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49>베트남의 심장 호찌민시
[세계일보 2005-12-01 17:30]

베트남 남부에는 한때 우리가 ‘월남’이라 부르던 나라가 있었다. 참혹한 내전 속에서 요동치다가 30년 전 소멸한 나라. 그 월남의 수도였던 곳이 사이공이고 현재는 호찌민이라 부른다. 호찌민시에는 예전의 월남 대통령이 살던 통일궁과 미군의 전쟁 범죄를 전시한 전쟁기념관도 있으며 아름다운 노트르담 성당도 있지만, 역시 호찌민시를 호찌민시답게 만드는 것은 오토바이와 시클로 물결이다. 끊이지 않는 그 행렬은 마치 강물처럼 호찌민시에 넘실거리고 있다. 그리고 하얀 아오자이 자락을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 같은 여학생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면 ‘과연 이 나라가 20세기의 가장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나라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화롭다.

1993년 3월부터 지금까지 다섯 차례를 방문하는 동안 이 도시는 급격하게 변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한국을 ‘남주띤(남조선)’이라 불렀고 호찌민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행허가증을 받아야 했으며 거리 곳곳에는 빈곤과 매춘이 배어 있었다. 개방 정책을 취한 직후였는데 거리의 시클로 운전사들은 “헬로, 맛사(마사지), 맛사”를 외쳤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가보니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중심지 동코이 거리의 허름했던 건물들은 예쁜 기념품 상점과 카페, 식당가로 탈바꿈해 있었다. 여행자들도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며, 남주띤이 아닌 한꿕(한국)의 영화배우 장동껜(장동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해서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 나오면 될지도 모른다’는 농담이 한국 교포들 사이에 퍼질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한류의 물결은 지금은 더욱 넘실거리고, 베트남과 호찌민시는 해가 갈수록 발전했다. 몇 년 있으면 경전철이 생긴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또 이미 호찌민시의 집값은 서울의 변두리 집값과 맞먹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런 변화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시클로다. 자전거를 개량한 앞바퀴 두 개, 뒷바퀴 하나인 시클로는 낭만적이다. 햇빛 가리개가 만들어주는 그늘 속에 몸을 반쯤 뉜 채 느긋한 세상의 방관자가 되어 거리를 바라보노라면 둥둥 떠가는 것만 같다.

시클로는 원래 인력거에서 왔다. 일본에서 ‘진릭샤’라고 불리던 인력거를 자전거와 연결한 것이 사이클 릭샤다. 동남아에 퍼져 나가면서 조금씩 변형되었고 나라마다 이름이 다른데, 베트남에서는 시클로(cyclo)라 부르고 있다. 이제 시클로는 택시의 등장과 오토바이의 증가로 급격하게 줄었고, 거리의 교통을 방해한다고 출입을 제한당하는 곳이 많아졌다. 베트남의 아까운 문화 하나가 그렇게 소멸되는 중이다.

베트남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쌀국수 ‘퍼(Pho)’다. 퍼의 원조는 하노이다. 유래에 대해서는 설이 많은데,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19세기 하노이를 지배했던 프랑스 귀족들이 소고기만 먹고 뼈를 버리자 가난한 베트남인들이 그 뼈를 고아서 국물을 내고 쌀국수를 말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점점 남하하면서 베트남 전역에 퍼졌다.

세계 각국에 퍼뜨린 사람들은 월남 패망 후 미국, 호주 등지로 건너간 ‘보트 피플’들이었다. 그것이 미국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크게 인기를 끌다가 체인점이 한국에도 상륙했는데, 서양인들 입맛에 맞게 조금 변형시킨 것이다.

쌀국수 퍼는 북쪽과 남쪽의 맛이 조금 다르다. 북쪽의 것을 퍼박, 남쪽의 것을 퍼남이라고 하는데, 현재 한국에서 먹는 쌀국수는 대개 퍼남의 영향을 받았다. 남쪽은 숙주 나물, 파슬리 등 많은 야채와 생선 발효 소스인 ‘느억맘(nuocmam)’을 넣고 또 향신료 고수(코리앤더)를 넣는다. 북쪽은 느억맘 대신 식초 절임 마늘과 고추장 소스를 타서 새콤하면서 매콤하다.

원래 쌀국수는 소고기가 얹힌 것을 말하는데, 점점 발전하여 소고기 얹힌 것을 퍼보(Pho Bo), 닭고기가 얹힌 퍼가(Pho Ga)로 나누고 점점 여러 종류가 나왔다고 한다.

맛있는 쌀국수를 먹은 후 카페에 앉아 베트남 커피를 마시며 흘러가는 자전거와 오토바이 물결을 바라보노라면, 문득 빈곤해보이는 사이공은 삶의 열기와 여유가 넘쳐 흐르는 풍요한 도시로 다가오게 된다.

여행 작가

◇왼쪽부터 노트르담 성당, 시클로, 메콩강의 수로

◇왼쪽부터 베트남 여인들이 쓰는 삿갓모자 ‘논 라’, 아오자이 차림의 여학생들, 거리의 카페

■여행 에피소드

호찌민시에 처음 들렀을 때 한나절 동안 시클로를 세내어 돌았었다. 시클로 운전사들은 바가지를 많이 씌우는 편이어서 처음에는 경계했는데, 나이가 55살이라는 그는 간단한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인상이 좋아 보였다. 이곳저곳을 돌아본 후, 저녁나절 거리의 카페에서 음료를 마셨다. 그는 월남 정부군 병사였는데 통일 후 1년 동안 재교육을 받은 뒤 17년째 시클로를 몰고 있다며 회한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호찌민을 좋아합니까?” 나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한동안 나를 쳐다보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것이고, 그가 나쁜 사람이라면 나쁜 것이지. 내말 알아듣겠어요?”

선문답 같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했는데, 그는 어금니를 꾹 깨물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기구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끼여버려 자신의 삶이 다 뒤틀린 그로서는 호찌민이 좋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12년 전의 일이니까 지금 그의 나이 67세. 그는 은퇴했을까, 아니면 어디선가 아직도 시클로를 운전하고 있을까.

◇쌀국수 집, 퍼 2000

■여행 정보

동코이 거리에 트윈룸에 20∼30달러짜리 중급 호텔부터 최고급 호텔들이 몰려 있다. 그곳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팜응우라오 지역의 데탐 거리에는 3∼4 달러의 도미터리, 싱글룸이 10달러 안팎인 저렴한 호텔들이 많이 있다. 아쉽게도 시클로는 점점 사라지고 있고, 그나마 남은 것들은 바가지가 심하다. 미터기 택시를 타면 저렴하고 안전하게 시내에 다닐 수 있다. 쌀국수 집은 너무나 많은데 여행자들에 인기 있는 곳 중의 하나는 벤탄 마켓 근처에 있는 ‘퍼 2000’. 대중식당인데 2000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퍼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가는 바람에 유명해졌다. 매우 맛있다. 퍼보가 1만8000동(약 1300원).

by 100명 2007. 4. 13. 12:42
[이지상의 세계문회기행]<50>베트남 꾸찌땅굴
[세계일보 2005-12-15 20:51]

베트남전은 기가 막힌 ‘전쟁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호찌민(사이공)시 서북쪽 75㎞ 지점에 있는 꾸찌(Cu Chi)땅굴은 전쟁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유적지다. 총 길이 약 250㎞의 땅굴은 이미 프랑스와의 전쟁 때(1948∼54) 48㎞ 정도 만들어졌다가 미군과 싸우면서 연장됐다. 66년 미군 제25 보병사단이 꾸찌 마을에 주둔했는데, 밤마다 미군을 습격하던 베트콩은 이 땅굴 속으로 숨어버렸다.

현재는 관광지가 되었다. 정글 속을 안내하던 안내원이 갑자기 관광객들에게 땅굴 입구를 찾아보라고 했다. 관광객들의 눈에는 도저히 분간이 안 되었는데, 안내원이 땅 색깔의 나무 뚜껑을 들어올리자 가로 70㎝, 세로 50㎝ 정도의 구멍이 나타났다. 몸집이 큰 미군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고 베트콩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구멍이었다. 계속 걸어가 보니 대나무 숲이 우거진 땅에는 보일락말락한 조그마한 공기 구멍도 보였다. 군견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베트콩은 미군이 사용하는 비누를 써서 군견들의 코를 교란시켰다고 한다.

드디어 안내원을 따라 땅굴 속을 기어 들어가니 군데군데 전등을 설치해 놓았는데 머리를 약간만 들어도 부딪칠 정도로 좁았다. 그런데 그 굴은 베트콩, 즉 베트남민족해방 전사들이 실제 사용하던 땅굴을 관광객을 위해 두 배 크기로 확장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동굴이 얼마나 작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꾸찌 땅굴은 호미와 망태기를 이용해서 팠다는데, 토질이 연해서 팔 때는 쉽지만 막상 파고 나서 공기와 접촉하면 딱딱하게 시멘트처럼 굳어버린다고 한다.

◇땅굴 투어를 마친 여행자들.(사진 위), 돈을 내고 총을 쏘는 관광객들.

땅굴을 기어가는 동안 숨이 막혀 오고 입에선 단내가 났다. 한참을 기어가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환자 수술실이라는데, 꾸찌 땅굴 안에는 그 외에도 여러 용도의 사무실, 방, 취사장 등이 있었다. 다시 굴을 기어가자 약 5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나왔다. 작전 회의실이라 했다. 책상이 있었고 뒤에는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뜻의 구호가 걸려 있었다. 호찌민이 늘 주장하던 말로, 그 당시 민족해방전선 전사들의 신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전 회의실 구석에 함정이 있었다. 가로, 세로 약 1m 정도의 구멍 속에는 날카롭고 길쭉한 죽창이 꽂혀 있어서 바로 위의 입구로 들어오는 침입자들은 모조리 그 함정으로 떨어져 죽게 되어 있었다. 죽창이나 쇠꼬챙이에는 파상풍을 일으키도록 동물의 소변 등이 묻혀졌다고 한다.

구석에는 매우 좁은 땅굴이 보였는데 적이 침투하면 베트콩은 그 굴을 통해 지하 2, 3층의 통로로 내려와 멀리 떨어진 사이공 강변의 출구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니 미군들은 땅굴 입구를 발견하기 힘들었고, 발견해도 들어가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더라도 함정에 빠지기 일쑤였다.

결국 미군은 고엽제를 살포했다. 금방 나뭇잎이 시들어서 다 떨어지고 나면 베트콩은 숨을 곳이 없기에 소탕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미군은 성공하지 못했다. 후일 고엽제로 수많은 피해자만 남긴 미군은 1960년대 말 B-52(전략폭격기)로 꾸찌 마을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초토화 작전으로 많은 땅굴이 함몰되어서 베트콩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이 무렵부터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던 미군은 끝내 이곳의 베트콩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다.

다시 땅굴을 기어가니 5∼6평 남짓의 공간이 나왔다. 사령관실이었다. 구석에 함정이 있었고 천장에는 지금도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이 박쥐는 모기를 먹고 사니 땅굴 속에 숨었던 베트콩은 모기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땅굴 안에서 밥을 할 경우 연기가 3∼4개의 땅굴 공간에 머물다 조금씩 흩어져 나가게 해 밖에서는 연기를 쉽게 감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땅굴 견학을 마치고 나면 돈을 내고 사격장에서 총을 쏠 수 있다.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들과 싸웠던 미국인과 한국인 등이 돈을 내고 총을 쏘는 것이다. 초현대식 무기를 갖고 폭탄을 퍼붓고 고엽제를 뿌린 미군이 가장 원시적인 호미와 망태기를 들고 저항한 베트콩을 이기지 못한 그 현장은 이제 20세기의 신화가 되었다.

비참한 전쟁 속에서 이런 ‘문화유산’이 탄생한다는 것이 씁쓸하지만 이제 베트남 정부는 이런 것조차 돈을 벌기 위한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전쟁을 딛고 일어선 베트남인들의 끈질기고 현명한 면을 여기서도 엿볼 수가 있었다.

여행작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꾸찌 땅굴 입구, 꾸찌 땅굴 안, 땅굴 안의 함정, 꾸찌 땅굴에서 투쟁하던 베트콩 마네킨.

■여행 에피소드

1993년 처음 호찌민시에 갔을 때 ‘꽁비엔 따이한(대한공원)’이란 곳에 갔었다. 1972년 7월 27일 한국군이 지은 팔각정과 공원은 평화공원이란 이름으로 바뀐 채 방치되어 있었다. 팔각정 2층에는 말라 비틀어진 인분만 즐비했다. 대충 돌아보고 나오는데 웬 30대 초반의 베트남 사내가 접근해 왔다. 내가 ‘따이한’이라는 사실을 알자 사내의 안색이 변했다. 흥분한 사내는 내 코앞에다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소리치는데, 머리로 받을 기세였다. 침이 얼굴에 튀겼고, 그는 계속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나는 일절 대꾸하지 않고 꾸중을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사내는 한참만에 내 앞에다 침을 뱉고는 사라졌다. 착잡했다. 옆에 있던 시클로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그 사내의 형이 예전에 한국군에게 죽었다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뭔가 사연이 있지 않고는 처음 보는 이에게 다짜고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그의 형은 베트콩이었을 것이다.

그 후 몇차례 호찌민에 가는 동안 베트남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점점 좋아져서 지금은 한류의 물결이 흐를 정도다. 하지만 베트남 여행을 하다 보면 전쟁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되니 각별히 언행에 조심해야 한다.

■여행 정보

꾸찌 땅굴은 혼자 가기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대개 여행자 숙소가 많이 모여 있는 데탐거리에 있는 현지 여행사의 투어에 참가하는 것이 좋다. 대략 5달러 남짓이면 된다. 그 외에도 메콩강의 정글 투어, 베트남 민족종교인 까오다이(Cao Dai)교 사원 투어 등이 있다.

by 100명 2007. 4. 13. 12:41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52>베트남 중부도시 호이 안
[세계일보 2006-01-05 17:03]

베트남의 중부에 호이 안(Hoi An)이란 도시가 있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30㎞ 떨어진 곳에 있는 고풍스런 도시로,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구시가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먼 옛날 참파(Champa) 왕국의 흔적과 중국인, 일본인들의 자취가 잘 보존되어 있다. 신시가지는 번잡스럽지만 옛 가옥들이 모여 있는 강변의 구시가지는 세월의 은은한 향기가 물씬 배어 있는 목조 가옥들과 그것을 개조해서 만든 조그만 호텔, 식당, 미술품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다.

호이 안은 베트남에서 중국 화교들이 처음 정착한 곳으로 푸젠성향우회관, 광둥향우회관 등은 물론 수많은 중국풍의 고가가 남아 있다. 떤끼 고가(Nha Tan Ky), 풍훙 고가(Nha Co Phung Hung) 등 약 200년 전에 지어진 목조 가옥들은 중국풍에 베트남·일본식이 가미되어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도 호이 안 역사박물관, 관운장 사당 등 중국의 정서가 많이 보이는 유적지들이 있다.

일본인의 자취가 서린 ‘일본교’도 있다. 1539년에 중국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 사이에 만들어진 다리인데, 1637년 도쿠가와 바쿠후가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자 일본인들이 철수했고, 2차 세계 대전 후에 다시 나타난 일본인들은 상인들이 아닌 군인들이었다.

구시가지 바로 옆에는 투본강이 흐른다. 나룻배 몇 척이 떠 있는 한가로운 분위기지만, 호이 안이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던 시절인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는 번잡스러웠을 것이다.

호이 안이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한 이유는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28년 북쪽의 하노이에서 일어난 레 러이(黎利)는 명나라의 지배를 물리친 후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한 레 왕조(1428∼1788), 즉 다이비엣(大越)이란 나라를 세웠다. 이 왕국은 16세기 중반에 찐씨가 지배하는 북부와 응우옌씨가 지배하는 남부로 분단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가가 들어선 거리, 풍흥 고가의 내부, 야자수 그득한 투본강 줄기, 민속공연

유럽인들이 베트남을 방문하기 시작한 때는 이 무렵이었다. 1511년 포르투갈 사람들은 말레이시아의 서부 해안 도시 말라카(멜라카)를 점령했고, 1540년에는 베트남 중부 해안의 호이 안으로 와 교역했는데 이곳을 팔리푸(Falifo)라 불렀다. 당시 호이안은 응우옌씨의 대외 무역항으로 포르투갈뿐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은 물론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 각지에서도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호이 안의 전성기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주민들의 상호 왕래가 금지되자, 외국에서 온 상인들은 남북 간의 교역을 통해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또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직접적인 무역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호이 안을 통한 중개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번성하던 호이 안도 쇠퇴했다. 19세기 말부터 투본강에 실려온 침적토가 해안에 쌓이기 시작했고, 결국 바다가 너무 얕아져 큰 선박이 들어올 수 없게 되면서 국제무역항으로서의 명맥이 끊겼다.

대신 부근의 다낭이 국제항구로 등장한다. 한국도 이곳과 인연이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의 해병대인 청룡부대는 1967년 12월부터 약 5년 동안 호이 안 일대에 주둔했다. 다낭과 호이 안의 중간에 대리석 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호이 안까지의 도로를 청룡부대가 건설했다.

한때 무역항으로 영광을 누렸고 또 전쟁의 상흔이 남은 호이 안은 이제 관광도시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전통 음악과 활기찬 춤이 어우러진 민속공연도 하고 밤이 되면 고가옥들에서 불을 밝힌 예쁜 등이 빛나는데, 마치 몇 백년 전의 흥청거리던 밤거리로 돌아온 것만 같다.

또 다른 호이 안의 매력은 값싼 옷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디자인이든 요구하면 하루 만에 뚝딱 만들어주는 옷집들이 매우 많아서 서양 여행자들 중에는 십수 벌씩 해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많이까지는 아니어도 1만∼2만원에 중국 혹은 베트남풍의 옷을 한두 벌씩 해 입는 것도 즐거운 문화체험일 것이다.

여행작가

◇왼쪽부터 고가를 개조해 만든 구시가지의 기념품가게, 호이 안의 옷가게, 대나무 조각

■여행 에피소드

똑같은 장소라도 어떤 분위기,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처음에 호이 안의 구시가지에 갔을 때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아름다운 도시를 수없이 보아온 사람으로서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나중에 한가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구시가지를 걷자 작은 아름다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갖가지 표정의 탈, 예쁜 등,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이 그려진 그림, 창틀에 앉아 책을 펴고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있는 여인, 가게에 앉아 신문을 읽는 여종업원, 재봉질을 하는 여인, 고깔 모자인 ‘논라’를 쓰고 걸어가는 중년 여인 그리고 골목길을 스쳐 가는 바람 등 거리에 숨어 있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정적인 베트남 음악으로 시작되어 어느새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이어지더니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으로 바뀌었다. 맞은편에서 오던 서양 커플이 그 감미로운 음악에 취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그 풍경과 음악에 도취하여 같은 길을 뱅뱅 돌았다.

이 도시의 진정한 매력을 맛보려면 급하면 안 된다. 마음을 한적하게 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거리의 풍경은 그저 낡고 평범한 정물화처럼 다가올 뿐이다.

■여행정보

일단 다낭까지 간 후 그곳에서 시외버스, 여행자 버스, 택시, 세욤(오토바이) 중에서 선택하면 된다. 호이 안은 구경하는 시스템이 특이하다. 박물관도 여러 곳 있고 중국에서 온 화교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향우회관도 여럿 있으며 오래된 집들도 여러 채가 있다.

또 전통 예술공연도 볼 수 있는데 이걸 개별적으로 표를 파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 중에서 하나, 향우회관 중에서 하나, 고가 중에서 하나, 예술 공연 중에서 하나, 그리고 기타 중에서 하나를 볼 수 있는 종합입장권을 사야 한다.

호이 안 거리에 흐르는 음악은 수요일, 토요일에만 나온다. 오전 8시에서 11시, 오후 2시에서 4시, 그리고 오후 6시에서 9시에 흘러나오니 이런 낭만을 맛보려면 그 시간에 맞추면 된다.

by 100명 2007. 4. 13. 12:40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53>인도 남부지방 칸치푸람
[세계일보 2006-02-02 16:48]

인도는 우리와 너무도 달라보인다. 인도에서 가장 충격적인 모습 중 하나는 소가 거리 한복판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광경 아닐까. 경적을 울려대는 차 앞에 앉아 있는 소의 태연함과 그 사회적 비효율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또 밥 한 끼는 굶어도 꽃을 사서 힌두교 사원에 바치는 사람들, 길에서 곧 사라질 신의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거리의 화가 등 우리의 가치관으로는 쉽게 이해 못 할 풍경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와 너무도 흡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곳도 인도다. 남인도에 있는 타밀나두주의 칸치푸람이란 곳을 여행할 때였다. 칸치푸람은 동남부의 대도시 첸나이(얼마 전까지 마드라스로 불렸다)에서 서남쪽으로 약 77㎞ 떨어진 곳이다. 그곳에는 걸출한 고대 힌두교 사원들이 있어서 천 개의 사원을 지닌 도시로 불렸다. 이곳은 중국에 선불교를 전해준 달마 스님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달마 스님은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 중국 광저우에 도착해 소림사까지 가서 면벽 수도를 하다가 중국에 선불교의 지혜를 전파하게 된다.

이런 유서 깊은 도시에 있는 사원들을 돌아보다 우연히 타밀족 사내를 사귀었다. 타밀족은 인도 동남부 타밀나두주와 스리랑카의 북부에 살고, 동남아시아에도 살고 있다. 타밀족은 남인도에 퍼져 사는 드라비다족의 일부로서 약 5000년 전에 현재 파키스탄 남부 지역에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을 일으켰으나,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북쪽 유목민인 인도 아리안족이 침입하자 남부로 이주했다. 침입자인 아리안족은 현재까지도 북인도에 살고 있는데, 주로 피부가 희고 기질이 공격적이며 힌디어를 쓰고 있다. 반면 남인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드라비다족은 피부가 검고 코가 낮으며 기질이 온순한 편이다. 이들은 남인도로 쫓겨 내려온 후 흩어져 살았는데 타밀어, 텔루구어, 칸나다어 등 남인도 사람들이 쓰는 언어 대부분이 드라비다어에 속한다.

타밀족 사내와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같이 사원을 돌아보았다. 힌두교 사원은 내부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만 했다. 입구에서 본전까지는 왕모래가 깔려 있는데, 6월 한낮의 불볕에 달구어져서 맨발로 가자니 몹시 뜨거웠다. 조금 걷다 보니 너무도 뜨거워 몇 걸음 걸어가다 가이드북을 내려놓고 그 위에 올라가 발을 식히고 있었는데 앞서가던 사내가 이렇게 외쳤다.

“헤이 코리안, 잉게 와!” 처음에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는 신전에 가서 조각을 가리키다가 이번에는 “헤이, 코리안, 잉게 봐!”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느낌이 이상해서 지금 무슨 말 했느냐고 물어보니, ‘잉게 와’는 ‘이리 와’라는 뜻이고, ‘잉게 봐’는 ‘이것 봐’라는 뜻이라 하지 않는가. 머리를 한 대 쾅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와’ ‘봐’ 등의 기본적인 동사가 우리말과 같다니…. 그 후 구경도 마다하고 그와 함께 낱말을 맞추어보았다. 그랬더니 엄마는 ‘엄마’, 아빠는 ‘아빠’, 아버지는 ‘아버치’, 쌀은 ‘쏘루’, 나는 ‘난’, 너는 ‘니’, 네가 봐는 ‘니봐’, 강은 ‘강가’, 메 혹은 산은 ‘말레이’, 풀은 ‘풀’, 형은 ‘언네’라 했다.

사내는 힌두교 사원을 설명하다가 예전에 이 사원에서 킹(King)이 호령했다고 영어로 말하다가 갑자기 ‘왕’이라 했다. 왕이 무어냐고 물으니 킹이라 하는 게 아닌가. 힌두어로는 킹을 ‘라자’라고 하지만 타밀어로는 ‘왕’이라는 것이었다. 왕은 한자어에서 온 발음인 줄 알았는데 타밀족도 왕이라는 말을 쓰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언어학자 강길운 박사가 쓴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새문사)’라는 책을 보니 고대 가야에서 지배층이 쓰던 말들은 거의 드라비다어이며, 이 드라비다족 언어가 한국어에 약 1300여자나 남아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이빨은 ‘빨’, 날짜를 뜻하는 날도 ‘날’이며, 국가를 뜻하는 나라와 비슷한 ‘나르’라는 단어는 땅이란 뜻이라 했다. 또 ‘가야’는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란 뜻인데 실제로 인도에는 가야란 지명이 남아 있고, 근교에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야라는 도시도 있다. 물론 한국어의 많은 단어는 북방에서 온 것이 틀림없지만, 일부분은 저 먼 인도의 드라비다 언어에서 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도인은 결코 우리와 먼 사이가 아니다. 명상과 요가와 신비로 알려진 인도지만 이 평범한 삶 속에서 밝혀지는 작은 진실들이 오히려 더 놀랍고 반갑게 다가오는 땅이 인도다.

여행작가

◇힌두교 사원의 조각(왼쪽), 사원에서 만난 타밀족 아이들.

◇크리슈나신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왼쪽), 힌두교 사원과 순례자들.

◇칸치푸람의 힌두교 사원.

■여행 에피소드

6월 말 첸나이의 기온은 숨도 못 쉴 정도였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에어컨도 없는 방으로 들어가니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결국 에어컨이 있는 방으로 바꾸었는데 냉장고가 있었다. 물이 든 병에는 ‘히말라야…’라고 쓰여 있어서 반가웠다. 때마침 들어온 종업원에게 마셔도 괜찮은 생수냐고 묻자 종업원은 ‘노 프로블럼’이라고 자신있게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그 물을 마신 뒤 3일간 죽다 살아났기 때문이다. 배탈이 시작되면서 거의 화장실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기진맥진해서는 ‘예전에 인도에 전도하러 왔다가 물을 잘못 마셔서 죽은 기독교 선교사들처럼 죽는구나’ 하는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3일 만에 살아났는데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그러나 이런 것은 통과의례였던 것 같다. 그 후에는 조심하기도 했지만 음식이나 물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여행정보

첸나이에서 칸치푸람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칸치푸람에서는 힌두교 사원이 널리 퍼져 있기에 사이클 릭샤를 대절해 돌면 편하다. 첸나이나 칸치푸람에서는 밀스(meals)라고 불리는 음식들이 있는데, ‘탈리’라고도 한다. 밥, 요구르트, 각종 야채를 손으로 비벼서 먹는 음식으로, 북인도에서는 식기에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남인도에서는 바나나 잎에 나온다. 처음에는 먹기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매우 맛있는 음식이다.

by 100명 2007. 4. 13. 12:39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54>힌두교 성지 인도 바라나시
[세계일보 2006-02-16 17:21]

바라나시는 인도의 힌두교도들에게는 성지 중의 성지다. 시의 북쪽과 남쪽에서 흐르는 바루나(Varuna)강과 아시(Assi)강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지만, 바라나시를 감싸안는 강은 히말라야의 눈 녹은 물을 품고 흐르는 갠지스강이다. 바라나시는 약 3500년 동안 힌두교도의 성지이자 도시로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으며, 현재는 인도 최고의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삶과 죽음, 삶에 대한 열망과 체념, 아름다운 초월과 비참한 현실이 어우러져 있다.

아침이 되면 전국에서 모여든 힌두교 순례객들이 배를 타고 강을 가로지르며 찬가를 부르고 기도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시는데, 그렇게 하면 갠지스 강물이라는 성수에 의해 죄가 사하여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의 열정이 있는가 하면, 껍질을 반쯤 벗긴 나뭇가지로 이빨을 닦는 사람, 웃고 떠들며 아침 수영을 즐기는 사람, 강변의 돌에 옷을 내리치며 빨래하는 사람 등 무심하게 삶을 이어가기도 한다.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갠지스강

그런가 하면 죽음과 비참한 현실이 펼쳐지기도 한다. 바라나시 성벽의 골목길에는 늘 황금색이나 붉은색 등의 아름다운 천에 곱게 싸인 시신들이 들것에 들려 화장터로 옮겨지는데, 시신을 나르는 인부들은 이렇게 외친다.

“스리 람 람 삿다 헤이, 스리 람 람 삿다 헤이.”

이 말은 “성스러운 라마, 라마, 그는 모든 것이 옳다. 헤이”라는 뜻으로 장례를 치르러 갈 때 늘 외치는 소리다. 라마는 인도인의 영웅이며 비슈누신의 화신이기도 하다. 힌두교도들은 죽음과 파괴의 신인 시바신이 손바닥에서 만든 불이 3500년간 꺼지지 않은 채 타고 있다고 믿는다. 바라나시에는 수천년간 이어온 화장터가 두 곳 있다. 마니카르니카 가트(Mankarnika Ghat) 화장터는 돈 많은 이들이 화장되는 곳이고, 상류 쪽 하리 찬드라 가트에는 돈 없는 이들이 태워지는 화장터가 있었는데 전기로로 시설이 바뀌었다. 그 화장터에서 태운 시신의 잿가루가 둥둥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가끔은 화장하지 않은 어린아이의 시신이 비닐봉지에 싸인 채 강물에 떠내려오기도 하며, 민물 돌고래가 갑자기 솟구치기도 한다.

◇힌두교 사두(힌두교 수행자)

빈민들의 화장터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는 빨래하는 이들이 있다. 빨래가 직업인 이들은 옷을 돌에 내리치며 빨래를 하는데, 화장터의 잿가루가 간간이 섞여 든 더러운 물이건만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의무와 돈벌이에 충실하다. 그 중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은 열 살도 안 된 아이들도 보여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다. 그 아이들은 평생 그렇게 세습된 직업을 이어받아 그 길을 갈 것이다. 가끔은 병자들이 강변에 누워 있고 다 죽어가는 이들 주위에 아이들이 몰려들어 시시덕거리며 짐승 구경하듯이 쳐다보기도 한다. 밤이 오면 거지와 사두(힌두교 수행자)와 소들이 강변에 누워 안식을 취하고, 적막 속에서 갠지스강은 고요히 흐르기만 한다.

강물에 들어가 목욕하면 정화돼

그래서 처음 바라나시에 온 사람들 중에는 몸서리를 치는 이들도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강의 풍경과 관념 속에서 바라보는 철학과 종교는 아름답지만, 강변의 현실은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 현장 앞에서는 감상적인 삶의 허무나, 생의 집착을 버리라는 교훈도 쉽게 읊조릴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은 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수록, 여러 번 가볼수록, 혹은 마음을 턱 내려놓고 바라볼수록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바라나시에는 공간의 족쇄와 시간의 사슬에 묶여 있던 존재가 스르르 풀려 나가는 묘한 혼돈의 기운이 서려 있다.

수천년 이어온 화장터에도 빈부격차

끝없이 이어진 성벽 안의 미로를 하염없이 걷거나, 강변에 누워 무심하게 강물을 바라보면 문득 삶이 꿈 같고 자신이 환영처럼 보이는 묘한 느낌을 갖게 된다. 새벽에 수행자처럼 맨발로 강가로 걸어나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 문득 세상은 삶과 죽음이 어우러진 구천의 세계로 다가오기도 한다. 강변 이쪽의 이승에서는 죽음이 연기로 피어오르고, 강 건너 저승에서 떠오른 해는 세상을 다시 밝힌다. 그리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갠지스강에서 사람들은 두 손 모아 합장을 한 채 빌고 있다.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이 삶으로 순환되는 순간, 추한 것, 더러운 것, 불결한 것, 아름다운 것, 깨끗한 것, 신성한 것은 모두 이름을 잃고 하나의 실재 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 세상은 한없이 성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서 바라나시는 지옥과 극락과 혹은 구천의 세계를 오가는데, 그 묘한 매력 때문에 오늘도 바라나시에는 순례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여행 작가

◇갠지스강에서 성수로 몸을 씻는 이들(왼쪽), 갠지스강 풍경

◇빨래하는 아이(왼쪽), 힌두교 성직자

◇걸인들(왼쪽), 바라나시 축제에 참가한 여인

■여행 에피소드

바라나시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다 보니 사고도 많이 난다. 1994년 초에 한국인 청년 하나가 실종됐다. 약 1개월 인도 여행을 한 이들은 조금 익숙해졌다고 방심했는지 바라나시에서 청년들을 사귀었고 그들이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로 놀러가자는 청을 받아들였다.

강 건너에 가서 그들이 건네준 요구르트를 마셨는데 그만 정신을 잃었다. 그 중의 한 명이 깨어보니 친구는 간데없고 자신만 남겨졌다. 결국, 경찰이 나서고 한국인 배낭 여행자들이 나섰으며, 나중에는 가족들이 직접 와서 찾아 보았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아마도 약에 덜 취한 한 청년이 저항하자 인도 사내들이 죽인 후 갠지스강에 던진 게 아닐까 하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현재 바라나시에서는 이런 강력사건들이 종종 발생해서 해만 떨어지면 여행자들은 거의 강변에 나가지 않고, 외출할 때도 여럿이 같이 나가는 경우가 많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소문이 안 좋은 관광지에서는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침과 낮에는 안전하다.

■여행정보

뉴델리에서 기차를 타면 약 13시간 걸린다. 또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까지 버스가 다니는데 약 13시간 걸린다. 또 바라나시에서 네팔의 카트만두까지 가는 1박2일짜리 버스도 있다. 보트 투어를 하고 싶다면 새벽에 갠지스강으로 나가면 뱃사공들이 달려든다. 나룻배를 타고 1, 2시간 정도 돌아보는 투어로 가격은 흥정하기 나름이지만 몇 십 루피 정도에서 결정된다.

by 100명 2007. 4. 13. 12:38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55>인도 북부 맥로드 간지
[세계일보 2006-03-17 00:21]

인도 히말라야산맥에 다람살라(Dharamsala)라는 마을이 있고, 여기서 약 12㎞ 정도 더 산길을 올라가면 맥로드 간지(McLeod Ganj)라는 곳이 나온다. 굽이굽이 물결치는 히말라야산맥 속, 해발 1800m에 위치한 이 포근한 마을은 영국인들이 개발한 여름 산간 휴양지였다. 1959년 중국에서 망명한 달라이라마 14대와 티베트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티베트인들의 마을이 되었다.

이곳에 처음 도착하는 순간 한국인의 눈에 비친 풍경은 전혀 낯설지 않다. 티베트인들의 얼굴과 표정이 우리와 비슷하고 허름한 목조건물들이 들어선 길거리 풍경은 과거의 우리 모습이다. 그리고 티베트 음식점에서 얼큰한 칼국수 ‘툭파’나 수제비 ‘덴툭’ 등을 먹는 순간 고향의 맛을 느끼며 감격하는 이들이 많다.

이곳에는 티베트 문화가 곳곳에 숨어 있다. 산 언덕에 달라이 라마 14대가 거주하는 아담한 왕궁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밑에서부터 한바퀴 돌아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 티베트인들은 이 길을 코라라고 부르는데, 이 길에는 ‘옴 마니 반메 훔’을 새긴 깃발이 나부끼며 바위들에도 이 진언이 새겨져 있다. 티베트인들은 아침이면 이 길을 시계 방향으로 돌며 ‘옴 마니 반메 훔’을 왼다. 방편과 지혜가 하나가 된 수행, 이타심의 실천, 연꽃과 같은 지혜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기 바라는 진언인데, 티베트인들은 이 진언이 새겨진 둥근 통 ‘마니차’를 돌리기도 한다.

왕궁 앞에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중앙 사원으로 종교 정치와 관련된 의식을 집행하는 남걀사원이 있고, 티베트인들이 중국에서 넘어올 때의 사진들이 전시된 작은 티베트 박물관이 있다. 발품을 들여 조금 걸어가면 박수 나트에 있는 폭포를 볼 수도 있고, 티베트 임시정부 청사들이 모여 있는 아랫마을의 티베트인촌에 가서 티베트 분위기를 맛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모습 뒤에는 티베트인의 암담한 현실이 있다. 이곳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여행자들의 발길이 잦아졌고, 장사가 잘되자 건물주인인 인도인들이 직접 장사에 개입했다. 결국 티베트인들은 상권이 좋은 곳에서 밀려났고, 후미진 골목길이나 노점에서 생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도 각지에서 유입된 인도인들과 티베트인들과의 갈등이 생겼으며, 급기야 몇 년 전에는 티베트인들이 살해되고 티베트 소녀가 성폭행당하는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해 한때 달라이 라마 14대는 남인도로 거처를 옮길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은 사태가 진정되었지만 나라 없는 설움이야 어디 가겠는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설법을 하러 나오는 달라이 라마 14대, 달라이 라마 14대의 스승이었으나 열반 후 환생한 고승, 링 린포체(현재는 10대 후반), 오체투지 하는 티베트불교도, 남걀사원에서 교리 문답을 하는 티베트 스님들

그래도 티베트인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좁은 골목길 곳곳에 숨겨진 허름한 가정집에서 요가 강습, 티베트 요리 강습, 티베트어 교습 등을 하고 있는데, 여행자들은 이런 것을 통해 티베트의 문화를 체험하고 있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달라이 라마 14대다. 달라이 라마는 ‘큰 바다와 같은 스승’이란 뜻이며, 종교 수장인 동시에 정치 수반이다.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계속 환생하며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인간 달라이 라마 14대는 그저 평범한 승려의 한 사람일 뿐이라며 티베트가 독립을 하면 자신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친근하게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탄압을 하고 있는 중국조차 미워하지 않으며 용서한다. 그리고 욕망을 줄이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지혜의 수행을 통해 무지와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실천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전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자발적인 추종자들이 생겨나서 티베트 불교와 문화는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티베트의 젊은 세대들 중에는 ‘관념에 질식했다’며 무장투쟁 같은 화끈한 행동을 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많은 티베트인은 달라이 라마 14대의 평화 노선을 따르며 자신들의 정체성만 잘 지키면 언젠가 독립의 기회가 온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 14대가 세상을 뜨면 온건파와 강경파가 갈리면서 내분이 일어날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바, 티베트인의 가까운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그렇더라도 100년이나 200년이 흐른 뒤 그들의 먼 미래는 밝을 수도 있다. 몇십년 전의 한국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으며, 백년 전의 중국이 지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티베트인이라고 그 일을 못해낼 까닭이 없지 않은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다람살라 거리, pc방, 국제전화할 수 있는 곳, 티베트 요리를 강습하는 요리사, 바위에 새긴 ‘옴 마니 반메 훔’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툭파(티베트 칼국수)

■여행 에피소드

1990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달라이 라마 14대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 1년 후였다. 티베트인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고, 남걀 사원에서 설법을 하던 달라이 라마 14대도 쾌활했다. 티베트불교를 믿고 그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세계에 알리고 있는 미국의 영화 배우 리처드 기어도 그때 와 있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모두 티베트 독립에 대한 밝은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정책은 요지부동이었고, 달라이 라마 14대가 독립을 포기하고 다만 지방 자치 정도만 허락해도 티베트 땅으로 들어가겠다고 양보를 했지만 중국 정부는 냉담하기만 하다.

이런 가운데서도 티베트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세계의 손길은 끊이질 않고 있는데, 2006년 1월에 갔을 때 한국인들이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모은 ‘티베트 독립 자금’을 전달하러 온 젊은이를 만날 수 있었다. 티베트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이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을 전달하러 왔다는데, 크게 소문 내지 않고 이런 활동을 하는 이들의 순수함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여행 정보

성수기는 여름철이나 봄가을도 좋다. 겨울철에는 추운데 혹한은 아니고 영하를 오르내리는 정도. 습기가 차고 난방시설이 안 되어서 잘 때 춥다는 것이 애로 사항이다. 뉴델리에서 다람살라 혹은 윗마을인 맥로드 간지까지 밤 버스가 오간다. 약 12시간 정도 걸린다. 배낭족을 위한 5000∼6000원짜리 게스트 하우스부터 6만∼7만원짜리 고급 호텔까지 다양한 숙소가 있다. 비수기 때는 깎아준다.

by 100명 2007. 4. 13. 12:37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56>인도 아그라 타지마할
[세계일보 2006-03-30 17:12]

4세기에서 7세기까지 융성했던 힌두교의 굽타왕조가 쇠퇴하자 인도에서는 작은 왕국들로 이루어진 봉건시대가 시작된다. 그 후 8세기부터 이슬람교가 서서히 침투하다가 드디어 16세기에 북인도에서 이슬람의 무굴제국이 탄생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지역을 다스리던 바부르(Babur)는 1526년에 아그라에 입성하면서 무굴제국을 일으켰는데, 장자상속제가 확립되지 못해서 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골육상쟁의 피를 불렀다.

바부르의 장남 후마윤은 왕이 된 뒤 아편과 점성술 등에 탐닉하다 아프간 출신들의 장군과 동생들에게 한때 축출되었다. 그는 페르시아로 망명했다가 후일 다시 왕권을 되찾았으나 이내 죽는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 대제(위대한 인물이란 뜻)는 위대한 군주였으나 말년에 아들 제항기르(세계를 장악한 자)가 반란을 일으킨다. 제항기르는 패한 후 오르차로 도망갔다가 훗날 아버지가 죽자 왕이 된다. 이런 집안의 내력은 계속 반복되어서 제항기르의 아들 샤 자한(세계의 왕) 역시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한 후 아버지가 죽은 뒤 왕이 된다.

이때 왕위 다툼에서 장인 아사프 칸이 자신을 지지해 왕이 되었으니 처가가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라 왕비 뭄타즈 마할은 미모와 지혜를 겸비해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이 부인이 출산 도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샤 자한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죽은 이듬해인 1632년부터 약 22년간 그녀의 묘인 타지 마할을 만들었다. 인부 20여만명이 동원되었는데, 이란 출신의 건축가가 설계하고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중국 등에서 기술자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아그라 포트 입구(왼쪽), 아그라의 주택가에서 자유롭게 사는 원숭이들

순백의 대리석과 거기에 새겨진 꽃과 잎 문양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이런 것을 만드느라 샤 자한은 국고를 탕진했다. 또 동원된 백성들은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결국 말기에 장남에게 왕권을 양위하려던 샤 자한은 3남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쫓겨났고, 타지 마할에서 약 2㎞ 떨어진 아그라 포트에 갇히게 된다. 원래 선대에 성으로 만들어진 것을 샤 자한이 궁으로 개조했는데, 그 안의 무삼만 부르지(포로의 탑)에 자신이 갇힌 것이다.

그곳에 서면 멀리 타지 마할이 보인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가 얼마나 미웠던지 도망가지 못하도록 성 앞의 야무나 강에 악어를 풀어놓았고, 여름에는 짠맛 나는 우물물만 마시게 했다. 결국 샤 자한은 8년 동안 멀리 왕비의 묘를 사무치게 바라보다 죽었고, 소원대로 타지 마할의 왕비 옆에 안치되었다.

아버지를 그토록 학대하며 왕권을 유지한 아우랑제브는 알람기르(세계의 정복자)란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 작은 세계의 정복자는 형과 동생도 죽여버렸다. 그러나 선대에서 그런 것처럼, 그도 아들 아크바르의 반란을 겪은 후 병을 앓다가 죽는다.

그 후 무굴제국은 자식들의 내분으로 급속히 쇠퇴하면서 영국 세력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1774년 인도에 영국의 초대 총독이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영국 식민지가 된 것이다.

아크바르 대제(위대한 인물), 제항기르(세계를 장악한 자), 샤 자한(세계의 왕), 알람기르(세계의 정복자)…. 거대한 칭호를 갖고 거대한 꿈을 꾸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집안대대로 골육상쟁의 비극을 맛보았던 그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세월이 흐른 지금, 어느 누구도 그들의 헛된 야망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허망한 역사와 골육상쟁 속에서 피어난 한 여인에 대한 극진한 사랑만이 가슴에 남아, 그 기억을 되살리며 바라보는 타지 마할은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런 역사를 몰라도 단지 건축미에 감동하는 이들도 있다. 또 타지 마할의 대리석 계단에 앉아 햇볕을 쬐며 사랑하는 연인에게 엽서를 쓰는 이들도 있다. 거창한 역사를 되새기며 건축물을 돌아보는 재미도 있지만, 이렇게 시공 속에 드리워진 순수한 아름다움에 푹 젖어 있노라면 사진 몇 장 찍고 휘돌아본 후 떠나는 여행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기쁨이 샘솟는다. 타지마할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볼수록 수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인류의 보물임에 틀림없다.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무삼만 부르지(포로의 탑)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아그라 포트의 무삼만 부르지(포로의 탑), 입구에서 본 타지마할, 타지마할의 여행자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현재 아그라의 타지 마할 주변에는 인도인들이 하는 한국 음식점들이 많이 생겼다. 간판에는 한글이 쓰여 있고, 한글 메뉴판은 물론 상인들도 간단한 한국어는 다 할 줄 알았다. 그만큼 성수기인 겨울철에 한국 여행자들이 많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오므라이스를 제외하고는 보통 30분에서 1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주문을 하면 그때마다 밀가루나 야채를 사러 종업원이 시장으로 뛰어가고, 부엌에는 휴대용 가스버너 하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손님들은 모두 배가 고파 괴로워하지만 주인은 “우리는 항상 싱싱한 음식을 제공한다”고 외쳐댔다. 그런데 나중에 ‘인도 100배 즐기기’라는 인도 가이드 북 저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화덕에 구웠다는 ‘탄두리 치킨’ 맛이 영 이상해서 주방을 확인해보자고 하니 절대로 공개 못 한다고 해서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아마도 닭고기가 아니라 까마귀나 비둘기 고기가 아닐까’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글쎄 직접 증거가 없으니 확실치는 않겠지만, 진정 닭고기라면 주인은 뽑힌 닭털을 당당히 보여주면 되었을 텐데 왜 결사적으로 주방을 공개하지 않은 것일까? 이 소리를 듣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인도는 이래저래 수많은 얘기가 생산되는 곳이다.

여행 정보

뉴델리에서 아그라까지 가는 기차가 많다. 보통 2∼3시간 걸린다. 버스도 많이 있다. 여행자들은 대개 타지 갠즈 지역에 많이 묵는다. 타지 마할 바로 옆에 있고 숙박비가 5000∼ 6000원 정도로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이클 릭샤나 오토 릭샤 운전사들이 이끄는 상점에 갔다가 바가지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의 옥상 식당에서 과일을 먹다 원숭이에게 순식간에 뺏기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타지마할 근처의 한국 식당(왼쪽), 타지마할에 새겨진 문양

by 100명 2007. 4. 13. 12:35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57>인도 서북부 자이살메르
[세계일보 2006-04-13 20:21]

인도 서북부에는 타르 사막이 있다. 사하라 사막처럼 거대한 모래언덕이 흔하지도 않고, 가도 가도 메마른 돌집들과 고독해 보이는 낙타들 그리고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숨죽인 메마른 선인장과 뿌연 먼지들이 스쳐 지나가는 황량한 벌판이 펼쳐지는 곳이다. 이 타르 사막을 안고 있는 지역이 라자스탄주인데, 한반도의 1.5배 크기에 약 5000만명이 살아 인구 밀도는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인도의 여느 지역과 달리 황량한 타르 사막을 배경으로 핑크빛 도시 자이푸르, 낙타 축제로 유명한 푸슈카르, 호반의 도시인 우다이푸르, 인도에서 가장 큰 성이 있는 조드푸르 등 이국적인 분위기를 간직한 관광도시들이 많다.

◇타르 사막의 폐허가 된 유적지

이곳은 현재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들이 같이 살고 있지만 원래는 힌두교인의 땅이었다. 불교와 힌두교라는 종교를 배경으로 크게 성장했던 굽타 왕조가 6세기에 멸망하자 봉건제도에 기초한 소왕국들이 출현한다. 그리고 8세기부터는 서쪽에서 밀려 들어오는 이슬람 세력을 맞아 수많은 전투가 일어나는데, 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이들이 라자스탄 지방을 다스려온 라즈푸트였다. 그들은 힌두교인으로서 결코 항복하지 않고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웠으며 부인들은 불에 뛰어들어 죽음을 택했는데, 이런 사실들은 수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대한 이슬람 왕조 무굴제국이 북인도를 통일하자, 라즈푸트는 공물을 바치며 복종한 대신 그들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라자스탄 지방의 ‘작은 왕’들은 위대한 왕 ‘마하라자(Maha Raja)’라고 불리며 자신들의 영토를 다스려왔고, 그들이 세운 성과 유적지들이 라자스탄주에는 많이 남아 있다. 영국이 이곳에 몰려왔을 때도 라즈푸트들은 영국인의 환심을 산 후 지위를 보장받아 라자스탄주는 ‘왕들의 땅’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들의 특권은 새로운 인도 독립 후에도 유지되다가 훗날 인디라 간디 총리에게 빼앗겼지만, 여전히 그들의 자부심은 이 땅에 배어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간 여행자들은 그들의 자부심보다는 그들의 조상이 남긴 유물들과 풍경에 더 끌리게 된다. 황량한 사막을 달려 파키스탄 국경 부근에 있는 자이살메르에 도착한 후 구시가지에 들어서는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뚝 선 자이살메르성이다. 1156년 라왈 자이살이 트리쿠타 언덕 위에 세운 80m 높이의 이 성 안에는 마하 라자의 궁전과 자이나교 사원이 있는데, 그런 역사적 유적지보다도 더 매력적인 것은 성 안에 숨겨진 수많은 여행자 숙소, 성벽 길의 조그만 가게와 음식점들 그리고 거의 1000년 동안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다. 긴 세월 동안 성벽 속에 젖어든 그들의 삶과 분위기에 푹 빠지다 보면 문득 먼 과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외에도 수많은 귀족들이 지은 저택과 라자스탄 토속품점, 인형극을 공연하는 문화센터가 있으며, 근교의 사막에는 가디 사가르라는 인공호수가 있어서 색다른 풍경을 즐길 수가 있다.

◇낙타 몰이꾼

그러나 역시 자이살메르의 가장 유명한 관광상품은 낙타 사파리다. 낙타 사파리는 겨울철이 좋은데, 한낮의 따가운 햇살과 사막 위를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낙타를 타고 황량한 사막을 지난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자이나교 사원과 왕족들의 무덤들 그리고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들을 지나치다 보면 어느새 훌쩍 하루가 간다. 저녁이 되면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는 태양을 바라보며 거대한 모래언덕 위에 잠자리를 만든다. 모닥불을 피우고 차파티(밀개떡)에 차이 한 잔으로 저녁을 먹으며 낙타 몰이꾼의 노래를 듣노라면 어느샌가 캄캄한 밤하늘에는 별들이 금싸라기처럼 빛난다.

만약 그날이 보름이라면 사막의 지평선 위에서 쟁반처럼 둥근 달이 둥실 떠오르는 것을 볼 수도 있다. 모래에 누워 온몸으로 젖어드는 달빛을 느끼면서 사막의 적막함에 귀 기울이다 문득, ‘락, 락, 락….’하는 낙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절대자와 대면하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 속으로 빠지기도 한다. 그 고독하고 환상적인 사막의 밤은 어디서나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세상의 수많은 여행자들은 오늘도 계속 타르 사막을 향해 가고 있다.

◇사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막의 우물 터인 작은 오아시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낭만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자이살메르지만 관광객이 많아지면 어디나 그렇듯이 오염되기 시작한다. 낙타 사파리 상품들이 난무하고, 각 숙소와 업체들이 서로 헐뜯으며 온갖 악소문이 무성해서 여행자들을 혼란 속에 빠뜨린다. 또 바라나시나 푸슈카르도 그렇지만 자이살메르에서도 ‘방라시’란 것을 판다. 방라시는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라시’라는 음료에 마약의 일종인 ‘방’을 탄 것을 말한다. 이걸 마신 서양 여자 여행자에 따르면 방라시에는 강한 것, 중간 것, 약한 것 등이 있는데 중간 것 정도를 마시면 약 7시간 정도 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으면서 계속 웃음이 나오고 음식을 많이 먹게 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계속 웃으며 허겁지겁 이것저것을 먹어댔다. 그런데 훗날 바라나시에서 만난 한국인은 강한 것을 먹고 나서 너무 취해 ‘죽는 줄’ 알아 유서까지 쓴 적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축제 때 이걸 너무 많이 마시고 죽는 사람들도 종종 나온다고 하니 조심할 일이다.

■여행정보

가장 가기 좋은 때는 10월 중순에서 3월 중순까지다. 낮에는 봄·여름 날씨고 밤에는 싸늘하다. 델리에서 기차로 약 20시간 걸리고 자이푸르에서는 12시간 정도 걸린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라 고급 호텔부터 저렴한 숙소까지 많다. 특히 성 안에는 몇 천원 정도 하는 여행자 숙소들이 많이 있다. 거리의 여행사와 거의 모든 숙소에서 낙타 사파리를 하고 있다. 1박2일부터 4박5일 등 많은 종류가 있는데, 사막의 맛만 보고 싶은 여행자들은 대개 1박2일 혹은 2박3일 정도를 선택한다.

by 100명 2007. 4. 13. 12:34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58>보르네오 섬 키나발루산
[세계일보 2006-04-28 01:42]

보르네오 섬 하면 제일 먼저 목제 가구가 떠오르지 않을까? 그만큼 원시림이 풍부한 곳이다. 관광객이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키나발루산(해발 4101m)이 있기 때문이다. 섬 남쪽은 인도네시아령의 칼리만탄주고, 북쪽은 말레이시아령으로 사라왁주와 사바주로 나뉘는데, 이 두 주 사이에 브루나이 왕국이 있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사바의 주도는 코타키나발루로 한때 이곳은 ‘아피’로 불렸다. 아피는 현지어로 불이란 뜻으로, 해적들이 자신들의 항해를 위해 이곳에 늘 횃불을 켜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타키나발루의 한적한 공항에 첫발을 딛는 순간 야자나무 숲에서 불어 오는 훈훈한 바람을 맞으면 문명과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시내에 들어서면 번듯한 호텔, 쇼핑센터, 피자 헛, 맥도널드 등이 보여 이미지와 현실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그렇더라도 이들만의 문화와 풍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박물관과 모스크 등 볼거리가 있고, 주변의 아름다운 섬들은 깨끗한 해변을 자랑하며 부둣가에는 각종 해산물을 파는 필리피노 시장이 있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저녁나절에는 길가에 빽빽이 들어선 가로수에 수백마리의 새들이 앉아 지저귀어서 마치 하늘이 조각 나는 것 같고, 낙조에 물든 바닷가 풍경은 환상적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모두들 음식점 앞에 늘어선 의자에 앉아 비디오로 방영되는 영화를 시청하거나 미국 프로레슬링 등을 시청해 마치 한국의 1960년대 풍경을 연상케 한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키나발루 산은 코타키나발루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나온다. 1년 연중 무더운 날씨의 보르네오섬이지만 이곳에 오면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온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들어가면 휴양지 같은 분위기다. 깔끔한 펜션, 고급 레스토랑이 산길 따라 들어서 있고 멀리 산의 모습이 보인다. 이곳은 매년 17만명이 방문하지만 그 중에서 10% 정도만 정상에 오르고, 대부분은 공원의 정취만 즐긴다고 한다. 그러나 키나발루산은 해발 4000m가 넘는 산 치고는 가장 오르기 쉬운 산으로 알려져 있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오른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입구에선 잎들이 넓적한 열대림과 그 사이에서 피어 오르는 뿌연 안개와 작은 폭포가 반겨준다. 그리고 한 30분쯤 걸어 올라가면 첫 번째 휴게소가 나오는데 그곳이 벌써 해발 2000m 정도다. 길 따라 적절하게 휴게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해발 3000m 정도가 넘으면 고소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이때부터는 천천히 걷는 수밖에 없다. 올라갈수록 떡갈나무, 밤나무 등 우리 눈에 익숙한 나무들이 보이고 피처 플랜트(Pitcher Plant)란 식물도 나온다. 벌레나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인데, 매우 큰 것은 지름 15∼20㎝로, 19세기에 어느 식물학자는 지름 30㎝짜리를 발견한 적도 있다. 그 안에 약 2.5ℓ의 물이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 쥐가 빠져 죽어 있었다고 한다.

키나발루산 등정로

종종 쉬면서 5시간 정도를 걸으면 해발 3272m에 있는 라반라타 산장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휴식 겸 하룻밤을 보내고 , 다음날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상을 향해 오른다. 해발 3668m부터는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거대한 바위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사실 북한산 백운대나 도봉산 포대능선에 비해 쉬운 길이지만 공기가 희박해 숨이 가쁘다. 어느샌가 동녘 하늘이 벌겋게 물들며 여명이 드러나면 세상은 거대한 구름바다에 파묻혀 있고, 출발한 지 2시간30분쯤 후에는 정상에 오른다. 키나발루산은 원주민 언어로 ‘영혼을 위한 안식처’라는데, 글자 그대로 세상을 떠나 안식처에 이른 기분이 든다. 코타키나발루와 키나발루산은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낯선 문화와 풍경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관광지다.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키나발루산은 혼자 올라갈 수가 없어서 홀로 갔던 나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과 조를 이뤄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3000m 정도부터는 말레이시아 가이드가 “플라한, 플라한(천천히, 천천히)”이라며 주의를 주었는데, 한국인인 나에게는 실실 웃으며 “빨리, 빨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연유가 있었다.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을 많이 상대해본 그는 자기가 “플라한”이라고 외쳐도 “빨리, 빨리”라며 부지런히 걸어가는 한국인들에게서 그 말을 배웠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성격이 급하기도 하지만 산악국가답게 등반을 많이 한 까닭에 키나발루산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일까?

키나발루산은 올라가는 길보다도 내려가는 길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올라오는 데만 익숙했던 근육이 내려가는 길에 적응이 잘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마라톤을 하는 말레이시아 중년 사내를 만났다. 해발 3272m의 라반라타 산장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기록이 1시간30분이라던가, 1시간40분이라던가…. 대단한 이였다.

◆여행 정보

키나발루산에 오르려면 미리 등반허가를 받아야 한다. 코타키나발루 시내에서 등반허가를 대행하는 사무실로 가도 되는데, 성수기에는 예약이 넘치므로 한국의 여행사를 통해 미리 받든가 패키지 투어에 참가하는 것이 좋다. 키나발루산 밑에는 산장, 펜션 등의 숙박업소가 많은 편이나 해발 3000m에 있는 숙소들은 예약하지 않으면 등반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 산에 식당이 있어 비상식량 외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상 부근은 늘 추우므로(초겨울 날씨) 스웨터와 윈드재킷 그리고 비가 종종 오므로 우의를 챙기는 것은 필수다. 침낭은 산 중턱에서 히터가 있는 숙소에서 잘 수 있다면 필요없다. 그렇지 않으면 관리소에서 빌릴 수도 있다. 가끔 기상 상태 급변으로 위험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근래에 일행보다 앞서가던 10대 중반의 서양 아이들이 갑자기 안개가 끼면서 길을 잃어 3일 만에 밀림 속에서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하니 방심은 금물이다.

by 100명 2007. 4. 13. 12:26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59>보르네오섬 세필록·셀링간 섬
[세계일보 2006-05-11 16:57]

보르네오섬 사바주의 산다칸이란 도시 근처에는 세계에서 4곳밖에 없는 오랑우탄 재활지가 하나 있다. 상처 입거나 어미 잃는 등 자생력이 없는 오랑우탄들을 보호해주는 ‘세필록 오랑우탄 재활지’다. 오랑우탄들은 숲 속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원시림 가운데 설치해 놓은 연단으로 오전 10시, 오후 2시에 몰려 든다. 먹이를 주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열대림 무성한 정글 속으로 들어가 이 광경을 구경할 수 있다. 시간이 되어 관리인이 과일이 든 양동이를 갖고 나타나면 오랑우탄들이 모여드는데, 이때 원숭이들도 함께 나타난다.

원숭이들은 서로 먹이를 뺏으며 방정맞게 싸우지만 먹이가 넉넉하다는 것을 인식한 오랑우탄들은 바쁘지 않다. 가끔 수컷이 먹고 있는 바나나를 암컷이 뺏어도 수컷은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른 것을 집어 먹는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가져가면 그냥 내버려두듯이.

말레이시아어로 ‘오랑’은 사람이고 ‘우탄’은 숲이란 뜻이니, 오랑우탄은 ‘숲 속에 사는 인간’을 의미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3000만년 전부터 인류,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들의 공통 조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1000만년 전에 오랑우탄이 분화가 되고 나서 800만년 전에 고릴라, 500만년 전에 침팬지와 인류가 각각 분화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아직도 논쟁 중이니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오랑우탄은 침팬지·고릴라와 함께 인류와 매우 가까운 존재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이런 자연 친화적인 관광지의 예는 또 있다. 산다칸에서 배를 타고 약 한 시간 정도 가면 플라우 셀링간(셀링간 섬)이 나온다. 이 섬은 거북이들이 알을 낳는 곳이라서 거북이 섬이라고도 불린다. 셀링간 섬뿐만 아니라 근처의 섬에서는 호크스빌거북이, 녹색거북이들이 8월에서 10월 사이에 알을 낳는다. 하지만 한때 쥐, 새, 상어, 도마뱀 그리고 사람들이 거북이 알을 먹어서 멸종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사바주 앞바다의 셀링간 섬, 바쿵간 케칠 섬, 굴리산 섬들을 특별히 보호하면서 거북이이은 점점 늘어났고, 그 중에서 셀링간 섬이 관광지가 되면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관광객이 오면 많이 훼손될 텐데도 잘 보존되는 이유는 지난 30년간 철저히 보호하고 통제했기 때문이다. 섬의 숙소는 한정되어 있어서 수십명 정도밖에 머물지 못하고 사전 예약제로 운영한다. 또 숙박요금이 높아 자연스럽게 사람을 통제하는 효과가 생겼다.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인간들과 늘 함께 있던 오랑우탄 암컷, 오랑우탄에게 먹이 주는 것을 구경하는 관광객들, 고독한 오랑우탄, 세필록 오랑우탄 재활지 근처의 펜션.

거북이 섬은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는 조그만 섬이다. 낮에 자유롭게 이곳을 돌아볼 수 있지만 산호초가 많아 수영을 하기에는 곤란하다. 백사장에는 조그만 탱크가 지나간 것처럼 거북이들이 지나간 흔적들이 보이는데, 오후 6시 이후부터 오전 6시까지는 개인적으로 해안가에 나갈 수 없어 가이드와 함께 돌아봐야 한다.

이때는 거북이 사진도 찍을 수가 없다. 오후 8시부터 모두 로비에 모여 앉아 가이드로부터 거북이 섬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면 해안가 경비원에게서 무전기로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 “현재 한 마리 상륙, 두 마리 상륙!” 이 말을 듣는 순간,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대에 들뜬다. 잠시 후 모두 바닷가로 몰려가 아이 몸집만큼 커다란 거북이가 네 발로 모래 구덩이를 파고 알을 낳는 광경을 보게 된다. 관리인은 거북이가 알을 낳는 대로 열심히 주워서 양동이에 담고, 또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구경을 하건만 청각이 약한 거북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알을 다 낳은 후 모래로 빈 구덩이를 덮는다.

탁구공만한 거북이 알은 부화장의 구덩이에 묻혀 사람의 관리에 들어가는데, 지붕을 설치해서 그늘로 지열을 낮춘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지붕 밑 서늘한 구덩이에서는 수컷이 태어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암컷이 나오는데, 약 50∼60일 후에 스스로 깨어난 거북이들은 모래를 뚫고 올라온다.

부화장에 알을 파묻는 것을 보고 나면 관광객들의 손바닥 위에는 거북이 새끼들이 한 마리씩 놓인다. 예전에 묻었던 알에서 방금 부화한 거북이 새끼들이다. 사람들은 짜릿한 흥분 속에서 바닷가로 나가 방생하고, 캄캄한 한밤중에 파도 치는 거친 바다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거북이 새끼들을 향해 손뼉을 친다.

◇위쪽부터 거북이 부화장, 셀링간 섬 안의 숙소, 아이와 함께 거북이 섬으로 가는 관광객.

그렇게 그들의 행운을 기원하건만 갈매기, 물고기들에게 먹히고 또 자연사해서 3%만이 어미 거북이로 성장해서 알을 낳으러 이곳에 온다고 한다. 8월 성수기에는 하루에 상륙하는 거북이가 10∼20마리고, 한 마리가 보통 100개 전후의 알을 낳게 되는데, 현재 이곳은 생태 관광지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오랑우탄 재활지나 거북이 섬은 관광지화되었으면서도 동시에 동물들이 보호되는 성공적인 정책의 산물로 보이는데, 거기서 얻은 수익금은 멸종해가는 오랑우탄과 거북이 보호에 투자되고 있다 한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세필록 오랑우탄 재활지에는 특이한 암컷 한 마리가 있었다. 관리인이 먹이를 주는데도 그곳에 가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서서 먹이를 먹는 오랑우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 자신의 사진을 찍는 인간들을 우수에 찬 눈초리로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마치 자신의 정체성과 처지에 대해서 고뇌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 고독해보이던 오랑우탄이 생각난다. 오랑우탄들은 가끔 근처에 있는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한다. 어떤 이는 밤에 오랑우탄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와 책상 위에 있는 미네랄 워터를 마신 후 유유히 사라져서 기가 막혔다는데, 침팬지도 그렇지만 확실히 오랑우탄들도 지능이 높고 자아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행 정보

세필록 오랑우탄 재활지, 거북이 섬 모두 일단 산다칸이란 도시로 가야 한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버스를 타면 약 5시간 걸린다. 대개 중간에 키나발루산을 거쳐 산다칸으로 간다. 세필록 오랑우탄 재활지는 산다칸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리고, 거북이 섬은 배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산다칸, 세필록 오랑우탄 재활지 근처, 거북이 섬 등에는 다양한 숙소가 있다. 거북이 섬은 거북이가 알을 많이 낳는 8월이 성수기로, 현지 여행사에 신청해야 갈 수가 있다. 깊은 정글로 들어가지 않는 한, 말라리아 문제는 심각하지는 않다.

by 100명 2007. 4. 13. 11:53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 <60>메콩 델타
[세계일보 2006-05-25 21:12]

저 멀리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중국, 미얀마는 물론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서 베트남으로 흘러 들어가는 장장 4500㎞의 메콩강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젖줄로, 그 중에서도 베트남인들에게 가장 많은 축복을 내려 주었다.

베트남은 현재 세계 수출국 2위일 만큼 쌀이 많이 나는데, 대부분이 메콩 델타 지역에서 생산된다. 베트남 국토의 12% 정도지만, 여기서 생산되는 쌀이 수출량의 80%를 차지하니 메콩 델타 지역이 베트남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 풍요로운 메콩강 유역을 돌아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개인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저렴한 여행자 숙소가 많이 모여 있는 호찌민시 데탐 거리의 여행사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을 실은 버스가 호찌민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달린다. 호찌민시의 인구 약 750만명 중에 250만명이 오토바이를 탄다. 일본의 혼다와 스즈키는 4000달러지만 중국제 조립품은 400달러로, 특히 개방정책 이후 외국 거주 교포들의 송금 덕택에 오토바이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났다고 한다.

한두 시간 후 버스가 메콩 델타 지역에 들어서면 논이 끝없이 펼쳐지고 간간이 하얀 석조물들로 치장된 무덤들이 보인다. 이 지역은 논이 많다 보니 화장 문화도 영향을 받아 논에 무덤을 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여인들이 쓰고 다니는 논라(Non La)라고 불리는 원뿔형의 모자다. 베트남전 당시 우리에게는 한때 ‘베트콩 모자’라고 알려졌지만 원래 논(Non)은 모자, 라(La)는 잎이라는 뜻으로 얼굴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여자들이 주로 쓰고 다닌다.

이렇게 낯설면서도 한편으론 익숙한 풍경을 헤치고 가다 보면 미토(My Tho)라는 도시가 나온다. 메콩 델타 입구에 있는 이 도시는 한때 화교들이 많이 살아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베트남 공산화 이후 이들이 많이 떠나면서 빈곤한 도시가 됐다.

이 도시의 나루터에서 여행자들을 실은 조그만 배는 황토빛 강물이 출렁거리는 거대한 메콩강을 가로질러 얼마 후 거북이 섬에 들렀다. 잎이 넓적한 활엽수와 바나나나무 등이 우거진 좁은 수로를 따라가자 수많은 베트남전 영화에서 눈에 익은 풍경들이 펼쳐졌다. 숲 그늘 아래서 물은 녹색을 띠고, 가끔 들리는 새소리만이 적막함을 깨뜨린다. 미끄러지듯이 정글 깊숙이 들어가는 동안 불쑥 조그만 다리가 나타나고 그 다리 위로 노인이 유령처럼 천천히 걸어간다.

간신히 다리 밑을 통과한 배는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수로를 따라 깊고 깊은 정글 속으로 들어간 후 외진 곳에 상륙했다. 이곳에서는 베트남 여인들이 코코넛의 하얀 속살을 긁어내 달궈진 솥에 넣어 녹인 후, 여러 재료를 넣어 꾸둑꾸둑하게 말려 코코넛 캔디를 만들었고, 그 후에 들른 다른 섬에서는 벌꿀차와 독한 바나나 술을 대접받았다.

군대 간 남자를 그리워하는 베트남 여인의 슬픈 노래도 들을 수 있었고 커다란 구렁이를 목에 감고 돌아다니는 뱀 쇼도 있었는데, 이렇게 메콩강의 정취를 돌아보고 호찌민시로 귀환하다 보면 어느샌가 붉은 해가 서녘 지평선을 붉게 물들인다.

두 번째로 메콩 델타의 도시 껀터(Can Tho)를 출발하여 메콩강을 돌아보는 방법이 있지만, 이곳은 호객 행위가 너무 심하고 개인적으로 여행하려면 꽤 비싼 비용을 내야 하기에 많은 여행자들은 호찌민시에서 단체 투어를 선호한다.

다만, 껀터에 왔다면 근처의 속짱(Soc Trang)이란 도시에 들러볼 만하다. 한국의 1960, 70년대를 생각나게 하는 낡은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 가면 도착하는데, 이곳에는 캄보디아의 흔적이 서려 있다.

캄보디아계인 크메르족이 약 28% 정도가 살며 그들이 세운 불교 사찰들이 있다. 그 중에서 쭈어 줘이(Chua Doi·박쥐사)란 절은 박쥐로 유명하다. 주택가 근처에 있는 이 절의 커다란 나뭇가지에는 박쥐들이 시커먼 비닐처럼 축축 늘어져 매달려 있는데, 새벽과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먹이를 구하기 위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광경이 볼 만하다.

더욱 즐거운 것은 돌아오는 길에 감상하는 메콩 델타의 풍경들이다. 야자나무 아래서 ‘해먹(그물망)’을 치고 누워서 낮잠을 자는 청년, 메콩강변의 수상 가옥들, 버스 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야금 소리 비슷한 베트남 악기 연주 소리….

이윽고 메콩강 너머로 해는 넘어가고 숲의 그늘은 길어지며 민가 근처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때 서늘한 바람을 헤치면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얀 아오자이 차림의 여학생들은 순결한 학처럼 보인다.

삶이든, 여행이든 목적지보다는 과정에서 만나는 이런 소박한 풍경들이 더욱 감동을 준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정보

메콩 델타 투어는 호찌민시 데탐 거리의 수많은 여행사에서 다루고 있다. 해마다 오르기는 하지만 왕복 교통비, 보트비, 식사비, 가이드비가 다 포함된 여행 가격이 7달러 정도로 저렴하다. 껀터에서 속짱까지는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간다. 사람들이 짐을 많이 갖고 타서 마치 피난민 버스 같고, 천천히 달려서 약 2시간30분 걸린다.

■여행 에피소드

버스 안에서 졸면서 달리고 있을 때였다. 비몽사몽간에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증산교, 현대APT―홍제 지하철’이라는 노선판 붙인 버스가 스쳐가는 게 아닌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의 어딘가를 달리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졌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동남아 여러 곳, 그리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이런 중고 버스를 본 적이 있다.

베트남 도로를 달리다 보면 한글이 종종 눈에 띈다. ‘○○ 스포츠센터’ ‘○○ 백화점’ 등의 한글이 적힌 버스들이다. 버스가 낡아 한국에서 운행이 금지되자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등지에 헐값에 팔렸다고 한다. 이런 버스에 새로 페인트칠을 해서 깨끗하게 단장할 수도 있지만 페인트 비용도 부담스럽고, 또 베트남에서는 한글을 지우면 오히려 값이 안 나가서 일부러 안 지우고 다닌다는 얘기도 있다. 그만큼 한국의 국가 이미지가 좋고 한글이 대접을 받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하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by 100명 2007. 4. 13. 11:52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61>베트남 국경도시 쩌우 독
[세계일보 2006-06-08 21:54]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예전에는 프놈펜에서 버스를 타고 호찌민까지 갔는데, 12시간이 걸리는 매우 불편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여행자들이 수로를 이용하고, 시간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달리니 허장강의 선착장이 나왔다. 라오스에서 내려온 메콩강과 톤레삽 호수에서 내려온 허장강은 프놈펜 부근에서 만난다.

베트남의 국경도시 쩌우 독(Chau Doc)으로 가는 배 역시 허장강을 따라 내려간다. 대기하고 있던 배 안에는 좌석이 있건만 여행자들은 거의 다 지붕 위로 올라가 적막한 강을 바라보았고, 남국의 따스한 바람이 한 시간 정도 볼을 스치자 캄보디아 영토의 끝이 나왔다. 육지로 내려가 입국 수속을 밟은 후, 다시 배를 타고 5분 정도 가자 베트남 국기가 달린 이민국이 나왔다.

입국 수속을 마친 후 들어선 베트남 쪽의 허장강에는 적막한 캄보디아 쪽과는 달리 활기 찬 삶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원래 이 지역은 한때 캄보디아의 영토였고 아직도 크메르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하지만 뾰족한 고깔 모자 ‘논라’를 쓰고 배를 젓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여기는 베트남 땅이란 것을 강하게 깨닫게 된다.

그런 길을 2시간 정도 달린 후에 배는 쩌우 독에 도착했다. 국경 도시 쩌우 독은 많은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광객에 의해 덜 오염되었고 현지인들의 꾸밈없는 삶이 펼쳐지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의 중심지에는 온갖 과일과 꽃, 건어물이 들어선 시장이 있었고, 강변에는 허름한 목조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은 채 강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뱃삯을 흥정해 나룻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수상가옥촌을 찾아갔다.

중간에 커다란 그물이 쳐진 물고기 양식장이 보였다. 쩌우 독은 물고기 양식으로 유명하고, 여기서 생산한 물고기들을 외국에 수출한다고 한다.

누런 황토빛 메콩강 위에 드문드문 떠 있는 수상가옥들의 마루에 중년 여인들이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옆집 노인은 책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눈이 마주쳐서 들어가도 되겠냐고 묻자 흔쾌히 허락했다. 말은 안 통했지만 한국에서 온 손님을 반기며 노인은 차를 대접했다.

수상가옥에서 제일 궁금했던 것은 가옥 안에 설치한 양식장이었다. 이 지역의 수상가옥에 사는 사람들은 마루 중간에 구멍을 뚫고, 밑에는 그물을 쳐서 남은 음식을 주어 물고기를 기른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려 물어보니 이내 알아차린 노인은 마루 한가운데 있는 가로세로 30㎝ 정도의 뚜껑을 열었고, 그 밑으로 출렁거리는 물이 보였다. 그러니까 구멍을 통해서 먹이를 주다가 필요하면 그물로 떠서 잡아먹는데, 노인은 아이가 빠질 염려가 있어서 지금은 안 기르고 폐쇄했다는 식의 몸짓을 보였다.

수상가옥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그 중의 하나에는 향과 꽃이 놓인 제단이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처럼 가옥 안에 조상을 모시는 제단을 설치해 놓는다. 또 인상적인 것은 집집에 매달려 있는 화분들이었다. 마루에 앉아 메콩강의 풍경을 바라보며 차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화분도 가꾸고 얘기도 나누는 이들의 삶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눈에는 꽤 낭만적으로 보였다.

알고 보면 이들에게도 삶의 애환과 고뇌가 서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생물이 겪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 다만 나이가 들면 은퇴하고 초조하게 살아야만 하는 한국에서 온 나그네의 눈에는 저녁나절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그 노인이 풍요롭게만 보였다.

돌아오는 길,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서늘한 바람은 옷깃 속을 파고 들었다. 멀리 강으로 가라앉는 붉은 햇빛에 어리는 고깔모자 쓴 여인의 휘날리는 바지 자락은 서글프면서도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이었다. 쩌우 독은 이런 곳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나룻배 타고 강 한가운데를 휘휘 돌며 풍경을 구경하고 사람들의 체취를 맡는 것, 그것만큼 풍요로운 여행이 어디 있겠는가.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왼쪽부터 쩌우 독의 수상가옥,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배 위의 여행자들, 허장강의 일몰 풍경

>> 여행 정보

프놈펜에서 허장강을 타고 오는 코스는 교통편이 많지 않다. 현재 많은 여행자들은 프놈펜의 ‘까삐똘(Capitol)’ 게스트 하우스에서 제공하는 교통편을 이용하고 있다. 프놈펜에서 베트남의 쩌우 독까지 버스, 보트비를 다 합해서 6달러 정도다. 오전 8시에 출발해서 오후 2시30분 정도에 도착한다. 쩌우 독에서 메콩 델타 유역의 도시인 껀터로도 갈 수 있고 호찌민시까지 곧바로 갈 경우 약 6시간 걸린다. 이곳 호텔들은 TV, 선풍기, 깨끗한 침대, 욕실 등이 딸린 방이 5달러 정도밖에 안 할 정도로 저렴하다. 수상가옥을 방문하고 싶으면 강변에 나와 나룻배를 직접 흥정하면 된다. 뱃사공이 딸린 배를 혼자서 이용하는 데 1시간에 1달러 정도면 가능하다. 상품화된 배보다 현지인들과 접촉해 타는 배에서 여행의 낭만을 느낄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공산주의 국가였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잇따라 개방되자 여행자들은 방콕에서 시작해서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지, 프놈펜, 쩌우 독, 호찌민을 거쳐 하노이까지 올라가 베트남 여행을 마친 후, 라오스쪽으로 꺾어져 다시 방콕으로 돌아오는 루트를 많이 이용하고 있다. 국경을 넘나들며 많은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코스다.

>> 여행 에피소드

저녁이 되면 쩌우 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학교가 파한 후 귀가하는 아오자이 차림의 여학생들이 눈에 띄었고 거리 곳곳의 식당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돼지갈비 냄새가 몹시 풍겨왔고 냄새를 따라가니 연기가 자욱해서 식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돼지갈비 덮밥, ‘껌스응’이 아닌가.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먹는 달짝지근한 돼지갈비는 입에 착착 감겨왔다. 한국에서 먹는 돼지갈비보다 훨씬 맛있었다. 뚝딱 해치우고 돈을 치르니 3000동. 한국돈으로 약 240원이었다. 그 전에 호찌민시에서 먹었을 때는 8000동 정도이었으니 이곳은 물가가 더 쌌고 인심도 여유 있어 보였다. 쩌우 독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았는데, 맛도 맛이지만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베트남 서민들과 어울려 먹는 분위기가 더욱 좋았다.

by 100명 2007. 4. 13. 11:50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62>베트남 달랏
[세계일보 2006-06-22 20:57]

베트남 북부에서 내려온 길고 긴 쯔엉선(長山) 산맥의 남쪽에 중부 고원이 있고, 그 끝 부분에 달랏(Dal Lat)이란 중소 도시가 있다. 쯔엉선 산맥은 호찌민 루트가 있는 산맥으로 베트남전 당시 북베트남의 수많은 게릴라들과 탄약, 물자가 이 루트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서로 암묵적으로 전투를 피한 달랏에서는 남베트남의 고위 관료들과 베트콩 간부들이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휴양지로 개발된 해발 1475m의 달랏에는 아름다운 호수와 계곡, 폭포 그리고 프랑스풍의 예쁜 집들이 있어서 1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으며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들고 있다.

◇짜이 맛에 있는 영복사↑
◇영복사의 대웅전↓

언덕이 많은 달랏에는 미니 호텔, 카페, 식당, 시장 등이 아기자기하게 퍼져 있는데, 그 중심은 시민들의 휴식처인 쑤언 흐엉(Xuan Huong) 인공 호수와 야채와 어류 등을 파는 달랏 중앙시장(Cho Dalat)이다. 시내 중심지에는 약 70년 전에 프랑스인들이 지었다는 달랏 대성당이 있고, 언덕의 정상에는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여름별장도 있다. 또 주택가 한구석에는 모스크바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1960년대 히피 영향을 받았다는 베트남 건축가가 만든 항응아 갤러리가 있다. 이 집의 뜰에는 철사로 만든 거미줄, 시멘트로 만든 거대한 나무, 그 속에 만든 방 등 기괴한 건축물이 들어서 있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끈다.

달랏은 시내보다는 교외에 볼 것이 많다. 시내에서 약 13㎞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뚫고 나가면 높이 15m의 프렌 폭포가 나오고, 그곳에서 약 17㎞를 더 나가면 ‘닭 마을(치킨 빌리지)’이 나온다. 이곳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대형 닭이 서 있는데, 산에 들어가 화전 생활을 하던 소수 민족 ‘꼬호’족이 정착하자 정부에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마을 사람들의 상징으로 세웠다고 한다. 또 근교에는 죽림선원(竹林禪院·Thin Vien Truc Lam)이 있다.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한국과 같은 대승불교를 믿고 있어서 대웅전과 좌우의 고루·종루·선방 등의 분위기가 한국의 절과 비슷하며, 정원에 아름다운 꽃들과 분재가 가득한 것이 인상적이다. 달랏 근교의 짜이 맛(Trai Mat)에는 영복사(靈福寺·Chua Linh Phuoc)라는 불교 사원이 있는데, 약 50년 전에 지어졌다는 이 절은 용 조각으로 가득하다.

입구에도, 대웅전 기둥에도, 경내에도 꿈틀거리는 용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곳까지는 러시아제 두 량짜리 증기열차를 타고 갈 수 있다.

◇조개구이를 파는 음식점↑
◇야채시장↓

달랏에서는 다양한 음식도 즐길 수 있다. 고급 음식점에서 각종 해산물은 물론 달랏 특산품인 토끼고기,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고 거리에서는 조개, 우렁이, 골뱅이 등을 값싸게 즐길 수도 있다. 각종 조개 한 접시에 한국 돈으로 800원에서 2000원 정도이니 얼마나 싼가. 또 돼지갈비 덮밥 껌스응과 뜨거운 단팥죽 같은 쩨농(che nong)을 먹을 수도 있으며, 베트남 쌀국수 퍼(Pho)도 즐길 수 있다.

또한 달랏에는 카페가 많다. 그 중에서 역사가 서린 뚱(Tung)카페란 곳은 1950년대 사이공 지식인들의 아지트로 유명했다. 서서히 남과 북의 갈등이 증폭되고 전쟁이 태동하던 그 시절의 탁자와 의자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이곳에서는 언제나 지나간 팝송들이 흘러나온다. ‘카사블랑카’, ‘아이 앰 세일링’, ‘디 엔드 오브 더 월드’, ‘엔드리스 러브’.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 중에는 꽁지머리 화가도 있고, 작가도 있으며, 옛 추억을 되살리러 오는 노부부도 있는데 모두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 듯, 아무 말 없이 기다란 소파에 앉아 창밖의 흘러가는 세상을 쳐다본다.

노인이 지나가고, 멋진 여인이 지나가고, 허름한 노동자가 지나가고,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아이가 지나가고…. 그렇게 어디론가 흘러가는 세상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다큐멘터리 무성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

달랏은 거창한 볼거리는 없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을 감상하고 음식을 즐기며 가끔 소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 가득한 매력적인 도시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달랏에서 머물던 며칠 동안 아침마다 가던 쌀국수집이 있었다. 하노이에서 왔다는 나이 든 주인은 늘 꼭두새벽부터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를 닮은 베트남 가수 ‘엘비스 퐁’의 노래를 틀어 놓았다. ‘짝퉁’ 가수 엘비스 퐁은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뿐만 아니라 올드 팝송과 샹송들을 불러댔다. 황제의 여름궁전이나 폭포보다도 이른 아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쌀국수와 엘비스 퐁의 흘러간 팝송이 베트남이란 나라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쌀국수집으로 달려갔고, 대머리인 주인 사내는 허허거리며 반겨주었다. 눈치로 보아 내 국수 값을 ‘조금’ 더 비싸게 받는 것 같았지만, 증거도 없었고 그리 큰 바가지도 아니어서 넘어갈 만했다.

쌀국수도 좋았지만 쌀국수를 늘 조심스럽게 나르는 10대 소녀의 공손함과 수줍은 미소는 더욱 좋았다. 어느 날 산책하러 이른 아침에 호숫가로 나갈 때 쌀국수집으로 출근하던 몸집 작은 그 소녀는 길거리에서 나와 마주치자 또 수줍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 모습이 슬프게 다가왔다. 일하러 간다는 것은 당당하고 즐거운 일일 텐데…. 아마도 소녀가 한창 공부해야 하는 학생의 나이여서 그랬던 같다. 다시 달랏에 간다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그 쌀국수집의 어린 소녀다.

여행정보

호찌민시에서 가는 가장 편한 방법은 여행자 숙소가 모여 있는 데탐 거리에서 달랏행 ‘오픈 투어 버스’를 타는 것이다. 오픈 투어 버스는 각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주요 관광도시 몇 곳을 연결하는데, 호찌민시에 달랏까지가 5달러 정도다. 그 외에도 호찌민∼달랏∼나짱∼호이안∼훼∼하노이까지 한번에 표를 끊은 뒤 계속 중간에 내려 며칠 동안 구경하다가 갈아 타면서 하노이까지 갈 수 있다. 하노이까지 27달러 정도로 많은 여행자들이 이용하고 있다. 호찌민시에서 달랏까지는 약 8시간 걸린다.

달랏의 교외를 돌기 위해 운전사가 딸린 오토바이를 탈 수도 있는데, 요금은 가는 곳과 시간에 따라 흥정하기 나름이다. 보통 10달러 정도지만 20달러를 요구하는 이들도 있고, 몇 군데 안 돌면 5달러 정도에도 가능하다.

by 100명 2007. 4. 13. 11:49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 <63> 베트남 나짱
[세계일보 2006-07-06 16:54]

베트남 남부에는 나짱(Nha Trang)이란 해변 도시가 있다. 베트남전쟁 시절 우리에게 영어식 발음인 나트랑으로 알려진 이 도시는 전쟁의 기억에서 멀어진 젊은이들에게는 감미로운 휴식처다. 쪽빛 해변의 코코넛나무 그늘에서 뒹굴며 마사지를 받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다 심심해지면 카이트서핑, 보트 서핑, 스노클링, 스쿠버 다이빙 등을 즐길 수 있는 흥겨운 관광지다.

그러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나짱이 먼 옛날 짬빠(Champa) 왕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에 눈길을 주게 된다.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해변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1번 국도를 타고 닌호아를 향해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하라(Hara)교와 썸벙(Xom Bong)교가 나온다. 이곳에는 혼쭝 해변이 있는데, 밤에만 바다로 나가고 낮에는 정박해 있는 어선들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엽서 같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하고 썸벙교를 건너면 왼쪽 산 위에 뽀나가르짬 탑(Thap Cham Po Nagar)이라는 힌두교 유적지가 나온다.

베트남의 중부지방은 먼 옛날부터 짬족이 일으킨 짬빠 왕국이 다스렸다. 짬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어계의 사람들로, 2세기 말 경 베트남 중부 지방에 나라를 세웠고 이 나라가 훗날 짬빠 왕국이 된다. 이들은 인도문화를 수용하며 힌두교를 믿었고 한때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앙코르 왕국을 공격해서, 앙코르 유적지에 있는 바이욘 사원의 벽에는 짬빠 왕국과의 전투가 부조로 새겨져 있을 정도다. 짬빠 왕국은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를 지배하며 14세기 중반까지도 비엣족이 다스리고 있던 북베트남과 치열하게 싸웠다. 짬족은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14세기 중반에는 남쪽의 메콩 델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나, 1428년 북베트남에서 레(Le·黎) 왕조가 새로 일으킨 다이비엣(Dai Viet·大越, 1428∼1788)에 침략당한다. 1470년에 다이비엣 군대는 짬빠 왕국을 침입해 왕을 생포했으며, 짬빠군 6만명을 살해하고 군민 3만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부터 짬빠 왕국은 다이비엣의 속국이 되었고, 나짱 부근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할 수 있었다.

◇뽀나가르짬 탑(왼쪽), 시장 풍경

그런데 다이비엣이 남북으로 분단되자 짬족은 1611년과 1653년에 남부 베트남을 다스리던 응우옌 왕조를 공격했으나 대패한다. 역사 속에서 패자의 설 자리란 그리 넓지 않았다. 짬족은 계속 남쪽으로 쫓겨갔고 응우옌 왕조는 점령지에 비엣족들을 이주시키며 더욱 세력을 다졌고 수도를 후에로 옮긴 후 18세기 중반에는 메콩 델타 지역까지 지배하게 된다. 그 후 응우옌 왕조의 응우옌 푹 아인(Nguyen Phuc Anh)이 1802년 전 베트남을 통일하자 짬빠 왕국은 완전히 소멸했고, 짬빠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현재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짬빠족이 소멸한 것처럼 그들의 유적지 또한 초라하기 그지없다. 계단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면 허물어진 탑들이 네 개 남아 있는데, 원래는 7, 8기의 탑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불교신자들이 와서 향 연기 자욱한 가운데 기도를 하고 있지만, 한쪽 발을 황소 난디(Nandi)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춤을 추는 힌두교의 죽음과 파괴의 신인 시바신상이 있는 등 짬빠 왕국의 흔적과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나짱은 베트남전을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1번 국도를 따라 북쪽의 닌호아 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지면 십자성 부대의 주둔지가 나온다. 색 바랜 원형의 초소 방호벽에는 탄흔이 곰보 자국처럼 나 있고 안에는 쓰레기와 말라비틀어진 똥들이 쌓여 있다. 계속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 정상에도 초소가 나오고, 고개를 넘어 계속 가면 한국군 십자성 부대의 사령부 건물이 나온다. 지금은 베트남군이 쓰고 있으며, 근처에는 연병장 터가 남아 있다. 십자성 부대는 병참부대로서 각 전투 부대에 군수품을 지원했고, 1965년 10월에 왔다가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이곳에 주둔했다.

나짱에는 이 외에도 나짱 대성당, 롱선사(Chua Long Son) 그리고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별장 등의 유적지가 있다. 현재 나짱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시원한 남국의 바람이 불어오는 맑고 깨끗한 해변과 그곳에서 즐기는 해양 스포츠다. 주변에는 머드 온천까지 있어 나짱에는 피곤한 여행자들이 여독을 풀며 한가한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정보

호찌민시에서 나짱까지는 기차를 타면 좀더 편하게 갈 수 있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달랏이나 므이네 등을 들려서 나짱으로 가는 오픈투어 버스를 이용한다. 호찌민에서 달랏이나 므이네를 거쳐 나짱까지 가는 오픈투어 버스를 이용하면 약 9∼10달러 정도가 들고, 12시간 정도 걸린다. 나짱 시내나 근교는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빌리면 편리하다. 해변을 중심으로 6, 7달러의 저렴한 숙소부터 15∼30달러 정도의 중급 숙소들이 많고, 물론 최고급 숙소들도 많다. 이곳은 바닷가답게 수많은 해물 요리를 즐길 수 있고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시며 밤을 즐길 수 있다. 나짱은 10∼12월이 우기이므로, 이 기간에는 많이 찾지 않는다. 하지만 우기에도 비는 밤이나 아침에 오며, 또 비를 즐기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이 시기에 여행을 떠나도 큰 지장은 없다.

■여행 에피소드

베트남에서는 생맥주를 비아 호이(Bia Hoi)라 부르는데, 나짱에도 비아 호이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다. 길바닥에 놓인 ‘목욕탕 의자’처럼 생긴 조그만 의자에 앉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데, 혼자 있던 나에게 옆에 앉았던 세 청년들이 알은 체를 했다. 이들은 모두 공장 노동자들로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 후 가끔 이같이 들러 술을 마시는데, 새끼손톱을 길게 기른 한 명은 클래식 기타를 잘 친다고 했다.

청년들의 술잔이 비어 있기에 1ℓ를 더 시켜서 같이 나눠 마신 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떠나며 계산하려고 하니 이 친구들이 자기들이 낸다며 말렸다. 서로 내겠다고 옥신각신하다가 주인 아주머니 손에 돈을 쥐어 주고 도망가는데, 비틀비틀 취한 채로 나를 쫓아온 청년이 기어코 내 주머니에 돈을 꽂아 주며 외쳤다. “깜옹(감사합니다).” 베트남에 가면 상혼에 물든 이들이 바가지를 씌워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지만, 이렇게 작은 인정을 베푸는 이들도 많아서 가면 갈수록 정이 드는 나라다.

by 100명 2007. 4. 13. 11:47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64〉베트남 할롱베이
[세계일보 2006-07-21 09:00]

할롱베이는 6월에서 9월까지 날씨가 쾌청하다. 4월에는 비가 종종 오는데 할롱베이로 향하던 그날도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하노이에서 차로 세 시간 반 정도를 달리자 항구가 나타났고 수많은 목선과 관광객들로 혼잡했다.

할롱베이, 즉 할롱만은 1500㎢의 넓이에 약 3000개의 암석이 떠 있으며, 1994년에 유네스코가 보존해야 할 인류의 자연유산으로 선정됐다. 영화 ‘인도차이나’의 배경으로 유명해졌고, 한국에서도 어느 항공사 CF의 배경이 되어 더욱 익숙해졌다.

할롱은 하룡(下龍)의 베트남식 발음으로 용이 내려왔다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이 바다로 내려와 해안을 달리면서 꼬리를 휘저어 계곡과 협곡이 파이면서 현재의 풍경이 만들어졌다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쩐흥다오(Tran Hung Dao)라는 민족 영웅이 몽골군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다. 1225년부터 1400년까지 베트남 북부를 지배한 쩐 왕조는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1285년에 처음 침략받았을 때 수도였던 탕롱(현재의 하노이)이 점령당했으나 쩐흥다오의 지휘로 사방에서 원군을 공격해 몇 개월 후 탈환했다. 이에 원군은 2년 후 다시 30만 대군을 이끌고 베트남을 침략해서 탕롱을 점령하고 도시를 파괴했으나 바다에서 패한다. 원군은 식량 부족으로 후퇴하는데, 이때 그들을 맞아 대승을 거둔 곳이 바로 할롱베이였다. 쩐흥다오는 강에 말뚝을 박아 놓고 밀물 때 원의 선박을 유인한 후 썰물 때 공격했으니, 그는 베트남 역사에서 한국의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이었다.

◇할롱베이 항구의 목선들(왼쪽), 하노이 거리

할롱베이는 신비스럽기도 하고 음산한 기운도 서려 있었는데 아마 비가 오는 우기여서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배는 섬을 향해 서서히 미끄러져 갔고 사람들은 갑판에 올라와 그림 같은 풍경에 넋을 잃었다. 석회암 바위들은 물에 닿는 부분이 녹아서 버섯, 코끼리, 닭, 개, 낙타 등을 닮기도 했는데,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던 배는 바다 속에 나무를 박아 만든 양식장 앞에 섰다. 그곳 사람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물고기를 키워서 팔고 있었다.

할롱베이 여행에서 꼭 들르는 곳은 섬에 있는 자연 동굴들이다. ‘더우 고’ 덩굴은 말뚝 동굴이라는 뜻으로, 쩐흥다오 장군이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바다에 박은 말뚝을 숨겨 놓았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이 유래했다. 이 동굴과 이어진 띠엔꿍 동굴은 원래 해적들의 동굴이었으나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는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다. 현재 관광객들의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은 동굴들에 있는 각종 아름다운 종유석들이다.

할롱베이는 이제 더 이상 은둔의 세계가 아니다. 몽골군이 쳐들어왔던 시절이나 베트남 독립투사들이 프랑스군을 피해 숨어들었던 시절에 찾아왔더라면 그야말로 세상 밖의 세상이었겠지만 이제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서 다소 번잡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흩어지고 나면 자취조차 흐릿해질 만큼 할롱베이는 넓고 넓다. 각박하고 분리된 세상 속에서 시달리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묘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바다와 하늘과 바위들의 경계가 흐릿한 회색 속에서 허물어지는 그 풍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또한 그렇게 스스로의 경계를 얼마나 허물고 싶어하는가? 그 흐릿한 풍경 속에서 잠시나마 그런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곳이 할롱베이다.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 여행 에피소드

베트남의 다른 지역도 그렇지만 특히 하노이는 외국인에 대한 바가지 혹은 이중 가격제가 심한 편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미니버스는 베트남인은 2만동(1.3달러 정도)지만 외국인인 나에게는 3만동, 즉 2달러를 내라고 했다. 물론 공식 가격이 아니라 ‘관습 가격’이다. 비슷한 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미니버스가 시내의 종점에 와서 서자 다른 승객들은 다 내렸지만, 인상 좋은 운전사는 내가 가는 호텔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선심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가 내려준 곳은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아니었다. 나를 내려놓은 운전사가 사라지자 그 호텔에서 나온 종업원이 서둘러 내 배낭을 낚아채려 했고, 금방 사태를 파악한 나는 그들을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 운전사가 호텔로부터 알선료를 챙기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음식점, 교통수단 등 여행자를 상대하는 모든 부문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공산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평등하다고 배웠는데 어느 순간 이데올로기가 무너지자 처참하게 빈곤이 드러났고 외국 관광객들이 갑자기 들어와 돈을 물 쓰듯 하자, ‘인간은 평등한데 있는 놈들의 것 좀 바가지 씌워서 나눠 먹자는 게 뭐 어떤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바가지와 이중가격제는 이런 심리 속에서 나타나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외국인들이 함부로 돈을 뿌리지 못할 정도로 베트남이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정상적인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 여행정보

개별적으로 직접 할롱베이 근처인 할롱까지 가서 배를 타고 돌아보는 방법이 있다지만 거의 모든 여행자들은 하노이의 호텔이나 구 시가지에 있는 여행사의 투어를 이용한다. 당일치기는 인원 수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는데 대개 버스, 선박, 점심식사를 다 포함해 15∼18달러 정도면 된다. 1박2일짜리도 있다. 중간에 자유시간을 갖고 선상에서 밤시간을 즐기며 천천히 할롱베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기도 한다. 사람들의 경험에 따라 당일치기가 좋다, 1박2일이 좋다 등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노이 구시가지 항박 거리와 주변이 여행자 거리로, 1박에 3∼4달러짜리의 도미토리와 싱글 룸에 7∼8달러 하는 저렴한 숙소부터 20달러 전후의 중급 호텔들이 몰려 있다. 고급 숙소들은 하노이 중심지에 많이 있다.

by 100명 2007. 4. 13. 11:46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65〉 터키 사프란볼루
[세계일보 2006-07-28 09:51]

터키의 서북부에는 사프란볼루(Safranbolu)란 마을이 있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이어지던 실크로드의 경유지답게 여인의 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하맘(터키 전통 목욕탕)의 둥근 지붕과 모스크, 그리고 고즈넉한 전통 가옥들이 어울어져 뭔가 아기자기한 비밀들이 잔뜩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포근한 분위기의 마을이다.

이곳에는 18세기와 19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부자들이 살았고, 그들이 살던 전통 가옥들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원래 사프란볼루가 유명하게 된 것은 사프란꽃 때문이었다. 사프란꽃은 유럽 남부와 터키가 원산지로, 노란색이란 뜻을 지닌 아랍어 자파란(zafaran)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사프란꽃이 많이 피는데 9월과 10월의 밤에만 피고, 씨를 4만개 뿌리면 단 한 개의 씨앗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그만큼 귀했던 사프란은 최고급 염색제, 약재, 향신료 등으로 쓰였다. 또 인도나 그리스에서는 최음제나 우울증 치료제로도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관광객들이 사프란볼루를 찾는 이유는 전통 목조가옥들을 보기 위해서다. 높고 낮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에는 시냇물처럼 마을을 돌고 도는 돌길이 펼쳐져 있고, 길을 따라 전통 목조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가옥들은 거의 다 2, 3층인데, 특이한 것은 창문이 많다는 것으로 하나만 있으면 될 만한 넓이에 보통 두 세 개의 창문이 있다.

전통 가옥들의 목재는 대부분 전나무, 소나무, 호두나무, 미루나무 등인데, 이 마을에는 전통 가옥이 약 2000여채가 들어서 있고, 그 가운데 800여채는 고가옥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 카라우즈밀러 하우스, 뭄타즐라 저택, 카이마카믈라 하우스 등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특히 18세기 무렵에 세워진 카이마카믈라 하우스는 1979년에 국유화해 현재 박물관이 되어 있다. 1층은 정원과 카페이고, 2층에는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4∼5개 정도가 있다. 수많은 창문들을 따라 밑으로 길게 나무 소파를 놓고 그 위에 카펫을 깔아 놓았는데, 터키의 전통 가옥은 남녀가 유별했으며 방들의 기능이 분화되어 있었다. 남자 손님들이 놀던 응접실에는 음식을 먹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남자들의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고, 여자들끼리 놀던 방에는 놀이를 하는 여자들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다. 또 하녀들이 기거하는 방,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방들이 따로 있다. 3층에는 아이들방, 주방 등이 있는데 터키인들은 전통적으로 대가족제도여서 식구들이 많았다.

◇전통 목조가옥들(왼쪽),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이런 전통 가옥들에는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고 그 중에서 일부는 펜션, 호텔, 정원이 딸린 낭만적인 카페와 음식점 혹은 기념품 상점 등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런 가옥에서 묵을 수 있는데, 목조가옥이라 계단이나 마루를 걸을 때면 삐걱거려서 마치 일본의 전통 여관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을에는 대장간과 공방도 있어서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중심지를 벗어나면 물 흐르는 계곡과 산 언덕에 수많은 가옥들이 들어서 있고, 더 나아가면 집과 나무가 사라지고 풀만 가득한 밋밋한 구릉 같은 산이 끝없이 펼쳐져서 문득, 세상을 멀리 떠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곳은 보러 가는 곳이 아니라 느끼러 가는 곳이다. 저물녘 마음의 긴장을 풀고 목욕탕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석탄 냄새를 맡고, 현지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받아가며 홀로 골목길을 걷노라면 문득 먼 과거의 실크로드를 오가던 나그네가 된 것만 같다.

곳곳에 숨어 있는 거리의 카페에서는 낭만적인 민요풍의 터키 노래가 흘러나오고, 늦은밤 여관의 창가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면, 온갖 세상 시름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렇게 잠시 세상을 이탈하는 순간이야말로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인데, 사프란볼루는 잠깐이나마 그맛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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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여행자 노린 범죄 조심

이곳은 관광지인 이스탄불, 에페스, 카파도키아만큼 붐비지 않아서 한적한 마을 분위기와 푸근한 인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점점 여행자들의 발길이 잦아질수록 조금씩 오염되는 현상도 보인다. 외국 여행자들이 많이 들르는 식당의 종업원들은 내국인들에게는 그러지 않으나 외국 여행자들에게는 은근히 팁을 바라고, 점점 돈에 민감해지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들도 생기고 있다. 또한 현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가 차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보니 외딴곳에 놓여진 채 모든 것을 털린 외국 여행자들도 생긴다.

얼마 전 한국 학생이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안타깝게 변을 당한 적도 있는데, 종종 약을 먹고 털리는 여행자들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터키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외국 여행자를 가장한 범죄자들의 소행도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물론 터키인 대부분은 친절하고 정이 많다. 그런 좋은 분위기에서 악의를 가진 사람을 가려내기란 더욱 힘든데, 자신이 다시 찾아갈 수 없는 낯선 곳이나 유흥업소 등에 갈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런 사고는 세계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으로, 어딜 가든 안전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늘 주의해야 한다.

>> 여행정보

이스탄불에서 갈 경우 직접 오토가르(버스터미널)로 가서 표를 사야 한다. 메트로 혹은 귀벤이라는 버스 회사에서 운행하는데 7시45분, 10시30분, 17시, 23시30분에 출발하고 약 7시간이 걸린다. 앙카라에서 갈 경우 약 4시간 소요. 사프란볼루에는 뉴사프란볼루(크란쾨이)와 올드 사프란볼루가 있는데, 관광객들이 가는 곳은 올드 사프란볼루다. 버스에서 내려 근처의 아스마 마켓까지 걸어간 후, 거기서 올드 마켓까지 가는 돌무시(미니버스)를 타면 된다. 약 2km 거리에 5분 정도 걸린다.

숙박비가 10달러에서 약 40달러 정도 되는 전통 가옥을 개조한 숙소들이 많이 있다. 사프란볼루에 가면 로쿰이란 것을 먹어볼 만한다. 과일, 너트 등이 들어 있는 매우 달고 고소한 젤리의 일종인데 사프란볼루의 로쿰은 맛있기로 유명하다.

by 100명 2007. 4. 13. 11:45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66>천국이 가까운 섬…필리핀 보라카이
[세계일보 2006-08-04 09:06]

보라카이 섬을 표현할 때 흔히 ‘천국에 가까운’이란 수식어를 쓴다. 그만큼 필리핀의 이 작은 섬은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1970년대 중반, 독일과 스위스의 어느 여행자들이 이 섬의 환상적인 경치를 유럽에 처음으로 알리리면서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해외여행 자유화 초기인 1980년대 후반부터 배낭여행자들이 방문하다가 서서히 일반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고, 지금은 보라카이 관광객의 약 60% 정도가 한국인일 정도다.

이 섬은 지도를 보면 ‘뼈다귀’처럼 양끝의 동서 폭이 2㎞ 정도로 두툼하고 중간 폭은 1㎞ 정도여서 걸어서 15분이면 섬 다른 편으로 갈 수 있는 특이한 형태다. 남북의 길이는 약 9㎞인데 서쪽 해변 중간에 약 7㎞의 화이트 비치가 있다. 이곳의 모래는 너무도 고와서 살에 닿는 순간 고운 밀가루처럼 느껴진다. 하늘 높이 치솟은 코코넛나무 그늘 아래 누워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을 보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코코넛 오일 마사지를 받아 가며 살갗을 스치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느끼는 순간, 왜 이곳이 ‘천국에 가까운 섬’이라 불리는지를 알게 된다.

그 바닷가에 누워 뒹굴다 보면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쁘게 살아왔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더 바쁘게, 더 많이를 외치며 살아가지만 호흡은 점점 가빠지고 스트레스는 더 쌓인다. 최소한의 먹을 것만 확보하기 위해 땀 흘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마시고 춤추고 사랑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 자신의 삶과 현대 문명에 회의하다가 조국도 잊고 모국어도 잊은 채 이 섬에 숨어버리는 서양인들도 있었고, 한국인 중에도 보금자리를 틀고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벗 삼아 한가로운 삶을 살아간 이들이 있었다.

이곳은 해양 레포츠의 천국이기도 하다. 보트를 타고 섬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스노클링과 스킨 스쿠버 다이빙을 통해 아름다운 바다 속을 구경한다. 또 작은 돛단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거나 보트로 윈드서핑을 즐길 수도 있다. 보라카이 해변의 즐거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곳에 오면 낙조를 꼭 봐야 한다. 저물녘 온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낙조 앞에서 사람들은 말을 잃고 넋을 잃으며, 다만 떨리는 가슴으로 위대한 대자연을 찬미한다. 밤이 되면 보라카이는 더욱 흥청거린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수많은 레스토랑과 카페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값싸고 푸짐한 해산물 요리에 맥주를 마시면서 라이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필리핀인들의 노래 솜씨는 대단한데, 표정이 딱딱한 필리핀 남자들에게서 나오는 노랫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감미롭다.

또 디스코텍에서 밤새도록 술 마시고 몸을 흔들다가 흥에 겨워 밤바다로 나와 하늘을 보는 순간, 탄성을 터뜨리지 않는 이가 없다. 보석처럼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은 너무도 낮아 보여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고, 하늘로 치솟은 코코넛나무를 타고 오르면 하늘에 다다를 것만 같다. 가끔 그 환상적인 풍경에 취해 옷을 다 벗고 바닷가를 스트리킹하는 이들도 있다.

보라카이 섬에 해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섬에는 약 1만명 정도의 주민이 살아서 마을도 있고 학교도 있고 시장도 있어서 해변의 휴식이 지루해질 때쯤 마을이나 시장을 돌아다니며 현지인들을 사귀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이렇게 즐거운 보라카이 섬이지만 예전의 한적한 해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관광지화로 변한 번잡한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밤이 되면 손님을 찾는 성매매 여성들 혹은 게이들도 보이고, 경쟁이 붙은 스킨스쿠버 업소 사이에서 당황하는 여행자들도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세계의 어느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보라카이 섬은 여전히 ‘천국에 가까운’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환상적인 휴양지임에 틀림없다.

by 100명 2007. 4. 13. 11:44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67〉발리
[세계일보 2006-08-11 08:36]

발리 섬의 이미지는 야자나무로 둘러싸인 한적한 백사장과 낭만적인 해변 아닐까.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발리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쿠타 비치(Kuta Beach)에 가서도 그 풍경에 조금 실망할 수 있다. 백사장은 넓고 파도 타기에 좋지만 해변의 아름다움은 한국의 동해안, 남해안을 능가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쿠타 비치의 매력은 주변의 흥청거리는 분위기다. 배낭 여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3K라 부르는 곳이 있다. 원래는 네팔의 카트만두, 발리의 쿠타 비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이었다가 카불이 전쟁 때문에 빠지고 대신 방콕의 카오산 로드가 추가되었다. 값싼 숙소, 음식점, 술집 등이 몰려 있는 쿠타 비치의 자유롭고 흥청거리는 분위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해방감을 느끼지만, 아쉽게도 지난해 이 근처에서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 명성이 빛을 바랬다.

그러나 발리 섬에 해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발리 섬의 중심 도시인 덴파사르(Denpasar)에서 북쪽으로 약 30㎞ 정도 올라가면 우붓(Ubud)이란 도시가 나오는데, 이곳은 휴양지가 아니라 문화 관광지다. 주변에는 계단식 논이 펼쳐져 있고, 돌집들 사이로 고즈넉한 분위기의 좁은 골목길들이 이어지며 힌두교 신상 앞에서 절을 하고 기도하는 여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 전역이 이슬람교를 믿지만, 발리 섬만은 특이하게 힌두교를 믿는다. 5세기경 인도네시아에 인도 세력이 들어오면서 불교와 힌두교가 전파되었고, 크고 작은 왕국이 번성하다가 13세기경 자바섬에서 마자파힛(majapahit) 왕국이 일어나 힌두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을 피해서 발리 섬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발리에는 힌두교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졌다.

발리 섬에는 약 2만개의 힌두교 사원이 있고 크고 작은 축제가 벌어지는데, 우붓에서는 바롱 댄스라는 공연을 볼 수 있다. 초자연의 힘을 지닌 성스러운 짐승인 바롱은 선의 상징이고, 그에 대항하는 악의 상징인 마녀 란다가 등장하여 무서운 싸움이 전개된다. 이 선과 악의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외에도 우붓 근처에서는 ‘케착(kecak) 댄스’도 공연된다. 수십명이 원을 그리고 횃불을 에워싼 채 ‘케착’ ‘케착’ 하는 원숭이 소리를 흉내 내서 원숭이 합창(라마나야 몽키 챈트)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것은 전염병의 유행이나 천재(天災)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집단 최면 종교의식이었다. 초경 전의 소녀가 최면 상태에서 춤을 추고 그에 맞춰 남성들이 합창을 하는데, 1930년대 이곳에 살던 네덜란드 화가 올터 슈피스가 인도의 힌두교 서사시 라마야나의 얘기를 합하여 현재의 케착 댄스를 창안하고 초연했다고 한다.

또한 우붓에는 많은 예술인들이 살면서 미술품과 목공예품을 직접 제작해서 판매하고 있다. 미술관들은 우붓 시내에, 힌두교 사원들은 근교에 많다. 힌두교 시바신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동시에 남근의 상징인 링가가 모셔져 있는 고아 가자(Goa Gajah·일명 코끼리 동굴 사원), 힌두교 성역으로 묘비들이 들어선 구눙 카위(Gunung Kawi)가 있다.

이 사원의 샘은 힌두교의 천둥과 번개의 신인 인드라신이 불멸의 영약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어 많은 사람들은 만병통치약이라 믿고 있다. 또한 16세기에 자바 섬에서 건너온 고승이 바다 위의 섬에 만든 타나 롯 사원(Pura Tanah Lot)에는 지금도 바다신의 화신인 하얀 뱀이 살고 있다는데, 전설을 믿지 않는 관광객들도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석양과 파도의 모습 앞에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또한 발리 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반복적이고 몽환적인 가믈란(gamelan·전통타악합주) 음악을 듣는 것이다. 발리섬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 전통적인 음악을 듣다 보면 문득 먼 과거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발리 섬에서 비치를 넘어서서 그들 고유 문화의 세계로 들어가 보고, 듣고, 느낀다면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다양한 문화의 향기 때문에 장기 체류하는 여행자들이 적지 않을 정도로 발리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섬이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정보

쿠타 비치나 우붓의 배낭여행자 숙소는 하룻밤에 5∼10달러 정도고, 수영장이 딸린 쾌적한 중급 숙소는 30∼40달러 정도다. 물론 고급 호텔도 많은데 한국에서 예약하면 싸게 구할 수 있다. 효율적으로 관광하는 데는 차를 전세내는 것이 편리하다. 숙소나 현지 여행사를 통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각종 공연은 우붓에서 많이 하는데, 인포메이션센터에 가면 자세한 안내를 받아 쉽게 즐길 수 있다.

현지 가이드의 소박한 꿈''물질 만능'' 우리 돌아보게 해

■여행 에피소드

우붓 주변의 관광지를 돌아보기 위해 봉고차와 함께 가이드를 고용했는데, 가이드는 자꾸 기념품 상점이나 보석 상점을 가도록 권유했고, 그런 것에 관심 없는 나를 껄끄럽게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친해질 수 있었다. 먼저 그 당시 어려웠던 나의 가정에 대해 얘기하자 그 역시 자신의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자기 위로 누나가 셋인데 모두 시집을 갔고, 동생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자기가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아직 미혼이었는데 그의 꿈은 결혼해서 아이 둘 낳고 사는 것이고, 아이 둘을 낳는 것은 정부의 권장 사항이라고 했다.

그러다 서울의 아파트 가격과 서로 옆집과도 잘 모르고 살며 이름만 대서는 사람을 못 찾는다는 등의 얘기를 하자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리 사람들의 주요 화제는 집이 크냐, 비싸냐보다도 아이가 몇이냐, 잘 크느냐라고 했다. 삶에서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으냐고 묻는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우리 역시 예전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교육비, 주거비 문제로 출산율이 줄어드는 현실을 생각하니 씁쓸했다. 글쎄, 발리 사람들도 앞으로 경제가 발전해서 우리처럼 되면 의식도 그렇게 변할까.

by 100명 2007. 4. 13. 11:43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68) 미얀마 양곤 물 축제에 가다
[세계일보 2006-08-18 09:06]
축제는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이요 일탈이다. 질서와 이성에 의해 억눌린 본능의 에너지를 잠시 카오스적인 상태에서 분출한 후 재충전하여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 축제의 의미가 있다. 미얀마의 물 축제, ‘띤잔(thingyan) 페스티벌’은 이런 축제의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축제일 것이다.

해마다 미얀마 달력으로 새해를 맞이하기 전 3, 4일간 벌어지는데 양력으로는 대개 4월 중순이다. 몇 달 전부터 이어온 더위 속에서 모두 지칠 때쯤 흥겨운 물 축제는 시작된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 양곤에 간 적이 있었다. 공항에서 위가 트인 트럭을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어디선가 물 봉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젖을까 봐 온몸으로 배낭을 끌어 안았지만, 계속 날아오는 물세례에 금방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양곤 시청 앞 광장의 커다란 연단에서는 미얀마 전통 복장을 한 무희들이 춤을 추고, 그 앞으로 트럭과 삼륜차, 승용차 등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차량들을 향해 호스의 물줄기들이 쏟아졌고, 청년들은 1년 동안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광란적으로 춤을 추었다. 시청 앞 광장만 그런 게 아니라 온 시내 곳곳에 설치된 연단에서 부녀자들이 고무 호스를 들고 행인, 차에다 물을 퍼부었다. 또 트럭에 탄 청년들은 미리 준비한 수백개의 물 봉지를 아무에게나 서로 던지는데, 가히 물 전쟁이었다. 소년들은 지나가는 여인들의 머리나 목에 물을 부었고, 장난기가 심한 아이들은 물바가지의 물로 지나가는 여인들의 엉덩이를 후려치기도 했다.

띤잔 페스티벌은 파간(pagan) 왕조 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양곤을 지나가는 이라와디 강물로 궁궐에서 물 축제를 벌였다. 물 축제 기간에는 떠자민(Thagyamin)이라는 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의 선행 공덕을 평가한다.

미얀마어 띤잔은 산스크리트어의 티타우(Thitau)에서 나온 말로 ‘change over’란 뜻. 즉 묵은 것과 불순하고 추한 것을 물로 깨끗이 씻어버린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것은 묵은 것을 씻어내고 신의 은총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의미이기에 이 기간만큼은 무례하게 물을 퍼부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 물 축제 때 ‘물 전쟁’만 벌이는 것은 아니다. 사원에서는 불탑과 불상을 깨끗이 씻어주고, 웃어른의 머리를 물로 깨끗이 감아주는 봉사를 한다. 떠자민은 인도 힌두교에서 폭풍의 신인 인드라신을 의미하고 불교에서는 제석천이라 부르는데, 진지한 이들은 사원에 가서 참선이나 자선을 함으로써 공덕을 쌓는다. 하지만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이 축제는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서로에게 물 봉지를 던지는 한바탕 놀이다.

밤이 되면 물뿌리기는 끝나고 거리에 설치된 수많은 무대에 주민들이 나와서 춤추고 노래 부르며, 시청 앞 광장의 무대에는 각 지방의 대표들이 나와 춤 경연 대회를 벌인다. 미얀마의 춤은 손가락, 손목, 팔목, 어깨, 가슴, 허리, 엉덩이, 무릎, 발가락, 발바닥 등 모든 신체 부위를 사용하는데 춤추는 모습이 매우 경쾌하고 흥겹다.

양곤에서는 3일, 다른 지방에서는 4일간 하는데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종교적인 명상과 관조의 시간을 가지며 승려들에게 갖가지 공양물이 바쳐진다. 그리고 다음날, 즉 미얀마의 새해부터는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너무나 조용해서 지루할 정도다.

현재 미얀마 사람들은 사회주의 군부 독재 밑에서 빈곤하게 살아가고 있다. 외부와 단절된 만큼 사람들은 매우 순박하다. 양곤은 도시 전체의 약 40%가 아름다운 공원과 호수 그리고 파고다(탑) 등의 관광지이지만, 이 축제만큼 화끈한 볼거리는 없다. 세상에는 많은 축제가 있지만 미얀만의 물축제만큼 격렬하고 원시적인 축제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코리안'' 이라며 내게 물세례 생쥐 꼴 됐지만 스트레스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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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의 물 축제 기간 동안 거리의 음식점에서 국수를 먹을 때였다. 낮은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젓가락질을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목 뒤에다 물을 퍼붓는 게 아닌가. 돌아보니 웬 중년 여인이 바가지를 든 채 웃고 있었다. 나도 바가지를 빼앗아 똑같이 그녀에게 물을 부었는데, 그 후부터 재미가 들린 나도 적극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트럭에 대고 물 봉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는 물 봉지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에게나 물 봉지를 던지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물과 바가지는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나중에는 거리의 음식점에서 국수를 먹던 연인의 목 뒤에 물을 부어 버렸다. 평소 같으면 무례한 일이겠지만, 그들은 슬그머니 웃기만 했다.

급기야 아무 지프에나 올라타 시청 연단 앞을 지나갔는데, 청년들이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자 ‘코리안’을 외쳐댔고 물줄기는 나에게 집중되었다. 언젠가 이 기간에 다시 간다면 며칠 동안 물싸움만 하다 오고 싶다. 3일 동안 그러고 나면 스트레스가 싹 풀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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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은 주2회 직항을 운행한다. 또, 방콕을 거쳐 가는 방법도 있다. 한국이나 방콕에서 미리 비자를 받아야 한다. 관광비자로는 4주 동안 체류할 수 있다. 미얀마는 1993년부터 외국인들에게 달러를 대용 화폐인 FEC(Foreign Exchange Certificate)로 강제 환전시켰다.

처음에는 300달러, 나중에는 200달러를 강제 환전시켰는데 이 FEC는 호텔비, 항공료, 기차운임 등에 사용했고 음식, 시내 교통비 등은 현지 화폐인 차트(Kyat)를 쓸 수 있었다. 문제는 암달러 환율과 은행의 공식 환율이 100∼200배 차이가 난다는 것. 그러니 여행자들은 암달러상에게 바꾸는 것이 좋은데, 이미 바꿔 놓은 FEC를 안 쓸 수도 없고 재환전도 되지 않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그걸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슬며시 FEC로 안 바꾸고 입국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담당자에게 뇌물을 주고 약간의 달러만 환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제도가 2004년부터 잠정 폐지됐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상황이 계속 바뀌므로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by 100명 2007. 4. 13. 11:42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69)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세계일보 2006-08-25 09:12]

인도네시아 자바(Java)섬에 욕야카르타(Yogyakrta)라는 도시가 있고, 여기서 서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곳에 세계 문화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보로부두르(Borobudur) 불교 사원이 있다.

불에 강하고 세공하기 좋은 화산암 100만개를 사용해서 만든 이 사원은 거대한 산처럼 보인다. 벽돌로 차곡차곡 1층을 깐 뒤 2층을 올리는 식으로 계속 쌓아 올려서 내부에는 공간이 없다는데,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피라미드형이다. 2층에서 5층까지는 폭 2m의 회랑이 만들어져 있고, 이 회랑의 벽에는 불교 설화와 관련된 수많은 부조가 새겨 있다.

회랑을 따라 부조를 감상하며 한 층씩 올라가다 6층으로 올라서는 순간 정사각형의 넓은 단이 펼쳐진다. 이곳은 밑과는 달리 꽤 넓은 공간이어서 테라스라고 불리는데, 확 트인 파란 하늘과 평원이 보인다. 이 위부터는 원형의 단이 있고, 그 단 위에는 커다란 종 모양의 스투파(탑)들이 들어서 있다. 7층 단에는 32기, 8층에는 24기, 9층에는 16기가 있는데 중앙에 있는 가장 높고 큰 대스투파는 지름이 16m다. 이 스투파 안에는 각각 1구의 불상이 들어 있는데, 현지인들은 빈틈 사이로 오른손을 넣어 약지로 불상을 만지면 행복이 온다고 하여 너도나도 손을 집어넣는다.

이 사원은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그것을 추측하려면 자바섬의 고대 역사를 알아야 한다. 자바의 전설에 의하면 1세기 무렵 인도인이 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414년에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바섬에 들러 약 5개월간 체류했던 중국 승려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에 보면 그 당시 힌두교도 널리 퍼졌다고 한다. 자바섬에서는 이처럼 불교와 힌두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했는데, 8세기 중엽에 나타난 마타람 왕국은 힌두교를 믿었고, 근처에서 일어난 사이렌드라 왕국은 불교를 믿었다. 이 두 왕국은 서로 경쟁했고, 8세기 중엽쯤 나타나 마타람 왕국을 눌렀던 사이렌드라 왕국도 9세기 중엽쯤에 멸망한다. 보루부두르 사원은 9세기쯤 사이렌드라 왕국이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추정일 뿐이다. 그러나 사이렌드라 왕국 자체가 수수께끼에 싸여 있고 어떤 과정을 통해 망했는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보로부두르’라는 이름의 의미에도 여러 설이 있다. 사이렌드라 왕국은 832년에 멸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왕가 계통의 한 여성이 마타람 왕가에 출가해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 왕후가 842년에 사원 ‘캄란이부미상바라부다라’에 논을 기증했다는 비문이 보이는데, ‘캄란이부미상바라’를 산스크리트어로 풀이하면 ‘깨달음의 단계로 가게 하는 여러 법을 상징하는 산’을 의미한다. 그런데 부미상바라부드라(Bhumisam Bharabhudhara)에서 뒤의 바라부드라(Bharabhudhara)가 변하면서, 즉 알파벳 ‘에이’가 ‘오’로 와전되어 현재의 보로부두르(Borobudur)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산스크리트어로 보로는 ‘승방(僧房)’, 부두르는 ‘높게 쌓인 곳’이라 하여 ‘높은 언덕 위에 쌓인 승방’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이 사원은 왜 만들었을까? 그것도 여전히 수수께끼다. 왕의 무덤인지, 왕조의 사당인지, 불법을 형상화한 만다라인지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다.

이 사원은 약 900년간 흙 속에 파묻혀 있다가 1814년에 발굴된다. 그런데 보로부두르 사원의 벽돌과 그 위에 덮힌 흙의 성분이 같아서, 만들어짐과 동시에 파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근교의 메라피 화산 폭발로 매몰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고 한다. 이렇게 수수께끼에 싸인 보로부두르 사원은 이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전 인류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욕야카르타에는 비슷한 시기에 마타람 왕국에 의해 건설된 힌두교 사원 프람바난(Prambanan)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보로부두르 사원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조각과 부조의 섬세함은 더 뛰어나다. 이 사원에서는 밤에 힌두교 설화인 라마야나의 공연도 펼쳐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늘 화산 폭발과 지진으로 불안하다. 얼마 전인 2006년 5월27일에도 지진으로 욕야카르타 시내가 파괴되기도 했다. 다행히 이 사원들은 큰 피해는 안 입었지만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쳔년의 세월 동안 흙 속에 묻혔던 보로부두르 사원이 다시 흙에 파묻히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욕야카르타는 매우 무더운 곳이다. 그래서 유적지를 돌아보려면 아침 일찍 떠난다. 도착하니 날씨는 아직 선선했고, 아래에서부터 수많은 부조를 구경하며 천천히 올라가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정상 부근에 올라가니 언제 왔는지 수많은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외국 관광객들이 나타날 때마다 달려들어 많은 질문을 했다. 나에게도 “어디서 왔어요, 하는 일은 뭡니까, 인도네시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등의 질문을 퍼부었다. 알고 보니 영어회화 연습을 위해 단체로 나온 대학생들이었다. 오전에는 늘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데, 그들의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매우 강렬해 보였다. 보로부두르 사원도 좋았지만 이런 젊은이들을 만나 대화하는 시간도 즐거웠다.

◆여행 정보

자카르타에서 오전 7시5분에 우리의 새마을열차격인 엑세쿠트프(Eksekutif)를 타면 8시간 정도 걸린다. 요금은 18.5달러 정도. 야간 열차도 있다. 기차는 자카르타 중심지의 감비르(Gambir)역에서 출발하지만 예매는 시내 외곽의 주안다(Juanda)역의 예매소에서 한다. 비행기로 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리고 요금은 약 55달러 정도. 욕야카르타의 숙소는 수영장 딸린 깔끔한 게스트 하우스가 더블베드에 15달러 정도, 이비스(Ibis) 같은 별 세 개짜리 호텔은 45달러 정도. 물론 더 좋은 호텔들도 많다. 보로부두르, 프람바난 사원을 돌고 공연을 보는 일일투어의 비용은 약 18달러다. 보로부두르 입장료 8달러와 프람바난 입장료 7달러는 모두 별도다.

by 100명 2007. 4. 13. 11:40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0〉 인도네시아 반둥
[세계일보 2006-09-01 08:51]

인도네시아에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산다. 그 중에서 순다인은 자바인 다음으로 많은데, 순다인의 중심지는 인구 약 150만명이 살고 있는 반둥(Bandung)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이 도시는 해발 750m로 기온이 서늘하고, 대학이 많아 교육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반둥에서는 국제회의도 많이 열렸다. 1955년 수카르노, 저우언라이, 호찌민, 나세르 등 제3세계 수뇌들이 모여‘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연 곳도 반둥이다. 반둥 시내에는 ‘자바원인’의 뼈가 보관된 지질학 박물관과 서부 자와 문화박물관 등이 있는데,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은 근교에 있는 탕쿠반프라후(Tangkuban Perahu) 산의 분화구다. 자와(영어명 자바) 섬 최대인 이 화산은 반둥에서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탕쿠반프라후는 ‘뒤집어진 배’라는 뜻으로, 형태가 그렇게 보인다.

분화구까지 자동차가 올라가는데, 차에서 내리면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해발 2096m인 이 활화산 분화구의 전망대에 서면 지금도 푹 꺼진 분화구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솟고 있다. 우기인 9월에서 1월 사이에 찾으면, 종종 비도 오고 천둥소리가 들려 섬뜩해지면서 대자연의 장엄함을 느끼게 된다. 분화구 주변은 걸을 수도 있는데 상인들이 대나무로 만든 볼펜, 목걸이, 유황 가루, 류머티즘에 좋다는 나무 가루를 팔면서 한국말로 “싸요, 싸요”를 외치고, 피부에 좋다는 약을 팔 때는 “여드름, 여드름”을 외쳐서 웃음을 자아낸다.

화산 근처에는 치아트르(Ciater)란 온천도 있고, 분화구에서 렘방(Lembang)이란 곳으로 내려와 동북쪽으로 약 30km를 달리면 아름다운 전원 풍경과 언덕이 펼쳐진다. 이곳은 공원처럼 만들어졌는데, 온천 풀장이 있어 쏟아지는 온천 물줄기 밑에서 현지인들이 목욕을 즐긴다.

반둥의 근교에는 다고(Dago)란 곳도 있다. 언덕과 계곡 사이에 고급 전원 주택들이 들어선 평화롭고 고즈넉한 곳으로, 운치 있는 인도네시아 전통 찻집인 ‘다고 티 하우스’는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다.

◇다고 티 하우스(왼쪽), 탕쿠반프라후 화산 분화구

그러나 반둥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사웅 앙클룽 우조(Saung Angklung Udjo)’다. 이 곳은 대나무로 만든 인도네시아 전통 악기 앙클룽(Angklung) 연주를 보고 배우는 곳이다. 1967년 1월 망 우조(Mang Udjo)와 그의 아내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단체 관광객들이 주로 찾아온다. 아주 먼 옛날에 마을에서 포경수술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아이 앞에서 앙클룽 연주를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원래 전통적인 미니 앙클룽(Mini Angklung)은 간단한 노래만 연주하고 리듬 악기로만 쓰였다. 그러다 1938년에 현재의 파다엥 앙클룽(Padaeng Angklung)으로 개조해서 모든 노래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더욱 개발된 아룬바(Arunba)라는 악기도 나왔다. 이 악기가 나오면서 수많은 대나무를 이용해 화음도 맞추고 역동적인 음색을 창조하게 된다.

사웅 앙클룽 우조에서는 2시간 동안 약 20여명의 학생이 연주하는 것을 감상할 수가 있다. 먼저 나무로 만든 인형, 즉 와양 골렉(Wayang Golek)의 인형극을 공연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가죽으로 만든 인형인 와양 쿨릿(Wayang Kulit)을 이용한 그림자 인형극, 사람이 인형처럼 분장하여 공연하는 와양 오랑(Wayang Orang) 등도 유명하다. 그다음부터 앙클룽 연주가 시작되는데,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은 물론이고 귀에 익은 서양 음악 그리고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 등도 연주한다. 예닐곱 살부터 10대 후반의 아이들이 다같이 앙클룽을 연주하고 무대 위에서 커다란 아룬바를 두드리는 연주는 흥겹기 그지없다.

연주가 끝나면 관람객들도 같이 앙클룽을 배우는 시간이 있다. 관람객들은 각자 한 음만 낼 수 있는 미니 앙클룽을 가지고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흔드는데, 지휘자가 손가락으로 1번을 표시하면 1번이라고 새겨진 미니 앙클룽을 흔든다. 이것이 도다. 3번은 미고 5번은 솔인데, 인도네시아에서는 학교에서도 음계가 아닌 번호를 사용해 음악을 배운다고 한다.

반둥은 이처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지고 온순한 사람들과 살결이 흰 순다 미녀들이 많이 사는 매력적인 도시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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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간 밤거리 술집 여자들이 치근거려

반둥의 밤거리를 걷다가 ‘월드 단돗 뮤직(World Dandot Music)’이라는 간판이 보여 들어가 보았다. 조그만 무대에서는 남자 연주자 다섯 명이 전자오르간, 기타, 탬버린, 드럼, 술링(피리) 등의 악기로 연주를 하는데 특히 구슬픈 술링 연주가 좋았다. 그런데 밤 10시가 되었는데도 수십명 정도가 앉는 객석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가수가 나와 부르는 단돗(Dandot)이라는 인도네시아 전통 가요는 트로트풍이어서 친근했다.

한동안 듣고 있는데 마담이 오더니 여종업원을 합석시키라고 권했다. 싫다고 했는데도 야한 옷차림의 여인이 옆에 와 앉았다. ‘한 시간 동안 같이 얘기하는 데 얼마’라며 권하던 여인은 계속 거절당하자 이내 사라졌다. 그런데 잠시 후 다른 여자가 또 와서 치근거리는게 아닌가. 더 이상 앉아 있기가 불편해서 나오기로 했다. 생맥주 한 잔과 안주가 모두 3600원, 세금 10% 합해서 약 4000원 정도가 나왔으니, 바가지 씌우는 건 아니었지만 편한 곳은 아니었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낯 모르는 여자와 어색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술이나 실컷 마시면서 음악 속으로 푹 빠져들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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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서 엑세쿠트프(Eksekutif·새마을 열차급)를 타면 반둥까지 약 3시간30분 소요. 탕쿠반프라후 화산 분화구는 미니버스인 앙코타를 타고 레당(Ledang 40분 소요)까지 가서, 다시 렘방(20분 소요)으로 가는 앙코타를 갈아 탄다. 렘방에서 화산 분화구까지 올라가는 차는 여럿인 경우 1인당 1달러, 혼자서 타면 7달러 정도. 렘방에서 치아트르 온천까지 오토바이를 타면 왕복 4달러 정도. 사웅 앙클룽 우조의 공연은 20명 이상이 되어야 하므로 단체여행자 틈에 끼어서 보아야 한다. 미리 연락해서 공연 일정을 알아보는 것이 좋다. 연락처는 022-7271714. 시내에서 사웅 앙클룽 우조가 있는 파크 우조(Pak Udjo)까지 택시를 타면 3∼4달러 정도 요구한다. 시내로 올 때는 대로로 나와 오른쪽으로 가는 켈라파(kelapa)행 앙코타를 타면 된다.

by 100명 2007. 4. 13. 11:39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1)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세계일보 2006-09-08 08:39]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약 13㎞ 떨어진 기자(Giza) 지역 사막에는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있다. 이것들은 왜 만든 것일까? 우선 왕들의 무덤이란 설이 있다. 이집트의 초기 무덤은 마스타바(mastaba) 양식이었다. 마스타바는 그 당시에 이집트인들이 쓰던 직사각형의 진흙 의자였다. 이 같은 형태의 마스타바 양식이 발전하면서 계단식 피라미드로 변했고, 이것이 더 발전해서 기자에 있는 사각뿔형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설들도 있다. 전체 피라미드 배치를 보면 가장 오른쪽에 쿠푸왕의 피라미드(제1피라미드), 그 왼쪽 옆에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제2피라미드), 그리고 맨 왼쪽에 가장 작은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제3피라미드)가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가장 커서 대 피라미드라고도 불리는데, 원래 높이는 약 146.73m이지만 벼락 혹은 지진으로 파손되어서 약 9m 정도가 떨어져 나가 현재는 약 137m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3000년경 제 1왕조, 제 2왕조가 나일강의 상류와 하류 지역을 통합하여 이집트 문명의 기틀을 잡은 후, 고왕국 시대(기원전 2650∼2180년, 제3∼6왕조)가 열린다. 피라미드가 출현한 시기는 고왕국 시대의 제4왕조 때로, 기자 지역에 피라미드를 가장 먼저 만든 왕은 쿠푸왕이었다.

그로부터 약 3300년이 지난 서기 818년, 아랍 세계의 지배자 칼리프 알마문은 궁핍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도굴한다. 도굴꾼들은 무작정 입구를 부수다가 정식 통로를 만났고, 그 길을 따라 중심부에 가니 길이 10.5m, 폭 5.2m, 높이 5.8m의 현실이 나왔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도굴된 흔적이 전혀 없는데도 뚜껑 없는 석관만 있을 뿐 미라와 부장품은 물론 그 흔한 벽화도 없었다.

그래서 기자의 피라미드는 무덤이 아니라는 설도 많다. 특히 요시무라 사쿠지 같은 일본 학자는 피라미드의 배치에 공간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원래 비슷한 크기로 기획되었지만 작은 제3 피라미드는 재정난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후 지도상에서 제3 피라미드를 두 배로 확대시켜 보니 제1, 2, 3 피라미드의 대각선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었고, 그 선을 스핑크스 앞에 있는 신전과 잇자 직삼각형이 나왔다고 한다. 요시무라 사쿠지는 쿠푸왕이 이 직삼각형 안의 공간에 내세의 생활을 체험하는 가상 천국을 만들고, 왕위 즉위식이나 축제 등의 의식을 거행하려 했으며, 진짜 쿠푸왕의 미라는 도굴을 피하기 위해 대피라미드 근처에 파묻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 그레이엄 핸콕 같은 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지구 적도의 둘레는 약 4만68㎞이고 북극에서부터 지구의 중심부까지 잰 지구의 반지름은 약 6355㎞인데, 이것을 각각 4만3200으로 나누면 927.5m와 147.11m가 나온다. 그런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밑면의 둘레는 921.46m로 축소된 지구 적도의 둘레 927.5m와 비슷하고, 높이는 146.73m로 축소된 지구 반지름 147.11m와 비슷하다.

즉,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지구 북반구를 축소해 형상화한 것이고, 그 비율 축소에 사용된 숫자가 4만3200이다. 432란 숫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 고대 문명에서 나오는 신비의 숫자다. 또 컴퓨터를 통해 세차 운동을 계산하여 우주의 별자리를 역산한 결과, 기자 피라미드들의 배열은 기원전 1만450년경의 하늘에 보이는 오리온 자리의 배열과 똑같고, 환기 구멍은 기원전 2475년에서 기원전 2400년경의 시리우스 별자리에 조준되어 있다. 즉,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2475년∼ 2400년경에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만들면서 그 시기를 환기 구멍이 가리키는 방향의 별자리를 통해 표현했다. 또한 기원전 1만450년경에 지구의 엄청난 대격변으로 매우 발전한 고대 문명이 멸망했는데, 후손인 그들은 이를 잊지 않기 위해 그 시절의 오리온 별자리를 지상에 구현시켰다고 주장한다.

피라미드는 건축 방법도 수수께끼에 쌓여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는 높이 1m, 평균 무게 2.5t 짜리 돌 약 250만개가 사용됐다. 이 돌들을 높이 3m, 두께 30㎝로 자르면 프랑스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담이 쌓일 정도다.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 도구가 없어서 지레나 굴림대를 이용하고, 청동 말고는 강한 연장이 없었던 시절인데 어떻게 그 많은 돌들을 정교하게 다듬고 운반했을까?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나일강이 범람하던 약 3개월 동안 인부들을 동원했고, 연인원 10만명이 20년 동안 쌓아왔다고 기록했지만, 현대 과학자들은 그 기록의 부정확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피라미드의 축조 의미와 공사 방법이 명쾌하지 않다 보니, 외계에서 온 생물체가 자신들의 연락 기지로 쓰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지 4500년이나 지난 지금 온갖 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라미드는 더욱 매력적이고 신비하게 다가온다.

이지상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에피소드

도굴꾼들이 판 쿠푸왕의 피라미드 통로가 널찍해서 걸어 들어갔으나, 정식 통로가 나오자 좁고 가팔라졌다. 허리를 굽히고 위로 30, 40m 올라가자 대회랑이 나왔고 계속 올라가자 텅 빈 현실 ‘왕의 방’이 나왔다. 환기 구멍이 있어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지만 뚜껑 없는 석관만 있어서 허탈했다. 구경을 마친 후 나가기 위해 좁은 통로를 구부정하게 걸어가는데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소녀들이 나를 보자 “꺄악”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하자 뒤따르던 애들도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밖으로 나오니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모두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가 중국에서부터 시작한 여행이 9개월째 되어 가던 무렵인데, 아이들은 장발에 수염을 안 깎은 내가 피라미드에서 나오는 괴물인 줄 알고 놀랐던 것 같다. 황당하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행정보

카이로에서 기자로 가려면 직접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40분 정도 걸리는데 만원이어서 매우 불편하다. 카이로의 여행사나 숙소에 들르는 저렴한 가격의 미니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

by 100명 2007. 4. 13. 11:38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2) 이집트 룩소르
[세계일보 2006-09-15 09:27]

기원전 3000년경부터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자살한 기원전 30년까지 약 3000년간 지속되었던 이집트 문명은 인류에게 중요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그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고왕국 시대(기원전 2650년∼2180년) 때 만들어진 피라미드들이지만,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신왕국 시대(기원전 1570년∼1069년)였다.

신왕국의 수도는 테베로, 현재의 룩소르를 말한다. 룩소르의 나일강 동편은 산 자들의 세계로, 예나 지금이나 상업과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다. 반면 해가 지는 서쪽의 황량한 계곡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수많은 파라오(이집트의 지배자)들의 무덤이 있어서 ‘왕가의 계곡’이라 불린다.

동쪽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은 카르나크 신전이다. 이곳은 룩소르의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2세 이래 역대 파라오들이 새로운 건축물을 계속 추가했는데, 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들이 늘어서 있는 통로를 통해 들어가면 아몬 라 신을 모시는 거대한 대신전과 대열주실이 나타난다. 둘레 15m, 높이 23m나 되는 거대한 기둥들이 134개가 들어선 대열주실에서는 누구나 까마득한 기둥을 쳐다보며 위대한 이집트 문명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아몬신은 원래 테베 지방의 사람들이 믿는 지방신으로 테베가 이집트의 중심지가 되면서 국가 신으로 등장하고, 후일 태양신 라신과 합쳐지면서 아몬 라 신이 된다.

나일 강변의 룩소르 신전도 역시 아몬 라 신을 모신 곳으로, 왼쪽에 오벨리스크가 있다.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한 기념탑으로, 오른쪽에 있던 것은 현재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있다. 계속 들어가면 거대한 람세스 2세(기원전 1279년∼1212년)의 좌상과 입상이 나타난다. 그는 나이 30세에 파라오에 즉위하여 67년간 이집트를 지배하며 대외 전쟁을 많이 치른 이집트의 위대한 왕이었다.

◇카르나크 신전 앞의 양 머리 스핑크스(왼쪽),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발굴된 옥좌에 새겨진 부조

배를 타고 나일강의 서편으로 건너가면 제일 먼저 높이가 20m인 거대한 석상 두 개를 보게 된다. 원래 아멘호테프 3세가 세운 신전의 입구에 세워졌었는데 정작 신전은 사라지고 석상만 남았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그리스의 영웅 멤논의 거상이라고 불렀다. 새벽이면 거대한 석상들이 울음소리를 냈는데, 죽은 멤논이 자신의 어머니인 여명의 여신 에오스를 부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석상의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진동 소리라고 한다.

이 근처에는 하트셉수트 장제전(葬祭殿)도 있다.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스 1세의 딸로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였다. 이집트 왕실은 피를 보존하기 위해 근친결혼을 해왔고, 또 왕가의 남자들은 왕가의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파라오의 위치에 오를 자격을 얻었는데, 친오빠나 남동생이 없었던 그녀는 이복동생인 투트모세스 2세와 결혼하지만, 남편이 일찍 죽자 이번에는 투트모세스 2세와 첩 사이에서 난 자식인 투트모세스 3세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하트셉수트는 어린 남편이며 아들뻘이었던 투트모세스 3세를 몰아내고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파라오 자리에 올랐다가 후일 투트모세스 3세에게 쫓겨나 죽게 되는 비운의 여자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위로는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계곡이 펼쳐진다. 여기에는 수많은 파라오들이 바위 속을 뚫고 묘를 만든 후, 스스로 미라가 되어 묻혔다. 그러나 후일 도굴꾼들에 의해 거의 다 파헤쳐졌는데, 유일하게 그대로 발굴된 것이 제18왕조 투탕카문의 무덤이었다. 1922년 11월 27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굴된 그 묘에는 호화로운 금박 장식의 나무관, 순금으로 만든 동물 머리 등 수많은 보물들과 함께 푸른 유리띠 무늬를 덧붙인 황금마스크를 쓴 투탕카문이 3300년 전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는 실권이 별로 없었던 불우한 파라오로, 어린 나이에 죽어서 초라한 곳에 묻혔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도굴꾼들의 눈에 띄지 않아 현대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부활을 꿈꾸며, 죽어서도 화려한 보물로 치장한 모든 파라오들은 그 욕심 때문에 안식을 취하지 못했다. 도굴꾼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해 파헤쳐진 그들의 미라는 이제 박물관에서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왕가의 계곡에 서면 세상의 모든 영광은 덧없으며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게 된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정보

카이로에서 룩소르까지는 대개 야간 열차를 타게 된다. 12시간 정도 걸리는데 종종 연착한다. 왕가의 계곡을 돌려면 차를 대절하는 게 좋은데, 건너가는 동안 호객꾼들이 달라붙는다. 체력이 좋다면 미리 자전거를 빌려서 배에 싣고 건너가 이용하는 것이 속 편하고 좋다. 햇살이 뜨거운 걸 예상해 아침 일찍 출발하고 모자, 선탠 크림, 물 준비는 필수다.

◆여행 에피소드

유명 관광지는 어디나 비슷하지만 이집트의 룩소르도 상인들이나 호객꾼들이 매우 거칠다. 배를 타고 나일강 서편으로 가는 동안 계속 차를 전세 내라며 달라붙는 호객꾼이 있었다. 왕가의 계곡은 매우 넓기에 차가 필요한데, 배가 서편에 도달할수록 협상 가격은 점점 떨어졌다. 같은 배에 탔던 미국 여인 둘과 함께 차를 빌렸는데 돌아다니는 동안 꽤 피곤했다. 이집트인 운전사, 계곡에서 손님들에게 접근하는 가이드, 어슬렁거리는 청년들이 미국 여인들에게 자꾸 치근거렸다. 폭력적이지는 않았지만 살을 은근히 만져보고 사진 찍자며 어깨동무하는 식의 치근거림이었다.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미국 여인들은 적당하게 처리를 했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겠지만 이집트의 유명 관광지에서는 여자들끼리 여행하려면 남자들보다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너무 겁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런 불편함과 고통을 처리하는 과정도 여행의 일부며, 그것을 극복한 후에 맛보는 기쁨이 더 값지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by 100명 2007. 4. 13. 11:37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3> 이집트 텔 엘 아마르나
[세계일보 2006-09-22 08:48]

이집트인들은 여러 신을 믿었다. 그 중에서도 신왕국 시대(기원전 1570∼기원전 1069년)에는 나일강 상류 테베(현재의 룩소르) 지방에서 믿던 ‘아몬’ 신이 세력을 떨쳤다.

후일 아몬 신은 나일강 하류 지방에서 믿던 태양신 ‘라’와 합쳐지면서 강력한 국가 신 ‘아몬 라’ 신이 되었다. 그런데 아몬 라 신과 다른 신들을 부정하면서 유일신을 믿던 시절이 있었다. 카이로와 룩소르 중간쯤에 있는 텔 엘 아마르나(Tell el-Amarna)라는 폐허 유적지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가 있다.

말라위(Malawi)라는 중소도시에서 선착장까지는 야자나무가 보이는 한적한 전원 풍경이 펼쳐지고, 선착장에서 허름한 페리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는 순간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조그만 미니버스 혹은 트랙터가 연결된 운송수단을 타고 벌판을 가로질러 봉곳하게 솟아 오른 암산으로 접근하면, 지름이 약 10㎞ 되는 구역에 폐허 유적이 산재해 있다.

한때 이집트 왕국의 수도로 왕궁과 아톤 신(혹은 아텐 신)을 모시던 신전이 있었지만, 지금은 굴 안에 새겨진 희미한 부조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테베에서 텔 엘 아마르나로 수도를 옮긴 파라오는 아멘호테프 4세로, 그는 그때까지 믿던 신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유일신을 섬겼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현실 정치 속에서 찾아야 한다. 아멘호테프 4세의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는 외국 여성으로 보이는 평민 출신의 여자 티티를 비로 맞아들였는데, 술과 여자 그리고 사냥에 빠져 국정을 게을리 했다. 50세 무렵에는 이민족 출신인 15세 소녀 네페르티티를 왕비로 맞아들였으나 잇몸에서 고름이 나오는 병으로 2년 후 죽고 만다. 이런 과정에서 파라오의 권력은 약해졌고 정치는 아몬 라 신의 사제들이 좌지우지했다. 또한 아들 아멘호테프 4세는 이런 아버지를 싫어해서 외국으로 떠돌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은 뒤 파라오가 된 아멘호테프 4세는 아버지의 어린 왕비였던 네페르티티와 결혼하고, 권력이 비대해진 아몬 라 신의 사제들을 몰아내기 위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새로운 신 아톤을 내세운다. 아톤은 태양을 상징하며 우주의 탄생과 자연의 힘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자신의 이름도 아크나톤(아톤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바꾼 후, 왕국의 수도를 테베에서 북쪽으로 약 280㎞ 떨어진 지금의 텔 엘 아마르나로 옮겼다.

◇왕비 네페르티티(왼쪽), 유적지의 부조

그는 ‘이 땅은 어떤 신과 여신, 왕과 왕비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소유자로서 이 땅을 지배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할 만큼 이상 사회에 대한 열정이 컸지만, 기득권층을 너무 배척하는 등 현실을 무시했다. 또 국방을 소홀히 해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점점 민심을 잃었고, 결국 죽고 만다. 그는 자신의 열두 살 난 셋째딸 안케세파텐과 결혼했다(아버지와 딸, 형제자매의 결혼은 혈통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이집트 파라오 집안에서 종종 이뤄졌던 일이다).

그후 근대에 무덤이 발굴되어 유명해진 어린 투탕카문은 숙부인 아크나톤의 셋째딸이자 왕비였던 안케세파텐과 결혼하면서 새로운 파라오로 등극하고, 아몬 라 신 사제들의 영향 하에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기게 되니 아크나톤의 종교개혁은 15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유일신 종교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기원전 1360년경에 일어난 아크나톤의 종교개혁이 실패한 후,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그 추종자들이 이집트와 시나이 반도 쪽에 유일신 사상을 전파했고, 그로부터 130년 후쯤 유대인인 모세라는 인물이 나타나 유일신 사상을 꽃피운 것은 아닌가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15년간 잠시 꽃피었던 종교개혁의 이상은 지금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현대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아크나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의 아름다운 조상이 근대에 발견되면서 현재 이집트 곳곳에서 그녀의 얼굴이 새겨진 기념품 등을 볼 수가 있고, 아크나톤의 조카사위인 투탕카문의 미라는 박물관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집트에는 피라미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폐허지만 신화와 역사 속에서 빛을 발하는 유적지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매력적인 나라가 이집트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정보

텔 엘 아마르나는 폐허 유적지이므로 숙소나 음식점이 없다. 일단 말라위까지 간 뒤 그곳에서 텔 엘 아마르나로 가는 미니버스를 타거나, 오전 8시쯤에 떠나는 완행열차를 타고 10분 정도 가다 데이르 마와스(Deir Mawas)에서 내린다. 여기서 나일강 페리 선착장까지 걸어가면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우연히 지나가는 미니버스를 탈 수도 있다. 강을 건너가면 트랙터가 연결된 운송수단이나 미니버스를 타고 유적지로 이동할 수 있다.

>>여행 에피소드

물건 하나 못 판 아이들 그래도 웃으며 "굿바이”

이집트 여행은 쉬운 편이 아니었다. 4월의 날씨는 몹시 더웠고 유명 관광지에서는 호객꾼들이 괴롭혔으며, 기차나 버스 출발 시각도 정확하지 않아서 짜증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말라위에서 텔 엘 아마르나에 갈 때도 그랬다. 오전 8시에 출발한다는 완행열차는 8시40분이 되어서 왔고, 기차에 타니 승객들이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이집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의 질문을 했다. 일일이 질문에 답하느라 조금 피곤했지만,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이 다가오자 모두 내리라고 가르쳐 주어 고마웠다. 기차에서 내려 선착장까지 걸어가는데 또 젊은 사내들이 쫓아오며 온갖 질문을 했지만, 행선지를 잘 안내해 주었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바구니나 기념품을 팔려고 달려들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경찰관이 아이들을 멀리 쫓아버렸다. 그런데 관광객들이 사막의 유적지로 이동하는 차를 타자 아이들은 일제히 손을 흔들며 ‘굿바이’라고 외쳐댔다. 물건 하나 못 팔았는데도 멀리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의 모습이 불쌍했다. 이집트 여행에서는 짜증 나는 일도 많았지만 종종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고마웠고, 가난한 아이들의 밝은 웃음을 보며 안쓰러운 생각도 많이 들었다.

by 100명 2007. 4. 13. 11:36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4) 추수감사절 축제 열리는 인도
[세계일보 2006-09-29 08:39]

인도는 축제의 나라로, 1년 내내 지역마다 축제가 끊이질 않는다. 그 중에서 우리의 추석에 해당하는 축제가 있다. 남인도의 타밀 나두 지방에서는 퐁갈(Pongal), 북인도에서는 마카르 산크란티(Makar Sankranti), 펀자브 지방에서는 로흐리(Lohri) 등으로 불리는데,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1월14일을 기준으로 축제가 벌어진다.

이날은 인도인들의 달력으로 밤의 길이가 가장 길어지는 동짓날이고, 겨울의 마지막 날이다. 이날이 지나면 낮이 길어지고 차차 기온도 올라가 사람들은 움츠린 마음을 활짝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장 큰 즐거움은 수확의 기쁨이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인도는 대개 7월에서 9월까지 장마철로, 바짝 마른 대지가 촉촉한 물에 적셔진다. 장마가 끝나면 농부들은 파종을 한다. 따스한 태양과 선선한 바람에 익은 곡식들, 특히 쌀과 사탕수수를 추수하는 시기가 1월쯤이고, 이때 거대한 축제를 벌인다.

남인도의 퐁갈 축제는 4일 동안 벌어진다. 첫째 날은 대지를 풍요롭게 해준 구름과 비의 신 인드라에게 푸자(Puja·예배)를 드린 후,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낡은 것과 불필요한 것을 모두 들어내 불에 태운다. 이때 소녀들은 춤을 추며 추수를 기뻐하는 노래를 부른다.

둘째 날부터 본격적인 축제가 벌어진다. 우선 태양신인 수리야신에게 예배를 드린 후, 여자들은 여러 색깔로 물들인 햅쌀가루, 돌가루, 꽃, 나뭇잎 등을 이용해 갖가지 문양을 집 앞에 그린다. 콜람(Kolam)이라고 부르는 이 문양들은 집안에 복을 불러들인다는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추수한 쌀을 그릇에 넣고 끓이다 넘치기 시작할 때, 모두 “퐁갈, 퐁갈” 하고 외친 후 나눠 먹는다. 퐁갈은 ‘끓어 넘치는 것’을 의미하며, 번영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셋째 날은 가축을 위한 날이다. 특히 소들이 대접을 받는데, 암소는 우유를 제공하고 황소는 논밭을 가느라 수고했기 때문이다. 소를 잘 먹이고, 소 뿔에 색을 칠하고, 소 목에 꽃 목걸이도 걸어준다. 이것이 점점 발전해 남인도의 마두라이(Madurai)에서는 황소에게 술을 먹인 후 젊은 사내들이 달리는 황소의 뿔을 잡아 길들이는 ‘잘리카투(Jalikattu)’란 행사도 열린다.

넷째 날은 힌두교 사원에 가서 태양신 수리야에게 예배를 드리고 다른 친지들을 방문해 인사를 한다. 이때 서로 음식을 대접하고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돈을 주기도 한다. 젊은 남녀들은 강가에 모여 미래의 반려자들을 고르는 풍습도 있었으나,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마카르 산크란티 축제에서 갠지스강에 목욕하는 이들.

한편 북인도에서는 이 축제를 마카르 산크란티라고 부른다. 이 축제를 가장 잘 보려면 바라나시로 가면 된다. 전국 각지에서 온 힌두교도들은 성스러운 강 갠지스로 몰려와 축제 전부터 갠지스 강변에서 밤마다 불을 밝혀 놓고 의식을 벌인다. 1월14일 전날 밤부터 사람들이 강을 떠나지 않고 밤새도록 추수감사절을 축하한다. 북인도인들에게 이날은 추수의 기쁨 못지않게 다가오는 봄에 대한 설렘을 표현하는 날이다. 북인도의 겨울은 꽤 춥고 난방시설이 안 되어 있어서, 여행자들이 옷을 껴입고 슬리핑백에서 잠을 자도 감기가 걸릴 정도인데, 이날이 지나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날이 따스해진다.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서 가장 중요한 가트(강변의 계단)인 다샤스와메드 가트에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려들어 멀리서 보면 마치 새까만 개미 떼처럼 보일 정도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벌거벗은 채 목욕하고, 떠들고, 기도하며 아우성을 친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남자들은 덜덜 떨면서 모두 팬티 차림으로 물속으로 뛰어든다.

강변에서 시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수많은 사두(수행자)와 거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뒤섞인 채 양쪽에 줄지어 앉아 있다. 이날 그들이 내민 그릇에 담기는 것은 돈이 아니라 햅쌀이다. 이 기간에는 아이들이 날리는 연들이 갠지스 강변에 잠자리 떼처럼 흩날리고, 가끔 피리를 불어 코브라를 춤추게 하는 이들도 나타나 축제 분위기를 돋운다.

인도의 추수감사절은 우리와 다른 겨울철이지만 수확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똑같고,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축제의 원시적인 열기가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조차 흥겹게 한다.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 여행 에피소드

마카르 산크란티 축제 중에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변에 묵은 적이 있다. 창문을 열면 바로 밑에 강이 보였는데, 1월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내내 시끄러웠다. 밤새도록 사람들이 강변을 걸어다니고, 멀리서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다 원숭이들과 개들이 싸우는 바람에 숙소 지붕 위에서 우당탕거리는 원숭이 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 밤새도록 자지 못했다. 새벽 5시쯤 일어나서 강변의 다샤스와메드 가트로 걸어가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밤새도록 떠들며 마카르 산크란티 축제를 축하하느라 그토록 시끄러웠던 것이다.

“참… 바라나시는 묘한 곳이에요. 삶의 본질이 다 이곳에 담겨 있어요.” 그곳에서 만난 인도 사진작가는 황홀한 눈빛으로 강변의 인파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고, 나도 맞장구를 쳐줬다. 그러나 세상 어느 나라에서 추수에 감사하고 겨울의 끝을 기념하기 위해 밤새도록 축하하다 새벽부터 강물 속으로 뛰어든단 말인가. 세상의 많은 축제는 이벤트화되고 여행객을 위한 관광상품으로 재탄생하고 있지만, 인도의 축제는 관광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수천년의 전통을 그대로 굳건하게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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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갈 축제나 마카르 산크란티 축제는 양력 1월14일로 고정되어 있으므로, 이 축제를 보려면 이때에 맞춰서 가면 된다.(단, 윤년인 경우에는 1월15일). 퐁갈 축제는 남인도의 타밀 나두 지방이 가장 흥겹고, 마카르 산크란티 축제 때는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by 100명 2007. 4. 13. 11:35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5>영화 ''비정성시'' 무대 대만 주펀
[세계일보 2006-10-13 08:21]

대만의 북부 해안 도시 지룽(基隆)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약 1시간 정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주펀이란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골 마을인데, 19세기 말에 금광이 발견돼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금광 채굴로 한때 번성했다. 그러나 요즘 활기를 띠게 된 것은 대만 영화 비정성시 때문이다.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의 비정성시가 1989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후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이곳에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보이고, 그 옆의 지산가(基山街)라는 골목길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어우러진 기념품가게, 음식점들이 죽 들어서 있다. 예스러운 골목길의 낭만을 느끼며 걷다 보면 중간에 돌계단 길이 가로지르는 십자로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 비탈을 내려다보면 영화 속에서 본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 돌계단 길이 수치로(竪崎路)이고, 여기에는 비정성시, 아매차주관(阿妹茶酒館)이란 간판을 내건 찻집들이 있다.

영화는 비정성시란 찻집에서 촬영했고 아매차주관에서도 찍었다는데, 원래 다른 곳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입구 풍경이 영화에 나오는 조선루(朝鮮樓)와 비슷한데, 대만 사람들은 조선이란 이름에서 이국적인 정서를 느꼈던 것일까? 영화 속에서 일제로부터 해방된 대만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며 암울한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산꼭대기에 들어선 가옥들

비정성시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대만 사람들이 겪는 비극을 다룬 영화다. 린아루(林阿祿)란 사람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장사를 하고, 제일 공부를 많이 한 둘째는 일본군 군의관으로 대륙으로 갔다가 실종되고, 셋째는 미친 불량배가 되어서 대륙에서 돌아온다. 그리고 여덟살 때부터 벙어리에 귀머거리인 넷째는 고향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평화롭게 산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물러갔으나, 해방이 대만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중국 대륙의 국민당 정부는 천이(陳儀)라는 관리를 대만 행정장관으로 파견하는데, 그와 함께 대륙에서 몰려온 부패 관리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며 새로운 점령자처럼 행동한다. 물가와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대만 사람들의 불만이 팽배해졌고, 드디어 1947년 2월27일 타이베이시 전매청 앞에서 세금이 붙지 않은 담배를 팔던 여인을 관리들이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음날인 2월 28일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자 이에 놀란 행정장관 천이는 대륙의 국민당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장제스(蔣介石)는 군대를 파견한다. 3월 8일 지룽항에 상륙한 국민당 정부군은 대만 원주민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약 2만명을 살해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얼얼바’(2·28)사건이다.

영화에서도 이 사건으로 수많은 청년이 잡혀가고 죽으며 린씨 일가도 몰락한다. 첫째는 대륙에서 온 마약 밀수범들과 싸우다 죽고, 아무 죄도 없는 넷째는 군인들에게 끌려가 사라진다. 마침내 마약 밀수에 연루돼 고문을 받고 완전히 실성한 셋째아들만 남게 된다. 그리고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패한 국민당 정부군이 대만으로 몰려들게 된다.

대만에서는 대륙에서 국민당 정권과 함께 온 사람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부른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흥하던 17세기 중반 무렵부터 명나라 장수 정성공(鄭成功)을 따라 대만에 와서 300년 넘게 터를 잡은 푸젠(福建), 광둥(廣東)성 출신들을 본성인(本省人)이라 일컫는다. 이 본성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에 발생한 ‘얼얼바 사건’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아 수많은 정치적 갈등의 원인이 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 주펀에는 평화와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낭만이 넘쳐 흐르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 있는 평범한 사당이나 퇴락한 금광 박물관보다도 예스러운 목조 가옥들이 들어선 골목길의 낭만을 찾아온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바다와 산골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고, 고즈넉한 골목길의 술집이나 찻집에서 잠시 세상을 잊으며 은둔하고 싶은 사람에게 주펀은 놓치기 아까운 곳이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골목길 지산가

이번 대만 여행은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했는데, 도착하던 날 첸수이볜(陳水扁) 총통 퇴진 데모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중정 기념당 광장 앞에 모여서 엄지손가락을 거꾸로 내리며 “아볜 샤타이(阿扁·천수이볜 하야)”를 외쳐댔고, TV에서는 철야로 진행되는 시위를 계속 중계했다.

첸수이벤은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 속에서 본성인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지만, 무능과 측근 비리로 국민 대다수가 등을 돌린 상황이다. 이 시위를 주도하는 있는 이가 첸수이볜과 같은 당에 있던 전 민진당 대표 스밍더(施明德)라는 사실이 첸수이볜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첸수이볜은 독립과 유엔 가입을 내세우며 계속 자기 길을 가겠다고 고집부리고 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무능과 부패를 슬그머니 덮고 정치판을 독립과 반독립 구도로 나누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9월 15일에는 100만명 정도가 모여 시위를 했다. 그리고 9월 16일부터는 첸수이볜 지지자들이 약 10만명을 목표로 시위를 벌인다고 했는데, 과연 대만은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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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펀 가는 길은 여러 가지다. 타이베이역 9번 출구로 나와 지룽 가는 버스를 타고 40분 후쯤 종점에서 내리면 육교가 나온다. 그곳을 건너서 진과스(金瓜石)행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정도 가면 주펀이 보인다. 다른 방법은 지하철역 충샤오푸싱(忠孝復興)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진과스행 버스를 타면 된다. 약 1시간20분 소요되고, 요금은 80NDT(약 2400원)로 거스름 돈을 안 주니 잔돈을 준비해야 한다. 타이베이에서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하지만, 주펀에서 민박을 할 수도 있다. 숙박비는 3만원이 조금 안 된다.

by 100명 2007. 4. 13. 11:33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6> 이집트 아비도스·덴데라·에드푸
[세계일보 2006-10-20 09:00]

고대 이집트 신화는 단일하지가 않다.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신들이 오랜 세월 속에서 통합되며 여러 신화가 만들어졌다. 강한 세력이 주변을 통합하면서 신들도 정리되었는데, 크게 보아 헤르모폴리스, 멤피스, 그리고 헬리오폴리스 등이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 현재 카이로 동남쪽 교외 지역인 헬리오폴리스의 신학에 따르면 태양신 아툼(혹은 라)이 슈(공기의 남신)와 테프누트(이슬의 여신)를 창조했고, 이 둘이 결합하여 게브(대지의 남신)와 누트(하늘의 여신)를 낳는다. 그 후 게브와 누트 사이에서 남신 오시리스와 세트, 여신 이시스와 네프티스가 나오는데 이들 남매가 각각 짝을 지어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가 부부가 된다. 이 아홉 신이 9주신으로 사람들에게 숭배되었다.

이 가운데 오시리스신은 이집트를 통치하며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존경을 받았지만, 이를 시기한 동생 세트의 모함에 빠져 죽게 된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관을 찾아내어 남편을 살려냈지만, 이를 안 세트가 오시리스를 14토막으로 잘라 이집트 방방곡곡에 버렸다. 이시스는 다시 조각들을 찾아서 결합시켰지만, 물고기에 먹혀 버린 남근만은 찾지 못했다. 이시스는 나일강의 진흙으로 그 부분을 보충한 후 생명을 불어넣어 오시리스를 살려내었고, 그와 결합해 아들 호루스를 낳게 된다. 호루스는 성장하여 작은아버지이자 아버지의 원수인 세트를 물리치고 왕위에 복귀한다. 그렇게 해서 호루스는 현세의 왕으로, 오시리스는 내세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학자들은 이런 신화를 호루스신을 믿는 나일강 상류 사람들과 세트신을 믿는 나일강 하류 사람들의 권력투쟁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어서는 내세의 왕인 오시리스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고, 생전에 한 번은 그의 머리가 묻혔다는 아비도스의 오시리스 신전을 방문하는 것이 꿈이었다.

아비도스(Abydos)는 나일강 상류인 룩소르에서 북쪽으로 약 150㎞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신전은 신왕국 제19왕조의 세티 1세가 만들었다. 제18왕조의 투탕카멘 왕이 어린 나이에 죽자 혼란스러운 시기가 지나고 람세스 1세가 기원전 1310년쯤, 제19왕조를 연다. 20개월 후에 그가 죽자 파라오에 오른 사람이 아들 세티 1세였다. 그는 이름에서 보듯이 세트신을 숭배하던 나일강 하류 출신이었지만 다른 신을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집트인들에게 인기 있던 오시리스의 거대한 신전을 아비도스에 지었고, 수많은 기둥과 부조 속에 오시리스신에 관련된 기록들을 새겨 놓았다.

◇오시리스 신전의 부조(왼쪽), 호루스를 상징하는 독수리 조각

그 외에도 이집트 신화와 관련된 또 다른 신전들이 나일강변에 있는데, 아비도스에서 남쪽으로 약 90㎞ 떨어진 덴데라(Dendera)란 도시에는 호루스신의 부인이며 사랑의 여신으로서 많은 이집트인들에게 사랑을 받은 하토르 여신의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인 기원전 2세기쯤에 건설된 것으로, 그리스인들은 하토르 여신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동일시했다. 이집트인들은 하토르 여신이 새해 첫날에 남편이 있는 에드푸(Edfu)의 호루스 신전으로 외출한다고 믿었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호루스신은 태생이 두 가지였다. 헬리오폴리스 사람들은 호루스신을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서 난 아들로 여겼지만, 멤피스 신화에서는 오시리스와 형제였다.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 호루스신을 ‘연하의 호루스’, 오시리스와 형제인 호루스신을 ‘연상의 호루스’라고 불렀다.

룩소르에서 남쪽으로 약 120㎞ 떨어진 에드푸에 있는 호루스 신전은 연상의 호루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연하의 호루스를 나타내는 상징들도 보인다. 이 신전은 기원전 237년에 시작되어 약 200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매우 보존이 잘되어 있고, 거대한 신전과 열주에는 수많은 부조가 새겨져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신전 앞에 세워진 독수리 모습의 신인데, 이것은 숙부인 세트에게 복수한 연하의 호루스신을 의미한다.

현재는 이런 신전과 신상들이 단지 복잡한 신화의 상징에 불과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절실한 현실이었다. 이집트에서 수많은 신화가 서린 3000년 전의 유물 앞에 서서, 기둥과 벽에 새겨진 수많은 상징을 보노라면 문득 현실이 무한히 확장되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비록 이집트 신의 계보가 복잡해서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더라도, 수천년 전의 숨결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이집트 여행은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카이로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천천히 내려가다 관광객이 별로 없는 중소 도시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나는 스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소하그란 마을에서는 버스에 타니 이쪽저쪽에서 “코리안, 야판(일본)”이라고 수군거리다가 웬 청년이 다가왔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코리아요!”

그러자 모두들 “아! 세울(서울)!”이라고 외쳤다. 88 서울올림픽 이후 코리아 하면 서울로 알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반갑다며 악수를 청한 후 담배를 권했다. 마치 몇십년 전의 한국 인심을 보는 것 같았다. 케나란 마을에서는 거리를 걷던 나에게 “헬로!” 하면서 경례하듯이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다가와서 나라를 묻고 악수를 청한 후 저녁 때 한번 만나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별다른 뜻은 없었고 대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는데, 관광지에서 호객꾼들에게 시달리다가도 이런 인심과 친절을 맛보는 순간 여행의 피로가 풀렸다.

아비도스로 가려면 우선 엘 발리아나(El Baliana)까지 와야 한다. 카이로에서 버스를 타고 나일강을 따라 말라위(Malawi), 아시우트(Asyut), 소하그(Sohag)를 거쳐 엘 발리아나까지 가는 방법도 있지만, 버스가 뜸해 카이로에서 룩소르행 기차를 타고 가다 엘 발리아나에서 내린 후 버스나 합승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엘 발리아나에서 오시리스 신전이 있는 아비도스까지는 합승 택시가 있고, 아비도스에서 케나(Qena)까지는 버스로 1시간, 케나에서 하토르 신전이 있는 덴데라까지는 합승 택시를 탄다. 케나에서 룩소르까지는 버스로 약 1시간30분 정도, 룩소르에서 남쪽의 에드푸까지는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리고, 에드푸에서 합승 택시를 타면 호루스 신전까지 간다.

by 100명 2007. 4. 13. 11:32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7>이집트 아스완 아부심벨
[세계일보 2006-10-27 09:54]

람세스 2세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다. 신왕국 18왕조 말기의 유약한 투탕카멘(기원전 1340∼1331)이 죽고, 늙은 대신 ‘아이’와 호렘헵 장군이 짧게 통치하다가 전차 지휘관이었던 람세스 1세가 제19왕조를 연다.

그의 아들 세티 1세(기원전 1294∼1279)가 19왕조의 초석을 다진 후, 이집트의 영광을 크게 떨친 이가 바로 그의 젊은 아들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2)로, 약 6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며 자신의 흔적을 온 이집트 신전에 남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아부심벨 신전이다. 카이로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890㎞ 가면 아스완이란 도시가 나온다. 예전에는 누비아 광산에서 캐낸 엄청난 금과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목재, 동물의 가죽, 상아 등 진귀한 물품들이 집결되던 곳이었지만 오늘날은 거대한 아스완 댐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차를 타고 나일강 상류를 향해 사막 길을 서너 시간 달리면 아부심벨이 나온다. 이곳의 황량한 돌산에 람세스 2세가 세운 아부심벨 대신전과 소신전이 있다. 아부심벨 대신전 앞에는 높이가 약 20m인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조각 4개가 있어, 이미 피라미드를 본 사람들도 그 장엄함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기둥들과 람세스 2세의 입상 8점이 늘어서 있으며, 벽에는 수많은 부조가 새겨져 있다.

이 부조들은 람세스 2세가 주도한 카데쉬 전투의 승리를 묘사한 것이다. 카데시 전투는 현재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집트와 히타이트 왕국 간의 대규모 전투다. 이집트는 기원전 13세기쯤 아나톨리아 반도의 하투샤(현재 터키 중부의 보아즈칼레)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히타이트 왕국과 근동 지방을 중간에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4년 4월 카데쉬를 향해 약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을 떠난다.

◇아부심벨 대신전

람세스 2세는 한 달 뒤 적군의 속임수에 걸려 위기에 처한다.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이집트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홀로 싸운 람세스 2세는 아문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고 이집트의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후일 밝혀진 히타이트 측의 기록과 객관적인 정세로 볼 때 람세스 2세는 필사적으로 탈출했을지언정 승리하지는 못했고, 카데시도 여전히 히타이트 왕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람세스 2세는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아부심벨 신전 등에 자신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부조들을 새겨 놓았다. 후대 학자들은 이런 람세스 2세를 자기현시욕이 매우 강하고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기록을 이용해 현실을 지배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람세스 2세 치하에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대탈출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약 66년간 고대 이집트를 연구해 온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에 의하면,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서 그 같은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절 많은 유대인들이 왕릉이나 신전을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아마도 이집트인들에게는 사소한 사건을 나중에 유대인들이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탈바꿈시켰다고 그는 추측하기도 한다.

◇나일강의 펠루카(돛단배)

아부심벨 대신전 제일 안쪽의 지성소에는 오른쪽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의 신인 라 하라크티신, 신격화한 람세스 2세, 테베의 주신이며 땅의 생식 본능을 지배하는 아몬신, 어둠을 솟아나게 하는 프타 신의 좌상이 나란히 서 있다. 동굴 안의 신상들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2월 20일쯤에는 동굴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약 20분 동안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아몬신, 람세스 2세, 라 하라크티신을 차례로 비췄다. 10월 20일쯤에는 반대로 햇살이 가장 오른쪽의 라 하라크티신을 비춘 후 차차 왼쪽으로 옮겨졌는데, 어둠의 신인 프타신 상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햇살이 머물다 간다고 한다.

대신전 옆에는 아부심벨 소신전이 있다. 사랑과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 여신(호루스신의 아내)과 람세스 2세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기리는 작은 신전인데, 이 신전들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나일강을 막아 아스완에 댐을 건설하려 하자,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것을 염려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1963년부터 약 10년 동안 해체해 원래 위치보다 약 210m 뒤쪽, 650m 더 높은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펠루카를 타고 나일강을 유람하는 이집트 관광객들.

한 인간의 집요한 욕망과 의지가 실현된 거대한 신전 앞에서 현재 카이로 국립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는 초라한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떠올리면 묘한 느낌에 휩싸인다. 미라로 남은 그는 환생하지 못했고 그의 욕망은 신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람세스가 남긴 100여명의 자식들에게서 퍼져 나간 자손들은 얼마나 되며, 현재 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기차표 예매 새치기 심해

>>여행 에피소드

카이로에서 아스완까지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중간의 유적지와 도시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내려갔는데, 아스완에서 아부심벨을 구경한 후 카이로까지 가는 길은 기차를 타기로 했다. 기차표 예매를 위해 역으로 가니 새치기가 심했다. 줄을 섰어도 슬그머니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표를 사러 온 나이 든 경찰이 왔다 갔다 하면서 새치기를 막다가, 그 역시 앞쪽에 가서 슬그머니 줄에 끼어드는 게 아닌가. 기가 막혔다. 어떤 서양인의 부탁을 받은 이집트인이 앞쪽에서 새치기하는 것을 지켜보다 마침내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나서서 항의하자 가만히 서있던 이집트인들이 내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고 결국 새치기했던 사람은 슬그머니 뒤로 가버렸다. 그렇게 표를 사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우리도 예전에 새치기가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집트에서도 종종 그런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여행정보

아스완에서 아부심벨까지는 미니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아스완의 숙소에 신청하면 된다. 새벽 4시에 출발해 오전 7시 30분에 도착. 9시까지 구경한 후 돌아오다 아스완 댐을 구경한다. 대중 버스도 있다는데 매우 불편하고 시간이 걸린다. 아부심벨 마을에도 호텔은 있지만 대개 여행자들은 아스완에서 묵는다. 아스완에는 싼 게스트 하우스부터 고급호텔까지 다양하게 있다. 아부심벨 신전 근처에는 매점이나 식당이 없으므로 각자 빵과 음료수를 준비해 가야 한다.

by 100명 2007. 4. 13. 11:31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8> 이집트 시와 오아시스
[세계일보 2006-11-03 12:51]

리비아와 이집트의 국경 사이에 끝없이 펼쳐진 리비아 사막이 있고, 그 한가운데 시와 오아시스(Siwa Oasis)란 곳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590㎞ 떨어져 있는데, 버스를 타고 4∼5 시간을 달리면 마르사 마트르(Marsa Matruh)를 지난다. 바닷가 휴양지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 롬멜 장군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 여기서부터 단조롭고 끝없는 사막 길을 다섯 시간 정도 달리면 드디어 시와 오아시스가 나타난다.

시와 오아시스는 동서 길이 약 82㎞, 서쪽의 폭은 9㎞, 동쪽의 폭은 28㎞로 물고기가 누워 있는 형상의 거대한 오아시스로, 비가 거의 오지 않지만 300개가 넘는 샘물에서는 물이 계속 솟구치고 있다. 대다수가 베르베르족인 주민 약 5000명이 살고 있으며, 약 24만그루의 대추야자나무, 2만5000그루의 올리브나무가 자라며 곡식과 야채, 과일 등이 풍성한 땅이다. 평균 해발은 200m이고 해발 -18m인 낮은 곳도 있는데, 여기에 고인 호수물이 한여름에 증발하고 나면 천연 소금이 생길 정도로 물에는 소금기가 가득하다.

이곳에는 기원전 6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아몬 신전 터가 있다. 현재는 부조가 새겨진 기둥 몇 개만 남아 있지만, 고대에는 이집트는 물론 그리스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져 있었다. 아몬 신은 테베(현재의 룩소르)의 지방신이었지만 점차 이집트 전역에서 인기를 끌며 훗날 파라오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 신은 그리스 제우스 신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아몬 신전 부근의 낮은 언덕에는 또 다른 아몬 신전이 있다. 이곳은 알렉산드로스가 방문한 후부터 ‘알렉산드로스 신탁의 신전’이라고 불린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고 있던 이집트를 정복한 후, 기원전 331년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에 시와 오아시스를 방문한다. 약 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사막을 횡단한다는 것이 무모했지만,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꾼 신비한 태몽을 듣고 자란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을 아몬 신의 아들이라 믿었고 그것을 아몬 신전에서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와 동행했던 그리스의 사관 칼리스테네스(Callisthenes)의 기록에 따르면, 나흘째 되던 날 물을 담은 가죽 부대의 상당수가 뜨거운 햇볕에 의해 터져 버렸다. 샘 하나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만난 위기였는데,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이 소낙비를 뿌려 병사들은 새 가죽 부대에 물을 담을 수 있었다. 또 무서운 모래 바람이 불어와 길을 잃었으나 갑자기 나타난 까마귀 두 마리가 길 안내를 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이같이 하늘의 도움으로 마르사 마트르를 떠난 지 8일 만에 시와 오아시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몬 신전의 벽(왼쪽), 당나귀를 탄 아이들

도착하자마자 알렉산드로스는 예언자를 만나기 위해 홀로 아몬 신전 안으로 들어갔고, 한참 후에 나와서 ‘무엇을 들었느냐’는 부하 장수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미소만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 올림피아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중에 예언자로부터 들은 얘기를 전하겠다고 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채 8년 후인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죽고 만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보면 아몬 신전의 예언자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당신의 아버지 아몬 신은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고, 필리포스 왕(인간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의 암살자들은 모두 처벌받았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사제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그는 훗날 바빌론 근교에서 숨을 거두며 시와 오아시스에 매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모심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어느 왕이 장례 행렬을 자신이 지배했던 알렉산드리아로 돌렸다고 한다. 현재까지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몇 년 전에 이집트 고고학자가 시와 오아시스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나, 신뢰성에 의심을 받아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곳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샘도 있다. 크고 깊은 우물 형태로 아직까지 보존되고 있는 이 샘에서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목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낮은 언덕에는 ‘죽은 자의 산’이라고 알려진 고대 공동묘지가 있는데, 구덩이에 직접 들어가 보면 미라를 감쌌던 천 조각들이 보인다. 또한 시내 중심지에는 녹아 버린 촉농처럼 허물어진 고대 도시 유적이 남아 있고, 외곽에는 수심은 낮지만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호수들이 있으며 서쪽 호수의 판타지 섬에는 온천도 있다. 그리고 더 외곽으로 나가면 거대한 모래 바다가 펼쳐진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에서 빠져나온 후 모래 바람을 맞으며 끝없는 사막 깊숙이 걸어 들어가다 보면 오아시스가 지평선 너머에서 가물가물거린다. 그 순간 방향감각이 사라지면서 다시는 세상 속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과 함께 절대자를 대면하는 듯한 묘한 느낌이 온몸을 덮쳐온다.

이렇게 고대 역사와 문화의 흔적 그리고 종교와 자연의 신비감을 맛볼 수 있는 시와 오아시스는 기자 피라미드, 왕들의 무덤이 있는 룩소르와 함께 이집트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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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에서 늦은 오전에 출발한 버스가 약 9시간 후에 시와 오아시스에 도착하니 캄캄했다. 그때 웬 소년이 다가와 자신의 호텔로 가자고 해서 따라가보니, 말이 호텔이지 허름한 방 몇 개가 있는 단층 벽돌집이었다. 그런데 리셉션에 걸린 영어 팻말이 인상적이었다.

‘오직 부부만이 같은 방을 쓸 수 있으며, 그외의 남녀는 철저히 다른 방을 써야 한다.’ 즉 미혼 남녀가 같이 묵기 위해서는 결혼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얘기를 해 보니 이 집 주인은 외부인들, 특히 미혼의 서양 커플들이 같은 방에 자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철저한 이슬람교도였다. 주민들은 외부인들로 인해 자신들의 관습과 문화가 훼손받는 것을 매우 꺼리고 있었다. 특히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외국 여성들에게 현지 여성들이 영향을 받으며 사회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데, 관광객이 많이 들어가고 있는 요즘에도 그 팻말이 붙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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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는 1박에 2달러 정도다. 중급 호텔들도 있고 고급 호텔도 생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카이로에서 버스를 타면 약 12시간 정도, 알렉산드리아에서 타면 약 9시간 정도 걸린다. 오전, 오후 각각 한대가 있다.

by 100명 2007. 4. 13. 11:30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79>이집트 시나이산과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세계일보 2006-11-10 09:30]

시나이 반도는 기원전 13세기경 모세가 유대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머물렀던 광야다. 남한 면적의 절반 크기인 시나이 반도에는 날카롭게 치솟은 산맥들이 가득한데, 그 중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나이산이 있다. ‘시나이’란 말은 원래 셈족의 언어로 ‘이빨’을 뜻하는 ‘신(Sin)’에서 유래하였는데, 황량한 벌판의 뾰족한 산맥들이 정말 이빨을 닮았다.

시나이산 기슭에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이 있다.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함께 이곳을 방문한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며 “모세야,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라는 여호와의 말을 들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주장하며 조그만 예배당을 지었다. 그 후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기독교 수도사들이 정착했는데, 근처에 살던 유목민 베드윈족의 공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당했다. 이에 수도사들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구원을 청했고, 황제는 요새처럼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원을 548∼565년에 세웠다.

이 교회가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 것은 11세기 이후부터다. 성 카타리나는 4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는데 시와 철학, 수학, 언어, 논리학, 수사학 등에 통달했다. 그녀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시리아 출신의 어느 수도승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당시 기독교가 박해를 당하고 있었는데도 독실한 신도가 되었고, 우상 앞에 제물을 바치는 로마 황제를 비난하기까지 했다. 황제는 50명의 현인을 보내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들이 설득당했다. 그녀는 칼날이 붙은 네 개의 바퀴에 매달아 앞뒤 바퀴가 반대 방향으로 돌면 육신이 산산조각 나는 형벌을 받았으나 신의 도움으로 바퀴가 헛돌았다고 한다. 마침내 그녀는 305년 11월25일 목이 베어졌는데, 그 상처에서 붉은 피가 아닌 뽀얀 우유가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9세기 초에 시나이산 근교에서 수도하던 어느 수도사가 빛에 휩싸인 그녀의 시신이 천사에 의해 성 카타리나 산(시나이산 근처) 정상에 옮겨지는 환상을 보게 된다. 다음날 그곳에 올라간 수도사는 썩지 않은 채 향내를 풍기는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고, 금으로 만든 관에 넣어 수도원 예배당에 안장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유럽에 전해지면서 이곳은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알려졌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줄을 이었다. 여기에는 모세가 보았다는 ‘불타는 떨기나무’도 보존되어 있는데, 원래 떨기나무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 안에 있는 ‘불타는 떨기나무 예배당(The Chapel of Burning Bush)’ 중심에 있었지만, 예배당을 지으면서 밖으로 옮겨져 지금은 바깥 벽 쪽에 있다. 성경에는 떨기나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는 덩굴나무처럼 보이는데, 과연 이것이 약 3300년 전에 모세가 목격한 나무일까?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빈약해 보이는 이 나무는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전해지지만, 1216년 이곳을 방문했던 독일인 여행자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미 꺾어 가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수도원에는 타계한 수도승들의 납골당도 있어 수많은 전설, 신화와 함께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방문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장 보이는 것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나이산이다. 모세산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성 카타리나 수도원 뒤쪽에 솟아 있다. 해발 2285m로 매우 가파른데 산정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1400년 동안 수도사들이 닦아 놓은 3750개의 돌계단 길이고, 또 하나는 낙타나 당나귀를 타고 올라가는 우회로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중턱에 예언자 엘리아가 기도하던 곳을 기념하는 예배당을 보게 되고, 드디어 정상에 오르면 파도처럼 물결 치는 거친 암산들이 발밑에 펼쳐진다.

산 정상에서 맞는 새벽의 사막 바람은 몹시 차다. 그러나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이면 기독교 순례자들은 감격에 젖어 예배하며 찬송가를 부른다. 이곳에는 작은 기독교 예배당뿐 아니라 이슬람 모스크도 그 맞은편에 있는데, 이슬람교인들에게도 모세는 예언자며 이곳이 성지이기 때문이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시나이산의 황량하면서도 장엄한 풍경 앞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신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경외감이 절로 우러나오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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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산에 오르기 위해 새벽 3시에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이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눈부셨다.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회중전등에 의지해 계단 길을 따라가다 그만 길을 잘못 들었다. 같이 가던 서양 커플 두 명과 함께 바위산을 힘들게 기어다니며 한참 동안을 헤매는데 암담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우회로로 접어들었는데 어둠 속에 낙타가 앉아 있었다. 낙타 몰이꾼의 호객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걸으니 약 세 시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4월의 추운 날씨에도 정상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한 서양인들도 있었고 한국인 순례자들도 보였다.

모두 덜덜 떨며 예배당에 들어가 차가운 바람을 피하다가 드디어 장엄한 일출이 시작되자 모두들 나와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 시나이산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믿음이 이 산을 신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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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타리나 수도원 안에 있는 호스텔은 1박에 1∼2달러로 저렴하다. 중급, 고급 호텔은 마을에 있다. 이스라엘에서 간다면 먼저 에일라트라는 해변 휴양지를 통과해 이집트의 타바라는 곳으로 입국한다. 거기서 여럿이 지프를 전세 내어 갈 수 있다. 국경을 통과하고 자동차를 알아보는 시간까지 다 합하면 하루가 걸린다. 카이로에서는 하루에 한 대 정도 버스가 다니는데, 교통 사정이 열악해 오전에 떠나면 밤에 도착한다. 차를 대절하면 6∼7시간 걸린다. 해변 휴양지 샤름 엘 셰이크를 거쳐 가면 시간이 적게 걸린다.

by 100명 2007. 4. 13. 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