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한국 영화 딱 두 종류잖아요. 100억원짜리 아니면 20억원짜리요."(A 영화사 대표)
"미디엄(M) 사이즈가 사라졌어요. 엑스라지(XL) 아니면 스몰(S)이에요."(B 프로듀서)
요즘 영화인 세 명만 모이면 어디서나 '100분 토론' 분위기가 된다. 토론 주제는 '한국 영화 이대로 좋은가?' 또는 '막다른 골목, 정녕 탈출구는 없나?' 정도가 될 것 같다. 언론도 한국 영화가 조금만 흥행이 안 되면 금세 붕괴할 것처럼 비관적인 기사 일색이다. '아이언맨' 같은 흥행작에는 할리우드 공습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대체 왜? 한국 영화의 진짜 딜레마는 뭘까.
▶심각해지는 '돈맥경화'요즘 영화 제작사들이 한결같이 제기하는 한국 영화 위기는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1~2년 공들여 시나리오를 완성했는데 "재미없다" "승산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번번이 투자가 거절된다는 항변이다.
얼마나 돈이 돌지 않는 걸까. 이정재·정려원 주연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송해성 감독이 연출하는 새 영화의 크랭크 인이 미뤄지는 이유도 실은 투자금이 다 모이지 않아서라는 괴담이 있을 정도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 정도 스펙이었다면 CJ나 쇼박스, 롯데가 서로 콘텐트 확보를 위해 경쟁했을 텐데, 어느 한 회사가 투자를 보류하자 서로 눈치만 살피며 뒷짐을 쥐고 있다. "30%만 투자해줄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돈을 모아오라"는 게 요즘 달라진 대기업의 투자 패턴이라고 한다.
쇼박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오리온이 영화사업에서 철수한다는 얘기도 끊임없이 나돈다. 최근 자체 제작사 모션101을 폐업하자 이런 소문이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추격자'로 숨통이 트인 벤티지홀딩스 역시 구심점이었던 김우중 전 회장의 아들 선용씨가 영화 사업에서 손을 뗀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세상이 불안하면 유언비어가 그럴 듯하게 유포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돈맥경화' 현상이 심각해지면 고사하는 영화사가 속출한다. 실제로 올 들어 임대료와 인건비 부담 때문에 개점 휴업중이거나 자진 폐업하는 영화사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 보증금이 바닥 나 강남에서 서울 외곽으로 이전하는 영화사도 있고, 중소 규모 영화사들이 합종연횡하는 양상도 보인다.
'두사부일체' 시리즈로 큰 수익을 낸 시네마제니스는 지난 달 두 개 층을 쓰던 서울 청담동 오피스텔에서 강남역 근처로 이전했다. 비싼 임대료 때문이었다.
'성난 펭귄'의 공동제작사 노비스와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을 제작하는 팝콘필름은 아예 투자사 아이엠픽처스와 합병을 선언했다. '강철중' 때문에 담보대출까지 한 강우석 감독도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놈이 강한 놈"이라고 말할 정도다.
▶엄격해진 선택과 집중그럼 투자사는 얼마나 투자에 인색해진 걸까. 확인 결과 그렇지 않았다. 빙하기로 비유되는 요즘에도 투자 시계는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선택과 집중'의 투자 원칙이 전보다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을 뿐이었다.
김강우·박시연 주연 '마린보이'와 임창정·김민희 주연 '몽당연필', 엄태웅 주연 '차우' 등이 최근 대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고 시동을 걸었다.
SK텔레콤도 강제규 감독의 새 영화에 5억원을 투자했고, 김대우 감독이 연출하는 차승원 주연작 '방자전'에도 돈을 댔다.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의 두사부필름도 최근 CJ로부터 '해운대' '7광구' '세이빙 마이 와이프' 등 세 편의 투자배급 계약을 맺었다. 나비픽처스의 야심작 '각시탈'도 순조롭게 진행중이다.
쇼박스도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에 이어 유하 감독의 '쌍화점'과 조승우 주연 '고고70' 등에 투자하며 하반기를 노리고 있다. 눈에 띄는 공통점은 신인 감독과 조연 배우 출신의 주연작이 대거 사라졌다는 점. 검증된 감독과 배우, 시나리오에만 돈이 몰리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새롭게 선보일 한국영화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흥행이 안 될 경우 투자 환경이 더 열악해질 것이라는 걱정의 목소리다.
올 7월 개봉하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총제작비는 대략 200억원. 역대 최고 제작비가 쓰인 '디워'(300억원)에 이어 두 번째 고액이다. '님은 먼곳에'도 태국에서 진행된 전쟁 장면 때문에 70억원이 소요됐다.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도 100억원의 제작비가 책정된 해양 블록버스터다. 한쪽에선 이런 대작이 진행되는 반면 또다른 쪽에선 20억원 안팍의 작은 영화에만 투자가 이뤄진다는 볼멘 소리가 나온다.
제작비 21억원이 소요될 '몽당연필' 정성일 프로듀서는 "크랭크 인을 앞두고 축하를 받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힘들었다"면서 "리스크를 낮추려는 투자사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점점 영화 만들기가 척박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걸스카우트'의 제작자 심보경 대표도 "투자 환경이 열악해져 배우들과 술 한잔 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요즘 영화인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누구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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