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커버스토리 1974년 <맹물로 가는 자동차>라는 ‘맹랑한’ 영화가 나왔다. 신일룡·장미화·신영일·김세환·오수미·나하영 등 당시 내로라하는 청춘스타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휘발유 대신 맹물로 자동차를 움직이겠다고 장담하는 허풍쟁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코미디물이다.
미국에서는 영화같은 ‘사기’가 실제로 있었다 한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루이스 엔리히라는 고희 노인이 맹물로 달리는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선언했다. 엔리히는 뭇사람들을 모아놓고선 자동차 연료탱크에 맹물을 붓고 녹색 알약 몇알을 넣은 뒤 시동을 걸어 거뜬히 달렸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조차 놀랬던 이 사건은 결국 사기로 드러났다.
맹물 자동차 사기가 통했던 것은 물을 분해할 때 나오는 수소를 연료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수소가 화석 에너지 고갈을 해결해줄 새 에너지로 주목받으면서 과연 수소가 맹물자동차의 ‘오명’을 벗겨줄지, 수소의 진정성 논쟁이 점화되고 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3년 1월 국정연설에서 “수소 연료전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유망하고 혁신적인 기술을 대표할 것”이라며 수소에너지 개발에 120억달러(12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도 2002년 3월 국회연설에서 “연료전지 자동차와 가정용 연료전지 시스템을 3년 안에 실용화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3월 연료전지 자동차를 시승하고 나서 “우리는 수소시대로 가고 있다”고 발언하자 곧바로 정부가 올해를 ‘수소경제의 원년’으로 천명했다. 산업자원부는 조만간 2040년까지의 국가 수소경제정책 방향성을 제시할 ‘친환경 수소경제 구현을 위한 종합계획’(마스터 플랜)을 보고할 예정이다.
수소 논쟁은 ‘수소경제’라는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굳이 따진다면 수소경제라는 말의 ‘저작권’은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저자인 제레미 리프킨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리프킨은 우리나라에는 ‘수소혁명’으로 번역된 <수소경제―석유시대의 종말과 세계경제의 미래>라는 책에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자원인 수소가 앞으로 인류 문명을 재구성하고 세계 경제와 권력구조를 재편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곧 고갈될 석유를 대신할 자원으로 수소를 예고하고, 수소를 ‘민주적 에너지’로 의미지웠다.
정부, 올해를 수소경제 원년 선포
정부는 마련 중인 수소경제 비전에서 “수소경제는 탄소에 기반한 하부 경제구조가 수소 중심으로 전환된 미래 경제사회”라고 밝히고 있다. 리프킨의 미래관과 닮았다. 홍성안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수소·연료전지사업단 단장은 이달 중순 국회에서 열린 ‘수소경제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회에서 “수소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풍부한 물에서 제조할 수 있어 자원 제약이 없고, 또한 수소 이용기술인 연료전지에 의해 전기를 생산할 때 생성물이 물밖에 없는 재생가능한 청정연료”라며 “수소에너지는 궁극적으로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에너지와 환경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꿈의 에너지원”이라고 밝혔다. 홍 단장은 2040년까지 국가 총에너지 수요의 20%를 수소에너지가 담당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정작 재생가능하고 친환경적인 대안에너지 정책을 촉구해오던 환경운동 진영에서는 수소경제의 ‘미화’를 경계하고 나섰다. 이상훈 환경운동연합 정책기획실장은 “화석연료가 산업사회를 가져왔듯이, 수소가 또다른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변화를 가져올 듯이 표현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지적한다. 수소에너지는 석유나 원자력처럼 1차 에너지 곧 에너지원이 아니라 전기와 같은 2차 에너지 또는 에너지 ‘담채’다. 수소는 무엇을 에너지원으로 생산할 것이냐는 문제를 여전히 남긴다는 것이다. 이 실장은 “유럽연합의 ‘저탄소경제 비전’에서 연료전지가 극히 일부만을 담당하고 있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미국이나 일본도 적어도 정책발표에서 ‘수소경제’라는 말을 우리처럼 과감하게 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강용혁 에너지기술연구원 신재생에너지부장은 “수소에너지는 신재생에너지법이 규정한 11개 신재생에너지의 한 가지에 불과했다”며 “지금은 별다른 합의 없이 수소에너지가 나머지 신재생에너지를 흡수해버린 형국”이라고 말했다. 강 부장은 “중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신재생에너지로 가야 할 터인데 급하다고 한쪽에 투자가 집중돼서는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탄소경제의 생명연장 수단일뿐”
두번째 쟁점은 수소에너지의 강조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재생가능 에너지 활성화에 찬물을 끼얹고 화석연료와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 정책으로 ‘회귀’하려 한다는 지적에서 출발한다.
정부의 수소경제 비전 초안은, 2040년까지 최종 에너지 15%를 수소연료로 충당해 에너지자립도를 23%로 높이고, 이산화탄소를 20% 저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계획대로 되면 2040년 1250만대의 연료전지 자동차가 운행되고 가정에 276만대의 연료전지가 보급되는 것으로 돼 있다.
홍성안 단장은 토론회에서 ”현재는 대체에너지원으로부터 수소를 경제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아 과도기로 천연가스나 석유 등 화석연료에서 직접 수소를 추출해 사용하고 있다”며 “기술개발이 원활히 진행되면 궁극적으로 수소는 물을 재생가능에너지 잉여분으로 전기분해하거나 제4세대 원자로에서 얻는 고열로 열분해해 얻게 될 것이다”고 밝혔다.
이상훈 실장은 이에 대해 “정부의 수소경제 비전은 수소가 탄소를, 연료전지가 내연기관을 대체한다는 전제를 하면서도 사업계획은 정작 화석연료(천연가스) 개질과 원자력 확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탄소경제의 대안으로 등장한 수소경제가 탄소경제의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역설적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소경제는 기존 화석연료·원자력 중심의 에너지정책 강화를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필렬 방송통신대 교수(문화교양학)는 “수소와 연료전지는 앞으로 꽤 보급될 것이고, 태양이나 풍력으로 만든 여분의 전기도 수소 생산에 쓰일 것이지만 경제성과 효율성 때문에 수소가 중심 연료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주장했다.
국민 수용성도 따져 추진해야
수소경제를 바라보는 원자력계의 시선은 다르다. 박창규 소장은 “신재생이냐 수소냐 논쟁이 아니라 무슨 기술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 우리 입장에서 가장 바람직한 기술적 대안이 무엇이냐가 논의의 초점이 돼야 한다”며 “수소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원자력이다”라고 밝혔다. 박종균 원자력수소사업추진단 단장은 “지금까지 에너지는 자원 확보가 목표였지만 수소는 기술주도형 에너지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유일한 기회”라며 “수소경제 시대에는 우리가 기술만 개발하면 에너지 자립의 길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박 소장 시각으로는 정부의 로드맵이 오히려 너무 느슨하다. 박 소장은 “우리나라는 기름값 오르면 대안이 없다. 수소에너지 체제를 가속화해야 한다. 정부가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태도에 대해 한 환경운동가는 “석유가 정점에 대해 언급도 인정도 하지 않던 산자부 등 에너지 정책 당국이나 원자력계가 묘하게도 수소경제를 언급할 때는 망설임없이 2010년이면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고유가가 정착될 것이라는 둥 석유가 정점에 대해 강조한다”고 꼬집었다.
수소경제의 또다른 논점은 국민의 수용성 문제다. 이 주제는 에너지 정책에 대한 국민 인식과 연관돼 있다. 현재와 같은 자동차 위주의 에너지 정책이 계속된다면 수송 연료의 90%를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국민으로서 이를 대체할 수소경제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윤순진 서울시립대 교수(행정학과)는 “국민의 80%가 원자력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원전이나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이 자신의 지역에 들어오는 데는 20%만이 수용 의사를 밝히고 있다”며 “수소경제 정책도 장기계획인 만큼 국민의 수용성을 따져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필렬 교수는 “수소 위주 정책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국민에게 석유 고갈이라는 에너지 위기를 수소가 해결해주리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며 “국민들에게 좀더 차분하게 따져볼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