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프로듀서의 영화제작비 횡령의혹으로 충무로가 싱숭생숭하다. 개인의 비리인가? 암암리에 자행된 제작사들의 관행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음해인가? 진실규명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지난 20일 충무로 영화제작사들과 투자배급사들, 그리고 언론사에 '영화 제작비가 부풀려지고 빼돌려지는 명확한 증빙자료‘라는 서류가 배달됐다. 제보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채 발송된 이 서류에는 정말 '영화 제작비가 부풀려지고 빼돌려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자료가 들어 있었다. 자료가 말하고 있는 내용인즉슨 이렇다.
다수의 흥행작들을 만들어낸 굴지의 영화제작사인 T사 소속 김00 프로듀서가 영화감독과 촬영감독, 제작부 스탭, 무술감독, 카메라 대여업체, 믹싱 및 후반작업업체와 보조출연업체 대표 등 각종 관련자들의 개런티를 부풀린 뒤 이중 일부를 돌려받는 수법, 친인척들에게 자금을 세탁하는 수법 등을 사용해 1억여 원의 제작비를 횡령했다는 것. 익명의 제보자는 영화제작비 상습 횡령의혹의 증거자료로 김 PD 명의의 통장 사본을 첨부했다. 충무로 전반에 삽시간에 퍼진 이 서류는 각종 설과 진위공방을 낳았다.
일단 첨부된 김 PD의 통장 사본에는 세세한 입출금 내역이 적혀 있다. 적게는 20만 원부터 많게는 1,000만 원의 돈이 입금된 내역이 빼곡하고 입금한 사람의 신원은 물론 어머니와 형 등 가족 계좌로 이체된 돈들의 내역이 명시돼 있다. 자료에 따르면, 두 가지 의혹을 품을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이 적혀 있는 개인 통장은 정말 개인 통장인가? 개인 통장이라면 왜 감독, 스탭, 업체들이 PD의 개인 통장에 목돈을 입금하는가? 게다가 김 PD 명의의 통장 사본 지출내역엔 영업비용과 개인비용 지출내역이 뒤섞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보 자료에서 김PD가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리베이트란 이런 식이다. 프로듀서가 3,000만 원에 스탭과 임금 개별 계약을 했다고 치자. 계약을 하면서 프로듀서는 계약서에 4,000만 원으로 명시한 후 해당 스탭으로부터 차액의 일부를 받는다. 제보자에 따르면 김 PD의 통장에 입금된 돈의 내역이 그런 리베이트에 해당된다는 얘기다.
횡령의혹을 받고 있는 김 PD는 FILM 2.0과의 전화통화에서 ”해당 통장은 내 개인 통장이다. 영화제목이 적혀 있는 건 제작진행비 통장으로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끝난 후 T사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고 월급 통장 겸 개인 통장으로 계속 사용해왔다"고 주장했다. 1,000만 원가량이 수차례 입금된 것에 대해서는 "작품을 할 때마다 프로듀서 개런티를 받은 것"이라고, 30여 차례 감독이나 스탭들, 업체들의 돈이 입금된 내역에 관해선 "12년간 영화 하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영화인들에게 돈을 빌린 것이다. 그저 개인적인 거래들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가족 계좌로 자금을 세탁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집안의 막내라 프로듀서 개런티를 받고 나면 어머니와 형님에게 목돈을 보내 관리를 부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영화사들과 언론에 돌려진 사본에는 내가 받은 내역만 있지 내가 되갚은 내역은 철저하게 지워져 있다. 원래 내역 그대로를 제작사 감사팀과 경찰에 제출했다. 나 역시 더욱 철저한 수사를 바란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보 자료의 사실 유무에 관해 T사는 "김씨에게 앙심을 품은 전 직원이 음해를 한 것“이라며 "리베이트와는 거리가 멀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장 사본에 입금자로 명시된 관련자들은 대부분 리베이트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1,000만원의 리베이트 금액을 입금한 것으로 명시된 모 촬영감독은 "내가 컴맹이라 후배 스탭들에게 가끔 대신 인터넷 뱅킹을 해달라고 했던 것 같다. 그게 김 PD의 통장인지 아닌지 정확히 모르겠고, 돈을 빌려준 것일 수도 있는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굳이 돈을 줘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김 PD와 작품을 함께한 제작실장 역시 "전혀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고, 믿기지 않는다. 너무 충격적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일개 프로듀서가 1억여 원에 달하는 제작비를 착복한 것이 사실이라면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이것이 정말 개인을 향한 지독한 음해라면 이런 불신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도 짚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작사 자체 조사나 검찰 수사가 이뤄지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테지만 소문으로만 떠돌던 영화계의 고질적 관행이 수면으로 부상했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료가 사실이라면 최근 몇 년간 치솟았던 제작비 상승에 대한 의혹이 근거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영화계의 시각도 분분하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 차승재 회장은 "현재 제협 소속사인 해당 제작사에 사실 확인 공문을 보낸 상태다. 확인 여부에 따라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제협 오기민 정책위원장은 "문제의 증빙 자료에 리베이트를 한 것으로 거론된 관련 업체들을 불러 확인할 예정이다. 사실로 밝혀진다면 향후 업체와의 계약 때 장비 단가에서 리베이트 가격을 깎고 시작하는 게 기준점이 될 것이다. 한쪽에선 임금협상을 하고 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영화계 스스로 자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제협 측은 해당 제작사의 확실한 입장 표명이 없을 경우엔 자체 조사위원회를 꾸린다는 계획이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하 ‘영화노조’) 최진욱 위원장은 "현재 증빙 자료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단체행동 할 생각이다. 영화계 전체의 문제이며 스탭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영화노조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검찰 고발 조치를 고려중이다. T사와 김 PD가 작업한 영화의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지금으로선 개인적인 비리의혹이 제기된 상태 아닌가. 법적으로 확실히 비리인지 아닌지 어떤 결론이 나기 전엔 해당 작품의 투자배급사라 하더라도 입장을 제기할 상황이 아니다. 법적 결과나 나오면 그때 행동해야 할 듯하다"라며 사건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자료를 본 한 영화인의 주장은 특히 강경했다. "통장 사본 내용만 봐선 해당 제작사의 제작관리에 엄청난 누수가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문제는 크다. 그리고 이건 일개 프로듀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감독 및 여러 스탭들의 돈이 입금됐다는 건 제작자의 용인이나 지시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로 추측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영화계 인사는 "깨끗한 제작사도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이건 그간 충무로 여러 제작사들이 지녀온 공공연한 비밀이자 관행이었다. 터질 게 터진 것이며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제보가 있던 다음날인 지난 21일 T사 측은 김 PD와 통장 사본에 명시된 관련자들을 일일이 소환해 내부 감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PD는 “제보자가 치밀하게 준비해 자신을 음해한 것 같다”며 "제작사 내부 감사실에서 충분히 감사받았고, 이미 강남 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했다. 미개봉 우편물의 지문 감식을 국과수에 의뢰할 예정이며 우편물 직인이 찍힌 서울광진우체국의 CCTV 동영상을 확보했다. 반드시 음해를 한 제보자를 잡아서 결백을 증명하겠다"라며 억울함을 주장했다. T사는 조만간 자체 감사결과와 이번 사건에 대한 공식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좋은 영화 만들기에 매진해야 할 프로듀서가 제작비를 횡령했다는 신빙성 있는 의혹, 진실은 곧 밝혀질 테고 그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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