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월드컴. 새로운 축제를 맞을 생각에 서서히 마음이 설레기 시작하는 지금, 2002년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영화계는 월드컵을 피하거나 아니면 맞닥뜨리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전 국민이 축구에 열광했던 2002년 여름. 영화계만큼은 축제와 거리가 멀었다. 통상적으로 영화의 가장 큰 성수기 중 하나인 여름 시즌으로 접어드는 6월. 하지만 그해 대중들의 눈과 귀는 온통 그라운드의 선수들에게 쏠렸다. 자연스럽게 영화는 대중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자료만 봐도 2002년 월드컵은 영화 관객의 수를 일시적이긴 하지만 큰 폭으로 하락시켰다.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6월 관객수는 384만 7957명으로 5월의 560만 324명보다 크게 감소했다.
무려 40%에 가까운 관객 감소다. 다른 해 관객수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증가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체감 관객감소 비율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물론 그해 하반기 한국영화들이 약진하면서 전반적인 영화산업 침체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2006년 월드컵이 영화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의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준결승전이 열렸던 지난 3월 12일 일요일 한산했던 극장가는 이미 영화인들에게 지난 2002년의 기억을 돌이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지금 영화계는 월드컵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대다수의 영화인들은 국내가 아닌 독일에서 열리는 데다, 한국팀의 경기 시간이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잡혀 있어 2002년만큼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피해보고 싶다는 것이 영화계 전반의 솔직한 얘기다.
피해가거나 
이 같은 영화인들의 생각은 이미 3월 말부터 5월까지 진행되는 한국영화 개봉 스케줄에 반영돼 있다. 영화의 주 관객 층인 학생들이 개학을 하고, 중간고사 등을 치르는 3,4월은 통상적으로 극장가 비수기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지금까지 3월 말 혹은 4월 개봉이 예정된 한국영화의 면면이 만만찮다. <달콤, 살벌한 연인>을 비롯, 정재영과 장서희가 만난 송창수 감독의 <마이캡틴, 김대출>, 조승우, 강혜정이 커플 연기를 펼쳐 화제가 되고 있는 강지은 감독의 <도마뱀>, 황정민, 류승범과 최호 감독이 만난 <사생결단>, 김성중 감독의 <연리지>등이 4월에 관객들을 만난다.
지난해 4월 서울지역 관객수가 244만 6540명으로 1년 중 대목인 8월의 518만 4400명, 12월 548만 3840명에 비해 절반밖에 안됐던 것을 상기한다면, 올해 4월의 개봉 경쟁은 월드컵이 아니라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다. 4월 개봉이 벅찬 영화들은 늦어도 월드컵 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5월 초중반까지는 극장에 걸어야 한다는 전략이다. 엄정화 주연의 <호로비츠를 위하여>, 차승원이 주연한 안판석 감독의 <국경의 남쪽>,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 등이 5월 중순 이전에 개봉을 노리고 있다. “일단 피해가는 게 안전하지 않겠나.
월드컵이 영화 흥행에 2002년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월드컵으로 몰려 있는 시기에 개봉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다. 영화들이 몰려 서로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전한 방법은 월드컵을 피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이 시기 개봉을 노리고 있는 영화 마케터들의 한결 같은 생각이다.
관련해, 6월에 개봉하는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편이다. 예컨대 CJ엔터테인먼트의 배급 라인업엔 드림웍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해지>(6월 2일)와 일본과 공동 제작한 공포영화 <착신아리 2>(6월 24일)를 빼고는 아직까지 월드컵 기간 중 개봉 일정이 잡힌 영화가 없다. CJ엔터테인먼트 황기섭 대리는 “<해지>의 경우 미국에서 개봉하는 시점이 5월 말에서 6월 초인데 더 앞당겨 개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월드컵 이후인 7월에 개봉한다면 불법동영상 때문에 관객을 많이 잃을 것으로 판단했다.
가급적 피해갔으면 하는 게 월드컵이지만, 아예 영화 배급을 안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월드컵으로 관객을 조금 잃더라도 미국과의 동시개봉 시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착신아리 2>의 경우 6월 말께여서 한국팀의 경기와는 크게 관계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당초 6월 개봉으로 알려졌던 강우석 감독의 대작 <한반도>도 7월로 개봉을 늦췄다. 시네마서비스, 쇼박스, 롯데시네마 등 다른 메이저 배급사들 역시 6월을 꺼리기는 마찬가지다. 이들 3개 배급사들은 6월에 배급이 확정된 작품이 아직 없다.
이용하거나 이런 가운데 <강적>은 월드컵을 적극 이용하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강적>은 누명을 쓰고 투옥됐다 탈옥한 조폭 출신 수현(천정명)과 아들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한 경찰 성우(박중훈)의 대결을 그린 영화. <강적>은 아직 날짜는 정확히 못박지 않았지만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월드컵이 국민적인 관심을 끄는 시기에 개봉을 한다. <강적> 배급을 맡은 쇼이스트의 염현정 과장은 “<강적>의 경우 두 남자의 이야기인 데다 제목 ‘강적’이 월드컵 분위기와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개봉을 당기거나 미뤄서 월드컵과 부딪히지 않으려 하는데, 오히려 개봉 영화가 적은 6월이 틈새 시장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부에선 아예 토고전에 맞춰 개봉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말한다. 지난 2002년 <챔피언>의 배급을 경험했던 쇼이스트는 영화가 잘되고 못되고는 월드컵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당시 기대에 못 미치는 평가를 받고 개봉했던 <챔피언>은 월드컵 열기가 무르익었던 6월 중순 개봉을 해 흥행에서 참패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월드컵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것. 즉 월드컵 때 안된 영화는 어차피 7월이나 8월에 개봉해도 안 될 것이라는 얘기다.
<강적>은 월드컵을 정면 돌파하는 것뿐 아니라 오히려 월드컵을 호재로 받아들이고 이를 이용한 여러 가지 홍보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 5월 말 열릴 국가대표팀 평가전 때 모인 관객들을 대상으로 <강적> 시사회를 열고, 월드컵 공식 후원사와 협력해 포스터 등에 공식협력업체 로고를 노출시키는 등 월드컵을 홍보에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두 주연배우인 박중훈, 천정명을 독일에 보내 한국 선수단을 응원하면서 언론 매체에 노출한다는 전략도 세워두고 있다.
두 배우들이 한국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응원전을 펼치는 내용의 광고도 이미 제작해놓은 상태다. <강적>의 제작사 미로비전 측은 “물론 피해가는 게 안전하긴 하겠지만, 이를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영화들이 개봉하지 않아 관객들의 선택을 받기 쉽기도 하고, 월드컵을 홍보에 활용할 경우 매체 노출 등 홍보 면에서도 유리하다. 또, 우연이긴 하지만 제목이 '강적'이라 제목도 홍보에 활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영화 자체가 월드컵을 활용하는 경우는 <강적>이 거의 유일하지만, 극장 입장에선 월드컵이 극장을 알릴 절호의 홍보 기회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방법은 월드컵과 관련된 이벤트를 극장에서 열거나 응원전을 펼치는 것. CJ CGV는 이미 독일 월드컵의 한국전 전 경기를 전국 265개 스크린에서 생중계하기로 결정했다. 6월 13일과 19일, 24일 세 게임 모두를 대형 디지털 프로젝터를 활용해 생중계하며, 한국팀이 토너먼트에 오를 경우 이 역시 생중계를 통해 극장에서 응원하는 문화를 이끌 예정이다.
CGV 홍보팀 김민지 씨는 “영화 상영에는 별로 지장이 없는 시간대에 게임이 진행되기 때문에 영화 상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밤에 하는 게임인 경우는 심야영화와 연동해 응원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 중이다”라고 말한다. 메가박스 역시 극장 체인을 통해 생중계하는 것을 비롯한, 월드컵 특수를 노린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롯데시네마도 월드컵과 관련된 행사들을 기획 중에 있다.
방관하거나 
한편 몇몇 영화들은 월드컵을 피해가지도, 이용하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월드컵을 지켜만 보면서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하자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5월 마지막 주 개봉이 예정된 <가족의 탄생>과 <짝패> <다세포소녀>가 그 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각광받았던 김태용 감독이 6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 <가족의 탄생>은 ‘가족’ 컨셉에 맞는 '가정의 달' 5월 개봉을 고수한다는 방침이다.
<가족의 탄생> 제작사인 블루스톰의 남영미 실장은 “후반작업이 빨리 끝난다면 5월 초쯤에 개봉하려 했다. 하지만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려 5월 27일께나 개봉할 수 있을 것 같다. 월드컵과 맞물리지 않는 게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리해서 앞당겨 개봉할 수도, 가족과 봄에 어울리는 영화를 월드컵 이후인 7~8월에 개봉할 수도 없지 않나”라며 월드컵과 맞물리는 5월 말 개봉 방침을 굳혔다고 말한다.
<짝패> 역시 후반작업이 끝나는 대로 5월 말이나 6월 초께 개봉한다는 입장. <짝패>의 홍보를 맡고 있는 외유내강 기획실 조영지 실장은 “월드컵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경기가 열린 데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던 2002년만큼 타격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또, 대부분 게임이 밤에 열려 영화 상영에 지장을 줄 것 같지는 않다”며 “후반작업이 끝나는 대로 월드컵과 크게 상관없이 개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세포소녀> 역시 월드컵 때문에 영화 개봉 시점을 조절하거나 마케팅에 변화를 주지 않고 그대로 5월 말에서 7월 사이에 영화가 완성되는 대로 개봉할 예정이다.
<다세포소녀>의 제작사인 영화세상 조석영 대리는 “월드컵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월드컵 때문에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고 있다. 영화 개봉 시점이나 배급에는 월드컵을 제외하고도 고려해야 할 많은 전략적인 면들이 존재한다. 그런 것들을 고려해 빠르면 5월 말에서 늦으면 7월 이후까지 가장 적절한 시점에 개봉하게 될 것 같다”고 밝혔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시티 오브 조이>에는 "인생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도망치거나, 방관하거나, 부딪히거나"라는 대사가 나온다. 지금 한국영화가 월드컵을 맞아 짜내고 있는 전략들은 이 대사를 절로 떠오르게 한다. 과연 이 중 어느 길이 성공을 거두게 될까. 분명한 건 영화적인 완성도와 한국 대표팀의 성적이 서로 상호 작용해 해당 시기 영화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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