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총칼 피하려 여자아이 행세 ‘오키나와 소녀’의 마지막 반전 강연

기사입력 2008-06-26 01:21 |최종수정2008-06-26 02:26
[중앙일보 김동호]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오키나와에서 일본인들에게 범한 만행을 일본인들에게 알리는 데 몸 바쳐온 오시로 모리토시(大城盛俊·75)가 21일 오키나와현 이시가키(石垣)섬에서 마지막 강연을 했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전했다. 63돌을 맞은 오키나와 피해자 '위령의 날' 이틀 전이었다. 그가 25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면서 한 강연은 1230여 차례. 매주 한 번꼴이었다. 그러나 부인 병간호를 하고 있는 데다 자신의 발목 관절도 약해져 공식 강연은 이번으로 끝내기로 했다. 그는 이날 “처음 강연할 때는 '오키나와가 미국에 있나요'라고 질문하는 어린이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과거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를 모르는 일본인이 많았다는 뜻이었다.

그가 오키나와 전쟁 증언에 앞장서게 된 계기는 1984년에 나타난 한 장의 사진이었다. 오키나와 류큐(琉球)대 교수였던 오타 마사히데(大田昌秀) 전 오키나와 지사가 오키나와의 비극을 고발하는 책을 내면서 '넋을 잃은 눈동자의 소녀'라는 제목으로 책 표지에 게재한 오시로의 어린 시절 사진이었다. 이 책이 나오자 오시로는 “사진 속 인물은 나 자신”이라고 밝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증언 인생은 소년이 소녀로 둔갑한 사연에서 시작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5월. 오시로는 12살 소년이었다. 일본군이 남자 아이들을 보이는 대로 데려다 일을 시키고 방해가 되면 서슴없이 살해하자 그의 아버지는 오시로를 여자 아이로 변장시켰다. 그의 머리를 단발머리로 자르고 여자 아이의 옷을 입혔다. 그런 뒤 동굴에 숨어 지내던 중 일본군이 찾아왔다. 일본군은 오시로가 흑사탕을 넣어둔 손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묻다가 “어린것이 말을 안 듣는다”면서 오시로의 얼굴을 군홧발로 찼다. 다음 날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오시로를 치료했고, 이때 찍힌 사진이 '넋을 잃은 눈동자의 소녀'(사진)라는 이름으로 책 표지에 쓰인 것이다.

이 책이 발간된 후 오시로가 전국을 돌면서 한 강연의 핵심은 '반전(反戰)'이다. 그는 “내가 정말 호소하고 싶은 것은 일본군의 잔혹함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내몰았던 전쟁의 광기”라며 “베트남 전쟁도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도 처음에는 오키나와 주민에게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순순히 일본군에게 거처와 식량을 제공하며 협력했다. 하지만 미군 상륙이 임박하자 일본군은 공포에 떨며 광기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도로와 진지 구축에 주민을 동원하더니 참호에 억류했다. 그 바람에 미군의 포탄이 떨어져도 민간인은 도망가지 못했고, 일본군이 참호 밖으로 나갈 때면 주민을 앞에 내세워 인간 방패막이로 삼았다는 게 오시로의 증언이다.

일본군에게 폭행당해 실명한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경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다른 동굴에서 내(오시로)가 있던 동굴로 돌아오던 중 일본군에 붙잡혀 미군 스파이로 의심받았다. 일본군은 어머니를 동굴에 가두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는 후두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인공발성기를 사용해 강연을 해왔다. 전기 장치로 목소리를 전달하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지만, 그의 강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넘쳤다. 그는 “오키나와의 하늘은 푸르지만 아픈 과거가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 달라”면서 고별 강연을 끝냈다.
by 100명 2008. 6. 26. 08:49

청동기시대 절굿공이 또 출토

기사입력 2008-06-23 15:21


(서울=연합뉴스) 안동 저전리 유적에 이어 두 번째로 청동기시대 목제 절굿공이를 출토한 대구 북구 매천동 유적. 물길 유적을 발굴한 결과 각종 가공한 목재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절굿공이를 포함해 도끼자루 6점, 고무래 등의 목제 유물이 포함됐다. << 문화부 기사참조, 영남문화재연구원 제공 >>
by 100명 2008. 6. 23. 17:12

"파리에 한국독립운동 자료, 상자 2000개 분량 있어요"

기사입력 2008-06-20 04:09 |최종수정2008-06-20 10:53
'외규장각 도서' 세상에 알린 在佛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

파리에 왔던 김규식 박사 자취

佛당국에 50년간 졸라 현판 걸어


그가 혼자서 프랑스 유학을 떠났던 것은 1955년의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파리에서 혼자 산다. 그 53년 동안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朴炳善·80·사진) 박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두 가지 귀중한 유물을 찾아내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1377년 인쇄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심경)'과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당했던 외규장각 의궤(儀軌) 도서 191종 297권이었다.

박 박사는 지금 경기도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 숙소에 머물고 있다. 1985년 국내에서 발간했던 '조선조(朝鮮朝)의 의궤' 개정판을 내기 위해서다. "작년에 의궤 반환문제로 프랑스 국영 3TV와 인터뷰를 했어요. 그런데 저를 취재했던 방송사 간부가 '프랑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어찌 보면 그들이 병인양요가 뭔지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개정판에는 300쪽 중 100쪽 정도의 분량을 프랑스어로 썼다. 의궤의 내용과 그것이 프랑스로 가게 된 사연,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의 일기와 공문, 한국이 도서 반환을 요구하는 이유 등을 자세히 적었다. 프랑스에서 출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그걸 왜 반환해야 하느냐고 묻는 프랑스인도 있었다. 그럼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만약 프랑스 루이 14세의 왕실 행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당시의 사회·경제·문화를 통찰할 수 있는 자료가 고스란히 담긴 문서의 유일본이 다른 나라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모든 사람이 "아, 당연히 찾아와야죠!"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박 박사는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 등에서 재불 독립운동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일에도 힘을 쓰고 있다. "파리에 무슨 한국 독립운동 자료가 있겠느냐고 생각하시죠? 상자 2000개가 넘는 분량이에요." 1919년 파리 강화회의 당시 독립을 호소했던 김규식 박사의 자취도 추적했다. 파리 시내 서쪽 샤토덩(Chauteaudun) 거리에 이들 일행이 머물던 곳이 있는데, 지난해 겨우 그 내용이 적힌 현판을 건물에 걸 수 있었다. "50년 동안 부탁하고 또 부탁해서 겨우 걸었어요. 이곳에 기념관을 만들려고 하는데 지원을 받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직지심경의 대모(代母)'라 불리는 박 박사이지만 지난 53년은 너무나 길고 곤고한 세월이었다. 1979년 의궤를 찾아낸 뒤에는 '비밀을 누설했다'는 질책 때문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그만둬야 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고문서와 옛 자료들 속에 파묻혀 살아 온 일생에 후회는 없을까? "천만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순간적인 기쁨일 뿐이에요. 자료를 찾으려고 몇 년을 두고 뒤지다가 마침내 찾아내는 기쁨이 어떤 건지 아세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 가는 기쁨이에요. 길거리를 가다가도 그걸 생각하면 벙글벙글 웃음이 나옵니다. 저는 아주 잘 걸어왔어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경'과 외규장각 의궤 도서 297권을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내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던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 2008년 6월 19일 경기도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의궤를 반환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by 100명 2008. 6. 20. 11:41

경매까지 나왔는데…'안중근 최후 친필' 가짜?

기사입력 2008-06-1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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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뉴스>

<앵커>

안중근 의사의 최후 친필이라는 작품이 베이징 경매시장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문화재 평가위원은 가짜라고 평가했습니다.

베이징에서 표언구 특파원입니다.

<기자>

안중근 의사가 사형직전 옥중에서 남긴 친필이라며 베이징 경매시장에 나온 작품입니다.

"적을 맞아 앞서 나가는 것이 의무다"라며 장수의 자세를 가르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노즈량/소장자 친구 : 진품의 근거는 먼저 글씨체입니다. 또 종이가 오래돼 자연적으로 낡았습니다.]

경매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 인터넷 사이트에는 이 작품을 찾아오자는 서명운동까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분석한 중국 정부 관리는 가짜라고 평가했습니다.

손도장에 보여야 할 손금이 없고, 종이는 오래됐지만 글씨를 쓴 먹은 최근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이영인/중국 문화부 문화재평가위원 : 한국에 소장하고 있는 먹으로 찍은 도장과 봐서 일치할 때는 꼭 컴퓨터로 인조해서 찍을 수 있습니다.]

국내에 있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 측은 문제의 작품이 이미 해군이 소장한 안 의사의 유묵과 내용이 같고, 글씨체도 비슷하다며 대부분의 위작들처럼 정교하게 흉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습니다.

[김호일/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 주인, 소위 말해서 인주를 발라서 낙관 대신 찍었다고 하는 것은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숭모회 측은 또 지난 5월 가짜로 밝혀진 안 의사의 벼루처럼 안 의사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가짜 유품이 잇따르고 있다며 미술품 애호가들의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by 100명 2008. 6. 20. 07:56

옛일본군, 종군위안부 개입 확인 문서 발견

서울=뉴시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 직후 옛해군이 일본인 위안부를 군병원의 보조 간호부로 고용하도록 명령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교도 통신이 19일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연합국 측이 암호 해독해 작성한 영문 공문서에 의해 이 같은 사실이 판명됐다.

연구자들은 위안부가 간호부로 고용될 때 신분이 군속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패전 당시 군무원으로 채용하는 배려를 했다는 점에서 옛일본군이 2차대전 동안 위안부 관리에 사실상 깊숙히 관여했다는 주장을 확인해 주는 귀중한 사료라고 통신은 지적했다.

종군위안부 문제에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 근거로 되고 있는 당국의 관여 정도가 초점이어서 앞으로 논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또한 옛일본군이 위안부를 간호부로 고용함으로써 위안부의 존재를 연합국에 은폐하려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위안부를 간호부로 활용한 것은 옛일본군 병사의 증언과 호주인 언론인의 저서 중에 출전 불명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그런데 관련 명령이 원문에 가까운 형태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야시 히로후미(林博史 현대사) 간토학원대의 교수가 영국 국립공문서관에서 문서를 발견했다.

by 100명 2008. 6. 20. 07:51

5500년전 ‘중국 여신’ 얼굴 복원

기사입력 2008-06-19 23:07


[한겨레] 랴오닝성서 발견 ‘중화모조’

훙산문화-한반도 연관 주목


5500년 전 여신의 얼굴이 복원됐다.

자오청원 중국형사경찰학원 수석교수는 최근 훙산문화(紅山文化)의 대표적 유적지인 뉴허량(牛河梁)에서 발견된 기원전 3500년의 여신 두상을 사람의 얼굴로 복원해 공개했다.

복원된 여신의 얼굴은 현대 여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오 교수는 “여신은 둥근 방패형 얼굴, 살구씨 모양의 눈, 위로 올라간 눈꼬리 등 기본적으로 현대 여성의 오관(五官) 비례와 부합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며 “이를 근거로 진흙으로 여신상을 빚을 때 변형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복원된 여신 두상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랴오닝성 뉴허량에서 발견된 여신전 유적지에서 파편 상태로 발견된 여신상의 일부다. 중국에선 ‘중화모조’(中華母祖)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곳에선 대형 제단과 적석총군도 함께 발견돼 이 지역이 이미 초기국가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훙산문화와 한반도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뉴허량 유적지가 과거 고조선의 영역과 겹치는데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적석총이 한반도에서도 발견됐기 때문이다. 중국의 중원문화와는 별도로 탄생해 한반도를 통해 일본까지 전파된 독자적인 문명의 시원지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by 100명 2008. 6. 20. 07:51

<탄생 100주년으로 돌아본 우리역사>

기사입력 2008-06-19 11:25 |최종수정2008-06-19 11:46

신채호 선생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본사자료 //(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讀史新論ㆍ한글학회ㆍ윤봉길 등 탄생 100주년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한국 근대사에 방점을 찍은 인물이나 단체 등을 기념하기 위한 100주년 기념행사가 올 하반기 풍성하게 열린다.

한국사 연구의 일대 획을 그은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역작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비롯해 일제 36년간 꿋꿋이 '한글지킴이' 역할을 한 한글학회, 중국 상하이 한 복판에서 폭탄을 투척해 일제 장성을 숨지게 한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도 탄생 100돌을 맞는다.

이에 따라 독립기념관, 한글학회 등 관계 기관은 이들의 탄생과 한국 근대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독사신론 = 단재가 1908년 8월 27일부터 그해 12월13일까지 자신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국한문체 논설이다.

단재는 이 논설에서 기자(箕子), 위만(衛滿)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역사 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단군에서 부여, 고구려로 계승되는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제시했다.

특히 지배층 중심의 사관에서 탈피, 민중의 생활상을 들여다 보고 '낭가사상'과 같은 고유한 우리 것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독사신론은 최초의 근대역사물로 간주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김형목 연구원은 "기존의 역사연구가 관념적인 부분에 치중했던 것에 비해 독사신론은 철저한 문헌고증을 통해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 역사를 귀납적으로 도출했다는 점에서 근대 역사의 장을 연 글"이라고 설명했다.

독립기념관은 독사신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월1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 근대 역사학 100년의 성찰과 과제'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연다. 이에 앞서 지난 4월에는 총 9권으로 된 '단재신채호전집'을 완간, 출판기념회를 열기도 했다.

◇한글학회 = '한글지킴이' 한글학회도 8월31일 창립 100돌을 맞는다. 1908년 8월31일 주시경 선생 등이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해 창설한 국어연구학회가 그 모태다.

국어연구학회는 조선어연구회(1921년), 조선어학회(1931년)를 거쳐 1949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서울=연합뉴스)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는 독립운동가 윤봉길의사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윤봉길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우표 1종(135만 장)을 오는 20일부터 전국 우체국에서 판매한다고 19일 밝혔다. 우표는 윤봉길의사의 초상과 한인애국단 앞으로 보낸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겠다'는 자필 선서문을 함께 디자인했다.

학회 회원들은 1942년부터 광복 때까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 옥고를 치르며 우리말 지키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같은 의미있는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한글학회는 8월15일-10월15일 서울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 전시실에서 '국어학 문헌 전시와 한글학회 발자취 전시전'을 갖는다. 또 8월22일에는 한글회관에서 조선어학회 수난 33인과 한글학회 역대회장 등을 대상으로 '한글학회를 이끈 스승 추모전'을 연다.

이어 8월 29-30일 건국대에서 한글학회 100년의 발자취와 우리 말.글의 미래를 주제로 미국,영국 등 6개국 언어 학자들이 참가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한글학회 100주년 기념식은 8월30일 거행되며, 31일에는 서대문 봉원사에서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을 갖는다. 또 12월에는 한글학회 100년사를 조명하는 1천쪽 분량의 기념서적도 출간할 예정이다.

◇윤봉길 의사 = 1932년 상하이 한 복판에서 폭탄을 투척, 일제 장성 등을 숨지게 한 독립운동의 전설 매헌(梅軒) 윤봉길(1908-1932년) 의사는 이달 21일 탄생 100년을 맞는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등은 매헌의 100주년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학술대회, 전시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우선 100주년 기념식은 21일 오전 11시 서울 양재동 윤봉길 의사 기념관 광장에서 열리며, 이명박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이 영상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

평전 출판기념회,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사전 행사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3일 `매헌 윤봉길 평전'이 중국어와 한국어로 출판된데 이어 20일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이밖에 19-22일에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양재동 시민의 숲 일대, 시청앞 광장에서 윤 의사의 생애와 활동을 알리는 사진 및 자료 전시회가 열린다.
by 100명 2008. 6. 19. 13:09

‘백제 조상은 부여’ 증명…풍납토성서 귀고리 출토

기사입력 2008-06-18 18:12


ㆍ은제 장식편·갑골 등 기원전·후 유물확인

한성백제 도성인 풍납토성에서 백제의 조상으로 알려진 부여계 은제 귀고리 장식(오른쪽 위 사진)과 갑골(甲骨·중심 연대는 기원 전후·아래 사진)이 출토됐다. 또한 기원전후 중국 등 주변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나타내주는 중국제 포수(鋪首·청동그릇 따위에 붙인 장식)도 확인됐다

풍납토성에 대한 10개년 학술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옛 미래마을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부여(BC 4세기~AD 494년) 영역에서 출토된 바 있는 황금 귀고리 장식과 똑같은 잎사귀 모양의 은제 귀고리 장식편과 동이계의 전형적인 갑골을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확인된 은제 귀고리 장식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수셴(柳樹縣) 라오허선(老河深)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귀고리 장식과 흡사하다”고 밝혔다. 나뭇잎 모양의 은제 귀고리 장식품은 길이 5.4㎝, 폭 1.2~1.5㎝ 정도였다.

또한 갑골은 동이계의 전형적인 유물이다. 1962년 BC 3500~BC 3000년 유적인 중국 동북부 발해연안인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처음 출토됐다. 이후 상(商)나라에서 갑골문자를 만들어내는 등 찬란한 갑골문화를 창조했고 그 전통이 부여~한반도로 이어졌다.

부여계의 은제귀고리 장식편과 갑골의 확인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나온 백제의 출자(出自) 기사와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끈다.

즉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한가지이며,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성씨를 부여씨라 했다(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는 기록(삼국사기)이다.

이 교수는 “한성백제 도성인 풍납토성에서 기원 전 후의 것으로 보이는 부여의 귀고리 장식과 갑골이 확인된 것은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의 출자를 증명해준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말했다.

최몽룡 서울대 교수는 “귀고리 장식은 BC 1세기~AD 1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또한 동한시대(AD 1세기)로 편년할 수 있는 중국제 포수(무늬는 괴수면 혹은 짐승면)도 확인됐다. 최 교수는 “부여계 귀고리 장식과 갑골, 그리고 한나라 시대에 유행한 중국제 포수 등을 미루어 보면 이미 이때부터 한성백제 수도인 풍납토성에서 활발한 국제교역이 벌어졌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by 100명 2008. 6. 18. 20:40

정조 효심 상징 ‘첫 왕릉 터’ 어쩌나…

기사입력 2008-06-18 03:09 |최종수정2008-06-18 03:49


[동아일보]

화성 사도세자릉 인근 택지지구서 재실-정자각 터 등 발굴돼 논란

“아버지보다 낮은 곳에 첫 무덤 정해”

전문가들 “사적지 지정 종합관리를”

주공은 난색 “시설별 별도보존 방침”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효심을 상징하는 정조의 첫 왕릉 시설 터(봉분 터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정자각 및 재실 터)가 발견되면서 이를 사적에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정자각 터와 재실 터는 대한주택공사가 아파트단지 건설을 추진 중인 택지개발지구(태안3지구)에 속해 있어 보존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터가 발견된 곳은 경기 화성시의 사적 206호 융릉과 건릉 인근. 이곳엔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융릉)와 아들 정조(건릉)가 나란히 묻혀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정조(1752∼1800)가 처음 묻힌 곳은 현재의 건릉(융릉 서쪽)이 아니라 융릉 동쪽의 한 구릉이었다. 이곳은 지대가 낮은 데다 습하고 좁아 왕을 모실 자리가 아니라는 우려가 많았다. 정조는 왜 애초 건릉을 마다하고 상서롭지 못한 구릉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전문가들은 아버지 곁에 묻히되 아버지보다 낮은 자리에 있으려는 아들의 효심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한다. 이곳에 묻혔던 정조의 시신은 1821년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죽은 뒤 현 건릉으로 이장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사실은 잊혔고 첫 왕릉 터의 정확한 위치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융·건릉 사적 밖 동남쪽에서 재실 터가 발굴됐으며 이 터는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 재실의 평면 배치를 간략하게 그린 ‘재실간가도(齋室間架圖)’와 일치했다.

재실 터에서 서북쪽으로 400여 m 떨어진 곳에서 정자각 터로 추정되는 건물 터와 무덤으로 가는 큰 길인 신도(神道)에 사용된 전돌들도 발견됐다. 이 터는 정조의 첫 무덤으로 추정되는 융릉 동쪽의 커다란 구덩이에서 남쪽으로 100여 m 떨어져 있다.

조선 왕릉은 봉분과 정자각(봉분에서 100여 m 떨어져 있음), 재실(정자각에서 남쪽으로 300∼400m 떨어져 있음)로 구성되기 때문에 정조의 첫 왕릉 시설 터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이남규(고고학) 한신대 교수는 “이 터들은 정조 효심의 결정체인 만큼 사적으로 일괄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최근 이곳을 실사한 한영우(한국사)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도 “재실 터만으로도 정조의 첫 왕릉 시설이 확인된 셈”이라며 “봉분 추정 터를 발굴해 이를 확증하고 사적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정자각 터가 발굴이 중단된 채 흙으로 덮였으며 정자각 터와 재실 터가 주공의 택지개발지구에 속해버렸다는 점이다. 경기문화연대와 경기도는 개발지구 전체 약 115만7000m²(35만여 평)를 ‘효(孝) 테마역사문화권’으로 공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주공은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주공은 최근 정부 관계 기관 회의에서 개발지구 북쪽(49만6000m²·15만여 평)을 ‘효 테마공원’으로 하고 개발지구 남쪽의 재실 터는 체육공원(9만9000m²·3만여 평)에 포함시켜 별도 보존하겠다는 기존 방침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영우 위원장은 “왕릉을 구성하는 무덤 정자각 재실이 따로 분리된 ‘점’ 단위 문화재가 아니어서 왕릉 관련 시설은 함께 보존할 때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by 100명 2008. 6. 18. 07:37

김구先生 서명 태극기 문화재 된다

기사입력 2008-06-16 21:01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 담긴 태극기 등 15점의 태극기가 문화재로 등록된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을 기념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태극기 15점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고 16일 밝혔다.

등록 예고한 태극기는 '김구 서명문 태극기' 등 독립기념관에 있는 11점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데니태극기', 동덕여대 박물관의 '동덕여자의숙 태극기', 하남역사박물관에 있는 '미 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 국회 헌정기념관이 소장한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 등이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선생이 1941년 광복운동을 돕던 벨기에인 매우사(梅雨絲ㆍ미우스 오그) 신부에게 전달한 것. 이 태극기 바탕에는 선생이 광복군에 대한 우리 동포의 지원을 당부하는 친필이 인장과 함께 남겨져 있다.

'데니 태극기'는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고문이었던 데니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데니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고 그의 후손이 1981년 한국에 기증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등록대상에서 누락된 태극기도 고증이 이뤄지면 추가 등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by 100명 2008. 6. 16. 23:28

잊어선 안될, 그러나 잊혀져 가는 6·25 전적지 문화재 된다

기사입력 2008-06-09 03:34 |최종수정2008-06-09 10:56


[동아일보]

문화재청 “이달 중 6곳 지정 예고… 2010년까지 장기 전투지역 추가”

《민-경(民-警)이 힘을 모아 북한군을 막아낸 경북 김천시 부항지서 망대(望臺),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경북 칠곡군 왜관철교, 서부 전선 영령들의 넋이 서린 경기 연천군 유엔군 화장터, 수도 서울 재탈환의 힘을 키운 옛 육군 제1훈련소(제주 서귀포시)….

6·25전쟁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적지와 훈련소 등 6·25전쟁 유적지 6곳이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는 부항지서 망대를 비롯해 경기 파주시 설마리 전투비, 제주 서귀포시 해병대 3, 4기 훈련소 등 6곳을 이달 중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지난해 10월 유엔군 전몰장병의 유해가 안장된 부산시 유엔기념공원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으나 6·25전쟁 전적지를 문화재로 지정 예고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2010년 6·25전쟁 60주년을 앞두고 무관심 속에 사라져가는 6·25전쟁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등록 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왔다. 등록문화재는 건물 수리 때 보조금 지원, 세제 기준 완화 등의 혜택을 받는다.

김천 부항지서 망대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북한군의 습격을 막기 위해 주민과 경찰이 함께 구축한 전적지. 7m 높이의 지상 건물에 15m 길이의 지하 통로를 갖춘 콘크리트 건축물로, 6·25전쟁 당시 세워진 망대 가운데 유일하게 사각형 모습이다. 1951년 1월 북한군 1000여 명과 교전 끝에 경찰 5명이 전사했으나 끝내 공격을 막아낸 곳이다. 이번에 민간과 공권력이 힘을 합쳤다는 점이 평가됐다.

칠곡 왜관철교는 1950년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막기 위해 다리 일부가 폭파됐다가 1990년대 복구됐다.

당시 왜관이 북한군에 넘어갈 경우 북한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이 다리를 폭파했다. 북한군은 더는 남하하지 못했고 이후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국군의 북진 계기를 마련해 ‘호국의 다리’로 불린다.

연천 유엔군 화장터는 격렬했던 서부전선 전투에서 사망한 유엔군을 화장한 곳. 돌로 쌓은 10여 m 높이의 굴뚝과 화장 구덩이가 있으나 지금은 표지판 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주 설마리 전투비는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와 제170 경박격포대 소대 장병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57년 건립된 비. 영국군은 1951년 4월 북한군과 중국군을 방어하다가 수많은 전사자를 냈지만 이들의 희생 덕분에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에 새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서귀포의 옛 육군 제1훈련소(일명 모슬포 훈련소)는 북한군에 밀려 퇴각하던 1951년 1월 개소된 뒤 국군 신병을 배출해 서울 재탈환 등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곳. 이곳에선 1956년까지 약 50만 명의 신병이 훈련받았다. 훈련소 정문 기둥, 지휘소, 막사, 의무대 건물 등이 남아 있다.

서귀포의 해병 3, 4기생 훈련소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을 낳은 해병 3, 4기를 훈련시킨 곳. 여기서 훈련받은 해병 3000여 명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

이만열(한국사) 근대문화재분과 위원장은 “2010년 6·25전쟁 60주년까지 장기 전투 지역, 참호, 낙동강 전선 등의 전적지를 추가로 찾아내 등록 문화재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by 100명 2008. 6. 9. 11:04

동굴도 못 견디는 유람선 소음? '해금강의 위기'

기사입력 2008-06-0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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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뉴스>

<앵커>

바다의 금강산으로불리는 거제 해금강. 그 중에서도 비경을 자랑하는 해식 동굴이 난데없는 소음 때문에 위기에 처했습니다. 셀 수 없이 드나드는 유람선의 소음이 동굴을 흔드는 것인데요.

김형주 기자가 현장 취재했습니다.

<기자>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백미, 명승 제2호 해금강.

깎아지른 해식절벽이 일품인 돌섬으로, 하루에도 수십 척의 유람선이 드나듭니다.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십자동굴.

[바로 저 십자! 바로 저 십자입니다!]

동굴 안에 울려퍼지는 유람선 엔진과 확성기 소리를 측정해보니 109.5데시벨에 달합니다

[배명진/숭실대 정보통신전자공학부 교수: KTX를 타도 95데시벨 정도밖에 안되고, 천둥번개 소리가 계속해서 바위를 때리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선박의 엔진은 큰 물체를 공명시켜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저주파음을 발산합니다.

공명을 일으키는 저주파음은 동굴 전체를 진동시켜 지속적인 타격을 줍니다.

충격이 누적될 경우, 지난 1940년 공명현상으로 무너진 미국 워싱턴 다코마 현수교처럼, 바다 위의 돌섬인 해금강도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진단입니다.

환경단체도 이미 소음으로 인한 훼손가능성을 여러 번 경고했지만 당국은 아직까지도 나몰라라입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사무소 관계자 : 그걸 특별히 실태조사한 적은 없습니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지도 못했고요.]

오랜 세월 동안 파도와 바람으로 다듬어진 해금강의 절경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by 100명 2008. 6. 7. 21:20

안중근 의사 순국 직전 뤼순감옥서 사용한 벼루 일본서 발견

기사입력 2008-06-06 17:44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까지 만주 뤼순(旅順) 감옥에서 사용했던 벼루가 일본에서 발견됐다고 도쿄신문이 6일 보도했다. 안 의사의 벼루가 발견된 것은 처음으로 전문가들은 “한국의 국보급”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벼루는 가로 7.5㎝, 세로 13.3㎝로 일반 벼루보다 작은 크기이며 뒷면에는 ‘경술년 3월 뤼순감옥에서 안중근(庚戌三月 於旅順獄 安重根)’이라고 새겨져 있다. 경술년 3월은 안 의사가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1910년 3월을 의미하며 사형집행일(26일) 직전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문은 안 의사 자신이 이 글씨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벼루를 발견한 사람은 사이타마현 가와고에시에 사는 70대 치과의사. 고(古) 벼루 수집이 취미인 그는 구 만주철도 콜렉션행사를 통해 이를 사들였고 지난 4월 안 의사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먹과 함께 안 의사의 현창비(顯彰碑·공적을 알리는 비석)가 있는 미야기현 다이린지(大林寺)에 기증했다.

다이린지에서는 해마다 안 의사와 뤼순감옥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를 기리는 법요식이 열린다.

벼루 전문가인 구스노키 후미오(楠文夫) 도쿄예술대 강사는 “안중근 의사의 글이나 필적과 비교한 결과 이 벼루는 진품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by 100명 2008. 6. 6. 22:12

안익태 선생 오케스트라 ‘파스토랄’ 악보 美서 발견

기사입력 2008-06-06 03:13 |최종수정2008-06-06 05:25
[동아일보]

안익태 선생 ‘한국 환상곡’ 보다 2년 앞서 초연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1906∼1965)가 1936년 초연한 최초의 오케스트라 작품 ‘파스토랄’(‘전원’ 또는 ‘목가’라는 뜻)의 악보가 발견됐다.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학과 교수는 “(안익태가 1933∼1937년 살았던) 미국 필라델피아의 시립도서관에서 제목만 알려졌던 그의 첫 오케스트라 작품 ‘파스토랄’의 악보 사본을 3월에 발견했다”며 “누가 사본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표지에 ‘To. Mrs. H. O. Peebles’라는 헌정사까지 그대로 옮겨져 있다”고 말했다. 피블스 여사는 안익태의 후원자다.

지금까지 안익태가 최초로 발표한 오케스트라 작품은 1938년 2월 더블린에서 초연된 ‘한국환상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파스토랄’은 이보다 앞선 1936년 9월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됐다. ‘파스토랄’은 우리 민요인 ‘방아타령’을 주제 선율로 편곡한 오케스트라 곡이다.

안익태는 ‘파스토랄’이 부다페스트에서 오케스트라 곡으로 초연되기 1년 전인 1936년 5월 미국 필라델피아 지역의 한 여성클럽 모임에서 첼로 독주곡으로 직접 연주했다.

허 교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환상곡’ 악보인 1944년 판(독립기념관 소장) 2악장에는 ‘파스토랄’이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며 “1938년 ‘한국환상곡’ 초연 당시 프로그램에 실린 작품 해설에도 2악장에 대해 ‘전원적 생활’을 묘사했다고 한 점을 감안하면 이때부터 ‘파스토랄’이 ‘한국환상곡’의 일부로 사용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by 100명 2008. 6. 6. 11:53

"1951년 해인사 폭격 명령 거부… 팔만대장경 구했죠"

기사입력 2008-06-06 03:09 |최종수정2008-06-06 10:24

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은‘문화재 지킴이’들. 왼쪽부터 초산 스님, 장지 량 전 공군참모총장, 김정동 목원대 교수./유석재 기자

장지량 前 공군참모총장 등 '문화재 지킴이' 일화 책으로

북관대첩비·경복궁 자선당 등 日本서 되찾은 문화재 소개도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한일불교복지협의회 공동대표인 초산 스님이 5일 자리를 함께했다. 이 세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하마터면 영영 잃어버릴 뻔했던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문화재청 주최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눌와 刊)의 출간기념회에 참석해 감사장을 받았다.

장지량 전 총장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경남 사천에서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고 있었다. 그는 미국비행고문단으로부터 갑작스런 명령을 받았다. "인민군 1개 대대가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으니 그곳을 폭격하라"는 것이었다. 해인사가 어떤 곳인지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아찔했다. 팔만대장경이 몽땅 한 줌 재로 변할 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식량 탈취가 목적이니 며칠 지난 뒤 빠져나오면 그때 폭격해도 늦지 않다. 2차대전 때 프랑스의 파리 방위사령관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 무조건 항복한 일도 있었는데….' 장 전 총장은 고민 끝에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을 계속 끌어 날이 어두워지자 자연스레 출격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며칠 뒤 인민군이 철수해 산 속으로 이동한 뒤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격노한 미군측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해 그는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김정렬 당시 공군참모총장의 해명으로 가까스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천년 고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지켜진 것은 그의 공이었다.

김정동 교수는 1993년 일본 도쿄(東京)대에 객원 연구원으로 가 있던 중 오쿠라 호텔 경내를 조사하다 옛 건물터를 발견했다. 그것은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의 흔적이었다. 자선당은 '동궁'이라고 불렸던 왕세자의 거처로, 1915년 다른 경복궁 전각들과 함께 총독부에 의해 헐린 뒤 일본으로 반출돼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의 저택으로 옮겨졌다.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불탄 뒤 석조 잔해만 남아있던 것을 김 교수가 발견한 것이다. 그가 백방으로 뛰어다녀 여론을 모은 끝에 자선당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흔적)는 1996년 8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함북 길주에 1709년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승을 기록한 비석으로,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이 가져간 뒤 야스쿠니(靖國) 신사 구석에 방치돼 있었다. 초산 스님은 일본측과 함께 북관대첩비 반환 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해 2005년 반환을 이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북관대첩비는 2006년에 북한측에 인도됐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의 소실이 곧 역사와 문화를 잃는 것임을 깨닫고 시대를 앞서 '문화재 지킴이'의 역할을 했던 분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 우리문화유산지키기 캠페인]



1951년 8월, 경남 사천 주둔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였던 장지량 중령(훗날 공군참모총장)은, 인민군 1개 대대가 점령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미국비행고문단의 명령을 거부해 팔만대장경을 지켜냈다. 장지량 전 총장은 2008년 6월 5일 문화재청 주최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유석재 기자
by 100명 2008. 6. 6. 11:07

<서울시청 본관 건물 82년만에 '아듀'>(종합)

기사입력 2008-06-03 11:06 |최종수정2008-06-03 11:42

서울시청 본관 건물 82년만에 '아듀'

리모델링 후 문화시설로..서소문시대 개막

(서울=연합뉴스) 문성규 기자 = 서울 중심의 시청 본관이 82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3일 서울시에 따르면 신청사 건립공사에 따라 오세훈 시장을 비롯한 시장단과 경영기획실, 행정국, 재무국, 대변인실 등 본관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핵심부서들이 서소문 별관(옛 검찰청사)으로 이전, 오는 9일부터 이 곳에서 집무를 보게 된다.

이로써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성부 청사로 준공된 이후 지금까지 서울시의 '수장'들이 시정을 펼치던 시청 본관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퇴장하게 된다.

시청 본관 건물은 시가 이 건물 뒤 부지에 신청사를 2011년 2월까지 건립하기로 함에 따라 리모델링을 거쳐 도서관과 전시관, 역사관 등의 시민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본관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한 때 점령한 것을 제외하곤 시 청사로 줄곧 사용됨으로써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을 함께 해 왔으며, 특히 해방 후 서울의 발전을 주도해온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건물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 등 2명의 대통령이 배출됐으며, 허 정 과도정부 수반과 고 건 전 총리도 시장으로서 이 곳을 거쳐 갔다.

르네상스 양식의 지상 4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위에서 내려다 보면 '본(本)'자 형태여서 1996년 철거된 '일(日)'자 형태의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서울시청 본관 건물 82년만에 '아듀'

시는 본관과 연결돼 있던 증축건물은 신청사 건립을 위해 2006년 2월 철거를 했지만 본관은 역사성 등을 감안해 시 등록문화재(제52호)로 지정, 보존을 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오는 9일부터 서소문 별관을 본관으로 임시 사용한 뒤 2011년 2월 신청사로 이전할 계획이다.

시가 지난달 20일 착공한 신청사는 지하 5층, 지상 13층, 연면적 9만7천㎡ 규모로, 한옥의 '처마' 형상에 곡선미를 가미한 디자인에 전체면적의 3분의 1 이상이 시민 문화공간으로 꾸며진다.

한편 시는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6개월여에 걸쳐 본관 이전작업을 진행하면서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야간이나 토.일요일, 공휴일에 이사를 했고 의자와 책상을 포함한 모든 비품을 재활용했다.

또 본관 이전에 맞춰 서소문별관의 주차장을 공원으로 새롭게 단장, 시민들이 덕수궁과 시립미술관, 정동극장과 연계해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시 청사내 새 사무실 위치는 다산콜센터(☎ 국번없이 120)와 시 홈페이지(http://www.seoul.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by 100명 2008. 6. 3. 17:08

[옛날광고] 철마는 밤낮이 없습니다

기사입력 2008-06-03 10:21 기사원문보기


[인터뷰365 홍경희] 사진은 80년대 초반 철도청 광고다. 각진 모양의 무채색 열차가 옛 서울도심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아날로그의 향수를 물씬 풍긴다. KTX가 개통된 이후 80년대 기차여행의 백미였던 통일호는 물론 ‘특급’열차로 위용을 과시하던 새마을호마저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동선에 속하던 부산이나 목포까지 당일에 다녀올 수 있는 요즘, 시간에 몸을 맡기고 떠나던 완행열차의 추억은 사진 속 기차처럼 점점 멀어져 간다. 상상할 수 없이 빨라진 기차의 속도만큼 창밖 멀리서 손 흔들어주던 사람들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절이 그리워서일까. 최근에는 옛 객차를 이용한 마케팅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by 100명 2008. 6. 3. 13:05

국내 첫 채광갱 유적 발견

기사입력 2008-06-02 19:28 |최종수정2008-06-02 19:52

국내 최초의 전근대 채광갱

울산 달천유적 인근..조선시대 坑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근대 이전에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철광석을 캐서 철제품을 제련했을까?

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채광갱 유적이 지금까지 단 한 곳도 발견되지 않다 신라시대 철광산지로 지목돼온 울산 달천유적 인근에서 최초로 확인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있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울산문화재연구원(원장 이겸주)은 현대산업개발㈜이 학교 부지를 조성할 울산 천곡동 513-4번지 일원 8천523㎡를 발굴조사한 결과 조사대상 구릉지 남동쪽 경사면 일대에서 철광석을 캐내는 과정에서 형성된 갱(坑) 10여 곳이 지름 30m 범위 안에서 집중적으로 분포된 양상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이 채광갱(採鑛坑)들은 일단 수직에 가깝게 평면 원형 형태로 암반을 파고 내려간 다음, 광맥을 따라가면서 굴착한 흔적을 보였다.

채광갱은 대체로 폭이 1.2~1.5m였으며 깊이는 가장 깊은 곳이 4m 정도였다. 일부 채광갱은 지하에 철광석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적으로 파본 '시추갱'일 것으로 판단됐다.

갱 내부는 채굴할 때 나온 풍화토로 매몰된 흔적이 확인됐다.

국내 최초의 전근대 채광갱

조사단은 채광갱 출토 옹기나 토기 조각들로 볼 때 조선시대에 굴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철기문화사 전문인 손명조 국립제주박물관장은 "그토록 고대하던 철광산이 마침내 출현했다는 점에서 이번 발굴은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

채광갱이 발견된 곳 인근에 위치한 달천유적은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경주 지역에 원료를 공급한 철광산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경주지역 철기 출토품과 달천 유적 출토 철광 원석에서 모두 비소 성분이 다량으로 검출된다는 공통점이 그 근거가 되고있다.
by 100명 2008. 6. 2. 19:53

<거제 칠천도서 '거북선 찾기' 대장정>

기사입력 2008-06-02 13:32 |최종수정2008-06-02 17:33

모형으로 제작된 3층 거북선

(거제=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최신 탐사기술을 동원한 거북선 찾기가 임란왜란때 조선수군이 유일한 패배를 당했던 경남 거제시 칠천도에서 2일 시작됐다.

경남도는 이날 오후 임란당시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 연구리 옥계마을 공설운동장에서 섬주민과 해군, 조선업체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거북선을 찾아라!' 출항식을 갖고 1년간의 대장정에 나섰다.

이날 출항식을 시작으로 내년 5월말까지 칠천도 일대 1천584만㎡ 해역에서 거북선을 비롯한 임진왜란 유물 찾기에 도전한다.

거제도 북쪽 끝에 있는 칠천도는 인구가 1천280여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모함을 받은 이순신 장군을 대신해 지휘봉을 잡았던 원균이 410여년전 일본 수군에 맞서 치열한 해상전투였던 '칠천량 해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거북선 꼭 찾겠습니다

2000년 본섬인 거제도 하청면 실전리와 연결되는 길이 455m의 연륙교가 개통되면서 '섬아닌 섬'으로 거듭났고 경남도가 추진하는 임진왜란 문화콘텐츠 사업인 '이순신 프로젝트'에서 '칠천량 해전 패전공원' 대상지로도 꼽혔던 지역이기도 하다.

출항식이 개최된 '연구리'(蓮龜里)라는 행정지명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여러척이 연꽃같은 모습으로 바다에 떠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내력이 섬주민들 사이에 대대로 전해질 정도여서 당시 거북선이 전투에 참전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1597년 7월7일 시작돼 16일까지 계속된 칠천량 해전에는 조선수군 함선 180척이 일본 수군 함선 600여척과 대적해 거북선 수척과 판옥선 등 140~160척이 파손되고 1만여명이 전사하는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

이때문에 거북선을 비롯한 당시 해전 잔해들이 바닷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란 기대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높은 곳이다.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칠천수로'를 비롯한 칠천도 인근 해역은 수심이 20~30m로 비교적 얕고 뻘퇴적층의 두께가 3~4m로 넓게 분포해 있다.

거북선 찾기 기원 큰북치기

여기다 바람과 해류의 흐름이 약해 침몰 함선들이 바다 밑바닥에 매몰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과거 거북선 발굴조사를 했던 해군이 칠천수로를 포함한 주변을 조사했지만 남해안 전역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대상지중 한곳에 불과해 이번처럼 첨단장비와 인력이 투입돼 샅샅히 탐사에 나서기는 사실상 처음이다.

이승철(70) 거제향토사연구소 소장"이번 탐사에서는 전투해역 뿐만 아니라 전투전 조선수군이 정박했을 가능성이 있는 포구와 패전 후 해상도주로까지 광범위하게 탐사할 예정이어서 거북선 뿐만 아니라 다른 임란 해저유물 발견에 충분히 기대를 걸어볼 만 하다"고 말했다.

이번 사업에는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STX조선, 성동조선해양 등 경남에 있는 조선소가 2억원씩 8억원 등 모두 11억7천만원이 투입되며 한국해양과학기술 등 3개사가 컨소시엄을 형성해 칠천도 주변 바닷속을 뒤지게 된다.

이날 출항식은 임진왜란 당시 전몰된 조선수군들의 혼을 달래는 진혼제를 시작으로 해군 참모총장 등의 영상메시지가 전달되고 거북선 등 이충무공 해저유물 탐사계획이 담긴 영상물이 상영됐다.

이어 1592년 임란 당시 사용됐던 '3층 거북선' 모형 거북선과 제작과정이 소개되고 탐사출항 기원제와 출항 퍼포먼스, 탐사정 승선 순으로 진행됐다.

또 이번 탐사에 직접 참여할 ㈜한국해양과학기술측이 탐사에 사용될 사이드스캔소나와 지층탐사기, 금속탐지기 등 30여종의 첨단 장비들을 전시.소개했다.

경남도 관계자는 "당시 전장에 나간 조선수군과 같은 한결같은 믿음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거북선 찾기에 나서겠다"며 "칠천도 탐사에서 유물이 발굴되지 않으면 거제도 인근 가조도와 진동만, 안정만 해역으로 탐사지역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seam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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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100명 2008. 6. 2. 19:51

日 '아스카 고분 벽화' 1200년 만의 외출

기사입력 2008-06-02 02:57
72년 첫 발굴··· 퇴색·변질 가속에

복원 위해 석실 해체 일반 첫 공개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 채색 벽화 ‘아스카(飛鳥) 미인’으로 유명한 일본 나라(奈良)현 다카이치(高市)군 다카마쓰(高松) 고분이 지난달 31일부터 6월 8일까지 일반 공개되고 있다. 1972년 일본내 첫 벽화고분 발견으로 고고학 붐을 일으킨 이후 시민 대상 실물 공개는 처음이다.

하지만 이번 공개는 안타깝게도 다카마쓰 고분 내에서 벽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발견 직후부터 온ㆍ습도 조절 장치를 설치하고 관리ㆍ연구자 이외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벽화가 퇴색, 변질하는 열화(劣化)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 문화청이 보존수리를 위해 지난해 석실 벽면과 천정의 돌을 모두 해체해 옮겼기 때문이다.

7세기 후반 8세기 초 무덤으로 고구려나 백제 왕족의 것일지 모른다는 학설도 있는 다카마쓰 고분은 발견 당시 동, 서, 북벽과 천정의 선명한 벽화로 일본 고고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동ㆍ서벽에는 대칭으로 남녀 군상과 해ㆍ달, 청룡ㆍ백호도가, 북벽에는 현무가, 천정에는 별자리가 그려져 있으며 모두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벽화 훼손이 처음 확인된 것은 2002년. 고분 시설 수리 기술자가 멸균 방호복을 입지 않은 채 석실을 드나든 뒤 벽화에 대량으로 검은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책위가 구성돼 수년에 걸쳐 상태를 관찰한 결과, 현상태로는 보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2005년 해체 후 복원을 결정했다.

지난해 4월 3일부터 두 달에 걸쳐 천정석을 시작으로 석실 내 돌 16장이 고분 근처 복원작업시설로 옮겨졌다. 영안실을 연상케 하는 이 작업실에는 ‘시신’처럼 벽화가 그려진 다카마쓰의 석재 캔버스가 16개 작업대 위에 한 장씩 누워 있다.

도쿄문화재연구소 등의 복원수리 전문가들은 어두운 석실 내에서 자세히 보이지 않던 곰팡이의 범위와 상태를 일단 정확히 확인했다. 서벽의 ‘아스카 미인’ 벽화는 석재 뒤쪽에서 습기가 침투해 그림의 바탕에 칠한 회반죽이 함몰된 부분을 새롭게 발견했다.

천정 벽화를 시작으로 곰팡이 제거는 하루 5㎝ 정도다. 그만큼 조심스럽다. 난관은 고분 내 높은 습도 때문에 벽화 전체를 덮고 있던 젤 상태의 미생물막(바이오필름)이다. 석실 바깥으로 석재를 옮기자 습도가 낮아지면서 이 막이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일단 약제를 이용해 미생물 막의 분자를 차단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고분 발견 당시부터 제기됐던 ‘원상태 보존’과 ‘해체 후 수리복원’ 논란도 여전하다. 일본고고학회가 회원 77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분의 해체는 파괴’라는 응답자가 57%였다. 벽화 보존을 위해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답은 35%에 그쳤다.

다카마쓰 고분의 수리복원은 앞으로 10년에 걸쳐 진행된다. 성과는 고구려 고분 벽화 보존에 고민하는 남북한에도 좋은 참고가 될 전망이다.
by 100명 2008. 6. 2. 09:31

"불가사의 스톤헨지 유적 고대 왕족의 무덤이었다"

발견된 화장 흔적들 연대기 조사… 지배계층 가족 공동묘지로 밝혀져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 남서부의 선사시대 거석 유적 스톤헨지는 고대 왕족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영국 BBC 방송이 29일 보도했다.

영국 BBC는 스톤헨지 발굴 프로젝트팀의 연구 결과 이 유적이 착공 후 500여 년 동안 지배계층과 그 일족을 위한 공동묘지로 사용되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 동안 이 신비한 유적의 건축 목적을 놓고 학계 안팎에서는 천체관측소, 치료를 위한 신전, 묘지 등 다양한 설을 제기했다.

고고학자들은 유적에서 발견된 화장 흔적들의 연대기를 조사한 결과 가장 오래된 뼈와 치아 조각들은 BC 3000년 전의 것이었다. 이는 건립 초기 단계인 외곽의 도랑 건설시점과 일치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화장됐을 것이라 추정되는 25세 여성의 유해는 그로부터 약 500년 후 건축물의 배열 완공 시점인 BC 2570~2340년 무렵의 것이었다.

연구팀은 오래된 화장 유골 흔적이 소수였던 데 반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그 수가 많아진 점을 발견, 한 가문이 대를 이어 번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마이크 파커 피어슨 셰필드대 교수는 “무덤에서 발견된 석기곤봉과 같은 유물을 고려할 때 이 곳은 평범한 일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면서 “무덤의 주인공은 고대 영국의 왕족일 수 있다”고 말했다.

스톤헨지 발굴을 후원해 온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는 새롭게 밝혀진 연구결과를 6월 호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31일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도 방송할 계획이다.

by 100명 2008. 5. 31. 08:58

"태극기 창안자는 박영효 아닌 이응준"

기사입력 2008-05-30 03:37 |최종수정2008-05-30 08:17


"1882년 5월 朝美통상조약때 첫 게양"

●독립기념관 '국기 원형 보고회'서 결론

美, 조인식 앞두고 조선에 국기 사용 요구

역관 이응준이 함정 '스와타라' 안에서 만들어

박영효는 1882년 9월 일본 수신사로 가던 중

'이응준 태극기' 중 4괘 左·右 바꿔 공식 제정


최근 우리나라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에 대해 학계와 연구기관들의 관심이 뜨겁다. 그 덕분에 이번 주 '최초 태극기'의 제정과 관련된 여러 의문들이 해결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처음으로 태극기를 창안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1882년 9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됐던 박영효(朴泳孝·1861 ~1939)가 아니라, 이보다 4개월 앞선 1882년 5월 조미(朝美) 조약 체결 당시 역관이었던 이응준(李應浚)이었음이 새로 밝혀졌다.

지난 27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한시준) 주최로 서울 대우재단빌딩에서 열린 '국기 원형 자료 분석 보고회'에서는 한철호 동국대 교수가 논문을 발표했고,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토론문을 보냈다. 국내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이들은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4시간 넘게 격론을 이어 간 끝에 태극기의 창안과 제정 과정에 대해 사실상의 결론을 내렸다. 태극기의 창안자는 이응준이었으며,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꾼 뒤 국기로 공식 제정했다는 것이다.

◆조미조약 당시 첫 태극기 게양

1882년 5월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은 국기가 없었다. 5월 14일(이하 양력),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Schufeldt)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申櫶)과 김홍집(金弘集)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제정할 것을 명했고, 이응준은 5월 14일에서 22일 사이에 미국 함정인 스와타라(Swatara)호 안에서 국기를 만들었다. 이 '국기'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 하지만 이 국기의 형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괘가 없는 태극기'(김원모)나 '팔괘 태극기'(이태진)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자료가 발굴됨으로써 '이응준 태극기'는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됐다. 조미조약 체결 2개월 뒤인 7월 19일 미국 해군부(Navy Department) 항해국이 제작한 문서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에 태극과 4괘를 갖춘 태극기가 실렸음이 밝혀진 것이다〈본지 2004년 1월 27일자 A11·22면 보도〉. 지금의 태극기와 4괘의 좌·우가 바뀌었고 태극 모양이 약간 다를 뿐 전체적으로 매우 흡사했다.

김원모·이태진·한철호 교수 모두 이것이 조미조약 체결 당시 걸렸던 '이응준 태극기'라는 데 동의했다. 이 태극기에 대해 김원모 교수는 "최초의 국기이자 태극기"라고 평가했다. 한철호 교수는 "임진왜란 때도 이미 태극 모양의 깃발이 존재했고 조미조약 당시는 아직 공식 국기를 제정하기 전이었으므로, 최초의 태극기가 아니라 '국기의 원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극기'를 통념대로 '태극과 4괘를 갖춘 깃발'로 규정하는 한, 이 깃발은 사실상의 국기로 쓰인 현존 최고(最古)의 태극기임이 분명하다.

◆박영효, 4괘 위치 바꿔 공식 제정

그렇다면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明治丸) 선상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어떻게 된 것인가? 박영효의 일기인 《사화기략(使和記略)》에는 그가 준비해 간 '태극팔괘도'를 본 영국인 선장 제임스(James)가 '너무 복잡해서 식별이 어렵다'는 의견을 내 '팔괘도'에서 괘 네 개를 뺀 '사괘도'로 고쳤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한철호 교수는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조미조약 당시 청나라 특사 마건충(馬建忠)은 '이응준의 깃발(태극사괘도)이 일본 국기와 혼동된다'며 태극 주변에 팔괘를 그린 그림을 새 국기로 제안했다. 청나라의 제안을 일방적으로 묵살하기 어려웠던 박영효는 제임스의 의견을 구실로 자연스럽게 '마건충 안'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태진 교수도 "제임스 선장의 역할은 '사괘도'와 '팔괘도' 중에서 '사괘도'를 택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효가 이 국기를 만든 것은 9월 25일이었고, 일본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것은 12월 27일이었다. 이 국기의 모습 역시 수많은 설이 있었지만, 한철호 교수는 최근 발굴된 문서에서 그 형태가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 태극기는 11월 1일 일본 외무성 외무대보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Parkes)에게 보낸 문서에 수록된 것으로, 박영효가 국기 제정 직후 일본에 체류할 당시의 태극기라는 것이다.

이 태극기에 대해 한철호 교수는 "박영효 태극기가 분명하다"고 했고 이태진 교수도 동의했지만 김원모 교수는 "방증자료일 뿐 박영효 태극기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태극기가 1883년 3월 6일 조선 정부가 국기 제정을 공식 반포한 직후인 3월 18일 청나라 문서 《통상장정성안휘편》 에 실린 '대청국속 고려국기(大淸國屬高麗國旗)'와 비슷한 형태인 것은 분명하다. '요시다 문서'의 태극기가 '박영효 태극기'가 맞다면, 박영효의 역할은 ▲ '이응준 태극기'를 모본으로 삼아 국기를 제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괘(卦)의 좌·우를 바꾼 것이 된다. 그러나 '태극기를 만든 사람'으로서 역사에 이름이 남은 것은 중인 신분의 역관 이응준이 아니라 철종 임금의 부마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였다.

◆다른 태극기들은…

지난 1997년 일본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 1882년 10월 2일자에 실린 '조선국기' 그림이 발굴된 뒤, 한때 이 태극기가 '박영효 태극기'란 설이 불거졌었다. 이 태극기의 4괘는 지금의 태극기와 3괘가 달라 논란이 일었다. 당시 김원모 교수가 "일본측이 날조한 그림"이라고 주장한 반면 이태진 교수는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이 교수는 이번 토론문에서 자신의 기존 해석을 수정한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잘못 그린 태극기'라는 것이다.

또 《통상장정성안휘편》의 태극기에 대해서 김원모 교수는 "반포 당시의 태극기 원형이 맞다"고 한 반면, 이태진·한철호 교수는 "바탕이 황색이고 태극 안에 작은 원이 있는 등 청나라측이 일부 왜곡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국기의 명칭 앞에 멋대로 '대청국속'이란 말을 붙이는 등의 조작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의도를 보였다는 설명이다.



2008년 5월 27일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로 열린 '국기 원형 자료 분석 보고회'에서 동국대 한철호 교수가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유석재 기자



같은 자리에서 토론자로 참석한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유석재 기자
by 100명 2008. 5. 30. 08:44

은평뉴타운 첫 문화재 보존 결정

기사입력 2008-05-29 06:03 |최종수정2008-05-29 09:23

신라 화엄10찰 청담사

문화재委 "청담사터 보존하라"..건설사업 변경 불가피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은평뉴타운 예정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문화유적에 대해 첫 보존 결정이 나왔다. 이에 따라 은평뉴타운 건설사업은 일정 부분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는 지난 25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회의를 열고 신라시대 화엄종에 속한 10대 사찰(화엄10찰) 중 한 곳인 '청담사(靑潭寺)'라는 명문기와가 다수 출토된 진관내동 429번지 일대 3-A공구 절터 유적과 그 인근 신라말-고려초기 석조미륵불상을 현장에 그대로 보존할 것을 결정했다고 문화재청이 29일 밝혔다.

문헌기록에만 언급되고, 그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던 청담사는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숙정)이 지난해 12월부터 SH공사의 의뢰를 받아 은평뉴타운 예정지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북한산 자락인 응봉(鷹峰.해발 235.1m) 능선 하단부 구릉지에 있었음을 밝혀주는 명문 기와가 발굴됨으로써 베일에 가려졌던 위치가 밝혀졌다.

신라 화엄10찰 청담사

이 절터가 발견된 곳 인접지점에는 자씨각(慈氏閣)이라는 현판을 내건 보호각이 있고, 그 안에는 석조미륵불상 1개가 안치돼 있다. 자씨(慈氏)란 미륵보살을 말한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박경식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이 불상은 뉴타운 건설을 위한 2003년 지표조사가 실시되기 이전에는 학계에 전혀 보고가 되지 않은 것으로, 옷주름 등을 포함한 양식적 특성으로 볼 때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작품으로 생각하며, 아무리 늦잡아도 (제작시기는) 고려 중기를 넘어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뉴타운 계획 수립 단계에서 이 미륵불을 현장 보존조치하도록 서울시 측에 통보했음에도 불구하고 SH공사는 이곳을 관통하는 도로 건설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담사는 신라말을 대표하는 학자 최치원이 신라 효공왕(孝恭王) 8년(904)에 저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라는 한 승려의 전기에서 "해동의 화엄의 큰 학문 장소로는 10군데가 있으니 한주(漢州)의 부아악(負兒山) 청담사(靑潭寺)도 그 중 하나다"(海東華嚴大學之所有十山…漢州負兒山靑潭寺也)라고 적었으나 그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SH공사는 청담사터와 자씨각을 보존할 경우 도시계획에 차질이 초래되는 점을 들어, 문화재위에 재심의를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매장분과 위원 대부분은 "다시 안건이 올라오더라도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없다"고 못박았다.

보존결정 은평뉴타운 불상
by 100명 2008. 5. 29. 13:57

혁명가 체 게바라 열풍이 다시 분다

기사입력 2008-05-28 03:48
ㆍ탄생 80돌 맞아 전기영화·회고록 등 나와

ㆍ오스트리아선 쿠바혁명 기간 사진 전시회

남미의 ‘혁명 아이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탄생 80주년(6월14일)을 앞두고 영화·전시·출판 등에서 ‘체 게바라 붐’이 재연될 조짐이다.

지난 25일 폐막한 제61회 칸국제영화제에서는 미국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만든 게바라의 전기영화 ‘체(Che)’가 큰 관심을 모았고, 게바라를 연기한 푸에르토리코 배우 베니치오 델 토로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26일에는 오스트리아 빈의 베스트리히트 갤러리에서 게바라 탄생 80주년 기념 사진전이 막을 올렸다. 쿠바 혁명기간 동안 쿠바 사진작가들이 찍은 게바라의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 중에는 사진은 물론 포스터와 티셔츠·가방·커피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등장하는, 베레모를 쓴 게바라의 모습(사진·1960년 3월 알베르토 코르다 촬영) 원판이 포함돼 있다. AFP통신은 이 사진을 가리켜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복제되는 사진일 것”이라고 평했다.

사진전 참석을 위해 빈에 온 게바라의 아들 카밀로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언젠가는 쿠바 감독이 아버지에 대한 영화를 만들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 ‘체’ 제작 과정에서 감독인 소더버그와 접촉하기도 한 그는 이 영화가 건조할 만큼 사실묘사에 치우쳤다는 지적에 대해 “완성된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정신에 충실했다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카밀로는 “쿠바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현재형’이지만, 아직 (아버지에 대해) 이뤄져야 할 작업이 많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그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 연구센터’를 이끌며 게바라의 미발행 유고들을 출간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카밀로의 어머니이자 체 게바라의 두번째 부인인 알레이다 마르치는 최근 회고록 ‘체, 회상’을 펴냈다. 마르치는 쿠바혁명 중이던 58년 이념적 동지로 게바라를 만나 67년 게바라가 죽음을 맞기까지 부부의 인연을 함께했다. 남편 사후 41년 만에 입을 연 마르치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과 게바라가 보낸 엽서·편지 등을 통해 ‘인간의 얼굴을 한 혁명가’의 모습을 털어놓았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체 게바라의 사망 40주기를 맞아 쿠바와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베네수엘라 등 남미 전역에서 추모 열풍이 불었다.

28년 6월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를 졸업한 뒤 잠시 의사로 일했다. 두 차례의 남미 여행을 통해 민중의 삶을 목격한 그는 55년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뛰어들었다. 쿠바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장관 등을 지냈지만 65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혁명의 일선으로 돌아갔다. 콩고에서 반정부 활동에 실패한 그는 66년 볼리비아로 떠나 게릴라 활동을 벌이다 67년 10월9일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총살됐다.
by 100명 2008. 5. 28. 10:24

징용 한인 전사자 2만여명 그냥 잊혀지게 할순 없었죠

기사입력 2008-05-28 03:11 |최종수정2008-05-28 09:51
[동아일보]

日 60대 기쿠치씨 명부 정리

희생자 대부분 20대 젊은이 ‘충격’

10년 넘게 사망장소 일시 등 입력


“그냥 잊혀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조금씩 작업하다 보니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일제에 의해 군인이나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다가 전사한 조선인 2만수천 명의 명부를 한 평범한 일본인이 완성했다고 아사히신문이 27일 보도했다.

도쿄(東京) 도 다치카와(立川) 시에 사는 전직 학원 강사 기쿠치 히데아키(菊池英昭·66) 씨. 그가 완성한 명부를 보면 식민지 시절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기쿠치 씨는 앞으로 이 자료에 해설을 곁들여 출판할 계획이다. 옛 일본군 전사자 명부는 일본 후생노동성이 보관하고 있지만 가족 외에는 볼 수 없다.

기쿠치 씨는 일본 외무성이 1971년 한국 정부에 전달한 ‘구 일본군 재적 조선인 사망자 연명부’를 한국의 국립대와 관련 유족회 등에서 복사한 뒤 사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름과 사망일시, 장소, 소속, 출신지별로 일일이 분류해 왔다.

일본이 한국 정부에 전달한 명부는 특별한 순서 없이 손으로 작성한 것이어서 중복이나 누락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는 이를 일일이 정리해 컴퓨터에 입력했다.

기쿠치 씨가 명부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1993년경.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이 제기한 피해보상 청구 재판을 알게 되면서였다. 끝없이 이름이 이어지는 전사자들이 모두 20대 젊은이라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대학을 나와 취직해 불편 없이 살고 있는 제 처지와 비교해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었을까, 한 사람씩 정리하다 보면 전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결심대로 역사적 사실이나 연결고리가 새롭게 떠오르기도 했다. 한 예로 명부를 정리하던 중 대부분 경상남도 출신인 113명이 모두 1945년 3월 10일 도쿄의 한 해군숙사에서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됐다. 기쿠치 씨는 이들이 도쿄대공습에 희생됐다고 해석했다. 그는 2006년 겨울 한국 출신 강제동원자의 가족으로 구성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 완성 직전인 명부를 넘겨줬고 이 명부 덕에 몇몇 유족이 육친의 소식을 알게 됐다. 한 유족은 고맙다며 소주 2병을 보내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한반도 출신 군인 군속은 모두 24만3992명으로 이 중 약 2만2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대부분은 기쿠치 씨의 명부에 포함됐지만 그는 “앞으로도 정확한 희생자 수를 계속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사히신문은 “‘잊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편집한 명부가 바다 건너 두 나라를 잇는 가교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by 100명 2008. 5. 28. 10:20

최초의 국기 수집자료 공개

기사입력 2008-05-2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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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깃대 처음엔 오른쪽"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정착한 현재의 태극기는 그 이전에 나온 태극기와 구도가 많이 다르다.

붉은색과 파란색이 교차하는 중앙 태극 문양은 그 교차 모양이 현재와는 반대인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주변 네 귀퉁이에 배치된 건(乾)ㆍ곤(坤)ㆍ감(坎)ㆍ리(離) 위치 또한 현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의 연구성과는 이런 의문의 일단을 깃대 위치의 변화에서 풀 수도 있다는 시사를 준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7일 서울 대우재단 제2세미나실에서 개최한 제243회 월례연구발표회에서 한 교수는 논문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박영효 태극기.1882)와 외아문 제작 국기(1884)의 원형 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를 통해 깃대 위치가 변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현재 태극기를 비롯한 각국 국기는 그 깃대는 왼쪽에 배치하고 깃발은 오른쪽에 두는 것이 관례지만, 태극기가 처음 제작돼 활용되기 시작한 1880년대 무렵만 해도 이와는 반대로 깃대가 깃발 오른쪽에 배치됐다고 한다.

그 근거로 한 교수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최근 발굴한 두 종류의 태극기 자료 즉, 1882년 11월 제작 박영효 태극기와 1884년 6월10일자로 조선 주재 영국 총영사 애스턴이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에게 보낸 '조선국기'(Corean National Flag) 등을 들었다.

이 중에서도 '조선국기'에는 태극기 오른쪽에 깃대가 명확히 표시돼 있다.

한 교수에 의하면 비단 이뿐만 아니라 같은 1880년대 작품인 '시사신보'라는 잡지에 수록된 조선국기 그림이라든가 유길준의 '상회규칙'에 수록된 '국기' 또한 같은 배치를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태극기가 그 이후 어느 시점부터 깃대 위치가 왼쪽으로 바뀐 것이다.

한 교수는 이런 깃대의 위치 변화가 태극기의 앞뒷면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주장에 대해 독립운동사연구소측은 "초기 태극기 문양이 지금 기준으로 언뜻 혼란스럽게 보이는 이유를 깃대 변화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박영효 태극기'..최초 국기 놓고 학계 논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박영효의 태극기'냐 `고려국기(高麗國旗)'냐.

최초의 국기가 어떤 것이냐를 놓고 학계의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1883년 3월 조선의 국기로 채택된 태극기는 수신사 박영효가 1882년 9월25일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원본이 전해지지 않아 태극기 제작 경위와 최초의 태극기 형태 등을 두고 여러 논란이 있어왔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7일 개최한 `최초의 국기 수집자료 보고회'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는 역사학자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 국기의 원형 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이른바 `박영효 태극기'가 국기로서의 자격을 갖춘 최초의 태극기라고 주장했다.

'박영효 태극기'는 박영효가 일본에 체류하던 중인 1882년 11월1일, 당시 일본 외무성 외무대보가 주일 영국공사에게 보낸 문서에 '한국의 국기가 될 기(a flag said to be The National Flag of Korea)'라는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 첨부돼 있다.

한 교수는 ▲고종이 외교고문에게 하사했던 데니태극기(1890년) 등 19세기말-20세기 초에 만들어진 태극기들과 모양이 유사한 점 ▲일본 정부가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에 보낸 공식 외교문서에 들어 있었다는 점 ▲태극기 안에 가로 세로 규격이 정확하게 명기된 점 ▲ 지금까지 태극기 원형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대청국속 고려국기'(大淸國屬 高麗國旗)와도 바탕색과 태극문양 속 동그라미를 제외하고 똑 같았던 점 등을 근거로 박영효 태극기가 최초의 국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박영효 태극기가 최초의 국기라는 점은 이처럼 명백한 만큼 최초 국기 논의를 끝내고 한 발 더 나아가 그 원형을 발견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자"고 주장했다.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이를 정면 반박했다.

김 교수는 "태극기는 조.미 조약 결과 만들어진 것으로 당사국인 조선과 미국, 양국의 교섭을 주관한 청나라가 협상의 주체였다. 일본은 객체일 뿐이다. 이에 따라 일본 측 자료는 방증자료는 될지언정 사실을 입증할 주요 자료는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반면 1883년 3월에 만들어진 고려국기는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포함돼 있었다. 조선 정부가 국기를 그려 청국에 보낸 것이다"라며 "고려국기는 조선 정부의 문서에 명기화 돼 있지만 박영효 태극기는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 보낸 외교문서에 게재돼 있다. 어느 것이 신뢰할 만한가"라고 반문했다.

고려국기의 명칭과 `태극문양 속 동그라미'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다.

한 교수는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태극기 중 음양 속에 동그라미가 있는 것은 고려국기 밖에 없다. 청국이 `대청국속 고려국기'라고 명칭뿐 아니라 모양마저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조선정부가 그려서 보냈다고 외교문서 첫머리에 나오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며 반박했다.
by 100명 2008. 5. 27. 22:58

산산조각 비파형동검 대전서 출토

기사입력 2008-05-27 07:02 |최종수정2008-05-27 08:53
산산조각 비파형동검
조선시대 무덤에서는 卍자문 동경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실질적인 청동기시대 개막을 이야기할 때 그 표지적인 유물로 평가되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대전 서남부지구 택지개발사업지구 예정지인 유성구 상대동 양촌마을에서 발굴됐다.

기존 비파형동검이 대체로 무덤에서 온전한 상태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산산조각이 난 상태로 발견됐다. 이는 무덤이 붕괴되거나 도굴되는 등의 과정에서 발생했다기보다는 무덤을 조성할 당시에 이미 여러 조각으로 동강난 채 시신과 함께 묻혔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백제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오선)은 한국토지공사 대전충남지역본부가 시행하는 택지개발사업부지에 포함된 상대동 65-9번지 일대 양촌마을 20만7천㎡를 지난 1월10일부터 발굴조사한 결과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각종 고분과 집터 등의 문화 흔적 58곳을 찾아냈다고 27일 밝혔다.

이 중에는 청동기시대 고분으로는 판돌을 이용해 무덤방을 조성한 석곽묘(石槨墓) 11기와 덮개만 판돌을 쓰고 무덤방은 맨땅으로 파서 만든 구덩이를 그대로 이용한 석개토광묘(石蓋土壙墓) 3기, 그리고 옹관묘 1기가 포함돼 있다.

비파형동검 출토 석관묘

비파형동검은 길이 158 x 폭 69 x 깊이 27㎝로 묘광(墓壙)을 마련한 3호 석관묘 내부 중앙 부근 동쪽 벽면에 치우친 곳에서 발견됐다.

박태우 실장은 "발견된 위치가 현재의 지표면에서 약 15㎝ 가량 내려간 곳이며, 10조각 이상으로 깨진 채 아래 위로 중첩된 상태로 어지럽게 출토됐다"면서 "일부 지도위원은 무덤이 조성된 뒤 어느 시점에 그것이 붕괴해 내리면서 동검이 조각났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발굴자의 시각에서는 원래부터 조각을 내서 매장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조사대상지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토광묘 중 7호묘에서는 불교의 상징인 '卍'이라는 문자를 도안한 범어 동경(梵語銅鏡)이 청동합 1점, 청동숟가락 1점 등과 함께 출토됐다.

조선시대 무덤의 청동합

조선시대 무덤에서 卍자 동경은 출토 사례가 그다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卍자경 동경

by 100명 2008. 5. 27. 08:59

제주 삼화지구서 청동기시대 유구 확인

(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제주시 삼화지구 택지개발사업부지에서 인근에 있는 국가사적 제416호인 삼양동선사유적 보다 앞선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됐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지난해 9월 27일부터 현재까지 제주시 삼양동 택지개발사업부지 중 삼양초등학교 남쪽 3만7천452㎡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집자리와 무덤, 소형수혈 등 540여 기의 유구가 확인됐다고 25일 밝혔다.

주요 유구로는 장방형 및 방형 주거지 47기와 삼양동유적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옹관묘 5기, 제주에서 처음 나온 토광묘 4기, 불을 태웠던 흔적인 소토유구 30기 및 콩으로 보이는 탄화곡물 등이 있다.

이밖에 공렬토기, 구순각목문토기, 직립구연토기, 단도마연토기 등 토기류와 토광묘에서 나온 적이 없는 유경식 마제석검 및 석촉 등 석기류, 방추자, 옥, 동물뼈 등이 출토됐다.

이 같은 유물의 조합상은 제주도에서는 처음 보이는 양상으로 지금까지 한반도 본토에 비해 시기가 상당히 늦은 것으로 알려졌던 제주도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한반도 본토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날 현장을 둘러본 이강승 충남대 고고학과 교수, 김성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이청규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등 지도위원들은 유적의 밀집도가 떨어진다는 점 등을 들어 발굴현장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고 일부 유구만 개발지구 내 공원으로 이전해 보존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by 100명 2008. 5. 25. 18:24

부여 송국리 유적 발굴

기사입력 2008-05-25 11:12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반도 중부 일대 청동기시대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표지처럼 꼽히는 부여 송국리 유적에 대한 한국전통문화학교의 제12차 발굴조사 결과 기존에 드러난 목책렬(木柵列)과 구상유구(溝狀遺構). 가운데를 가른 도랑 같은 곳이 구상유구이며 오른쪽 측면이 북측 목책렬, 왼쪽이 남측 목책렬이다.
by 100명 2008. 5. 25. 11:21

무너진 국보 1호… 2013년 ‘부활’

방화로 숯덩이가 된 숭례문이 20일로 소실 100일을 맞았다. 지난 2월 10일 숭례문이 전소됐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만 해도 슬픈 목소리와 눈망울이 반도 땅을 덮었다. 서울 시민은 물론 멀리 삼남 지역인 충청 경상 전라에서도 애도 인파가 몰려들었다. 금세 울음 방울을 터뜨릴 것 같은 유치원생부터 망연자실한 표정의 팔순 노인까지 숭례문에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복원 과정을 감시하고 더 이상 숭례문을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석 달이 흐른 지금 숭례문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는 눈에 띄게 낮아졌다. 굳이 시간을 내서 찾았던 삼남의 상경 행렬은 고사하고 서울 시민들도 무심하게 주변을 지나칠 뿐이다.

19일 오후에 찾은 숭례문 인근에서는 참사 당시에 쌓여 있던 꽃과 편지를 접할 수 없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은 ‘흉물’로 변해버린 국가의 ‘상징’을 애써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일상에 파묻혀 사는 도시민에게 제모습을 찾지 못한 숭례문은 ‘잊혀진 주인공’처럼 멀리 비켜나 있었다. 가림막 속에 가려져 있어 안을 들여다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현장 보호용 아크릴 지붕이 2층 지붕을 대체하고 있었고, 숭례문은 속 깊은 상처를 가림막 속에서 숨기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일할 때 설치하는 임시가설물인 비계가 숭례문 외부를 꼼꼼하게 둘러싸고 있었고, 내부는 버팀목들이 지탱하고 있었다. 숭례문 핵심 기둥인 고주(高柱·높은 기둥) 4개는 반 정도가 불에 그슬린 채 그대로다. 화재로 90% 가까이 손상된 누각 2층은 뻥 뚫려 있었다. 수습한 부재와 기와, 불에 탄 벽돌 등은 앞마당의 비닐 천막 안을 채운 상태다. 문화재에 준하는 부재는 경복궁 안의 부재보관소로 옮겨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림막 밖의 시민들이 애써 시선을 두지 않은 것은 덧난 상처를 일부러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숭례문 전소가 어디 단순한 생채기던가. 숭례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거나 잊혀지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국민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문화재청은 최근 ‘숭례문 복구 추진 자문단’을 위촉하고 청내에 복구추진단을 설치하며 숭례문 복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숭례문이 예전의 모습을 찾으려면 2013년 원단까지 기다려야 한다. 복원은 3단계 과정으로 추진된다. 지난 8일부터 이달 말까지 현장에서 수습한 부재 3000여점을 경복궁 부재보관소로 옮기고(1단계), 2010년까지 발굴과 고증·설계작업을 끝내고(2단계), 2010년부터 공사(3단계)에 들어간다.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문화재 재활 전문가들은 복원을 낙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고주의 윗부분을 이어 쓰는 전통적인 방법을 도입하면 크고 굵은 목재인 대경목을 사용하지 않아도 돼 목재 수급이 보다 원활해진다”며 “원래의 목재를 계속 사용하기 때문에 원형을 많이 남길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범정부 차원의 협조체제는 아직도 미흡한 상황이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복구에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는 200억원 이상의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다. 인력 수급도 원활한 편이 아니다. 문화재를 경쟁력 강화의 장애요인으로 생각하는 시각도 여전하다.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최근 정부를 중심으로 번진 경제개발 논리에 밀려 문화유산이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며 “문화유산이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라는 인식의 틀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산 타령만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부의 각성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by 100명 2008. 5. 19.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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