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폴란드 크라쿠프
[세계일보 2004-11-18 16:36]

세상에서 빼어나게 아름다운 도시는 흔치 않다. 아름답고도 인심이 후한 도시는 더욱 찾기 힘들다. 그런데 아마 폴란드의 크라쿠프는 그런 도시가 아닐까?

크라쿠프는 우리나라 경주에 비할 만한 폴란드의 고도다. 7세기부터 발전한 이 도시는 1038년부터 1596년까지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고, 전성기였던 14세기에는 학문과 예술이 크게 부흥했다.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인구의 20%인 600만명을 잃었던 폴란드지만, 이 크라쿠프만은 피해를 입지 않아 197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곳의 중심지는 구시가지의 리네크 글로브니라는 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14∼15세기에 만들어진 중세풍의 시청 탑과 성 마리아 교회가 들어서 있다. 특히 성 마리아 교회 탑에서는 정시마다 나팔이 울린다. 13세기 타타르인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불다 화살에 맞아 죽은 나팔수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았던 폴란드인들은 80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의 일도 쉽게 잊지 못하고 있다.

광장 주변에는 박물관들이 수없이 많고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다녔던 야기에오 대학도 있는데, 관광객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은 광장의 중앙에 있는 길이 100m나 되는 커다란 직물회관이다. 원래 의복이나 직물의 교역소였지만 지금은 많은 기념품 상점들이 있다.

구시가지 남쪽에는 아름다운 숲길이 있고 그 끝에 바벨 언덕이 있다. 언덕에는 폴란드 왕족의 대관식과 장례가 치러졌다는 바벨 성당, 16세기 초부터 폴란드 역대 왕들이 살던 바벨성이 있어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크라쿠프까지 왔다면 그곳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소금광산 역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하에 180개 이상의 갱이 있고 현재 소금 채취가 중단된 2040개 이상의 방이 있는데, 그것을 연결하는 통로의 총 길이는 무려 200㎞다.

◇비엘리치카 소금광산 안의 동상들

본격적으로 비엘리치카 광산이 개발된 것은 700년 전으로 지하 1층은 64m, 지하 9층은 327m 깊이에 있다. 계단을 따라 깊은 땅속으로 들어가다 시커멓고 딱딱한 바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른 후 맛을 보니 짭짤하다.

이 광산 안에는 수많은 이름이 붙은 방이 많다. 코페르니쿠스가 1493년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방’이 있고 폴란드의 공주 킹가와 관련된 ‘전설의 방’이 있으며, ‘불탄방’이란 방에는 긴 막대에 매달린 횃불을 들고 뭔가를 하는 소금 동상들도 있다. 이 광산에서는 메탄 가스 때문에 종종 화재가 발생해 이것을 미리 정기적으로 폭발시켜주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수많은 방 중에서도 ‘축복받은 킹가 교회’에 다다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탄성을 지른다. 체육관만한 크기의 텅 빈 바닥, 벽, 제단 그리고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도 모두 암염, 즉 소금 바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은 1862년부터 1880년 사이에 소금을 다 파낸 뒤 만들어진 공간을 활용해 교회로 만들었다. 교회 소금벽에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기독교 성인들의 부조와 동상들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깊이가 9m인 지하 호수와 수없이 이어지는 방들을 찾아가며 3시간 정도 컴컴한 땅속을 걸어다니다 지상으로 나오면 불현듯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거리의 화가들과 작품

이렇게 크라쿠프에는 볼거리도 많지만, 거리나 골목 구석의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만나는 현지인들의 순박한 미소와 따스한 눈빛이야말로 여느 관광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크라쿠프의 매력이다. 이 인심에 취해 저녁나절 구시가지 광장의 어느 레스토랑에 앉아 거리 악사들의 연주를 듣노라면 이 도시에 몇 달간 머물러 보았으면 좋겠다는 충동이 들고마니, 세상에 이런 도시가 그리 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여행작가

■여행 정보

▷교통: 프라하에서 야간열차가 다니고 있는데 치안 상태가 안 좋으니 4인용 쿠셰트(침대차)를 타는 것이 안전하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차장이 티켓을 보관해준다.

버스의 경우 프라하에서 새벽 6시에 떠나면 오전 11시쯤 폴란드의 브로츠와브에 내려 잠시 후 크라쿠프행 버스로 갈아타면 오후 3시30분쯤 도착한다.

가는 동안 음식 사먹을 시간이 없으므로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숙소:가이드북을 보고 찾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역의 사설 안내센터에서 민박을 소개받는 것도 한 방법이다. 민박을 소개받을 경우 1박에 30유로 정도부터 다양한데, 1박에 5유로의 소개수수료를 받고 있다.

■여행 에피소드

다른 동유럽국가와 달리

현지인들 순박하고 친절

동유럽의 아름다운 도시에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현지인들이 쌀쌀맞다는 얘기도 종종 들린다. 폴란드의 크라쿠프는 다르다.

숙소를 찾다 잡화를 팔고 있던 여인에게 길을 물어보아도 수줍은 미소를 띠며 길을 가르쳐 주었고 숙소 주인도 순박했다. 길에서 옥수수를 사먹는데도 아주머니는 동양인인 나를 호의 섞인 눈초리로 따스하게 바라보았으며,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도 여종업원은 ‘즐겁게 드시라’는 말을 꼭 붙이며 친절했다. 글쎄, 말보다도 수줍어하는 그들의 표정과 눈빛에 나는 감동했다.

저녁무렵 광장 주변의 레스토랑에서 음식 몇 가지를 시켰는데, 여종업원은 그건 너무 양이 많으니까 조그만 것을 시키라고 친절하게 권하는 것 아닌가. 유럽 혹은 동구에서 이런 섬세한 배려는 흔히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약간의 팁을 주니 얼굴이 발그스레해지면서 고맙다고 하는데…. 아, 이런 푸근한 인심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크라쿠프에 가고 싶다(물론 불친절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따스했다. 크라쿠프를 방문했던 많은 여행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다).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폴란드 크라쿠프
[세계일보 2004-11-18 16:36]

세상에서 빼어나게 아름다운 도시는 흔치 않다. 아름답고도 인심이 후한 도시는 더욱 찾기 힘들다. 그런데 아마 폴란드의 크라쿠프는 그런 도시가 아닐까?

크라쿠프는 우리나라 경주에 비할 만한 폴란드의 고도다. 7세기부터 발전한 이 도시는 1038년부터 1596년까지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고, 전성기였던 14세기에는 학문과 예술이 크게 부흥했다.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인구의 20%인 600만명을 잃었던 폴란드지만, 이 크라쿠프만은 피해를 입지 않아 197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곳의 중심지는 구시가지의 리네크 글로브니라는 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14∼15세기에 만들어진 중세풍의 시청 탑과 성 마리아 교회가 들어서 있다. 특히 성 마리아 교회 탑에서는 정시마다 나팔이 울린다. 13세기 타타르인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불다 화살에 맞아 죽은 나팔수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았던 폴란드인들은 80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의 일도 쉽게 잊지 못하고 있다.

광장 주변에는 박물관들이 수없이 많고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다녔던 야기에오 대학도 있는데, 관광객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은 광장의 중앙에 있는 길이 100m나 되는 커다란 직물회관이다. 원래 의복이나 직물의 교역소였지만 지금은 많은 기념품 상점들이 있다.

구시가지 남쪽에는 아름다운 숲길이 있고 그 끝에 바벨 언덕이 있다. 언덕에는 폴란드 왕족의 대관식과 장례가 치러졌다는 바벨 성당, 16세기 초부터 폴란드 역대 왕들이 살던 바벨성이 있어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크라쿠프까지 왔다면 그곳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소금광산 역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하에 180개 이상의 갱이 있고 현재 소금 채취가 중단된 2040개 이상의 방이 있는데, 그것을 연결하는 통로의 총 길이는 무려 200㎞다.

◇비엘리치카 소금광산 안의 동상들

본격적으로 비엘리치카 광산이 개발된 것은 700년 전으로 지하 1층은 64m, 지하 9층은 327m 깊이에 있다. 계단을 따라 깊은 땅속으로 들어가다 시커멓고 딱딱한 바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른 후 맛을 보니 짭짤하다.

이 광산 안에는 수많은 이름이 붙은 방이 많다. 코페르니쿠스가 1493년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방’이 있고 폴란드의 공주 킹가와 관련된 ‘전설의 방’이 있으며, ‘불탄방’이란 방에는 긴 막대에 매달린 횃불을 들고 뭔가를 하는 소금 동상들도 있다. 이 광산에서는 메탄 가스 때문에 종종 화재가 발생해 이것을 미리 정기적으로 폭발시켜주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수많은 방 중에서도 ‘축복받은 킹가 교회’에 다다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탄성을 지른다. 체육관만한 크기의 텅 빈 바닥, 벽, 제단 그리고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도 모두 암염, 즉 소금 바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은 1862년부터 1880년 사이에 소금을 다 파낸 뒤 만들어진 공간을 활용해 교회로 만들었다. 교회 소금벽에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기독교 성인들의 부조와 동상들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깊이가 9m인 지하 호수와 수없이 이어지는 방들을 찾아가며 3시간 정도 컴컴한 땅속을 걸어다니다 지상으로 나오면 불현듯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거리의 화가들과 작품

이렇게 크라쿠프에는 볼거리도 많지만, 거리나 골목 구석의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만나는 현지인들의 순박한 미소와 따스한 눈빛이야말로 여느 관광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크라쿠프의 매력이다. 이 인심에 취해 저녁나절 구시가지 광장의 어느 레스토랑에 앉아 거리 악사들의 연주를 듣노라면 이 도시에 몇 달간 머물러 보았으면 좋겠다는 충동이 들고마니, 세상에 이런 도시가 그리 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여행작가

■여행 정보

▷교통: 프라하에서 야간열차가 다니고 있는데 치안 상태가 안 좋으니 4인용 쿠셰트(침대차)를 타는 것이 안전하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차장이 티켓을 보관해준다.

버스의 경우 프라하에서 새벽 6시에 떠나면 오전 11시쯤 폴란드의 브로츠와브에 내려 잠시 후 크라쿠프행 버스로 갈아타면 오후 3시30분쯤 도착한다.

가는 동안 음식 사먹을 시간이 없으므로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숙소:가이드북을 보고 찾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역의 사설 안내센터에서 민박을 소개받는 것도 한 방법이다. 민박을 소개받을 경우 1박에 30유로 정도부터 다양한데, 1박에 5유로의 소개수수료를 받고 있다.

■여행 에피소드

다른 동유럽국가와 달리

현지인들 순박하고 친절

동유럽의 아름다운 도시에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현지인들이 쌀쌀맞다는 얘기도 종종 들린다. 폴란드의 크라쿠프는 다르다.

숙소를 찾다 잡화를 팔고 있던 여인에게 길을 물어보아도 수줍은 미소를 띠며 길을 가르쳐 주었고 숙소 주인도 순박했다. 길에서 옥수수를 사먹는데도 아주머니는 동양인인 나를 호의 섞인 눈초리로 따스하게 바라보았으며,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도 여종업원은 ‘즐겁게 드시라’는 말을 꼭 붙이며 친절했다. 글쎄, 말보다도 수줍어하는 그들의 표정과 눈빛에 나는 감동했다.

저녁무렵 광장 주변의 레스토랑에서 음식 몇 가지를 시켰는데, 여종업원은 그건 너무 양이 많으니까 조그만 것을 시키라고 친절하게 권하는 것 아닌가. 유럽 혹은 동구에서 이런 섬세한 배려는 흔히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약간의 팁을 주니 얼굴이 발그스레해지면서 고맙다고 하는데…. 아, 이런 푸근한 인심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크라쿠프에 가고 싶다(물론 불친절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따스했다. 크라쿠프를 방문했던 많은 여행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다).

by 100명 2007. 4. 13. 13:35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겨울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세계일보 2004-11-25 16:06]

태평양에 부동항을 열고 모피 등을 조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베리아를 개척하던 러시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시베리아에 횡단철도를 건설했다. 1870년 우랄산맥 부근의 예카테린부르크까지 개통된 철도는 계속 동쪽으로 연장되어 98년 바이칼 호수의 이르쿠츠크까지 이어졌다. 또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구간은 앞서 97년에 개통되었고, 마지막으로 스레텐스크∼하바로프스크 구간이 1916년에 개통되면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횡단철도가 완성됐다.

이렇듯, 군사·경제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인 길이 되었다.

2000년 초겨울 어느 날 홀로 배낭을 메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달렸다. 총 길이 9446㎞로 두 번 왕복하면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것과 같은 먼길이었다. 6박7일이 걸리는 시간을 열차 안에서만 보낼 수 없었기에 중간 중간에 내려 도시를 구경했다.

아무르강변의 하바로프스크, 우리와 비슷한 외모의 부랴트족이 살고 있는 울란우데, 세계 최대의 호수 바이칼호, 시베리아의 파리라 일컬어지는 이르쿠츠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횡단철도에서 벗어나 버스를 타고 사얀 산맥을 돌고 돌아 시베리아 청동기 문화의 요람인 아바칸과 아시아 중심 기념비가 있는 투바 공화국의 수도 키질을 방문했다. 이어 횡단철도를 타고 시베리아에서 제일 큰 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와 우랄 산맥 부근에 있는 유럽의 관문인 예카테린부르크를 돌아보고 러시아의 자랑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마지막 도시 모스크바까지 가는 데 모두 한달 정도가 걸렸으며, 시간대가 여덟 번이나 바뀌는 매우 재미있는 길이었다.

11월이건만 시베리아 한복판은 이미 눈 속에 깊이 파묻혔고 수은주는 영하 25도로 곤두박질쳤다. 사실 추위보다도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낯선 세계를 홀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 더 어려웠다. 저렴한 호텔에서 숙박을 거절당하기도 했고 경찰 검문도 많이 당했으며, 모스크바를 떠나던 날 저녁에는 시비를 거는 스킨 헤드족과 빙판길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겨울 시베리아 횡단은 낭만적이었다. 특히 하바로프스크에서 울란우데까지 약 54시간에 걸쳐 거대한 타이가 숲을 달리는 동안 눈 덮인 침엽수림과 헐벗은 자작나무 숲의 풍경은 쉽게 끝나질 않았다.

하루종일 그 풍경을 바라보다 싫증날 때쯤이면 침대에 팔베개하고 드러누워 기차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러시아 음악에 푹 젖어 들었다.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나타샤, 라스콜리니코프 등 수많은 주인공들의 이름과 영화 닥터 지바고를 회상하기도 했다. 영화를 실제로 찍은 장소는 북유럽의 어느 국가였다지만 차창 밖 풍광은 영화 속 장면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또 공산주의 혁명 당시 적군과 백군의 싸움을 상상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억울하게 죽어간 한국 독립군들의 애환에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보드카 파티를 열던 러시아인들.

가끔 술을 좋아하는 러시아 사람들과 어울려 보드카를 마시다 곯아떨어지기도 했고, 아리따운 러시아 여인들의 모습에 가슴 두근거리기도 했다.

멀고 먼 길을 가는 횡단열차 속에서는 짧은 삶이 펼쳐졌다.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섰고, 때가 되면 식당이나 열차 칸에서 끼니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기차가 정차할 때 잠시 열리는 역사 간이장터에서 승객들은 소시지와 빵 등의 식료품과 맥주 보드카 등을 샀다. 내가 늘 고마워했던 음식은 한국산 ‘도시락라면’과 ‘초코파이’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어느 도시, 어느 역에서나 그것을 구할 수 있었으니 동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시베리아 횡단여행은 결코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 러시아 알파벳과 여행에 필요한 약간의 말을 익힌 후 좋은 가이드북을 갖고 떠난다면 짜릿한 감흥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길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틈틈이 그 길을 소개할 예정이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이르쿠츠크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행 저녁 열차를 타니 내가 탄 칸에 러시아 중년 사내 3명이 먼저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저녁이 되자 술판을 벌이며 나에게도 술을 권했다. 레몬맛이 나는 보드카로 일반 보드카보다 약한 35도짜리였지만 목이 타는 것은 여전했다. 그들은 보드카를 벌컥 들이마신 후 타는 목을 달래기 위해 맥주를 마셨다. 안주 겸 저녁은 바이칼 호수에서 잡히는 ‘오물(omul)’이라는 생선과 소시지였다. 술이 별로 세지 않지만 정에 굶주렸던 나는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일단 마시고 보자’라는 생각에 주는 대로 벌컥벌컥 받아 마셨다. 그러자 러시아인들은 신이 나서 ‘카레야(코리아) 넘버 원!’을 외치며 계속 잔에 술을 부었다. 그 바람에 먼저 곯아떨어졌는데 다음날 아침,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아침도 먹지 않았는데 이들은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매점에서 커다란 보드카와 맥주 몇 병을 사갖고 오는 게 아닌가. 해장술이었다. ‘저걸 마시면 내가 죽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한국 남자의 체면을 위해 마시고 또 마셨다. 그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후 영하 15도의 길거리에서도 맥주병을 들고 다니는 러시아인들을 보았으니 정말 술을 좋아하는 민족임에 틀림없다.

■여행 정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1등칸 2인실은 매우 비싸고 2등칸 4인실 쿠페는 비교적 저렴하다. 예전에는 외국인 가격과 내국인 가격이 달랐으나 지금은 모두 동일하다. 담요는 몇 백원 정도를 내고 빌려야 한다. 여름에는 기차표나 숙소를 구하기가 힘든 편이지만 겨울에는 얼마든지 있다.

기차표 시간은 모두 모스크바 시각 기준이므로 잘 계산해야 한다. 급행과 완행, 짝수날과 홀수날 등의 러시아말을 익히면 금방 파악할 수가 있다.

by 100명 2007. 4. 13. 13:34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Vladivostok
[세계일보 2004-12-02 16:03]

우리에게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무식한 붉은 군대, 초라한 보따리장수들, 식료품을 사려는 긴 줄, 춥고 음산한 날씨…. 이렇듯, 옛 소련의 풍경과 공산주의가 망한 후의 외신 보도가 어우러져 부정적인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는 깊은 틈이 있다.

그동안 정치적인 이유로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에게 멀고 먼 도시였다. 하지만 ‘극동의 정복자’라는 뜻을 가진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러시아 도시다. 비행기를 타고 동해를 따라 북상하다 보면 2시간도 안 돼 연해주 땅이 펼쳐진다. 물결처럼 퍼지는 광대한 숲 한가운데 공항이 있고, 그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제복을 입은 예쁜 러시아 여인들의 쌀쌀맞은 표정과 금발이다. 그 풍경을 보는 순간 ‘아, 러시아 땅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예쁜 도시다. 물론, 조잡한 물건을 파는 허름한 가게들도 많고 역 앞 광장에는 레닌 동상이 여전히 서 있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매우 평화스럽다. 기차역은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예쁘고, 언덕에 올라 내려다보는 쪽빛 바다와 항구들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스베틀란스카야 거리에는 제정 러시아 때 세워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한가운데를 장난감 같은 전차와 트롤리 버스들이 달린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시베리아 호랑이 박제와 이 근방에 살던 현지인들의 민속 유물, 소비에트 시절의 유물들이 전시된 박물관들이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혁명전사 광장으로 깃발과 나팔을 든 채 진격하는 역동적인 병사들의 동상이 서 있다.

◇레닌 동상 앞에서 록 음악을 연주하는 젊은이들.

◇천진난만한 러시아 아이들.

◇거리의 장터.

블라디보스토크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 때 이곳에 러시아 태평양 해군기지가 생기면서 급속하게 발전했는데, 공산주의 혁명 직후에 미국과 영국, 일본군이 상륙하여 반혁명 러시아 세력인 백군을 지원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러시아인들은 늘 이런 침략에 시달렸다. 몽골인들의 침략, 나폴레옹의 침략, 히틀러의 침략….

그러나 어느 나라나 그렇듯 그들 또한 힘을 갖게 되면서 끝없는 팽창 정책을 추구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 시기에 만났었다. 제정러시아의 확장을 외치던 그들을 구한말 시대에 만났고, 소비에트 공산혁명을 외치던 그들을 해방 후에 만났다. 그래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러시아인들의 이미지는 침략적이고 팽창적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들도 외국에 늘 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려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우리의 흔적도 배어 있다. 항일 독립군들은 볼셰비키와 백군들 싸움에서 볼셰비키를 도와 1919년 말 그들의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성장했고 서북 변두리 언덕의 신한촌(新韓村)에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한때 거주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밀려난 백군, 즉 황실과 귀족들은 중국의 하얼빈으로, 상하이로 도망가게 되고 몰락한 그들의 딸들은 생계를 위해 술집에 드나들기도 했다. 그들이 백군에 속해 있었기에 백계 러시아인이란 용어가 생겨났고 우리들에게도 백계 러시아 여인의 미모가 다소 과장되게 전달됐다. 원래 백러시아란 옛 소련 해체 후 독립한 벨로루시의 전 국가 이름이었다. 그들의 흰 피부와 흰 의상, 흰 집으로 인해 그렇게 불렸다는데, 우리는 백러시아와 백계 러시아를 혼동해서 쓰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무얼 보려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런 역사가 서린 고풍스러운 골목길을 걸어보고,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인 아무르만을 산책하며, 가끔 러시아인들과 함께 전차를 타고 그들의 체취에 젖어보는 것이 큰 만족을 준다. 그리고 밤늦게 카페에서 러시아인과 함께 앉아 홍당무로 만든 새콤한 보르슈 수프에 독한 40도 보드카를 마시며 러시아 음악을 듣는 순간이야말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의 진짜 매력이 아닐까?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에 탔을 때, 1등칸 좌석 밑에서 팔자 좋게 누워 있는 송아지만한 개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뒤 러시아를 여행하며 아침과 낮에는 물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러시아인들을 수없이 볼 수 있었다. 그만큼 러시아인들은 개를 매우 사랑하고 있었다.

또 하나 눈에 띄었던 점은 거리에서 마주친 러시아 여인들이 하나같이 모델처럼 멋진 외투를 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수준이 높지 않은데 어떻게 이런 고급 옷을 입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그 의문은 풀렸다. 혹독한 추위를 겪어야 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외투는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이다.

그리고 소비재가 아니라 내구재이기도 하다. 대개 결혼할 때 평생 입기 위해 마련하는 것이기에 큰돈을 들여 좋은 것을 마련하는 것이다.

■ 여행정보

▲항공편:대한항공과 블라디보스토크 항공이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운항한다.

▲비자:여행으로 가는 사람은 관광비자를 얻어야 하는데 초청장이 필요하다. 여행사를 이용하면 쉽게 해결된다.

▲거주등록제도:일단 러시아에 가면 3일 이내에 오비르란 관청에 가서 비자 등록을 해야 한다. 이걸 안 하면 나중에 출국할 때, 혹은 길거리에서 경찰에 검문당했을 때 문제가 된다. 대개 좋은 호텔에 묵으면서 호텔에 수수료를 내면 대행해서 받아준다. 혹은 자신을 초청해준 여행사에 수수료를 주고 부탁하면 된다.

또 각 도시에 들를 때마다 3일 이내에 그 도시의 오비르에 가서 등록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호텔에 묵으면 즉시 호텔 측에서 처리를 해준다. 단, 값싼 호스텔에서 묵거나 민박할 경우 개인적으로 알아서 해야 하는데, 여행사에 수수료를 내고 부탁하거나 3일 이내에 그 도시를 떠나야 한다.

by 100명 2007. 4. 13. 13:33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세계일보 2004-12-09 16:45]

하바로프스크란 이름은 러시아의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그가 동방의 끝까지 탐험했던 이유는 모피 때문이었다.

9세기 말 러시아의 기원이 된 나라 키예프 루시가 터를 잡았으나 13세기 초 몽골에 굴복해 러시아인들은 약 24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그 치욕을 털어내며 일어선 나라가 모스크바공국인데, 16세기경 우랄산맥 서쪽에 있던 시비리란 나라로부터 담비·다람쥐 가죽 등을 공물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시비리가 의무를 게을리 하자 이 지역을 정벌한다. 이렇게 시작된 시베리아 정복은 17세기 초 로마노프 왕조에 와서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되는데, 그 전위대는 사냥꾼과 모피류를 수집하던 상인들과 민병들이었다. 하바로프 역시 기업가적인 야망을 안고 17세기 중반 아무르 강변을 탐사하며 원주민을 점령했다. 이렇게 해서 아무르 강변에 만들어진 도시가 하바로프스크다.

◇아무르강.

현재 하바로프스크는 극동 지방의 최대 도시지만 첫발을 내디디며 낡은 아파트와 목조 건물들,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굴뚝 등을 보는 순간 낙후된 우리의 1960∼70년대 풍경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바로프스크는 전원풍의 낭만적인 도시이고 23개의 대학과 수많은 중등교육기관, 전문기술학교가 있는 교육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코 아무르강이다. 길이 4350㎞로 동북아시아 최대의 강인 아무르강은 중국에서는 헤이룽강이라고 부른다.

아무르강은 바다 같은 강이다. 가물가물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러시아인들은 산책을 즐기는데, 특히 아름답기로 소문난 하바로프스크 여인들이 눈길을 잡아끈다.

강 근처의 향토박물관에는 아무르 호랑이와 곰, 순록들의 박제, 아궁이와 솥이 걸린 부뚜막, 마루가 있는 집, 나무 탈 등 낯익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원래 아무르강은 만주족의 무대였고 먼 옛날엔 우리의 무대이기도 했다. 또 적군박물관에는 극동지방에서 벌어졌던 일본과 중국, 소련군의 전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에서 식료품을 파는 사람들.

하바로프스크 중심지는 레닌광장에서 콤소몰 광장까지 이어지는 아무르스키 거리다. 이곳에는 번듯한 건물들이 많다. 그런데 문이 엄청 두껍고 창문이 없거나 조그마해서 러시아어를 모르는 이방인은 무슨 건물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개 백화점이나 상점인데, 소련이 망할 때와는 달리 안에는 풍부한 식료품과 상점들이 있어 열기가 후끈하다. 그리고 거리에서 깜찍한 제복을 입은 여인들이 양담배 판촉 활동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이제 러시아는 완전히 공산주의를 털어버리고 자본주의화되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면 몽골 접경지역인 울란우데까지 약 54시간이 걸린다. 이 길에는 거대한 타이가 숲이 펼쳐지는데, 러시아의 시인 안톤 체호프는 타이가의 매력을 이렇게 읊었다. “타이가의 매력은 우뚝 솟은 거목이나 깊이 모를 정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새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끝없는 넓이에 있다.”

과연 그랬다. 인도 대륙을 다 덮을 수 있다는 그 겨울의 눈 덮인 숲은 쉽게 끝이 나지 않았다.

◇횡단 철도 인근의 마을.

그 길에는 우리 민족의 흔적도 있었다. 중간에 벨로고르스크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얼마 안 떨어진 아무르 강변에 블라고베시첸스크라는 도시가 있다. 그 근방에서 자유시 참변 혹은 흑하사변이란 우리 항일 무장독립투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사건이 발생했다. 독립군은 볼셰비키 쪽에 가담해 일본군과 싸웠으나, 후에 일본군과의 확전을 원치 않은 볼셰비키 측은 우리 독립군을 무장해제하려 한다. 이를 거부하자 1921년 6월 28일 볼셰비키는 우리 독립군을 학살했다.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여명, 포로 917명이었다.

시베리아를 그냥 달리면 밋밋하다. 그러나 단조로운 풍경에 지칠 때쯤 이런 책을 읽고 역사를 회상하며 러시아 음악을 듣노라면 애환과 달콤함이 묘하게 결합한 낭만적인 길이 된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는.

여행작가

■여행정보

숙소:하바로프스크에서 인투리스트라는 최고급 호텔이 있지만 기본적인 침대와 욕탕, TV가 있는 중급 호텔 정도에 묵으면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레닌광장에 첸트랄나야 호텔은 1박에 18달러 정도로 사람이 별로 없는 겨울철에는 예약 안 하고 그냥 가서 묵을 수 있다.

음식:추운 겨울철에 갔다면 뜨끈뜨끈한 펠메니(물만두국)는 최고의 음식.

■여행 에피소드

러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검문을 많이 당한다. 새벽 기차를 타기 위해 오전 4시쯤 하바로프스크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경찰이라며 제복을 입은 이가 다가와 여권을 보자고 요구했다. 여행자들은 러시아에 도착하거나 혹은 어떤 도시에 다다른 후 3일 이내에 오비르란 관청에 가서 도장을 받아야 하는 거주등록제가 있는데, 나는 다 해결했으므로 자신만만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는 다음에 기차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순간 이 사람이 정말 경찰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휴가나온 군인이 여행자를 겁줘서 뭔가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브이, 크토 에타(당신, 누구야?)”

서투른 러시아말로 크게 외치자 이 사내는 얼떨결에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내가 보면 아는가? 그러나 나는 기세를 몰아 그의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시늉을 했다. 그가 정말 경찰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가면서 생각하니 ‘도대체 지금 내가 어딜 가서 뭘 하자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두고 표를 보여주었다. 난생 처음 시민에게 이런 거친 대접을 받은 이 경찰은 기가 푹 죽은 채 표를 돌려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자기 동료와 함께 순찰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가 정말 경찰임을 안 순간 아찔했다. 다행히 그는 그냥 지나쳤는데, 그가 만약 거친 사내였다면 어땠을까? 남의 나라에 와서 아무것도 몰랐기에 부렸던 만용이었다.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세계일보 2004-12-09 16:45]

하바로프스크란 이름은 러시아의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그가 동방의 끝까지 탐험했던 이유는 모피 때문이었다.

9세기 말 러시아의 기원이 된 나라 키예프 루시가 터를 잡았으나 13세기 초 몽골에 굴복해 러시아인들은 약 24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그 치욕을 털어내며 일어선 나라가 모스크바공국인데, 16세기경 우랄산맥 서쪽에 있던 시비리란 나라로부터 담비·다람쥐 가죽 등을 공물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시비리가 의무를 게을리 하자 이 지역을 정벌한다. 이렇게 시작된 시베리아 정복은 17세기 초 로마노프 왕조에 와서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되는데, 그 전위대는 사냥꾼과 모피류를 수집하던 상인들과 민병들이었다. 하바로프 역시 기업가적인 야망을 안고 17세기 중반 아무르 강변을 탐사하며 원주민을 점령했다. 이렇게 해서 아무르 강변에 만들어진 도시가 하바로프스크다.

◇아무르강.

현재 하바로프스크는 극동 지방의 최대 도시지만 첫발을 내디디며 낡은 아파트와 목조 건물들,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굴뚝 등을 보는 순간 낙후된 우리의 1960∼70년대 풍경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바로프스크는 전원풍의 낭만적인 도시이고 23개의 대학과 수많은 중등교육기관, 전문기술학교가 있는 교육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코 아무르강이다. 길이 4350㎞로 동북아시아 최대의 강인 아무르강은 중국에서는 헤이룽강이라고 부른다.

아무르강은 바다 같은 강이다. 가물가물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러시아인들은 산책을 즐기는데, 특히 아름답기로 소문난 하바로프스크 여인들이 눈길을 잡아끈다.

강 근처의 향토박물관에는 아무르 호랑이와 곰, 순록들의 박제, 아궁이와 솥이 걸린 부뚜막, 마루가 있는 집, 나무 탈 등 낯익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원래 아무르강은 만주족의 무대였고 먼 옛날엔 우리의 무대이기도 했다. 또 적군박물관에는 극동지방에서 벌어졌던 일본과 중국, 소련군의 전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에서 식료품을 파는 사람들.

하바로프스크 중심지는 레닌광장에서 콤소몰 광장까지 이어지는 아무르스키 거리다. 이곳에는 번듯한 건물들이 많다. 그런데 문이 엄청 두껍고 창문이 없거나 조그마해서 러시아어를 모르는 이방인은 무슨 건물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개 백화점이나 상점인데, 소련이 망할 때와는 달리 안에는 풍부한 식료품과 상점들이 있어 열기가 후끈하다. 그리고 거리에서 깜찍한 제복을 입은 여인들이 양담배 판촉 활동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이제 러시아는 완전히 공산주의를 털어버리고 자본주의화되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면 몽골 접경지역인 울란우데까지 약 54시간이 걸린다. 이 길에는 거대한 타이가 숲이 펼쳐지는데, 러시아의 시인 안톤 체호프는 타이가의 매력을 이렇게 읊었다. “타이가의 매력은 우뚝 솟은 거목이나 깊이 모를 정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새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끝없는 넓이에 있다.”

과연 그랬다. 인도 대륙을 다 덮을 수 있다는 그 겨울의 눈 덮인 숲은 쉽게 끝이 나지 않았다.

◇횡단 철도 인근의 마을.

그 길에는 우리 민족의 흔적도 있었다. 중간에 벨로고르스크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얼마 안 떨어진 아무르 강변에 블라고베시첸스크라는 도시가 있다. 그 근방에서 자유시 참변 혹은 흑하사변이란 우리 항일 무장독립투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사건이 발생했다. 독립군은 볼셰비키 쪽에 가담해 일본군과 싸웠으나, 후에 일본군과의 확전을 원치 않은 볼셰비키 측은 우리 독립군을 무장해제하려 한다. 이를 거부하자 1921년 6월 28일 볼셰비키는 우리 독립군을 학살했다.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여명, 포로 917명이었다.

시베리아를 그냥 달리면 밋밋하다. 그러나 단조로운 풍경에 지칠 때쯤 이런 책을 읽고 역사를 회상하며 러시아 음악을 듣노라면 애환과 달콤함이 묘하게 결합한 낭만적인 길이 된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는.

여행작가

■여행정보

숙소:하바로프스크에서 인투리스트라는 최고급 호텔이 있지만 기본적인 침대와 욕탕, TV가 있는 중급 호텔 정도에 묵으면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레닌광장에 첸트랄나야 호텔은 1박에 18달러 정도로 사람이 별로 없는 겨울철에는 예약 안 하고 그냥 가서 묵을 수 있다.

음식:추운 겨울철에 갔다면 뜨끈뜨끈한 펠메니(물만두국)는 최고의 음식.

■여행 에피소드

러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검문을 많이 당한다. 새벽 기차를 타기 위해 오전 4시쯤 하바로프스크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경찰이라며 제복을 입은 이가 다가와 여권을 보자고 요구했다. 여행자들은 러시아에 도착하거나 혹은 어떤 도시에 다다른 후 3일 이내에 오비르란 관청에 가서 도장을 받아야 하는 거주등록제가 있는데, 나는 다 해결했으므로 자신만만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는 다음에 기차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순간 이 사람이 정말 경찰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휴가나온 군인이 여행자를 겁줘서 뭔가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브이, 크토 에타(당신, 누구야?)”

서투른 러시아말로 크게 외치자 이 사내는 얼떨결에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내가 보면 아는가? 그러나 나는 기세를 몰아 그의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시늉을 했다. 그가 정말 경찰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가면서 생각하니 ‘도대체 지금 내가 어딜 가서 뭘 하자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두고 표를 보여주었다. 난생 처음 시민에게 이런 거친 대접을 받은 이 경찰은 기가 푹 죽은 채 표를 돌려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자기 동료와 함께 순찰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가 정말 경찰임을 안 순간 아찔했다. 다행히 그는 그냥 지나쳤는데, 그가 만약 거친 사내였다면 어땠을까? 남의 나라에 와서 아무것도 몰랐기에 부렸던 만용이었다.

by 100명 2007. 4. 13. 13:32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부랴트 울란우데
[세계일보 2004-12-16 16:33]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따라 달리다 보면, 베이징에서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거쳐 오는 중국횡단철도(TCR)와 만나는 지점이 시베리아 한복판에 나타난다.

부랴트의 수도인 울란우데로,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깜짝 놀라게 된다. 마주치는 얼굴들이 우리와 매우 흡사해서다. 울란우데에 사는 부랴트족은 유전학적으로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민족 중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부랴트는 현재 러시아 연방에 속해 있다.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될 때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은 완전히 분리되었지만 러시아 밑에 있던 부랴트와 하카스, 체첸 등의 자치공화국들은 ‘자치’를 떼어내면서 공화국으로 격상되었고 이들이 모여 새로운 러시아 연방을 만들었다. 석유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이슬람을 믿는 체첸은 완전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철저히 러시아에 예속된 부랴트는 현재 러시아 연방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썰매를 타고 노는 아이들.

울란우데는 교통 요지답게 시내는 활발하다. 그러나 중심지를 벗어나 몇십분만 외곽으로 걸어나가면 목조건물들이 많이 들어선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 사람들은 러시아인들과는 달리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시내 민속박물관에는 티베트 불교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울란우데에서 30㎞ 정도 떨어진 이볼긴스키 다산이란 민속촌에 가면 멋있는 티베트 불교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은 버스를 타고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을 30분 정도 달리면 목조주택이 간간이 들어선 곳에 우뚝 서 있다. 화려한 법당 안에는 불상과 함께 14대 달라이라마의 사진이 모셔져 있는데, 평일에는 승려 서너 명이 간소한 의식을 치르지만 특별한 날에는 수많은 승려들이 모여 거대한 의식을 치른다. 이곳은 러시아 티베트 불교의 총본산으로 부랴트족의 불교도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울란우데의 외곽에는 야외 민속박물관도 있다. 넓은 벌판 한가운데는 유목민들의 거주지인 게르(몽골식 이동식 천막)와 아름다운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 있고, 올루스(ooloose)라는 통나무로 만든 근세 부랴트 전통가옥도 있다. 또한 러시아 정교회의 개혁을 거부하고 17세기 초에 시베리아로 와 숨어 살던 보수적인 정교회 사람들의 집도 전시되어 있다. 어찌나 꼭꼭 숨어 살았던지 이들은 1980년 발견되었을 때, 레닌이나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약 350년동안 세상을 모른 채 자기들끼리만 살았던 것이다.

◇야외 민속박물관에 있는 게르.

이곳에는 솟대도 있다. 기둥 위에 나무를 깎아 만든 새를 얹어 놓은 한국의 솟대와 똑같다. 그곳에 쓰인 팻말의 설명을 소개하면 이렇다.

“예벤크족(초기 퉁구스족)은 북쪽의 툰드라와 타이가 지역을 개척한 종족이다. 러시아에 모두 2만5000여명이 살고 있는데 그중 1700여명이 이곳 부랴트에 살고 있다. 예벤크족에게 우주는 3개의 정신세계로 형성되어 있다. 다르페(darpe)는 하늘의 세계를 의미하며 샤먼은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하늘의 세계는 곰과 물고기로 형상화되고 오난(onan)은 악과 죽음의 세계, 땅의 세계로 늑대와 여우로 표현된다. 이 두 세계 사이의 중간세계를 나타내는 정신은 무그데네(mugdene)라 하며 이것은 새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즉 이들에 의하면 솟대는 하늘과 땅의 두 세계를 연결하는 중간세계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솟대는 세계의 무질서와 부정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고 하늘에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상징이었으니, 형상은 물론 의미에서도 비슷하지 않은가?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우연히 만난 솟대를 바라보노라면, 땅 위에서 힘든 현실을 살아가며 새를 통해 하늘의 축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언어와 의미 이전에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느낌을 통해서다. 그것은 아마도 이곳을 거쳐왔던 우리 조상의 추억이 유전자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여행작가

■여행정보

▲숙소

고급 호텔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시내 중심지 광장에 있는 호텔 바이칼(거스티니치 바이칼)이 싸고 편리하다. 8달러 정도.

▲교통

티베트 불교 사원이 있는 이볼긴스키 다산으로 가는 버스는 시외버스 터미널에 있다. 약 40분 걸리는데 버스는 오전 7시10분, 낮 12시40분, 오후 5시 등으로 뜸하다. 야외민속박물관(에트노그라피체스키 무제이)은 바이칼 호텔 앞에서 출발하는 8번 버스를 타면 된다. 20분 정도 가다 내려서 숲길을 따라 20분쯤 걸어들어가면 나온다.

■여행 에피소드

울란우데는 많은 여행자들이 거쳐가는 곳이어서 종종 간판에 쓰인 영어도 눈에 띄었다. 카페라는 글자를 보고 허름한 건물 2층으로 무작정 들어가 보았다. 이곳은 아무 인테리어도 없는 조그만 공간으로, 보드카나 생맥주를 셀프 서비스로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부랴트족이어서 나의 얼굴도 그렇게 튀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복장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이란 표시가 났나보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그들의 눈초리를 피하며 구석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여종업원이 와서 서투른 영어로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나와 합석하기를 원한다’고 말을 전했다. 외로웠던 나는 흔쾌히 합석했는데 자리에 앉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남녀 커플이었는데 한국인과 얼굴이 똑같았고, 특히 남자는 나의 고교 동창생 얼굴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는 머리에 노란 염색을 하고 있었다. 둘 다 의대생으로 한국에 매우 관심이 있었다.

시베리아의 한복판이어서 오지일 줄 알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유행을 다 알고 있었다. 한동안 이데올로기 밑에서 억눌렸던 욕망을 분출시키며 이제 힘차게 달리고 싶어했다. 교통의 요지여서 수많은 외국인이 드나들기도 하는 이곳은 어쩌면 머지않은 장래에 엄청난 욕망과 에너지에 휩싸인 도시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란우데 거리.

by 100명 2007. 4. 13. 13:30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이르쿠츠크
[세계일보 2004-12-23 16:15]

시베리아 한복판의 이르쿠츠크.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한 도시지만 아픈 역사도 서려 있다.

1825년 12월,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에서 일단의 청년들이 차르를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공화제나 입헌군주제를 추구했던 이들 귀족 자제는 12월에 거사를 해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라 불리는데, 실패 후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다. 그때 그 부인들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반역자들을 잊고 새 출발을 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갈 것인가. 이때 그들은 쇠고랑을 차고 유배지 시베리아로 떠나는 남편들을 따라왔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놓이기 전에 그 길은 죽음의 길이나 다를 바 없을 만큼 험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황량한 이르쿠츠크 근처의 광산이나 벌목장에서 일을 했고 부인은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이곳에서 삶을 다 바쳤다.

그런 이르쿠츠크가 이제 시베리아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교통의 요지이며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상점들로 활기찬 이 도시에는 데카브리스트의 주동자인 트루베츠코이와 볼콘스키가 살던 집들이 보존되어 있고 러시아 화가들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전시된 예술박물관도 있다. 시베리아 벌판에도 이제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이르쿠츠크 시내. 사진 아래는 바이칼 호수 전경.

이르쿠츠크가 가장 자랑하는 곳은 바이칼 호수다. 면적이 3만1500㎢로 한반도의 약 7분의 1이고, 길이는 한반도만한 바다 같은 이 호수에 가려면 우선 시외버스를 타야 한다. 침엽수림이 우거진 눈 덮인 길을 1시간45분 정도 달리자 리스트반캬라는 마을이 나왔고 드디어 바이칼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11월 초 영하 10여도의 차가운 공기 아래서 호숫물은 엷은 김을 뿜어내며 서서히 얼어가고 있었다. 여름에는 배를 타고 호수 주변의 휴양지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지만, 한겨울에는 꽁꽁 얼어 호수를 건너는 노선 버스가 생길 정도라고 한다.

바이칼 호수의 깊이는 1673m로, 세계에서 가장 깊고 물이 매우 투명해 40m 깊이까지 육안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호수에는 336개의 강이 흘러드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강은 앙가라강 하나뿐이고 호수 밑에서는 샘물이 솟고 있다. 3500여종의 생물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84%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다고 한다. 또한 햇빛에 닿으면 그냥 녹아버리는 투명한 물고기도 있다.

바이칼이란 타타르어로 ‘풍요한 호수’라는 뜻이다. 타타르인은 원래 13세기 몽골을 따라 서진했던 투르크족과 불가리아인, 카자흐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인데, 나중에 북방 투르크족들을 모두 타타르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바이칼은 먼 옛날 우리 조상의 무대이기도 했다. 학자들은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 중의 일부가 차차 동진해서 한반도로 흘러들었다고 추정한다. 그 흔적일까. 바이칼 호수 근처에는 한국의 장승과 모습이 똑같은 장승이 서 있기도 하다.

바이칼 호수에 온 이들은 누구나 ‘오물’이라는 물고기 맛을 본다. 끝없이 펼쳐진 바이칼 호수 앞에서 오물 안주에 목이 타는 듯한 보드카 한잔을 기울이는 것은 빠뜨릴 수 없는 의식이다.

이르쿠츠크에 이런 낭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르쿠츠크 근처의 가스 매장량은 1조5000억㎥. 이는 한국과 중국에 30년간 공급할 수 있는 매장량이다. 또한 석탄과 석유 철광석 등의 지하자원 개발 중심지도 이르쿠츠크다. 이제 러시아는 거대한 포부를 안고 시베리아를 개발하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오염되는 자연은 몽골과 중국의 황사처럼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련이 망한 후 지난 10여년간 서방인들로부터 설움을 톡톡히 맛본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2000년 새해 벽두에 강성 러시아 재건을 이렇게 선언했다.

“최근 수년간 일어난 사건들은 러시아가 강해지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과연 이르쿠츠크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여행작가

■ 여행정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리스트반캬까지 가는 버스가 오전 9시에 있다. 리스트반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가는 버스는 오전 11시와 오후 4시45분, 오후 8시에 있다. 역 맨 왼쪽의 건물에 외국인 전용 매표소가 있다. 이곳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또 짐을 맡기고 싶으면 역 부근의 ‘카메라 흐라네니야(수하물 보관소)’를 이용할 수 있다.

■ 여행 에피소드

호텔서 여인들 전화 시달려

말로만 듣던 인터걸 실감

시베리아의 도시들을 들르면 늘 숙소를 찾느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많이 걸었다. 그리고 날마다 추운 날씨 속에서 하루 종일 걷다 보니 한 2주일쯤 지나자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르쿠츠크 구경을 마치고 저녁에 호텔침대에 누우니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지고 가슴까지 결려 왔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욕조 속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아픈 허리를 달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누가 나에게 전화를?’ 이상했지만 간신히 기어나와 전화를 받으니 여자가 러시아말로 떠들고 있었다. 내가 영어로 묻자 여인은 전화를 끊었다. 다시 욕조로 기어와 탕으로 들어갔는데 또 전화가 왔다. 다시 기어나와 전화를 받고, 끊고…. 이 짓을 서너번 하다 보니 짜증이 나고 말았다. 마침내 마지막에는 소리를 지르려고 거칠게 받았는데 수화기에서 여인의 부드러운 영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오늘 밤,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을 원하지 않아요?” “…니예트(아니오).”

말로만 듣던 인터걸이었다. 이르쿠츠크 이전에 들렀던 울란우데의 어느 호텔에서도 계속 전화가 와 코드를 아예 뽑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인터걸의 전화였던 것 같았다.

그 호텔의 1층에는 나이트클럽이 있었고 마피아 같은 건장한 사내들이 늘 서성거리는 것으로 보아 마피아와 매춘이 결합한 곳 같았다. 글쎄, 이런 전화는 울란우데와 이르쿠츠크에서만 걸려왔으므로, 전 러시아가 다 이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일부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by 100명 2007. 4. 13. 13:29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하카스 아바칸
[세계일보 2004-12-30 15:54]

러시아 지도를 펼쳐 놓으면 몽골과 서부 시베리아 평원 사이에 높은 산맥들이 보인다. 약 2000㎞ 길이의 알타이산맥과 1000㎞의 서사얀산맥 그리고 600㎞의 동사얀산맥인데, 사얀산맥 사이를 흐르는 예니세이강은 러시아 대륙을 종단해 북쪽의 북극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거대한 산맥과 강 유역은 예로부터 수많은 유목민들의 고향이었다. 돌궐족(투르크족)과 위구르족, 몽골족이 살았고 지금은 러시아 연방에 속한 알타이 공화국과 하카스, 투바 공화국 등이 있다.

그 중에서 하카스 공화국의 수도 아바칸 근처에 있는 미누신스크는 약 5000년 전부터 청동기 문화가 발생한 곳으로 시베리아 문화의 요람이었다.

이르쿠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 크라스노야르스크라는 곳에서 내린 뒤 횡단철도 본궤도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들어가는 기차를 타면 거?12시간 후에 아바칸에 도착하게 된다.

밤기차를 타고 가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차창 밖으로 눈에 파묻힌 자작나무 숲과 침엽수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눈 속에 푹 파묻힌 아바칸은 인구 16만명으로 작고 아담한 도시였다. 하카스라고 하지만 인구 약 60만명 중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81.5%고 몽골계인 하카스인은 11.5% 정도다. 그래서 거리를 걷다 보면 하얀 살결의 러시아인이 훨씬 눈에 많이 띄고 간간이 우리와 얼굴이 비슷한 몽골계 사람도 눈에 띄었다.

아바칸의 11월 중순의 온도는 영하 17도에서 20도 정도로 추웠다. 여인네들이 아이를 썰매에 태워 끌고 다니는 풍경이 문득, 설국 속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잣을 우물우물 씹다가 껍질을 뱉었다. 시베리아에는 잣나무들이 많아서 어딜 가나 사람들이 잣을 많이 씹는다.

오지 중의 오지 같았지만 백화점에 들어가 보니 웬만한 상품은 다 들어와 있었다. 청바지와 화장품, CD음반, 전자레인지, 냉장고 그리고 한국산 TV가 보였다. 왁자지껄한 재래시장도 있어서 아바칸이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또한 서울이란 이름의 레스토랑도 있었다. 사할린에서 살던 교포가 이곳에 와서 하는 식당인데, 이미 한국의 기업인들이 가끔 드나들고 있다고 했다. 이렇듯 한국 사람들의 발길은 전 세계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미누신스크 박물관의 남근 형태 거석.

눈 덮인 아바칸 길을 기웃거리며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역시 가장 볼 만한 곳은 아바칸에서 20㎞ 떨어진 미누신스크였다. 3000∼5000년 전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됐는데,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의 유물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지역은 현재 러시아 영토에 속해 있지만 먼 옛날에는 몽골리안의 무대였던 것이다.

미누신스크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신시가지에는 아파트 등 현대적인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고, 구시가지에는 수백년 전의 목조가옥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구시가지 중심에는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 있고 사원 근처에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원래 마티아노브라는 사람이 1877년에 만든 박물관으로 처음에는 바위와 벌레를 수집해서 전시했지만, 지금은 청동기시대와 스키타이인의 무기 그리고 거석문화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그곳에 전시된, 사람 몸의 두세 배는 됨직한 크기의 거대한 선돌들은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있는 석상들처럼 커다란 얼굴 형상, 혹은 남자의 성기 형상처럼 보이는 거대한 선돌들도 보였다. 동물 그림들, 수렵하는 모습 등을 바위에 새긴 암각화들도 있었다.

이런 거석들은 시베리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한국에서도 볼 수 있지만 지중해 부근에도 많다. 유명한 영국의 스톤헨지 역시 기원전 2800년쯤부터 만들어진 거대한 환상 열석들이다. 이런 거석들은 천문대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고 매장에 관련됐을 것이란 설도 있는데, 어쨌든 미누신스크는 수천년 전 이런 문화가 크게 번성했던 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러시아에서는 사람들이 혈액순환에 좋아 자작나무 가지로 온몸을 치며 사우나를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호기심 어린 마음을 안고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휴게실이 있고 그곳을 통과하니 공중탕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웬 할머니가 홀딱 벗은 남자들 사이를 태연히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어서 난감했다.

안을 들여다보니 탕이 있는 게 아니라 각자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끼얹고 있었다. 한쪽에는 자작나무 가지가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그 가지로 자기 몸을 때리고 있었다. 나도 하고 싶었지만 탕도 없고 썰렁한 데다 탈의실 옷 보관함도 허술해 보이고 할머니 앞에서 옷 벗기도 싫어서 그냥 나왔다.

그런데 돌아나오는 나를 보고 휴게실에 있던 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원래 러시아는 목욕탕에서 몇 시간씩 얘기하고 술 마시는데 갑자기 이방인이 들어왔다가 슬그머니 나가는 것을 보니 우스웠나보다. 웃음소리가 너무 시끄럽자 할머니가 화를 냈고, 사내들의 웃음은 더욱 크게 폭발하고 말았다.

엉거주춤 돌아서던 나도 장난기가 들어, 그들에게 코믹한 웃음을 지으며 ‘다스비다니야(안녕)’라고 인사말을 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발을 동동 구르는 이, 허리를 잡고 고꾸라지는 이, 웃다가 맥주가 목에 걸려 켁켁 거리는 이, 그러다 의자 밑으로 엎어지는 사내도 있었다. 벌거벗은 사내들의 난장판을 보던 나 역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여행 정보

▲숙소:아바칸에는 1박에 80달러를 넘는 인투리스트 호텔부터 20∼30달러 하는 중급호텔, 6∼8달러의 저렴한 하카시야 호텔, 아바칸 호텔 등 다양한 숙소들이 있다.

▲교통:아바칸에서 미누신스크 가는 버스는 버스터미널 2번 플랫폼에서 약 20분 간격으로 있다. 아바칸에서 모스크바까지 직접 가는 열차도 있다.

by 100명 2007. 4. 13. 13:28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투바 키질
[세계일보 2005-01-06 16:5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이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곳이 투바 공화국의 수도 키질(Kyzil)이다. 그곳에 아시아의 중심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이끌렸다고 한다. 그는 10여년 동안 그곳에 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88년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3년 후 소련은 해체됐고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땅이 됐다.

투바 공화국의 수도 키질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우선 하카시야 공화국의 수도 아바칸으로 간 후,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탔다. 11월 중순 영하 20도의 추위 아래서 덜덜 떨며 버스를 타니 시트는 누더기처럼 낡고 스팀조차 들어오지 않아 달리는 내내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야만 했다.

중간에 들른 화장실은 담도 없이 탁 트여 있고 소변이 얼어 만들어진 누런 작은 언덕이 있었다. 거대한 사얀산맥을 넘는 동안 엄청난 폭설이 내렸지만 그에 못지않게 제설차들이 부지런히 다녀 버스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얀산맥을 넘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버스는 검문소에 도착했다. 검문하던 군인은 한국인과 얼굴이 비슷했다. 투바인 역시 몽골리언으로 전혀 낯설지 않다. 투바인들은 스탈린 때도 라마교를 국가의 종교로 채택할 정도였는데 소련이 망하던 무렵에 폭동이 일어나서 약 3000명의 러시아 기술자들이 투바 공화국을 떠난 적도 있다.

투바 공화국은 인구 밀도가 아주 낮다. 면적 17만㎢에 사는 사람은 약 30만명. 한반도 전체 면적이 약 22만㎢인데 남북한 전체 인구가 700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이곳은 텅 빈 곳이나 마찬가지다.

투바 지역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흉노족이 지배했고 6세기 돌궐족, 8세기 위구르족, 13세기부터 몽골족, 18세기부터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지금은 러시아 연방에 속해 있다.

투바 공화국의 수도 키질은 인구 9만5000명으로 한나절만 걸어도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도시다. 낮고 오래된 건물, 초라한 행인들의 옷차림으로 보면 한눈에 이 지역이 사얀산맥 속의 오지라고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시장에는 이미 한글이 새겨진 새우 스낵과 한국산 신발들이 있고 투바족 청년들은 ‘카레이스키, 카레야 넘버 원’을 외치며 엄지 손가락을 높이 쳐들 정도였다.

◇키질의 투바족.

◇키질에서 만난 샤먼.

마을 중심지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는 예니세이강은 꽁꽁 얼어가고 있었다. 강 한가운데는 북극의 빙하처럼 얼음덩어리가 흘러가고 있었고, 이미 얼어버린 강가에서는 사내들이 얼음 낚시를 하고 있었다.

아시아 중심 기념비는 예니세이강을 내려다보며 강변에 우뚝 서 있었다. 단이 있고 커다란 지구본 위에 뾰족한 탑이 하늘로 치솟았는데, 이 기념비는 19세기에 이곳을 여행했던 별난 영국 여행자가 세운 것으로, 나름대로 계산을 한 결과 이곳을 중심으로 잡았다고 한다.

◇우리 어린이와 비슷한 생김새의 투바족 어린이.<사진왼쪽> 아시아 중심 기념탑.

러시아나 서방의 입장에서 보면 이곳은 변방 중의 변방이지만 이곳을 터전으로 살고 있던 유목민들에게는 변방이 아니라 중심지였다. 이곳은 이제 관광 명소가 되었고 결혼식을 올린 현지의 신혼부부들이 기념 사진을 찍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우리 민족과 관련된 흔적도 있다. 우연히 예니세이 강변을 거닐다 서낭당처럼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알록달록한 천을 세워 놓은 곳을 발견했다. 그 옆에 집이 있어서 무작정 들어가 보니 무당집이었다. 무당들은 향을 피워놓고 찾아온 여자 손님들에게 점을 보아주고 있었다. 마침 남자 무당, 즉 박수가 있었는데 그는 친절하게도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의식하는 모습을 재현해주기도 했다. 자료에 의하면 1931년 투바 공화국에는 725명의 샤먼이 있었는데 남자와 여자가 반반이었다고 한다.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하여 미래를 예언하고 병을 고치는 샤머니즘의 발원지가 바로 이 사얀산맥이라는데, 의식은 물론 생김새까지 똑같은 투바족을 보며 우리 샤머니즘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라는 느낌이 들고 말았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키질의 중심지에도 극장이 있다. 표를 끊고 들어가는데 할머니와 아이 그리고 나를 포함해 6명이었다. 같이 들어가 보니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한참 지나 어둠에 눈이 익은 후 보니 창문도 없이 시멘트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한 40평 정도 되나? 거기에 긴 나무 의자 몇 개 갖다 놓고 나머지는 그냥 바닥에 앉게 돼 있었다. 화면은 큰 비디오 화면 정도였고 거기서 상영되는 영화는 인도영화였다. 화면에서는 죽죽 비가 내리는데, 재미있는 것은 변사가 있다는 것. 녹음된 러시아 남자 변사의 목소리는 남녀노소의 역할을 혼자서 다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와 얘기하는 게 재미있었는데 아이는 간단한 영어를 곧잘 했다. 한참 얘기를 하다 중간에 나왔는데 도저히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아무 난방 장치가 없는 그곳에서 한두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떠나는 나에게 ‘다스비다니야(안녕히 가세요)’를 속삭이는 아이들의 마음씨가 따스하게 다가왔던 시간이었다.

■여행정보

▲교통:아바칸에서 키질까지 가는 버스는 예매하는 것이 좋다. 오전 8시30분에 떠나며 약 7달러로 8∼9시간 소요된다. 버스표는 기차역 안의 창구에서 팔며 버스는 역 앞에서 출발한다. 키질에서 아바칸 가는 버스는 오전 6시 50분에 출발하는데 예매하는 것이 좋다.(승객이 없는 경우 대형버스가 미니버스로 바뀌기도 하며, 시간도 정확히 지켜지지 않는다.)

▲숙소:몽굴렉 호텔, 키질 호텔 등이 시내에 있는데 외국인은 잘 받지 않는 분위기고 쌀쌀맞으며 만원인 경우가 많다. 예니세이 강변의 호텔 코테츠, 호텔 오두겐 등이 싸고도 쾌적하다. 호텔 코테츠의 경우 약 7달러를 받는다.

▲치안:여름 밤에 술 취한 청년들이 가끔 행패를 부린다고 하니 조심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순박한 편이다.

by 100명 2007. 4. 13. 13:27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 예카테린부르크
[세계일보 2005-01-13 16:24]
유라시아 대륙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것은 우랄산맥인데, 우랄산맥에서 아시아 쪽으로 41㎞ 들어간 곳에 예카테린부르크란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아시아에서 유럽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는 유럽의 관문이요,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사람에게는 아시아의 입구인 셈이다.

예카테린부르크는 1723년에 건설되었는데, 그 목적은 우랄산맥에 광범위하게 퍼진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공되기 약 46년 전인 1870년에 이미 이곳까지 철도가 들어왔다.

동쪽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려면 시베리아에서 가장 큰 기차역, 가장 큰 도서관, 가장 큰 발레극장, 가장 큰 공항 등을 자랑하는 노보시비르스크란 도시를 거쳐야 한다.

이 도시에서 횡단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약 20시간 정도 달리자 예카테린부르크가 나왔다. 첫 발을 디디자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상점, 그리고 세련된 점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유럽 쪽으로 다가왔다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은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군주인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일가족의 처형지다. 역을 등지고 남쪽으로 약 2㎞ 정도 걸어가니 언덕이 보였고 오른쪽에 작은 십자가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뒤편에 조그만 러시아정교회 사원이 있는데, 안에서는 몇몇 러시아인이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고 있었다.

◇황제 가족 사살명령을 내린 스베르들로프의 동상.

차르 니콜라이 1세는 매우 무능했고 2세는 그보다 더 무능했다. 차르가 된 후 러일전쟁에서 패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패했다. 또 차르의 부인은 시베리아 출신의 라마승 라스푸틴에게 홀렸다. 혈우병에 걸렸던 그녀의 아들을 라스푸틴이 고쳐 주었다고 믿고 그에게 많은 권력을 주라고 니콜라이 2세를 조종했다. 급기야 그녀와 라스푸틴 사이에 불륜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민심은 이반했다.

결국 1917년 2월혁명에 의해 차르는 퇴위했고, 1917년 10월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군과 반혁명군 간 싸움 속에서 차르의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1918년 7월 16일 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부인 그리고 다섯 아이들은 볼셰비키스트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소련 붕괴 후 그들의 유해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베드로와 바울 성당으로 옮겨졌다. 또 공산주의 시절 스베르들로프의 이름을 딴 도시 이름 스베르들로프스크는 1991년 시민 투표로 옛 이름인 예카테린부르크로 바뀌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부인.

예카테린부르크는 예카테리나 여제 2세를 기념하기 위한 도시 이름인데, 그녀는 독한 여자였다. 표트르 대제가 죽자 수십년간 러시아 정치는 극도로 혼란해서 차르가 열 차례나 바뀌었는데, 그 중 일곱 번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 혹은 남편과 부인 사이에 일어난 살해와 쿠테타 등에 의해서였다.

그 기간에도 강력한 권력을 잡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예카테리나 여제였다. 독일의 프러시아군 장교의 딸이었던 그녀는 남편을 독살하고 여제에 오른 후 폴란드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 전역을 차지했으며, 크림 반도를 장악했다. 또한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 알래스카까지 러시아 영토를 확장한 강력한 군주였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국유지를 나눠 주고 농노제를 더욱 강화해 많은 자작농을 농노로 전락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1800년 러시아 인구 3600만명 중 약 2000만명이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농노였기에 이런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혁명의 불씨는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는 돌고 돈다. 니콜라이 2세를 죽인 공산주의자들은 망했고 러시아인들은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을 위해 성호를 긋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서 ‘황제를 쏴라’ 하는 몸짓으로 서 있는 스베르들로프의 동상은 저녁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앞으로 또 100년이 지난 후 역사의 평가는 어떤 것일까? 돌고 도는 세상을 모두 보고 싶지만 100년을 못 넘기는 인간 수명 앞에서 쓴웃음만 삼키게 될 뿐이었다.

여행작가

■여행정보

▷숙소:예카테린부르크의 저렴한 숙소는 만원인 경우가 많다. 숙박을 못 하고 몇시간 정도 시간을 내어 돌아본다면 역 근처에 있는 수하물 보관소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몇백원 정도에 안전하게 짐을 맡긴 후 빈몸으로 구경할 수 있어 편리하다.

▷예의:콤파트먼트로 된 횡단 열차 안에서는 묵시적인 예의가 있다. 겨울에 훈훈한 열차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려면 외투와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동성끼리면 상관없지만 남녀가 같이 있을 경우, 한편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예의다. 대개 남자가 먼저 갈아입은 후 밖에 나가 있어 준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비:철도와 도로 사이에 있기에 이곳을 보려면 따로 시간을 내서 가야지 기차를 타고 가면 보이질 않는다. 우랄산맥은 언덕처럼 낮아서 언제 통과했는지 모를 정도다.

■여행 에피소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는 약 36시간이 걸리는 길로, 저녁 기차를 타면 2박3일이 걸린다. 4인실 쿠페의 2층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가 심심하면 바깥의 풍경을 구경하는, 조금은 지루한 길이었다.

내가 탄 객실 중간에 중년 남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까워지더니 하루가 지나자 연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식사와 술을 같이하고 같이 나가 담배를 피우는데 매우 다정스럽게 보였다. 그런 광경을 보니 예전에 본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생각났다. 기차 안에서 흘러 나오던 노래도 ‘러브 스토리’ ‘로미오와 줄리엣’ ‘남과 여’ ‘대부’ ‘엠마누엘 부인’ 등 감미로운 서양 영화음악들이었다.

홀로 침대에 누워 그들의 다정함을 바라보자니 은근히 질투심이 날 정도였는데, 멀고 먼 길을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이니만큼 이런 즉석 연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by 100명 2007. 4. 13. 13:24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상트 페테르부르크
[세계일보 2005-01-20 16:27]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네바강이 흐르는데 네바는 핀란드어로 늪이란 뜻이다. 이 늪 위에 도시를 세운 이는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 표트르 대제였다. 젊은 시절 포병 상등병으로 위장한 채, 서유럽 사절단에 참가해 직접 유럽문명을 체험한 그는 돌아와 개혁의 화신이 됐다. 러시아정교에서 신성시했던 턱수염을 스스로 깎은 후, 주변 관리들의 턱수염을 직접 면도기로 깎아 주었다. 그의 개혁 의지가 얼마나 철저했던지, 젊은이들에게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지 말라는 등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세목의 교훈서를 발간할 정도였다.

유럽풍의 새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야망에 불타올랐던 그는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수도를 건설하는 동안 열악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약 3만명의 노동자가 죽어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뼈 위에 세워진 도시’란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가졌으나 현재는 러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됐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중심도로는 약 4㎞에 달하는 네프스키대로다. 시골에서 올라와 심한 열등감과 좌절감을 느꼈던 러시아의 대문호 고골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아, 꿈엔들 이 네프스키 거리를 믿지 말지어다. 모든 것이 허위이고, 모든 것이 환영이며, 모든 것이 보기와는 다른 것이다.”

그 네프스키대로는 12월 초에도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해는 오전 9시나 돼서야 떴고 오후 3시만 되면 어둠이 깔렸다.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 순간의 네프스키대로는 문득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소설의 무대 같았고, 가끔은 어디선가 볼셰비키 혁명군의 총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러시아 귀족의 전통 복장.

네프스키대로에는 화려한 백화점, 아름다운 이사크 러시아정교 사원, 한국 기업들의 간판, 미국의 패스트푸드점들이 들어서 있고 2월 혁명의 현장인 궁전 광장도 있다.

1917년 2월, 영하 20도의 살벌한 추위 속에서 식량 배급을 받던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식량이 없다며 ‘니예트’라고 외친 병사의 말에 흥분해서 궁전 광장으로 행진했다. 결국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물러나고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2월 혁명은 그해 10월 레닌과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공산주의 혁명으로 완결된다. 이 역사의 현장인 궁전광장에는 러시아가 세계에 자랑하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있다. 300여개의 방에 전시된 소장품은 약 300만점인데, 작품 한 점당 1분씩만 본다고 해도 잠 안 자고, 쉬지 않고 볼 경우 2083일이 걸리니 햇수로 계산하면 5년 8개월이다.

이 어마어마한 박물관 못지않게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예술가들이 남긴 흔적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시구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시인 푸슈킨의 집은 운하 옆에 있다. 푸슈킨은 4개월 동안 이곳에서 살다 죽었는데 창 밖으로 파란 운하가 보이는 낭만적인 집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썼던 5층 하숙집.

그리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위대한 문호 도스토예프키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지하철 센나야역에는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며 대지에 입을 맞춘 센나야 광장이 있고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는 그의 하숙집이 있다. 운하 근처 노란색 건물 5층의 어느 방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1864년부터 약 3년간 머무르며 ‘죄와 벌’을 썼다고 한다.

그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박물관은 지하철 도스토예프스키역 근처에 있다. 그는 1881년 1월28일 오후 8시36분 이곳에서 숨을 거뒀고, 네프스키대로 끝에 있는 타흐빈묘지에 묻혔다. 정치범으로 사형 직전까지 갔었고 간질병, 도박, 변태성욕 등에 시달리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제 차이코프스키,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과 함께 평화롭게 쉬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못지않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들은 바로 사라져간 것들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역시 사라져간 러시아 예술가들의 흔적에 의해 아름다운 도시로 우뚝 서 있었다.

여행작가

◇네프스키대로의 러시아정교회 사원.

■여행 정보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의 현장을 찾아가려면 일단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센나야 역에서 내려야 한다. 바로 나오면 센나야 광장이고, 그곳에서 10시 방향으로 걸어가다 운하를 건너면 노란색 5층 건물이 보인다. 현재 이곳은 박물관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을 찾아가려면 지하철 4호선을 타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면 도스토예프스키 동상이 보인다. 근처에 꽃집이 보이는데 꽃집을 끼고 오른쪽으로 꺾어져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식료품 파는 시장이 나오고, 조금만 더 올라가면 허름한 건물 모서리 지하에 ‘도스토예프스키무제이(박물관)’라고 씌어진 팻말이 보인다.

푸슈킨의 집은 지하철 3호선의 네프스키 프로스펙트 역에서 내려 운하를 따라 북쪽으로 산책하다 보면 오른쪽에 보인다.

■여행 에피소드

예술가 동상앞 꽃 천지

삶 남루해도 마음은 풍성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언제, 어디서나 낭만적인 도시는 아니었다. 조금만 외곽으로 가거나 뒷골목으로 접어들면 밤에는 가로등이 없어 어두컴컴했고 가끔 구걸하는 이들도 만나게 됐다. 기차 교외선의 바닥이나 문이 낡은 목조로 남아 있는 경우도 많았고,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가장 부럽고 감탄스러운 것은 지하철역 중에 푸슈킨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기리는 ‘푸슈킨카야’, ‘도스토예프스키카야’ 등이 있다는 점이다. 역 안, 혹은 역 밖에 있는 그들의 동상 앞에는 늘 꽃다발이 바쳐져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꽃을 좋아했고 예술가들을 흠모했다. 비록 그들의 삶은 남루했지만 마음이 풍성해보이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어느 역 대합실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대학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성을 우울한 미소(depressed smile), 우울한 희망(depressed hope)이라 했다. 그래서 그럴까? 겨울에 바라본 그들의 겉모습은 우울해 보였지만 나는 그 속에 흐르는 따스한 미소와 희망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by 100명 2007. 4. 13. 13:23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모스크바
[세계일보 2005-01-27 16:27]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는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싸여 모든 게 빠르다. 행인들의 발걸음이 빠르며 지하철 플랫폼은 한국보다 두 배가 깊다.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도 두 배나 빠르다. 그 빠름의 물결을 타고 모스크바는 상품광고로 뒤덮여 있다. 대부분 수입품 광고이고 그 중의 많은 부분이 한국 제품들이다.

여행자들의 눈길을 가장 끄는 것은 역시 붉은 광장이다. 붉은 광장은 크렘린 궁 앞의 광장으로 크렘린 성벽과 굼 백화점, 역사박물관, 성 바실리 사원 등에 둘러싸인 폭 130m, 길이 695m의 포근하고 아름다운 광장이다. 붉은 광장에는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의미도 있다. ‘크라스나야’라는 러시아말은 붉다는 뜻도 있지만 어원으로 보면 아름답다는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붉은 광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단연코 양파처럼 올라간 돔과 아름다운 색깔이 조화를 이룬 성 바실리 사원이다. 1562년 이 사원을 만든 사람은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4세였다. 당시 덕이 높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 바실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이반 4세는 용감한 차르였지만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의 친위대 오프리치니나 사람들은 국가의 반역자들을 모두 물어뜯어 쓸어버리겠다는 의미로 검은 옷을 입고, 말의 안장에는 개의 머리와 빗자루를 달고 다녔다. 그 때문에 이반 4세는 ‘이반 공포제’라 불렸고 성 바실리 사원이 만들어진 후,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원을 짓지 못하도록 건축가들의 눈을 뽑아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 옆에는 크렘린 궁이 있다. 한때 음모와 음흉의 대명사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지금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관광지다. 원래 목조로 만들어졌으나 1363년 하얀 돌로 재건축됐다. 그 후 15세기에 이르러 수많은 교회와 성벽이 만들어졌고 17세기에 이르러 차르가 이곳에 머물게 된다. 1872년 나폴레옹 침입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후 개축한 모습이 현재의 크렘린이다.

◇(왼쪽부터)톨스토이 동상. 크렘린 궁 안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사원. 아래 사진은 붉은 광장과 성 바실리 러시아정교회 사원. 크렘린 궁 안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

크렘린 궁 안에는 한 번도 발사된 적이 없는 세계 최대인 차르의 대포가 있고, 한 번도 울려본 적이 없다는 무게 202t의 깨진 종이 있다. 또한 수많은 정교회 사원과 진기한 무기, 왕관 보석들이 전시된 무기고 박물관 등이 있는데 이곳에는 구한말 우리의 흔적도 서려있다. 1896년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대관식을 했을 때 대한제국의 민영환, 윤치호 등의 일행이 이곳에 왔다. 그러나 이들은 안에 들어가질 않았다. 갓을 벗어야 했지만, 그들은 갓을 벗기를 거부하고 밖에서 기다렸다는 것이다.

크렘린 궁의 맞은편에 있는 굼 백화점에는 1000개 이상의 점포가 들어서 있다. 한때 이곳은 질 나쁜 상품과 긴 줄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러시아 최고의 백화점으로 수입명품들을 팔고 있다.

러시아의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보고 싶으면 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32㎞ 떨어진 고르키 레닌스키에로 가면 된다. 이곳에서 레닌은 말년을 보내다 1924년 1월21일 뇌경색으로 죽었다. 혁명이 성공했을 때 그의 나이 47살이었고 죽었을 때가 54살이니, 그가 혁명의 열매를 맛본 기간은 약 7년 정도였다. 그나마 말년은 병에 시달렸는데 그가 살던 방과 정원 등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인생무상, 정치무상을 느끼게 된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톨스토이 박물관도 있다. 톨스토이는 모스크바를 싫어했지만 부인 때문에 할 수 없이 이곳에서 살았다. 2층 집에는 조그만 방이 매우 많다. 용도별로 나뉘어 있는데 세어보니 약 18개나 된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부활’ 등의 작품을 쓰기도 했지만 빈민 실태조사를 하며 종교·사회 활동에 더욱 심취했고, 결국 가출했다가 삶을 마감했다.

모스크바의 매력은 이런 역사나 문화의 흔적 못지않게 빠르게 변하는 현실에 있는 것 같다. 이제 서방을 향해 활짝 문을 열고,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달리고 있는 그들이 가끔 각박하고 쌀쌀맞게 보여도 그들의 삶을 엿보는 즐거움이 모스크바에는 있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시비걸며 때리는 스킨헤드족에 죽기살기로 싸워

출국하던 날 나는 스킨헤드족에게 얻어맞았다. 호텔에서 택시를 불렀다면 당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간 후, 그곳에서 공항행 미니 버스를 타려다 생긴 일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러 가던 중에 갑자기 누군가 내 뒤통수를 세게 갈겼다. 돌아보니 머리를 빡빡 깎고 가죽점퍼를 입은 친구가 무리와 함께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눈앞에 스치는 가족들 생각을 하며 꾹 참고 돌아서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그런데 지상에 거의 다 왔을 때쯤 그 녀석이 쫓아와 배낭을 밀며 계속 시비를 거는 게 아닌가. 마침내 역에서 나오자 2명이 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나는 배낭을 벗어던지고 싸우기 시작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빙판길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일까, 나는 그 녀석들을 흠씬 패줄 수 있었다. 어느 중년 사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 녀석들은 아마도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 만큼 나는 분노했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부들부들 떨렸다. ‘못난 녀석들…, 자신들의 불만을 외국인들에게 풀다니.’

여행길에 낭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낭만을 누리다 보면 종종 이런 위험이 다가오는데, 특히 모스크바에서는 밤거리나 외진 곳은 가급적이면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

■여행정보

▲톨스토이 박물관:지하철 1호선을 타고 파르크쿨투리역에서 내린다. 그곳에서 대로를 따라 북서쪽으로 400∼500m 걷다 보면 사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져 300m 정도 걸어가면 숲이 보이고 톨스토이 동상이 보이는데, 그 근처의 ‘톨스토고(tolstogo)’란 거리에 있다.

▲고르키 레닌스키:지하철 2호선 남쪽의 도모데도브스카야 역에서 내려 439번 버스를 타면 된다. 약 25분 후에 ‘레닌무제이(레닌박물관)’란 곳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면 된다.


by 100명 2007. 4. 13. 13:22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야생동물 천국'' 케냐
[세계일보 2005-02-04 13:33]

케냐와 에티오피아의 국경 부근에 투르카나 호수가 있다. 1960년대 인류고고학자 리키가 약 250만년 전의 인간의 해골 화석을 발견함으로써 인류의 탄생지라고 여겨지는 곳이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투르카나 호수로 가는 길은 동부 코스와 서부 코스가 있다. 동부 코스는 대중교통수단이 끊긴 황무지만 펼쳐 있어서 차를 대절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고, 서부 코스는 버스가 다니지만 2∼3일 걸리는 힘든 코스다.

우선 서북부의 도시 키탈레란 곳까지 가서 1박을 하고, 다음날 미니버스를 탔는데 북쪽으로 올라가는 몇 시간 동안 삼림이 우거지다가 갑자기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다. 풀 몇 포기 보일락말락한 물기 한점 없는 메마른 벌판이었고, 아스팔트 길은 있었으나 전신주가 끊겨 있었다. 가도 가도 반대편에서 오는 차도 없었고 이쪽에서 가는 차도 없는 텅빈 길이었다.

그러다 홀연히 카이눅이란 마을이 나타났다.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은 투르카나족이었다. 원래 우간다의 동북쪽 부근에 살다가 현재 이곳으로 옮아온 투르카나족은 유목민으로, 현재 투르카나 호수 근처와 근방의 사막 지방에 살고 있다. 이들은 케냐의 중부지역에서 살아가는 삼부루족, 마사이마라 국립공원과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에서 살아가는 마사이족과 함께 케냐에서 가장 현대화되지 않은 호전적인 부족이다.

이곳의 사내들은 모두 뾰족한 막대기를 들고 다녔는데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경계했다. 그때부터 살벌한 인심만큼이나 황량한 벌판이 펼쳐졌고 태양은 무섭게 이글거렸다. 불타는 대지 위를 야생 낙타와 타조가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으며, 가끔 높이가 1∼2m 정도 되는 흙기둥이 보였는데 흰개미 집이었다. 그리고 벌판 위에서 미친 듯이 돌고 있는 돌개바람도 보였다.

◇높이 1~2m 정도 되는 흰개미집.

중간에 로드와란 곳에서 다시 한번 차를 갈아타고 투르카나 호수 근처의 칼레콜이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마치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로는 뚝 끊기고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양쪽으로 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호텔은 있었다. 말이 호텔이지 맨 흙바닥에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감방 같은 곳이었다.

투르카나 호수는 마을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걸어 가는 길에 야자나무 수십그루가 보였고 그 밑에는 도토리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초가집이 10여채씩 모여 있었다.

이곳은 매우 더웠다. 땀도 증발시킬 정도였는데 한창 더울 때는 섭씨 50도까지도 올라간다는 곳이다.

◇투르카나 호수의 전경.

힘들게 투르카나 호수를 찾아가니 투르카나족들이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배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남북 250km, 동서 55km인 투르카나 호수는 평화로운 곳으로 현지인에게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이곳은 현재 사막기후지만 1500만년 전에는 푸른 숲이었다. 화산 폭발 후 거대하게 솟아오른 용암이 케냐 북부와 에티오피아를 덮쳐 현재의 지형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때 우거진 삼림이 소멸되어 현재 케냐의 대초원지대가 형성되었고 그 여파로 숲 속을 나와 걸어다닌 인류가 빠른 속도로 진화되었을 가능성을 인류고고학자들은 제기하고 있다.(물론, 인류의 탄생에 대한 학설에서 이것은 절대적이 아니고 창조론처럼 다른 설도 있다.)

◇지나가는 차에서 물을 얻는 투르카나족의 어린이들

현재 투르카나족은 대가족제도며 일부다처제다. 보통 한 남자가 서너 부인을 갖는데 부자는 열 명 정도를 거느린다고 한다. 그러니, 많은 집은 한 아버지의 자손이 50명 정도가 될 때도 있다. 열악한 환경 때문일까?

투르카나족은 오히려 종족 번식을 위해 자손들을 많이 낳고 있었는데, 이곳의 기후와 환경은 너무도 열악했다. 우연히 만난 학생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물을 긷기 위해, 양들을 몰고 목초지에 가기 위해 보통 하루에 20∼30km를 걷는다고 한다.

밤이 되자 칼레콜 마을은 푹푹 쪄서 도저히 잠을 못 이룰 정도였고 재래식 화장실에는 풍뎅이만한 바퀴벌레 수십마리가 변기 주위를 기어다니기도 했다. 물론, 몸을 씻을 물도 얻기에 힘들었으니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투르카나족의 끈질긴 생명력이 경이롭게 보일 정도였다.

여행작가

by 100명 2007. 4. 13. 13:21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
[세계일보 2005-02-24 16:24]

사하라 이남의 검은 아프리카에는 수많은 현실과 이미지가 있다. 기아, 내전, 질병 등의 부정적인 현실이 있고, 동물의 왕국과 흑인들의 열정적인 춤과 노래 등의 낭만적인 이미지도 있다. 아프리카에서 원초적인 신화의 세계를 엿보는 사람도 있고, 일본의 사진작가 후지와라처럼 “인도에서는 태양이 사물을 비추면 배후의 이미지, 존재의 의미가 솟아오르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빛이 비치면 사물에서 의미가 떨어져 나가고 단지 그 존재 자체만 남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돌이라고 하면 그냥 돌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아프리카에서 사파리란 극히 부분적이고 사치스러운 경험일 뿐이다. 원래 사파리는 사냥을 의미하는 여행인데, 백인들의 남획으로 야생동물들이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현재 케냐나 탄자니아에서는 국립공원이나 동물보호구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그 결과 사파리는 예전처럼 스릴을 맛볼 수 있는 모험이 아니라 잘 짜인 상품처럼 되었지만, 그래도 빌딩 숲에서 살아온 도시인들은 아프리카의 대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동물들을 바라보는 ‘작은 모험’을 쉽게 포기하지는 못한다.

◇대평원의 사자◇전통복장으로 분장한 마사이족들<사진왼쪽부터>

케냐나 탄자니아의 국립공원은 대개 한국의 강원도, 충청도만 하다. 아무리 아프리카의 대초원에 동물이 많다고 해도 이렇게 넓은 곳에 흩어져 있다 보니 ‘동물의 왕국’에서 보는 장관을 쉽게 볼 수는 없다. 결국, 시기와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한다.

대표적인 초원이 케냐의 마사이마라 국립공원과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으로, 국경선으로 갈라져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초원이다. 이곳에는 초식동물이 약 300만마리 살고 있는데, 풀을 찾아 정기적으로 대이동을 한다. 9월에서 10월쯤에는 풀이 많은 케냐의 마사이마라 동물보호구역을 향해 이동하고, 1, 2월에는 반대로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국립공원으로 옮아간다. 이것을 야생동물들의 ‘대이동’라고 하는데, 이때 가면 끝없이 이어지는 초식동물들의 이주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맘때라면 세렝게티 평원으로 가는 것이 좋다. 세렝게티는 마사이족 말로 ‘끝없는 평원’이다. 아루샤란 도시에서 네댓명이 팀을 이루어 지붕이 열린 지프를 타고 몇 시간 동안 ‘끝없는 평원’을 달리다 보면, 시간의 물결따라 의식은 출렁거리고, 문득 알 수 없는 존재의 시원으로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늪지대의 하마들◇대표적 초식동물 누떼<사진왼쪽부터>

이윽고 초원 한복판에 이르는 순간, 엄청난 수의 초식동물이 뛰노는 풍경이 펼쳐진다. 사슴을 닮은 수천 마리의 귀여운 톰슨가젤 그랜트가젤 임팔라들이 뿔을 부딪치며 장난치고,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무수한 얼룩말들과 기묘한 누떼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뿔은 소를 닮고 축 늘어진 수염은 염소를 닮았으며 꼬리는 말을 닮은 누는 세렝게티 평원과 마사이마라 평원에 약 100만마리가 살고 있다. 그리고 바위 밑 그늘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사자들도 기지개를 켜며 사냥을 준비한다. 사자는 야행성 동물이라 주로 청각을 이용하여 밤에 사냥한다.

초원의 왕은 사자지만 초원을 제패하는 동물은 없다. 아무리 연약한 톰슨가젤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시각, 청각, 후각이 매우 발달해서 사자나 치타가 접근하면 재빨리 도망친다. 그래서 치타는 몰래 접근해서 갑자기 덮치고, 사자는 여러 마리가 무리를 지어 사냥하며, 레오파드는 나무 위에 숨어 있다가 덮친다. 먹이를 잡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먹다 보면 초원의 청소부 하이에나 무리나 자칼이 와서 방해를 하는데, 레오파드는 먹이를 물고 나무로 도망치고 겁많은 치타는 한입 떼어 물고 도망친다.

초원에서는 모두 목숨을 내놓고 살며 자기 힘닿는 만큼, 먹을 만큼만 사냥하다 힘이 달리면 자연스럽게 소멸하지만, 인간만이 끝없는 욕심을 부리며 미래와 자손을 위해서 저장한다.

초원은 인간세계처럼 무한경쟁이 아닌 유한경쟁의 무대다. 초원에 서면 냉엄한 자연의 법칙을 보지만, 동시에 절제의 미덕을 배울 수가 있다. 몇박 며칠 동안 대초원을 달리며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문득 이런 작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도 사파리의 큰 기쁨이다. 여행작가

◇세렝게티 평원의 코끼리◇사파리하는 여행자들<사진왼쪽부터>

■ 여행에피소드

세렝게티 평원에서 4박5일의 사파리를 했는데, 저녁에는 텐트를 치고 캠프 파이어를 하며 정식으로 요리를 해서 먹지만, 점심은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다.

어느 날 닭다리가 든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어어’ 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느낌이 이상해서 위를 쳐다보니 엄청나게 큰 독수리가 내 도시락을 향해 날아들고 있는 게 아닌가.

으아, 겁이 난 나는 그만 닭다리 하나를 공중에 던졌고 독수리는 날쌔게 잡아챘다. 그때부터 시작한 독수리들의 공습은 계속 이어졌다.

보니 거대한 바오바브나무 위에 수십마리의 독수리들이 앉아 있었고 우리 일행을 향해 계속 편대를 이루어 한 마리씩 하강했다.

결국 몇 사람은 닭다리를 공중에 던지며 독수리들의 비행을 감상했고, 몇 사람은 지붕 밑에 숨어서 점심을 먹었다. 아프리카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 여행정보

대개 사파리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나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시작하는데 더운 곳이 아니다. 특히 나이로비는 1700m의 고원지대여서 1년 내내 연 평균기온이 17.5도로 서늘하다. 동부 아프리카의 경우 3월 말쯤부터 5월 무렵까지 대우기, 11월 전후의 소우기가 있는데, 우기 때 케냐는 매우 추워서 옷을 단단히 준비해 가야 한다.

사파리는 한국에서부터 패키지에 참가할 수 있지만 혼자 가서 현지 여행사의 팀에 참가하는 방법도 있다. 아프리카 물가에 비해 사파리 비용은 비싼 편이다. 캠핑하는 경우 5명이 가면 모든 걸 포함해서 1인당 400달러 정도가 들고, 초원에 있는 최고급 호텔에 묵으면 하루 숙박비 100달러 정도가 더 든다고 보면 된다. 아프리카에 갈 경우 황열병 예방주사와 말라리아약은 먹어 두는 것이 좋다. 아프리카에서도 도시나 마을에서 성매매가 은밀히 확산되고 있으니 에이즈 등을 조심해야 한다.

by 100명 2007. 4. 13. 13:19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탄자니아 잔지바르섬
[세계일보 2005-03-10 17:15]

아프리카를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온갖 종류의 음식뿐 아니라 야생동물 고기도 맛볼 수 있지만, 조금만 시골로 들어가면 현지인 식당의 음식은 열악하다. 동부 아프리카의 경우 옥수수와 소맥을 섞어 만든 백설기 맛의 우갈리 정도는 괜찮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 양고기는 먹기 힘들고 야채도 흔하지 않다.

교통은 어떠한가. 예외는 있지만 대개 정해진 출발 시각은 소용없다. 사람이 다 차야 출발하므로 버스 안에 우두커니 앉아 한두 시간 정도 기다리는 것은 기본. 가끔 염소나 닭 그리고 엄청난 짐을 갖고 탄 사람들로 인해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우리가 근대화되기 전에 그랬듯이 급하지 않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아쿠나마타타’다. ‘아쿠나마타타’는 스와힐리어로 ‘괜찮아’라는 뜻이다. 스와힐리어는 동부 아프리카 흑인들 말에 아랍어가 결합하여 생긴 언어로, 이들이 잘 쓰는 말 중에 또 하나는 ‘폴레폴레’(천천히 천천히)다.

물론 문명화된 대도시 사람들은 빨리빨리 행동했지만, 그들조차 일이 잘 안 될 때는 ‘어이쿠 죽겠네’보다는 ‘아쿠나마타타’를 외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프리카에서 이 말이 가장 어울리는 곳은 잔지바르 섬인 것 같다. 이 섬에는 풍요와 느긋함이 넘쳐 흐른다. 탄자니아의 동남부 해안에 있는 수도이자 해안도시인 다르에스살람에서 배로 3시간 정도 가면 잔지바르 섬이 나온다. 잔지바르는 1964년까지 잔지바르 공화국이라는 독립국가였으나 탕가니카 공화국과 병합하여 국호가 탄자니아연방공화국이 됐다.

◇잔지바르 섬의 야자나무 숲, 아랍시대의 유적들.(왼쪽부터)

◇팅가팅가 그림, 토속 기념품들(왼쪽부터)

이 섬은 아프리카 대륙보다는 아랍이나 인도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파란 바다, 하늘, 산호초와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섬으로, 옛날 아랍 지배자의 궁전과 노예 무역 시대의 유적이 섬 전체에 널려 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또 무더위 속에서 시간이 엿가락처럼 축 늘어져 세상이 정지한 것만 같은 고요가 섬 전체에 몽롱하게 깔려 있다.

이 섬의 중심은 19세기 초반 지배자인 아랍인들이 만든 ‘올드스톤타운’. 돌집들 사이로 골목길이 미로처럼 퍼져 있고, 사이사이 수많은 가옥, 모스크, 상점들이 들어서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곳에는 끔찍한 노예시장이 있었다. 백인들은 동부 아프리카 전역에서 생포한 아프리카인을 잔지바르 섬으로 데려와 팔았다. 노예시장은 가로 46m, 세로 27m의 공간에 있었는데 여기서 거래된 노예들은 아랍, 유럽, 미국 대륙 등으로 팔려나갔다.

15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약 400년간 아프리카에서 잡혀간 노예 수는 최소 1000만명이었다. 그들은 총 몇 자루, 단검이나 거울 몇 개, 럼주 몇 병, 손수건 몇 십장의 가치로 교환되었는데, 이런 아픈 상처의 현장에 지금은 대성당이 서 있다.

잔지바르 섬의 매력은 밤에 있다. 어둠이 깔리고 기온이 떨어지면 거리는 활기를 띤다. 아랍 성채 밖의 해안가에 있는 야시장에는 해산물과 과일 등을 파는 수많은 노점상들이 불을 밝히고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얽혀서 인산인해를 이룬다. 잔지바르 섬 거리에는 화가들도 눈에 띈다. 그들이 주로 그리는 그림은 강렬한 원색과 코믹한 동물들의 표정을 담은 ‘팅가팅가’라는 그림인데,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인기상품이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스파이스 투어(spice tour)다. 잔지바르의 정취와 맛을 즐기는 여행인데, 잔지바르 출신인 미투라는 노인이 창안한 1일 투어로 인기가 매우 좋다. 안내인은 관광객들을 데리고 잔지바르의 숲을 다니며 온갖 종류의 코코넛 나무, 말라리아 예방약에 쓰이는 클로로킨, 씨가 물기에 닿으면 팝콘처럼 퍽퍽 튀는 식물, 잭 프루트, 과일의 왕 두리안, 라임, 수많은 종류의 바나나, 상처를 치료해주는 진액이 있는 나무 등 숲 속의 온갖 보물들을 소개해 준다.

잔지바르 섬은 이처럼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열악한 환경에 지친 여행자들이 ‘폴레폴레’ 쉴 수 있고, 세상만사 ‘아쿠나마타타’할 수 있는 휴식의 섬이다.

여행작가

■ 여행정보

잔지바르 섬의 숙소들 중에 저렴하거나 중급 수준의 숙소는 올드스톤타운에 많이 있다. 싼 곳은 1박에 10달러(약 1만1000원) 정도이고 비수기에는 할인도 많이 해준다. 주의할 점은 침대가 부실하다는 것. 그냥 스펀지라 몸을 누이면 푹 꺼지면서 바닥의 나무가 등에 느껴질 정도다. 자고 나면 몸이 말이 아니다. 중급 숙소는 20∼50달러 정도면 된다. 잔지바르는 입국할 때 탄자니아의 비자가 있어도 입국심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비자가 다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입국카드에 원하는 체류기간을 쓰고 허가받은 체류기간을 초과하면 벌금을 내야 하니 주의해야 한다.

■ 여행 에피소드

말라리아 증세로 앓은 적이 있다. 골은 빠개질 듯 아프고 식은땀이 흘렀다. 덜덜 떨리다가 구토까지 했다. 갖고 다니던 여행의학 팸플릿을 보니 ‘말라리아는 두통 피로감 미열로 시작해 오한과 고열이 발생하고, 심한 고열이 두세 시간 지속한 뒤 전신에 땀이 심하게 난다. 이런 증상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데, 즉시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나와 있었다. 딱 나의 증상이었다. 1주일에 한 번씩 말라리아약을 먹었지만, 그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말라리아에 걸려서 며칠 앓다가 쉽게 죽어버리는 예를 많이 들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병원도 멀리 떨어진 오지였다.

‘아, 이렇게 길에서 죽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며 가족들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다행히 아침에 일어나니 좀 괜찮았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증상이 반복된다니 안심이 안 되었다. 병원에 가느라 먼길을 가느니 차라리 푹 쉬면서 잘 먹자고 생각했는데 차차 회복이 되었다. 충분한 영양과 복용한 말라리아약 덕을 보아서 그런지, 아니면 단순한 감기 증세였는지 아직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 날씨가 감기가 들 날씨는 전혀 아니었으니 아마도 말라리아였던 것 같다.

by 100명 2007. 4. 13. 13:18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우간다 키발레 국립공원
[세계일보 2005-03-24 15:48]

독재자 이디 아민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우간다의 이미지는 그리 밝지 않다. 1970년대 이디 아민 우간다의 대통령은 종종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해외토픽난을 장식했다. 대통령이 직접 글러브를 끼고 복싱 선수들을 지도한다든지, 우간다의 백인들이 이디 아민이 탄 가마를 들고 가는 사진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난다. 이디 아민이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이런 얘기들로 우간다는 미개한 나라쯤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미지다. 물론 이디 아민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그의 독재 때문에 경제가 망가져서 지금도 우간다 사람들은 이디 아민을 싫어하지만, 그가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서방 언론의 왜곡인 듯하다. 이슬람을 믿는 그가 사람고기를 먹을 이유가 있었을까.

우간다는 아름다운 나라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집트까지 아프리카를 종단한 사람이나 서부아프리카에서 동부아프리카까지 횡단한 사람들 모두 우간다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총리도 우간다를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감탄했을 정도로 우간다는 산이 많고 밀림이 우거진 평화로운 곳이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버스로 8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대적인 건물들이 꽤 있었고 매우 활기차 보였는데, 특히 밤거리는 삶의 열기가 물씬 느껴졌다. 가로등이 별로 없는 컴컴한 거리지만 수많은 사람이 호롱불이나 촛불을 밝힌 채 온갖 생활필수품을 사고팔았다. 구두 몇십 켤레를 길에다 늘어놓고 열심히 광을 내는 사내, 야채를 들고 목이 쉬어라 외치는 장사치들을 보노라면, 우리에게 알려진 느긋한 아프리카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인간과 가장 비슷하다는 침팬지는 다처다부제로 알려져 있다.<사진왼쪽>

◇캄팔라의 시장에서는 온갖 생활필수품을 판매한다. <사진오른쪽>

◇우간다의 차들은 짐을 많이 싣고 다닌다.<사진왼쪽>

◇포트포탈에서 민속공연을 하는 현지인들.<사진오른쪽>

우간다에 가면 포트포탈이란 곳도 놓칠 수 없다. 캄팔라에서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5시간 정도 가면 나오는데, 호수가 여러 개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가까운 키발레 국립공원 숲에서는 침팬지 사파리를 할 수 있다.

공원으로 가니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공원안내인을 따라 숲속의 침팬지를 찾아갔다. 넓은 숲 속을 헤쳐가며 한두 시간 걷자 어디선가 출현한 침팬지가 나무 위에 숨어서 인간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꼬록꼬록, 워어익, 워어익” 하며 신호를 보내다 열매를 던지기도 했고, 나무 밑의 인간들을 향해 소변을 봐 골탕을 먹이기도 했다.

확실히 침팬지는 원숭이와 달리 뭔가 깊은 생각을 할 줄 아는 것 같다. 침팬지는 인간의 유전적 특질을 98% 공유함으로써 인간과 매우 흡사하다는데, 한평생 침팬지를 연구한 제인 구달은 침팬지도 도구를 쓴다고 말한다. 나뭇가지를 이용해 개미굴을 쑤셔서 거기에 달라붙은 개미를 핥아 먹기도 하고 단단한 과일은 돌로 깨 먹기도 한다. 잡식성 동물인 침팬지는 원숭이를 공동으로 사냥하는 경우도 있는데 포획물은 공정하게 분배한다. 그러나 혼자 잡았을 때도 침팬지들이 모여들어 좀 달라는 시늉을 하면 준다고 한다. 설령 주인이 안 줘도 그냥 돌아서지 강제로 뺏지 않는다. 나름대로 질서가 있는 것이다. 또 침팬지는 고릴라, 오랑우탄 등의 유인원들과 함께 자기를 인식할 수 있다니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 할 수 있겠다.

나무 위의 침팬지들은 시간이 지나자 경계심을 풀고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수컷이 암컷에게 달려들어 교미하기 시작했지만, 20초도 안 되어서 떨어져 나갔다. 일반적으로 침팬지는 그렇게 교미를 금방 끝낸다고 한다. 침팬지들은 다처다부제로 부성 개념이 없으며, 수컷 여러 마리가 암컷과 교미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한다. 그런데 이렇게 난교를 하는 침팬지들도 자기 자식이나 형제자매와는 성적인 접촉을 거부한다니 이 또한 전혀 질서가 없는 게 아니다.

과연 우리 인간은 먼 과거에 어떻게 살았을까. 진화된 인간은 침팬지와 사촌 정도쯤 되는가, 아니면 따로 창조된 것인가. 숲 속에서 침팬지와 어우러져 서로 구경하노라면 인류의 근원과 조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포트포탈의 숙소에 들어가는데 웬 청년이 따라왔다. 침팬지 사파리를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결정할 수 없어서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돌아서며 “혹시 압둘하고는 하지 마세요. 그놈은 나쁜 놈입니다”라고 말했다. 압둘이 누구인가 했는데, 방에 들어와 짐을 풀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려서 내다보니 압둘이었다.

압둘은 가이드라고 새겨진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자기와 사파리를 하자고 했다.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알았느냐고 물으니, 일본에 있는 자기 친구가 내가 이곳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미리 팩스로 보내 알게 되었다나.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일본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 그 역시 멋쩍은 웃음을 지었는데 사정을 알 만했다.

마을이 좁아 외국인 하나만 나타나면 비상이 걸려 줄지어 방문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치열하게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경쟁 속에서 서로 비방하는 투서를 마을 위원회인가 하는 곳에 올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압둘은 집안이 망해서 사정이 어려웠고 미국에 가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우간다의 중소 도시에서 만난 이 청년을 보며 1960년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과연 앞으로 20∼30년 후의 우간다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여행정보

케냐 비자가 있으면 우간다는 그냥 들어갈 수 있다. 캄팔라에 10달러짜리 저렴한 숙소부터 100달러가 넘는 호텔까지 다양하다. 캄팔라는 치안이 안전하다.

포트포탈의 침팬지 사파리는 현지 여행사를 이용하는 경우 4명을 팀으로 1인당 15달러 정도. 혼자 하면 전부 부담해야 한다. 여행사를 이용하지 않고 혼자 할 수도 있는데, 공원 입장료만 15달러 정도다. 홀로 가는 경우 대중교통수단이 별로 없어 히치 하이킹을 해야 하는데,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불편하다.


by 100명 2007. 4. 13. 13:17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적도의 나라'' 르완다
[세계일보 2005-04-07 21:21]

20세기 최대의 학살이 벌어졌던 르완다는 내전 중에 전체 인구 700만명 중 100만명이 죽었다. 이 참혹한 내전의 원인은 종족 간의 갈등이지만, 그 갈등을 심화시키는 데 벨기에의 식민 지배가 큰 영향을 미쳤다.

르완다의 대표적인 부족은 1000년경부터 르완다에 정착해 농경을 시작한 후투족과 15세기 북방에서 소를 몰고 내려온 투치족이다. 유목민인 투치족은 르완다 전체 인구의 9% 정도밖에 안 되는 소수지만, 수백년 동안 약 90%인 후투족을 지배해왔다. 그러다 1899년부터 1916년까지 독일의 지배를 잠시 받았고, 그 후 약 40년 가까이 벨기에의 통치를 받았다.

벨기에는 원래 지배자였던 투치족을 이용해 르완다를 간접 통치하는 과정에서 투치족에게 더 많은 정치·경제·교육적 특혜를 부여하며 ‘분열과 지배(devide and rule)’ 정책을 편다. 그러자 다수이며 피지배자인 후투족은 자신들의 불평등한 처지를 깨달아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벨기에가 물러나던 1962년에 르완다 공화국을 탄생시키며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이 취임한다.

◇한가하게 여가를 즐기는 노인들.◇르완다 여인들.<왼쪽부터>

이에 기득권층인 투치족은 반발했고 후투족은 그들을 탄압한다. 이런 과정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은 서로 싸우며 부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1994년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암살당한다. 결국 후투족 강경파는 부족 간의 갈등을 대학살로 마무리짓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우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온건파를 제거한 뒤, 본격적인 투치족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르완다 전역에는 매일같이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의 시체들이 길거리에 쌓였는데, 더욱 충격적인 일은 군인뿐만이 아니라 선동에 흥분한 후투족 시민과 여자,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나서서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특히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 시내는 시체들로 메워지면서 피와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불과 100일 동안에 르완다 전국에서 100만명이 학살당했으니 매일 1만명씩 죽었다는 얘기다.

이에 경악한 투치족 게릴라들은 다시 르완다를 침공해 후투족을 몰아내 정권을 잡고, 후투족 강경파들은 인접국가로 이동해 게릴라 활동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엔평화유지군이 개입하고 우리 한국군도 파견했지만 평화를 회복한 뒤 모두 철수한 상태다.

◇밭으로 개간된 산들. 국토가 좁고 인구가 많은 르완다는 숲이 울창했던 산을 밭으로 일군 곳이 많다.

◇천진난만한 르완다 아이들. 벨기에의 지배를 받았던 까닭에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관광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런 참혹한 과거를 안은 키갈리는 현재 평화로우나 빈곤하다. 키갈리는 산 위에 건설된 도시로 비록 시가지에는 현대식 건물들도 들어섰지만, 언덕에는 아직도 곳곳에 허름한 판잣집, 돌집 등이 널려 처참한 난민촌 풍경이 펼쳐진다.

이들은 벨기에의 지배를 받은 탓에 프랑스어를 쓰고 있는데, 초등학교 아이들은 외국인을 보면 ‘봉주르’를 외치고 이어 ‘돈 좀 달라, 볼펜 좀 달라’는 영어가 튀어나온다. 가난하나 천진난만한 그들을 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아파온다.

르완다의 약 2만6000㎢의 땅에 800만여명이 거주해 아프리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국토는 좁고 인구는 많아 식량이 부족하다보니 산을 태워 밭을 일구느라 화전을 많이 만들었다. 화전은 몇 해 동안은 수확 할 수 있으나, 지력이 떨어지면 또다시 산의 나무를 없애고 화전을 만들 수밖에 없어 국토는 점점 황폐해졌다. 18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독일 탐험대가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부를 정도로 우거진 산림을 자랑했던 르완다는 이제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사실만 놓고 보면 르완다에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비참한 전쟁을 겪었던 한국이 다시 일어섰고, 100년 전 갈가리 찢겨졌던 중국이 세계의 중심을 향해 달리고 있으며, 병든 코끼리처럼 비틀거리던 인도가 몇십년 후면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100∼200년 후의 아프리카와 르완다는 지금보다는 훨씬 살기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여행작가

■ 여행 에피소드

르완다 키갈리를 돌아보고 우간다로 가기 위해 새벽에 버스터미널로 왔을 때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르르 한 떼의 사내들이 몰려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를 외치자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7, 8명의 사내들이 달려들어 내 팔, 목덜미, 배낭 등을 거머쥐고 자기네 차로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쪽저쪽에서 잡아끄는 통에 내 몸은 갈기갈기 찢길 것 같았는데, 결국 힘센 친구한테 개처럼 질질 끌려가다 안경이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치솟아 고래고래 소리치자 내 기세에 눌려 손을 떼었는데, 이번에는 웬 영수증철을 들고 온 사내가 차장이라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를 따라가자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저놈은 차장이 아니다’고 외치며 고릴라처럼 펄펄 뛰는데 극도로 흥분해서 검붉은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따라갔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미니버스를 탔는데 다른 승객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들어오는 대로 잡혀서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서 버스를 탔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 모습들이 가난한 나라, 직업도 별로 없는 나라에서 먹고살려는 인간의 처절하고도 장엄한 몸짓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 여행정보

르완다를 가려면 우간다의 국경 도시 카발레까지 가야 한다. 카발레에서 미니버스를 타면 2시간 안에 갈 수 있다. 비자는 국경에서 약간의 돈을 내고 얻을 수 있다.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 사람들은 거의 모두 불어를 쓰므로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약간이나마 불어를 배워 가는 것이 좋다. 현재 치안 상태는 괜찮지만, 산악지대에는 아직도 반정부 게릴라들이 있어 간간이 전투가 벌어진다고 하니 조심할 일이다. 밤에는 가로등이 없어 컴컴하고 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니 외출을 삼가는 것이 좋다.

by 100명 2007. 4. 13. 13:16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실크로드 출발지 중국 시안
[세계일보 2005-04-21 18:42]
중국의 시안(西安)은 웅숭깊은 고도(古都)다. 약 3000년 전부터 한족이 살면서 명나라 전까지 장안으로 불렸고, 주 진 전한 수 당 등 11개 왕조를 거치며 1100년간 한족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또 로마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수많은 유적지와 유물을 간직한 도시다.

우선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2200년 전의 거대한 진시왕릉이다. “에이, 능도 없는데 입장료만 비싸게 받고….” 어떤 한국인 관광객은 진시왕릉에 오른 후 그렇게 불평했는데, 높이 79m에 동서 폭이 475m, 남북으로 약 384m인 그 산 같은 능에 올라가 다시 능을 찾았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하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왕은 죄인 70만여명을 동원해 자신의 묘와 지하궁전을 만들었다. 지하수가 세 번이나 나올 정도로 깊이 판 후 동판을 깔고 자기의 관을 안치했다. 묘에는 궁전, 망루를 만들고 문무백관의 자리를 만들었고, 묘에 접근하는 자는 자동발사되는 활을 장치해 죽게 했다.”

이 얘기는 한동안 전설로 여겨지다 1974년 5월, 한 농민이 우물을 파다 지하 4m에서 우연히 무엇인가를 발견하면서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렇게 해서 2200년 만에 지하궁전 일부분이 발견되었는데, 진시왕릉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병마용갱의 전시실이 있다. 약 4.5m 깊이의 지하에서 발굴된 거대한 보병·전차대·포대의 지하군단이 전시되어 있는데, 흙으로 만든 인물상(토용·土俑)들은 크기나 모양이 실물과 같다. 복장과 표정이 모두 다른 6000여명의 병사들은 방금 잠에서 깨어나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표정이 생생하다.

시안에는 양귀비가 노닐던 화청지도 있다. 아름다운 연못과 정자와 도교 사원들을 거닐며 관광객들은 양귀비를 그리워하지만, 사실 그녀는 추악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를 빼앗아 자신의 비로 삼았던 것이다.

그 후 양귀비는 온갖 영화를 누렸으나 안사의 난을 맞아 도망치던 중 대들보에 목매달아 죽는다. 이렇게 불운하게 죽어간 양귀비지만 이제 그녀는 식당에서, 관광 기념품에서, 연못가에서, 그림으로, 조각으로 부활하고 있다.

◇대안탑 7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시안의 주작대로. 대안탑은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다.

시안 시내의 남쪽에 자리 잡은 자은사와 대안탑도 옛 모습 그대로다. 구법의 길을 떠났던 당승 현장은 험한 서역을 거쳐 인도로 가서 18년 만에 불경 657부를 갖고 장안으로 돌아온다. 그 후 그가 평생을 머물며 불경을 번역했던 곳이 자은사고, 번역한 불경을 보관했던 곳이 대안탑이었다.

대안탑의 7층 전망대에 오르면 남북으로 뻗친 넓은 주작대로가 보인다. 당나라 때는 대로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한족들이 살았고, 서쪽에는 페르시아 티베트 인도 이란 등지의 서역에서 온 사람들이 살았다.

특히 호희들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호희(胡姬)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오랑캐 여자다. 원래 호인(胡人)은 처음에 흉노족을 가리켰으나, 훗날 돌궐족(투르크족)·위구르족·이란계 사람들을 일컬었고 특히 당나라 때는 이란인들을 지칭했다.

온 장안의 한량들은 호인들의 옷과 노래와 음식 등 호풍(胡風)을 즐겼고, 이태백도 가는 봄날을 아쉬워하며 빛나는 야광 술잔에 호희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마셨다. 이태백이 즐기던 호선무(胡旋舞·호희들의 춤)를 지금은 볼 수 없다. 대신 거리의 옷가게 앞에서 한국 가수 이정현의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라는 노래를 부르며 호객하는 청년을 볼 수는 있다. 이제 그 옛날의 호풍이 한류로 변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이 도시로 끌려왔던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을 생각했다. 지금 이곳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지나치는 행인들의 표정 속에서 그들의 자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볼 뿐. 그 모든 것을 뒤섞으며 어디론가 흘러가는 세상을 노인처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곳이 바로 시안이란 고도다.

여행 작가

■여행 에피소드

하루 1500원 왕복 시내버스 표사면 편리

1991년도에 베이징에서부터 중국 서역을 횡단해 실크로드 여행을 했었는데, 공원의 공중 화장실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화장실에 문이 없었던 것이다. 아주 좋은 호텔은 모르겠지만 허름한 호텔의 공중 화장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일을 처리한 적이 많았다. 서역의 변방은 더 열악해서 2박3일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다 묵는 초대소 같은 곳이나 버스터미널의 공중 화장실은 도저히 발을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더러워서 사람들은 근처의 옥수수밭에서 부스럭거리며 일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 후 10년 후에 가보니 상황은 많이 변해 있었다. 현대식 건물이 치솟고 화장실 문화도 깨끗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 후 몇 차례 중국에 더 가는 동안 매년 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음식문화가 세계 최고지만 배설문화는 신경을 안 쓰던 중국이 이제 근대화되기 시작하면서 화장실 문화도 탈바꿈한 것이다.

■여행정보

▷숙소:시안은 관광지답게 싼 숙소에서 고급 호텔까지 다양하다. 가장 편리한 곳은 역 바로 앞에 있는 해방반점. 더블베드에 한국돈으로 약 7만원 정도.(비수기에는 흥정하면 반값도 가능)

▷교통:시안 근교의 유적지인 화청지, 진시왕릉, 병마용갱을 가장 손쉽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역 앞 터미널에서 20분마다 세 곳을 왕복하는 306번 시내버스를 타는 것이다. 한국 돈으로 약 1500원짜리 표를 끊으면 세 군데를 다 돌아볼 수 있는데, 하루 관광으로는 최고다. 이 밖에 역 앞에서 지도를 사면 시내버스 노선이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시내 관광에 좋다.

by 100명 2007. 4. 13. 13:15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사막속의 박물관 중국 둔황
[세계일보 2005-05-05 16:51]
시안(西安)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란저우(蘭州)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서부터 작은 동산만한 바위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황량한 벌판이 펼쳐진다. 바퀴 소리조차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적막함 속에서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서 손오공과 저팔계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올 것만 같은 풍경이다.

이 길을 허시(河西)회랑이라 부르는데, 황허 서쪽에서 둔황에 이르기까지 북쪽의 고비 사막과 남쪽의 치롄(祁連)산맥 사이의 동서 800에 이르는 긴 띠 모양의 지대를 말한다. 즉 황허 서쪽의 긴 복도라는 뜻으로 동서를 잇는 동맥이었다.

당승 현장은 이 길을 가며 이렇게 외쳤다. “길이 없다. 다만 사막을 헤매다 죽은 사람의 뼈를 보고 표적을 삼는다.”

그 험한 길을 지금은 쉽게 갈 수 있다. 시안에서 저녁 기차를 타면 두 밤을 보낸 후 새벽 네시쯤 둔황역에 도착한다. 현재 둔황은 둔황역에서 약 130km 떨어져 있다. 날이 밝은 후 합승 택시를 타고 황사 바람을 헤치고 사막 가운데 난 외줄기 길을 따라 2시간을 달리니 둔황이 나왔다.

둔황이 유명한 것은 막고굴(莫高窟) 때문이다. 둔황 시내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사막 길을 30분 정도 달리면 벌집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산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막고굴이다.

중국의 3대 석굴 중 하나인 막고굴은 서기 366년부터 만들어졌다.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모두 1000여개가 조성됐지만 현재 발굴된 것은 492개다. 1300년간 사막에서 잠자던 막고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영국의 지리학자 오렐 스타인과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막고굴에서 발견된 문서가 중요한 것을 알고 중국 관리 왕원록을 꾀어서 많은 문서를 몰래 빼돌렸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은 17굴로 장경동이라고도 하는데, 16굴로 들어가는 통로의 오른쪽에 따로 있는 조그만 굴이다.

원래 흙벽으로 가려진 이곳에 수많은 불서가 보관된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 중에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은 10세기 말 카슈가르(카스·喀什)에서 일어난 이슬람의 카라한 왕조가 서역 남도에 있는 호탄(허톈)을 점령한 후 불서를 깡그리 파괴했다. 그 후 둔황을 지배하고 있던 서하를 공격하려 하자, 서하는 불서를 장경동에 넣고 봉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오천축국전’이 이곳에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지만 자세한 내력은 알 길이 없다.

혜초 스님은 신라에서 태어나 719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로 간다. 그곳에서 스승의 권유로 인도 순례 길을 떠났는데,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배를 타고 인도의 콜카타로 들어가 성지를 순례했다. 그리고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의 신장 지방으로 온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고, 그가 4년간의 인도 순례에 관해 쓴 책이 ‘왕오천축국전’으로 그 당시 인도, 중앙아시아 등의 풍습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혜초 스님은 신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 오대산 보리사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수많은 막고굴 안에는 불교에 관련된 수많은 벽화와 아름다운 불상조각들이 있는데, 237굴과 335굴의 벽화에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쓴 신라인이 그려져 우린 민족의 흔적으로 알려져 있다.

아쉬운 점은 건조한 기후와 관광객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에 의해 벽화와 조각들이 점점 손상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10여개 정도만 개방하고 있는데, 중요한 굴은 바로 밖의 박물관에 그대로 본떠 만들어져 있다.

둔황의 즐거움은 막고굴 못지않게 명사산(鳴沙山)에도 있다. 시내에서 4km 정도 떨어진 명사산에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하고 환상적인 모래 바다가 펼쳐진다. 칼날 능선을 따라 사막길을 걸어가다 사막 속으로 들어가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도 있고, 낙타를 타고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으며, 모래 썰매를 타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다. 짧은 시간 사막을 느끼고 즐기려는 이들에게는 둔황의 명사산이 가장 가기 쉬운 사막이 아닐까 한다.

여행작가

◇둔황 시내의 거리

◇둔황 시내에서 시시케밥(양고기 꼬치구이)을 만드는 소년.

◇한번도 마른 적이 없다는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 월아천(月牙泉).

◇둔황 시내에서 4㎞ 정도 떨어진 명사산의 모래 바다.

◇비천녀(飛天女)상 기념품 조각

■여행 에피소드

1991년에 처음 둔황에 갔을 때는 한국인을 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10여년 만에 다시 가보니 한국인 여행자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둔황 버스터미널 앞에는 카페가 많다. 그 중의 한 곳에 들르니 여행자들을 위한 노트가 있었다. 여행자들이 얻은 정보, 도움말 등을 빼곡히 적혀져 있었는데 한글도 꽤 자주 보여 반가웠다.

그 중에 눈에 띈 글은 예순 살이 넘은 노인이 실크로드와 티베트를 배낭을 메고 두 달째 여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패키지 여행도 많이 해보았지만 역시 몸으로 부딪치며 헤쳐나가는 배낭여행이 최고라며 모두의 건투를 빈다는 내용이었다. 그 체력과 의지 그리고 열정이 감동스러웠다. 노인이 이런 험한 길을 가는 이유는 바로 ‘살아있음의 환희’를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험한 길을 가며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노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여행정보

둔황 시내에 있는 고급 호텔인 둔황빈관의 트윈베드가 8만∼9만원, 저렴한 숙소인 페이톈빈관의 트윈베드가 2만∼3만원 정도다. 여럿이 같이 묵는 다인방은 5000원 정도여서 배낭 여행자들이 많이 묵는데, 요즘 들어 도난 사건이 많이 생겨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둔황역 바로 옆에도 숙소가 있으므로 늦은 밤 혹은 새벽에 도착하면 임시로 묵을 수 있다.

시안에서 둔황까지는 기차로 약 32시간 걸린다. 둔황역에서 내려 둔황 시내까지 택시를 합승하면 1인당 약 5000원 정도 들며, 미니버스 요금은 약 2000원 정도다.

명사산은 시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성수기에는 미니버스가 많아서 편리하다. 왕복 2500원 정도면 된다. 막고굴까지는 일반버스도 있고 미니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으므로 현지에서 선택하면 된다.

by 100명 2007. 4. 13. 13:14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서역의 입구 중국 투르판
[세계일보 2005-05-19 18:27]

둔황에서 밤 기차를 타고 서역으로 가다 보면 북쪽으로 톈산(天山)산맥이 어둠 속에서 뻗어 나간다. 일본 열도를 다 품에 안을 수 있는 거대한 그곳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다른 해와 다른 달, 다른 바다와 다른 인종, 그리고 다른 동식물….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아침이 오고 기차는 투르판역에 도착한다.

투르판역에서 투르판 시내까지는 차로 약 한 시간 거리다. 내리자마자 달려드는 위구르족 호객꾼들의 차량이나 미니버스를 이용해 얼마쯤 달리다 보면 길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동서 120km, 남북 60km로 해발 마이너스 154m의 깊은 바닷속 같은 투르판은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사해 다음으로 낮은 분지다.

투르판의 역사는 길다. 중국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2000년 전에도 이곳에는 흉노족, 이란계, 위구르족들이 이룩한 오아시스 국가들이 있었다. 현재는 한족과 위구르족 등 24만명이 섞여 살고 있으며, 위구르족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서역의 입구이다.

◇고창고성을 지나는 마차. 고창고성에 살던 한족은 당 태종이 보낸 소정방에 의해 서기 651년 멸망한다.

개방화 물결을 탄 투르판은 현대식 건물과 공원들이 생기고, 거리는 번잡스러워졌다. 그러나 포도 덩굴 우거진 낭만적인 길들은 예전과 같다. 투르판 근처의 유적지들은 모두 폐허의 미를 자랑하고 있다.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 인적 없는 화염산 중턱에는 베제크리크(바이쯔커리커) 석굴이 고즈넉이 들어서 있는데, 석굴 안의 수많은 불상과 벽화들은 서양 탐험대에 의해서 반출되고 이슬람교도들의 소행으로 눈이 뽑히고 팔과 목이 잘려 나갔지만, 한적한 이곳에 서면 폐허의 미를 감상할 수 있다.

고창국의 도성이었던 고창고성 역시 폐허로 남아 있다. 후한이 멸망한 후 투르판 분지는 흉노족, 티베트족, 돌궐족(투르크족), 한족의 세력 각축장이었다. 고창고성에 살던 이들은 한족이었는데, 이들은 당나라보다 오히려 돌궐족과 가까웠다. 결국 당 태종은 소정방을 보내 서기 651년 고창국을 멸망시킨다. 백제를 멸망시켰던 그들은 이 머나먼 서역 땅에도 등장했던 것이다.

◇바싹 마른 화염산의 전경. 약 100㎞나 뻗은 이 산을 현지인들은 ‘쿠즈로다고(붉은 산)’라고 부르며,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당하는 무대다.

화염산 역시 메마른 산이다. 약 100km에 이르는 길고 긴 이 산을 현지인들은 ‘쿠즈로다고’라 부르는데, 빨간 산이란 뜻으로 불길이 치솟는 형상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 산은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당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현재 투르판의 주요 민족인 위구르족 무희들. 밤이 되면 인근 호텔의 야외 무대에서 화려한 복장의 무희들이 춤을 춘다.

투르판 근교의 유적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교하고성(交河故城)이다. 글자 그대로 하천이 마주치는 곳에 세워진 성인데, 동·서·남쪽은 약 30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그 밑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

남북의 길이 1600m, 동서 폭이 330m인 이 성은 약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폐허다. 한때 번성했지만 폐허가 된 이곳은 고창고성처럼 벽돌을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위에서 파내려가 만들었다. 그만큼 견고한 성 안에는 지금도 그 시절의 주택가, 시장, 절, 관청, 감옥 등의 터가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라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투르판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힘도 있다. 화염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파낸 카레즈는 예로부터 투르판의 전통적인 우물이었다. 투르판에 널려진 수백개의 카레즈에 모여 주민들은 노래를 불렀고 춤을 추었으며 연애를 했다. 지금 그들은 우물가에서 노래를 부르지는 않지만 무희들이 관광객들을 위해 공연하고 있다.

◇화염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파낸 카레즈. 수천개에 이르는 이 투르판의 전통 우물은 당시 주민들이 춤과 노래를 즐기며 연애하던 장소였다.

연강우량 16.6mm, 여름에는 기온이 보통 섭씨 50도, 지표면 온도는 80도를 넘는 살인적인 열기를 뿜어대는 이곳에서는 서늘한 밤이 되면 호텔의 야외 무대에서 화려한 복장의 위구르족 무희들이 나와 춤을 추고 사내들은 코믹한 오리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그리고 공연이 끝날 때쯤에는 무희들이 관객들을 무대로 끌어올려 난장을 벌인다.

투르판의 매력은 폐허의 미와 함께 이런 난장 가운데 벌어지는 삶의 방기 아닐까? 머나먼 서역의 밤을 잠시 불사르는 순간, 그 일탈과 방기 속에서 문득 다가오는 자유가 여행자들을 즐겁게 한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나는 투르판에 두 번 갔었다. 한번은 11월 말, 또 한번은 4월 말이었다. 11월 말은 항상 쌀쌀했고, 4월 말에 찾았을 때 아침에는 선선했지만 낮에는 뜨거운 햇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후만 되면 공기에 수면제를 탄 것처럼 잠이 몰려오는데, 시장의 상인들도 모두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고, 온 도시가 깊은 잠의 늪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낮잠을 자고나니 오후 8시, 베이징 같으면 캄캄한 밤이겠지만 서역 한가운데인 이곳은 아직도 날이 훤했다.

결국 해는 밤 10시나 되어서야 서서히 졌고 자정이 되어서야 밤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중국은 거대한 땅이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서역으로 가다 보면 이렇게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시차를 느끼게 된다.

■여행 정보

▷숙소: 버스터미널 근처에 새로 생긴 투르판 대반점의 쾌적한 트윈베드 룸이 한국 돈으로 약 2만5000원, 오아시스 호텔의 위구르족 전통 스타일 트윈은 약 4만8000원(비수기에는 약 3만원까지 할인), 여럿이 같이 묵는 다인방은 1인당 약 4000원.

▷교통: 둔황역에서 기차로 8시간 정도 소요. 투르판의 유적지는 모두 수십km 떨어져 있어서 차를 대절해야 한다. 기사 딸린 승용차를 하루 종일 이용하는 데 약 4만5000원. 여행자들이 많은 성수기에는 미니 버스들도 많이 다니는데 1인당 약 9000원이면 된다.

▷공연: 위구르족 무용 공연은 투르판대반점 투르판빈관 오아시스호텔 등에서 하는데, 포도 축제가 열리는 여름에는 매일 열리지만 비수기에 단체 관광객이 오는 날 열린다. 그 중에서 오아시스호텔 야외 무대의 공연이 가장 흥겹다. 입장료는 약 5000원.

▷주의사항: 여름에 가면 자칫 화상과 탈수증에 시달릴 수 있다. 물과 밀짚모자, 선글라스, 선탠 크림은 필수고 낮에는 잠을 자두는 것이 좋다.

by 100명 2007. 4. 13. 13:13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36〉중국 우르무치
[세계일보 2005-06-02 16:36]

내 핏속에 기마민족의 혼이 깃들여 있고, 내 뼛속에 바람처럼 초원을 달리던 기억이 서려 있어서일까. 톈산북로, 즉 초원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몹시 뛰었다. 투루판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버스는 톈산을 넘어갔다. 멀리서 바라본 눈 덮인 톈산산맥은 신비로우나, 막상 다가가니 거대한 암벽과 메마른 계곡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돌산이었다. 한 시간 정도 험한 톈산을 오르자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왔고 뒤이어 푸른 초원과 양 떼, 싱그러운 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톈산북로 초원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 동서 문물 교류의 길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유목민이었던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이 그들로, 기개가 대단했었다.

◇가까이서 본 톈산산맥. 황토빛 암벽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하늘에는 오직 하나의 신이 있고 땅에는 오직 하나의 군주 칸이 있다. “말이 달릴 수 있는 땅에 사는 자, 귀가 있는 자 모두 들을지어다. 우리에게 도전하는 자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붙잡으려 해도 손이 없으며, 걸으려 해도 발이 없게 될 것이니라. 신은 짐에게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든 영토를 부여했노라.”

13세기 몽골의 구유크 칸(3대 정종)은 로마교황에게 그런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족이 지배하는 길로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드는 현장이다. 초원에는 풍력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대형 바람개비들이 가득 차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위구르 말의 랩음악이 울려퍼졌으며 시도 때도 없이 휴대전화 소리가 울려댔다.

◇천지 부근에 사는 카자흐족의 게르. 황토로 다져진 바닥 위로 양탄자가 깔려 있어 푹신하다.

변화의 물결은 초원뿐 아니라 대도시 우루무치도 뒤덮고 있었다. 몽골말로 ‘초원의 목장’이란 의미의 그 도시는 모든 곳이 공사 중이었다. 낡은 아파트와 민가는 사정없이 헐렸으며, 새로운 고층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서 서역의 정취를 느끼고 싶으면 천지(天池)로 가야 한다. 백두산에만 천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역 땅 톈산산맥의 깊은 골짜기에도 해발 1910m의 천지가 숨어 있다.

버스를 타고 좁고 가파른 산길을 기우뚱거리며 두어 시간 가니 천지가 나왔다. 여름에는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진남빛 물이 넘실거린다지만, 5월 초에는 여전히 얼어 있었고 멀리 주봉인 보거다(博格達·5445m) 정상의 흰 눈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5월 초에도 얼어 있는 천지 풍경. 얼음이 녹으면 진한 남빛을 자랑한다.

면적 3㎢에 수심이 100여m이 거대한 호수. 톈산산맥 깊은 곳에 이런 호수가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그만큼 예전부터 천지는 주변 부족들에게 신성시되었다.

기원전 1000년쯤 주나라 목왕이 천지에 올랐다가 호수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수영을 즐기는 한 여인을 보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 여인은 바로 서쪽 나라를 다스린다는 전설의 서왕모였다. 서왕모는 원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흉측한 모습에 재앙과 죽음을 관장하며 영생과 불사의 능력을 지닌 생명의 여신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죽음보다는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이런 전설을 되새기며 천지를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얼굴에는 깊은 감회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백두산의 천지와 이름이 같은 호수에 선 우리보다 더 감회가 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6000㎞쯤 떨어진 이곳의 천지는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언어학자 강길운 박사는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배달이란 말은 박달에서 왔으며 이것을 이두문으로 백산(白山)이라 표기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한다. 다만 박달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언어학적으로 보면 ‘박(바쿠)’이란 만주어로 호수를 뜻하고 ‘달(타아르)’은 터키어로 산을 뜻한다. 그러니 박달이란 곧 ‘호수가 있는 산’을 의미했고 이는 천지가 있는 백두산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되었다. 그러므로 배달민족은 호수가 있는 산을 신성시하고 그 주변에서 사는 민족을 일컫는다고 추정된다.”

우리 민족은 백두산뿐 아니라 먼 옛날 이 톈산산맥과 천지를 무대로 말을 달렸음이 틀림없을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톈산산맥의 천지와 초원을 보는 순간, 피가 불끈 솟구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유목민 집 ''게르''에서 하룻밤

방랑자 카자흐족 된듯 야릇

15년 전 천지에 처음 왔을 때 카자흐족의 집인 게르(유목민들의 거주지)에서 잔 적이 있다. ‘카자흐’는 원래 방랑자, 모험자를 뜻하는 터키어고, 부족의 구속이 싫어 떨어져 나간 이탈자들을 그렇게 부르다 보니 하나의 부족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카자흐스탄에 500만명이 거주하고 신장성 전역에 약 60만명이 흩어져 사는데, 톈산산맥에 일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그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잠도 재워주고 있었다.

11월 초인 그때, 저녁이 되자 호수 주변에는 추위가 몰려왔지만 안은 따뜻하고 푹신푹신했다. 중앙 쇠 난로에는 불이 뜨겁게 타고 있었고, 바닥에서 약 20㎝ 황토로 돋운 원형 방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날 밤 잠이 잘 오지 않아 슬그머니 나와 천지에 서니 휘영청 달이 호수를 밝히고 있었다. 그 달빛에 취해 홀로 천지 주변을 거닐던 순간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짜릿한 희열이 솟구쳤다. 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대책 없이 떠돌던 그 시절, 나 또한 방랑자인 카자흐족이 된 것만 같아서였다.

■여행정보

새로 생긴 보거다빈관은 가격에 비해 매우 좋은 편이다. 트윈이 우리 돈으로 약 7만원가량(비수기 때는 반값 정도), 여럿이 자는 다인실은 1인당 약 4000원이다.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걸린다. 천지 가는 대형 버스는 인민공원 정문 앞으로 가면 오전 중에 떠난다. 비수기 때는 그곳에 가면 조그만 여행사에서 나온 호객꾼들이 접근한다. 그들에 이끌려 미니버스를 타면 천지까지 왕복 4시간이나 걸리고 천지에서 2시간 정도 보내게 되니, 천지 구경에만 하루 정도를 투자해야 한다.

by 100명 2007. 4. 13. 13:00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실크로드 요충 중국 카슈가르
[세계일보 2005-06-16 18:15]

몽골어로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 예전에는 말이나 낙타를 타고 목숨 걸고 갔던 길을 지금은 기차가 24시간 만에 가볍게 돌파하고 있다.

황량한 사막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전신주와 가끔씩 보이는 대형 간판을 보면 사막보다, 황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서서히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는 메마른 대지와 희미해져가는 지평선, 어디론가 끝없이 뻗어가는 도로…. 그렇게 거친 곡선과 직선으로 분할된 세상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그대로의 세상에 몰입하는 순간, 자연의 위대함에 감탄하기도 한다.

우루무치에서 떠난 기차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밤새도록 달렸고, 창틈으로 스며 들어온 황사 바람에 입이 텁텁해지는 오후 무렵 드디어 카슈가르에 도착했다. 역사 주변은 황량하지만, 차를 타고 시내에 들어오는 순간 잠시 어리둥절한 풍경이 펼쳐졌다.

카슈가르는 오아시스다. 오아시스라면 언뜻 호수 주변에 야자나무가 서 있는 낭만적인 풍경을 연상할 테지만, 서역 최대의 오아시스는 번화한 도시로 변해 있었다. 넓게 뚫린 대로에는 멋진 현대식 빌딩들이 들어서 마치 종로 한복판에 온듯한 느낌이 들고 말았다.

카슈가르의 중국어 명칭은 카스(喀什)이나, 위구르족은 모두 카슈가르라 부른다. 이곳 인구는 약 230만명이다. 원래는 그 중 90%가 위구르족이고 나머지 10%가 우즈베크족 등 소수민족이었으나, 이젠 정책적인 이주로 거리에 한족들이 매우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카슈가르는 여전히 위구르족의 도시고, 시내에 있는 에이티갈 모스크와 근교에 있는 아바흐 호자의 묘는 위구르족의 정신적 의지처다. 이슬람교의 시조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인 아바흐 호자는 17세기 이곳에 와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녹색 타일로 뒤덮인 아름다운 모스크 안에 아바흐 호자와 그 일족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향비의 묘도 이곳에 있다. 서역을 평정한 청의 건륭제에게 시집간 호자 일족의 여인인 향비는 끝까지 건륭제를 거부하다 죽고 마는데, 그의 유체가 베이징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카슈가르의 가장 큰 볼거리는 일요시장이다. ‘한서’의 서역전에도 시열이 유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시열은 시장을 말한다. 카슈가르는 톈산남로를 거쳐온 상인들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온 서쪽의 상인들이 만나는 곳이어서 자연히 시장이 크게 열렸었다.

지금도 아침이면 사람들은 팔 물건들을 당나귀 수레와 마차 그리고 자동차에 싣고 꾸역꾸역 장으로 몰려든다. 비록 예전과는 달리 시장이 정비되고 상설화되어서 북적거리는 재래시장의 열기를 느낄 수는 없지만, 여전히 외부에서 오는 이들은 낯선 이국적인 장 풍경에서 흥분을 금하지 못한다.

카슈가르에서 전통적인 위구르인들의 생활 모습을 보려면 구시가지로 가야 한다. 돌담길에는 크고 작은 위구르족의 상점과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고, 거리에서는 양의 창자로 만든 한국의 순대와 맛이 비슷한 ‘웹갸이습’을 맛볼 수 있다. 또 에이티갈 모스크 근처의 뒷길은 저녁 때가 되면 수많은 거리의 음식점들이 들어선다. 양고기 꼬치구이인 시시케밥을 굽는 연기가 거리에 자욱하고, 사람들의 물결로 흥청거린다.

카슈가르에 와선 좋은 호텔의 음식점에 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저녁 나절 구시가지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좌판에 앉아 이들의 주식인 난(밀개떡)에 매콤한 양념에 버무린 시시케밥을 넣어 먹고, 주인의 순박한 웃음과 현지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접하는 순간, 그제서야 여행자들은 자신이 멀고 먼 서역 땅에 앉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돌담으로 쌓인 미로 같은 골목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마주친 아이들이 문 뒤에서 몰래 훔쳐볼 때, 마주 오던 아름다운 전통 복장의 위구르 여인이 살짝 낯을 붉히며 고개를 숙일 때, 온몸에는 짜릿한 희열이 흐른다. 카슈가르는 그런 곳이다. 대단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세상의 변경에 와 있는 듯한 희열을 맛볼 수 있는 낯설고도 즐거운 세상이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위구르족을 보면 나는 왠지 모르게 정이 갔는데, 어느 청년이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우리 위구르족은 매운 것을 잘 먹지요. 그리고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을 많이 써요. 또 박치기를 잘합니다. 여러 말 할 필요 없어요. 그냥 한번 받아 버리면 끝나는 거지요.”

우리 또한 그렇지 않았던가. 프로레슬러 김일의 박치기는 얼마나 유명했으며 일본인이나 중국인에 비해 숟가락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가, 또 매운 것도 그렇고. 이렇듯이 위구르족은 우리와도 공통점이 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터키의 조상인 돌궐족(투르크족)은 한때 서역 지방을 지배했었고, 동돌궐은 우리 고구려와 접경을 이루기도 했다. 그렇다면 수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돌궐족의 사촌쯤 되는 위구르족이 우리와 비슷한 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같다.

■여행정보

숙소는 지니바허 빈관(其尼巴合賓館) 트윈이 한국돈으로 약 5만원 정도며, 비수기 때는 3만∼4만원으로 할인된다. 그 외에도 많은 종류의 숙소들이 있다. 우루무치에서 카슈가르까지는 기차가 편리하고 빠르다. 약 24시간 걸리고 침대차 요금은 약 5만∼6만원 정도다.

카슈가르 역에서 우루무치까지는 오전·오후에 출발하는 것이 있는데, 오전에 출발하는 기차가 더 싸다.

기차역에서 시내의 에이티갈 모스크 앞까지 버스가 다닌다. 택시를 타면 대개 10분가량 걸리고 요금은 1500원 정도. 파미르 고원을 넘어 파키스탄 국경 도시 서스트까지 가는 버스표는 지니바허 빈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국제버스정류장(international bus terminal)에서 판다. 5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공식적으로 길이 열리나, 대개 11월 말까지 다니고 기상 상태에 따라 약간씩 변동이 있다. 중간에 타슈가르칸에서 1박을 하고 간다.

by 100명 2007. 4. 13. 12:59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환상의 카라코람 하이웨이
[세계일보 2005-06-30 20:33]

세상에서 가장 높고 장엄한 길이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과 파키스탄을 잇고 있다. 중국 서역 지방의 카슈가르에서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까지 이어지는 약 1200㎞의 길로, 중국 측에서는 중파공로(中巴公路), 파키스탄 측에서는 카라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라 부른다. 이 길은 현재 버스를 타고 1박2일이 걸리지만 예전에는 대상들 혹은 불법을 구하러 인도로 가던 구도자들이 낙타나 야크(티베트 등 고원에서 주로 사는 소과의 포유류)를 이용해 몇 달씩 가던 길이었다.

지금 이 길을 오가는 이들은 파키스탄의 비단장수들과 소수의 여행자들이다. 카슈가르에서 승객과 비단을 잔뜩 실은 버스는 황량한 벌판을 달리다 몇 번의 중국 측 검문소를 거친 후 약 여덟 시간 만에 타슈쿠르간(Tashkurgan)에 섰다. 그곳에서 1박을 해야 했다.

타슈쿠르간은 조그만 촌락으로 해발 3600m지만 파미르 고원의 6000, 7000m급의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포근한 골짜기 마을 같았다.

타슈쿠르간이란 ‘돌의 성’ 또는 ‘돌의 탑’이란 뜻이다. 그리스의 물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상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며 “비단의 나라 세리카(서역지방의 한 나라)로 가려면 ‘투리스 라피데아’ 즉 돌의 탑을 거쳐서 간다”고 그의 저서 ‘지리학’에 적었는데, 투리스 라피데아는 바로 타슈쿠르간을 말했다.

◇파키스탄 학생들.

또 중국 측 기록을 보면 당 승 현장도 인도에서 카슈가르로 오다가 타슈쿠르간에서 20일간 머물렀고, 고구려계의 고선지 장군도 이곳을 거쳐 소발륙국(현재 파키스탄의 길기트 지방)을 원정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인 길이지만 지금 이곳에는 유물이 남아 있지 않고, 다만 타지크 유목민들이 야크를 기르며 살고 있을 뿐이다.

다음날 아침, 버스는 드디어 해발 약 5000m의 파미르고원을 향해 올랐고,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자 중국 측 이민국이 있는 피랄리(Pirali)가 나왔다. 그곳에서 출국 수속을 밟은 후 드디어 쿤제라브 고개(Khunjerab Pass)를 오르기 시작했다. 쿤제라브 고개는 그 지역 말로 ‘피의 계곡’이란 뜻이다. 예전에 산적들이 이 길을 넘던 대상과 수도승들을 상대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여 늘 피가 계곡에 흘렀다고 붙인 이름인데, 양쪽으로 높게 치솟은 산들이 고갯길을 에워싸고 있었다. 위를 쳐다보니 바위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아 아찔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에 있는 도시 길기트(Gilgit)에서 본 석불.

예전의 실크로드는 정확히 이 길이 아니었다. 타슈쿠르간에서 80㎞ 정도 오다가 서쪽으로 약간 비껴 난 민타카 고개를 넘어 파키스탄 쪽으로 가거나, 와크지르 고개를 넘어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혜초 스님은 아마도 인도를 여행한 후 와크지르 고개를 통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카슈가르에 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이 고개를 넘으며 느꼈던 암담한 심정을 ‘왕오천축국전’에서 이렇게 읊었다.

“그대는 서번(西蕃·서쪽의 변방)이 먼 것을 한탄하나

나는 동방으로 가는 길이 먼 것을 한탄하노라

길은 거칠고 눈은 산마루에 수북이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이 들끓는구나.

새는 날다 깎아지른 산 위에서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를 건너며 어려워한다.

평생에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오늘만은 천 줄이나 뿌리도다.”

◇타슈쿠르간에 사는 유목민 타지크족. 소와 생김새가 비슷한 야크를 기르며 산다.

그렇게 험했던 길이건만 지금은 넓은 도로를 버스가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 사이에 선 경계비가 보였다. 해발 4943m의 꼭대기에 서 있는 경계비를 지나는 순간, 파키스탄 대상들은 모두 손을 들고 카운트 다운을 하기 시작했다.

“셋, 둘, 하나, 파키스탄!”

그들은 서로 악수하며 껴안았고, 버스는 이내 깎아지른 계곡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중국 쪽은 평평한 고원이었지만 파키스탄쪽에는 기암절벽 밑으로 시퍼런 물이 콸콸 흘렀다.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위의 길을 달리며 계곡 건너편 산허리를 보니 옛길이 희미한 실처럼 보였다. 옛사람들은 저런 아찔한 길을 걸어서 파미르 고원을 넘었던 것이다.

◇파키스탄 국경쪽 서스트에서 짐을 내리는 파키스탄 대상들.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이처럼 상품·종교·문화가 교류한 역사적인 길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열정이 서린 길이다. 또한 장엄한 풍경 앞에서 짜릿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파키스탄쪽의 국경 마을은 서스트(Sust)다. 이곳의 이민국에 도착하자 파키스탄 대상들은 긴장하다 못해 초조한 빛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대상들의 말에 의하면 이민국 관리들이 매우 깐깐하고 뇌물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버스 위에서 짐을 내린 사람들은 한쪽으로 가 줄을 서는데 모두 주눅 든 표정이었다. 나는 외국인이라 쓰인 책상 앞으로 갔다. 이민국 직원은 뭐가 못마땅한지 다짜고짜 비자가 없다며 신경질을 냈다. 파키스탄은 그 당시 관광의 경우에 비자가 필요없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고 “규정을 확인해보라”고 해도 “규정집이 없다”고 하고, “이슬라마바드에 확인해보라”고 해도 “전화가 안 된다”고 했다. 72시간의 통과비자밖에 줄 수가 없다고 해서 옥신각신하는데 관리의 최후 통첩은 ‘싫으면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참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결국 72시간의 통과비자를 얻어 이슬라마바드에 가서 연장했었다. 그 당시 드나드는 한국인들이 거의 없는 오지의 이민국이다 보니 규정을 잘 모르고 있던 것 같았다.

■여행정보

5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공식적으로 길이 열리나 기상 상태에 따라 약간씩 변동된다. 5월에는 해빙기라 산사태가 날 염려가 있어 주의해야 한다. 파키스탄은 예전에는 3개월간은 관광비자를 얻을 필요가 없었지만 현재는 비자면제협정이 파기되어 비자를 얻어야 한다. 타슈쿠르간에는 조그만 호텔이 있고, 서스트에는 허름하지만 여러 개의 호텔이 있어 숙박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단 봄이나 늦가을의 경우 매우 추워서 침낭이 필요하다. 또 이동하다 보면 끼니를 놓치기 쉬우므로 물과 식량을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by 100명 2007. 4. 13. 12:58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 뉴질랜드 북섬 로토루아
[세계일보 2005-07-14 22:18]

뉴질랜드에 최초로 발을 디딘 인간은 마오리족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1000년 전에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거대한 카누를 타고 이 땅에 왔는데, 그 후 1624년 네덜란드의 항해사 아벨 타스멘(Abel J. Tasmen)이 나타나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해변 도시 젤란트(Zeeland)의 이름을 따서 ‘노보 젤란트(Novo Zeeland, 새로운 젤란트)’란 뜻으로 불렀고 이것이 영어식으로 바뀌면서 뉴질랜드(New Zealand)가 되었다.

그러나 마오리족은 이 땅을 아오테아로아(Aotearoa), 즉 ‘좁고 흰 구름 같은 땅’으로 불렀다. 북섬과 남섬을 다 합친 면적이 한반도보다 조금 더 넓은 27만㎢며, 길이가 1600㎞나 되는 이 흰 구름같이 긴 땅에 급격한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였다. 1769년 영국인 항해사 제임스 쿡이 뉴질랜드를 탐사한 후 영국인들의 이민이 급증했고, 1840년 영국 정부는 마오리족과 와이탕기 조약을 맺으면서 이 땅을 식민지화했다. 그 후 토지 문제로 1860년에 일어난 영국과 마오리족 사이의 12년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게 된다. 이런 역사 흐름 속에서 패배한 마오리족들의 터전이 로토루아(Rotorua)란 도시다.

◇오클랜드 시내 풍경(사진 왼쪽) 목초지의 양떼들.

로토루아는 뉴질랜드의 최대 도시 오클랜드(Auckland)에서 차를 타고 동남쪽으로 두세 시간 가면 나온다. 푸른 풀로 뒤덮인 목초지에는 방목되는 양떼들과 젖소들이 보이고, 집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길이 이어지다가 로토루아에 들어서면서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갈색 피부의 몸집이 큰 마오리족들이 보이고 유황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로토루아는 북섬 최대의 관광지답게 많은 볼거리가 있다. 와카레와레와(Whakarewarewa) 지열지대에서는 간헐천이 솟는데, 하루에 한두 시간 간격으로 온천물을 약 30m 높이까지 내뿜는 포후투(Pohutu) 간헐천이 유명하고 마을회관에서는 마오리족의 공연이 벌어진다. 어깨가 딱 벌어진 건장한 마오리족 전사들이 손님과 코를 맞대고 인사한 후 민속 무용인 ‘하카’를 춘다. 가슴을 치고 눈을 크게 부릅뜬 채 혀를 내밀면서 상대방을 위협하는 전투 때 추던 춤이다. 여성들은 줄끝에 포이(공)를 달고 돌리면서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은 바다의 물보라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가 귀에 익은 곡조였다. 포카레카레 아나(Pokarekare Ana)는 마오리족 연인들의 슬픈 사랑을 읊은 노래로 후일 한국에 “비바람이 불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으로 알려진 ‘연가’와 같았다.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 마오리족 노래는 6·25 때 참전한 뉴질랜드 병사들에 의해 한국에도 알려졌다고 한다.

이 외에도 레인보 스프링스라는 정원에는 뉴질랜드에서만 볼 수 있는 동식물을 모아 놓았고, 건너편의 키위 인카운터(Kiwi Encounter)에서는 키위새가 보호되고 있다. 과일 키위(kiwi)와도 단어가 같은 키위새는 뉴질랜드에서만 살고 있는 새로 뉴질랜드의 상징인데, 날개가 퇴화되었고 하루에 18시간 정도 잔다.

약 1억년 전에 대륙에서 갈라져 독자적으로 생물의 진화가 이루어진 뉴질랜드에서는 이상하게도 포유동물이 진화되지 않았고, 7000만년 전부터 나타난 키위새는 이런 환경 속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인간과 그들이 데리고 온 개와 쥐에 의해 공격을 당해 지금은 7만마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2015년에는 키위새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하여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보호 정책을 펴고 있다.

이곳에서는 양털깎기 쇼도 빠뜨릴 수 없다. 아그로돔(Agrodome)에서는 양털깎기를 직접 보여주는데, 1분도 안 되어 커다란 양이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버린다.

양털깎기는 고도의 숙련된 노동으로 최고의 기록은 하루에 720마리를 깎은 것으로, 한 마리당 약 45초 걸렸다고 한다. 그 외에도 류머티즘과 근육통에 좋다는 노천 온천, 번지점프, 밑에서 올라오는 강한 공기 위에서 떠 있는 보디 플라잉(Body Flying)을 즐길 수 있어 로토루아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오클랜드 공항에서는 비행기 통로에서부터 이민국 직원들이 승객들을 검사했다. 다른 이들은 무사 통과했지만 나는 따로 불러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여행작가라는 것을 알고난 후에야 호의를 보이며 보내주었다.

그러나 정식 입국 심사할 때, 또 다른 이민국 직원은 계속 망설이다가 빨간 볼펜으로 카드에 뭐라 쓴 후 통과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세관 검사에서 4번으로 가 짐 검사를 받으라 했다.

번호가 높을수록 강도가 세어지는데, 4번으로 가면 두어 시간 정도 조사를 받는다고 한다. 음식물 반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뉴질랜드지만 전혀 걸릴 것이 없던 나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다만 기분이 언짢았다. 같이 갔던 후배는 모든 조건이 나와 같았고 옷차림도 비슷했는데 무사히 통과했고 왜 나만 이럴까. 아하, 딱 하나 차이가 있었다.

내가 콧수염을 길렀다는 것. 9·11 테러 이후 서양 문화권에서 콧수염 기른 나에게 이유 없는 적대감과 경계심을 보인 사람들을 보았는데 여기서도 그런 것일까. 그러나 구세주가 나타났다.

처음에 비행기 출구에서 나를 검사해 내가 여행작가라는 것을 알고 있던 이가 다가와 간단한 질문을 한 후, 그냥 데리고 나가 입국시켜주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음식물 반입은 결코 하지 말고, 콧수염 기른 사람은 가급적이면 깎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여행 정보=직항인 대한항공을 타면 오클랜드까지 11시간30분 소요. 캐세이 퍼시픽을 타면 홍콩까지 3시간, 홍콩에서 뉴질랜드까지 11시간 걸리는데, 홍콩에 들러 구경할 수 있는 1석2조의 장점이 있다. 뉴질랜드는 7, 8월이 겨울이라 피서와 설경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도 많다.

오클랜드에서 버스는 운행 횟수가 뜸해 불편하다. 현지에서 일일 투어를 할 수도 있고, 렌터카를 이용해도 좋다. 보험료까지 포함해 하루에 약 4만원이면 가능.

by 100명 2007. 4. 13. 12:57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뉴질랜드 남섬 카이코라
[세계일보 2005-07-28 21:51]

뉴질랜드 북섬의 남단에 있는 수도 웰링턴(Wellington)에서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 남섬의 픽턴(Picton)이 나온다. 이곳에서 동부해안을 따라 카이코라(Kaikoura)까지 가는 약 160㎞의 해안 길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다. 한두 시간을 달려야 집 몇 채 나오는 텅 빈 길 옆으로 양떼가 널린 끝없는 푸른 들판이 보이다가 갑자기 해안도로가 나타난다. 절벽 왼편으로 파도 치는 태평양과 구름 낀 음산한 하늘이 펼쳐지고, 해안선 옆으로 코스털 퍼시픽(Coastal Pacific)철도가 달리는 환상적인 길 끝에 작은 마을 카이코라가 있다.

마오리 언어로 ‘카이(Kai)’는 ‘먹는다’는 뜻이고 ‘코라(Koura)’는 ‘크레이 피시(작은 바닷가재)’를 의미하는데, 그만큼 카이코라의 앞바다에는 바닷가재가 많이 산다. 현재 카이코라가 관광객에게 유명해진 것은 이 일대에서 출몰하는 향유고래와 돌고래 때문이다.

◇남섬의 픽턴 항구

카이코라 앞바다는 수심이 깊어서 고래가 접근하기에 좋고 고래의 먹이인 오징어와 생선이 많으며,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서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여름철에는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물 위로 떠오르는 향유고래를 보기 위한 투어는 물론, 돌고래 떼와 함께 수영하는 투어, 그 외 번지점프, 래프팅, 제트보트 타기 등 수많은 투어가 있어서 카이코라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휴식을 취하는 물개

투어가 뜸한 겨울철에도 볼거리는 있다. 마을 중심지에서 해안을 따라 4㎞ 정도 걸어가면 물개 서식지가 나온다. 썰물 때 가보니 뉴질랜드물개(New Zealand Fur Seal)가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저무는 석양 밑에서 출렁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하는 물개의 모습이 조금은 고독해보였다. 물개는 한때 남획되어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현재는 보호를 받아 3만8000여마리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카이코라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183㎞ 더 가면 크라이스트 처치가 나온다. 남섬의 최대 도시이자 오클랜드, 웰링턴에 이은 뉴질랜드 제3의 도시지만, 이곳에 사는 인구는 약 32만명 정도. 그러니 우리의 눈에 비친 이 도시는 한적하다. 도시의 중심지 대성당과 그 앞의 광장, 콜롬보 스트리트(Colombo St)와 시티몰(City Mall)에는 번듯한 건물과 은행, 상점, 레스토랑, 카페 등이 들어서 번잡하지만 걸어서 10분만 외곽으로 나가도 단층 주택이 이어진 한산한 길이 나온다.

◇남극 탐험가 스콧의 동상

개척 당시의 영국적인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한 캔터베리 주청사, 캔터베리 박물관 등은 물론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해 만든 광장, 그녀의 동상, 또 뉴질랜드를 최초로 탐험한 영국 항해사 제임스 쿡의 동상과 영국 출신의 남극 탐험가 스콧의 동상 등이 있어서 그 시절의 분위기를 듬뿍 맛볼 수 있다.

그러나 크라이스트 처치의 가장 큰 특징은 공원이다. 공원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 일컬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넓고 넓은 해글리 공원(Haegleu Park)이 단연 돋보인다. 공원과 함께 이 도시를 낭만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에이번 강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이 강에는 38개의 다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아치형의 문이 인상적인 추억의 다리(Bridge of Remembrance)가 눈에 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들을 위해 환송 행사를 벌였던 장소에 전사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다리인데, 지금 이 주변은 수많은 노천 카페가 모여 있다.

이 도시의 매력은 천천히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 못지않게 한곳에 앉아 여유가 넘쳐 흐르는 거리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경하다 잠시 눈을 감고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문득 산속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어버린다. 향긋한 공기가 마치 산속의 공기처럼 맑기 때문이다. 도시 한복판에서 그런 공기를 마시는 것이 현실인 곳, 그곳이 뉴질랜드고 크라이스트 처치다.

여행작가

◇카이코라에서 크라이스트 처치까지 가는 동안의 목가적인 풍경

by 100명 2007. 4. 13. 12:55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뉴질랜드 남섬 퀸스타운
[세계일보 2005-08-18 16:48]

퀸스타운(Queens Town) 은 19세기 중엽 금광이 발견되어 급속히 발전했지만 현재는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퀸스타운까지는 차로 약 8시간 걸리는데, 테카포(Tekapo) 호수를 지나면서부터 멀리 서던 알프스 산맥의 눈 덮인 연봉과 그 최고봉인 마운트 쿡(Mount Cook·3754m)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오리족들은 마운트쿡을 아오라키(Aoraki)라 부르는데, ‘구름을 뚫은 산’이란 뜻이다.

구름은 퀸스타운을 향해 달리는 동안 산맥의 중간에 길게 깔려 있었다. 서서히 산맥 따라 이어지는 긴 호수 위에 어둠이 내라앉았고, 희미하게 보이는 긴 띠 모양의 구름과 그 너머 눈 덮인 산맥을 바라보니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의 무대인 중간계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퀸스타운의 인구는 7500명이고 중심부는 걸어서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장소가 많다. 마오리족 언어로 ‘비취 호수’라는 아름다운 와카티푸 호수, 그 수면 아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인공 수족관,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주변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산 정상의 스카이 콤플렉스 등이 있다.

◇퀸스타운의 레지 번지점프대

그러나 퀸스타운의 가장 큰 매력은 레포츠다. 겨울철에는 스키, 여름철에는 래프팅 제트보트 등을 즐길 수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아무때나 할 수 있는 번지점프다. 번지점프는 원래 남태평양의 팬타코스트섬 원주민들이 치르던 성인식의 통과의례였는데, 뉴질랜드인 해켓(A J Hackett)이 고향인 퀸스타운의 카와라우(Kawarau) 다리에서 최초로 상업적으로 시도했다고 한다. 다리에서 강으로 뛰어내리는 47m의 카와라우 번지점프는 물론, 가장 경치가 좋은 43m짜리의 레지 번지(Ledge Bungy), 134m짜리의 네비스 하이와이어 번지(Nevis Highwire Bungy) 등이 있다.

근교의 볼 만한 곳으로는 스노 팜(Snow Farm)이 있다. 퀸스타운에서 카드로나(Cardrona)를 거쳐 산길을 따라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올라가면 정상에 눈에 뒤덮인 고원지대가 나오는데, 바로 이곳이 한국 영화 ‘남극일기’의 촬영장소였다.

퀸스타운에 오면 밀퍼드 사운드(Milford Sound)를 꼭 가야만 한다. 차를 타고 티 아나우(Te Anau)를 거쳐 서쪽의 해안까지 약 5시간 정도 걸리는데, 특히 티 아나우에서 밀퍼드 사운드에 이르는 120km의 구간은 장관이다. 중간에 호수, 산책길, 폭포 등의 구경거리가 있는데 특히 미러(Mirror) 호수가 눈길을 끈다. 물이 잔잔하고 맑아서 거울처럼 주변 풍경을 수면에 비쳐주고, 거꾸로 된 ‘Mirror Lakes’ 팻말이 수면 속에서 바르게 보인다. 그곳을 지나면 눈 덮인 거대한 산이 정면을 가로막고 1219m의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 급경사 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면 비로소 밀퍼드 사운드가 나온다.

밀퍼드 사운드는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의 중심지다. 피오르드랜드는 14개의 사운드(sound), 즉 협곡으로 이루어진 뉴질랜드 최대의 국립공원으로 1만2000년 전 빙하의 무게에 의해 산이 파이면서 V자 형태의 계곡을 이룬 후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와서 형성된 해안이다.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드와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2시간짜리 크루즈 배를 타고 밀퍼드 사운드로 들어섰을 때 서늘하고 무서운 느낌이 온몸을 덮쳐왔다. 같은 침식 해안이라도 땅이 물속으로 꺼지고 바닷물이 들어온 리아스식 해안, 즉 한국의 다도해 등은 아기자기하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빙하에 의해 절벽처럼 깎여진 해안과 차갑고 맑은 물, 160m나 되는 보웬 폭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장엄한 폭포로 이루어진 피오르드 해안은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북섬의 오클랜드에서 남섬의 밀퍼드 사운드까지 뉴질랜드의 자연은 평화롭고 낭만적이며 동시에 경이롭기 그지없다.

여행작가

43m 번지점프대 올라서니 다리 후들후들… 끝내 실패

■여행 에피소드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43m짜리 레지 번지를 하기로 했다. 번지점프대에 서기 전까지도 자신 있었다. 그러나 점프대에 서서 까마득한 허공과 밑으로 펼쳐진 거대한 침엽수림을 보는 순간 힘이 쪽 빠져왔다.

공포감은 상상 밖이었다. 머뭇거리자 직원이 뒤에서 달려가며 뛰어내리라고 했다. 그러나 웬걸 겁은 더 났고 찬바람이 온몸을 휘감아 왔다. 심호흡을 하며 허공을 노려보았지만 도저히 뛰어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직원은 줄을 풀며 뒤로 가라 했다. 실패였다. 창피하고 스스로 화가 났다. 그래도 ‘왕년’에는 겁없이 살았던 나였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내 앞에서 실패했던 서양 여자는 울고 있었다.

후일 집에 와서 나의 실패담을 들은 아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신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가는데 무슨 번지점프를….” 하긴 젊다거나 혹은 평소에 그런 운동이나 레포츠를 즐겼다면 모를까, 갑자기 그 나이에 그런 걸 하려 하다니. 그렇게 스스로 위로했지만 여전히 기분이 씁쓸했다. 동시에 번지점프를 하는 이들이 대단해보였다.

■여행정보

번지점프는 시내 인포메이션 센터나 숙소에서 미리 신청한다. 예약한 후에 가야지 아무때나 가서 하는 게 아니다. 하기 전에 간단하게 몸무게만 재는데, 그 외의 건강 상태는 따로 측정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므로 한국에서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요금은 140뉴질랜드 달러(NZD·약 10만4000원)

렌터카로 갈 경우 밀퍼드 사운드까지 당일치기로 갔다올 수 있다. 퀸스타운에서 교통편과 크루즈까지 모두 엮은 밀퍼드 사운드 일일 투어도 있다. 퀸스타운에서 오클랜드까지의 항공료는 세금을 포함해서 166NZD다. 이곳에서 호주의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도 있다. 오클랜드에서 일단 퀸스타운까지 차로 왔다면 시드니로 가든, 오클랜드로 돌아가든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시간적·경제적으로 낫다.

◇퀸스타운 시내 모습

by 100명 2007. 4. 13. 12:54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 캄보디아 앙코르 문명
[세계일보 2005-09-01 17:39]

캄보디아 북서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거대한 톤레삽 호수 인근의 정글에 위대한 앙코르 왕국이 있었다. 9세기에 나타난 왕국은 약 600년간 존재했고, 한때 리오스 태국 베트남의 일부까지 다스리다가 15세기에 갑자기 소멸했다.

그 후 잊혀졌던 왕국을 방문했던 이들이 종종 있었는데, 앙코르 문명을 전 세계에 크게 알린 이는 1860년 프랑스의 동식물학자 앙리 무오였다.

앙코르(Angkor)란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동남아시아 미술사를 연구하는 ‘돈 루니(Dawn Rooney)’ 같은 학자는 “원래 크메르인들은 앙코르 왕국을 ‘캄부자(Kambuja)’왕국이라 불렀고 자신들의 도시를 인도 산스크리트어의 나가라(Nagara·도시)에서 유래한 나크혼(Nakhon)이라 불렀는데, 서양인들이 나크혼을 잘못 들어서 앙코르라 부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앙코르 문명의 대표적인 사원은 앙코르 와트다. 와트는 사원이란 뜻이니 앙코르 와트란 ‘도시 사원’을 의미한다. 이 힌두교 사원은 수리야바르만 2세 때인 12세기 중엽, 약 30년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 다른 사원들과 달리 입구가 죽음을 의미하는 서쪽에 있어서 아마 수리야바르만 2세의 무덤으로 쓰였거나 천문대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 사원에는 그 외에도 수많은 의미와 상징이 담겨져 있다.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호수 같은 해자는 우주의 대양을 뜻하고 해자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 것은 인간의 속세, 상대성의 세계에서 신들의 세계, 절대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원 안에 우뚝 솟은 중압탑의 지성소는 우주의 중심이고 절대자가 살고 있는 메루산(수미산)의 상징이다.

◇앙코르 톰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54개 악마의 조각들.

본전의 제3회랑에는 힌두교의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쿠루 평야의 전투’, 라마야나에 나오는 ‘랑카의 전투’ 그리고 대홍수에 의해 파멸된 세상에서 암리타라는 영생불사약을 얻기 위해 뱀의 몸통을 잡고 뒤흔드는 신들과 악마들, 그 물결 속에서 탄생하는 천상의 무용수들인 압사라 등 풍부한 인도 힌두교 신화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앙코르 와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힌두교의 마누법전에 의하면 우주는 네 개의 흥망성쇠를 겪고 순환한다. 이걸 유가(Yuga)라는 단위로 계산하는데 크리타 유가는 우주의 정법이 모두 지켜지는 시기로, 인간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172만 8000년, 트레타 유가는 우주의 정법이 4분의 3만큼만 지켜지는 시기로 129만 6000년, 드바파라 유가는 우주의 정법이 4분의 2만 지켜지며 86만 4000년이 유지되고, 칼리 유가는 말세의 시기로 43만 2000년이 유지된다. 우리는 현재 말세를 살고 있는데 이 흥망성쇠를 다 합하면 432만년이 되며, 이것이 2000번 되풀이되는 것이 창조주의 하루고, 이것을 1칼파(겁)라 한다.

그런데 베네수엘라의 여성학자 엘리노 마니카(Eleanor Mannika)가 앙코르 왕국시대에 쓰던 큐빗(1Qubit=0.43545m)이란 단위로 사원의 구석구석을 재보니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대략 다리길이는 432큐빗, 다리를 건넌 후부터 참배로가 끝나는 곳까지가 864큐빗, 다리 중간에서부터 제3회랑까지가 1296큐빗, 그리고 다리 시작되는 곳부터 제2회랑까지가 1728큐빗이 나왔는데, 바로 각 유가 주기를 1000분의 1로 축소한 것과 같았다. 이것은 앙코르 와트의 건설자 수리야바르만 2세가 말세와 같은 세상을 우주의 정법이 실현되는 크리타 유가의 시대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국경에서 시엠리엡까지 다니는 픽업(Pick-up) 트럭.

그 외에도 태양이 움직이는 황도대의 별자리,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시기, 동지, 하지 때 비추는 햇빛의 양 등을 계산해서 우주의 시간을 일정한 공간에 구현해 놓은 사원이 바로 앙코르 와트다.

앙코르 와트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앙코르 톰(위대한 도시)’의 성벽이 있다. 입구에는 54명의 신(Deva)과 54명의 악마(Asura)가 뱀의 몸통을 잡고 뒤흔드는 모습으로 양편에 늘어서 있고, 성벽에는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진 사면 얼굴상이 있어 방문자들을 오싹하게 만든다.

도성 안에는 폐허가 된 왕궁이 있고 중심에는 바이욘 사원이 있다. 집채만한 아발로기데스바라(관음상)의 사면 얼굴상이 가득 찬 기괴스러운 사원인데, 앙코르 왕국의 번성기를 열었던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불교 사원으로 그는 스스로 관세음보살이라 일컬었다. 그 외에 거대한 문어발 같은 무화과나무 뿌리가 사원의 담장을 움켜쥐고 있는 폐허의 프레아 칸 사원과 타 프롬 사원은 경이롭고 충격적이다. 이처럼 앙코르 문명은 거대하고, 기괴하고, 아름다우며 수많은 상징과 의미를 간직한 독특한 인류의 문명이다.

관광객 급증… 조악한 기념품 파는 아이들 안쓰러워

■여행 에피소드

앙코르 유적지에는 1997년부터 2005년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가보았는데, 7년 동안 관광객은 급증했고 그에 따라 인심도 변해갔다. 2005년도에 갔을 때는 가짜 배표를 파는 이까지 등장했으며 발마사지 업소가 성행하고 나이트 클럽에서는 매춘도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티셔츠, 조잡한 기념품을 팔며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달려드는 아이들은 여전했다. 아이들의 눈망울이 맑고 깨끗해서 더욱 마음이 안쓰러운데, 프놈 바켕처럼 산에 있는 사원에서는 음료수 등을 조금 비싸게 팔기도 한다. 가끔 이들에게 야박하게 대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이곳 경찰들에게도 돈을 바쳐야 한단다. 내막을 알고 보면 매우 불쌍한 아이들이니 너무 야박하게 대하는 것은 피하는 게 좋을 듯하다.

■여행정보

여행자들은 앙코르 유적지에서 약 6㎞ 떨어진 시엠리엡에서 머물러야 한다. 시엠리엡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프놈펜에서 비행기(약 1시간), 배(5시간), 혹은 버스(7시간)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태국 방콕에서 버스를 타고 국경 도시 아란야프라텟까지 간 후, 그곳에서 국경을 통과해 시엠리엡까지 가는 택시 미니버스 픽업 트럭(소형 트럭을 개조해 만든 것)을 이용한다. 4∼7시간 소요되고 길이 안 좋다. 앙코르 유적지 입장료는 1일은 20달러, 3일은 40달러, 일주일은 60달러다. 시엠리엡의 숙소에서 모토바이크(오토바이)를 빌리면 하루에 보통 5∼6달러, 2·3인용 삼륜차를 타면 10달러, 택시를 타면 20달러 정도. 반테이 스레이 사원이나 초기 유적지가 있는 롤루오스 지역을 가면 추가 요금을 요구한다.


by 100명 2007. 4. 13. 12:53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43〉영화의무대 홍콩
[세계일보 2005-09-22 17:09]

홍콩 영화는 한물갔다고 하지만 그래도 영화의 흔적들은 아직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주룽(九龍)반도의 번화가 침사추이에 청킹맨션(中慶大厦)이란 낡은 건물이 있다.

이곳은 왕자웨이 감독이 만든 ‘중경삼림’에서 린칭샤가 마약을 운반하기 위해 고용한 인도인들에게 밥을 사주고 옷과 신발을 맞춰 주던 곳이자 배신한 이들을 죽이던 무대이기도 하다.

''중경삼림''의 배경 캘리포니아 바

한때 왕 감독의 아버지가 이 건물 지하의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다는데, 왕 감독은 그래서인지 인도인들의 낙천적이고 엉뚱한 면을 영화 속에서 잘 묘사했다.

원래 이곳은 싸구려 여행자 숙소가 몰려 있는 건물이다. 또 영화에서처럼 이 건물의 1, 2층에는 인도인들이 운영하는 상점, 환전소, 식당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장기체류하는 아프리카 흑인들도 자주 보인다. 이상하게도 이곳을 소개하는 글들에서 “위험하다, 조심하라”는 문구가 많이 보이는데, 겁낼 필요는 없다. 생업에 열중하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중경삼림’의 흔적은 홍콩 섬의 센트럴 역 부근에도 있다. 퀸스 로드 센트럴(皇后大道中) 역 근처의 란콰이퐁(蘭桂坊) 거리는 홍콩의 압구정동답게 화려한 곳이다. 이곳의 ‘캘리포니아 바’에서 왕징원에게 바람맞은 경찰관 663호 량차오웨이가 쓸쓸하게 술을 마셨다.

◇란콰이퐁의 캘리포니아 바

캘리포니아 바는 아직도 성업 중이지만 선머슴 같은 여종업원 왕징원이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부르던 패스트푸드점 ‘미드 나이트 익스프레스’는 사라졌다. 영화가 히트한 후 세가 올라서 몇 번 주인이 바뀌었는데, 현재는 문을 닫았다. 감상과 문화가 자본의 힘 앞에 쫓겨나는 현실은 어디나 똑같다.

‘중경삼림’의 세계는 란콰이퐁 거리에서 얼마 안 떨어진 800m짜리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부근에도 있다. 높은 언덕을 깎아 주택가로 만들었고 그곳에 에스컬레이터가 달리고 있는데, 주변에는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가게 등이 즐비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다 보면 주변에 조그만 집들이 자주 눈에 띄는데, 왼쪽에 있는 집 중의 하나가 자기 세계 속에 빠져 ‘몽중인(夢中人)’으로 살던 량차오웨이의 집이었다.

예전에는 일본 여성들이 영화에서처럼 네 번째 에스컬레이터에서 무릎을 굽힌 채 이 방을 훔쳐 보았다는데,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이미 1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다 중간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캐슬 로드가 나온다. 성벽이 있는 이 고적한 길에서 공중전화 부스를 설치해 놓고 ‘아비정전’을 찍었다고 한다. 1960년대 장궈룽과 류더화 그리고 장완위 사이의 가슴 아픈 사랑이 서린 거리다.

그 외에도 캔턴(Canton) 로드는 영화 ‘첨밀밀’에서 리밍이 장완위를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던 거리고, 그들이 처음 만났던 맥도널드 햄버거 집이 근처에 있어서 첨밀밀을 잊지 못하는 영화 팬들이 종종 들른다.

''화양연화''의 골드핀치레스토랑

또 ‘아비정전’에 나오던 고풍스러운 퀸스카페(皇后飯店)와 ‘화양연화’에서 배우자들이 서로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확인하고 사랑을 이어가는 골드핀치(Goldfinch) 레스토랑이 코즈웨이 베이(Causeway Bay)역 근처에 있으며, ‘영웅본색’에서 저우룬파가 성냥개비를 씹던 빅토리아 피크 등 수많은 영화의 무대들이 홍콩에 있다.

냉엄한 현실에서 영화 속의 무대를 찾아다니는 행위가 유치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무한대로 펼쳐진 공간과 시간의 교차점에서 잠시 피어오르는 꿈과 환영이 현실임을 안다면, 신화와 전설 그리고 영화가 ‘촉촉한 현실’이 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음식과 쇼핑을 넘어서 촉촉한 현실 속에서 바라본 홍콩은 더욱 낭만적이었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주룽반도의 번화가 네이선(Nathan) 로드에는 늘 ‘롤렉스 카피(copy)’를 행인들에게 속삭이는 인도인들이 있다. 가짜 롤렉스 시계를 파는 것이다.

싼 것은 600홍콩달러(약 9만원)부터라는데, 나는 시계보다 이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하루 평균 한두 개 정도 판다는데 간신히 먹고사는 벌이라 했다. 나도 장난 삼아 행인을 향해 외쳐 보았다. “롤렉스 카피! 롤렉스 카피!” 행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흉내내는 나를 보며 인도 친구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잠시 쉬던 그들은 다시 ‘근무 시간’이 오면 날카로운 눈빛으로 ‘롤렉스 카피’를 외쳐댔다.

냉대를 당하고 수모를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생존을 위해 외쳐대는 그들. 산다는 것이 장난이 아닌, 서글프고도 냉엄한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었다. 하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여행정보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이용은 오전 10시15분부터가 편리

청킹맨션은 지하철 침사추이 역에서 내리면 된다. 란콰이퐁에 가려면 지하철 센트럴 역에서 내려 D-1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대로 퀸스 로드 센트럴이 나온다.

그 길을 건너 아길라 거리(D’ Aguilar St·德己立街)이라는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 스탠리 거리와 웰링턴 거리를 지나면 나온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오전 10시15분부터 밤 12시까지는 위로 올라가지만, 오전 6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므로 관광객들이 이용하기에 편한 시간은 오전 10시15분부터다. ‘첨밀밀’을 촬영한 맥도널드는 침사추이역 근처의 페킹로드(北京道)와 한커우로드(漢口道)가 교차하는 모퉁이에 있다.

코즈웨이 베이 역의 F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걸어가면 리 가든 쇼핑센터가 나오는데, 그 맞은편에 퀸스카페가 있고, 리 가든 쇼핑센터 뒷골목인 란퐁로드(蘭芳道)에 골드핀치 레스토랑이 있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by 100명 2007. 4. 13. 12:52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46>파키스탄 훈자
[세계일보 2005-10-06 16:51]

파키스탄 북부, 히말라야산맥 언저리에 길기트란 도시가 있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는 소발률(小勃律)이란 나라로, 가난한 사람이 많고 산천이 협소하며 논밭이 많지 않은 곳이라 했다. 지금도 역시 이곳 풍경은 삭막하기 짝이 없는데, 시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정도 더 달리면 장수마을로 유명한 훈자(Hunza)가 나온다.

일단 가네시라는 곳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르자 포플러나무와 살구나무가 풍성한 산골 마을이 나왔다.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 밑에 있는 해발 2500m의 훈자 마을은 속이 시릴 정도로 공기가 싸늘하고 맑았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밑으로는 시퍼런 훈자 강이 도도히 흘렀고, 멀리 해발 7788m의 눈 덮인 라카포시 봉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장수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때 이곳에는 90세 이상이 주민의 3%였고, 80세 이상이 15% 정도였다고 한다. 1978년에 이곳을 방문한 NHK의 보도에 따르면 가장 나이 많은 이가 108세 정도였다.

◇길기트의 비단가게

최고령이라는 나이보다 이들 노인이 건강하다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다는데, 100세 넘는 노인들이 수두룩하고 70, 80세 된 노인들은 청년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장수의 비결은 무엇일까. 야채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고, 석회질이 섞인 빙하 녹은 물도 식수로서는 좋지 않았다. 자꾸 음식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이들은 발효시킨 살구씨가 효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했었다. 살구씨는 기침과 천식에 효능이 있고 피부를 매끄럽게 하지만, 과연 그것이 장수의 비결이 될 수 있을까.

장수 비결은 맑은 공기와 스트레스 없는 삶, 소식하는 습관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NHK의 인터뷰에서 최고령 노인은 자신의 건강비결은 “하늘의 뜻에 따르며, 식사는 감자나 시금치 등 땅에서 나는 거친 음식을 조금씩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길기트의 산에 새겨진 불상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은 모든 것을 ‘알라’의 뜻에 맡기고 세상일에 신경 안 쓰며 무심하게 살았다. 해가 뜨면 일하고 배고프면 밥 먹는 자연적인 리듬에 따른 생활이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며칠 있다 보면 세상을 잊게 된다. 간단한 식사를 한 뒤 하루 종일 주변을 산책하거나 바위에 걸터앉아 일광욕을 즐겼는데, 공기가 맑으니 걷는 동안에도 몸이 둥둥 떠가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늦게 흘렀다. 생체 리듬이 늦게 흐르니 그만큼 주어진 수명도 천천히 소모되어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1933년에 이곳을 방문했던 어느 서양 여행자의 기록에 따르면 훈자 마을에 장이 서기는 했는데 훈자 미르(소왕국의 왕)가 시끄러워서 금지했다고 한다. 또 우체국도 하나 있었는데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을 닫았을 정도로 훈자 사람들은 한적한 삶을 살았다.

◇훈자의 아이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이 몰려든 것이다. 관광객들은 이곳저곳에 돈을 떨어뜨리며 바쁘게 돌아다녔고, 훈자 주민들의 마음과 삶도 같이 바빠졌다. 그래서 그럴까, 이들의 평균 수명도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100세 넘는 노인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오히려 평균 수명이 연장돼 초고령사회를 걱정하는데 훈자에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거대한 세계화 흐름은 온갖 신화와 전설을 무자비하게 흡수하며 모든 생활을 획일화시키고 있었다.

훈자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불명확하다. 이들이 쓰는 말을 부루샤스키어라 부르는데, 바로 산밑의 가네시 마을 사람들이 쓰는 말과도 달라 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그들 말로 ‘훈스(Huns)’는 화살이란 뜻인데, 화을 잘 쏘아서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지만 불명확하다.

◇훈자에서 길기트 가는 길

재미있는 가설은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드로스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 그의 부하 장수인 가와자 아랄이 귀국을 거부하고 이곳에 머물며 자손을 퍼뜨렸거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직접 퍼뜨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스인 비슷한 파란 눈과 곱슬머리가 있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이제 장수마을의 명성은 점점 빛이 바라고 있지만 그래도 길 가는 여행자들에게는 매력적인 곳임에 틀림없다. 저녁이면 히말라야산맥 너머로 태양이 넘어가고 붉은 놀 속에서 기도를 하러 오라는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도다)’의 스피커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그 저녁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 종교와 철학을 떠나, 대자연의 위대함 속에서 마음은 한없이 겸손해지고 평화로워진다. 마음의 여유란 그렇게 자신을 끝없이 낮추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여행작가

◇기도를 하는 이슬람교도들

■여행 에피소드

잡담하고 차 마시고… 급할 게 없는 버스운전사

길기트에서 중부의 라왈 핀디까지 국영 버스를 탔다. 오후 1시에 떠난 버스는 세월아 네월아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달렸다. 30분 정도 가다가 버스가 섰는데, 이유는 운전사가 차를 한잔 마시기 위해서였다. 약 30분쯤 더 가다 또 섰다.

이번에는 운전사가 벌판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소변을 보느라 선 것이다. 그러고는 조금 더 가다 마주 오는 버스 운전사를 만나자 한참 동안 잡담을 했다. 정말 운전사 마음대로였다. 그리고 수많은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았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모두 내려 메카 쪽을 바라보고 절하며 예배를 드리느라 20분 정도가 또 소요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다 고장 난 차의 승객들을 태웠다. 승객들은 닭, 개, 염소들을 품에 안고 있어서 버스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저녁을 먹느라 또 쉬고…. 그렇게 17시간을 달려 새벽에 라왈 핀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급할 것 없는, 그러나 너무도 느린 파키스탄의 버스 여행이었다.

◇훈자 마을

■여행정보

훈자는 지역 이름이다. 중심지는 카리마바드라고 부르는데, 이곳에는 하루에 1000∼2000원 하는 배낭족 숙소부터 1만∼2만원 하는 중급 숙소까지 다양하다.

근처의 빙하를 돌아보려면 3만원 정도에 운전사를 포함해 렌터카를 빌려 돌아볼 수도 있다. 훈자에서 길기트까지 버스가 다니는데, 숙소에 부탁해 차를 대절할 수도 있고 대로로 나와 히치 하이킹을 할 수도 있다.

by 100명 2007. 4. 13. 12:46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47>파키스탄 페샤와르
[세계일보 2005-10-20 16:54]

파키스탄 중부에 페샤와르란 도시가 있다.

북쪽은 중국, 동쪽은 인도, 서쪽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뻗은 길이 교차하는 곳이다.

중국에서 온 비단이 여기를 거쳐 서방과 인도로 갔고, 인도에서 발현한 불교가 이곳을 지나 중국으로 넘어갔다.

지금도 페샤와르는 수많은 물건과 여행자들이 오가는 흥겨운 곳이다.

알록달록한 문양을 그린 트럭이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질주하고 삼륜차를 개조해 만든 오토릭샤, 자전거, 당나귀 수레들이 어지럽게 얽히는 거리다.

터번과 회색 숄을 걸친 남자들과 검은 차도르로 몸을 숨긴 채 걷는 여인들이 길거리에서 뒤섞이고 토담집 사이의 골목길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논다. 이런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도 삶의 생기는 넘쳐 흐른다. 또 구 시가지 노천시장 바자르는 온갖 잡화점과 음식점들이 있고, 카세트 테이프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늘 넘쳐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페샤와르 근교에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이 있다. 구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을 때 피난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소련군이 물러난 뒤에도 이곳에 살고 있다. 그들의 고향,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려면 카이베르 고개(Khyber Pass·카이바르 Khaibar)를 넘어야 한다. 페샤와르에서 차를 타고 몇 십분 만 가면 커다란 성채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카이베르 패스가 시작된다. 이 지역은 기원전 1600년경에 아리안족이 살았고, 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가 점령했던 곳이다.

카이베르 패스는 거기서부터 한국의 속리산 말티고개처럼 구불구불 온몸을 뒤틀며 뱀처럼 정상을 향해 기어오른다. 지금은 평화로운 길이지만 세계 역사의 파동이 크게 칠 때마다 물결이 넘실거리던 현장이었다. 이 고개를 넘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인도로 향하는 부푼 꿈을 키웠고, 칭기즈칸은 세계 정복의 꿈을 불태웠다. 이슬람 세력이 이 고개를 넘어 인도로 들어갔으며, 영국도 이곳을 지난 인도로 왔다. 카이베르 패스는 이 격동의 사건들을 모두 지켜봤다.

◇페샤와르 거리

카이베르 패스를 넘으면 란디코탈이란 국경도시가 나온다. 예전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있을 때나 알 카에다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그곳까지밖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현재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 고개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간다.

최근 카불에 들렀던 여행자들의 입을 통해 들리는 소문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엄청나게 사회가 변했고 엄격한 이슬람에 의해 통치됐던 그 도시에 웃음과 몸을 파는 외국 여인들까지 등장했다는 것이다. 테러와 교조주의도 무섭지만 이런 자본과 퇴폐의 침투는 더욱 무섭게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카이베르 패스 입구의 성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은 페샤와르 근교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부슈카시(bushkashi)’라는 게임을 한다. 삼륜차를 타고 근교로 가보니 흙담에 둘러싸인 운동장이 나왔고, 그곳에는 20여마리의 말과 기수들이 있었다. 게임은 간단했다. 기수들이 말을 탄 채 목이 잘린 양의 사체를 팔이나 발로 거머쥐고 본부석 앞의 원에 갖다 놓으면 상금을 타는 것이다.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힘든 듯했다.

먼저 늠름한 기수가 양을 잡고 멀리 벗어나더니 그곳에서 양의 한 발을 손으로 잡고 오른 다리로 양의 몸통을 감아 말에 밀착시켰다. 준비를 단단히 한 그는 본부석 앞의 원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다. 그러자 나머지 기수들이 그에게 다가들어 양을 뺏으려 했다. 나중에는 양 다리를 잡고 뺏느라 양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결국 양을 뺏겼다. 편도 없고 자기를 제외한 모든 이가 적인 셈이다. 어떤 이는 채찍으로 양을 잡고 있는 이의 말 잔등을 사정없이 후리기도 했다. 이 어려움을 뚫고 어떤 이가 양을 원에 갖다 놓자 즉석에서 100루피의 상금이 수여되었다. 게임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되풀이 되었다.

◇부슈카시

기수와 말이 겪는 고통은 대단해 보였다. 어떤 기수가 모자를 벗자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고 기진맥진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 낙마해 말발굽에 밟히는 이도 있었다. 여기서는 말이 20∼30마리지만 원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00마리도 넘게 참가한다고 하니 부슈카시는 상당히 격렬하고 위험한 기마민족의 경기로, 세련된 서양의 폴로 게임이나 우리의 격구 게임의 원형처럼 보였다. 페샤와르는 빈곤하지만 이렇게 여러 문화의 원초적인 흔적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여행지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무기제조에 능한 파탄족 청년

"호신용 권총사라" 강권에 진땀

페샤와르 남쪽 약 40㎞ 지점에 ‘다라’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사는 파탄족(Pathans)의 마을이다. 파탄족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영국군, 구 소련군에게 타격을 주었고, 근래에는 미군을 괴롭히고 있는 용맹한 산악 부족이다. 이들은 무기 제조에도 매우 능해 어떤 무기든 한번만 보면 몇시간 내에 뚝딱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졌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다라에 가자마자 이쪽저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고, M16을 든 청년이 다가와 총을 쏘라고 권했다. 공터에서 약 2000원을 주고 10발 정도 쏘았다. 그 후 청년은 나를 무기공장으로 데려가 소련제 칼라슈니코프, 박격포 등을 보여주다가 볼펜 총을 호신용으로 사라고 자꾸 권했다. 이들은 이런 무기를 만들어 무자헤딘(성전 전사)들에게 파는 것이다.

주변에는 마리화나나 해시시 같은 마약을 만드는 집들도 있었다. 세숫대야만큼 커다란 해시시를 들고 사라는 통에 난감했다.

이 마을은 파키스탄 경찰도 건드리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이라 했다. 내 말을 듣고 이곳에 가려다 잘못해서 ‘바라’라는 곳을 갔다온 후배가 있는데 죽을 뻔했다고 한다. 그곳은 더 험악한 곳이고 웬만한 외국인은 납치당하는지라 파키스탄 사람들도 가지 못하는 곳이니, 다라와 바라를 잘 구별해야 한다.

■여행정보

카이베르 패스는 여러 명이 팀을 만들어 차를 대절해 가는 것이 편리하다. 다라는 개인적으로 갈 수도 있고 투어에 동참할 수도 있다. 아프간 난민의 부슈카시를 보려면 오토릭샤를 타고 펠다우스라는 곳으로 간 뒤 그 근방에서 호나산 캠프로 가는 스즈키(삼륜차)를 타면 된다.

by 100명 2007. 4. 13. 12:45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48>인도 간다라의 스와트 계곡
[세계일보 2005-11-17 22:12]

간다라 지방의 중심지는 탁실라(탁샤실라)와 스와트 계곡이다. 인도에서 북상한 불교는 탁실라를 거쳐 스와트 계곡에서 꽃을 피웠다. 스와트 계곡까지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밤에 미니버스를 타고 달리는데, 컴컴한 어둠 속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절벽 위를 달리고 있었다.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계곡 밑의 노란 불빛들이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 같았다. 아차 하면 황천길인데, 버스가 커브를 돌 때마다 바퀴와 절벽 사이의 폭이 한 뼘 정도밖에 안 되어서 간이 콩알만 해졌다.

스와트 계곡의 중심 도시는 유적지가 많이 모여 있는 밍고라(Mingora)와 행정관청이 있는 사이두 샤리프(Saidu Sharif)다. 밍고라는 밝고 번화한 소도시로 파키스탄인들에게는 신혼여행지로도 잘 알려져 있고, 사이두 사리프는 그곳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그리고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들판이 펼쳐지고 산들이 솟구쳤다. 이런 풍경 속에서 그 옛날 불교문화가 크게 번성했던 것이다.

서기 7세기경 스와트 계곡의 불교문화가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 이곳을 방문한 당승 현장은 약 1400개의 불교 사원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니 이 당시 스와트 계곡은 염불 외는 소리와 승려들의 수행 열기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 후 힌두교 세력에 밀리다가 10세기경에 들이닥친 이슬람교에 의해 초토화되었고, 불교 유물은 박물관에 남아 있다.

◇부트카라 지방의 평화로운 풍경

박물관에 들어서니 길이 93㎝, 너비 76㎝의 까만 돌인 스와트의 불족석(佛足石)이 보였다. 전설에 따르면 스와트 강에는 ‘고파’라는 몹쓸 용이 살았는데, 해마다 홍수를 일으켜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당시 이 지방을 다스리던 왕 아사나진은 부처의 신통력을 빌려 이 악룡을 퇴치하고자 부처를 초빙했고, 부처가 이 악룡을 퇴치한 후 남긴 것이 바로 불족석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우상숭배라 하여 부처 상을 만들지 못해 상징적으로 보리수나 연꽃, 수레 바퀴, 불족석 등을 만들었는데, 이 불족석은 믿음에 따라 길게도 보이고 짧게도 보인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여러 종류의 반지, 상아로 만든 목걸이와 함께 바가지, 옹기, 절구 모양의 오일램프, 촛대 등 다양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부처의 사리를 날랐다는 쌍혹낙타상을 비롯해 부처의 생애에 관련된 수많은 부조와 조각들이 보였는데, 특히 불상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콧수염이 난 불상, 곱슬머리의 불상 등 매우 다양한 모습 속에 어떤 것은 그리스의 철학자 같은 느낌도 들었다.

석가모니의 실제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흔히 인도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카필라국의 석가족으로 현재 네팔 지방의 룸비니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부처는 인도인이 아니라 네팔인을 닮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쨌든 사람들은 부처의 얼굴을 새기면서 사실은 자신의 얼굴을 새겼던 것이다.

◇부트카라의 아이들

박물관의 유물들은 부트카라(Butkara)에서 출토된 것이 많다. 부트카라는 밍고라와 사이두 샤리프 사이에 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인 마을로 박물관 근처의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나왔다. 스와트의 옛 이름은 우디아나, 즉 ‘아름다운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정원’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 옛 이름에 걸맞게 스와트 계곡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멀리 하얀 잔설이 덮인 산들이 보였고 밭에는 파릇파릇한 배추들도 보였다. 길가의 노란 가로수 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시냇물과 돌담장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불교 흔적은 부트카라를 관통하는 대로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아이들의 안내를 받아 낮은 언덕을 넘어 들어가 보니 커다란 사원의 터전이 나왔고, 그곳에 흙으로 만든 스투파(Stupa)들의 흔적이 보였다. 스투파는 불탑의 원형으로, 원래는 봉긋한 봉분 모양의 인도 화장묘 양식이었으나 석가모니 입적 후 불사리를 봉안하면서 예배의 대상이 되어 여러 가지 형태의 탑으로 발전하였다. 동남아시아로 전해지며 하늘을 향해 치솟은 파고다로 변했고, 중국으로 와서는 목탑 석탑의 형태로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부트카라에 남아 있는 스투파는 원형의 모습에 가까웠다.

◇스투파 유적

그 외에도 스와트 계곡에는 우데그람(Udegram, 옛이름 오라·Ora) 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현지인들이 전투를 벌였으며, 한때 이곳을 다스렸던 힌두교 왕의 성채도 산 정상에 남아 있었다.

고대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흠뻑 맛볼 수 있고, 아름다운 전원풍경과 사람들의 따스한 인정을 느낄 수 있는 간다라 지방은 언제나 다시 가보고 싶은 매력적인 곳이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저녁 식사를 하고 나니 밍고라 거리에는 이미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는데 손수레에 커다란 솥을 올려놓고 죽을 파는 사내가 있었다. 뭐냐고 물어보니 사내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다만 자기 손으로 머리를 가리키고 팔을 들어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추측건대 머리가 좋아지고 힘이 세진다는 소리 같았다. 한 그릇 먹어보니 팥죽 맛이었다. 가격은 1루피(약 17원)였다. 주인 사내는 한 그릇 더하지 않겠느냐는 듯 죽을 더 퍼주려고 했다. 그만 먹겠다고 한 후 1루피를 주니 사내는 받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프레센트(선물), 프레센트…”

순간 당혹스러웠다. 이것을 팔아 얼마나 번다고, 나에게 돈을 안 받는단 말인가. 손에 돈을 쥐어주려 했지만 한사코 그는 받지 않았다. 옆에서는 아들로 보이는 열살 남짓 해보이는 비쩍 마른 아이가 애를 쓰며 아버지를 거들고 있었다. 여행길에서 늘 나에게 힘이 된 것은 바로 이런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이 베푸는 소박한 친절과 호의였다.

■여행정보

스와트 계곡에는 1000, 2000원 남짓 하는 배낭족 숙소부터 최고급 호텔까지 다양하다. 관광객이 넘쳐 숙소가 모자랄 경우는 이곳에서 약 50㎞ 떨어진 자연이 매우 아름다운 작은 마을 마디안으로 가면 된다. 이곳에는 저렴하고 쾌적한 숙소가 많다.

페샤와르에서 밍고라까지는 미니버스로 세 시간 반 정도 걸리고, 밍고라에서 계속 한 시간 반 정도 더 가면 마디안이 나온다.

◇간다라 지방의 민속의상(왼쪽), 밍고라 박물관의 간다라 불상.

by 100명 2007. 4. 13. 1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