이끌어줄 것이라 기대하는 의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의존성 때문에 거듭 종교에 실망했을 것이다. 수녀 직을 버리고 종교를 버리면서 바로 그 지점에서 의존성도 벗는다. 또한 그 지점에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나르시시즘을 이겨내면서 동시에 종교적 나르시시즘도 벗는다. ‘버림으로써 얻는다’는 명제처럼, 그제야 그녀는 범우주적인 종교의 본질과 만나게 된다.


이 책은 인간이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개념을 저자 자신의 삶을 표본으로 하여, 종교 신화 문학의 상징과 은유를 통하여 설명한다. 종교적 믿음의 문제로 회의를 느끼는 사람, 삶의 총체성에 대한 개념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급격히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모색하는 이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김형경 소설가

by 100명 2007. 4. 13. 23:42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6>에드거 스노 자서전



《“중국 서북지방에서 나는 기근으로 어린이들이 수천 명씩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 기근은 결국 5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것이 나를 각성시킨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 가난, 폭력, 혁명으로 점철된 내 생애의 온갖 경험들 가운데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으로 남았다.”》

천생기자의 냉정한 기록, 열정적 증언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일러 ‘극단의 시대’라 했다. 오늘의 풍요로운 삶에만 눈을 돌리면, 이 정의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류가 지난 세기에 벌인 고투를 기억한다면, 홉스봄에 동의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에드거 스노 자서전’은 홉스봄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반봉건, 반식민, 반파시즘의 기치를 내세운 거대한 혁명의 물결 한복판에서 보고 겪은 바를 기록한 책이기에 그러하다. 알려진 대로 스노는 서구 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마오쩌둥과 홍군을 취재해 보도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세기의 특종을 한 셈인데, 이때의 기록을 바탕으로 쓴 ‘중국의 붉은 별’은 스노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스노의 자서전을 읽을 때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호기심과 진지한 기사거리를 얻겠다는 생각뿐”이었던 청년이 어떤 연유로 “나는 분명 더는 중립이 아니었다”고 토로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기자라면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면 그 임무를 다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기자정신이라는 방파제를 넘어오는 거대한 역사의 파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 해일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냉정한) 기록자이면서 (열정적인) 증언자가 되고 마는 삶이라는 것이 있다. 스노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오해가 있었으나, 스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굳이 그의 이념을 규정하자면 점진적 사회주의자 정도가 되리라. 그럼에도 스노는 중국대륙을 휩쓴 혁명의 실체를 명확히 이해했다. 이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아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천생 기자였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물결을 편견과 억측으로 물들여 보아야 소용없다.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라, 직업적으로 충실했다. 그러기에 마오의 성공을 점칠 수 있었던 것이다.

스노가 중국통으로만 활약한 것은 아니다.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도 취재했고, 간디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방문해 그 특유의 냉철하면서도 객관적인 관찰기를 남겼다. 한 개인이 이 모든 사람을 만나고 그 현장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열적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혁명 이후의 소련과 중국을 보는 스노의 시각은 냉정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그 혁명이 “인간적인 연대, 인류 전체의 진보 및 자유, 평등, 박애 이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


스노를 세계적 명성을 누린 기자로 성장시킨 힘은 억압받는 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있었다. 세계 차원에서 불평등 구조가 뿌리내리는 오늘, 우리에게 스노에 견줄 만할 기자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권우 도서평론가


by 100명 2007. 4. 13. 23:41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5>크로포트킨 자서전



《말로만 인류의 진보를 역설하는 진보주의자들, 농민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체하면서 실은 농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모순을 감추는 데 급급하여 궤변만 늘어놓고 있었다.》

대중을 보듬은 혁명가의 영혼

진보와 혁명, 한때 청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이 단어들은 어느덧 케케묵은 낡은 의미가 돼버렸다. 혼신의 힘을 바쳐 조금 더 살 만한 세상, 모두가 평등하게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열정은 이제 불가능한 공상이 돼버렸다. 물론 자신이 진보주의자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진보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통용되는 얘기일 뿐 대중의 가슴을 파고들지 못한다.

크로포트킨이 자서전에서 기록하는 시대는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와 맞닿아 있다. 우리에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이 있다면, 그 당시 러시아에는 ‘자기 이마로 돌담을 부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속담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회의 모순을 목격하고도 눈을 돌리는 지식인들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비판적인 지식인들도 자신들을 따르라고 외칠 뿐 대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서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명문 귀족의 작위와 젊은 나이에 쌓은 지리학자로서의 명성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로 나섰다. “내가 이 고상한 정서의 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하여 소비하는 모든 것은 바로 땀 흘려 농사지어도 자식들에게 빵 한 조각 배불리 먹일 수 없는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은 크로포트킨을 투옥과 망명 생활로 이끌었다.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크로포트킨은 억압을 겪으며 혁명가로 살아야 했다. 크로포트킨이 걸었던 길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대표되던 사회주의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이 신뢰했던 것은 과학적인 이론이나 혁명조직이 아니라 대중이었다. 대중이 스스로 자신의 욕구와 목소리를 내고 서로 학습하며 시민으로 성장하는 공화국, 그것이 크로포트킨의 이상이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제도보다 선하다”고 믿었던 크로포트킨에게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념이나 제도보다 서로 보살피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었다.

왜 우리는 자서전을 읽을까? 아마도 그것은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대를 온몸으로 헤쳐 간 인물의 삶을 통해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은 시대와 교감하려면 합리적인 지성만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하려는 영혼을 품어야 한다고 알려 준다. 자신의 내면세계로 도피하는 영혼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고 때론 그 시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영혼 말이다.


그런 영혼의 무게를 담지 못했기에 사회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가 대변한다고 주장했던 그 대중이 사회주의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추구해 왔던 사람들의 정신은, 항상 대중과 함께하고자 했던 그들의 영혼은 아직 현실에 뿌리내려 있다. 600쪽을 조금 못 채우는 이 두꺼운 한 권의 책 속에 그 소중한 영혼의 싹이, 아직 인류가 걷지 않은 가려진 길이 숨어 있다.

하승우 제3섹터연구소 연구원·한양대 교수


by 100명 2007. 4. 13. 23:41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8>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이따금 나 자신이 한 줄기 흐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체처럼 충일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보다는 한 줄기 흐름이 나는 더 좋다. 시간 속에서, 장소 안에서, 온갖 기묘한 형태로. 그렇다고 반드시 앞으로만 움직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과연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과 모순투성이의 정체성이 혼재하는 내면을 깊이 있게 대면할 용기가 있는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자서전은 한마디로 좌충우돌과 종횡무진의 표상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문화와 문화 사이를 넘나든다.

영국 왕세자의 이름을 딴 ‘에드워드’와 아랍 이름인 ‘사이드’. 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인으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자랐고, 아랍인이면서도 미국 국적의 기독교 집안이라는 독특성이 있다. 아버지의 사업적 성공으로 부유하게 살면서 프린스턴과 하버드대라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컬럼비아대의 교수로, 저명한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는 근본적인 정체성의 혼란으로 항상 불안정한 이방인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가 사용했던 언어는 ‘금지된’ 아랍어였고, 프랑스어는 항상 ‘자신’의 언어가 될 수 없었으며, 불가피하게 사용한 영어 또한 사이드의 정체성 혼란에 무게를 더하였다. 어느 순간에는 거짓된 자신의 대내외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만 그의 내적 자아의 분출은 통제가 불가능하였다.

사이드는 강력한 아버지의 권위에 짓눌려 있지만 지속적으로 일상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문제아였다. ‘본국과 식민지 관계’처럼 심리적으로 갈등관계에 있으면서도 영양분이 많은 최면효과로서의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비록 정치와는 무관한 ‘온실’ 속에 자라도록 제한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처절한 실상을 경험하였다. 열등한 지위 때문에 체념하며 가슴 한구석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움과 분노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인’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의 자서전은 단순하게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세계의 권력구조를 학문적으로 파헤친다. 서양의 식민권력으로 열등한 이미지를 생성하여 동양을 지배한 제국주의 음모를 해부한 명저 ‘오리엔탈리즘’(1978년)은 그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권력의 중압감에 따라 달라지는 흑백논리와 사이비 지성의 프리즘을 거부하고 편견에서 벗어나 진솔한 면모를 대면하도록 통렬히 비판한 사이드는 세계지성사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한 시대를 움직이는 책’이라는 찬사를 받은 ‘문화와 제국주의’(1995년)는 문화와 제국주의 관계를 해부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동서양의 화해를 내포하였다.


사이드 인생의 불협화음을 통해 그의 삶과 학문을 이해할 수 있는 자서전은 ‘세계화’에 휩쓸려 자신의 정체성에 무감각한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에 쓰라린 아픔을 던져 준다. 또한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에도 위험은 언제든지 닥쳐올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다모클레스(Damocles)의 검’을 상기시켜 우리의 현재를 되돌아보는 마력으로도 작용한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 인문사회학부


by 100명 2007. 4. 13. 23:40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7>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내가 큰 실수를 했다거나 내 작업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고 결정적인 비판을 받거나 심지어 지나친 호평을 받아서 불쾌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뇌면 위안이 되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잘했다.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진화론 어떻게 만들어졌나

2009년은 아주 특별한 해다. 내겐 더욱 그렇다. 내 학문의 경전과도 같은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이 책을 쓴 내 학문의 스승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금 서양에서는 2009년 다윈의 해를 맞이할 온갖 사업과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은 전례 없이 성대한 다윈 특별전을 마련하여 이미 성황리에 전시를 마쳤고 지금은 세계 순회전시에 들어갔다. 캐나다와 호주의 대표적인 자연사박물관을 거쳐 드디어 2009년에는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각종 이벤트와 더불어 다윈의 해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다.

다윈의 이론에 관한 책보다 다윈 자신에 대한 책이 더 많이 출간됐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는 다윈이 직접 쓴 유일한 자서전이다. 독일의 한 편집자에게서 자서전을 집필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할아버지가 자기 정신에 대해 쓴 짧은 글이라도 읽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흥분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손자들을 위해 쓴 글이다.

다윈은 모든 과목을 두루 잘하는 이른바 모범생은 아니었다. 다윈의 위대함은 거의 전적으로 호기심과 상상력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엄청난 수집가였는데, 특히 딱정벌레를 좋아했다. 어느 날 오래된 나무의 껍질을 벗기다가 진귀한 딱정벌레 두 마리를 발견하곤 양손에 한 마리씩 쥐었는데도 또 다른 종류의 딱정벌레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것을 입에 넣었는데 그놈이 분비액을 쏴 대어 황급히 뱉어 내느라 세 번째 딱정벌레도 잃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이 그가 케임브리지대에 있던 시절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의 나이는 호기심을 잠재우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

다윈의 진화론, 즉 자연선택론은 지난 한 세기 반의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치며 생명의 본질과 역사를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이론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훌륭한 이론이란 논리의 완벽함과 더불어 간결성과 적응성을 지녀야 하는데 자연선택론은 이런 점에서 거의 완벽하다. 이 책에는 그가 어떤 계기로 비글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할 수 있었으며 어떤 사람과 사건들이 그의 이론이 확립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는지가 잘 나와 있다. 그의 이론도 그의 삶과 더불어 ‘서서히 진화해왔다’.


서양에서는 다윈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10인 중 한 사람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다윈의 이론은 단순히 학문 세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인간의 의식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킨 위대한 사상가다. 이제 더는 우리 주변에 세상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다고 믿는 이는 없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들 간의 관계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독자들도 드디어 인간 다윈, 그리고 위대한 사상가 다윈을 새롭게 발견하기 바란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by 100명 2007. 4. 13. 23:40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9>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



《인생은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맡은 일을 완수했다. 실수도 했지만, 변화를 이루어냈다. 나는 힘든 선택을 했고 그 결과를 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잃어버린 사람들과 목표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컸지만, 내 영혼을 잃었다는 슬픔은 없었다.》

부당한 해임. 그리고 자서전. 갈등이나 폭로는 없었다. 단지 믿는 것에 전부를 바친 여성 최고경영자(CEO)의 솔직한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은 추락하던 HP에 구조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컴팩과의 합병을 통해 사상 초유의 성과를 올리고도 구(舊)세력인 이사회에 의해 밀려난 HP의 전 CEO 칼리 피오리나의 자서전이다. 만일 이 책을 펼치며 피오리나의 화려한 외모, 저돌적인 경영스타일, 성공한 여성 CEO를 따라다니는 갖가지 루머, 혹은 비즈니스계의 드라마틱한 뒷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유감이다. 결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은 여성 CEO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졌던 피오리나의 개인 성장 일기이자 조직과 비즈니스의 실체에 대한 멘터링 북이다. 부모와 유년기의 이야기, 법대를 자퇴하고 부동산 업체의 말단사원으로 비즈니스 업계에 입문해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잠재력을 발견했던 사회 초년 시절, 그리고 실패와 두려움 속에서도 배우고 느끼며 성장해가는, 치열하게 살아온 개인의 흔적을 통해 성공이란 결코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 준다.

여성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고통도 다루고 있다. 신입 시절, 스트립 바에서 상담하면서 장애를 선택할 순 없지만 장애를 넘는 법은 선택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일화, 편견에 맞서기 위해 사랑받기보다 존중받아야 함을 배우고, 말과 제스처를 읽고 남성들의 힘의 언어를 익히는, 안정보다 도전을 택하게 되는 과정은 이 시대 여성이라면 꼭 읽어 봤으면 하는 대목이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입장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의 계기로 삼는 피오리나의 현명함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AT&T, 루슨트테크놀로지에서의 관리자 생활에 대한 회고부터는 비즈니스에 대한 본격적인 멘터링이다. 협상, 마케팅, 인사관리, 법정공방, 기업 간 문화갈등, 비즈니스에 있어 성공과 승리의 개념, HP에서의 열정에 찬 구조개혁 작업과 합병에 관한 상황설명과 의사결정과정을 꼼꼼하게 그려 내고 있어 비즈니스에 포부를 가진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지침서가 될 것 같다.

그 어떤 것보다 가슴 벅찬 멘터링은 책을 덮을 때쯤 들려오는 피오리나의 열정에 찬 목소리다.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원칙을 잃지 말고 스스로를 지켜 나가십시오. 자신의 세계는 온전히 자기 것이어야 합니다. 영혼을 팔지 마십시오.”

피오리나는 ‘비즈니스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진정한 리더가 되는 길을 가르쳐 준다.


삶이 자신을 속인다고 불평하거나, 세상이 불공평해서 언짢게 느껴진다면 ‘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을 읽었으면 한다.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영혼을 되찾게 도와줄 것이다.

하민회 이미지21 대표

by 100명 2007. 4. 13. 23:39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0>하인리히 슐리만 자서전



《“아버지! 아버지가 틀렸어요. 예러는 틀림없이 트로이를 봤어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요.” “얘야, 이 그림은 상상으로 그린 거란다.” “아버지, 만일 정말로 그런 성벽이 옛날에 있었다면 완전히 없어졌을 리 없어요. 틀림없이 그건 수백 년 동안 흙먼지에 묻혀 있을 거예요.”》

현실은 꿈을 이루는 과정이다. 때로는 한 권의 책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 더욱이 아주 어릴 때 만난 책은 한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기도 한다. 책은 인간의 호기심과 열정과 집착을 끝없이 부추기는 강력한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여덟 살이 될 무렵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라는 책을 읽고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겠다는 뜻을 품었고, 평생을 그 꿈을 이루는 데 바쳤다.

인간이 꾸는 꿈은 늘 ‘지금 이곳’이 아니라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혹은 아예 현실 너머의 아득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어린 슐리만은 생생한 삽화가 그려진 역사책을 보는 순간 ‘그때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가 트로이를 꿈꾸기 시작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문학적 허구로 존재하던 트로이가 한 소년의 가슴에서 역사적 현실로 발아한 것이다.

슐리만은 자서전의 서두에서 ‘나의 인생 후반기에 진행됐던 모든 발굴 작업이 어린 시절에 받았던 여러 가지 감명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필연의 결과였다’고 밝혔다. ‘여러 가지 감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불타는 트로이 도시 속을 아이네아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은 채 어린 아스카니우스의 손을 잡고 빠져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며 가슴 벅차하던 일이야말로 그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기억이었음이 분명하다.

열성적으로 고대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와 나중에 커서 결혼한 뒤 함께 트로이를 발굴하겠다고 약속한 동갑내기 여자 친구 민나 덕분에 끝없이 샘솟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을 빼놓으면, 슐리만의 어린 시절은 불우하기 짝이 없었다. 아홉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가난한 목사인 아버지는 슐리만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비용을 댈 수 없어 실업중학교를 마치고는 상점의 사환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가 생활에 정신없이 바쁠 때에도 나는 트로이를, 그리고 언젠가 그곳을 발굴하겠다고 30여 년 전 아버지와 민나에게 했던 맹세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나의 금전에 대한 집착도 사실은 어떻게 해서든 평생의 목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 때문이었다’는 자서전의 한 대목을 보면 그는 철저한 현실주이자이며 동시에 낭만적 이상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낭만적 러브 스토리는 해피엔드가 아니었지만 그는 마침내 트로이를 문학적 허구에서 역사적 사실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부를 축적하는 데 급급한 상인이었다고 말하든, 낭만적 상상력에 기댄 단순한 발굴가였다고 부르든, 그리스의 고대 유적을 입증한 위대한 고고학자였다고 평가하든 그에겐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으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신형건 아동문학가·푸른책들 발행인

by 100명 2007. 4. 13. 23:37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1>마더 테레사 자서전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하지 않다면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지 않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없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과 접촉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고 있다고 믿는다.”》

“세계는 가장 큰 것을 잃었다. 테레사 수녀는 이제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전 세계 특히 인도는 테레사 수녀의 사망으로 더욱 가난해졌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에 속하고 자신의 뜻대로 인도를 세웠다면 마더 테레사는 그 인도를 세계의 것으로 만들었다.”

1997년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데르 쿠마르 구지랄 당시 인도 총리가 남긴 말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기독교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다른 종교를 가진 알바니아나 인도 정부도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했다. 테레사 수녀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 종교를 넘고 인종을 넘어 모두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죽음의 순간에 연출해냈던 것이다. 그 원동력은 그가 일생 동안 보여 줬던 소외된 사람들을 섬겼던 사랑과 자비와 청빈의 힘이었다.

‘마더 데레사 자서전’은 마더 테레사에 대한 각종 인터뷰, 편지, 대화 등을 자서전 형태로 편집한 글이다. 그가 평생 걸어온 삶의 기록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감동을 느끼는 한편 부담스럽기도 하다. ‘과연 나는?’이라는 자기 반성적 질문이 뒤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모두에게 자신처럼 살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어떤 도움을 주면 좋은가’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성스러움은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가족 가운데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간단한 일을 권고하고, 그 다음에 앞집에 사는 이웃, 그 다음에 근처에 사는 가난한 사람을 찾아볼 수 있도록 권유하라.”

평화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이유를 앞세워 펼쳐지는 온갖 화려한 구호와 정치 사회적 퍼포먼스들을 무색하게 하는 현답이었다. 나눔과 사랑의 실천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큰 가르침이자 숙제이기도 하다.

마더 테레사는 가난 해결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현대사회가 실은 역사상 가장 가난한 시대라는 점을 일깨웠다. 물질적 가난보다 정신적 가난으로 고통 받는 현대인의 우울한 자아를 우려했던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은 나병이나 결핵이나 혹은 암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고독이나 자기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에서는 언젠가 실험을 했는데, 그 내용은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한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체내 면역기능이 향상된다는 것이었다. 이 실험에 따르면 마더 테레사의 전기를 읽어도 면역기능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것을 ‘테레사 효과’라고 부른다. 사랑의 힘은 진실로 사람을 강하게 해 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마더 테레사의 자서전을 꼭 한 번 읽도록 권하고 싶다.

표혜령 화장실문화 시민연대 대표


by 100명 2007. 4. 13. 23:36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2>벤저민 프랭클린



《늘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려면 반대되는 습관을 깨부수고 좋은 습관을 익혀야 한다. (그 좋은 습관으로 일생을 살았기에) 누군가 내게 똑같은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그렇게 하겠느냐고 물어볼 때 나는 주저 없이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10여 년 전 좋아하는 출판사의 사장이 지금까지 나온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서전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서슴지 않고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을 추천하면서 새로이 출판할 것을 부탁하였다. 국내에서 여러 번 출판됐으나 번역 수준이 낮고 품질도 원서에 비해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년이 흘러 훌륭한 번역을 거쳐 고품질의 양장본으로 재탄생한 이 자서전을 받아 들고 매우 기뻤다. 이 책은 혼자 읽는 데도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지인들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하기에 부족함 없는 보물이었고 나아가 전 국민에게 읽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펜실베이니아대의 설립자인 벤저민 프랭클린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이 자서전을 추천하는 데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내용에 아무런 과장이나 숨김이 없다. 둘째는 내가 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13가지 덕목과 50여 가지 명언이 동양 사상과 기독교 정신에 부합되고 2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먹어라. 먹기 위해서 살지 말라’ ‘손윗사람에게 겸손하고, 동등한 사람에게는 예절 바르며, 아랫사람에게는 고결해야 한다’ 등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교훈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셋째는 많은 한국인이 범하고 있는 시간 관리의 잘못과 작심삼일 심리를 물리치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13년 동안 시간관리 워크숍을 진행해 오면서 “그대는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왜냐하면 시간은 인생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는 명언을 수없이 인용하였고 나도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다.

마지막 이유는 이 책은 내가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청소년들의 인생지침서 1호로 꼽힌다는 점이다. 이 자서전이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청소년 지침서가 된 이유는 프랭클린의 인생이 철저히 인본주의적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긴 결과 많은 분야에서 성공을 이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벼락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피뢰침를 발명했고 주민 편의를 위하여 우체국 소포제도와 의용소방대를 창설하였으며 신문 발행, 대학과 병원 설립, 세계 최초의 화재보험회사 설립 등 업적을 남겼다. 영국 식민지의 시민으로서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인이 되었다. 과학자이자 외교관이며 저술가와 정치가로서, 어느 역할에서도 빛을 발했던 벤저민 프랭클린.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자 100달러 지폐의 모델이 되는 이유를 이 자서전에서 엿볼 수 있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2년밖에 받지 못한 사람이 독학으로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여러 가지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으니 학구열이 높고 자기계발에 힘쓰는 한국인들의 필독서 1호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책이다.

김경섭 한국리더십센터 회장


by 100명 2007. 4. 13. 23:35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4>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감옥에서 나와) 멍들고 지친 몸을 쉴 새도 없이…국어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정말 태산 같았다…우리말을 뿌리째 뽑아 없애려던 일제의 국어말살 정책이 10년 가까이 계속된 터였다. 때문에 우리는 잃어버린 말부터 되찾아야 했다.》

우리말 지키기 한평생

이희승 선생은 19세기 말(1896년)에 태어나서 국어학자로, 시인으로, 문장가로 활동하면서 이 땅의 지성인으로 살다 갔다. 이 책은 저자가 80세가 넘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쓴 자서전이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36년, 제1, 2차 세계대전, 미군정, 6·25전쟁, 자유당과 민주당 정권, 군사혁명과 공화당 정권을 겪으며 기구한 세월 속에서도 우리 문화, 특히 국어를 지키고 키운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내용을 기록한 저술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잃은 소년이 보고 들은 일들, 당시로서는 생소한 언어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가출한 일, 한성외국어학교를 시작으로 여러 학교를 거쳐 중앙학교를 20세가 되어서야 졸업한 일, 3·1운동 때 태극기를 그려 돌리면서 만세를 불렀고 동지들과 등사판으로 지하신문을 만들어 돌린 일…. 이 같은 일화들이 입지전적인 기록으로 펼쳐진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조선어문학과가 있는 경성제국대 예과에 30세의 만학도로 입학하여 드디어 언어학 공부의 꿈을 이루었고 대학의 낭만을 즐기며 친구들과 어울리던 일은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화여전 교수로서 여성 문인들을 길러낸 일,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국어생활을 생각할 때 길이 찬양될 일이다.

그러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악랄한 고문을 받았고 굶주림과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동지들이 죽어나간 일들은 개인의 고난이자 우리 문화의 시련이었다. 출옥하자마자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으로 폐사 직전에 있던 국어를 살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고, 경성대를 재건하기 위한 일을 맡아 교수가 된 것은 우리 문화의 재건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 땅 비극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일도 많다. 6·25전쟁 중 9·28수복 전날, 전투의 와중에서 한밤중에 집이 불에 타는 바람에 온 가족이 몸만 빠져나온 일이나, 1·4후퇴 때 부산까지 1000리 길을 걸어갔다가 어머님의 임종에 겨우 맞춰 돌아와, 흩어진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찾은 일이 그것이다.

그는 4·19혁명 때는 교수 시위에 앞장섬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하게 했다. 이는 그의 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 준다. 정년퇴직 후 동아일보 사장, 사립대의 대학원장, 동양학연구소장을 거치면서 한가롭게 쉴 틈이 없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였지만 몸에 밴 근면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그 안에 담긴 사건이 기구하고 문장이 평이하다. 무엇보다도 그 안에 흐르는 정신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 책은 남산골 딸깍발이의 선비정신이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현대의 지성으로 성장하여 간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저술이라 하겠다.

남풍현 한국어문회 부이사장

by 100명 2007. 4. 13. 23:34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3>불꽃 - 최승희 자서전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든 일에 대해서 더욱 나를 조심스럽게 만듭니다. 고국을 대표할 만한 위인은 못 되지만, 어떻든 무용에는 나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동안 나는 잠자고 먹는 것도 잊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피투성이가 되어….》

식민지의 설움, 춤사위에 실어 사르다

최승희는 어린 시절 내게 수수께끼였다. 어딘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가라고 나오지만 찾아보려고 하면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 이유가 좌익인 남편과 함께 북으로 가서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의 삶은 정치적으로 불행했다. 남편과 함께 숙청돼 역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승희는 정치가가 아니라 무용가였다. 우리는 그를 예술가로 기억한다. 예술가의 불행한 삶은 단지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참고 사항일 뿐이다.

이 나라가 식민지이던 어두운 시절에 무용이라는 예술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이가 있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민족은 춤과 노래를 즐기는 흥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는 아름다운 용모와 늘씬한 몸매로 무용을 하기에 적당한 몸을 타고났다고 한다.

자서전은 자료가 드문 최승희의 육필 원고와 그의 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평을 담고 있다. 최승희 자신의 이야기는 슬프다. 어린 시절 가세가 기울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학교에 다니던 일, 글 쓰는 오빠가 돈이 생기면 사오는 쌀로 끼니를 잇느라 먹을 것이 부족해 아침이면 부모와 아이들이 서로 먼저 밥을 먹지 않았던 일이 무거운 풍경으로 펼쳐져 있다. 그러나 춤을 배우기 위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떠나는 모습에선 그의 배짱이 당당하게 전해온다.

시대의 암울함이 그에게 준 것은 무용에 대한 평에서도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조선춤을 창작해 호평을 받을 때 일각에서 조선의 혼을 팔아먹는다는 비난도 받았던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세계적인 무용평론가 존 마틴은 그의 공연을 보고 “엄청난, 여성의 매력 그 자체”라고 평했다. 그는 “최승희, 그에게는 일본의 색, 중국의 몸짓과 한국의 선이 함께 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대를 뛰어넘는 것은 예술가의 숙명이다.

최승희는 와세다대 문학부 출신의 인텔리 안막과 결혼할 때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했다고 내가 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결코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오히려 무용에 대한 열정이 날이 갈수록 더해졌을 뿐이다.”

조선에서 무대에 서는 여자는 사내들의 장난감이 되어 무절제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혼은 말없는 항의와도 같다고도 했다.


좋은 예술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오는 법인지도 모른다. 최승희는 민족의 비극 속에서 민족의 춤을 춘 무용가다. 그런 그의 행적 때문에 우리가 이 희귀한 예술가를 잊는다는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나는 그의 춤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글과 글의 행간에서 춤을 추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듯하다. 식민지의 설움이 키우고 남북의 분단이 삼켜 버린 무용가 최승희, 이 책의 제목 ‘불꽃’처럼 산 사람이다.

전 윤 호 시인

by 100명 2007. 4. 13. 23:34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5>체 게바라 자서전



《동지여.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 가족이 스페인 어느 지방 출신인지 잘 모릅니다. 내 생각에 당신과 내가 가까운 친척인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만일 당신이 이 세상에서 불의가 저질러질 때마다 분노로 떨 수 있다면 우리는 동지입니다.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터넷 혁명 시대에, 사이버 게릴라가 창궐하는 이 시대에 왜 사람들은 4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체 게바라를 그릴까.

이미 국내에서 체 게바라의 생애를 다룬 전기가 수십만 부 팔렸다고 하고, 뒤이어 사진첩도 나왔고, 그가 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번역되었다. 후자는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로도 소개되어, 멋진 로드무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런 붐을 타고 ‘체 게바라 자서전’도 출간되었다. 왜 하필이면 체 게바라일까. 68세대의 잃어버린 향수가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것일까. 이상주의를 갈구하는 젊은 세대의 길 찾기의 일환일까. 아니면 독일풍의 교양소설로 읽히는 것일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같은 성장소설 말이다.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체 게바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가 풍기는 묘한 아우라 때문인 것 같다. 그는 게릴라로 죽었지만 불멸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쿠바산 시가 몬테크리스토를 피우는 모습은 가히 베네통 광고 사진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게릴라 이전에 지극히 사적(私的)인 인간이었다.

여행 중에도 일기장을 꼼꼼히 챙겼고, 틈틈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엽서를 부쳤으며, 마지막에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투쟁을 수행할 당시에도 글을 남겼다. 결코 게릴라답지 않은 독서광이기도 했다. 글을 읽고 나면 반드시 자신의 감상을 노트에 남겼고, 솔직담백한 작가 비평까지 곁들였다. 게릴라 아지트에서 시가를 피우며 괴테를 읽는 독서삼매의 사진을 보노라면 독서 취향도 얼마나 자유분방한지 알 수 있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그에게 강요된 관료적 생활은 천성에 맞지 않았다. 초기에는 “베트남을 여러 군데 만들자”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누비며 반제(反帝) 전선 투쟁에 몰입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베텔하임이 계획경제의 초기 단계에 물질적 유인이 중요하다고 지적했을 때 그는 정신적 자극이 중요하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천식이 심해지면 늘 게릴라적 삶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볼리비아로 가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 낭카우아수 계곡에서 붙잡혀 총살당했다.

이 자서전의 전반부는 일종의 여행기이다. 전도유망한 아르헨티나 중류층 출신의 한 의학도가 라틴아메리카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대륙에 제도화된 빈곤과 불의에 분노하는 모습을 진솔하게 기록한다. 마야와 잉카 유적지 앞에서 그는 아메리카 대지의 뿌리와 하나가 됨을 느낀다.


자서전 후반부는 내밀한 일기와 편지글이 다수이다. 그가 남긴 편린은 산문체지만 정신은 대단히 시적이다.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 속에서 혁명 속에서 그는 삶을 태웠고, 반제 투쟁의 성자가 되었다. 체 게바라의 관련 서적에 비해 이 책이 지닌 미덕이라면 사진을 적절히 배치하여 내밀한 육필 기록의 체취를 진하게 전달한다는 점이리라.

이성형 이화여대 교수 정치외교학

by 100명 2007. 4. 13. 23:23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6>사흘만 볼 수 있다면



《세상만사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어둠과 침묵 속에서 만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 그러하다. 어떤 처지에 있게 되더라도 나는 이에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헬렌 켈러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종종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다른 대목들은 기억이 나지 않고 펌프 앞에서 어린 헬렌이 ‘물(w-a-t-e-r)’이라는 말을 아주 힘들게 하던 장면만 떠오른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헬렌의 자서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다시 읽었다.

헬렌의 이야기가 어떤 보편적인 감동을 담고 있다면, 그의 이야기가 결코 그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정도의 문제일 뿐 누구나 태어나면서 일정한 조건들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그 조건들이 늘 호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어려운 조건들을 가지고서 삶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인생이란 그런 조건들을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이루어진다.

삶이 가져다주는 힘겨움은 원한을 낳기도 하고 창조를 낳기도 한다. 힘겨움이 닥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 힘겨움에 대해 원한을 품는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을 저주하게 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힘겨움을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고 삶에서 어떤 새로운 경지를 여는 계기로 삼는다. 역사적으로 악한 일을 한 사람들도, 또 뛰어난 일을 한 사람들도 대개 남들보다 더 큰 힘겨움을 겪은 사람들이다. 다만 그 힘겨움을 원한으로 가져가는가 창조로 가져가는가가 그 모든 차이를 가져온다.

헬렌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의 삶에 남들보다 모진 조건들이 주어졌고, 그가 그 조건들과 싸우면서 그 방벽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려 가는 과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랑이다. 누구도 혼자의 힘으로 삶의 방벽들을 넘어갈 수는 없다. 그때 자신의 손을 잡아 주고, 걸음을 이끌어 주고, 미래를 보여 줄 사람,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헬렌의 이야기는 또한 설리번 선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이 책 앞의 사진들 중 왜 설리번의 사진이 없는지 궁금하다) 헬렌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한 사람, 그의 삶의 동반자가 되어 준 사람은 설리번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헬라스(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는 여러 격언들이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주어진 것을 선용(善用)하라”이다.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시작하고 어떠한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 어떻게 원한이 아닌 창조의 삶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헬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볼 것인지, 헬렌은 아름다운 필치로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들도 자신이 사흘밖에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무엇을 보고 싶은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정우 철학자·소운서원 원장

by 100명 2007. 4. 13. 23:22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30선]<27>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얘야, 대지의 맥박을 가까이 느끼며 살아가도록 해라. 거기에 힘이 깃들어 있단다. 농부도 목사도 마찬가지이지만, 건축가가 위대한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영혼의 단순함이 필수적인 것이란다.》

자연과 소통하는 건축을 위하여

술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처음 만난 이의 살아온 인생 편력을 듣다 보면 어느새 그가 내 오랜 지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렇듯 자서전은 개인의 독백이기 이전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독자인 내가 그의 삶 속에 들어가고 그가 다시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통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으로 만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20세기 초반 마천루라는 미국 대도시의 기계문명에 대한 거친 저항과 광활한 남서부 대자연에의 순응을 애증에 찬 목소리로 들려준다. 아무리 위대한 건축가라 할지라도 그가 설계한 건축물보다 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진 못한다. 사람들은 위대한 건축물은 알지만 그 위대함을 창조해 낸 건축가는 기억하지 못한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아마도 이것이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라이트의 대부분의 삶은 시카고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시카고는 근대건축의 상징인 마천루의 도시이다.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 라이트의 작품은 마천루도 아니거니와 마천루처럼 도심을 가득 채우고 있지도 않다. 지금은 시카고의 관광상품이기도 한 라이트의 작품들을 순례해 보면 그의 발자취는 시카고 근교의 자연과 하나가 된 다양한 주택에서 만날 수 있다.

“나는 이제 알았다. 집은 언덕 위에 혹은 그 어떤 것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집은 언덕 속으로 스며들어 가야 하는 것이었다. 언덕과 집이 함께 살면서 더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의 고백처럼 라이트의 주택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유기적 건축을 갈망하였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광활한 초원지대를 배경으로 한 ‘프레리(prairie) 스타일’ 건축이다.

자연에 순응한 라이트의 정신은 탈리에신에 응축되어 있다. 탈리에신은 그의 고향인 웨일스의 음유시인 이름이다. ‘빛나는 이마’라는 뜻의 탈리에신은 라이트의 삶과 일, 가족의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는 자신의 집 이름이기도하다. 이곳은 라이트가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족과 함께 생활한 공동체 공간이다. 그래서 이 자서전의 상당 부분은 탈리에신 I, II, III을 통해서 그가 겪었던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한다. 또한 탈리에신에서 함께했던 제자들과의 삶은 오늘날 건축 교육의 원형으로 탐독할 만하다.

이 책은 라이트가 건축가로서의 삶의 중간쯤에 서서 쓴 책이라 완전한 자서전은 아니다. 그래서 그의 불꽃같은 열정에 더해진 완숙미가 활짝 피어난, ‘낙수장’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한 카우프먼 저택과 구겐하임 미술관에 대한 독백이 없다. 라이트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열어 놓은 길을 독자들과 함께 가길 바라고 그 발길의 마지막에 낙수장과 구겐하임 미술관에 이르는 상상의 세계를 열어 놓은 듯하다. 그래서 이 자서전의 끝은 독자의 상상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근대를 풍미했던 거장 건축가가 걸어간 마지막 길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이영범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by 100명 2007. 4. 13. 23:21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8>시와 진실-괴테 자서전



《인간이 이루려고 하는 모든 것은 행동이나 말이나 그 밖의 어떤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총체적으로 결합된 힘으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모든 분리된 것은 배척되어야 한다.》

분열과 고난의 시대 구원의 빛은…

온 나라가, 아니 온 세계가 정치, 경제 및 민족의 갈등 등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시대에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을 읽는 것은 매우 의미 깊다. 괴테가 활동하던 고전주의 시대도 사회적으로 분열과 고난의 혼탁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괴테는 혼탁한 시대에도 퇴폐와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고 암담한 현실에 대해 끊임없는 구원을 모색했다.

1115쪽의 방대한 이 자서전에는 괴테 문학에 영향을 끼친 괴테의 여성 편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괴테는 첫사랑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헤어진 뒤 시 ‘제센하임의 노래’를 지었고 두 번째 찾아온 사랑인 샬로테 부프가 자신의 친구와 결혼해 떠나자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25세 때 16세인 릴리 쇠네만을 만나 약혼까지 했지만 양가의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마음의 상처가 매우 컸던 듯 괴테는 무려 56년 뒤인 1830년의 한 회고담에서 “릴리와 사랑하던 시절만큼 진정으로 행복에 다가간 적은 없었다. 그녀는 나의 마지막 여성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여성 편력은 계속되어 바이마르 체류 시절에 괴테는 유부녀인 샬로테 폰 슈타인과 사랑을 나누었고, 39세 때인 1788년에는 23세 꽃집 처녀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사랑에 빠져 동거를 거친 뒤 결혼식을 올렸다. 1816년에 아내가 사망한 뒤 1923년 74세의 괴테는 19세 되는 울리케 폰 레베초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늙은 괴테는 울리케의 모친에게 딸을 달라고 부탁도 했지만 당사자가 끝내 망설이는 바람에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고, 이러한 배경에서 시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가 생성되었다.

결론적으로 괴테의 사랑은 천박하지 않았고 이해관계도 깔지 않았고 끊임없이 문학으로 승화되었다. 이들 여성 편력에서 괴테의 순수함도 느껴져 늙어서도 우리네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는지가 감동적으로 나타난다.

괴테의 삶의 이론도 자서전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원초적인 것에서 벗어났다 다시 원초적인 것으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원초적인 것에서 벗어남은 진취이며 다시 되돌아감은 헌신이다. 괴테는 이를 심장의 수축과 팽창의 양극적 운동으로 나타내고 있다. 심장의 팽창이 자신의 상승인 진취를 상징한다면 수축은 자신을 버리는 헌신을 나타낸다. 괴테는 이를 “생명의 영원한 방정식”이라고 하면서 시 ‘프로메테우스’(진취)와 ‘가뉘메트’(헌신)로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이 자서전은 괴테가 어린 시절 7년전쟁으로 인한 삶의 시야 확대, 화려하기 그지없는 요제프 2세의 대관식, 경건파를 통한 열렬한 종교적 체험 등 18세기의 풍속을 잘 보여 준다. 또 자연, 감정, 개인을 중시했던 질풍노도 운동과 세계동포주의를 인식시키고, 루소, 하만, 셰익스피어, 헤르더 등의 작가들에게서 받은 영향 등 수많은 괴테의 발전 과정을 담고 있어 괴테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안진태 강릉대 교수·독어독문학


by 100명 2007. 4. 13. 23:18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9>네루 자서전



《얼마 안 가 근처의 마을들 전체가 텅텅 비다시피 하면서 들판은 온통 모여드는 남녀노소로 가득 찼다. 그들은 “시타 람” 하고 일제히 소리쳤다. 그 고함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이웃마을까지 메아리쳐 마치 “시타-라-아-아-아-암”이라고 외친 것처럼 들렸다. 그러면 사람들은 물결처럼 때로는 전속력으로 달음박질쳐 왔다.》

인도 독립운동 역정 감동적 기술

개인의 이력이 한 국가의 역사인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1936년 나온 네루의 자서전은 네루의 경험과 인도의 기록이 부합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자서전은 반영(反英)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네루가 감옥 생활의 고독을 이기고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1934년 6월부터 1935년 2월에 걸쳐 쓴 것이다. 여기엔 수동적 젊은이에서 독립운동가로 변모하는 네루의 개인 기록과 독립운동사라고 부를 수 있는 인도 근대사의 흐름, 특히 간디의 활약상이 잘 그려져 있다.

자서전은 카슈미르에서 갠지스 유역의 알라하바드로 이주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인 네루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네루는 자신을 성공한 ‘영국 신사’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영국에 유학하여 유명 사립학교와 케임브리지대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귀국하였다. 법률직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채 아버지 일을 돕던 네루는 1916년 중매로 만난 카말라와 결혼식을 올리며 필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곧 누에고치같이 안온한 집을 떠난 네루는 험한 세상으로 나가 지도자로서 국가적 서술의 주인공이 되었다. 1919년 영국군이 비무장 인도인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이 바로 네루 생애의 ‘루비콘 강’이었다. 그는 사건을 정당화하려는 영국군 장교들의 냉혹한 말투와 태도를 접하고 그 순간부터 영국의 ‘정의’에 대한 신뢰를 접고 간디가 이끄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인용한 발췌문이 보여 주듯, 도시에서 자란 네루는 1920년의 한여름에 갠지스 평원의 농촌을 방문하여 농민의 가난한 삶을 목격하였다. ‘계시’처럼 농민을 ‘발견’한 네루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농민의 열악한 처지를 동정하고 그 해결 방안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들의 지도자로, 독립운동의 리더로 부상하였다. 이 자서전에는 네루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인도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과 움직임도 함께 서술되었다.

간디와의 만남은 네루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남겼다. 자서전에는 ‘진리의 힘’ 등 모호한 표현을 쓰며 단식과 비폭력의 기이한 투쟁 방식을 동원하는 간디와 달리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고 종교를 사적(私的) 영역으로 밀어내려던 네루의 속내가 엿보여 흥미롭다. 그럼에도 혁명적 개혁을 꿈꾸는 네루와 계급투쟁을 부정한 간디는 상대의 장점이 독립운동에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서로 손을 잡아 감동을 준다.


네루가 영어로 쓴 자서전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와 영국의 헉슬리가 극찬할 정도로 그 필치가 매우 빼어나다. 타고르는 네루와 같은 지성인이 정치를 하는 현실이 유감이라고 말했으나 네루는 독립한 인도의 총리로 75세까지 살았다. 네루의 자서전은 45세의 젊은 나이에 서술된 반생의 기록으로 독자에게 ‘뭔가’를 감춘다는 인상을 주는 약점이 있으나 인도 근대사라는 보너스를 선사하는 더 큰 장점이 있다.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 인도근대사

by 100명 2007. 4. 13. 23:16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30>앤드루 카네기 자서전



《‘스코테이스 아메리칸’지에서 우연히 한 줄의 격언이 눈에 띄었다. ‘옷감을 짜고자 기회를 노리면 신들은 실을 주게 된다.’ 이 구절은 나를 위해 직접 주어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이것은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말로 신들은 적당한 형식으로 실을 갖춰 주었다.》

앤드루 카네기는 사상 세계의 다섯 번째 부호로 손꼽힌다. 실로 대단한 부를 쌓은 셈이다. 그러나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막대한 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썼느냐는 점이다. 부의 사회 환원,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부를 사회에 되돌려야 하는 부자의 도덕적 책무를 맨 먼저 주장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 덤펀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토끼를 길렀는데, 새끼가 태어나면 이름을 붙여 준다는 조건으로 친구들에게 토끼풀을 구해 오도록 했다. 이 때 이미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사업적 수완이 드러난 셈이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치를 잘 깨닫고 실천한 때문이 아니라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선별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네기가 가족을 따라 미국 피츠버그로 건너온 것은 1848년, 13세 때였다. 그는 면직물 공장에서 일하다가 전신국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전보를 배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상황이 젊은이들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를 붙잡지 못하는 것은 큰 실수다. 일자리가 주어졌을 때 머뭇거리다가는 못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

이 말처럼 카네기는 주어진 기회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철도회사의 전신기사로 채용된 것은 1853년이었다. 1859년에는 피츠버그 지부장에 오른다. 그리고 승승장구하다가 독자적인 사업을 위해 1865년 봉급자 생활을 마감한다.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좁은 세계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카네기가 강철 사업을 시작한 것은 1875년. 사업은 번창해 그는 막대한 부와 함께 강철왕의 자리에 오른다. 1892년 세계 최대의 ‘카네기 강철회사’를 설립했을 때는 미국 철강 생산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1901년 카네기는 또 한 번 큰 결단을 내린다. 연간 4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회사를 U S 스틸사에 넘긴 것이다. 이는 오직 부의 분배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은퇴한 뒤 18년 동안 저 위대한 업적의 막이 오른다. 이른바 ‘부의 복음’이었다.

카네기는 앤드루 카네기 구제기금 설치, 공공도서관 건립, 카네기협의회 설립, 대학교수 연금 설립, 카네기공과대, 카네기교육진흥재단 설립 등에 생전에 쌓은 부의 90% 이상을 내놓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 과감한 도전과 용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는 책의 전편을 통해서 읽는 이를 감동시킨다. 그것은 오직 위대한 인간의 결단과 정직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가 생전에 쌓은 부를 사회에 환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참다운 부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 앞에 내보였다.

권준환 전 롯데호텔 감사실장


by 100명 2007. 4. 13. 23:15
디지털 기능에 복고풍 감성을 더해라
이른바‘복고’ 열풍이전자제품 시장에까지 불고 있다.

1960~70년대 복고풍 디자인을 재현한 제품이 요즘 들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 일명‘레트로(Retro) 가전’으로 불리는 이 제품들은단순히 디자인만 고풍스러운 게 아니라 최신 성능까지 갖춘 게 특징이다.

식음료, 패션 분야에서 불기 시작한 레트로 열풍은 가전, 가구업계로 번지는 모습이다.

올해 소비 트렌드의 키워드는 40~50대 감성을 자극하는 ‘복고’와 ‘우울’로 정리할 수 있다.

트렌드컨설팅 전문기업인 아이에프네트워크는 2007년 소비의 트렌드와 키워드로 ‘추억을 상품화하라’(Analogia)와 ‘우울한 세대’(Gloomy generation)를 꼽았다.

최근까지 첨단기술 제품이 주요 트렌드였다면 올해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은 상품이 떠오를 것이라는 분석이다.

아이에프네트워크 측은 “40~50대도 젊은 층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 투자하고 가꾸는 경향이점차 두드러질 것”이라며 “결국 40~50대 장년층을 위한 마케팅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실제 전자제품 전문점에서도이 같은 열풍을 엿볼 수 있다.

전자전문점 테크노마트에서는 충전식 라디오, 다이얼을 돌려서 주파수를 맞추는 아날로그 라디오, 미니 컴포넌트 등 구형 음향기기 판매가 지난해보다 20% 이상 늘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엠포리오 아르마니’는 지난해 말 태엽을 감아 쓰는 ‘기계식’ 손목시계를 선보였다.

최고급 명품 시계 브랜드들이 수백만, 수천만원대의 고가 기계식 시계를 만든 적은 있었지만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하는 패션 브랜드에서 기계식 시계를 내놓은 것은 처음이다.

이 시계를 수입 판매하는 갤러리어클락 측은 “기계식 시계에 관심 갖는 사람이 늘면서 40만∼50만원대 제품을 내놨다”며 “기계식 시계에 아날로그 감성을 넣은 게 주효했다”고 전했다.

옥션에서도 수동 필름 카메라판매량이 점차 늘고 있다.

2005년 8500대, 지난해에는 1만3800대가 팔렸지만올해 3월 현재까지만 1만8500대가판매돼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동카메라 마니아 층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러시아산 로모카메라는 5~7만원대로 옥션에 하루 평균 40여개의 매물이 올라오고 있을 정도다.

라디오에 대한 수요도 꾸준한 것으로 나타났다.

라디오의 경우 옥션에서 2005년 1분기 판매량이 3500여대에 불과했지만 2006년 같은 기간 5600대, 올해 3월 14일까지 9000여대가 판매돼 수동카메라와 함께 아날로그 가전제품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부엌가구업체 에넥스는 최근 옛날 한옥 마당에 있었던 평상과 온돌, 창호문 등을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부엌 디자인 ‘안채’를 선보였다.

■ 레트로(Retro) 가전 전문몰도 등장 ■

인터넷쇼핑몰 CJ몰은 지난해 8월부터 레트로 가전을 팔고 있다.

CJ몰이 최근 복고 트렌드에 맞춰 내놓은 ‘명장 황충길 예산옹기 맛 가마솥’이 대표적. 부엽토와 잿물을 입히고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굽는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상품은 소비자들 사이에 전기밥솥보다 밥맛이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황토 등 순수 자연소재로 만든 황토 쌀독도 주목받는 히트 상품이다.

플라스틱 쌀통에 비해 정감이 느껴지는 데다 통풍과 온도조절이 탁월해 쌀벌레가 생기지 않는 등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외국에도 복고 열풍에 동참한 제품들이 많다.

일본 티악사의 ‘SL-D900’은 196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라디오 제품의 디자인을 그대로 옮겨 놨다.

사각형의 빨간 상자 모양을 가진이 제품은 USB 단자가 내장돼 있어 CD 재생은 물론 MP3플레이어 재생도 가능하다.

가격은 일반 라디오에 비해 두 배가량 비싸지만 올 들어 매달 평균 30~40대씩 팔리고 있다.

초소형 콤팩트 스피커인 ‘스칸디나 마이크로포드 SE’ 역시사이즈는 작지만강력한 음질을 자랑한다.

미국 티볼리사의 ‘모델원’은 30cm 정도 크기의 고풍스러운 갈색 원목 케이스로 만든 라디오. 라디오 기능만을 지원하는데도 20만원대로 고가다.

금속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중저음 덕분에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말 판매를 시작한 이후 매달 평균 50~60대씩 팔리고 있다.

검정 케이스의 중후한 느낌을 주는 미국 크로슬리사의 ‘크로슬리 턴테이블’은 레코드 기능이 내장된 제품. 비행기 계기판과 같은 앞면의 작동 패널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일반 카페나 레스토랑을 비롯해레코드를 통해 추억의 음악을 듣기 위한 중장년층의 구매가 늘면서 지난해 말 이후 매달 평균 100대씩 팔리고 있다.

이런 열풍 덕분에 레트로 가전만 따로 취급하는 쇼핑몰도 등장했다.

온라인 쇼핑몰 리얼심플은 100여종의 레트로 가전을 팔고 있다.

가격은 10만~30만원대. 미국의 가전 및 디자인회사 크로슬리사로부터 제품을 수입 판매하고 있다.

월 평균 5000만원의 매출을 올려 처음 문을 연 4년 전보다 150%나 증가했다.

특히 ‘크로슬리 앤틱 공중전화기’는 1950년대의 미국 공중전화기 모양을 본떠 만든 가정용 전화기로 월 평균 100대씩 팔리고 있다.

휴대전화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휴대전화 4위 업체인 소니에릭슨은 음악 기능을 강화한 ‘워크맨폰’ 시리즈를 선보였다.

‘워크맨’은 소니사의 음악 플레이어 브랜드로 1979년 출시된 이후 3억4000만대나 팔린 인기 제품. 모토로라코리아도 90년대 중반 히트폰인 ‘스타택’을 모델로 한‘스타택Ⅲ’를 출시했다.

스타택은 국내 출시 후 4년간 130만대가 팔리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끈 모델. 스타택Ⅲ는 스타택 고유의 디자인을 살리기 위해 카메라도 장착하지 않았다.

모토로라는 스타택Ⅲ 마케팅에도 60년대 복고풍 콘셉트를 적용할 계획이다.

by 100명 2007. 4. 8. 22:12
당신도 ‘디지털 치매’?
컴퓨터·휴대전화 없으면 하루종일 멍 ~
음성원기자 eumryosu@munhwa.com
컴퓨터와 휴대전화 등 디지털 기기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지는 이른바 ‘디지털 치매’ 현상이 늘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실제 디지털 문명에 중독돼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등의 도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캐나다의 유명한 문화비평가 마셜 맥루한(1911~1980)은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에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능력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 컴퓨터는 두뇌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고 창조적 업무에 매진하라는 것이다.

◆ 디지털 치매는 병이 아니다 = 대기업 과장인 김모(39)씨는 최근 대학병원의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최근 아내의 전화번호가 가물가물할 때도 있고, 심지어 친구와의 10분 전 대화내용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해졌기 때문이다. 불과 10년전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친구의 전화번호는 물론 주소와 생일까지 기억하고 대중가요 20여곡의 가사 정도는 거뜬히 외우는 등 발군의 기억력을 자랑하던 그였다. 김씨는 “혹시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아 다행이다”고 말했다. 김표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최근 김씨와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며 찾아오는 직장인이나 자영업자들이 하루에 1~2명 있다”며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고 너무 많은 양의 정보를 접하다 보니 오히려 집중력이 떨어지는 일시적인 증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승현 고려대 의대 정신과 교수는 “서양 사람들이 슈퍼마켓에서 잔돈을 계산할 때 계산기가 없으면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이 같은 변화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는 것일 뿐”이라며 “병리적 현상인 ‘치매’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김원 서울백병원 정신과 교수도 “기억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 생기는 디지털 치매는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 ‘병’과는 다르다”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치매가 뇌의 하드웨어 자체가 망가지는 병이라면 디지털 치매는 집중력과 관심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 인간 능력의 확장 = 전문가들은 디지털 치매로 인한 기억력 감퇴 등은 문제될 게 없으며 창조적 업무로 눈을 돌리라고 조언했다. 김성태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는 “과거 인간이 걸어다니거나 말을 타고 다닐 때는 다리가 발달했고, 인쇄술이 발달했을 때에는 논리성을 반영하는 좌뇌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최근에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감성과 감각, 시각적인 요소의 활용이 높아졌다”며 “이처럼 장단점이 상존하고 새로운 기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만큼 부정적인 부분은 재차 지적해 극복하고 우리 삶의 양식을 바꿔나가면 된다”고 말했다.

김용학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디지털 치매와 같은 디지털 시대의 부작용을 그저 부작용으로만 볼 게 아니라 우리 생각이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며 “이른바 지식정보와 같이 단순 암기를 강조하는 교육에서 벗어나 보다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지적 활동으로 인간의 교육이나 지식연구, 활동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준기 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도 “우리가 직접 해야만 했던 단순한 작업은 이제 기계가 대신해주고 있으니 창조적인 일에 매진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말했다.
by 100명 2007. 4. 8. 22:09

[과학] 그리스 원형극장 음향의 비밀 풀렸다

1만4천명이나 되는 청중이 배우와 악사들의 소리를 확성장치 없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던 그리스 에피다우루스의 고대 원형극장의 비밀은 계단식 관중석의 재료인 석회암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라이브사이언스 닷컴이 보도했다.

저명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폴리클레이토스 2세의 걸작품인 기원 전 4세기의 이 원형극장은 무대를 중심으로 동심 반원을 이루는 55줄의 관객석 맨 뒷줄에서도 배우의 육성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니코 데클레르크 등 미국 조지아 공대 과학자들은 첨단 시설로도 따라가기 어려 운 이 놀라운 음향의 비밀을 밝혀냈다고 미국 음향학회 저널 최신호에서 발표했다.

이들은 석회암 계단들이 청중의 웅성거림과 같은 저주파를 흡수해 배경 소음을 줄이는 여과기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고주파를 청중석으로 반사해 효과를 증폭시 키는 기능까지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계단식 청중석의 표면이 이루는 굴곡은 천연적인 음향 포착 기능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배우의 저주파 음역까지 흡수될 것 같지만 실제로 청중은 `버추얼 피치'라 불리는 현상을 통해 음역의 사라진 부분을 머리 속에서 복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 화통화를 할 때 상대방의 음성을 저주파없이 듣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연구진은 뜻밖에도 이 극장의 놀라운 음향은 우연에 의한 것일 뿐 실제로 설계 자들은 이런 음향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에피다우루스 극장의 음향을 재현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목재 등 다른 재료를 사용했다가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엔 계단의 경사도가 음향 효과와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같은 경사도의 실험시설을 만들어 보았으나 배우의 음성은 전달됐지만 저주파 음역이 흡 수돼 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초음파를 비롯한 수많은 모델을 사용해 실험한 결과 500헤르츠 이하의 저음역대는 더 낮아지지만 500헤르츠 이상의 고음역대는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by 100명 2007. 4. 7. 09:35
'주몽' 4월25일 日 안방극장 입성
후지TV 위성방송, 특집방송까지 마련

국민적 관심 속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MBC TV드라마 '주몽'이 제일 먼저 일본 열도에 상륙한다.

화제작 '주몽'은 위성방송 BS후지를 통해 다음달 25일부터 방송될 예정. 19일자산케이스포츠 인터넷판에 따르면, 후지TV 측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주요등장인물 인사말과 촬영현장 스케치 등으로 꾸며진 특별 프로그램을 4월 초에 편성한다.

신문은 '주몽'에 대해 "고구려의 건국 영웅의 일대기를 담은 81회의 대장편 드라마로 한국에서 지난해 5월 첫회 시청률 17.4%를 기록한 이래 올 1월 68회부터 50%대를 유지하다가 최종회는 51.9%까지 기록한 '괴물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타이틀롤 송일국은 "한 남자의 성장 드라마인데, 일본 시청자 여러분들도 주몽을 사랑해 달라"고 당부했으며, 소서노 역의 한혜진은 "대본을 본 순간 히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두근거리는 인물과 이야기가 세대를 뛰어넘어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했다.

by 100명 2007. 3. 20. 07:20
‘잘못되면 조상 탓’ 과학적 증명?
[한겨레 2007-01-31 05:09]

[한겨레]
전통풍수를 과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한 국내 첫 공학박사가 탄생한다.

영남대 대학원 응용전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박채양(49·대구도시개발공사 부장·왼쪽)씨와 최주대(57·경상북도 산림소득개발원장·오른쪽)씨는 묘의 위치와 형상이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을 통계학적 방법으로 분석한 학위논문으로 다음달 22일 영남대에서 공학박사(응용전자학) 학위를 받게 된다.

이들이 지난 3년간 준비한 박사학위 논문은 ‘묘소의 입수상태와 후손번성’(박채양)과 ‘산비탈에 있는 묘소와 자손번성’(최주대)으로 최근 논문심사를 통과했다.

이들은 17세기 이후 조성된 묘 가운데 근거가 분명한 전국 50개 가문의 묘소를 선정해 박씨는 산봉우리에 위치한 묘소를, 최씨는 산비탈에 위치한 묘를 답사해 토목측량법으로 형상을 관측했다. 관측 결과에 따라 묘의 기본유형을 데이터로 정리하는 데만 꼬박 1년반이 걸렸다. 이들은 다시 1년반 동안 각각의 묘에서 5대에 이르는 후손 중 기혼남성 2800여명의 번성상태를 면밀히 조사·검토하고 그 데이터를 사회과학 통계프로그램(SPSS)으로 분석해 전통 풍수이론에 대한 과학적 검증을 시도했다.

그 결과 이들은 논문에서 선대 묘소의 위치나 형상이 후대의 자손 번성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입증해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그의 논문에서 “산봉우리에 묘를 써서 묘 꼬리에 이상이 있을 경우에는 장자나 장손자에게 아들이 없을 확률이 높고, 5대 이내 그 가문이 절손됐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최씨도 “경사가 15% 이하인 정상 묘의 경우에는 5대손인 기혼남성의 수가 34명이었지만 경사가 30% 이상인 산비탈 묘소의 경우 절반 수준인 18명으로 급감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논문을 지도한 이문호(신소재 공학부·가운데) 교수는 “전통풍수이론을 과학적 논리전개와 검증을 통해 제도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며 “인문학의 영역에 응용과학적 방법론을 접목시켰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by 100명 2007. 1. 31. 07:18
교통사고 경찰신고 의무화 추진




앞으로 전치 3주 이상의 진단이 나오는 교통사고 등 차량 대인사고 발생시 보험금 지급에 앞서 경찰신고 및 조사를 의무화 하는 방안이 보험업계에 의해 추진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현행 보험사 주도의 사고처리 및 보상체계로 인해 이른바 '나일론 환자' 등에 의한 보험금 누수 및 보험사기가 증가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제도개선의 관건이 되는 경찰의 협조가 이뤄지기 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3일 손해보험 업계에 따르면 업계는 앞으로 교통사고로 전치 3주 이상의 진단이 나오는 대인사고 발생시 '경찰신고 이후' 보험사에서 보험금 지급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연내 정부에 건의하기 위해 기초 조사작업을 시작했다.

손보업계 관계자는 "자동차보험에 대한 도덕적 해이가 이미 도를 넘어서고 있어 선량한 보험가입자들의 피해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며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보험금 지급에 앞서 경찰조사가 반드시 선행할수 있도록 제도정비를 위해 기초적인 데이터조사를 수행할 용역을 조만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재 대형보험사들은 용역발주를 위해 업계간 의견수렴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용역작업 과정에는 외부 전문연구 기관과 보험학과 관련 교수, 소비자단체 등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실제 교통전문 시민단체인 교통문화운동본부 최근 발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3년 기준으로 경찰 통계상 교통사고 부상자수는 37만6503명에 불과하지만 같은 기간 보험사 통계는 이보다 3.2배나 많은 120만5428명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웃 나라인 일본의 경우 2003년 기준 경찰통계상 부상자수는 118만1431명으로 120만6408명인 보험통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경우, 경찰조사 등 제3자의 사고 경위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보험사 주도의 사고처리 및 보상이 이뤄지다 보니 보험금 누수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는게 업계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감독당국은 보험업계의 자구노력은 환영할 만한 하지만 경찰조사 의무화에 따른 부작용 측면도 함께 고려,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보험감독국 관계자는 "경찰이 개입되면 보험금 지금까지 과정에 투명성이 제고돼 보험금 누수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하지만 경찰협조가 필수적인 만큼 제도개선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고 경미한 사고까지 경찰에 신고할 경우, 가뜩이나 심각한 교통체증이 가중되는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by 100명 2007. 1. 24. 09:35
수성의 ‘태양 여행’
[한겨레 2006-11-09 23:42]

[한겨레] 태양계 첫번째 행성인 수성이 태양 앞면을 지나가는 현상이 9일 한국에서 관측됐다. 오전 4시12분부터 9시10분까지 4시간58분 동안 진행된 이 현상은 국내에서는 2032년에나 다시 볼 수 있다. 서울에서는 해돋이 시간과 흐린 날씨 때문에 오전 8시30분께(사진 맨왼쪽)부터 관측이 시작돼 9시 10분께(맨 오른쪽) 태양면을 벗어나는 수성의 모습을 카메라에 잡을 수 있었다. 500mm 망원렌즈. 젤라틴 필터 사용.

by 100명 2006. 11. 10. 07:24
늦가을 하늘…우주쇼 장관
[YTN TV 2006-11-05 12:43]
[앵커멘트]

늦가을 하늘에 보기 드문 우주쇼가 펼쳐집니다.

우선 이번 주 목요일에는 수성이 태양의 표면을 통과하는 수성식이 일어나고 18일 새벽에는 사자자리 유성우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김진두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7년 전 11월 9일, 수성이 태양의 표면을 지나는 수성식이 일어났습니다.

올해도 같은 날, 희귀한 이 우주쇼가 재현됩니다.

새벽 4시 12분, 검은 점으로 보이는 수성이 태양의 좌측면으로부터 진입을 시작해 오전 9시 10분까지 4시간 58분 동안 태양의 아랫 부분을 가로지릅니다.

해가 오전 7시 5분에 뜨기 때문에 수성식을 볼 수 있는 시간은 2시간 정도에 불과하지만 태양 투영판이나 필터를 이용하면 장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다음 수성식이 2032년에나 나타나기 때문에 이번 수성식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인터뷰:이태형, 충남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수성과 지구의 공전면이 다소 어긋나 있기 때문에 수성식이 100년에 5차례 정도 밖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2001년, 한시간에 만개 이상의 별똥별이 떨어졌던 사자자리 유성우가 올해도 11월 19일에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번에는 힌시간에 별똥별이 100개 정도 떨어질 것으로 보여 2001년과 같은 장관을 연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유성을 관찰할 수 있는 주변 여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합니다.

[인터뷰:이태형, 충남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올해는 새벽 5시 쯤에 극대가 나타나고 달도 그믐이기 때문에 유성을 보기 위한 환경이 아주 좋습니다."

늦가을 하늘을 수놓을 환상적인 우주쇼.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움츠러든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by 100명 2006. 11. 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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