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독, 미디어 시장 최고의 기회주의자
[미디어월드와이드-한국언론재단 제공] 루퍼트 머독 가라사대-TIME 인터뷰

뉴스코퍼레이션의 루퍼트 머독 회장은 월스트리트 저널의 모회사 다우존스를 인수하는 거래에서 소유주 밴크로프트 가문과 잠정 합의했다. 머독이 권위지 월스트리트 저널을 인수하는 문제는 그동안 미국 언론계에서 많은 논란을 빚어 왔다.

▲ 루퍼트 머독
머독이 그동안 언론계에서 보여준 행태로 볼 때 월스트리트 저널은 황색 저널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반면, 타블로이드 같은 대중지는 재미를 위주로 하지만 머독이 인수하는 권위지는 그동안 진지한 편집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 같은 우려가 기우라는 주장도 있었다. 미국 유력 주간지 타임(Time)의 에릭 풀리(Eric Pooley) 기자가 머독을 독점 인터뷰해 타임 2007년 6월 28일자에 게재했다.

WSJ 인수의 긴박한 순간

“50억 달러를 받아가면서 경영권은 계속 자기들이 갖겠다고?” 머독은 전화기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재정적으로 위기인 기업을 말이야. 경영권을 계속 갖겠다면 회사를 팔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이 안 된다. 미안하다.”

6월 22일 금요일 오후 5시가 조금 못된 시각, 자산 가치 680억 달러의 세계 세 번째 미디어 그룹이면서 1인 지배하의 흔치 않은 공룡기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은 맨해튼 한가운데에 위치한 본부 사무실 8층 책상 앞에서 10년 동안 간직해 온 꿈을 이루게 해줄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사무실에는 머독 이외에 벽에 설치된 6개의 평판 모니터가 소리를 죽인 채 11개의 채널에 맞춰져 있다. 5개의 모니터는 분할 화면으로 10개의 방송을 보여주고, 머독이 사랑하는 폭스 뉴스(Fox News)는 전용으로 1개의 모니터를 사용했다. 그러나 머독은 모니터를 쳐다보는 적이 없었다.

그는 전화기 저 편에 있는 투자증권업자에게 부드럽게, 하지만 연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머독이 상의와 넥타이를 벗으면서 갈색으로 염색된 가는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논란이 많았던 다우존스와 그 핵심인 월스트리트 저널을 인수하기 위한 50억 달러의 거래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머독은 포커 게임을 하고 있었다. 거래를 계속 진행시키던지, 아니면 자신은 빠지겠다고 위협을 해야 했는데, 머독은 진심이었다.

▲ 루퍼트 머독이 운영하는 미디어 기업 뉴스코퍼레이션 (News Corporation)
두 달 전인 3월 29일, 뉴스코퍼레이션에서 가진 비밀 조찬에서 머독은 주당 60달러에 다우존스를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이 회사 CEO 리처드 자니노에게 했는데, 이 가격은 당시 다우존스의 시장거래가가 주당 36달러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우존스를 100년 이상 경영해 온 밴크로프트 가문은 황색 언론인 머독의 타블로이드 스타일에 진저리를 치고, 월스트리트 저널의 독립성을 유린한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제안을 거절했다. 밴크로프트 가문은 월스트리트 저널의 편집국을 머독으로부터 분리하는 방안에 대해 2주 동안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인터뷰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보다 몇 시간 전에 자니노는 머독에게 전화를 걸어 밴크로프트 가문의 제안이 최종 작성에 들어갔다고 알렸고, 머독은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머독은 밴크로프트 가문의 제안을 증오했다. 자신이 인수한 후에도 밴크로프트 가문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대한 지배권을 전보다 더 강화한다는 것이 제안의 내용이었다. 머독은 팔소매를 걷어 올린 후 전화기에 대고 이야기했다. 거래의 주요 당사자들에게 자신의 기분을 알려 거래를 취소하겠다는 압력을 넣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다우존스의 주가는 다시 곤두박질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50억 달러의 힘

“데이브, 50억 달러를 그냥 버릴 수는 없네”라고 머독은 뉴스코퍼레이션의 재무담당 최고책임자(CFO) 데이브 드보(Dave DeVoe)에게 말했다. 그는 제안 철회 여부를 3명의 자문위원과 상담했다. 그룹의 대표법률고문 론 제이콥스(Lon Jacobs), 사무실에 함께 있던 법인담당 대표 개리 긴스버그(Gary Ginsberg), 그리고 뉴스코퍼레이션의 유럽위성TV 대표이며 상속자인 제임스 머독(James Murdoch)으로 스페인의 발렌시아(Valencia) 근처 요트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머독은 밴크로프트 가문을 위협해서 현실적인 제안으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거래를 끝내더라도 자신이 직접 끝내기를 원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협상을 끌고 가면 밴크로프트 가문은 제안을 거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전화벨이 다시 울렸고 자니노가 받았다.

“자니노, 제안을 읽어 봤는데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머독은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대충 설명했다. “그래. 이 제안을 거절하네.” 나중에 밝혀졌지만 머독은 자신의 제안을 철회할 필요가 없었다. 철회하겠다는 위협만으로 밴크로프트 가문의 양보를 받아내기에 충분했다.

며칠 후 머독과 다우존스 이사회는 독립편집감시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밴크로프트 가문을 위한 지분도 충분히 인정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순간에서도 거래는 물거품이 될 수 있었고, 특히 이 거래는 휘발성이 강했다.

그러나 1주당 여러 개의 의결권을 가진 슈퍼보팅 클래스(Class)B 주식으로 다우존스의 경영권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밴크로프트 가문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 소중한 신문과 회사를 파는 거래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렵게 됐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100종 이상을 거느린 ‘신문왕’

거래가 기대대로 진행된다면 호주 애들레이드(Adelaide)에서 1953년 신문 한 종으로 출발한 궁극적 문외한이며, 잉크 묻은 침입자인 머독은 미디어 제국에 자본주의의 일간지를 하나 추가하게 된다. 머독의 제국은 폭스 무비 스튜디오와 TV 네트워크, 유럽과 아시아의 위성TV, 100종 이상의 신문, 인기가 치솟는 사교 네트워크인 마이스페이스(MySpace)를 포함해 급성장하는 인터넷 사업부 등을 거느리고 있다.

2년 전 머독의 주요 라이벌인 바이아컴(Viacom)의 섬너 레드스톤(Sumner Redstone)은 마이스페이스를 사들일 생각을 했으나 뉴스코퍼레이션이 달려들어 감히 생각하지 못했고, 뉴스코퍼레이션은 레드스톤보다 3,000만 달러나 더 지불한 5억 8,000만 달러로 이를 채갔다.

이 사이트는 회원이 2,000만 명에서 2억 명으로 늘었고, 구글(Google)이 광고권을 확보하기 위해 9억 달러를 지불하자 갑자기 머독의 인수 비용이 헐값으로 여겨졌다. 머독은 인터넷 몽상가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는 “그러나 사실은 민첩했고 운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머독은 미디어 시장에서 아마도 가장 재능 있는 기회주의자로서 큰 재산을 모았다. 다우존스를 인수하고, 마이스페이스를 야후에 넘기고, 폴란드에 TV 방송국을 개설하는 등 각종 기업 거래를 찾아다니며 킁킁거리는 그의 코 때문에 그는 진정한 미디어의 황제는 결코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머독 일가가 의결권을 갖고 있는 뉴스코퍼레이션의 주식 비중이 31%에서 지난해에는 18%나 급상승했다. 머독의 주식은 90억 달러 상당이다.

무엇보다 의문이 간다. 지칠 줄 모르는 70대 노인은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경제 정보를 팔 수 있는 황금의 기회를 다 놓치고 이제 허약해진 다우존스 같은 미디어를 인수해서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몇몇은 다우존스가 재정적으로는 어렵지만 회원전용 웹사이트를 성공시킨 우수하고 세계적인 인쇄 매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머독은 곧 개국하는 폭스 비즈니스 채널(Fox Business Channel)을 운영하고, 유럽의 24시간 채널인 스카이 뉴스(Sky News)를 강화하며, 여전히 불안정한 일련의 온라인 금융 서비스를 자극하기 위한 엔진으로 다우존스를 생각하는 것이다. “판을 크게 짜야 한다”고 머독은 말한다. “경제 뉴스와 정보를 인쇄 매체뿐만 아니라 케이블TV에도 팔고, 온라인에서도 팔 것이다.”

경제적 조건으로 보면 다우존스의 거래는 단순하다. 머독이 지불하는 50억 달러는 다우존스가 지난 해 253억 달러의 매출에 23억 달러의 순이익을 냈고 빚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금방 회수 가능하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단순하지만 나머지 모든 부분은 복잡한 거래다. “다우존스의 주당 가격은 60달러에 업계의 ‘비방’을 더한 값”이라고 머독은 말한다.

고급지를 대중지로

머독은 1976년 가족 소유로 망해가는 자유주의 신문인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를 인수하면서 “현재의 정책과 전통을 유지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곧 우파로 급선회해 고급지보다는 대중지를 표방했다.

이때 당한 타블로이드의 테러 때문에 오늘날 미국 언론계의 많은 단체들이 머독의 월스트리트 저널 인수를 맹렬히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 가운데는 원칙이 있는 반대도 있지만 진지한 체 하거나 이념적, 상업적 동기로 얽힌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머독은 자신의 매체를 동원, 연일 자신을 위한 탐사보도 기사를 쏟아내고 있으며 친구에게는 상을 주고 적에게는 벌을 내린다. 이 모든 기사가 암시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월스트리트 저널 뉴스면을 자신의 것으로 이용해 월스트리트 저널의 명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사설은 머독보다 더 보수적으로 변했다.

그러한 징후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1984년 워너 커뮤니케이션스(Warner Communications)를 인수할 당시 머독은 3명의 뉴욕 포스트 기자에게 워너 사장인 스티브 로스(Steve Ross)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것은 신문 기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로스를 물러나게 하려는 머독의 변호사의 의도였다. 이에 대해 머독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우리가 잘못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1998년 자신의 출판사인 하퍼콜린스에 홍콩의 마지막 영국 총독인 크리스 패튼(Chris Patten)의 회고록 출간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패튼이 중국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 대해서도 내가 틀렸을 것”이라고 머독은 말한다. “오랜 경험을 쌓으면서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실수를 했다.”

머독을 잘 아는 사람들은 주요 언론이 그를 희화화했다고 얘기한다. “머독은 너무 악마로 그려졌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신문이 객관성이 없다고 비난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객관성이 없는 것”이라고 영국의 미디어 비평가 로이 그린슬레이드(Roy Greenslade)는 말한다.

그는 영국의 좌파 신문인 가디언(Guardian)에 글을 쓰면서 런던의 시티 유니버시티(City University)에서 언론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머독이 선정적인 타블로이드와 진지한 신문을 구별할 줄 안다는 사실”이라고 그린슬레이드는 말한다. 그는 머독 소유의 선정적인 타블로이드 선(Sun)과 진지한 신문인 대판형의 선데이 타임스(Sunday Times) 모두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타블로이드에서 머독의 말은 신의 말이다. 하지만 진지한 신문에서는 많은 토론의 여지가 주어진다.”

“나의 양면을 이해해 달라”

우리는 6월 어느 날 오후 맨해튼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실수를 한다. 그러나 뉴욕 포스트가 잘못하는 것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뉴욕 타임스에 앞서 뉴욕 포스트를 읽기 원한다. 대중지와 고급 엘리트 신문 사이에는 그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우리는 두 가지 모두 가지고 있다. 폭스의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과 ‘24’도 있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National Geographic Channel)’도 가지고 있다. 외부 사람이 그러한 것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머독은 화려하지 않고 실용적이다. 그는 강한 정치인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토니 블레어와 힐러리 클린턴 같은 중도 노선을 지지한다. 하지만 머독은 고집스런 대중주의자이고, 그러한 출구를 폭스 뉴스에서 찾았다.

폭스 뉴스는 불만에 찬 백인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채널이다. “CNN은 매우 오랫동안 왼쪽으로 기울었다. 기사를 선택하는 것을 보면 객관적이 아니라 심하게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 뉴스를 보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울었다는 생각이 드는가? 나도 모르겠다.” 머독이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을 인수한다면 편집을 바꿀 계획이 전혀 없다고 머독은 맹세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경제기사 취재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하지만 취재 대상은 넓힐 것임을 암시한다. 머독은 국가의 의제 설정에 있어서 뉴욕 타임스와 경쟁하고 싶어 한다. “뉴욕 타임스에 대한 나의 우려는 전국종합 엘리트 신문이라는 자세를 일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TV 방송국들도 뉴욕 타임스에서 뉴스의 방향을 잡고, 지역 신문들도 그렇게 한다. 막대한 영향력이다. 우리는 그것에 도전해 보고 싶다.”

머독의 인수 여부를 떠나 월스트리트 저널에는 변화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신문과 마찬가지로 변화하고 적응해야 한다. 그동안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점은 머독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지난 3년 동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몸집을 줄여 원가를 절감하고 더 많은 광고주를 유치하기 위해 토요판을 신설했다. 15년 동안 월스트리트 저널의 특파원을 지낸 새로운 편집국장 마커스 브로클리(Marcus Brauchli)는 자신이 조직한 편집 에디터들을 임명했다. 머독은 브로클리를 ‘변화의 기수’라 부르며 유임을 약속했다.

머독은 사용자로서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을 경험한 기업인으로서도 인터넷의 파워를 실감했다. 2004년 말 그는 “인쇄 매체의 광고가 잠식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TV로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머독은 로스앤젤레스에 폭스 인터랙티브 미디어(Fox Interactive Media)를 설립하고 인수할 기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게임 회사인 IGN, 스포츠 사이트인 스카우트(Scout), 마이스페이스 등을 사들였다. 마이스페이스는 주요 라이벌인 레드스톤으로부터 뺏다시피 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는 정말 달콤했다.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머독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나에게 교육이었고, 인터넷 항해를 위한 첫 출발이었다. 과거에는 진지한 젊은 사이트였지만 지금은 평균 연령이 올라가고 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황제’

마이스페이스보다 훨씬 규모가 작지만 주요 라이벌인 페이스북(Facebook)이 뜨고 있다. 대학 사이트로 시작해 규모를 넓히고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면서 사람들이 소규모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까지 제공했다. 그러나 마이스페이스가 붐비려는 조짐이 보이자 머독은 야후의 주식 25% 이상을 받고 마이스페이스를 야후에 파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야후의 대표가 바뀌어 공동창업자인 제리 양(Jerry Yang)이 대표직을 맡으면서 협상은 중단된 채 관망하고 있는 상태다.

머독은 모든 미디어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미디어 회사는 기본적으로 뉴스, 아이디어, 엔터테인먼트, 광고 등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하게 하는 매개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인터넷은 매일매일 공짜로 모든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은 광고가 지원돼야 한다.”

머독은 언론을 사랑했으며 언론을 이용해 돈을 벌고, 정치와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헨리 루스(Henry Luce),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윌리엄 팰리(William Paley) 등과 같이 최근에 성공한 마지막 미디어 황제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항상 곁눈질을 할 수 있었다.

그를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머독은 새로운 미디어 황제로 21세기를 맞았다. 그가 월스트리트 저널을 좋아하는 만큼, 그는 현재의 복잡한 미디어 환경에서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을 걱정하는 것이 그의 비즈니스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밴크로프트 가문은 월스트리트 저널 독립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해냈다. 그러나 당면한 비즈니스에 대해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머독이 돈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부자이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녹슬게 하기에는 너무 언론에 깊게 개입해 있다. 그러나 머독은 머독이다. 머독은 잉크를 배럴로 사서 신문을 찍어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by 100명 2007. 8. 20. 07:50

이슈&피플] 제주의 미래산업 ‘물’ 가능성과 과제
<3>지속발전 가능 ‘물산업 전제 조건 ’
활용&보존 ‘두마리 토끼’잡자
지하수 소비 억제 원수대금 현실화
공공자원 인식 관리 재원 확보부터

제주특별자치도가 최근 내놓은 물 산업 육성계획은 제주 미래의 꿈과 희망이다. 침체된 제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제주의 산업구조를 단숨에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도민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기대의 중심에는 제주의 청정 지하수가 자리잡고 있다.

청정 지하수는 물 산업의 핵심이며, 이를 빼놓고 물 산업을 논할 수 없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청정 지하수를 제주 미래의 꿈과 희망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활용계획과 함께 철저한 보전관리 대책이 전제돼야 한다.

물 산업을 육성, 오는 2017년까지 연 4000억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도의 야심찬 꿈도 철저한 보전관리 대책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지속적 희망이 아닌 일시적 희망에 그칠 수밖에 없다.

물 산업이 제주 미래의 지속적 희망으로 남기 위해서는 우선 물 산업 수익금을 지하수 보전관리환경보전에 재투입하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특별법 개정을 통해 물 산업 육성 수익금을 지하수관리특별회계 세입으로 명문화하는 등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또 지하수 원수대금이 상수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책정돼 발생되고 있는 지하수 난개발과 과소비를 차단하기 위해 지하수 원수대금의 현실화도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제주 청정 지하수가 무한 자원이 아닌 유한 자원이란 점도 간과해선 안된다.

유한 자원이란 점에서 지하수를 활용한 먹는 샘물과 제주산 맥주, 기능성 음료, 녹차 등을 제조하고 개발하기에 앞서 지하수 개발 및 이용량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설정, 적절한 수준의 지하수 활용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지하수 부존량이 강수량에 좌우되는 만큼 도 전역을 대상으로 지하수위 변화를 실시간으로 관측할 수 있는 관측망을 확대하는 등 체계적인 지하수 관리체계가 물 산업 육성의 전제조건이다.

뿐만 아니라 제주 청정 지하수를 공수화 개념에서 접근,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활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전문조직 육성도 필요하다.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2015년 목표 물 산업 육성계획에 따라 지난 6월부터 물 산업 육성과를 신설, 운영하고 있는 점에 발맞춰 제주도 물 산업 육성과 지속적인 보전관리 체계 구축을 위해 조직정비가 시급하다.

고기원 도 수자원본부 연구실장은 “물 산업 육성계획은 체계적인 보전관리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제주의 일시적 희망에 그칠 공산이 크다”며 “육성 계획과 함께 체계적인 보전관리 대책 마련과 전문조직 육성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by 100명 2007. 7. 17. 20:56

좁쌀막걸리 원조, 제주 '오메기술'이우다
김을정 모녀 명맥...14일부터 제주민속촌박물관 체험행사

▲ 오메기떡을 만드는 김을정 할머니와 강경순 전수자
ⓒ 정희종
전국에 있는 유명한 산이나 계곡 등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에 있는 식당에 가면 '조껍데기술'이라고 판매하는 술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좁쌀 껍데기로 술을 만들 수는 없다. 이는 좁쌀막걸리를 재미있게 말한 것뿐이다. 좁쌀막걸리도 원래부터 있던 말이 아니며 정확한 단어는 '오메기술'이다.

좁쌀막걸리 원조는 제주 오메기술

좁쌀막걸리의 원조는 제주도이다. 제주도가 관광지로 유명해지면서 좁쌀로 만든 막걸리가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다른 지방으로 퍼져 나가 지금은 전국 어디에서나 좁쌀막걸리를 찾아볼 수 있다.

▲ 차좁쌀 가루로 만든 오메기 떡
ⓒ 정희종
제주도는 화산섬으로서 토양 자체가 화산회토이고 물이 잘 빠져서 예로부터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었다. 예전에 제주도 사람들의 주요 식량은 조와 보리였다.

그중에서도 조는 제주도 내 토양이 비옥한 곳이면 어디에서든 농사를 지었으며, 제주사람들의 주요 식량이었다. 따라서 조를 중심으로 한 문화가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탁주와 청주도 좁쌀로 만들었다.

특히 차좁쌀로 만든 오메기떡을 별미로 많이 만들어 먹었는데, 오메기떡으로 만든 막걸리가 바로 오메기술이다. 오메기술과 좁쌀막걸리의 가장 큰 차이는 오메기술은 오메기떡을 직접 손으로 만든 다음에 그것을 이용하여 술을 만드는 반면, 좁쌀막걸리는 좁쌀을 기계로 쪄서 술을 만드는 데에 있다.

예전에 제주사람들은 집집마다 오메기술을 만들어서 잔치나 제사 등 크고 작은 집안 행사나 명절 때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옛 전통 방식대로 오메기술을 만드는 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금도 좁쌀막걸리는 대량으로 생산되어 일반 음식점에서 판매되고 있지만 '오메기술'은 기능 보유자에게 주문 제작해야만 맛을 볼 수 있다.

김을정 할머니 모녀 오메기술 명맥 이어

'오메기술'은 제주도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읍민속마을에서 예전부터 오메기술을 만들어 온 김을정(83) 할머니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고, 딸인 강경순씨가 전수자가 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김을정 할머니는 직접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차좁쌀로 오메기술을 만들고 있다.

▲ 오메기술 만드는 재료와 도구들. 대바구니에 담긴 누룩과 키에 담긴 차좁쌀.
ⓒ 정희종

만드는 과정은 먼저 차좁쌀을 갈아서 가루로 만든 다음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 반죽하여 동그랗고 납작한 모양의 오메기떡을 만든다. 끓는 물에 넣어서 떡이 물 위로 떠오를 때까지 저어주면서 삶는다. 익은 떡이 물 위로 떠오르면 차례로 건져낸다.

익은 오메기떡은 손이나 주걱으로 문질러 으깨야 하는데, 떡이 식어 버리면 잘 안 풀리므로 뜨거운 상태에서 물을 적시며 문질러 골고루 으깬다. 차좁쌀로 만들기 때문에 매우 찰져서 쉽게 으깨지지 않는 특성이 있어서 으깨는 작업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

▲ 삶아낸 오메기떡을 다시 으깨는 과정
ⓒ 정희종
으깬 떡에 누룩가루를 넣으면서 골고루 섞이도록 물을 부으면서 잘 반죽하고 적당량의 물을 붓고 항아리에 옮겨 담는다. 하루에 4~5번씩 저어주면서 발효시키는데, 처음에는 우유빛깔을 띠다가 4~5일 지나면 약간 검은 빛을 띠는 노란색으로 변한다.

▲ 으깬 오메기떡에 누룩과 물을 섞어서 반죽하여 술을 만든다
ⓒ 정희종

일주일쯤 지나면 위에는 맑은 웃국이 뜨고, 밑에는 탁한 찌꺼기가 가라앉는다. 윗부분을 청주라 하여 고급으로 쳐 따로 병에 담았다가 제사 때 사용하고, 밑에 가라앉은 알국을 떠내어 체로 쳐낸 것이 탁배기라고 하여 평소에 고된 농사일을 끝내고 돌아와서 한 대접씩 들이키면서 피로를 풀곤 했다.

오메기술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공 감미료의 맛이 전혀 나지 않으며, 처음에는 시큼하면서도 텁텁하지만 계속 음미하다 보면 차좁쌀의 진한 향기와 오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 왼쪽은 처음 만든 술, 오른쪽은 만든 지 나흘된 오메기술
ⓒ 정희종

제주민속촌박물관에서는 제주도의 전통 민속주인 무형문화재 '오메기술' 제작 체험 및 무료 시음 행사를 7월 14일부터 7월 17일까지 연다. 오메기술 기능보유자인 김을정 할머니와 전수자인 강경순씨가 직접 오메기떡과 술을 만드는데,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제주도의 전통 민속주를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으며, 또한 원하면 직접 오메기떡을 만들고 술을 만드는 체험도 할 수 있다.

by 100명 2007. 7. 13. 22:44

돼지고기 대신 값싼 들쥐를 먹자?

둥팅호 들쥐 식당서 판매 소문… 일부 네티즌 식용 부활 기대

“돼지고기 대신 값싼 들쥐를 먹자.” 후난(湖南)성에서 들쥐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최근 광둥(廣東)성에서 갑자기 들쥐에 대한 식용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후난성 둥팅(洞庭)호는 홍수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주변에서 서식하던 들쥐가 농가로 들어와 피해가 극심해지자 주민이 20억마리로 추정되는 들쥐 소탕작전을 펼친 결과 200여만마리(약 90t)를 살생했다.

죽은 쥐가 호수 주변에 나뒹굴며 수질 오염과 페스트 발생이 우려되는 가운데 광둥 성 일부 식당이 둥팅호 들쥐를 식용으로 팔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광둥성 화디완(花地灣) 미식타운의 한 식당주인은 “네덜란드산 관상용 쥐를 식용으로 사용하지만 가격이 비싸 일부 양심이 불량한 업주가 후난에서 공수해 왔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둥팅호 들쥐 판매 소문에 대해 광둥인은 이번 기회에 들쥐 식용을 부활하자는 엉뚱한 바람으로 퍼지고 있다. 한 네티즌은 둥팅호의 들쥐를 광저우로 가져오자고 제안했다. 일부 네티즌은 쥐고기를 먹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다양한 요리방법을 사진으로 올리기도 했다. 어떤 네티즌은 가격이 많이 오른 돼지고기를 쥐고기로 대체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 같은 광둥 네티즌의 반응에 대해 한 허난(河南)성 네티즌은 “들쥐 천적인 광저우 사람을 둥팅호로 데려가 쥐 먹기 대회를 여는 게 낫겠다”며 비꼬았다.

광둥 시 애국위생판공실 책임자는 “사스 발발 이후 들쥐 판매와 식용을 금하고 있이 때문에 둥팅호 쥐가 광둥으로 유입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면서도 신고를 당부했다, 지난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발생 이전에 들쥐 요리는 코스 요리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 요리였다. 그러나 현재 들쥐 요리 판매가 금지됐다.

by 100명 2007. 7. 13. 12:28
1만년전 새끼 매머드 발견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7-12 06:05

[동아일보]

러시아 과학자들이 시베리아 야말 반도에서 발견된 1만 년 전 매머드의 사체를 살펴보고 있다.

이 매머드는 5월 한 순록 목동이 냉동 상태로 보존돼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해 연구 가치가 크다고 영국 BBC방송이 10일 전했다. 몸길이는 130cm, 무게 50kg으로 생후 6개월 된 암컷. 미국 핫스프링 매머드유적 연구센터의 래리 어젠브로드 박사는 “잘 보존된 매머드 사체에서 유전자(DNA)를 추출해 매머드를 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매머드는 480만 년 전 출현해 유라시아 대륙에서 번식하다 5000∼1만 년 전 멸종했다.

1만년전 새끼 매머드 발견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7-12 06:05 기사원문보기

[동아일보]

러시아 과학자들이 시베리아 야말 반도에서 발견된 1만 년 전 매머드의 사체를 살펴보고 있다.

이 매머드는 5월 한 순록 목동이 냉동 상태로 보존돼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해 연구 가치가 크다고 영국 BBC방송이 10일 전했다. 몸길이는 130cm, 무게 50kg으로 생후 6개월 된 암컷. 미국 핫스프링 매머드유적 연구센터의 래리 어젠브로드 박사는 “잘 보존된 매머드 사체에서 유전자(DNA)를 추출해 매머드를 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매머드는 480만 년 전 출현해 유라시아 대륙에서 번식하다 5000∼1만 년 전 멸종했다.

by 100명 2007. 7. 12. 08:12
5년만에 ‘제일제당’ 간판 다시 올리는 CJ그룹, 왜?

CJ그룹이 5년만에 제일제당 간판을 다시 단다. 소비자들이 제일제당에 대해 친근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 지주회사 출범에 맞춰 신설되는 신규 법인의 회사명으로 제격이란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설법인의 회사명을 제일제당으로 표기할 경우 손쉽게 기업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CJ그룹은 오는 9월이면 국내 최대 식품회사로 50년간 주부들에게 친숙했던 ‘제일제당’이 다시 소비자들을 찾아간다고 11일 밝혔다. 오는 9일 지주회사 전환에 따른 신설 사업회사의 신규 회사명을 ‘CJ제일제당’으로 확정했다는 내용의 공시도 이날 함께 내보냈다.

CJ 관계자는 “9월 1일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앞두고 식품과 제약, 바이오 등 기존 사업을 담당할 회사의 신규 사명이 필요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그 동안 다양한 후보안을 놓고 소비자 조사 및 사내 선호도 조사를 실시했고, 지난 6일 최고경영진 회의와 10일 이사회를 거쳐 CJ제일제당으로 최종 결정했다.

CJ는 오는 26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지주회사 전환과 사업회사 분리 등을 의결하고 이같은 내용의 회사명을 승인받을 예정이다. 이같은 회사명 변경이 최종 승인되면 CJ는 제일제당 간판을 내린지 5년만에 옛 이름을 되찾게 된다. CJ는 2002년 10월, 반세기(49년 2개월)동안 고수해온 제일제당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CJ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꾼 바 있다.

신동휘 CJ그룹 홍보실장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소비자에게 익숙한 제일제당이 CJ로 바뀌면서 그동안 CJ그룹의 인지도 또한 급속도로 높아졌다”며 “이번엔 지주회사가 CJ라는 이름을 되가져 오는 만큼, 식품 및 바이오, 제약 등 사업부분은 ‘제일제당’이란 이름아래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여러 후보 회사명중 낙점받은 ‘CJ제일제당’은 특히 일반 소비자 조사에서 호감도(55.7%)와 선호도(36%), 기억용이성(44.9%) 등 각 부문에서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글자 한 글자가 각각 의미를 가진 한자어 명칭임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제일제당’을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로 받아들인다는 점이 장점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CJ측은 설명했다.

by 100명 2007. 7. 11. 18:46
<부산 영도다리 옛 모습 복원, 6일 첫 삽>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7-07-03 10:35 | 최종수정 2007-07-03 10:40
부산 영도다리 엣모습 복원, 6일 첫 삽

내년 1월 임시교량 완공 후 기존 다리 철거

폭 확장하고 도개기능 되살린 새 교량 건설

(부산=연합뉴스) 이영희 기자 =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단골 약속장소로 이용됐고 이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한 실향민들이 투신자살하는 등 국민적 애환이 서린 곳으로 유명한 부산의 명물 영도다리를 원형대로 확장복원하는 공사가 6일 임시교량 착공을 시작으로 본격화된다.

3일 부산시와 롯데건설에 따르면 6일 오후 4시 30분 영도구에 있는 현장사무소에서 공사기간 무사고를 비는 안전기원제를 올린 뒤 임시교량을 설치하기 위해 항타기로 바다 밑에 강관파일을 박는 공사를 시작한다.

기존 영도다리 옆 북항 쪽에 길이 281.3m, 너비 20.5m, 왕복 4차로로 설치될 임시교량은 내년 1월 에 완공될 예정이다.

임시교량에는 차로 양쪽에 폭 1.5~2m의 보행로가 설치된다.

롯데건설 관계자는 선박통행을 위해 임시교량의 교각은 기존 다리와 같은 간격으로 설치하고 상판은 기존 다리보다 1m가량 높게 건설된다고 밝혔다.

부산시와 롯데건설은 임시교량이 개통되면 지난해 11월 부산시 문화재로 지정된 영도다리의 통행을 전면금지하고 문화재위원들의 정밀조사를 거쳐 다리 상판과 교각 등 모든 자재를 재사용 대상, 역사전시관 보관대상, 폐기대상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벌인 뒤 철거에 들어갈 예정이다.

새 영도다리는 기존 다리의 원형을 복원하면서 현재 왕복 4차로를 6차로로 확장해 지어질 예정인데 9월말에 설계가 끝날 예정이다.

부산시와 롯데건설은 내년 2월에 기존 다리 철거를 시작하고 2010년 말까지 새 다리를 준공한다는 계획이다.

새 다리는 선박의 안전한 통행을 위해 높이를 현재보다 1m 이상 높게 지을 예정이라고 롯데건설측은 밝혔다.

새 다리는 문화재의 원형을 복원하는 차원에서 기존 다리의 자재 중 재사용 가능한 것은 활용하고 교각도 보수보강 공사를 통해 되도록 재활용한다는 방침이지만 노후 정도가 심해 대부분 새로 설치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부산시와 롯데건설은 판단하고 있다.

기존 영도다리는 다리 아래로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상판 일부를 들어올리는 모습으로 더욱 유명한데 노후화로 인해 1966년 9월 이후에는 상판을 들어올리는 도개(跳開) 기능이 중지된 상태다.

부산시는 새 영도다리에는 도개 기능을 되살리기로 하고 중구 남포동쪽의 원래 위치에 기계실과 도개식 상판을 설치하기로 했다.

부산 영도다리 옛 모습 복원, 6일 첫 삽

부산시는 새 다리가 완공되면 매년 특별한 날을 정해 다리상판을 들어올려 관광상품화하는 방안을 추진할 방침이다.

영도다리는 일제치하인 1934년에 길이 214.7m, 폭 18.3m로 준공된 부산 최초의 연륙교이자 도개교량으로 지난 1997년 롯데쇼핑이 중구 중앙동 옛 부산시청 자리에 107층 규모의 호텔과 백화점 등이 들어서는 `부산롯데월드'를 짓기로 하면서 교통소통을 위한 철거와 보존을 둘러싼 논란 끝에 확장복원하기로 결정됐다.

by 100명 2007. 7. 3. 14:32

<`石化'한 1천500만년전 나무로 횡재한 美 50대 화제>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장익상 특파원 = 약 1천500만년전 현무암 속에 파묻혔던 나무들이 예전에 서있었던 모습 그대로 보석과 같은 화석으로 변한채 무더기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28일 보도했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진기한 화석들이 발굴되고 있는 곳은 워싱턴주 남중부 야키마의 클라이드 프렌드(50)씨가 운영중인 중장비 보관 창고 뒤편.

프렌드씨는 지난 2002년 6월 창고를 리모델링하기로 하고 길을 내기 위해 불도저로 창고 뒤쪽 언덕을 파헤치던중 땅속에 박혀있던 나무를 건드리는 순간 나뭇조각들이 반짝이며 흩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갈색과 흰색의 파편들은 화석화된 나무였고 이후 여러날 동안 4만469㎡(10에이커)에 이르는 사유지를 파헤쳐 나가는 사이 돌로 변해버린 북미산 호두나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높이가 5.5m(18피트)인 이들 나무는 현무암 속에서 1천540만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채 서있었는데, 이후 5년간 프렌드씨가 발굴해낸 화석들이 모두 200그루나 되며 앞으로도 작업이 계속된다면 수백그루는 더 발굴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최대 규모는 높이가 7.3m, 직경이 61cm나 되며 대부분 북미산 호두나무이고 일부는 느룹나무, 단풍나무, 소합향인데, 전문가들은 이 화석을 "유기물이 침전물 및 광물에 파묻혀 돌로 변한" 것으로 설명하며 `석화(石化) 또는 광물화'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껍질 안쪽의 나무속은 반투명 상태여서 언뜻 보석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화석화한 나무를 수집하는 시애틀의 한 수집가가 맨 처음 샘플을 확인하고는 1만 달러에 구매했으며 이후 소문이 나면서 전세계 과학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특히 이들 화석은 서있던 당시의 직립 형태로 발견되는 것이 특징으로, 화석식물을 주로 연구하는 고식물학 대가인 캘리포니아 브레아의 월트 라이트씨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형태"라며 "다른 화석들은 여러 곳에서 흘러와 진흙속에 묻혀있다 발견되는 탓에 한 조각의 형태이지만 이곳은 수직으로 서있다가 원형대로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또다른 특이한 점은 화석들의 뿌리가 없다는 점.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기됐으며 지진이나 화산 폭발 등에 의해 분리된뒤 진흙이나 용암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과거 호수였다가 물이 마른뒤 나무가 자라났고 다시 물이 채워진 상태에서 용암이 쏟아졌으며 나무가 타는 것을 호수의 물이 방해했지만 뿌리가 박혀있던 진흙은 오히려 뿌리를 썩게 했다는 내용이 가장 설득력을 얻는다.

토머스 딜로프 워싱턴대학 버크박물관 큐레이터는 "이곳에서 3년간 연구한 결과 나무들은 살아있던 상태에서 화석화한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뿌리가 없어 이 확신을 힘들게 하는 기묘한 상태다"고 말했다.

전세계적으로 돌로 변한 나무 화석에 대한 적정 가격이 매겨져 있지 않지만 최근 수집가들이 몇조각을 구입하면서 15만 달러를 지급하는 등 주위에서는 `작은 금광'을 캔 셈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혼한채 혼자서 이동 자동차주택에서 살고 있는 프렌드씨는 이웃들은 별로 반가워하지 않지만 이곳에 일반 대중들을 위한 전시 공간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으며 대학이나 박물관에도 일부 기증할 예정이다.

Big dig

Ancient find

by 100명 2007. 6. 29. 14:28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미몽
뉴시스 | 기사입력 2007-06-28 15:08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미몽

【서울=뉴시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 최고(最古) 영화인 '미몽'을 비롯하여 한국고전영화 7편을 문화재로 등록키로 하고 각계의 의견 수렴을 위해 28일자로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고 밝혔다.

이들 영화 7편은 우리 영화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광복 전의 작품을 비롯하여 양과 질 양면에서 커다란 성장을 이룩하여 우리 영화의 도약기라 일컬어지는 광복 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작품들로 관계전문가회의와 공청회 및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등을 거쳐 엄선되었다.

아울러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할 대상은, 영화 제작과정에서 한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거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제작한 영화 가운데서 제작된 지 50년 이상 된 작품을 대상으로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것, 대중에게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준 것, 당대 사회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큰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작품들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의 신여성 및 근대성에 대한 담론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미몽'(일명 : 죽음의 자장가, 1936년), 광복 후 최초의 영화이자 본격 극영화로서 광복과 항일을 소재로 멜로 액션드라마의 초기형태를 잘 보여주는 '자유만세'(1946년),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인 '검사와 여선생'(1948년), 산사의 고요한 생활을 배경으로 신파성을 배제하면서 모정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표현한 수작 '마음의 고향'(1949년),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고 반공 휴머니즘 영화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피아골'(1955년), '최고급'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사회적 반향이 컸던 '자유부인'(1956년),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준 '시집가는 날'(일명 : 맹진사댁 경사, 1956년)이다.

사진은 1936년작 미몽.

by 100명 2007. 6. 28. 16:46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자유만세
뉴시스 | 기사입력 2007-06-28 15:08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자유만세

【서울=뉴시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 최고(最古) 영화인 '미몽'을 비롯하여 한국고전영화 7편을 문화재로 등록키로 하고 각계의 의견 수렴을 위해 28일자로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고 밝혔다.

이들 영화 7편은 우리 영화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광복 전의 작품을 비롯하여 양과 질 양면에서 커다란 성장을 이룩하여 우리 영화의 도약기라 일컬어지는 광복 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작품들로 관계전문가회의와 공청회 및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등을 거쳐 엄선되었다.

아울러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할 대상은, 영화 제작과정에서 한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거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제작한 영화 가운데서 제작된 지 50년 이상 된 작품을 대상으로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것, 대중에게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준 것, 당대 사회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큰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작품들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의 신여성 및 근대성에 대한 담론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미몽'(일명 : 죽음의 자장가, 1936년), 광복 후 최초의 영화이자 본격 극영화로서 광복과 항일을 소재로 멜로 액션드라마의 초기형태를 잘 보여주는 '자유만세'(1946년),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인 '검사와 여선생'(1948년), 산사의 고요한 생활을 배경으로 신파성을 배제하면서 모정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표현한 수작 '마음의 고향'(1949년),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고 반공 휴머니즘 영화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피아골'(1955년), '최고급'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사회적 반향이 컸던 '자유부인'(1956년),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준 '시집가는 날'(일명 : 맹진사댁 경사, 1956년)이다.

사진은 1946년작 자유만세. (사진=문화재청 제공)/박세연기자

by 100명 2007. 6. 28. 16:45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마음의 고향
뉴시스 | 기사입력 2007-06-28 15:08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마음의 고향

【서울=뉴시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 최고(最古) 영화인 '미몽'을 비롯하여 한국고전영화 7편을 문화재로 등록키로 하고 각계의 의견 수렴을 위해 28일자로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고 밝혔다.

이들 영화 7편은 우리 영화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광복 전의 작품을 비롯하여 양과 질 양면에서 커다란 성장을 이룩하여 우리 영화의 도약기라 일컬어지는 광복 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작품들로 관계전문가회의와 공청회 및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등을 거쳐 엄선되었다.

아울러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할 대상은, 영화 제작과정에서 한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거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제작한 영화 가운데서 제작된 지 50년 이상 된 작품을 대상으로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것, 대중에게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준 것, 당대 사회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큰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작품들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의 신여성 및 근대성에 대한 담론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미몽'(일명 : 죽음의 자장가, 1936년), 광복 후 최초의 영화이자 본격 극영화로서 광복과 항일을 소재로 멜로 액션드라마의 초기형태를 잘 보여주는 '자유만세'(1946년),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인 '검사와 여선생'(1948년), 산사의 고요한 생활을 배경으로 신파성을 배제하면서 모정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표현한 수작 '마음의 고향'(1949년),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고 반공 휴머니즘 영화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피아골'(1955년), '최고급'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사회적 반향이 컸던 '자유부인'(1956년),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준 '시집가는 날'(일명 : 맹진사댁 경사, 1956년)이다.

사진은 1949년작 마음의 고향. (사진=문화재청 제공)/박세연기자

by 100명 2007. 6. 28. 16:44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검사와 여선생
뉴시스 | 기사입력 2007-06-28 15:08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검사와 여선생

【서울=뉴시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 최고(最古) 영화인 '미몽'을 비롯하여 한국고전영화 7편을 문화재로 등록키로 하고 각계의 의견 수렴을 위해 28일자로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고 밝혔다.

이들 영화 7편은 우리 영화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광복 전의 작품을 비롯하여 양과 질 양면에서 커다란 성장을 이룩하여 우리 영화의 도약기라 일컬어지는 광복 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작품들로 관계전문가회의와 공청회 및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등을 거쳐 엄선되었다.

아울러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할 대상은, 영화 제작과정에서 한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거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제작한 영화 가운데서 제작된 지 50년 이상 된 작품을 대상으로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것, 대중에게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준 것, 당대 사회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큰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작품들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의 신여성 및 근대성에 대한 담론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미몽'(일명 : 죽음의 자장가, 1936년), 광복 후 최초의 영화이자 본격 극영화로서 광복과 항일을 소재로 멜로 액션드라마의 초기형태를 잘 보여주는 '자유만세'(1946년),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인 '검사와 여선생'(1948년), 산사의 고요한 생활을 배경으로 신파성을 배제하면서 모정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표현한 수작 '마음의 고향'(1949년),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고 반공 휴머니즘 영화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피아골'(1955년), '최고급'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사회적 반향이 컸던 '자유부인'(1956년),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준 '시집가는 날'(일명 : 맹진사댁 경사, 1956년)이다.

사진은 1948년작 검사와 여선생. (사진=문화재청 제공)/박세연기자

by 100명 2007. 6. 28. 16:44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피아골
뉴시스 | 기사입력 2007-06-28 15:08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피아골

【서울=뉴시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 최고(最古) 영화인 '미몽'을 비롯하여 한국고전영화 7편을 문화재로 등록키로 하고 각계의 의견 수렴을 위해 28일자로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고 밝혔다.

이들 영화 7편은 우리 영화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광복 전의 작품을 비롯하여 양과 질 양면에서 커다란 성장을 이룩하여 우리 영화의 도약기라 일컬어지는 광복 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작품들로 관계전문가회의와 공청회 및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등을 거쳐 엄선되었다.

아울러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할 대상은, 영화 제작과정에서 한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거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제작한 영화 가운데서 제작된 지 50년 이상 된 작품을 대상으로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것, 대중에게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준 것, 당대 사회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큰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작품들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의 신여성 및 근대성에 대한 담론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미몽'(일명 : 죽음의 자장가, 1936년), 광복 후 최초의 영화이자 본격 극영화로서 광복과 항일을 소재로 멜로 액션드라마의 초기형태를 잘 보여주는 '자유만세'(1946년),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인 '검사와 여선생'(1948년), 산사의 고요한 생활을 배경으로 신파성을 배제하면서 모정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표현한 수작 '마음의 고향'(1949년),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고 반공 휴머니즘 영화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피아골'(1955년), '최고급'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사회적 반향이 컸던 '자유부인'(1956년),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준 '시집가는 날'(일명 : 맹진사댁 경사, 1956년)이다.

by 100명 2007. 6. 28. 16:43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자유부인
뉴시스 | 기사입력 2007-06-28 15:08
한국고전영화 7편 문화재 등록예고-자유부인

【서울=뉴시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 최고(最古) 영화인 '미몽'을 비롯하여 한국고전영화 7편을 문화재로 등록키로 하고 각계의 의견 수렴을 위해 28일자로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고 밝혔다.

이들 영화 7편은 우리 영화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광복 전의 작품을 비롯하여 양과 질 양면에서 커다란 성장을 이룩하여 우리 영화의 도약기라 일컬어지는 광복 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의 작품들로 관계전문가회의와 공청회 및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등을 거쳐 엄선되었다.

아울러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할 대상은, 영화 제작과정에서 한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거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제작한 영화 가운데서 제작된 지 50년 이상 된 작품을 대상으로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것, 대중에게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준 것, 당대 사회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큰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작품들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의 신여성 및 근대성에 대한 담론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미몽'(일명 : 죽음의 자장가, 1936년), 광복 후 최초의 영화이자 본격 극영화로서 광복과 항일을 소재로 멜로 액션드라마의 초기형태를 잘 보여주는 '자유만세'(1946년),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인 '검사와 여선생'(1948년), 산사의 고요한 생활을 배경으로 신파성을 배제하면서 모정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표현한 수작 '마음의 고향'(1949년),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고 반공 휴머니즘 영화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피아골'(1955년), '최고급'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사회적 반향이 컸던 '자유부인'(1956년),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준 '시집가는 날'(일명 : 맹진사댁 경사, 1956년)이다.

사진은 1956년작 자유부인. (사진=문화재청 제공)/박세연기자

by 100명 2007. 6. 28. 16:42
[뉴제너레이션 뉴파워] "수익 없다면 미련없이 버려라"
창업주의 가르침이란

이규성 bobos@akn.co.kr

이재현 회장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이병철)의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랐다.

덕분에 엄격한 후계자 교육도 덤으로 받았다.

그가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여러 가르침 중 최고로 손꼽는 것은 "대세가 기울어서 이미 실패라는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지난 95년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하여 독자경영을 시작한 이후 이재현 회장은 식품 등 기존의 사업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미디어ㆍ영상ㆍ물류ㆍ유선방송ㆍ홈쇼핑 사업 등 사업다각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 가운데 IT관련 사업과 화장품 및 음료사업 등이 매년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적자를 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이에 이 회장은 미련 없이 불필요한 사업부문을 매각 정리해버렸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인 드림라인도 이 중의 하나였다.

"수익이 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버려라"와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사실 이 같은 교훈은 이병철 회장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큰 사업실패에서 기인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병철 회장은 중ㆍ일 전쟁의 발발로 인해 은행 대출금으로 산 전답이 폭락해 큰 손해를 보았다.

그는 더 큰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그동안 사두었던 전답을 미련 없이 모두 시가보다 싸게 되팔았다.

정미소와 운수회사도 남에게 넘겼다.

그 돈으로 200만평의 농토를 구입하는데 따른 대출자금을 은행에 갚고 나니 그에게 남은 것은 현금 2만원과 전답 10만평이었다.

한순간에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이때 얻은 교훈을 밑거름 삼아 훗날 그가 신사업을 전개할 때도 절대로 무모한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할아버지의 교훈이 종손에게 큰 가르침이 됐던 것이다.

by 100명 2007. 6. 26. 18:28
당신이 겪는 디지털 공포는 무엇인가요?

디지털의 편리는 곧 의존성을 낳는다. 의존성의 심화는 디지털이 몰고 올 부작용에 대한 심각한 공포를 내재할 수밖에 없다. 공포라는 표현이 다소 비약적일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디지털이 주는 부작용을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공포라는 표현에 공감할 것이다. 데이터 소실의 공포, 각종 디지털 증후군, 바이러스의 공포, 이메일 공포, 사생활 침해의 공포, 사이버 범죄 대상의 공포 등 일상적인 디지털 공포가 우리 주변에 만연하고 있다. 디지털 공포는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그것에 대한 산업화도 이뤄진다. 즉, 아래의 디지털 공포에 대한 해결책을 사업화하는 셈이다. 향후 디지털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질수록, 그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할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래 제시된 것 외의 새로운 디지털 공포를 찾아내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찾아보는 것도 미래의 틈새 산업을 보는 눈이 될 것이다.

데이터 소실의 공포
Data 날려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상당히 크다. 아날로그의 흔적들은 물리적으로 버려야 하지만, 디지털에서는 버튼 한번으로도 버려진다. 실수로 날려버리는 데이터도 생길 수 있고, 의도치 않은 컴퓨터의 다운이나 바이러스 감염으로도 소중한 데이터를 날려버릴 수 있다. 복구가 불가능할땐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종이 위에 적어놓은 아날로그의 정보들은 그 찢어지더라도 다시 붙이면 되고, 좀 지워지더라도 흔적을 따라 다시 살려낼 수 있지만, 디지털은 좀체 그렇질 못하다. 지식정보사회가 심화되면 될수록, 디지털화된 지식정보 데이터를 날려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데이터 백업만이 살길인 셈이다.

각종 디지털 증후군
오십대에 온다고 해서 오십견인 어깨통증이 요즘에는 이십대에도 온다고 이십견이라고 한다. 어깨를 비롯해 허리와 관절 등 각종 신경통 증세가 젊은 연령에게도 확산되는 것은 컴퓨터의 장시간 사용이 주범이다. 각종 VDT 증후군을 비롯하여 물리적인 질환 외에 정신적인 질환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각종 디지털 중독 질환도 디지털 증후군의 일종이며, 이것이 가진 심각성은 우려를 넘어서 공포 수준에 이른다.
디지털 치매도 디지털 증후군의 하나이다. 디지털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지면서 뇌의 기억활동이 줄어들어, 결국 뇌의 기억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노하우 없이 노웨어에만 의존하다보면 결국 디지털 치매라는 공포스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디지털 치매는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어서 발견된다. 핸드폰의 단축번호만 기억하게 되면서 전화번호 못외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도 디지털 치매의 한 현상이다.

바이러스의 공포
때만 되면 반기지도 않는데 어김없이 나타나는게 바이러스이다. 바이러스의 피해는 디지털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심각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컴퓨터에서 바이러스 피해를 당해본 사람이라면 더욱 공감할 것이다. 바이러스도 점점 교묘해져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바이러스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이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열지 않아도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경우도 발생하고, 특정 웹페이지를 열어본 것만으로도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경우도 생긴다. 스스로 바이러스에 대해 조심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바이러스의 전방위적인 공격이 이뤄지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바이러스에 감염되게 된다. 감염된 컴퓨터는 흡혈귀의 전파 처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이메일에서 주소록에 등재된 이들에게 무작위로 바이러스를 살포하게 되기도 한다. 실제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바이러스 전파자가 되어 무작위로 이메일을 뿌려대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경우도 증가한다. 바이러스의 진화 만큼이나 이를 막아내는 기술에서도 진화가 이뤄지지만, 바이러스의 공포를 불식시켜주지는 못한다.

이메일의 공포
가장 안전하고 편리한 수단으로 여겨지던 이메일, 그러나 이메일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지면 질수록 이메일이 가져다주는 공포도 만만치 않다. 이메일은 결코 안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아니다. 안가거나 혹은 기대한 도착 시간보다 한참이나 늦게 가기도 한다. 심지어는 상대방이 보낸지 일주일만에 이메일이 도착하기도 한다. 어떤 서버에 묶여있다가 날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빛의 속도를 얘기하는 디지털 시대에 이러면 정말 곤란하다. 상대방은 보냈다는데 난 결코 받지 못한 이메일의 경험들은 누구나 한번씩 가질 것이다. 그나마 친구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들은 타격이나 적지, 업무상으로 보낸 이메일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메일을 보내고서 문자메시지로 확인하는 것을 습관들인 사람들도 생겨난다.
실수로 원치않은 상대에게 이메일이 날아가기도 한다. 무심코 이메일의 주소록을 잘못 건드려 메일이 모든 주소록 등록자에게 날아가게 된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요즘엔 그런 문제에 대응할 소프트웨어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두 해결될 수는 없다. 실제로 의도치않게 비밀정보에 해당되는 일명 x파일들이 유포되는 사건에서 유포의 진원지로 이메일 실수가 거론되기도 한다. 대사관의 부탁을 받고 관련되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소위 말하는 X파일식으로 작성했다가, 의뢰한 사람에게 보낸다는 것을 실수로 주소록에 있는 전체에게 보내는 바람에 사건이 된 일이 있었다. 보내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이메일 실수에 따른 대가는 가혹하다.

사생활 노출의 공포
언제 어디서나 누군가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디카와 폰카, 캠코더의 확산과 함께 CCTV의 확대, 각종 몰카의 확산도 사생활 노출의 공포를 가중시킨다. 각종 X파일 파문과 도청과 감청 파문도 사생활 노출의 공포를 극대화시킨다. 디지털 시대가 빅브라더에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스몰시스터에게도 새로운 힘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직면하는 사생활 노출의 위험성은 이중적으로 강화된 셈이다. 인터넷을 통한 사생활 노출이나 인권 침해의 사례에서 확인했듯이, 디지털 주홍글씨라고 할 정도로 사생활 노출과 침해의 결과가 아주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것으로 위험성을 넘어 가히 공포의 수준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사생활 노출의 공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롭기 힘들다.

사이버 범죄 대상의 공포
누가 사이버 범죄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디지털화에 익숙하면 할수록 사이버 범죄의 표적이 될 가능성은 높다. 온라인으로 은행, 주식 등 금융거래를 한다거나, 쇼핑몰에서 결재를 한다거나, 게임을 하거나 등 각종 온라인에서의 활동들이 사이버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로 인해 발생할 피해도 크다. 은행의 거래 정보가 피싱에 의해 노출되어 통장에 있는 돈이 유출되거나, 게임 아이템을 도난 당하거나 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


점점 디지털 의존성이 높아지는 사람들에게 디지털 공포는 무섭고 두려운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디지털 공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피해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근절시키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사회적 수요도 커질 것이다. 덕분에 이러한 전방위적인 공포가 비즈니스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한다. 디지털 공포를 해소할 대안들이야말로 효과적인 상품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지털 공포는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인 트렌드이다.

by 100명 2007. 6. 23. 20:13
개인가족부 도입 59%`혼란만 가중`
디지털타임스 | 기사입력 2007-06-08 06:02

네티즌 59%는 내년 1월부터 시행될 `개인가족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국민 개개인을 기준으로 작성되는 개인가족부가 2008년 1월부터 시행된다. 이에 따라 호적이 없어지고 본적도 사라지는 등 앞으로 남성중심의 가족제도와 문화의 변화가 예상돼 네티즌 사이에서 뜨거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검색포털 엠파스가 4일부터 `호적대신 개인가족부 도입,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총 참여자 370명 중 59%(218명)가 `호주제 폐지로 인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며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반면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긍정적이라고 답한 네티즌은 41%(152명)로 나타나 네티즌간의 팽팽한 입장차이를 보였다.

네티즌 `예쁜사랑'은 "외국에서도 부러워하는 우리나라 호적제도를 폐지한다니 어이가 없다"며 `가족끼리 위화감 조성하기 딱 좋은 제도"라고 말했다. 또 `햇살가득한날'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호주제 폐지를 시행하는 것은 무리"라며 "외국처럼 친남매끼리 결혼하는 비극적인 일도 일어날 수 있어 또 다른 한국 사회의 문제로 번지게 될 수도 있다"며 대책 없는 정부의 선심성 정책에 비난을 가했다.

네티즌 `akm090777'은 "개인적인 이유로 호적 때문에 고생한 적이 많았는데 본인 위주로 호적을 바꾸면 아주 합리적일 것 같다"고 답했다. 또 `독개비'는 "일제가 통치용으로 만들어 놓은 호적제를 지금까지 끌어온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제라도 없앴으니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by 100명 2007. 6. 8. 07:14

[이런 직업] '파티 프로모터' 조 차씨 '한국 놀이문화에 미국이 껌뻑'

학교 파티 주관하며 끼 발견···회사 차려 전국무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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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재미와 열정 그리고 건전함이 공존하는 파티를 여는 것이 저의 일이죠."

전문 파티 프로모터사인 '위스퍼 엔터네인먼트'의 조 차(26.사진) 대표가 말하는 본인의 직업관이다.

조씨가 하는 일은 생일 각종 기념행사를 비롯해 주말에 열리는 댄스파티까지 다양한 행사들을 기획운영마케팅까지 모두 책임지는 것이다.

파티 프로모터라는 직업은 한인 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미국사회에서는 유망한 전문직종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파티의 종류가 워낙 많고 다양하다 보니 재미를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세인 조씨가 '파티 프로모터'의 길로 들어선 것은 대학교 1학년 때.

시애틀 인근의 워싱턴대에 재학중이던 그가 교내 한인학생회(KSA) 파티를 주관하면서 부터다. 이 파티에 참석했던 타인종 학생들로부터 'KSA 파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조씨의 '끼'도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놀이문화를 즐기는 한국적인 정서를 잘 알고 있다"는 조씨는 "학교 파티에서도 한국의 놀이문화를 편하고 신나게 소개한 것 밖에 없었다"고 겸손해 했다.

이후 '학교파티 전문가'로 통하던 조씨는 2004년 졸업전까지 시애틀 인근 클럽들과 계약을 맺고 각종 '테마(Theme)를 지닌 파티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약 4년간 매년 약 100여개의 파티를 연출했습니다. 하다보니 자신도 생기고 '파티 연출'이 제 '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주위의 친구들과 손잡고 지난 2005년 파티 프로모션 회사인 '위스퍼 엔터테이먼트(Whisper Entertainment)사를 설립했지요."

현재 위스퍼 엔터테인먼트사는 시애틀에 본사를 두고 LA 샌프란시스코뉴욕워싱턴 DC등의 메이저 클럽 10여곳과 계약을 맺고 특히 아시안을 위한 파티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시애틀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베놈(Venom)'에서는 매주 방문객 수 가 1500명에 달할 만큼 조씨의 파티는 인기를 얻고 있다.

"앞으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LA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파티를 연출할 계획"이라는 조씨는 "건전하면서도 재미있고 파티 문화를 LA한인들에게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by 100명 2007. 6. 5. 18:05
3천년만에 핀다는 전설의 꽃을 만나다
[오마이뉴스 2007-05-29 09:21]
[오마이뉴스 김민수 기자]
▲ 카라이파리에 핀 우담바라(풀잠자리알)
ⓒ2007 김민수
불교에서 전해지는 상상의 꽃 우담바라, 그는 3천년만에 핀다고 하며 상서로운 징조를 보여주는 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우담바라'는 꽃이 아니라 '풀잠자리알'이라고 하지만 한국불교대사전에서는 '풀에 청령(잠자리)의 난자(알)가 붙은 것'이 우담바라라고 정의하고 있다. 동아한한대사전(동아출판사)에서도 '초부유(풀잠자리)의 알'이 우담바라라고 하니, 풀잠자리알을 만난 것은 곧 우담바라를 만난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니라.

어머님의 옥상 텃밭, 옥상에는 각종 채소뿐 아니라 아기자기 가꾸시는 꽃들도 제법 많다. 카라의 넓은 이파리에 시원스럽게 피어난 하얀꽃이 예뻐 그를 보고 있는데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우담바라가 눈에 띈다. 그를 가만히 보니 꽃이라기보다는 곤충의 알이다.

ⓒ2007 김민수
아주 작은 데다가 실같이 얇은 줄기에 알이 붙어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카메라에 담기가 쉽지 않다. 풀잠자리알이면 어떠랴, 우담바라로 불러도 되니 상서로운 조짐으로 생각하자 했다. 마침 그 날은 조카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렇게 우담바라를 담고 혹시나 상서로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것을 단지 미신적인 것으로만 치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살면서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누구나 품고 살아가는 작은 희망이기도 하니까.

▲ 나리꽃에 핀 우담바라(풀잠자리알)
ⓒ2007 김민수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지난 밤 바람에 서너 개가 떨어져 버렸다. 꽃이 졌다고 해야 할까? 풀잠자리알이라면 그 곳에만 알을 낳아놓지는 않았을 터이니 다른 이파리들도 유심히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나리꽃 이파리와 꽃몽우리에도 수없이 많은 우담바라가 지천에 널렸다.

희소하게 느껴지던 것이 너무 많으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 흔한 것이니 내 눈에 띄었겠지. 과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고 했던가?

ⓒ2007 김민수
그나저나 좋은 관찰거리가 생겼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하루이틀 살펴보다 보면 꽃(식물)일지 곤충의 알(풀잠자리)일지 확실해질테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종교적인 것은 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우담바라의 힘을 빌어 하나둘 풀릴 수만 있다면 굳이 우담바라니 풀잠자리알이니 옥석을 가릴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2007 김민수
친구에게 우리 집 옥상에 우담바라가 피었다 이야기하니 "어쩌자고 목사집에 우담바라가 피었냐? 사이비 목사 아니냐?"고 농을 던진다. 농은 농이고 우담바라 한 번 보러 올 터이니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한다.

"왜, 당신도 우담바라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으려고?"

꽃이 아니면 어떠랴? 꽃이라고 하면 꽃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풀잠자리알을 우리꽃 이야기에 당당하게 올린다. 아마 들꽃이야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곤충의 알로 기록이 되지 않을까?

우담바라를 처음 만나고 사흘이 지났다. 좋은 일이 생겼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글쎄 아직 그 기운을 받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사흘, 평상시보다 좋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이 생겼다. 더 좋은 일이 생기려는 복선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그런지 상서로운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가만히 앉아서 상서로운 일이 생기길 바라는 심보가 복권당첨을 기다리는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진짜로 상서로운 일이란 자기가 땀흘린 만큼의 결실을 얻는 것 아닌가?
by 100명 2007. 5. 29. 13:45
“꼭 필요한 것만 원해∼” 컨버전스 지고 디버전스 뜬다
[쿠키뉴스 2007-05-15 09:49]

[쿠키 경제] 최근 디지털 카메라를 20만원대에 구입한 김현철(28·서울 서초동)씨. 카메라를 고를 때 인터넷 가격 비교 사이트부터 훑었다. 기능과 품종이 너무 다양해서다.김씨는 최저가격 순으로 정렬해 카메라 기능을 따져봤다. 화소 수, 줌 기능, 배터리 종류 등을 비교했다. 인기상품 순으로 다시 검색해보니 그가 고른 제품은 3위였다. 김씨는 곧바로 그 제품을 선택했다.

고가 제품들과 비교해봐도 화소 수가 낮고 이미징 처리속도가 약간 늦다는 점, 티타늄 재질이 아닌 알루미늄이라는 것 정도가 달랐다. 김씨는 “전문 사진 찍을 것도 아니고 미니홈피에 사용할 사진정도를 찍을 수 있는 카메라면 충분했다”면서 “필요한 기능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어림잡았던 가격보다 50여만원을 아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김씨처럼 제품 사양을 속속들이 비교한 뒤 자신에게 필요한 기능을 갖춘 제품을 고름으로써 비용까지 아끼는 소비자들을 겨냥한 디버전스 마케팅(divergence marketing)이 뜨고 있다. 가격과 기능의 거품을 빼고 소비층 취향에 맞춰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는 것이 디버전스 마케팅 특징이다. 소비층 취향에 따라 맞춤형 모델을 내놓기 때문에 시장이 세분화될수록 마케팅 전략도 다갈래로 펼쳐진다. 실용적인 것을 찾고 합리적 소비가 늘면서, 뚜렷한 타깃 소비층 없이 한 가지 제품에 다양한 기능을 모아서 브랜드 가치를 높여온 컨버전스 마케팅(convergence marketing)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는 것.

캐논 코리아 관계자는 “경쟁사들이 MP3나 네비게이션 기능을 추가한 카메라도 출시하고 있지만, 카메라 고유 기능에 충실하면서 전문가용은 기능을 향상시키고 취미용은 기능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메라 외적 기능은 접어두고 소비층에 맞춰 성격을 달리한 제품에 주력한다는 설명이다.

기능 다양화와 업데이트에 주력해왔던 휴대전화 업계도 최근들어 기능이 간소화된 모델을 속속 내놓고 있다. 지난 3월에 나온 모토로라 MS900 모델은 카메라 기능이 아예 없다. 통화 기능에 충실한 제품이다. 이 모델은 두 달여만에 2만5000여대가 팔렸다. 130만 화소로 카메라 기능을 최소화한 삼성 SCH- S470 모델도 제품이 출시된 2월 1만9700대, 3월 5만1000대, 4월 7만2100대가 팔려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디버전스 현상은 다기능 제품의 유용성에 회의를 느끼거나, 기능은 많지만 고유 기능엔 취약한 제품에 불편을 겪었던 소비자들의 학습 효과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2년전 첫 500만 화소 휴대전화를 100만원에 구입했던 윤모(27·여)씨는 “화소 수만 높을 뿐 상대방 음성이 잘 안 들려 처음 1년간 애프터 서비스를 4차례나 받았다”면서 “통화 기능이 부실한 휴대전화가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윤씨는 보조금 혜택을 감안해 심플한 모델을 구입할 생각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류한호 마케팅전략실장은 “소비자들이 휴대전화를 2∼3년 사용해보면 한 차례도 쓰지 않은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차 가치소비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케팅 초점을 요구사항이 명확한 특정 소비층에 맞춘 디버전스 마케팅은 틈새시장과 같은 맥락이다. 규모는 작지만 요구사항이 구체적인 소비층을 대상으로 세분화된 시장부터 공략하는 방식이다.

연령대, 성별, 취향에 따라 다른 틈새시장 전략은 은행 상품에서 두드러진다. 소비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은행상품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전된 마케팅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출시된 신한은행 탑스 캠퍼스 플랜 저축예금. 대학생들에게 필요한 혜택을 모아서 만든 상품으로는 처음이다. 가입하면 취업정보 서비스 이용권, 배낭여행 할인권을 받을 수 있다. 일정 학점이나 어학 점수, 헌혈 증서 또는 사회봉사 인증서를 내면 수수료를 우대해준다. 지난 8일까지 2만8000계좌가 트였다. 상품개발실 구현수 대리는 “주요고객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풍부한 만큼 대학생들의 관심거리를 골라 상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여성 겨냥 상품은 경쟁적으로 확산된 상태다. 지난해 9월말 여성우대서비스를모아 만든 국민은행 명품여성통장은 수수료 면제 혜택 등으로 지난 8일까지 60만9307계좌가 개설됐다. 신한은행 탑스레이디플랜 저축예금과 하나은행 여우통장 등도 마찬가지 성격.

깐깐한 소비가 늘수록 디버전스 마케팅은 확산된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김난도 교수는 “인터넷을 통한 소비자 네트워킹이 강해져 제품 정보가 다양해졌다”면서 “광고나 이미지에만 의존하기보다는 가치와 기능에 주력하는 추세인 만큼 디버전스 마케팅은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좋아하는 제품을 명품으로 구입하면 다른 물건에 대해선 지출여력이 줄어드는 만큼 까다롭고 깐깐하게 고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유라고 덧붙였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병석 기자 bsyoo@kmib.co.kr

<용어설명>

◇디버전스 마케팅(divergence marketing)=소비층 취향에 맞춰 제품을 다양하게 내놓는 마케팅. 특화된 제품, 간소화된 기능,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 특징이다. 취향대로 제품을 고르는 소비자, 가치 소비를 추구하는 합리적 소비자(smart consumer)가 주소비층이다.

◇컨버전스 마케팅(convergence marketing)=한 가지 제품에 다양한 기능을 백화점식으로 집약시키는 것. 업데이트, 다기능, 비싼 가격이 특징이다. 타깃 소비층이 불명확하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먼저 써 보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들의 구매로 상품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롱테일(long tail) 법칙=매출의 80%는 핵심 고객 20%에서 나온다는 파레토 법칙의 반대개념으로, 비주류 고객의 구매력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 비주류에 해당되는 80%가 상위 20%보다 더 큰 구매력을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이 흥행성없는 책들 판매량을 합해 베스트셀러 매출액을 추월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상위 20%를 공룡 몸통에, 비주류 80%를 '길게 늘어진 꼬리(long tail)'에 비유해 붙여진 이름이다.

by 100명 2007. 5. 15. 13:26
디지털 시대, 추억이 되어가는 아날로그의 낭만
참 편리한 세상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듣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손가락만 까딱해도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든, 못 느끼든 세상은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져, 까마득한 과거의 추억에만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요긴했던 것들이 지금은 시시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우리 주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을 좇으면서 한때는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것을 우리가 필요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면 찾을 수 있던 것들. 공중전화와 우체통. 속도를 중시하는 디지털 시대에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어느새 길거리에 있던 공중전화와 우체통이 하나 둘씩 철거되고 있다. 벌써 꽤 많이 없어졌다. 이제는 신경 써서 찾아야만 눈에 들어온다.

▲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공중전화기가 '퇴물' 취급을 받고 있다.
ⓒ 홍성현

“공중전화, 아~ 흘러가는 옛 영광이여”
“호출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을 눌러 주십시오”

한때, 무선호출기는 전 국민의 필수품이었다. 통신 예절이 자리 잡지 않았던 시절, 언제 어니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리던 무선호출기 탓에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누구든 호주머니 속 무선호출기가 “삐삐~”하고 울려 될 때면 자동적으로 공중전화를 찾아 달려가곤 했다.

지금은 휴대전화에게 그 자리를 뺏기긴 했지만 1997년에는 전국 가입자가 1천5백만명을 넘어 섰고, 당시 졸업·입학 선물로 단연 무선호출기가 1위를 차지했었고, 무선호출기가 없으면 ‘왕따’를 당할 만큼 전성기를 누렸다. 아마도 공중전화도 이때가 잘나가던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휴대전화 서비스가 시작되고 휴대전화 기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무선호출기는 하루아침에 책상 서랍 속에서 나뒹구는 처량한 신세가 돼 버렸다. 더구나 휴대전화 요금이 크게 내리면서는 아예 찬밥 대우를 받게 됐고 이제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

무선호출기에서 휴대전화로 급속히 교체되면서 된서리를 맞은 것이 바로 공중전화다. 무선호출기와 찰떡궁합을 이루며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공중전화도 무선호출기의 몰락과 더불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삐삐~삐삐~’ 주머니 속 무선호출기가 울리면 어김없이 공중전화기를 찾는 풍경은 이제 흘러간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돼 버렸다.

“아무도 찾지 않는 내 신세 처량해”

휴대전화에 밀린 공중전화가 이제는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10분, 20분, 30분…. 수많은 사람들이 공중전화 앞을 지나가지만 이용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찾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다 시설 노후화와 관리소홀로 오히려 이용자들의 불만을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동전 전화기는 동전을 먹기 일쑤요, 카드 전화기는 걸핏하면 고장이다. 또 지나가던 취객의 분풀이 대상이 됐는지 깨진 전화 부스와 양심까지 함께 버린 누군가의 쓰레기까지 뒤엉켜 도심 미관을 해친다는 악명까지 떨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최근 공중전화는 또 한 번 골칫거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해마다 적자를 내면서 애물단지로 전락한 공중전화가 수익은 커녕 올해 오히려 40억원 가량의 추가 비용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40년 만에 10원짜리 동전의 크기와 무게를 줄이기로 결정하면서 10원짜리 동전을 사용하는 공중전화의 부품교체가 불가피 하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적자로 우선 철거대상으로 지목되며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공중전화기. 최근 수신자부담 통화 수익금으로 그나마 근근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우리 곁에서 공중전화를 볼 수 있을까.

“공중전화 ‘퇴물’이라는 편견은 버려”

하지만 공중전화기는 다시 한 번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KT링커스는 문자메시지 전송서비스, 위치정보 확인서비스 등 최첨단 기능이 추가된 신형공중 전화기를 설치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형 공중전화는 동전이나 전화카드 없이도 신용카드로 바로 전화를 걸 수 있고 휴대전화 배터리도 충전할 수 있어 ‘주적’이었던 휴대전화와 상생의 길을 걷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신형 공중전화기는 디지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비롯해, 문자메시지 전송, 위치추적 및 지리정보 확인, 핸드폰 및 디지털카메라 배터리 충전 기능, 지역별 맛집 정보제공, 슬라이딩 광고 서비스가 제공될 예정이다.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환골탈태하듯 똑똑해져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공중전화기가 과연 예전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 e메일 등에 설 자리를 뺏긴 우체통이 사라지고 있다.
ⓒ 홍성현

“정성 담긴 편지가 그립지 않습니까”

공중전화 신세가 처량하다 한들 우체통만 하랴. 그나마 공중전화는 부활의 날개짓이라도 하고 있건만 우체통은 대책 없이 흐르는 세월을 온몸으로 버티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내용도 아니지만 우리는 편지 한 장 쓰라고 하면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 속에는 설렘이 있다. 또 편지란 묘한 매력이 있어 마지못해 쓴 위문편지라도 답장이 오면 뛸 듯이 기뻤다. 촌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편지는 그렇다.

하지만 집집마다 전화기가 생기더니 e메일과 휴대전화에 설 자리를 모두 내어 줬다. 그리움을 담아 보내던 빨간 우체통 안에는 고지서와 의례적인 연하장 그리고 잃어버린 신분증과 지갑이 대부분이다.

가끔 할 일을 잃어버린 우체통을 쓰레기통으로 착각했는지 쓰레기만 배불리 먹은 우체통도 있다니 처량함을 감출 길이 없다. 시 외곽에는 하루에 편지 한통도 수거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존재가치가 없어진 우체통은 조용히 없어지고 있다. 체신청은 개인우편사업의 수익성이 워낙 낮아 이용자가 적은 곳의 우체통은 없앤다는 입장이다.

느리고 불편했지만 소중한 정성이 담겨 있는 것들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편지를 쓰는 일은 줄었지만 글로 마음을 전하는 여유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by 100명 2007. 4. 25. 08:00
  • 50만원 휴대폰 때문에 2억 벤츠를 부숴? 누구이길래…
  • 일본 교회 선교사가 되어 성남 노인병원서 봉사활동 중이었는데
    새로 산 휴대폰이 글로벌 로밍 안돼 여러차례 SKT에 항의하다
    소용없자 결국 차로 본사 현관 돌진
    • 휴대폰 서비스에 불만을 품은 40대 남자가 벤츠 승용차를 몰고 서울 도심의 SK텔레콤 본사 정문을 들이받았다. 〈본지 4월11일자 보도〉

      지난 10일 낮 12시50분쯤 서울 을지로 2가 SK텔레콤 본사 현관으로 벤츠 S500이 돌진했다. 건물 입구 회전문은 산산이 부숴졌고, 현관 회전문을 들이받은 시가 2억여 원 상당의 벤츠를 찍은 사진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져나갔다. 이날 사건의 주인공은 김모(47·경기도 성남 거주)씨. 사건 발생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김씨는 경찰조사에서 “50만원을 주고 산 휴대폰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50만원짜리 휴대폰 때문에 2억여 원의 외제차를 부수다니? 차량 수리비만도 1000만원. 과연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김씨는 경기도 성남의 한 노인치료 전문 병원에 이사로 재직하며 그곳에서 생활했다. 병원에서 그의 역할은 노인 수발. 선교사인 그는 입원한 노인들을 목욕시키고, 말벗이 되어 줬다. 몇몇 복지관을 돌며 봉사활동도 펼쳤다. 그래서 수입은 없다. 전도에만 신경 쓰는 김씨는 월급도 받지 않는다.

      홍성선 원장은 “오랜 지인인 김씨가 우리 병원에서 돈 한 푼 받지 않고 봉사 활동을 해왔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김씨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선교 활동도 꾸준히 해왔다.

      그렇다면 벤츠 승용차는 어떻게 된 것일까? 김씨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김씨는 10년 전 일본으로 건너가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으로 상당한 부(富)를 쌓은 자산가다. 이후 뜻하는 바가 있어 일본 교회 소속 선교사가 되었고, 탈북난민돕기와 노인봉사활동 등을 비롯해 선교 활동에 전념해왔다. 그간 모은 재산으로 특별히 돈에 구애 받지 않고 선교 생활을 유지해왔으며, SK본사 회전문을 박살낸 벤츠 승용차 역시 친구 명의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김씨 소유였다.


    • 이번 사건을 담당한 남대문 경찰서는 “김씨가 돈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친구에게 3년 전 1억2000만원을 빌려줬고, 그 친구가 빌린 돈 대신 김씨가 리스(lease)하려는 차를 자신의 명의로 빌려 매달 할부금을 넣어왔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김씨의 차 조수석 앞 유리창에는 ‘불량 SK’라고 적힌 A4용지 4장이 붙어 있었다. 평소 외국을 자주 오가는 김씨는 지난달 12일 인천에서 글로벌 로밍(roaming)이 되는 휴대폰을 구입했으나 처음부터 작동되지 않았다. 출국 시간으로 마음이 조급했던 김씨는 바로 중국으로 떠났다. SK텔레콤은 “고객이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는 바람에 제대로 전산 등록이 되지 않아 작동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런 김씨는 귀국 후 수 차례 서비스센터에 “작동이 안 되니 휴대폰을 교환해달라”고 전화를 했고, 지난달 27일에는 직접 본사를 찾아가 고객 상담팀 직원을 만났다. 그러나 상담팀은 “교환은 안 된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SK텔레콤측은 “직접 김씨로부터 휴대폰을 건네 받아 등록이 제대로 되었는지 살펴보려 했지만 김씨는 계속 교환만 주장했다”며 “서비스 불만으로 항의하는 고객은 그 종류도 다양하고, 사안도 각양각색이라 회사가 일일이 처리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측 얘기는 다르다. 김씨의 친구 강모씨는 “휴대폰을 구입한 뒤 휴대폰 이용 요금 고지서도 받았고, 이미 휴대폰에 번호가 등록된 상황에서 오작동의 원인이 전산 등록에 있다면 본사 전산 조작만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며 “해외에서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고 구입했는데 국내에서조차 사용할 수 없다면 SK텔레콤은 책임지고 제품을 교환해줘야 한다”고 반박했다.

      지난 10일 김씨는 다시 한번 SK텔레콤 본사를 찾았고, 경비원이 주차 문제로 차를 빼라고 말하자 순식간에 핸들을 돌려 건물 현관 입구로 돌진했다. 김씨는 경찰에서 “여러 차례 항의 전화도 하고, 직접 본사로 찾아가 따져도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그러던 찰나에 경비원이 회사에서 차를 빼라고 하니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후 SK텔레콤은 직접 회사 사장이 나서 전 직원에게 이메일을 돌리며 ‘서비스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김씨는 지난 12일 재물손괴 혐의로 구속됐다. 법원은 김씨의 거주지가 불분명해 도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김씨의 딸은 인터넷 신문고 사이트에 글을 올려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중이다. 김씨를 면회한 지인들 역시 “사고 직후 SK텔레콤 본사 현관에서 끌려 내려오는 과정에서 김씨가 목을 다쳐 현재 거동이 불편한 상태”이며 “SK텔레콤에 대해 더욱 강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고 전했다.
  • by 100명 2007. 4. 21. 19:21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1>어니스트 섀클턴 자서전



    《나는 내 어깨 위에 무거운 책임이 지워졌음을 느꼈고 대원들의 의기소침한 태도를 보니 용기를 내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난파선 634일만의 귀환, 그 힘은?

    이 책을 읽으면서 군 생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던 이틀간의 동계훈련. 정말이지 너무나 힘이 들어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저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1874∼1922)은 내 기억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동계훈련보다 수백 배는 더 어려운 상황에서 634일 동안이나 대원들을 이끌면서 모두 살려 냈다는 사실이다. 섀클턴의 위대한 리더십과 조직원들의 팀워크가 그 역경을 이겨 내게 했다.

    1914년 12월 5일 섀클턴은 남극 대륙을 횡단한다는 야망을 품고 27명의 대원과 함께 인듀어런스호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부빙(浮氷)에 배가 난파하면서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펭귄을 잡아 허기를 달래고, 혹독한 추위에 발이 썩으면서도 전진하고 또 전진했던 이들이 구조되기까지 2년간 겪은 일들은 인간의 생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얼어붙은 웨들 해 부빙 위에서의 생활, 지붕도 없는 보트로 험난한 남극해를 두 번이나 건너는 위험천만한 항해, 절해고도 엘러펀트 섬에서의 사투. 이 모든 것이 인간이 가진 인내력의 한계를 보여 준다.

    이 처절한 여행의 하루하루 그리고 고비마다 탐험대장 섀클턴은 대원들에게 역경을 극복하는 지칠 줄 모르는 힘, 창의성, 영감을 불어넣었다.

    비슷한 시기인 1913년 8월 3일 빌햐울머 스테펀슨이 이끄는 캐나다 탐험대가 캐나다 최북단 해안과 북극점 사이의 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출발했다. 이들이 타고 간 탐험선 칼럭호도 단단한 빙벽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승무원들은 고립된 지 수개월 만에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이기적인 사람들로 변해 버렸다. 거짓말과 도둑질은 일상이 됐고, 11명의 승무원은 북극 황무지에서 죽음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섀클턴이 이끄는 인듀어런스호는 완전히 달랐다. 똑같이 지옥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의 대원들이 보여 준 행동은 칼럭호와 반대였다. 거짓말과 속임수가 아니라 팀워크, 희생정신, 그리고 서로에 대한 격려가 충만했다.

    최근 기업들은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시장에서의 경쟁뿐만 아니라 예측하지 못했던 사고와 재난이 수시로 기업을 엄습한다. 그리고 이런 위기를 리더가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섀클턴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면 조직원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팀의 구성원으로선 긍정적인 사고와 인내심, 존중과 협력의 정신을 가지면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 닥쳤던 역경, 아니 다가올지 모르는 역경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섀클턴과 대원들이 겪은 634일간의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섀클턴과 대원들이 역경을 극복했듯 긍정적인 사고와 인내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도 함께 들었다.

    조성용 한국리더십센터 사장

    by 100명 2007. 4. 13. 23:48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3>잭 웰치·끝없는 도전…



    《내가 GE를 경영하면서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능력 있는 사람을 핵심 역량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최고의 인재를 가장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그를 지원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의 전부라고 믿었다.》

    ‘CEO의 전설’이 말하는 인재경영

    “CEO는 정말 골치 아픈 직업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다.”

    잭 웰치는 제너럴 일렉트릭(GE) 최연소 회장으로 부임한 후 20년간 GE의 시가총액을 40배로 키워놓은 전설적인 경영자이다. 그는 GE를 오늘날 ‘경영사관학교’라는 별칭을 얻게 하며 세계적인 기업들의 최고경영자(CEO) 공급처로, 또 세계 초우량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잭 웰치·끝없는 도전과 용기’는 잭 웰치가 GE를 은퇴하면서 최초로 집필한 경영지침서이자 회고록이다. 관료적이고 보수적이었던 GE를 변모시켜 기업의 시장가치를 120억 달러에서 4500억 달러로 끌어올린 잭 웰치의 경영 철학에 대해 다른 사람이 쓴 책은 많이 나와 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기업경영에 관해 직접 쓴 것으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에는 잭 웰치가 GE의 조직 체질을 바꿔가며 추진했던 수많은 혁신 사례들이 일화 위주로 실감 나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그가 주장했던 4가지 이니셔티브, 즉 ‘6시그마’, ‘세계화 전략’, ‘서비스 사업 개발’, ‘e비즈니스로의 전환’ 등은 이미 경영학계의 정설이 된 실천 경영 사례로 많은 독자들에게도 익숙하다.

    이 책은 딱딱한 경영지침만을 열거하지 않는다. 잭 웰치 개인의 가족 이야기부터 경영의 성공담과 실패담까지가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실감나게 그려진다. 어릴 적 말더듬는 버릇으로 인해 소심했던 웰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어머니의 이야기라든지, 일중독에 빠져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이후 재혼하게 된 사연 등은 어려웠던 시절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준다.

    그런가 하면 1700여 건의 인수합병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키더 피보디(Kidder Peabody)’ 인수가 실패로 판명된 것이나 ‘허니웰(Honeywell)’ 인수가 무산된 데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대목도 나온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웰치의 인재 경영 방식이다. 잭 웰치는 “안타를 잘 치는 10명의 선수보다 홈런을 치는 1명의 선수를 키워라”라고 주장하며 5년간 무려 11만 명이나 되는 인원을 감축해 ‘중성자탄 잭’이라는 씁쓸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가능성이 보이는 핵심 인재에게는 아낌없는 지원과 믿음을 쏟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깊은 우물에 호스를 대는 것뿐이다”라고 말한 그는 핵심 인재 중심의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기업 문화를 만들며 직원들에게 최대한의 자율성을 부여했다.


    이렇듯 잭 웰치 본인의 카리스마 넘치고 대담한 성격을 그대로 닮은 그의 삶과 경영법이, 반드시 모든 환경과 기업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지침들을 거울삼아 더욱 의미 있는 인생과 혁신적인 경영 사례를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이 책을 읽고 실천을 다짐하는 모든 독자의 몫일 것이다.

    최효진 HR코리아 대표

    by 100명 2007. 4. 13. 23:47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살바도르 달리



    꿈을 일상으로 바꾼 천재 예술가

    《나는 늘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맹목적인 습성에 경악한다. 은행직원이 수표를 먹지 않은 것에 놀라고 나 이전에 어떤 화가도 흐물거리는 시계를 그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다.》

    천재를 열망하는 세상을 향해 ‘나는 천재이다’라고 깜짝 선언한 화가가 있다. 바로 초현실주의 스타 화가인 달리이다.

    독자여, 그대가 설령 미술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달리의 시계는 기억하리라. 치즈처럼 물렁한 달리표 시계는 미술교과서와 상업광고에도 단골로 등장하니 말이다. 달리가 흐느적거리는 시계를 개발한 덕분에 시계처럼 정확한 인간이 되기를 갈망한 사람들은 긴장감을 떨치고 한결 여유를 갖게 되었다. 아울러 시간은 정확하고 견고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도 해방되었다.

    그렇다면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에게 원초적 시계를 선물한 달리를 천재로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실 천재라는 단어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단어는 드물다. 과연 천재는 어떤 사람일까? 백과전서의 저자이자 프랑스 사상가인 디드로의 입을 빌려 천재를 정의해본다. ‘정신의 확장, 상상력, 영혼의 활달함, 그것이 천재이다.’

    디드로의 이론에 따르면 달리는 분명 천재이다. 그는 엄청난 상상력과 샘물처럼 솟는 아이디어, 기발한 발상으로 사람들의 잠든 의식을 단숨에 깨우곤 했으니까.

    그런 달리가 자신의 독특한 예술관, 사랑, 인생, 속내를 파격적으로 털어놓은 책이 지금 소개할 ‘살바도르 달리’이다. 그는 이 자서전에 아이처럼 치졸한 발상과 불경스럽도록 자유분방한 성의식, 편집광적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 천재성을 뽐내는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허풍쟁이 달리라고 흉보지 말자. 왜? 그것이 곧 천재예술가의 특권이니까. 생각해 보라. 만일 자아에 대한 확신, 혹은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토록 지나친 열정을 가지고 미친 듯 예술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시인 장 콕토는 ‘천재는 자신과 사랑에 빠진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흔히 세 살에서 일곱 살까지를 창조성의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아이들은 불꽃같은 열정으로 세상을 공부하고 농축된 호기심과 탐구심을 자양분 삼아 창의성과 상상력을 활짝 꽃피우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달리는 영원한 아이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던 도중 소설 양철북과 영화 아마데우스가 머리에 스쳤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는 위선과 증오로 가득 찬 세상을 거부하고 속물적인 삶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 세 번째 생일날, 자신의 의지로 신체적 성장을 멈춘다. 그리고 그는 영원한 아이로 살아가는 운명을 선택한다. 한편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는 천재성 대신 천재를 알아볼 능력만을 준 신을 저주하며 열등감의 원천인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끌며 그 또한 파멸의 길을 걷는다.


    오, 천재에 대한 선망과 감탄, 그리고 질투여!

    독자여, 만일 그대가 영원한 아이이며, 천재인 달리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꿈을 일상으로, 일상을 꿈으로 변형시킨 위대한 연금술사의 자서전을 꼭 탐독하기 바란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by 100명 2007. 4. 13. 23:47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6>러셀 자서전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 이 열정들이 바람처럼 나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한 사람의 자서전이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문화적 사상적 지형도가 되는 드문 일이 있다. 철학자, 수학자, 문필가, 반전운동가, 백작, 노벨 문학상 수상자, 대안 교육가, 여권 신장 운동가 등 하이브리드의 삶을 산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이 바로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 케임브리지 시절, 학문적 활동기, 활발한 사회 활동기 등으로 이어지는 이 자서전에서 단연 흥미로운 대목은 문화계와 사상계 저명인들과의 교유다.

    철학자 조지 무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 경제학자 존 케인스, 소설가 데이비드 로렌스, 조지프 콘래드(러셀은 아들 이름을 콘래드로 지었다. ‘내가 늘 가치를 발견하는 이름’이라는 게 이유였다), 사회운동가 시드니 웨브 부부, 시인 T S 엘리엇,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한밤중 러셀의 집으로 찾아와 서재에서 불안스럽게 서성거리는 비트겐슈타인을 향해 던진 러셀의 질문. “자네는 지금 논리학을 생각하나? 인간의 죄를 생각하나?”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인즉, “둘 다입니다.”

    러셀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그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국가나 타인이 간섭할 수 없다는 원칙에 철저했다.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시를 쓴 어느 젊은 시인을 영국 경찰이 구속하자, 러셀은 영향력을 발휘하여 시인을 석방시키려 했다. 시인이 시 때문에 구속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결국 시인은 러셀의 노력으로 석방됐지만, 러셀은 문제의 시를 읽어보고 매우 역겹게 느꼈다. 그러나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시가 아무리 역겹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끼친다고 할 수는 없다.’

    자서전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들 가운데 하나가 그 솔직함이라고 볼 때, 러셀의 자서전은 최고급의 자서전이다. 청소년 시절 러셀은 하녀를 유인하여 키스와 포옹을 하고 ‘나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하녀는 러셀의 제의를 거부하면서 ‘당신이 훌륭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러셀은 자신의 약점으로 비칠 소지가 있는 행적이나 심경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밝힌다.

    중국과 러시아 방문 경험에도 비교적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중국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면 소비에트 체제가 막 들어서고 있던 러시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특히 당시 중국 베이징대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러셀은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서 중국의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러셀의 자서전은 자서전 문화에 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시시비비의 판단을 드러내지 않는 두루뭉술한 자서전,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은 슬쩍 넘어가는 자서전,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자서전. 이것이 그동안의 우리 자서전 문화가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해보는 것이다. 러셀 자서전은 우리에게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사연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by 100명 2007. 4. 13. 23:46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5>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나는 전문가의 의견을 참조하는 실수를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단 한 번의 삶을 살며, 실수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배운다. 그것이 여러분의 목표이다.》

    성공적인 자서전은 어떤 것일까? 독자가 저자의 위대한 삶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저자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한 교훈을 은은히 남기는 글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과학자와 일반인에게 두루 유명했고, 많은 사람이 “물리학계의 무서운 신동”이라 불렀던 미국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1918∼1988)이다. 그는 유쾌하고 재치 있고 수수께끼 풀이에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물리학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겼고, 그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대중을 위한 강연과 저술의 능력도 탁월해서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를 친근하게 기억한다.

    우리가 100m 세계기록 보유자에게 감탄하듯이, 파인만에게 감탄하는 것은 그의 천재성에 대한 아주 단순하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만약 이 자서전이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데에 그치고 만다면, 그건 명백히 실패다.

    새내기 물리학도로서 노벨상을 꿈꾸던 시절에 감히 영어로 읽으려 애썼던 이 책을 훌륭한 우리말 번역으로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이 성공적인 자서전이라고 재평가하게 되었다. 과거엔 욕심이 앞서 감탄하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 호기심, 모험, 나만의 방법, 관습에 대한 무관심, 앎과 배움 그 자체의 즐거움, 놀이, 책 밖의 실제 세상 등의 핵심적인 화두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알고 보니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라는 제목에 이미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파인만은 이런 말을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자주 듣는 사람이었다. 파인만은 나름대로 진지한데, 사람들은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왜일까? 파인만은 실제 세상에서 스스로 배운 반면, 사람들은 책과 권위와 격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배웠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즐겁지 않으면 안 하는 족속인데, 사람들은 하라면 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수수께끼를 보면 군침을 흘리는데, 사람들은 울상을 짓거나 무시하거나 다수가 의지하는 권위자에게 달려가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권위와 겉치레에 반대하도록 배웠다”고 파인만은 말한다. 이 배움을 실천하면서 살기는 어렵다. 그리고 더욱 어려운 것은, 그렇게 살면서 진정으로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파인만은 사랑스럽다. 설령 그가 천재 물리학자에다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많은 사람은 과학의 즐거움에 관심이 있기보다 과학을 잘하는 비법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앨버트 R 힙스가 기억하는 파인만의 눈빛이 전하던 메시지, 그건 ‘물리학, 그 자체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니 파인만의 자서전에서 과학 잘하기 비법을 건질 가망은 일단 없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보자. 혹시 과학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과학을 잘하는 비법이 아닐까? 더 나아가 파인만의 아버지가 남긴 가르침을 보라. 그것은 또 다른 과학 잘하기 비법이 아닐까? 자유로운 자만이 과학을 잘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틀에 맞지 않는 제 자신을 깎아내다 지치고 풀이 죽은 젊은이들에게 이 성공적인 자서전이 주는 교훈인 듯하다.

    전대호 시인·과학평론가

    by 100명 2007. 4. 13. 23:46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4>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메이지시대 일본 근대화의 기수

    《정치와 관련된 나의 언행은…소위 진찰하는 입장에서, 정부 내에 지위를 점하고 정권을 휘두르며 천하를 치료할 뜻은 없지만, 아무래도 국민 모두를 문명개화의 문으로 인도하여 일본을 병력이 강하고 상업이 번창한 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근대 이후의 일본을 생각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했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탈피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의 한 쪽이 되지도 못하였고 아시아에 복귀하지도 못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근대 일본 서구문명의 길라잡이였던 후쿠자와는 메이지(明治)시대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서구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창한 사상가이자 교육가로 게이오(慶應)대를 설립했다. 특히 그의 초상은 오늘날 일본은행권 최고가 화폐인 1만 엔권 지폐의 앞면에 새겨져 있고 일본인들에게는 근대 일본의 민주화에 공헌한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실제 어떤 인물이었을까?

    후쿠자와는 소년 시절 학문에 뜻을 두고 봉건적이고 계급적 질서의 근거로 비판받았던 한학 등에 반발하여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난학(네덜란드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20대 중반에 도쿄에 가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영국 미국 등 영어권이라는 사실에 놀라 학문의 방향을 영학(英學)으로 바꾸었다. 그는 1860년 미국을 최초로 방문했던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 몰락 직전의 막부에서 외국 관련서류 번역담당관으로 근무했다. 1861년에는 막부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약 1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이런 경험으로 유럽과 미국의 학문 및 서구사상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그는 ‘서양사정’(1866년)을 비롯한 엄청난 저술활동으로 당대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또 저작물 수입을 바탕으로 게이오의숙을 창설하였다. 1868년 에도막부가 몰락한 뒤 신정부에 참여하지 않고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핵심 정치가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며 당대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 매김했으며, 서구화를 지향하는 재야인사이자 친정부적 국권론자로 변모해 나갔다. 그의 이상은 그가 남긴 어록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자존’이라는 한마디에 압축돼 있다고 하겠다.

    후쿠자와는 1882년 임오군란 후 조선에서 청국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의 급진개화파를 지원해서 그들이 스스로 국내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 그는 1885년 3월 16일 ‘탈아론’을 시사신보에 발표하며 일본이 다른 동양 국가들과 협조할 게 아니라 그들을 넘어서자고 주장했다.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한국의 근대는 왜 일본과 다르게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개방과 근대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사회 인식과 이를 부채질한 지도층의 빈약한 국제 인식 등 19세기 말 우리는 너무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침략이 정당화될 순 없으나 당시 우리의 안이한 대응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서민교 연세대 강사

    by 100명 2007. 4. 13. 23:46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8>나는 다다(dada) 다



    《진실을 말하라면, 내게는 학교와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이 있었다. 나는 가르치는 것을 믿지 않았다. 고독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만이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근래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열렸던 맨 레이(1890∼1976) 사진 전람회의 맨 끝 벽에는 ‘참여하지는 않지만, 무관심하지도 않았던’이라는 문구가 인상 깊게 쓰여 있었다. 이 문구는 레이와 생의 마지막을 같이했던 그의 부인 줄리엣 맨 레이가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그의 묘비에 썼던 것이었다. 이는 물론 레이가 살아 있을 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었다. 그의 자서전 ‘나는 다다다’(원제 ‘Self Portrait’)를 펼치면, 왜 그가 평소 자신의 삶을 이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레이는 현대 문학예술의 정신적 기반이며 20세기의 예술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던 다다(dada) 운동과 초현실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한 사진가이자 화가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평범한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당시의 현대미술에 매혹되어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그는 ‘뉴욕 다다’를 이끈 마르셀 뒤샹, 프랑시스 피카비아 등과 만나면서 뉴욕 다다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1921년엔 파리로 거처를 옮겨 파리 다다에 합류했다. 앙드레 브르통과 파리 다다의 회원들이 주도한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사진가로서 또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파리와 미국을 오가며 오랜 기간 다양한 장르의 실험을 지속했다.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사진을 레이는 초현실주의적인 사진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그에 의해서 사진은 처음 본격적으로 현대예술의 주류로 편입되었고, 기계시대의 미학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매체로 인정받게 되었다.

    레이의 자서전엔 이러한 그의 삶의 여정, 작품에 대한 고민과 철학, 주변 사람들의 얘기 등이 잘 녹아 있다. 평생을 친구로 살았던 뒤샹과의 일화부터 여성들과의 사랑과 이별, 전쟁의 경험, 당시 파리 미술계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주변이 파노라마처럼 얽혀 있다.

    때로는 성공을 위해 브르통이나 돈 많은 귀족 부인들의 눈치를 보는 대목도 있고, 생존을 위해 혹은 작은 편리함을 위해 슬쩍 거짓말을 하는 장면 등도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펼쳐 보인다. 그래서 이 위대한 예술가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고 옆집 아저씨 같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나온다.

    원래 사진가는 자기 작품 외에도 인물사진이나 잡지 및 도록에 필요한 사진을 찍어 주는 재주 때문에 다른 예술 분야의 사람들과 유달리 교분이 많은 편이다. 레이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의 자서전에는 뒤샹이나 브르통 외에도 트리스탕 차라, 파블로 피카소,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콘스탄틴 브란쿠시, 살바도르 달리, 장 콕토 등 20세기 예술을 빛낸 수많은 작가의 삶과 취향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더구나 이 책은 소설 쓰기를 열망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가장 허구적인 자서전이 가장 사실적인 전기보다 낫다’고 뻐기면서 1951년부터 63년까지 13년간 집필한 그의 또 다른 예술작품이며, 원제목처럼 그의 자화상이다.

    박주석 명지대 교수


    by 100명 2007. 4. 13. 23:45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7>마가렛 미드 자서전



    《인간의 모험을 전체로서 바라보고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에 관한 지식이 세계에 생명력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것, 거기에 희망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인류학의 어머니’ 치열했던 발자취

    프란츠 보아스를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마거릿 미드(1901∼1978)는 인류학의 어머니다. 미드는 인간 본성과 문화의 다양성을 탐구하기 위해 오지에서의 고독한 현지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말년에 미드가 쓴 이 자서전은 얼마나 그녀가 자신의 삶과 직업과 사랑과 가족과 인류학에 대하여 진지했고 치열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녀는 50여 년을 남자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하고 고단한 오지의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남태평양의 사모아 제도, 뉴기니의 세픽 강가와 마누스 섬,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에서 그녀가 평생 실험하고 연구한 남녀의 문화적 차이와 양육, 문화와 기질의 관계는 당시 프로이트 심리학이 지배하는 인간 과학에 새로운 의문을 던져 주었다.

    미드는 자신의 삶이 보여 준 것처럼 성과 결혼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그녀는 인간의 수명이 연장될수록 일부일처제가 평생 지속될 가능성은 적어진다는 생각을 하였고, 결혼에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말 것과 예비결혼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녀는 목사 지망생, 현지 연구 중에 만난 열정적인 인류학자 레오 포천,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혼인하는 등 3번 결혼하고 또 이혼했지만 전남편들과 그들의 배우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도전적 삶을 살았다.

    이 자서전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미드의 연구는 항상 실천적인 사회 참여로 행동에 옮겨졌으며 사회활동은 말년까지 그칠 줄 몰랐다. 그녀는 미국 인류학회와 미국과학진흥협회 회장을 지냈을 뿐 아니라 국립 아카데미 회원이었고 세계교회협의회 등 10여 개 조직에도 관여했다. 미드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종교와 여성, 범죄, 음주, 결혼 문제 등 거의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대중 강연을 했으며 여성잡지 ‘레드북’에 16년간이나 기고를 하여 여성 인권 신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무엇보다도 미드는 인류학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으며 그 덕분에 미국 사회는 편협한 문명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외부 세계를 바라보고 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1978년 11월, 미드가 췌장암으로 생을 마감하였을 때 그녀가 현지 조사를 했던 남태평양의 마누스 섬 마을 사람들은 대추장이 서거했을 때 치르는 5일간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애도를 표했다. 그녀가 사망한 이후 호주의 인류학자 데릭 프리먼은 미드의 사모아 제도 연구가 믿을 수 없이 순진한 것이었다고 비난하는 책을 발간했고, 뉴욕타임스는 이를 1면에 보도하여 ‘미드의 신화’가 다시 엄청난 논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사모아 제도를 다시 찾은 인류학자들은 그녀가 옳았고, 객관적이었으며, 매우 훌륭한 연구자였음을 증명해 주었다.


    미드의 자서전은 참으로 문학적이고 세심하게 삶과 학문,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 줌으로써 왜 미드가 인류학의 어머니로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는지를 가슴으로부터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녀는 자신이 머무는 곳 어디든지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열정적으로 만났던 것이다.

    이태주 한성대 교수

    by 100명 2007. 4. 13.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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