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 스크린 독점 논란
스크린 싹쓸이가 괴물 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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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06-09-04.11:29 수정2006-09-04.11:29 |
결국 <괴물>은 관객 천만의 벽을 넘었다. 지난달 26일에는 <태극기 휘날리며>가 세웠던 총관객 2위 기록도 깼다. 이제 남은 벽은 하나. 올해 초 <왕의 남자>가 세웠던 1200만 기록을 넘어서는 것도 시간문제인 듯 보인다. 문자 그대로, 파죽지세(破竹之勢)다.
놀랍기도 하지만, 일단은 반갑다. 좋은 영화가 많은 관객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극히 좋은 일 아닌가. 영화의 감상이야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라고는 해도, 가족영화와 사회비판 드라마, 그리고 괴수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한 데 버무려 이만한 성과를 끌어낸 것은 칭찬할 일이다. 더구나 별다른 전례가 없던 한국 괴수영화진영에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괴물>의 흥행은 더욱 반갑다. 그런데 어째 좀 이상하다. <괴물>이 남긴 흔적이 거대해질수록 영화계 안팎으로 높아지는 건 환호성이 아니다. 걱정과 우려, 심지어는 비난까지. 대체 <괴물>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스크린 독점의 폐해?당초 620개의 스크린을 확보하고 대대적 마케팅을 통해 <괴물>이 홍보되던 시점부터 걱정의 시선은 존재했다. 한국영화 사상 최다 스크린 확보. 문자 그대로 물량공세였다. 개봉과 함께 <괴물>의 흥행세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스크린 독점’이라며 영화를 몰아세웠다. 연 이어 개봉일자를 잡은 <플라이대디>의 배우 이문식은 “<괴물>의 흥행은 반가운 일이지만 박수칠 일만은 아니다”라고 했고, 나아가 김기덕 감독은 “한국영화와 관객의 수준이 낮은것” 이라고 지적했다.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이후 갈수록 많은 논란을 낳기는 했으나 일단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한 지적만큼은 사실상 맞는 말이다. 전국 스크린의 35%를 점령한 <괴물>의 개봉 방식을 놓고, ‘스크린 독점’을 떠올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괴물>‘만’이 모든 폐단의 주범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불성설이다.
‘스크린 독점’은 한국의 블록버스터들이 지금까지 해 온 관행적 개봉방식이었을 뿐, <괴물>이 오롯이 짊어져야 할 죄가 아니었다. <한반도>,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태풍>, 그리고 심지어는 <왕의 남자>까지. 소위 대작 영화이거나 흥행작인 경우, 수백 개의 스크린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관객을 만나왔다. 그것은 멀티플렉스 정착 이후 완전히 자리 잡은 와이드 릴리즈 개봉방식의 결과였으며 제작사와 배급사 그리고 극장이 수직계열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문제였다. 물론 그 사이에는 ‘관객의 요청’이라는 드문 변수도 작용하지만, 그야말로 이건 <왕의 남자>나 <괴물> 정도에 한정되는 변수였을 뿐이다.
개별 영화 아닌 구조가 문제기본적으로 구조의 문제였던 셈이다. 대기업 계열사인 CJ와 쇼박스가 국내 영화배급의 40%를 독점하고, 심지어 극장체인망까지 소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스크린 독과점’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필이면 미국의 예를 들게 되어 안타깝지만 와이드 릴리즈와 멀티플렉스 문화가 그들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선행국가의 예를 좀 보자. 독과점방지법으로 인해 한 가지 산업의 모든 분야를 일제히 선점할 수 없는 그들의 경우, 국내처럼 스크린 독과점으로 인한 부작용이 잦지는 않다. 물론 존재는 한다. 한국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슈렉>의 경우 1만 7천여 개에 달하는 북미 지역 스크린 중 4천여 개가 넘는 숫자를 확보한 채 개봉한 전례가 있다. 지난 달 모 토론프로그램에서 강모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제도적으로 독과점을 막고 있고,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의 차이이며, 현재의 심각해 보이는 상황은 바로 그 제도적 부재에서 기인됐다는 점이다.
한때 ‘재벌 해체론’이 대단한 사회적 화두가 될 만큼 재벌기업, 대기업의 산업독점 문제가 큰 이슈로 부각되었던 한국사회의 전력을 생각해 볼 때, 최근 <괴물>을 통해 제대로 불거져 나온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전혀 새롭지 않다.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 “<쥬라기 공원> 한 편이 자동차 몇 만 대 수출만큼의 이익을 가져 온다”는 신화적 문장에 매달려 ‘산업적 파이 키우기’에만 골몰했던 근시안적 행정과 해당 업계 종사자들의 방심이 낳은 총체적 난국이라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두고, “김기덕이 나쁘네”, “<괴물>이 죄인이네” 해봐야, 그건 달을 보라며 굽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고민에도 일관성은 필요하다제도의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는 법이다. 적당한 보상이 없는 이상,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눈앞의 이익을 포기할 기업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업인 동시에 자본의 총아이고, 대중문화의 원류이기도 한 영화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독과점은 궁극적으로 자본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폐단이며, 그러한 부작용을 최소화해내는 것이 문화로서의 영화의 다양성을 지켜내는 길이기도 하다. 올해 초부터 여름까지 내내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왔고, 지금도 그런 상태에 놓여)온 스크린쿼터 문제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더 거대한 규모의 할리우드 자본의 국내시장 독과점 문제인가, 국내 대기업의 한국영화시장 독과점 문제인가 정도일 뿐이다. 명백히,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는 독과점규제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할리우드 자본에게나 국내자본에게나 공히 적용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널뛰는 언론과 그에 휩쓸린 여론은 일관성을 잃은 지 오래다. 저예산 예술영화 감독 김기덕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 상업영화 <괴물>의 필요성을 단호히 거부하거나, 국내 대기업 독과점의 폐해는 인정하면서 반 토막 난 스크린쿼터로 인해 장차 예상되는 할리우드 대자본의 독과점 문제로 생겨날 폐해에 대해서는 과감히 눈을 감고 있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스크린 독과점을 막는 장치 중 하나였던 ‘프린트 벌수 제한’이 할리우드 제작배급사들의 주장에 의해 폐지된 제도라는 사실, 그리고 ‘FTA 대세론’ 속에 스크린쿼터마저 반 토막 나 버린 뒤, 그렇게 옹호하고 싶어 하는 저예산 예술·상업영화들의 개봉활로는 더욱 좁아졌다는 사실을.
모처럼 끌어낸 이슈들을 폭넓게 고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고민에도 일관성은 필요하다. <한반도>와 <태풍>의 스크린 독과점은 눈감고, <괴물>만 ‘씹어’대는 것이나, 한국영화의 스크린 독과점은 심각해하면서도 당장 ‘스크린쿼터 축소’문제는 외면한다면, 해결책은 계속 답보(踏步)할 것이다. 제대로 달을 가리키고 싶다면 당장 굽은 손가락부터 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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