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럭셔리 세단의 지존
- 뉴 롤스로이스 팬텀 (New Rolls-Royce Phantom)

BMW 인수후 첫 야심작, 롤스로이스 정신계승
최고속도 240km, 453마력, 33만 달러짜리



전통적인 부의 상징 럭셔리카를 생산하는 롤스로이스사는 ‘뉴 롤스로이스 팬텀’이라는 슈퍼프리미엄 모델을 출시함으로서 본격적인 럭셔리카 전쟁에서 선점하고 있다.

팬텀은 롤스로이스의 상징인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라디에이터 그릴을 그대로 살렸으며, 그 위에서 사뿐히 비상하려는 듯 움추린 요정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의 조화는 럭셔리의 대명사로 불린다. 차량 전장 크기는 경쟁모델인 마이바흐 57과 62의 중간 정도로 대시보드를 마호가니와 호두나무, 단풍나무, 오크 등의 원목으로 장식해 실내 분위기가 다른 차종에 비해 훨씬 고급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1998년 BMW 그룹이 롤스로이스를 인수하면서 뉴 롤스로이스 팬텀을 개발하는 ‘프로젝트 롤스로이스’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팬텀 개발과정에서 ‘BMW의 모습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주위의 우려가 있었지만 그것이 기우였음을 외치듯이 BMW의 부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디자인 또한 BMW의 디자인 라인에 단 1cm조차 접근하지 않아 영국 귀족 DNA의 아이덴티티가 한치의 손상없이 계승되었다.

귀족의 차로 불리 우며, 그 가치에 어울리는 디자인과 최고의 공간을 제공하는 롤스로이스 팬텀은 내구성, 신뢰성, 속도, 방음, 안락함의 장점을 모두 갖췄고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구조의 최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동급의 스틸 구조보다 가벼우면서도 견고하게 제작되어 핸들링 감각과 승차감이 한층 업그레이드 된 것이 장점이다.

편안해진 컨트롤러로 조정장치를 손쉽게 작동 할 수 있는 롤스로이스 팬텀은 V12 6.75L 엔진을 장착, 강력한 파워와 토크를 제공하며 도심 주행 시 4.06km/L로 연비는 높은 편이다.

453마력의 최고출력과 함께 720Nm/3500rpm 최대토크를 발휘하는 팬텀은 최고속도 240km를 달리며 특히, 최대토크의 75퍼센트가 불과 1000 rpm에서 가능하다.

거대한 외관과는 달리 유명 스포츠카 보다 뛰어난 민첩함과 성능을 보여 160km의 고속주행시에도 팬텀은 그 힘의 50%는 본네트 밑에 감춘채 유유히 흘러간다.

팬텀만이 채택하고 있는 독특한 ‘리어 코치 도어’(rear coach doors) 는 턱이 없어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승 . 하차가 가능하다.

팬텀의 보닛에 달린 대표적인 앰블럼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Spirit of Ecstasy)는 스위치로 작동되어 도난방지용으로 앰블럼이 엘리베이터식으로 차체로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롤스로이스 팬텀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세계 최초의 PAX 런 플랫 타이어는 타이어가 펑크 난 상태에서도 80km/h의 속력으로 160km 이상 안전하게 주행 할 수 있다.

'이안 카메론’의 지휘 하에 디자인 된 뉴 롤스로이스 팬텀은 과거 롤스로이스 대표 모델들의 전통과 새로운 디자인 미학을 접목시켜 탄생되었다.

긴 보닛과 짧은 프론트 오버행,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긴 리어 오버행으로 웅장한 풍채를 자아내며 무엇보다도 롤스로이스의 정확한 비율에 의한 높이, 폭, 휠베이스, 그리고 전체 길이 등이 모두 정확한 비율로 이루어지고 있어 중후한 분위기와 함께 대형 세단임에도 불구하고 균형잡힌 몸매를 유지한다.

최적의 중량 분산을 위해서 엔진의 앞쪽에 위치한 프론트 액슬과 함께 긴 휠베이스와 긴 보닛으로 인해 프론트 오버행은 짧아졌으며 전형적인 라디에이터 그릴 주변은 위로 치솟는 듯한 모양을 했다.

루프라인은 뒤쪽으로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며 내려가 전형적인 라이징 실(rising sill)과 어우러지며 멋진 조화를 이룬다. 휠베이스 3.570m, 차체의 총 길이 5.834m, 높이 1.632m, 폭 1.990m에 달하며 460L 대용량의 트렁크는 4개의 골프백을 싣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다.

V12엔진의 롤스로이스 팬텀은 정지상태에서 100km로 가속하는데 5.9초가 소요되며 출발 4초 만에 33m를 달린다. 더블 위시본 프론트에 멀티링크 리어 서스펜션 결합은 뛰어난 승차감을 유지하면서도 최고의 성능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랙 앤 피니언’(rack and pinion) 방식의 스티어링은 드라이브의 묘미를 더해주며 선대가 만들어 낸 '유령'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빠른 주행 속에서도 고요함을 자랑하는 팬텀은 거의 적막에 가까운 배기음 만을 자아낸다.

차량 한대 제작에 260시간의 사람 손을 거치는 뉴 롤스로이스 팬텀의 장인정신과 최고급 자재의 진수를 볼 수 있는 내부는 18마리의 소가죽이 사용되며 부드러운 천연가죽과 세련된 캐비닛, 고급 원목으로 잘 어우러져 있어 최고의 성능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과거 최고의 모습과 현재 최고의 디자인, 엔지니어링, 첨단 기술을 접목시켜 고귀함, 위엄 등 불변의 가치를 담아 새로운 롤스로이스를 제시한 롤스로이스 팬텀은 단연 이시대 최고의 프리미엄 럭셔리 세단이다. 가격은 33만 달러선.

by 100명 2007. 5. 22. 08:22
일본 소규모 메이커가 만든 수퍼카 - 미쓰오카 오로치( Mitsuoka Orochi)

일본 소규모 자동차 회사 미쓰오카의 자부심
뱀형상의 컨셉트카로 아직 제원과 가격 미정



자동차 산업이 시작되던 20세기 초에는 많은 사람들이 손수 차를 만들었다. 당시 자동차 공업이 앞선 영국의 경우 제조업체가 수백군데였다. 부품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자신이 만든 차를 카센터에서 등록 해 주었기 때문에 차를 만들기에는 아주 좋은 여건이었다. 자동차 문화를 영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일본에서 소량 제조업체나 카트카 제작업체가 생겨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랫동안 코치빌더(Coach Builder)로 활약한 미쓰오카도 바로 그런 경우다.

■ 지난해 도쿄 모터쇼에 수퍼카로 첫선

94년에 선보인 ‘제로원’이 96년 운수성 인증을 받으면서 일본의 열번째 자동차 메이커로 등록된 미쓰오카는 닛산 마치를 재규어처럼 개조한 ‘뷰트’와 중형차 ‘가류’ 등을 만들고 있다. 미쓰오카는 현재 자본금 5억 4천만엔에 한해 매출 한 해 매출 300억엔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미국에도 지사를 두고 있으며 전체 직원은 419명이다. 부문별 매출은 중고차 사업과 수입차 부문이 70%로 가장 크고, 자동차 제조 7%, 자동차 딜러가 23%를 차지하고 있다. 딜러부문은 폴크스바겐과 아우디. 글라이슬러. 피아트 . 알파로메오 등의 판매를 맡고 있다.

미쓰오카는 지난해 도쿄모터쇼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후 목표를 정했다. 그것은 남이 만들지 않는 독창적인 수퍼카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 참가한 도쿄모터쇼에서 컨셉트카 ‘오로치(大蛇, 큰뱀)’를 공개해 큰 주목을 끌었다. 컨셉트카 오로치의 ‘W’모양 자체는 영혼을 흔드는 정열적인 수퍼카를 만들려는 메이커의 노력을 잘 담고 있다.

오로치는 일본 설화집 ‘코지키(古事記)’에 등장하는 ‘야마타노오로치’라는 전설속의 뱀 이름에서 따왔다. 아이디어 스케치는 먹이를 노리는 뱀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길이(4,580mm)에 비해 큰 너비(2,050mm)는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람보르기니 디아블로의 차체(4,430 X 2,040 X1,115mm)와 비슷한 것으로, 미쓰오카가 수퍼카를 만들면서 디아블로를 참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수퍼카 위용의 커다란 바디는 신화 속 오로치를 모티브로 기괴함과 공포감 . 신비감을 불어넣은 근육질로 다듬었다. 낮은 노즈의 앞 모습과 앞 펜더로부터 뒷 펜더까지 이어지는 옆모습은 어떤 스포츠카 보다도 공격적이다. 모터쇼에 공개된 오로치는 아쉽게도 달릴 수 없는 목업(Mock-up) 모델이다.

■ 레플리카(Reply Car)생산하다 독자모델 개발해

미쓰오카(光岡自動車)는 68년 2월 도야마에 설립되어 중고차 판매와 자동차 수리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79년 10월에는 카센터 개념에서 본격적인 자동차 제조업체로 변신하기 위해 (주)미쓰오카자동차로 이름을 바꾸었다. 81년에는 개발팀을 만들었고 82년에는 보통면허로 운전할 수 있는 ‘부부50’을 내놓았다. 이 차는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것으로 같은 해 501, 83년 502, 84년 503, 85년 504/505-C 등으로 이어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의 미쓰오카를 이룩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87년에는 부부 클래식 SSK를 200대 한정 판매했고 89년에는 부부 356 스피드스타를 내 놓았다. 90년에는 드디어 자체 개발한 ‘라세드’를 발표했는데 500대 한정 판매된 라세드는 불과 4일만에 매진되어 화제가 되었다.

91년에는 오리지널 카 ‘도우라’를, 93년에는 재규어 마크Ⅱ를 모방한 ‘뷰트’를 발표했다. 미쓰오카는 판매대수가 연간 1천대를 돌파하자 전국에 특약점을 냈다.

이때까지 미쓰오카는 레플리카 생산체제였는데 이것은 인정 중고차라는 제도로써 타 메이커의 메이커 인증 중고차 제도와 다르게 운영되었다. 즉 중고차를 검사 후 다시 신차 제조라인에서 신차제조에 버금가는 공정수준의 보수를 거친 후에 판매를 하는 미쯔오까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말한다. 대개 메이커 인증 중고차가 정비공장에서 부품교환 및 검사를 거친 후 재 판매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미쯔오까의 차종 중 ‘Makeup Viewt’라는 것이 있는데, 2003년 5월에 생산종료된 Viewt를, 다시 찾는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여 신차 제조라인에서 완벽히 재수리를 거친 후 판매하는 차종이다. 이것은 미쯔오까만의 시스템이다.

94년에는 승용차 메이커 승인 후 제1호차 ‘제로원’을 발표, 그 해에 99대를 생산했으며 이어서 ‘클래식 타입F’와 ‘레이’를 발표했다. 98년에 ‘시티커뮤터 MC-1’, 99년에 ‘마이크로카 MC-1T’와 신형 ‘레이’ . ‘가류’를 잇달아 발표했다. 2001년에 발표한 ‘뉴료가’는 500대 한정판매했는데 주문후 3개월이 지나서야 차를 받을 수 있었다. 2003년 ‘유가’와 ‘뉴라세드’를 발표했다.

생산량에서 대형 완성차 메이커를 따라갈 수 없는 미쓰오카는 오로치 개발을 통해 독창적인 이미지 구축에 힘을 얻게 되었다. 미쓰오카는 양산형 오로치를 통해 오랜 꿈이던 수퍼카에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는데 보다 완벽한 성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 출시될 경우 성능과 옵션에 따라 10~40만 불의 다양한 가격을 형성할 것이라 한다.

by 100명 2007. 5. 22. 08:21
21세기의 아메리칸 아이콘 - 닷지 바이퍼 (Dodge Viper SRT-10)

오리지널 닷지 바이퍼 RT-10의 3세대 모델
8,300cc, 500마력의 양산차로 최고 12만달러



지난 8월 19일 닷지 바이퍼의 3세대 모델인 SRT-10이 데뷔했다. 양산 스포츠카 최초로 출력 500마력의 파워 유닛의 괴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형 6단 MT가 장착되었다. 디자인을 오리지널 모델에 가깝게 만들면서 컨버터블 보디로 바꾸었다. 휠 베이스는 660mm가 늘어났지만, 보디와 섀시에 쓰이는 많은 부품들을 경량화시키면서 오히려 무게도 줄였다. 바이퍼 마니아들의 요구를 수용해 편의장비도 크게 보강되었다.

바이퍼는 지난 1989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전세계 많은 자동차 마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또한 FIA GT2와 르망 클래스 챔피언전을 3차례나 석권하는등 퍼포먼스에서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모델이다. 특히 이번에 등장한 3세대 바이퍼 SRT-10은 전형적인 미국차의 틀에서 벗어나 한차원 향상된 성능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어떤 차보다 힘이 강하고 조작이 쉽다. 그 모체인 RT-10 로드스터와 GTS 쿠페에 비해 휠 베이스가 660mm 가량 늘어났으며, 보디와 섀시의 50%가 넘는 부품들이 교체되었다. 이는 단순히 메이커의 의도이기 전에 바이퍼 전담팀(Team Viper)의 다년간 주행 데이터와 닷지에서 가장 유능한 디자인팀, 그리고 닷지를 사랑하는 열광적인 마니아들의 노력이합쳐진 결과다.

■ 컨버터블에 오리지널 스타일로 복귀

기존의 바이퍼 마니아들은 출력 향상과 높은 제동력, 차체의 경량화, 진보적인 기술의 컨버터블, 최상의 인테리어와 안락함을 요구했다. 인테리어 부문에서는 디지털 인스트루먼트(계기판), 정속주행장치, 컵 홀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지만, 컵 홀더와 정속주행장치는 만들지 않았다.

닷지사의 한 관계자는 “바이퍼는 2인승 FR방식에 최소 450마력을 내는 차다. 트랜스미션을 수동 6단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이유다. 바이퍼는 그저 값비싸 보이는 보트 같은 스포츠카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보였다. 닷지사에서는 5가지의 새로운 제안을 발표했는데 오리지널 닷지 바이퍼 RT-10 로드스터를 컨버터블 타입으로 교체, 기존의 과격한 디자인을 오리지널 모델로 복귀, 모든 성능을 개선하고 밸런스를 최적화, 아메리칸 스포츠카의 혈통 보전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같은 요구가 적용된 차가 바로 2003년형 Viper SRT-10 컨버터블이다.

이에 따라 STR-10은 많은 변화가 따랐다. 섀시, 브레이크, 서스펜션, 타이어, 엔진, 트랜스미션, 운전석, 전자부품들과 12개의 보디패널 등 무려 100개가 넘는 부품들이 재디자인되었다. 4휠 모두 독립식 서스펜션을 갖추고 있으며, 높은 그립과 제동성능을 지닌 타이어와 휠을 장착했다. 또한 탑승자는 기능성이 향상된 인스트루먼트 패널을 경험할 수 있는데, 타코미터와 220마일까지 표시되는 스피드미터가 중앙에 자리잡고, 전통적인 시동 스위치 또한 잊지 않았다.

SRT-10의 새로운 알루미늄 8.3리터 엔진은 최고출력 500마력에 최대토크는 1500∼5600rpm에서 72.5kg·m로 향상되었다. 이 차는 양산차중 유일하게 500-500-500 클럽(출력 500마력, 토크 525lb-ft, 배기량 505cubic-inch)에 가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이퍼의 V10 엔진은 SPM(Semi-Permanent Mold) 356 T6 알루미늄으로 재디자인되었고, 흡·배기 포트와 연소실의 냉각 성능도 개선했다. 또한 로워 프로파일 다이캐스트 마그네슘 실린더 헤드 커버도 새롭게 적용되었다. 그밖에도 알루미늄 인테이크 매니폴드와 트윈 스로틀 보디, IAFM(Integrated Air and Fuel Module)도 적용했다. T56 6단 수동 변속기는 몇몇 경쟁차에 사용되어 그 품질과 성능이 인정되어 있으며, 풀 싱크로 타입으로 1단에서 4단으로 스킵 시프트(Skip Shift)도 가능하다. 더욱이 향상된 출력에 맞춰 트랜스미션의 토크 대응능력을 바이퍼 GTS 레이스카 수준으로 높인 점도 스포츠카 마니아들이 반길 일이다.

■ 체중은 줄이고, 공력 특성은 향상

무게는 출력 상승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이다. 신형은 기존 모델에 비해 약 220kg이나 줄었다. 대시 앞부분의 재질을 스틸에서 원피스 마그네슘과 다중 용접 기술로 74.8kg이나 감량했다. 또 원피스 시트로 몰딩된 혼합물과 RIM(Resin Injection Molded) 공법을 후드와 펜더에 적용해 경량화를 꾀했다.

익스테리어 역시 에어로 다이내믹 디자인의 채용과 앞뒤 다운포스의 균형을 테스트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 견인력도 예전 모델 대비 7%나 상승되었다.

3세대 바이퍼는 오리지널 모델의 이미지를 현대적인 메커니즘과 감각으로 계승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자동차 메이커가 오너들의 뜻을 반영해 바이퍼를 진정한 ‘바이퍼 다운’ 모습으로 만들려 했다는 점이 높이 살만 하다.

0→100km는 3.7초. 양산차에 걸맞게 가격대는 8만달러부터 12만달러까지 옵션에 따라 달라진다.

by 100명 2007. 5. 22. 08:21
세계에서 가장 빠른 4도어
- 벤츠 브라부스 로켓( Benzs Buravus Rocket)

730마력의 수퍼세단, 0→100km 4초, 시속 362km/h
벤츠의 튜닝전문회사 브라부스의 야심작, 12만 달러



더 빠른 벤츠는 없다.

벤츠 전문 튜너(Tunner, 보통 양산 차량을 엔진성능을 강화하거나 디자인을 바꿈으로 성능을 개선하는 전문가) 브라부스(Brabus & TechArt , 고성능 벤츠와 포르쉐 제작 메이커)는 스마트부터 벤츠 SLR까지 벤츠의 모든 라인업을 튜닝하고, 최근에는 계열사 크라이슬러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벤츠 튜닝으로 양대산맥을 이루던 AMG가 벤츠에 흡수된 이후 브라부스는 세계 제일의 벤츠 튜너로 올라섰다. 브라부스의 수출 책임자 마르쿠스 브래터(Markus Brater)는 “브라부스의 가장 큰 특징은 양복을 맞추듯 커스터마이즈된 벤츠를 타게한다는 것이다. 가죽시트 색깔부터 휠까지 직접 고를 수 있고, 운전 스타일에 맞는 퍼포먼스 세팅도 얼마든지 기능하다”고 자랑했다.

350여 명의 전문가가 있는 브라부스는 메르세데스 벤츠가 판매되는 거의 모든 나라에 딜러를 두고 있다.

가장 빠른 럭셔리 세단 브라부스 로켓 (Brabus Rocket)

2006년 제네바 오토살롱에 출품된 브라부스 로켓(Rocket)은 휠부터 그릴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은 살벌한 보디에 붙은 작은 ‘V12’ 배지가 인상적이었다. 보닛 안에는 V자 띠로 빨간색 포인트를 준 브라부스 V12 S 트윈터보 엔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엔진은 이전 브라부스 E클래스(W221)에도 얹어 화제를 모았던 12기통으로, 6.3ℓ 배기량에 두 개의 터보를 달고, 흡배기와 캠샤프트를 손봐 최고출력 730마력, 2천100rpm에서 무려 134.6kg·m의 최대토크를 뽑아낸다. 엄청난 힘은 브라부스에서 개량한 5단 AT를 통해 뒷바퀴에 전달된다.

안전하고 빠른 달리기를 위해 로켓은 피렐리와 요코하마 타이어를 신겼다. 브레이크는 가공할만한 성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륜에 12피스톤 알루미늄 캘리퍼와 375 x 36 mm 대구경 디스크를 장착했고 후륜에는 6피스톤 캘리퍼와 355 x 28 mm 디스크를 장착하는 등 제동 성능 업그레이드에도 만전을 기했다.

초고속으로 달리는 로켓을 위해 브라부스는 풍동 테스트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격적인 디자인의 에어댐을 제작, 차체에 힘을 실었다.

0→시속 100km 가속 4.0초, 0→시속 200km 가속 10.5초, 0→시속 300km 가속 29.5초의 고성능을 자랑한다.최고 시속362.4km/h. 독일 튜너 브라부스가 이태리 나르도 서킷에서 세운 기록이다. 메르세데스 벤츠 CLS를 베이스로 소량 제작되는 브라부스 로켓(ROCKET)은 브라부스 E V12 Biturbo가 갖고 있던 350.2 km/h를 가뿐히 뛰어 넘었다.

벤츠의 트윈 터보 V12엔진은 흡/배기 매니폴드를 개선해 저항을 줄인 것은 기본이고 브라부스에 의해 6,233cc까지 배기량을 확대했으며 크랭크 샤프트, 실린더, 피스톤 등에 걸쳐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무시무시할 만큼 과격하고 빠른 SUV R500

브라부스는 또 세단형 로켓을 브라부스 튜닝 프로그램을 통해 R클래스 스포츠 투어러( SUV)로 탈바꿈시켰다.

이번에 튜닝된 R500은 브라부스 6.1S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445마력을 발휘한다. 여기에 스포티하고 엘레강스한 모양일스타일의 에어로 다이내믹 부품과 함께 22인치의 경량 알로이 휠, 조율이 가능한 서스펜션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등이 적용됐다. 8기통 R500은 브라부스에 의해 4개의 새로운 튜닝 스테이지를 갖추고 있다. 그 중 가장 높은 레벨이 6.1S를 이용한 모델로, 엔진에 스페셜 캠샤프트는 물론 실린더 헤드 부분을 바꿨다. 여기에다 새롭게 구성된 R클래스 모든 모델은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의 배기 시스템과 메탈 촉매가 채용됐다. 이를 통해 최고출력은 445마력/6,000rpm, 최대토크는 635Nm/4,500rpm으로 향상됐고 0→100km/h 가속시간은 5.9초, 최고속도는 265km/h로 업그레이드됐다.

한편, 브라부스는 R클래스의 또 다른 모델들도 튜닝했다. 브라부스 4.0 엔진으로 세팅된 R350은 최고출력 332마력, 최대토크 420Nm의 힘을 가진다. 또 R320 CDI는 브라부스 파워엑스트라 D6(III) 제품의 조율을 통해 최고출력이 224마력에서 272마력으로 높아졌으며 토크는 510Nm에서 590Nm으로 상승했다. 커먼레일 터보 디젤엔진을 얹은 R320 CDI는 0→100km/h 가속성능이 8.2초로 빨라졌으며, 최고속도도 227km/h까지 가능해졌다.

가격은 로켓이 옵션 다 포함 약 12만불.

by 100명 2007. 5. 22. 08:20
날고싶은 자동차 - 마세라티 버드케이지 75th( Maserati Birdcage 75th)

피닌파리나 75주년 기념 700마력 컨셉트카
아름다운 바디라인 최첨단 자동차 공학의 결정체



수퍼카 시장에서의 마세라티의 저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는 디자인을 구사하여 차세대 카 디자인을 리드해 나간다는 것이다. 오늘 소개되는 마세라티 버드케이지도 같은 맥락이다. (M12 는 6월 3일자 참조)

■ 마세라티 TP63의 명성 물려받아

마세라티는 시기마다 획기적인 최첨단 기술력을 보이면서 자동차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해 온 굴지의 수퍼카 메이커다.

1929년 당시, 16기통 엔진에 최고 속도 246km/h의 성능을 지닌 V4는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마세라티는 이 속도로 당시 세계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30년대에 등장한 전륜 구동 방식의 1인용 자동차와 유압식 브레이크 시스템도 혁신적인 기술로 평가받았다.

1959년 마세라티는 혁신적인 섀시 구조의 Tipo 60을 발표했다. Tipo 60에 사용된 신형 튜블러 섀시는 많은 수의 작은 튜브를 함께 용접해 만든 것이었다. 이전에 사용되던 튜블러 섀시에서 완전히 변모된 형태로 개발된 신형 튜블러 섀시는 모노코크 섀시보다 견고하면서도 무게는 가벼웠다. 버드케이지(Birdcage)란 닉네임으로 더 유명한 Tipo 60은 1960년대 초 미국 및 유럽의 자동차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F1에서 미드쉽 엔진의 시대를 열었던 차도 바로 마세라티이다. 원래 미드쉽 엔진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이탈리아의 한 자동차업자를 통해 처음 시도되었으나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해 역사 속에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마세라티는 유압식 펌프로 작동하는 미드쉽 엔진을 그랑프리에 선보여 놀라운 성능을 보여주었다. 마세라티 이후 다른 제조 회사들도 앞다투어 미드쉽 엔진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마세라티는 현재에도 깜비오꼬르사 패들식 기어변속장치, 트랜스액슬 트랜스미션 시스템, 레이싱에 가장 최적화된 8기통 엔진 등 기술 혁신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마세라티 버드케이지 75th는 피닌파리나 디자인회사의 손길을 거친 디자인 스터디 모델이다. 에어로 다이나믹 보디에 윗부분을 덮고 잇는 투명창이 독특하고 V12 6.0리터, 700마력 엔진에서 레이싱카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피닌파리나의 첨단 디자인 능력이 집약된 버드케이지 75th는 피닌파리나의 축적된 기술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마세라티의 미래를 보여준다.

피닌파리나의 명차 콰트로포르테의 성공을 자축하는 무대가 된 2005년 제네바 모터쇼의 마세라티 부스에는 또다른 주인공이 쇼장을 빛냈다, 이태리차 디자인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던 시절인 1950~60년대의 화려한 스타일을 물려받은 주인공은 버드케이지 75th, 이 차는 마세라티 M12를 베이스로 만든 디자인 스터디 모델이다. 마세라티의 전통적인 디자인의 잠재성과 앞으로의 마세라티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스포티한 우아함에 최신의 혁신기술을 담아온 마세라티의 전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피닌파리나와 마세라티, 그리고 모토로라의 3 사가 공동 개발한 이 컨셉 카는 지난 동경모터쇼 기간중 단 몇일만 전시되어 더욱 관심을 끌었던 모델이다.

■ 마세라티, 피닌파리나, 모토롤라 3사의 합작

버드케이지라는 이름은 1950~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세라티는 TP63을 레이스에 투입했다. TP63은 삼각형 튜브구조의 새시와 투명하게 비치는 커다란 윈드실드가 새의 둥지를 닮았다해서 ‘버드케이지’란 별명을 얻었다. 독특한 스타일과 더불어 V12, 320마력의 엔진을 얹고 르망24시간과 아메리칸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이름을 날렸다. 버드케이지 75th는 피닌파리나 창립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 개발 컨셉트는 독창적인 디자인, 스포츠 DNA, 기술적인 혁신을 담는 것.

마세라티 M12의 도로용 버전을 베이스로 카본파이버 새시와 두부분으로 나누어진 물방울 형상의 바디로 구성되어 있다. 윗부분은 오리지널 버드케이지의 것을 본떠서 투명하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서스펜션과 인테리어, V12엔진의 카본파이버 트럼펫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랫부분은 에어로다이내믹 스커트 역할을 해낸다.

크기는 전장×전폭×전고가 4,656×2,020×1,090mm.

모토롤라와의 협력은 어디에서나 대화가 가능한 Seamless Mobility라고 하는 컨셉트를 기조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툴이 탑재되어 있다. 각종 주행 정보를 비롯한 인디케이터류는 운전석 시트 앞쪽에 있는 패널에 표시된다. 사람과 기계를 이어주는 인터페이스의 감각적인 터치를 느끼게 해주는 디자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베르토네의 카루셀과 더불어 역시 이탈리아 카로체리아(원래 이탈리아 마차제작소를 뜻하는 자동차 수공 제작소)들의 미래를 향한 노력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결치 듯 아름다운 바디 라인과 간결한 선의 디자인은 새로운 수퍼카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만 하다. 실제로 양산이 될지, 가격이 얼마인지는 미지수이지만 너무나 기대되는 수퍼카다.
(컨셉트 카이므로 0-100km 수치없음)

by 100명 2007. 5. 22. 08:20
페라리 엔초를 뛰어넘은 수퍼카 - 페라리 FXX(Ferrari FXX)

시속 350km, ‘엔쵸 페라리’ 후속 모델, 29대 생산
0→100km 3.5초, 12기통 800마력, $20만 플러스



20만 달러를 주고서도 일반도로에서 달릴 수 없는 차라면 누가 살까? 심지어 백미러 조차 없는 차라면... 그러나 그런 차가 있으니 ‘엔쵸 페라리(지난 4월 29일 소개)’의 후속 모델로 태어난 ‘페라리 FXX’이다.

세계 수퍼카 메이커의 정상 페라리가 극비로 개발한 수퍼카 FXX는 총생산대수 29대, 대당 가격 20만 달러 플러스, 나오기도 전에 모두 팔린 인기 모델. 그러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로드카가 아니다. 페라리가 개최하는 트랙 데이에 서킷에서 몰아볼 수 있는 이상한 수퍼카. 이 생뚱맞은 수퍼수퍼카는 왜 태어났을까?

수퍼카 명문 페라리가 엔초를 바탕으로 새 수퍼카를 개발했다. 29대 모두 계약을 끝냈고, 그 중 일부는 이미 오너를 찾아갔다. 그런 뒤에야 이태리 자동차 잡지 <아우토 스프린트>(Auto Sprint)가 이 사실을 폭로(?)했다.

■ 극비리에 태어난 수퍼, 수퍼카

새 수퍼카의 이름은 FXX. 오직 트랙에서만 달리고, 로드카로 개조할 수 없다. 겉모습은 엔초와 흡사하지만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뒤 펜더 뒤쪽에 달린 2개로 갈라진 리어 에어로포일 또는 윙(국제자동차연맹(FIA)이 2008년 F1 경주차에 사용하자고 제안한 것과 비슷하다)과 리어 데크에 달린 작은 스포일러가 얼른 눈에 띈다.

이것과 함께 다른 첨단장비가 FXX의 파워를 엔초보다 40%나 키웠다.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백미러를 없앴다. 대신 루프에 달아놓은 카메라가 운전석 모니터에 뒤쪽을 보여준다. 엔초의 장비 가운데 트랙 달리기에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없앴다. 따라서 실내는 르망 24시 프로토타입 경주차처럼 간소하고 기능적이다. 거기에다 완벽한 롤케이지를 더했다.

아울러 도어 윈도는 고정시켰다. 다만 환기를 위해 슬라이딩 패널로 대신했다. FXX 개발의 핵심 요소인 대담한 감량을 위해 취한 조치였다. 그 과정에서 줄어든 무게는 200kg이 넘는다. 19인치 휠에는 거대한 398×36mm 세라믹 디스크로 브렘보 브레이크의 성능을 높였다. 엔진 출력은 엔초보다 140마력 올라갔다. 페라리는 무게가 1,155kg이라고 알려주었다.

■ 트랙에서만 달리는 20만 달러짜리 괴물

FXX의 엔진은 뱅크각 65° V12 4오버헤드캠 6,262cc. 가변밸브 타이밍에 가변 지오메트리 흡기 시스템이 800마력을 뿜어낸다. 0~100km는 3.5초. 멀티디스크 클러치와 6단 근접비 기어박스가 뒷바퀴를 굴린다. 엔초와 마찬가지로 스티어링 휠 뒤에 있는 손가락끝 패들로 변속한다. 변속 속도는 엔초보다 빠르다.

이 차는 아주 특별하고 희귀하다. 각 오너는 초청을 받고 페라리 본사가 있는 이태리 마라넬로에 가서 차를 인수한다. 그러나 로드카가 아니기 때문에 몰고 떠날 수는 없다. 그날 하루를 공장에서 보내며 페라리 기술진과 테스트 드라이버로부터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페라리의 피오라노 서킷에서 시승한다.

시즌 중 페라리는 오너가 차를 몰아볼 수 있는 ‘트랙 데이’를 여러 차례 마련한다. 유럽만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열어 오너가 차를 몰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 자리에는 페라리 관계자들과 테스트 드라이버가 참석한다.

■ 페라리 패밀리의 스피드 정상

피오라노 서킷에서 FXX의 최고 랩타임(Lap time: 한바퀴 도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1분 18초. 정말 놀라운 기록이다. 엔초보다 자그마치 7초나 빠르다. 360 챌린저 스트라달레보다는 8.5초, 탁월한 F430 쿠페보다 9초 앞선다. FXX는 2009년에 나올 로드카 엔초의 후계차 개발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소문에 의하면 이를 구입하지 못한 억만장자들 사이에 경쟁이 붙어 100만 달러 정도에 거래된다고 한다.

by 100명 2007. 5. 22. 08:19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105>인도 룸비니·쿠시나가르
'天上天下 唯我獨尊'
◇룸비니의 불교 사원터
기원전 6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특별한 시기였다. 페르시아 지방에서는 조로아스터가 나타나 세상은 선신과 악신의 투쟁터이며 최후 심판의 날이 온다는 사상을 전파해 후일 유대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인도에서는 부처가 탄생했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인이 되는 진리를 가르쳐 준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는 현재 네팔에 속해 있다. 인도의 북쪽 도시 고라크푸르를 지나 국경도시 소나울리에 도착하면 나무 막대기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놓은 국경 같지 않은 국경의 풍경을 보게 된다. 여기서 출입국 절차를 밟은 뒤 네팔로 넘어가 벌판을 20여㎞ 달리면 허물어진 불교 사원 터와 물이 고인 연못이 있는 룸비니가 나온다.

이곳이 부처 탄생지라는 증거는 바로 근처에 있는 아쇼카 석주다. 기원전 3세기, 불교를 크게 부흥시켰던 아쇼카 대왕은 불교 성지 곳곳에 석주를 세웠는데,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에 새겨진 글에는 “아쇼카 대왕은 이곳을 친히 참배했고 석주를 세웠으며, 룸비니 마을은 일반 세금을 면제해 주고 생산세도 8분의 1만 내게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이곳의 현재 모습은 5세기에 룸비니를 방문한 중국의 법현 스님이나 7세기에 방문한 현장 스님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룸비니는 부처의 탄생지이나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 밀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요즘 들어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많은 불교 순례자들은 허허벌판의 허물어진 불교 사원과 쓸쓸한 풍경을 보며 잠시 실망감에 젖기도 한다.

◇열반사원 안에 있는 부처의 열반상

이 사원의 벽을 자세히 보면 마야 부인은 보리수 가지를 잡고, 방금 태어난 싯다르타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부조를 찾을 수 있다. 샤카족이 세운 카필라 왕국의 왕비 마야 부인은 관습에 따라 해산하기 위해 친정집으로 향하다, 룸비니의 연못에서 목욕한 후 갑자기 산기를 느껴 아기를 낳게 된다.

부처의 탄생 설화에 따르면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아기 싯다르타는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걷고 오른손은 하늘,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늘과 땅에서 오로지 나만이 존귀하다)”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마야 부인은 싯다르타를 낳은 후 이레 만에 세상을 떴고, 어린 나이에 생로병사의 고뇌에 눈을 뜬 왕자는 결국 스물아홉 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왕궁을 떠나 출가한다. 왕자는 떠나고 카필라 왕국은 쇠퇴했으며, 부처 생전에 코살라 왕국의 침입을 받아 파괴된다. 샤카족은 멸망했고 부처의 일가 친척들은 다 불법에 귀의하여 대가 끊긴다. 이렇듯이 부처의 흔적은 육체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그 탄생지도 썰렁하기만 하다. 그러나 텅 빈 공간이기에 오히려 약 2600년 전의 풍경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마야부인이 목욕한 연못(왼쪽)◇부처를 화장한 곳에 만들어진 스투파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평생 가르침을 펴던 부처는 여든 살의 나이에 북쪽으로 길을 가다가 ‘춘다’의 집에서 받은 공양 때문에 병이 난다.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올린 음식 중에 ‘수카라맛다바’라는 음식이 문제였다. 이 음식 재료가 야생 돼지고기라는 말도 있고, 버섯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부처는 독성이 있고 상한 것으로 보이는 그 음식을 맛본 후 춘다에게 “이 음식을 나만 먹게 하고 남들에게는 주지 말며, 남은 것은 구덩이에 파묻으라”고 말한다. 부처는 이 음식 때문에 피가 섞인 설사를 하면서도 계속 길을 가다가 마침내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들게 된다.

경전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병들 것을 알면서도 춘다의 공양 음식을 먹었고, ‘열반에 들게 한 최후의 공양을 바친 공덕’을 얘기하며 오히려 괴로워하는 춘다를 위로했다고 한다.

◇아쇼카 석주

쿠시나가르는 불교 경전에 매우 조그만 마을로 묘사되어 있지만, 현재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제법 활기가 도는 소도시다. 이곳에는 열반 사원이 있고, 그 안에는 거대한 불교 열반상이 있다.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댄 채, 두발을 포개어 누워 있는 이 열반상은 기록에 따르면 원래 사원 안에 모셔져 있던 것인데, 약 1.5㎞ 떨어진 강바닥에서 근래에 발굴되었다. 심하게 파손된 이 불상을 미얀마 불교도들이 수리하고 도금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고 한다.

부처는 열반에 들기 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편다.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열반에 든 부처는 화장되었는데 쿠시나가르에는 부처를 화장한 곳에 만든 거대한 스투파, 즉 다비탑이 있다. 부처의 유해에서 나온 수많은 사리와 함께 불법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부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해탈의 기쁨을 누렸으나, 그 기쁨에 안주하지 않고 평생 길에서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펴다가 길에서 육신의 탈을 벗었다.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와 열반지 쿠시나가르는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가르침을 편 사르나스와 함께 불교 4대 성지로 수많은 불교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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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의 불교 사원 터에서 네팔 소년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몽골리언 계통으로 한국인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그들은 부처는 인도인이 아니라 자기들과 얼굴이 비슷한 몽골리언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같은 얘기는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이겠지만, 룸비니 마을에 사는 그들을 보며 약 2600년 전의 샤카족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대로 육신이 뭐 그리 중요하며, 진리 앞에서 어떤 종족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날 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요란한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자니 먼 옛날 마야 부인이 이 근방에서 목욕한 후 아기 싯다르타를 낳은 게 바로 엊그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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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크푸르에서 쿠시나가르까지는 거리가 150㎞로, 버스가 다닌다. 룸비니까지는 고라크푸르에서 버스로 국경도시 소나울리까지 간 뒤 네팔로 들어가 삼륜 오토릭샤를 타는 것이 편리하다. 고라크푸르에서 소나울리까지는 약 90㎞, 소나울리에서 룸비니까지는 약 22㎞다. 인도 대도시에서 고라크푸르까지 가는 기차는 많다.

by 100명 2007. 5. 22. 07:26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104> 인도 사르나스
[세계일보 2007-05-11 09:36]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서른다섯 살의 청년 싯다르타는 법열에 잠겨 49일을 보낸 후, 잠시 망설인다. 자신이 발견한 이 오묘한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인가, 말 것인가. 초기 경전에 따르면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생각했으나 결국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에게 설법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부다가야에서 같이 수행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을 찾아 그들이 머물던 므리가다바(녹야원·鹿野苑)로 간다. 그곳은 바라나시에서 약 10㎞ 떨어진 리시파타나(현재의 사르나스) 근처에 있었는데, 부다가야에서 약 240㎞ 떨어진 이곳까지 부처는 홀로 걸어서 왔다.

현재는 불교 유적지가 흩어진 이 일대를 모두 사르나스 유적지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언덕에 있는 큰 탑이다. 이 탑의 이름은 차우간디 스투파로, 부처가 다섯 명의 수행자들을 만났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후대에 세운 것이다. 한국 불교계에서는 영불탑(迎佛塔)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 수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부처가 오는 것을 보고 ‘타락한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왜 우리를 찾아오는가’라며 모른 체하기로 한다. 그들은 고행을 중단한 부처가 니란자나강에서 수자타라는 여인에게 유미죽을 얻어먹는 것을 보고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가 다가오자 자신들도 모르게 인사를 하며 ‘고오타마, 멀리서 오시느라고 고단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부처는 자신의 성을 ‘고오타마’가 아니라 ‘타타가타’로 부르라고 한다. 이는 여래(如來)라는 뜻으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한 뒤 다시 세상으로 와 설법하는 사람’이란 의미였다.

부처는 이곳에서 1㎞ 정도 더 들어간 숲에서 그들에게 고행과 쾌락의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中道)의 길을 갈 것이며, 그 길을 가는 방법으로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직업,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명상 등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친다. 이에 다섯 수행자들이 감명을 받고 최초로 부처의 제자가 된다.

◇부처와 설법을 듣는 다섯 제자의 조각.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아쇼카 대왕이 그 장소에 거대한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를 세웠지만,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유적지 부근에는 다섯 제자들이 부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조각이 남아 있는데, 경전에 따르면 이때 숲속의 사슴들이 떼를 지어 나와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예전부터 이곳에는 사슴이 많이 살아 불교 경전에서는 녹야원(鹿野苑)이라 부르는데, 현재는 울타리가 쳐진 숲에서 방목되는 약간의 사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르나스는 최초로 부처가 설법한 곳이며, 동시에 최초로 불교 교단의 형태가 갖춰진 곳이었다. 진리를 발견한 부처(佛), 진리인 법(法),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들인 승(僧), 즉 불교에서 삼보(三寶)라고 부르는 3요소를 갖추게 된다. 또한 사르나스는 수많은 제자와 최초의 신도가 생긴 곳이다. 부처가 사르나스에서 머무는 동안 어느날 새벽 한 젊은이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야사로, 바라나시에 사는 큰 부자의 외아들이었다. 야사는 흥청망청 쾌락에 빠진 삶을 살다가 어느날 흥겨운 잔치가 끝난 후 깨어나 아름답던 시녀들이 추하게 자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삶에 회의하고 고뇌하던 그에게 부처는 가르침을 폈고, 야사는 그 길로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으며 야사의 아버지는 최초의 신도가 된다.

야사처럼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똑똑한 청년이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바라나시로 퍼졌고, 그의 친구들이 줄을 이어 출가하면서 부처의 제자는 60명 정도가 된다. 부처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편 후, 세상을 교화하러 떠나라며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한다.

◇승원 유적지.

“너희가 전하는 법을 듣고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럴 때 너희는 교만해지기 쉽다. 사람들이 법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공덕처럼 생각하면 그는 ‘법을 먹고 사는 아귀’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이렇게 시작된 불교의 가르침은 인도를 넘어서 전 세계로 뻗어나갔고 시공을 초월한 인류의 빛이 되었다. 사르나스에는 그외에도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사르나스 사자상과 함께 많은 불교 미술품, 불상들이 전시된 고고학 박물관이 있으며, 5∼6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다메크 스투파와 한때 1500명의 승려가 거주했던 승원 유적지 터가 남아 있다. 사르나스는 현재 불교 신도들이 성지순례 때 꼭 들르는 4대 성지 중의 한 곳으로, 폐허 속에서도 영광스러운 시절의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는 성스러운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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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나스는 갈 때마다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사원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예전에는 신발을 지키는 이들이 악착같이 돈을 받았다. 그러나 원하는 액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다시 가보니 약간의 돈에 만족하지 않고, 인도인들이 내는 액수의 열 배, 스무 배 정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마도 외국인 특히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많이 오다 보니 액수를 크게 늘린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가보니 인도인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지만, 관광객에게는 은근히 요구를 했다. 내가 ‘왜 저 인도인들에게는 안 받고 나에게만 받느냐’고 따져 묻자 슬그머니 돌아섰다. 사소한 일이지만, 인도가 좀더 발전해야 체계가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액을 정확하게 계산하든지 아니면 아예 안 받든지. 이렇게 해야 여행자들이 마음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인도 사회가 체계가 잡혀갈수록 근본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은 조금씩 사라져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인도 여행의 묘미는 그런 데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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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나스에 가려면 일단 기차를 타고 바라나시로 가야 한다. 삼륜 오토바이인 오토릭샤를 타고 30분 정도면 갈 수 있어, 대개 바라나시에서 숙박하며 당일치기로 돌아본다. 사르나스에 숙소는 많지 않은 편이다. 조용한 곳을 원하는 사람들은 한국 절인 ‘녹야원’이나 중국 절의 숙박시설, 인도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투어리스트 방갈로 등을 주로 이용한다.

by 100명 2007. 5. 15. 17:23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103>인도 부다가야
[세계일보 2007-05-04 10:42]

기원전 6세기, 인도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조그만 카필라 왕국에서 출가한 태자 싯다르타는 수많은 스승을 찾아다니며 혹독한 고행을 했다. 가는 곳마다 이내 스승의 경지에 도달한 그는 더 이상 스승이 없음을 깨닫자, 이번에는 홀로 수행하기로 결심한 후 가야에서 약 12㎞ 떨어진 우루벨라라는 마을의 숲을 찾아온다.

우루벨라는 현재의 부다가야를 말하는데 수행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수자타 마을이 있었고 근처에는 숲과 니란자나강이 흘렀으며 바위로 이루어진 전정각산이 우뚝 솟아 있는 평화스러운 곳이었다.

싯다르타는 숲 속에 들어가 곡식 낟알 몇 톨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낼 정도의 극심한 고행을 하다가, 문득 육체를 괴롭히는 것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회의를 가진 후 수행 방법을 바꾼다. 그는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 니란자나강에서 몸을 씻고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수자타라는 소녀로부터 한 그릇의 유미죽(우유에 꿀과 설탕을 섞어 만든 음식)을 얻어먹었다.

현재 니란자나강은 부다가야의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약 500m쯤 가면 나오는데 우기 때에는 제법 깊지만 겨울철에는 얕은 내 같다. 니란자나강 근처에는 싯다르타에게 유미죽을 준 수자타가 살던 마을이 있고 조그만 탑도 있다.

원기를 회복한 싯다르타는 다시 수행을 하기 위해 근처의 바위산에 올랐으나 산신과 천신이 두려움에 떨며 마을로 가 수행하기를 간청한다. 다만 이 산에 살던 용이 자신의 동굴에서 수행하기를 부탁하자 싯다르타는 기특한 용을 위로하며 자신의 그림자를 동굴에 남기고 떠났다. 그래서 이 바위산을 바른 깨달음, 즉 정각(正覺)을 성취하기 전에 오른 산이라 하여 전정각산(前正覺山)이라 하고 그림자를 남긴 동굴을 유영굴(留影窟)이라 부르는데, 이곳은 물이 귀해 수행하기에는 어려운 산으로 보인다.

전정각산을 떠난 싯다르타는 부다가야의 숲에 있는 커다란 보리수 아래 단정히 앉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육신이 다 죽어 없어져도 좋다. 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한 후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드디어 온갖 집착과 고뇌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경지에 이르면서 그는 부처가 된다. 출가한 지 6년째 되는 어느 날이었다.

현재 그 자리에 커다란 보리수가 있다. 그러나 이 보리수는 부처 당시의 것이 아니다. 원래의 보리수가 1876년 폭풍우에 쓰러져 죽자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보리수 묘목을 가져다 심은 것이다. 그 묘목은 바로 아쇼카 왕의 딸이었던 상가미타 비구니가 스리랑카에 가져가 심었던 보리수의 묘목이니, 현재 부다가야의 보리수는 원 보리수의 손자뻘 정도 되는 것이다.

보리수 옆에는 싯다르타가 앉아서 수행했다 하여 금강좌(金剛座)라 부르는 반석이 있고, 그옆에는 높이 52m의 마하보디 사원이 우뚝 서있다.

4세기에서 7세기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원이 12세기 중엽 이슬람교인의 침입에서도 살아난 이유는 당시 불교도들이 흙으로 사원을 파묻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후 이 주변은 정글화되었다가 19세기 후반에 커닝햄에 의해 발굴되어 현재의 모습을 찾게 된다. 그러나 커닝햄이 발굴하기 이전인 1800년대 초에 그려진 판화에도 이미 현재의 모습이 남아 있고, 높이 52m나 되는 사원을 흙으로 파묻는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안 되어 커닝햄의 발굴이나, 흙으로 파묻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불교가 쇠퇴하며 방치된 이 사원을 보수한 이들은 미얀마인들이었는데, 이 지역을 소유한 이는 이 근방을 지배하던 힌두교 수행단체의 우두머리인 마한타였다. 그런 상황에서 마하보디 사원은 불교사원의 명맥을 잇지 못했는데, 1885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에드윈 아널드의 노력과 스리랑카 출신의 불교 스님인 다르마팔라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현재 마하보디 사원의 소유는 불교도와 힌두교도가 참여하는 운영회에 속해 있다.

그 외에도 마하보디 사원 경내에는 부처가 걸을 때마다 연꽃이 솟아 올랐다는 경행처, 코브라처럼 생긴 무찰린다 용왕이 똬리를 틀어서 부처를 보호하는 조각이 있는 무찰린다 연못, 아쇼카왕 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지지만 진위는 확실치 않은 석주 등이 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불교를 만든 싯다르타는 가르침 못지않게 삶 자체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숙명적인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서 번민하다가 속세를 떠났고,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세상에 귀환하여 가르침을 편 그의 일생은 드라마틱한 영웅 신화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떠남과 귀환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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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종교 유적지는 종종 현지인들의 치열한 밥벌이의 현장이기도 하다. 부다가야에 도착하자마자 거지 아닌 거지들이 수없이 달려들고 수많은 상인들은 하나라도 물건을 더 팔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이것은 관광객 숫자와 비례한다. 17년 전에 갔을 때는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는데 10년 후 성수기 때 다시 가보니 성지 순례단과 그들을 맞이하는 현지인들이 범벅이 되어 온 마을이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여기 아이들은 보통 끈질긴 게 아니다. 구걸하는 아이들이 30분이고, 1시간이고 쫓아다니니 나중에는 질린 여행자들이 할 수 없이 돈을 주게 된다. 이런 현상은 이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아주 예전에 온 관광객들이 불쌍하고 귀여우니 먼저 돈을 주었을 것이고 이것이 점점 오염된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 현장인데, 이런 곳을 여행하며 생로병사의 고뇌를 체험적으로 겪는 것도 또한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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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가야에는 저렴한 숙소를 제공하는 절이 많다. 미얀마, 베트남, 티베트, 네팔, 태국, 일본, 한국 등에서 만든 절의 숙박비는 정해져 있는 경우도 있고,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가야까지 다니는 기차는 많고 가야에서 부다가야까지는 버스, 삼륜 오토바이인 오토릭샤, 마차 등이 다니는데 해가 떨어지면 강도도 출현하니 밤에 이동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by 100명 2007. 5. 4. 11:43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102> 인도 에르나쿨람·코치
[세계일보 2007-04-27 09:42]

인도 서남부의 케랄라 지방은 넉넉한 잎을 드리운 코코넛 나무와 드넓은 호수들이 많아 풍광이 아름답다. 주민들 교육 수준도 높고 공산당원들과 기독교인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힌두교 사원에서 절을 하는 공산당원들을 과연 공산당원으로 볼 것인가’와 ‘교회에 다녀온 뒤 자기 집에 모셔 놓은 힌두교 신상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을 과연 기독교인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 케랄라 지역은 먼 과거부터 서양과의 접촉이 잦았는데, 에르나쿨람(Ernakulam)과 코치(Kochi)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에르나쿨람은 신도시이고, 바로 코앞에 있는 섬의 구도시가 코치다. 정식 명칭과는 달리 주민들은 코친(Cochin)이라고도 부르는데, 역사적인 흔적은 거의 모두 구도시에 남아 있다.

1498년 포르투갈의 장교 바스코다가마는 대포로 무장한 120t급의 배 네 척을 거느리고 희망봉을 돌아 10개월 만에 인도 서남부 해안의 칼리쿠트(Calicut) 항구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향신료와 기독교인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인은 동방의 어느 곳에서 기독교를 믿고 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왕과 백성을 의미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은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동방의 기독교인들과 힘을 합쳐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싶어했다. 그가 생각한 프레스터 존 왕은 인도에 없었으나, 바스코다가마는 코치항을 거쳐 향신료를 잔뜩 싣고 포르투갈로 갔으며, 그 후부터 유럽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칼리쿠트와 코치는 이미 아랍인과 중국 상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국제무역항으로 중국인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중국인이 전파한 ‘중국식 낚시 그물(Chinese Fishing Net)’이라는 것인데, 매우 큰 그물을 나무에 매달아 바다에 담가 놓았다가 수시로 들어올려 고기를 낚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코치에는 1503년 포르투갈인들이 지은 성당도 있지만, 여행자들의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은 유대교 회당인 시나고그로. 회당 안에는 유대인들과 인도인들의 교역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그곳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992년부터 기원전 952년경 사이, 즉 솔로몬 왕 때부터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상아, 향신료, 공작새 등을 거래했다고 한다. 그러던 유대인들이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72년경이며, 379년에는 일시적으로 유대 왕국을 세운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유대인 회당이 세워진 것은 1524년인데, 이 마을에는 아직도 유대인들이 살고 있으며 사원에 들어가면 그들의 흔적을 물씬 느낄 수 있다.

이곳에는 초대 기독교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인도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의 제자인 도마가 인도에 와서 전도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예수의 부활 후 직접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던 ‘의심 많은 도마’는 인도까지 와서 전도를 했고, 에르나쿨람에서 동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말라야투르(Malayattoor)에는 그를 위한 교회도 있다. 도마는 그 후 전도를 하다가 남동쪽의 첸나이(예전의 마드라스)에서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코치에서는 독특한 민속 무용극인 카타칼리도 볼 수 있다. 카타란 이야기, 칼리는 연극이란 뜻인데, 주로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소재로 공연을 한다. 공연장에 미리 가면 그들이 분장하는 과정을 볼 수가 있는데, 배우는 모두 남자들이다.

얼굴에 온갖 색깔을 칠하고 눈을 크게 분장하며 커다란 금색 방울 귀걸이, 금팔찌 등을 걸친 채 엉덩이 부분이 크게 부푼 치마를 입는다. 이렇게 모든 것을 크게 형상화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힘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카타칼리에서 무용수는 눈, 눈썹, 입, 목, 손, 팔, 다리, 발목 등 모든 신체 부위를 사용해서 춤을 추는데, 이곳에 들르는 관광객들이 누구나 한 번씩은 볼 정도로 인기가 많다.

에르나쿨람 근교에도 볼거리가 있다.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칼라디(Kalady)는 힌두교를 크게 일으킨 힌두교 대학자이자 성인인 샹카라의 고향이며, 에르나쿨람에서 얼마 안 떨어진 알라푸자(Alappuzha)까지 가면 거기서부터 콜람(Kollam)까지 강을 따라 배를 타고 가며 수로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

인도에는 매력적인 볼거리가 많지만, 그 여행 과정은 몹시 피곤하고, 특히 불교 성지나 주요 관광지에서는 더욱 심하다. 그러나 자연이 아름답고 인심이 넉넉한 케랄라 지방에 가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면서 인도의 또 다른 매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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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야투르에 가서 산 정상에 있다는 사도 도마를 위한 교회를 찾아가려니 막막했다. 그때 마침 성당 근처에서 사제복 차림의 서양 신부와 인도인 청년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가가 길을 물으니 신부님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잠깐 기도한 후, 이 인도인에게 약간의 돈을 주면 안내해 줄 것이라고 했다. 선선히 승낙한 후 올라가다 얘기를 나누어 보니 그 인도인 청년은 마침 신부님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내가 나타났으니 아마 신부님은 하느님이 나를 보내주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예수 그림이 많이 붙어 있었고, 이끼 낀 바위가 많아서 매우 미끄러웠다. 힘들게 올라가 보니 교회가 있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그리고 옆의 바위에는 커다란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청년의 말에 따르면 그게 바로 ‘도마 사도’의 발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의 두 배 크기여서 실제 사람의 발 같지는 않았다. 볼 것은 별로 없는 곳이었지만, 인도 기독교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찬송가를 부르던 시간이 호젓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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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나쿨람까지는 기차나 버스가 잘 연결되어 있다. 에르나쿨람에서 코치까지는 버스나 페리를 탄다. 칼라디는 에르나쿨람에서 일단 버스로 알루바(Aluva)까지 간 후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탄다. 1시간 정도 걸린다. 말라야투르는 칼라디에서 버스로 20분 걸린다. 말라야투르 산 정상까지는 매우 미끄럽고 1시간 정도 소요된다.

by 100명 2007. 5. 4. 11:42
[조계종5대총림선풍을찾아] ④ 수덕사
[중앙일보 2007-04-26 07:09]
[중앙일보 백성호.김형수 기자] 수덕사에는 ‘선농일치’ 가풍이 살아 있다. 수덕사 산내 암자인 정혜사 뒤 텃밭에서 수좌 설정(右) 스님이 젊은 스님과 함께 감자순을 뽑고 있다. 예산=김형수 기자 수덕사 방문객들이 웅성거렸다. "비구니 절 아냐?" "수덕사에 왜 여승이 없지?" 이유가 있었다. 일제시대 때 김일엽(1896~1971)이란 신여성이 있었다. 이화학당 출신에 일본 유학파로 '여성해방''자유연애'의 상징이었다. 그러던 그가 만공 스님(1871~1946)을 만난 후 돌연 출가했다. 만공 스님은 그때 수덕사 뒤에 '견성암'이란 비구니 선원을 처음 세웠다.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자 뉴스였다. 이후 '수덕사의 여승'이란 유행가가 나오면서 '수덕사=비구니 절'이란 오해가 생겼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견성암에는 70여 명의 비구니 스님이 수행 중이다.

1937년 3월. 큰 절의 주지 스님들을 부른 조선 총독부 미나미 총독이 입을 뗐다. "전임 데라우치 총독의 뜻대로 조선 불교는 일본 불교와 합해야 한다." '왜색 불교화'로 조선 불교를 와해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듣고 있던 만공 스님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청정 비구 하나만 파계시켜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오늘부터 데라우치와 그 자손들의 천도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본인은 물론, 그 후손들도 지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관이 칼을 빼 스님의 목을 치려고 했다. 그때 총독이 말렸다. 고고한 위세에 탄복한 총독은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만공 스님은 총독을 향해 일갈했다. "당신처럼 무모한 사람과 밥을 같이 먹을 수 없다."

이 소문은 장안에 쫙 퍼졌다. 만공 스님이 친구인 만해 한용운 선사의 집을 찾았다. "'할(喝)'만 할 게 아니라 주장자로 아예 머리통을 박살내지 그랬느냐"는 만해 선사의 물음에 만공 스님이 답했다. "사자는 소리만 질러도 백수(百獸.온갖 짐승)의 머리가 다 터진다."

조선 오백년과 일제 시대를 거치며 불교의 선맥은 꺼져만 갔다. 이 불씨를 되살린 이가 경허 선사, 되지핀 불씨를 널리 퍼트린 이가 경허의 제자 만공 스님이다. 경허.만공 선사의 선맥이 고스란히 내려오는 사찰이 바로 덕숭총림(德崇叢林) 수덕사다.

19일 충남 예산 덕산면의 수덕사를 찾았다. 산 이름(德崇)과 절 이름(修德), 동네 이름(德山)까지 '3덕'이 모인 곳이 수덕사다. 그래서 수덕사에는 덕이 넘친다. 스님도 그렇고, 산도 그렇다. 덕숭산의 별명은 '소(小) 금강산'이다. 꽃나무는 숨이 멎도록 소담하고, 100~200년씩 묵은 소나무는 깎아 놓은 분재처럼 정갈하다.

그래서일까. 수덕사 스님들은 '허허실실(虛虛實實)'이다. 겉으로는 마냥 부드럽다. 선방 결제(동안거나 하안거) 때도 하루 8시간만 참선에 든다. '고작? 무슨 용맹정진이 그래?' '1주일씩 한숨도 안 자는 사찰도 있던데'라고 한다면 큰 오판이다.

수덕사의 선풍은 산을 빼닮았다. 덕숭산은 땅을 1m만 파도 거친 바위가 나온다. 화사한 꽃나무, 그 아래 무쇠 같은 바위가 버티고 있다. 선방도 그렇다. 참선은 하루 8시간, 그러나 나머지 시간을 열어 둔다. '강요 없는 정진, 우러나는 정진'을 위해서다. 성보박물관장인 정암 스님은 "선방 청규는 밤 9시 취침, 새벽 3시 기상이죠. 그런데 새벽 1시면 다들 일어나 좌선을 하고 있어요." 그게 수덕사의 '허허' 속에 숨겨진 '실실'이다.

수덕사하면 '선농일치(禪農一致)'가풍이다. 경허.만공 선사 때부터 닦아 놓은 전통이다. '참선과 농사일이 둘이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게 '선(禪)'이라면, 몸을 비우는 게 '농(農)'일런 지. 몸과 마음을 비운 자리, '나'가 없는 그 자리에서 '참 나'가 기다리는 법이다.

수덕사 수좌(首座)인 설정(雪靖) 스님을 찾아 산길을 올랐다. 스님은 감자밭에 있었다. 500m 고지의 암자인 '정혜사' 뒤 200평 남짓한 텃밭에서 젊은 스님과 감자순을 솎고 있었다. "감자는 더 깊이 묻어야 해. 얕게 심으면 알이 적게 들거든." 설정 스님은 성큼성큼 밭고랑을 오가며 감자순을 '쑥쑥' 뽑았다. 예순 다섯인 스님의 몸놀림이 젊은 스님보다 빨랐다. '선농일치가 뭔가요?'라는 물음이 목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감자순을 뽑는 스님의 몸놀림이 '선.농.일.치', 그 자체였다.

설정 스님은 어려운 법어 대신 나무와 햇살을 얘기했다. "일을 해본 사람만이 감사함을 알죠. 자연을 보고, 햇볕을 쬐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쁨인지. 자연의 정직함, 그 진솔함을 안다면 사람들이 함부로 살지 못할 겁니다." 스님은 "자연보다 크고, 흙보다 진솔한 스승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게 실은 '부처'였다.

덕숭산 서쪽으로 해가 졌다. 정혜사 앞뜰, 만공탑에는 '세계일화(世界一花)'란 글귀가 선명하다. 해방 이튿날, 만공 스님이 땅에 떨어진 무궁화를 먹에 찍어 쓴 글이다. 실상 세계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삼라만상 온 우주가 한몸이라. 또한 그 우주가 한 떨기 꽃이라. 꽃처럼 생명이 있어라.

by 100명 2007. 4. 26. 08:17

5월에 가볼 만한 곳, 전국의 5일장
[한겨레 2007-04-26 05:09]

[한겨레] 가정의 달 5월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등이 끼어있어서 가족들의 봄나들이가 잦은 달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5월의 가볼 만한 곳’으로 전남 보성군과 경기 여주군, 강원도 동해, 경북 영천의 전통 5일장 4곳을 소개한다.

벌교5일장-기름진 들녘과 넓은 갯벌을 품었다

전남 보성군의 벌교5일장은 끝수가 4, 9일마다 장이 선다. 여자만, 득량만 등의 때 묻지 않은 바다와 갯벌을 품은 5일장답게 참꼬막, 키조개, 낙지, 갑오징어, 짱뚱어 등과 같은 해산물이 어물전마다 산처럼 그득하다. 또한 주변의 들녘이 넓고 기름진 덕택에 딸기, 참다래, 쪽파 등의 농산물과 취나물, 쑥, 달래, 냉이 등의 산나물도 지천이다.

물산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옛 시골장터의 북적거림과 후박한 인심이 그대로 살아있다. 게다가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찾아가기도 쉽다. 벌교읍내와 가까운 보성차밭에서는 해마다 5월이면 보성다향제가 열리고 찻잎 수확이 한창이다. 축제기간 중에는 일림산의 철쭉도 만개하여 산등성이를 온통 붉게 물들인다. 그래서 5월에 벌교5일장과 보성차밭을 찾아가는 여행은 유난히 향기롭고 신명난다. 문의 보성군청 문화관광과 (061)850-5224.


여주5일장-두꺼비기름, 팔남매만두…… 웬만한 건 다 있다.

남한강 뱃길 따라 갖가지 풍물이 몰려들던 경기도 여주군의 여주5일장은 5백년 역사를 자랑한다. 양화장에서부터 시작되어 여주5일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며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고 생필품과 먹을거리를 조달해주었다. 지금의 여주5일장은 여주군청 별관에서부터 중앙 통까지의 시장 통과 그 사이 골목길에 펼쳐진다. 장날이 되면 집에서 키우던 씨암탉과 흑염소에서부터 고추 모종·매화꽃 묘목에, 산과 들에서 자란 산나물과 알뜰살뜰 지은 귀한 농산물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거기에 만병통치약인 두꺼비 기름과 무조건 천원 하는 장돌뱅이 난전까지 합세하면 여주장은 흥이 넘친다.

여주장에 물건을 대던 남한강의 황포돛배는 예전처럼 신륵사 앞을 오가고 뱃전에 부딪는 강바람이 시원하다. 명성황후의 자취와 백성을 보살피던 세종대왕의 숨결이 느껴지고 도자를 빚던 도공의 섬세한 손놀림도 따라 흐르니 여주는 찬찬히 돌아볼 곳 많은 고장이다. 문의 여주군청 문화관광과 (031)887-2866.


북평5일장-어촌, 산촌의 물산이 골고루 모였네


강원도 동해시의 북평 민속5일장은 기록상 2백여년 전부터 현재까지 3, 8일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영동권 최대의 전통 5일장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장터는 북평 동사무소를 시작으로 북평 경로당에 이르기까지 장터안길과 대동로를 중심으로 약 5백m 정도 되는 거리 양편에 형성된다.

메밀묵과 순댓국, 장국밥 등을 파는 식당들이 밀집해있는 구역이 있는가 하면 농기구, 해산물, 건어물, 밑반찬, 곡식, 야채, 그릇, 이불, 화훼와 묘목, 가금류, 어묵, 군것질거리 등을 파는 장꾼들이 인근의 삼척시, 강릉시, 정선군 등지는 물론 멀리 경북, 충북, 서울 등지에서도 몰려들어 만물백화점을 형성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체취가 장터 구석구석마다 녹진녹진 스며있는 모습을 구경하다 보면 여행객들도 삶의 활력을 얻게 된다. 문의 동해시청 문화관광과 (033)-530-2473.

영천5일장-봄나물과 한약 내음이 어우러진 영남 최대장터


대구 약령시장, 안동장과 더불어 경상도 3대 시장인 경북 영천시 영천장은 부산, 대구, 안동, 포항이 모두 80리 길 안인 사통팔달의 요지에 위치한, 영남의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다. 팔공산과 보현산 자락에서 자란 향긋한 나물과 복숭아, 포도, 사과는 당도가 높고 맛이 뛰어나다. 또한 영천장의 특산물인 돔배기(상어고기)도 맛볼 수 있으며, 특히 약초는 전국 최대의 거래량을 자랑하고 있다.

천년사찰 은해사는 솔숲이 좋아 가족나들이 코스로 그만이며, 국보 제 14호인 거조암을 둘러보며 고려 건축미에 취해보는 것도 좋다. 충신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와 영정을 볼 수 있다. 폐교를 활용한 유럽식 현대건축물인 시안미술관에서는 미술작품 감상과 체험을 즐길 수 있으며 우리나라 3대 천문대인 보현산 천문대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산줄기가 한 눈에 펼쳐진다. 문의 영천시청 문화관광공보과 (054)330-6063.

by 100명 2007. 4. 26. 08:10
장자제…눈물나게 아름답다
[서울신문 2007-04-26 04:39]

[서울신문]사람이 태어나 장자제(張家界)에 가보지 않았다면 백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 중국인들 사이에 이렇게 표현할 만큼 누구나 장자제를 동경한다.

중국 후난성(湖南省) 서북부에 위치한 장자제의 공식 명칭은 ‘무릉원’이다.무릉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등장한다.대략 이렇다.동진(東晋)의 태원(太元·376~396)때 무릉(武陵)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도화림(桃花林) 속에서 길을 잃었다.어부는 배에서 내려 산 속의 동굴을 따라 들어갔는데.마침내 어떤 평화경(平和境)에 이르렀다.그곳은 논밭과 연못이 모두 아름답고.닭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한가로우며?남녀가 모두 외계인과 같은 옷을 입고 즐겁게 살고 있었다.그들은 진(秦)나라의 전란을 피하여 그곳까지 온 사람들이었다.수백 년 동안 바깥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산다고 했다.어부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면서 그곳의 이야기를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하지만 어부는 이 당부를 어기고 돌아오는 도중에 표시를 해 두었으나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전설이 이러하니 장자제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수려한 산세와 청량한 계곡.그리고 기이한 동굴이 빚어내는 원시의 자연이 영락없이 무릉도원이다.구름에 반쯤 잠긴 기묘한 형상의 수많은 봉우리들.억만년의 침수와 자연붕괴를 견뎌낸 기암괴석과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려 있는 수려한 산세를 보고 있노라면 세월마저 멈춘 듯하다.

태고의 전설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장자제야 말로 꿈 속에서 그리던 말 그대로의 ‘무릉도원’이 아닐까 싶다.아울러 인간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미혼대(迷魂臺)에서 내려다보는 위안자제(袁家界)의 풍경은 그 어떤 첨단 장비와 기술로도 감지할 수 없는 선경(仙境)이다. 400~500m 높이의 송곳처럼 솟아 있는 석봉들을 보며 걷다가 잠시 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낭떠러지.정신을 잃을 듯한 아찔함에 스릴마저 느껴진다.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터?지난주 무릉도원을 다녀왔다.

글 사진 장자제 김경희특파원 saranghe@seoul.co.kr

장자제 가볼만한 곳

넋을 빼앗는 미혼대

협곡에서 솟은 바위 봉우리가 인간의 넋을 빼앗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미혼대에서 내려다보는 위안자제의 절경은 한 폭의 산수화 같다. 높이 500m에 달하는 뾰족바위 수백 개가 버티고 있는 형상이 마치 하늘에서 맨해튼의 고층빌딩을 보는 것 과 같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려 있고, 봉우리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이 병풍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무릉원의 하이라이트는 해발 2084m의 천자산(天子山). 무려 3500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1997년 길이 2㎞의 케이블카가 설치 되면서 누구나 손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붓을 거꾸로 꽂은 어필봉

천자산 정상에서 버스로 5분쯤 이동하면 하룡공원이 나온다. 이곳에서 만나는 어필봉은 바위 봉우리에서 자란 소나무와 어우러져 마치 붓을 거꾸로 꽂아놓은 형상이다. 전쟁에서 진 황제가 천자산을 향해 쓰던 붓을 내던졌다고 해서 ‘어필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 ‘천대서해’는 황제를 호위하는 천군마마의 기세로 솟은 봉우리가 운무에 휩싸여 마치 바다를 이룬다.

토가족 소녀와 보봉호수

11㎞ 길이의 황룡동굴과 ‘보봉호수’도 여행의 필수 코스. 동굴 안에서 보트를 타고 유람할 정도로 웅장한 황룡동굴엔 미사일 모양의 석순에 울긋불긋한 조명까지 더해져 환상의 극치를 이룬다. 산정호수인 보봉호는 기이한 봉우리 들에 둘러싸인 반 인공 호수로, 배를 타고 호수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배에서 토가족 소녀가 나와 손을 흔들며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준다.

천문산


천문산은 장자제 내의 최고봉(1528m)이다. 아흔아홉 굽이를 돌아 통천대로를 지나면 봉우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 그 모양새가 독특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터널의 이름은 천문동(天門洞)으로 지난 1999년 세계 곡예비행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면서 유명해졌다.

황석채

장자제에서 제일 큰 관람대. 해발 1300m로 주위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황석채에 오르지 않으면 장자제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한나라 대신 장량이 이 곳에서 도를 닦는 중 조난당했을 때 그의 스승인 황석공이 구해줬다고 해서 ‘황석채’로 불린다.

백장협, 용왕동

높이가 백장이라고 해서 이름 지어진 백장협은 삭계욕 동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가욕, 왕가욕 등과 함께 3개의 협곡으로 구성됐다. 전설에 의하면 토가족 농민봉기 수령향대군이 백장협에서 관군들과 백번이나 싸웠다고 한다. 용왕동은 장자제시 무릉원관광구 동쪽 17㎞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석회암 카르스트동굴로서 중국에서 가장 크고 원시적인 동굴 중 하나. 관광에만 약 2시간정도 걸린다.

# 장자제는 어떤 곳

‘장씨의 마을’이라는 뜻의 장자제(張家界)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BC200년 경이었다. 당시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이 토사구팽을 눈치채고 도망쳐서 정착한 곳, 바로 소수 민족인 토가족(土家族)이 살던 장자제다. 장량은 유방의 군사를 피해 황석채의 바위봉우리에서 무려 49일을 버텼다고 전한다.

외부와 격리된 채 살고 있던 토가족의 터전인 장자제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때는 2200년이 흐른, 지금부터 20여년 전이다. 이 지역 출신의 화가가 장자제의 산수를 담은 그림을 발표하면서 장자제는 중국 정부에 의해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중국 최초의 국가삼림공원(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장자제는 1992년엔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록되면서 한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로 부상했다.

# 여행정보

장자제는 4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계곡이 널리 분포돼 있다. 고산분지 기후로서 연평균기온이 섭씨 12.8도 이며, 겨울에 혹한이 없고 여름에 무더위가 없어 4계절 관광하기에 좋다. 장자제를 꼼꼼하게 둘러보려면 최소한 4∼5일은 걸리지만 명승지를 중심으로 돌아본다면 이틀이면 충분하다. 인천공항-샤먼(廈門)-(국내선 비행기)-장자제, 인천공항-창사-(버스)-장자제로 가는 방법 등이 있다. 최근 격린여행사(www.greentravel.com)에서 샤먼을 거쳐 장자제를 찾는 여행 상품을 출시했다.02)778-9338

# 여행팁, 가는 길에 골프를 치려면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샤먼에 내리면 4개의 골프장을 접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동방골프장이 가장 유명하다.

세계 100대 명문골프클럽에 선정됐다.1994년 4월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아시아프로골프대회를 개최한 곳이다. 바다를 끼고 있으며 샤먼시내가 멀리 보인다. 샤먼공항에서 20여분 정도 거리. 보통 300년 이상된 고목들이 즐비한 환경 친화적인 골프장이다. 난이도는 중급정도.18홀 가운데 11개 홀이 해안가에 위치해 바다와 푸른 잔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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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100명 2007. 4. 26. 08:09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101>인도 오르차
고즈넉한 폐허 속의 매력
◇제항기르 마할
북인도 아그라의 타지마할과 카주라호 사이에 고즈넉한 폐허의 미로 가득한 오르차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한가운데 폭이 좁은 강이 흐르고, 그 강을 경계로 높은 언덕에는 궁전들이, 낮은 곳에는 마을과 힌두교 사원들이 있다.

이 마을의 궁전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오르차의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일어나 북인도를 다스렸던 무굴제국은 장자상속제가 확립되지 못해 왕위 계승을 놓고 끊임없이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초대 왕 바부르의 장남 후마윤은 아편과 점성술에 탐닉하다 축출되기도 했지만 다시 왕권을 되찾았고, 그의 아들 아크바르(위대한 인물이란 뜻) 대제가 뒤를 이었다. 그런데 이 아크바르 대제 말년에 그의 아들 ‘살림’이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에 실패한 왕자는 1602년 오르차로 도망와 당시 이곳을 다스리던 제후국 분델라 왕국에 몸을 의탁한다.

◇시슈마할

◇라지 마할

분델라 왕국의 지배자 라자 비르 싱 데오는 왕자를 잘 대접하고 지원했는데, 3년 후인 1605년 왕자가 무굴제국의 왕이 되었고, 제항기르(세계를 장악한 자)란 이름을 갖게 된다.

이에 따라 그를 지원했던 분델라 왕국도 크게 융성했지만,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항기르의 아들들이 권력투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킨 왕자가 새로운 왕, 샤자 한(세계의 왕)이 된다. 샤자 한은 훗날 화려한 왕비의 무덤인 타지마할을 만든 왕으로, 훗날 그도 셋째아들인 아우랑제브에게 유폐된다.

샤자 한이 왕이 되자 냉대를 받게 된 제후국 분델라 왕은 1627년 무굴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꾀했다가 패하고서 분델라 왕국과 그 수도 오르차는 폐허로 변하게 된다.

이 폐허에서 비교적 보존이 잘된 곳은 1606년 제항기르가 왕이 되어 방문한 후 만들어진 제항기르 마할이란 궁전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궁전 안으로 들어서면 벽과 바닥에 그려진 문양과 그림들이 희미한 윤곽을 남기고 있는데, 몇 백년 전 번성했을 때는 매우 화려했을 것이다.

◇차투르부즈 만디르

◇원빈식당

이 궁에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 그 옆에 있는 호텔의 종업원, 청소부, 요리사들이 묵는 것으로 보이는 조그맣고 낡은 방에는 걸상과 잡동사니, 낡은 빨래들이 널려 있다. 옛날에도 궁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사는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오르차의 많은 왕궁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매력도 화려함보다 퇴락해 회색빛이 스며든 적막함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항기르 바로 옆에는 시슈 마할이란 궁전이 있다. 분델라 왕국이 새로운 도시로 수도를 옮겼을 때 왕족이 묵던 곳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현재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다. 주로 단체관광객이 묵지만 개인 여행자들도 비싸지 않은 가격에 묵을 수 있는 곳이다.

근처엔 라지 마할이란 왕궁도 있는데, 이곳은 왕과 왕비가 머물던 곳으로 벽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이 궁전의 매력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궁의 전경과 탁 트인 주변 풍경을 굽어보며 한적함을 맛보는 것이다. 혹시 MP3라도 갖고 있다면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음악을 들으며 잠시 세상을 잊어볼 만한 곳이다.

◇라지 마할 내의 벽화

◇라자 만디르의 쌍어문 무늬

마을 안쪽에는 다른 왕궁들도 많은데, 불에 탄 것처럼 검게 변하여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차투르부즈 만디르란 힌두교 사원이 있고, 비르 싱 데오의 아들이 형제의 아내를 탐했다는 오해를 받자 스스로 자살한 딘만 하르다울 왕궁도 있다.

왕비를 위하여 아요디아에서 가져온 라마 신상을 모셔 놓은 람 라자 만디르란 사원도 있다. 이곳은 아직도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입구에 그려진 쌍어문 무늬다. 힌두교 비슈누신의 화신인 라마의 고향 아요디아의 사원들에서도 이런 쌍어문 무늬가 많이 보이는데, 한국 김해의 김수로왕릉에도 이 같은 무늬가 남아 있다.

삼국유사는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적고 있고, 이에 의거하여 허황옥의 고향이 인도의 아요디아로 추정되는데, 이 사실을 상기하며 이 사원의 쌍어문을 보면 묘한 감회에 젖게 된다.

오르차의 매력은 이런 유적지 못지않게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인도 여인들이 미간에 바르는 빈디 재료 등 각종 기념품을 파는 거리의 가게와 소박한 인심을 맛보는 데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10여년 전만 해도 조용하던 이곳이 여행자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상업화되어 간다는 점이지만, 다른 관광지에 비하면 여전히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 여행 에피소드

오르차에서 한국 여행자들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라면, 수제비, 백숙, 김치볶음밥 등 한글 간판이 내걸린 식당들이다. 한국 여행자들이 많이 찾아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진 결과인데, 한국 여행자들의 공도 크다. 특히 젊은 한국 여성 여행자들이 한국 요리를 가르쳐 주고 자기 돈을 들여 예쁜 한글 메뉴판과 한글 간판까지 만들어 준다. 이 식당들 중에는 ‘원빈 식당’이라는 곳도 있다. 식당의 젊은 주인이 한국 영화배우 원빈을 닮았다고 해서 한국 여행자들이 이 같은 이름을 붙이고 한글로 ‘원빈 식당’이란 간판까지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 여행자들이 별로 없던 시절에 늘 일본 사람 취급받던 서러움이 생각나 격세지감을 느꼈다.

>> 여행 정보

여행자들은 대개 아그라와 카주라호 사이를 통과하는 도중에 오르차에 들르게 된다. 일단 잔시까지 와서 버스나 삼륜오토바이인 오토릭샤, 혹은 그보다 약간 큰 템포라는 것을 타고 30분에서 1시간 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 오르차 시내에는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들이 많다. 시슈마할의 왕궁 호텔에서 가장 싼 방은 한국 돈으로 트윈이 약 2만5000원. 에어콘이 없어 여름에는 피해야 하지만 겨울에는 따뜻해서 권할 만하다. 왕궁 호텔에는 이보다 비싼 방들도 많고, 단체여행객들이 많이 투숙한다.

by 100명 2007. 4. 25. 23:15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그리스 크레타섬
[세계일보 2004-07-22 16:33]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에게해를 헤쳐나가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 가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에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수많은 신화를 간직한 에게해의 섬들은 현실 너머에서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인 크레타는 5000여년 전의 위대한 문명과 신화를 담은 꿈 속의 세계다.

기원 전 3000년쯤 태동해서 기원 전 1400년까지 번성한 크레타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과 이집트 문명을 그리스에 전달하는 교량 역할을 했다.

이 문명은 아케아인의 침입으로 급격하게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본토 남부의 미케네 지방에서 번성한 아케아인은 기원 전 13세기 무렵 트로이로 원정했다. 그 아케아인도 기원 전 12세기 북방에서 침입한 도리아인에게 멸망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 등의 철학자는 그로부터 몇 백년 후의 인물들이다.

크레타 문명은 전기 에게 문명으로 불린다. 당초 신화로 여겨지다 고고학 분야의 발굴 성과에 의해 역사로 편입된다.

북쪽의 해안 도시 이라클리온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그 신화와 역사의 현장이 있다. 대표적인 곳은 크노소스궁으로 통로가 복잡해 미궁으로도 알려졌다. 재미있는 신화 한토막도 전해진다.

이곳을 다스리던 왕 미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으나 황소를 제물로 바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자 포세이돈은 저주를 내리고 미노스 왕의 아내 파시파에는 황소와 사랑에 빠진다. 결국 왕비는 소의 머리를 단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낳게 되고 왕은 이 괴물을 미궁에 가둔다. 그리고 정복한 아테네 사람들에게 괴물의 먹이로 9년마다 7명의 처녀와 7명의 청년을 요구했다. 이에 분노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스스로 희생자가 되어 미궁에 숨어 들어간 뒤 괴물을 죽이고 희생자들을 구출한다는 신화다.

크노소스 궁은 현재 폐허로 남아 있지만 원래 약 1500개가 넘는 방이 있었다. 수많은 방들에는 환기와 채광시설, 상·하수도, 욕조가 딸린 욕실, 수세식 화장실, 전망 좋은 베란다, 방을 서늘하게 하는 물 저장 탱크 등이 있어서 발굴하던 20세기 초의 유럽인들을 감탄시켰다고 한다.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3500여년 전의 크레타인들이 누렸으니 말이다. 궁 입구의 벽에 그려진 백합관을 쓴 날씬한 왕자와 여인들, 여왕의 방에 그려진 파란 색깔의 돌고래 프레스코 벽화를 통해 그들의 미적 감각과 활기찬 해양 문명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도 있다.

사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유물들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현장을 복원시키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영국 고고학자 에번스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에번스는 이로 인해 유적건설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든 관광객들은 그의 덕택에 수천년 전의 문화적 분위기를 흠뻑 맛볼 수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이라클리온의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뿔 모양의 술잔과 신화에 바탕한 그림, 물고기 문어 등이 그려진 아름다운 도자기들, 가슴을 드러낸 채 뱀을 들고 있는 상아로 만든 ‘뱀의 여신상’ 등은 크레타 문명의 화려함과 섬세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같은 고고학적 유물만 크레타의 매력은 아니다. 연평균 기온이 19도인 크레타 섬에는 올리브와 포도, 건포도, 감귤류, 바나나, 아몬드 등의 과일이 풍성하고 전통 음식점인 타베르나에서 올리브유가 섞인 그리스 전통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가 있다.

또한 크레타섬 어딜 가나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음악이 흘러 나온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 바로 크레타였다. 이 위대한 작가는 현재 이라클리온 남서쪽 언덕에 누워서 파란 에게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묘비는 그의 작품 만큼이나 감동적이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그 말을 하기까지 그의 삶이 얼마나 큰 고뇌와 치열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여행작가

■ 작가는 …

이지상씨는 1988년부터 지금까지 17년째 국내외로 떠돌며 이색 문화·종교·역사 자료를 수집해 온 40대 중반의 여행작가다. ‘황금소로에서 길을 잃다’(북하우스) ‘나는 늘 아프리카가 그립다’(디자인하우스) 등의 저서를 냈고, EBS 라디오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에 고정 출연해 해외여행을 소개하고 있다.

〈약력〉 ▲서강대 정외과 졸업 ▲3년간 평범한 회사원 생활 ▲88년부터 방랑 시작

■ 여행정보

크노소스 궁을 보려면 크레타 북쪽 해안가의 중심 도시 이라클리온으로 가야만 한다. 아테네에서 비행기로 갈 수 있고, 배로는 약 12시간 정도 소요된다.

방문하기 가장 좋은 때는 맑은 날씨가 많은 봄가을이지만 바닷가에서 선탠을 즐길 수 있는 무더운 여름에도 많이 간다.

by 100명 2007. 4. 13. 23:10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올림픽 열리는 아테네
[세계일보 2004-08-05 17:06]

1주일 후면 제28회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열린다.

고대 올림픽은 원래 올림피아에서 열린 제전이다.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열린 제1회 근대 올림픽은 1896년 아테네에서 열렸으니, 이번 올림픽은 108년 만의 귀향으로 역사에 기록될 참이다.

아테네 여행은 대개 신타그마 광장에서 시작된다. 신타그마란 그리스어로 ‘헌법’이란 뜻이다. 1843년 이곳에서 그리스 헌법이 공포되었는데, 주변의 무명용사기념비 앞에서는 매시 정각에 근위병 교대식이 열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수많은 유적지가 신타그마 광장과 모나스트라키 광장 사이의 남쪽에 넓게 퍼진 지역에 모여 있다. 그 중심지는 단연코 아크로폴리스다.

아크로폴리스로 가려면 플라카 지역을 거쳐야 한다. 이곳은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지로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마다 노천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등이 밀집되어 있다. 아테네는 인구 320만명(2001년)밖에 안 되지만 연중 몰려드는 엄청난 관광객으로 번잡한데, 특히 플라카의 미로는 항상 북적거린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골목길을 벗어나면 멀리 우뚝 솟은 아크로폴리스가 나타난다. 그리스어로 ‘도시(polise)’에서 ‘가장 높은(akros)’ 곳이라는 뜻인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로 어느 도시에나 있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해발 156m, 동서 약 270m, 남북 약 150m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있는데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딱 한 군데, 서쪽 언덕길이다. 숨을 헐떡거리며 정상에 다다르는 순간, 멀리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 1호인 이 신전은 처녀신 아테나의 집이다.

아테나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 이 도시의 이름을 처음 지을 때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경쟁했었다. 결국 시민들은 포세이돈이 준 소금보다 올리브나무를 준 아테나 여신을 택해서 아테네가 도시 이름이 됐다.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진 기원전 5세기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의 전성기였다. 그 시절의 영광을 보여주듯 파르테논 신전 건축에는 수많은 건축기법이 동원되었다. 가로 31m, 세로 69.5m인 신전의 각 기둥은 중간이 볼록한 엔타시스, 즉 배흘림 기법을 사용해 기둥 밑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일직선으로 보인다.

또 신전 중앙의 기둥 사이는 폭이 좁고 변두리 쪽은 넓어서 멀리서 보면 각 기둥들이 균일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모두 눈의 착시 현상을 이용한 건축기법이었다.

아크로폴리스의 절벽 부근에는 디오니소스 극장과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헤로데스 아티쿠스 원형극장이 있는데 헤로데스 아티쿠스 원형극장에서는 현재도 야외공연을 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근처에는 소크라테스의 동굴감옥도 있다. 인간들의 무지를 설파하던 그는 사회를 혼란시켰다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곳에 갇혔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일 것이다.

◇염소의 뿔과 다리를 가진 신 판(Pan)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희롱하는 내용의 조각(사진위) 파르테논 신전.

아고라는 아크로폴리스에서 서북쪽으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다. 아고라(Agora)는 그리스어로 ‘함께 모이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는데, 정치적인 집회 장소는 물론 시장터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활짝 꽃핀 현장이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돌무더기만 가득하지만 약 2400년 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거닐었던 감회 어린 현장이다.

아크로폴리스의 동남쪽에는 신 중의 신인 제우스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다. 당초 높이 17m, 지름 167㎝의 기둥 104개로 이루어졌는데, 지금은 16개의 기둥만 남아 있어 아쉽지만 그래도 여전히 웅장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제우스 신전의 동쪽에는 말굽처럼 생긴 올림픽 스타디움이 있다. 이곳은 기원전 331년 아테네 대축제 경기장으로 만들어졌지만 로마제국 이후에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버려졌다가 복원되어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렸었다.

이 밖에 국립고고학박물관에는 그리스 전역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급히 보자면 하루도 가능하지만 천천히 음미하자면 한 달도 모자란 도시가 바로 아테네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소매치기 우글우글 어디가나 지갑 조심

아테네는 매력적인 도시지만 관광객을 통해 한몫 챙기려는 호객꾼와 소매치기, 택시기사들도 많다. 특히 올림픽을 앞두고 전 유럽의 소매치기들이 속속 아테네로 집결하고 있을 테니 관광객은 이들과 일전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스의 ‘친절한’ 사내를 따라 술집에 갔다가 맥주 한 병과 안주 몇 조각을 먹고 500달러를 날렸다는 여행자, 미터기를 꺾지 않고 ‘뺑뺑이’를 돌리다가 50유로짜리를 내면 슬쩍 10유로짜리로 바꿔치기해 탑승객을 혼란에 빠뜨리는 택시기사의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늘 조심하고 하나하나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소매치기에 대비해 바지 안에 두르는 복대에 여권과 돈을 챙기고, 자기만 조심한다면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다행히 나는 아테네에 있는 동안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적은 없다. 오히려 ‘도가니탕’ 먹는 재미에 흠뻑 빠졌었다. 그리스인들은 우리처럼 흐물흐물한 소 무릎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매우 싸다. 시장 안 허름한 식당에 앉아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문한 뒤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싼값으로 꼬들꼬들한 고기를 맛보는 재미가 최고였다.

<여행메모>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려면, 중심지 신타그마 광장까지 운행하는 E95 익스프레스 버스가 싸고 편리하다. 24시간 운행. 밤늦게 도착했을 경우 바가지를 쓸 위험성이 있기에 택시는 피하는 것이 좋다. 시내에서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은 지하철과 주요 관광지를 경유하는 트롤리버스다. 버스를 탈 때 티켓을 사서 버스 안 검표기에 스스로 찍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검표원의 불심검문에 걸려 수십배의 벌금을 물 수도 있다.

by 100명 2007. 4. 13. 23:09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그리스 파트모스·로도스
[세계일보 2004-07-29 16:30]
그리스의 수많은 섬들 중에서 초기 기독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파트모스는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섬이다.

이 섬은 무서운 심판을 예언하며 새 땅과 새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현장이다.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요한계시록 1장 9∼10절)

여기서 등장하는 밧모섬이 바로 파트모스섬이다. 파트모스섬은 길이 16, 폭 10 정도로 험한 바위산이 솟구쳐 있는 작고 황량한 섬이다. 인구는 3000여명 정도인데 부둣가에 많이 모여 살고 있다. 산 정상에는 성요한 수도원이 있으며 중간에 파트모스 신학교와 기숙사가 있다. 요한이 계시를 받았던 동굴은 바로 그 아래 있다.

동굴 위에는 요한이 계시받은 것을 제자 프로코로스가 받아적은 그림이 그려져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철문이 나온다. 그곳을 통과하면 50평 정도의 컴컴한 공간이 드러난다. 좌측 끝에 제단이 있고 근처에는 요한이 자던 곳이라는 움푹 들어간 바닥, 요한이 책상으로 썼다는 턱이 진 바위 등도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양 팔을 쭉 펴면 품에 안을 수 있는 크기의 바위다. 이 바위는 금이 3개로 갈라져 있다. 사도 요한이 나팔 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세 쪽으로 갈라졌다고 전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예수의 애제자 사도 요한이 이곳에 유배왔을 때는 암담한 시절이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스스로 신이라 칭하며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고 그것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체포되어 파트모스섬에 유배당한 아흔 살 무렵의 요한은 이 동굴에서 계시를 받고 그 소식을 실의에 빠진 기독교인들에게 전파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저자를 요한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요한계시록 문헌 전체를 분석해 볼 때, 아마도 공동체에 속한 서로 다른 저자들이 요한의 이름을 빌려 썼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쓴 동굴 입구.

요한의 흔적은 남쪽 해안가에도 있다. 요한이 신자들에게 세례를주었다는 터에 기념비가 서 있고, 요한을 기념하는 성요한 수도원이 산 정상에 있다. 화강암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성채는 1088년에 지어졌는데 수도원 보물실에는 보석이 박힌 황제의 대관식 왕관들과 6세기에 쓴 금박 필사본의 마가복음 33쪽 등 기독교에 관련된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왕 파트모스 섬에 왔다면 조금 더 시간을 내 로도스섬까지 가볼 만하다. 파트모스섬에서 배를 타고 9시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나타나는 로도스섬은 에게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이곳은 현재 그리스의 대표적인 휴양지이나, 14세기 초에는 십자군전쟁에 참가했던 성요한 기사단이 점령해 견고한 요새를 만들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쯤 이곳 사람들은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믿음으로,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높이 36m의 거대한 크로이소스의 청동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225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1000여년간 방치되다가 7세기쯤 이곳을 침공한 아랍인들이 그 조각들을 시리아의 유대인에게 팔아서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미 사라진 거상의 흔적에 관심을 갖는 이는 지금 이곳에 없다. 관광객들은 아름다운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구시가지의 성벽과 유적지를 돌아보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박물관에 있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마 신화에서는 비너스)의 조각상이다. 기원전 1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60㎝ 정도의 아름다운 아프로디테는 길게 여러 가닥으로 딴 머리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채 목욕을 하고 있다. 그 매혹적인 자태 앞에서 가슴 설레지 않는 이는 드물다.

해변이 좋아서든 매혹적인 아프로디테 조각 때문이든, 로도스는 한번 가볼 만한 섬임에 틀림없다.

◇성요한 기사단이 만든 구시가지 성벽.

■ 여행정보

●파트모스

아테네 피레우스항에서 오후 1시에 떠나는 카미로스호를 타면 10시간 정도 걸린다. 터키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3월 25일에는 독립기념 행사를 볼 수 있다. 부둣가에 작은 호텔, 민박 등이 있고 배가 도착하면 종업원들이 호객에 나선다.

●로도스섬

아테네에서 비행기로 1시간, 배로 18시간 소요. 파트모스섬에서 밤 배를 타면 약 9시간 정도 걸려 이른 아침에 도착한다.

/여행작가

by 100명 2007. 4. 13. 23:09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그리스 펠라-베르기나
[세계일보 2004-08-19 20:57]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그리스의 북부에 있다. 비록 현재 그리스와 인접한 지역에 별개 국가로 마케도니아(Republic of Macedonia)가 자리 잡고 있지만, 그들보다는 그리스가 고대 왕국의 유산을 더 많이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유적지로 가려면 그리스 북부에 있는 테살로니키를 거쳐야 한다. 테살로니키는 그리스 제2의 도시다. ‘테살로니키 고고학박물관’은 마케도니아 왕국과 관련된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필리포스 2세의 묘에서 나온 그의 유골과 왕관, 갑옷, 장식품, 높이 1m나 되는 거대한 포도주 혼합용 청동 항아리인 데르베니 크라테르 등의 보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테살로니키 근교의 펠라와 베르기나에서 출토됐다.

펠라는 테살로니키에서 서쪽으로 38 떨어져 있다. 기원전 410년 마케도니아의 왕 아르켈라오스는 아이가이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고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펠라에서 태어났다.

펠라 가는 길은 한적했다. 테살로니키에서 떠난 버스가 시골 아스팔트 길을 1시간 정도 달리자 펠라 유적지에 멈췄다. 펠라는 조그만 박물관과 텅 빈 유적지만 남아 있는 허허벌판 같은 곳이었다. 박물관에는 펠라 왕궁터에서 발견된 수많은 모자이크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표범의 허리에 탄 늘씬한 몸매에 곱슬머리를 휘날리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 모자이크, 사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칼과 창으로 두 사내가 공격하는 모습 등의 훌륭한 자갈 모자이크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물은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에 가 있다.

박물관 건너편에는 펠라 유적지가 펼쳐져 있다. 궁전은 유적지 북쪽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상점들과 주거지 터는 있지만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아테네에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한때 이곳을 방문해서 알렉산드로스 왕자를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테살로니키를 거쳐 이곳에 왔는데, 그것을 기념하려고 테살로니키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이 있고 그의 동상도 거리에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북방의 고산지대에 살다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8년 그리스를 정복했고, 암살당한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 뒤를 이었다. 기원전 336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12년 동안 수많은 정복 전쟁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펠라 이전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는 아이가이였다. 아이가이는 원래 에데사로 알려졌으나, 그곳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베르기나란 곳에서 1977년 필리포스 2세의 묘와 팔라티차 왕궁터가 발견돼 현재는 베르기나가 고대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인정되고 있다. 테살로니키(성경에서는 데살로니가로 나와 있다)에서 베르기나로 가려면 우선 베리아까지 가야 한다.


베리아는 테살로니키에서 약 75 떨어진 조그만 도시로 서기 50년쯤 기독교의 사도 바울이 이곳으로 피신온 적도 있다. 베리아에서 버스를 갈아 타고 15분쯤 남서쪽으로 내려가니 베르기나가 나왔다. 버스에서 내려 산길을 따라 올라가자 발굴된 무덤들이 나왔다. 입장은 금지하고 있었는데 발굴될 당시 필리포스 2세의 묘는 직경 110m, 높이 12m로 거대했다.

◇테살로니키의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상.

그 무덤을 파고 30m 정도 내려가자 거대한 석관이 나왔는데 바로 거기서 필리포스 2세의 유골과 엄청난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덤 근처의 언덕에 왕궁터가 있다. 동서 300m, 남북 200m 정도 되는 공간에 석조 기둥과 주춧돌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중간에 무수히 많은 가지를 뻗어 올린 떡갈나무가 하나 있다. 바로 그곳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근원지였고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한 곳이었다. 필리포스 2세는 두 번째 결혼식을 이곳에서 올리다가 귀족 처녀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암살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왕궁터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니 해발 2000m급의 산들이 멀리 보이고 동쪽에는 풍요로운 마케도니아 평야가 펼쳐져 있다. 2500년 전의 인걸은 간 데 없지만, 그들의 흔적은 그렇게 조용히 남아 있었다.

◇펠라의 마케도니아 왕궁터


여행작가

■ 여행정보

테살로니키에서 펠라 가는 버스는 많다. 단 펠라 박물관은 오전 8시에 개관해 오후 3시에 폐관하기 때문에 일찍 서두르는 게 좋다.

테살로니키에서 베리아까지는 버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자주 있다. 베리아에서 베르기나까지는 15분 정도 걸리는데 버스가 1시간 혹은 1시간30분 정도 간격으로 뜸하게 다니는 편이니,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테살로니키 역 근처에 펠라, 베리아 가는 버스 터미널이 있다.

■ 에피소드

내가 처음 접한 그리스의 첫 도시는 테살로니키였다. 테살로니키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길을 물어보면 여자들은 수줍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고 시장의 상인들도 매우 우호적으로 대해주었다.

그런데 유스호스텔에서 나는 말 실수를 했다. 내가 터키와 동유럽 여행을 마치고 온 것을 안 호스텔 매니저는 터키가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 당시 터키에 푹 빠져 있던 나는 들뜬 마음으로 “매우 좋았다. 볼거리도 많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음식도 풍부하고…”라고 대답했다. 아뿔싸. 그 말을 듣는 동안 일그러져 가는 매니저의 표정을 보며 나는 후회했다. 오스만투르크가 그리스를 약 400년간 지배했다는 사실을 왜 깜빡했던가. 그 후 호스텔 매니저는 공연히 나에게 심술을 부렸다.

그리스와 터키는 민족감정이 안 좋다. 그리스는 지배당했으니 터키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터키 역시 그리스를 싫어한다. 그리스 독립 과정에서 서로 물리적 충돌을 일삼은 데다 그 후로는 지금도 얽힌 실타래처럼 남아 있는 키프로스 문제로 마찰을 빚어와 적대적 민족감정이 미처 가라앉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국을 이동하는 여행자들은 각별히 민족감정에 신경 써야 한다.


by 100명 2007. 4. 13. 23:08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그리스 델포이
[세계일보 2004-08-12 16:15]

고대 그리스 문화가 아테네에서 꽃을 피웠고 올림픽이 올림피아에서 싹을 틔웠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델포이였다.

세상의 중심으로 가는 길은 산길을 따라 돌고 돌았다. 아테네에서 떠난 버스가 굽이치는 산길을 3시간 정도 가자 거대한 파르나소스산이 나타났다. 버스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가니 델포이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돌기가 돋은 종 모양의 돌, 옴팔로스였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신이 독수리 2마리를 놓아주면서 세계의 중심을 향해 날아가게 했더니 독수리들은 델포이에서 만났다. 그 지점을 돌로 표시한 후 그 돌을 지구의 중심을 의미하는 대지의 배꼽, 즉 옴팔로스(Omphalos)라 불렀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그 외에도 아폴론 신전의 축소 모형과 신전에 바쳐진 보물들, 이륜전차를 모는 사람의 청동상, 낙소스인들이 봉헌한 스핑크스상 등이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 사자의 몸뚱이,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이 스핑크스는 ‘아침에는 발이 4개, 낮에는 2개, 저녁에는 3개 달린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내어 ‘사람’이라는 답을 못 내놓으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전설의 괴물이다.

박물관을 나와 10분 정도 참배의 길을 걸어 올라가면 아폴론 신전이 나온다. 기원전 6세기에 처음 만들어졌고, 두 차례 파괴된 후 기원전 4세기에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몇 개의 기둥과 터만 남아 있다.

아폴론 신전이 유명한 것은 델포이의 신탁 때문이었다. 델포이의 신탁소는 원래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인 뱀, 퓌톤이 지켰는데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론이 퓌톤을 죽이고 그곳을 차지했다. 또다른 신화에 의하면 아폴론이 죽인 것은 뱀이 아니라 델퓌네, 즉 ‘자궁과 같은 것’이라는 이름의 암룡이었는데 그로부터 델포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아폴론의 신전에는 신탁소가 있었다. 벌어진 바위 틈에서 나오는 증기(메탄가스로 추정)를 마시고 환각 상태에서 무녀가 중얼거리면 그것을 사제가 해석해주었는데, 현재는 바위 틈에서 그런 가스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곳에서 신탁을 받은 사람은 많았다. 소아시아에 있던 리디아 왕국을 다스리던 기원전 6세기의 크로이소스왕은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면 대제국이 파괴될 것’이라는 델포이 신탁을 믿고 공격했으나 자신이 오히려 나라를 잃었다. 그것을 나중에 항의하자 “그 대제국이 누구의 것인가를 묻지 않은 당신이 현명하지 않았다”는 황당한 답을 듣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신탁도 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한 자가 소크라테스냐”고 묻자 “그렇다”는 답을 듣는다. 이를 스스로 의심한 소크라테스는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었다.

◇상아로 만든 여자상

사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그 이전의 현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아폴론 신전에도 새겨져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도 신탁을 받았다. 테베의 왕자였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코린토스에서 살게 된다. 그러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을 듣고 괴로워하다, 그것을 피하고자 집을 떠난다. 그러나 길을 가다 만난 친아버지를 모르는 채 죽이고, 괴물 스핑크스를 처치한 공으로 테베의 왕비, 즉 자신의 친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후일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도려낸 후 참회의 길을 떠나게 되니 델포이의 신탁은 그렇게 실현된 것이다.

고즈넉한 신전의 폐허에 앉아 이런 신화와 역사를 더듬다보면 문득 먼 옛날 신화의 현장에 온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 들고만다.

근처에는 집회장소이자 시장이었던 아고라의 터가 있고, 5000여명의 관중을 수용한 원형극장, 트랙의 길이가 200m쯤 되는 경기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음악 축제와 육상제전이 결합된 델포이 제전이 열리기도 했었다.

이렇듯, 기원전 8∼6세기에 그리스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델포이는 후일 기독교 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의미를 상실했고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1892년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지금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여행작가

■ 여행정보

델포이는 아테네에서 약 170km 떨어진 곳에 있어서 당일치기 관광이 가능하다. 아테네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루에 4∼5편 왕복하는 정기버스를 타고 개인적으로 갈 수도 있고 당일치기 혹은 이틀짜리 관광상품을 이용할 수도 있어 매우 편리하다. 주변에는 호텔과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분위기 좋은 식당들도 많다.

■ 에피소드

그리스 사람들은 생각보다 차고 거친 것 같다. 하루는 아테네의 같은 숙소에 묵던 호주 여행자가 거리에 앉아 공업용 본드 위에 들러붙은 배낭을 떼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체크 아웃을 한 후 배낭을 거리에 두고 잠시 호텔로 들어온 사이에 누군가가 골탕 먹이려고 배낭 밑을 본드 범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호주 청년은 전날에도 그리스인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었는데, “이것 보았지요. 이러니, 내가 그런 말 안 해요?”라며 투덜거렸다.

델포이에 간 나에게도 불쾌한 일이 발생했다. 버스에서 내려 아폴론 신전 가는 길을 중년 사내에게 물어보니 기분 나쁘게 위아래를 훑어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박물관 근처에서 직원에게 매표소 위치를 물었을 때도 직원은 인상을 쓰며 가르쳐준 뒤 뭐라 중얼거리며 화를 냈다.

물론 이런 한두 가지 에피소드로 그리스 민족성을 들먹거리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관광객이 엄청나게 몰려오다 보니까 외국인에 대한 신경과민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리스인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번 아테네 올림픽이 그들에게 세련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by 100명 2007. 4. 13. 23:08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그리스 마라톤·수니온곶
[세계일보 2004-08-26 17:30]

기원전 5세기쯤 동방의 통일 세력인 페르시아가 팽창 정책을 추진하자 지중해 일대에 전운이 감돌았다. 드디어 기원전 5세기 말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페르시아 사이에 큰 전쟁이 3차례 일어났다.

마라톤의 기원이 된 마라톤 전투는 기원전 490년에 있었던 페르시아의 2차 침공 때 일어났다. 격전지였던 마라톤 평야는 아테네에서 동북쪽으로 40쯤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그곳에는 마라토나스시가 있는데, 아테네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아테네시를 벗어난 버스는 일단 동쪽으로 가서 에게해 연안의 항구도시 라피나를 거친다. 그곳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파란 에게해를 감상하며 북상하다 마라토나스시에 도착하기 전에 ‘팀보스’란 곳이 나온다. 버스에서 내려 바다 쪽 벌판으로 조금 걸어가니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나무에 둘러싸인 거대한 무덤이 있었다.

바로 마라톤 전투에서 전사한 그리스 영웅 192명이 묻힌 곳이다. 반면 페르시아군의 전사자는 6400명. 이 믿을 수 없는 승리를 전하려고 그리스군의 병사인 필리피데스(혹은 페이디피데스)가 아테네시까지 달려가서 “우리가 승리했다”라는 말을 한 후 숨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설에 가깝다.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는 그런 얘기가 없고 다만 아테네의 직업적인 장거리 주자, 필리피데스가 스파르타에 지원군을 요청하려고 이틀에 걸쳐 약 200를 뛰어갔다는 기록은 나온다. 그런데 그 이름이 후일 ‘말(馬)이 필요치 않은 자(장거리 주자)’라는 뜻의 페이디피데스로도 알려져 두 단어가 혼용되어 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쨌든 이 전설에 의거해 프랑스의 언어학자 미셸 브레알이 1896년 열린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때 정규 종목에 넣자고 주장해 마라톤은 정식 종목이 됐다.

한국 시각으로 30일 0시에 시작되는 이번 남자 마라톤은 이 무덤부터가 아닌, 마라토나스시의 마라토나스 스타디움에서 시작해서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까지 달린다. 제1회 때 달렸던 거리는 약 39였고 그 후 7회 때까지는 마라톤 거리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1924년 파리대회 때부터 42.195로 통일했는데, 이 거리는 1908년 제4회 런던대회의 마라톤 거리였다.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지만,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은 마라톤에 참가하지 않고 1974년 아시안게임 때도 마라톤을 제외했다. 현재 마라톤은 정치와 무관한 스포츠지만 그 기원은 전쟁에서 비롯되었으니 패한 사람으로서는 기분 좋을 리 없을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2차 전쟁은 마라톤에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라톤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은 급히 배를 타고 수니온곶으로 왔다. 그곳에 상륙해 아테네를 치려고 했지만 재빠르게 그리스군이 대처한 탓에 할 수 없이 귀국하게 된다.

수니온곶은 아테네의 동남쪽 70 지점에 있는데 깎아지른 절벽 위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 신전이 있다.

▲(사진)마라톤 전투의 전사자묘

그리스인들은 지중해를 무대로 활약했는데,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는 뱃길이 안전한 편이나 다른 때에는 풍랑이 심해 늘 바다를 두려워하며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에게 제사를 지냈다. 포세이돈은 태풍을 부르거나 가라앉히고 해안을 뒤흔들기도 한다. 또 그가 놋쇠 발굽과 황금 갈기를 가진 말이 끄는 2륜마차를 타고 바다 위로 나가면 바다는 그 앞에 엎드려 조용해진다고 한다.

포세이돈 신전은 기원전 5세기에 세워졌는데, 페르시아군의 공격 때 파괴돼 다시 복원됐지만 또다시 파괴돼 지금은 폐허처럼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그 폐허의 분위기가 더욱 낭만적이다. 특히 일몰에 바라보는 신전과 에게해의 분위기는 기막히게 좋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이 풍경에 심취해 신전의 기둥에 낙서를 남겼다고 한다. 오늘도 많은 관광객들은 그런 역사와 신화를 회상하며 신전을 거닐고 있다. 여행작가

■여행정보

그리스 병사들의 무덤을 보려면 아테네에서 마라토나스행 버스를 타고 가다 5쯤 남겨 놓고, 운전사에게 ‘팀보스’라고 말해야 한다.


아테네에서 수니온곶까지는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리고 수니온곶에서 아테네로 오는 막차는 오후 7시에 출발한다. 그러므로 해가 일찍 지는 겨울에는 일몰을 볼 수 있지만, 해가 오후 8시30분에나 지는 여름에는 개인적으로 갔을 경우 일몰을 보기가 힘든다. 렌터카를 구하든지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하는 수밖에 없다.

■에피소드

길거리 요리 ''수블라키'' 맘껏 즐겨

고급 호텔에서 그리스 음식을 즐기는 단체 관광객과는 달리 개인 여행자들은 타베르나를 많이 이용한다. 타베르나는 서민적인 그리스인의 식당으로 떠들썩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부담스럽지 않다. 그러나 올림픽을 맞아 그리스의 식당들이 음식값을 배나 올렸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만약 가격이 부담된다면 거리의 음식을 즐기는 것도 좋다. 그리스 여행 중 내가 가장 즐겼던 거리의 음식은 ‘수블라키’였다. 양, 소, 닭, 돼지 고기 등을 썰어 양파와 파인애플, 피망 등과 번갈아 꼬치에 끼워 구운 요리로 값도 저렴하고 맛도 있었다. 여기다 얇은 밀전병인 ‘파타’에 고기를 싸서 요구르트와 오이, 올리브유, 식초, 다진 마늘을 혼합해 만든 ‘차지키’라는 새콤한 소스에 찍어 먹으면 한끼 식사로는 그만이다. 또한 각종 다진 고기와 야채를 빵에 싼 후 오븐에 넣어 구워낸 ‘기로스’도 입맛에 맞았다.

국내에서는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의 기로스, 홍익대 앞의 그릭조이, 이태원의 산토리니 등에서 그리스 음식을 맛볼 수 있다.

by 100명 2007. 4. 13. 23:07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터키 카파도키아
[세계일보 2004-09-09 18:33]

낯선 세계에 툭 떨어졌을 때 느끼는 가슴 설렘,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가장 큰 묘미가 아닐까. 그 낯섬의 흥분 속에서 현실을 넘어 무한히 확장되는 의식은 이탈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런 여행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터키 중부의 카파도키아 지역이다. 이스탄불에서 밤 버스를 타면 아침에 카파도키아의 중심 도시 괴레메에 도착하는데,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다가 눈을 뜨는 순간 불현듯 외계의 다른 행성으로 날아온 것만 같은 충격을 받는다. 회색빛 바위산과 계곡을 배경으로 도토리나 버섯, 남근 같은 거대하고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은 수백만년 전 인근 에르지예스 산(해발 약 4000m)의 폭발로 시작됐다. 엄청난 화산재가 엉기면서 응고했고 수백만년 동안 바람과 물에 의해 깎이면서 재앙은 경이로운 자연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그런 풍경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열에 강하고 가공이 편리한 응회암 바위를 파서 집을 만들었는데, 동굴 집에서 처음 산 사람들은 기원전 2000년경의 히타이트족으로 여겨진다.

그후 페르시아와 로마의 지배를 거치면서 4세기부터 금욕적인 고행을 하는 기독교 수도사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파도키아 지역에만 약 3000개의 동굴 교회를 만들고 수도생활을 했는데, 특히 괴레메 근처의 ‘야외박물관’이 유명하다. 이곳에 있는 동굴 교회들은 대개 6세기에서부터 12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동굴 안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수많은 프레스코 벽화가 남아 있다.

카파도키아는 ‘아름다운 말들의 땅’이란 뜻의 ‘카트파두키아’에서 유래했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말보다도 관광으로 유명하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볼거리가 많다. 거대한 버섯 모양의 바위 수백개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파샤바, 마치 ‘스타워즈’에 나오는 배경 같은 황량한 분위기의 셀리메 마을 등이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곳은 데린쿠유 지하동굴 도시다.

데린쿠유란 ‘깊은 웅덩이’란 뜻이다. 1960년대 어느 날 마을의 닭이 우연히 사람 머리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주인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질 않아 당국에 신고를 했고, 닭을 잡으려고 안을 파보니 2만여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지하동굴 도시가 나타났다.

지하 20층 정도의 엄청난 규모지만 관광객은 지하 55m인 8층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간 통로를 가이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마치 개미가 된 것만 같다. 지하의 온도는 항상 평균 15도에서 18도로 유지되고, 동굴 안에는 부엌과 방앗간, 식량창고, 깊은 우물, 맷돌 모양의 입구를 막는 바위가 있다. 지하 7층에는 약 1만명이나 모일 수 있는 엄청나게 넓은 교회와 우물, 식량저장고, 학교, 고해성사실도 있고 가축을 기르는 곳도 있다. 인분은 토기에다 해결한 후 밀봉을 한 다음 나중에 바깥 농토의 비료로 썼다.

◇데린쿠유 동굴의 통로.

장례를 치를 땐 시신을 일단 묻고 그것이 썩은 후에 뼈만 추려서 다시 보관했다. 또 수만명이 빵을 구워도 연기가 흔적도 없이 밖으로 나가게 하고 밖의 신선한 공기를 안으로 들어오게 만든 52개의 통풍구가 있다 하니 그야말로 완벽한 시스템을 갖춘 지하도시였다.

그럼 언제, 누가 이 도시를 만들었을까. 정확한 문헌적 자료는 없고 6000∼70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부분적으로 원시인들이 살았고 히타이트족이 지하 2층 정도에서만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처럼 거대한 동굴 도시를 건설한 것은 7세기무렵의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아랍인의 침공이 거세지자 거대한 동굴 도시를 만들어 피신했다. 데린쿠유 동굴은 그 중의 하나로 인근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30여개의 지하도시가 있고, 수십개의 지하도시를 연결하는 비밀통로가 있다는 얘기도 들리니 완벽한 지하세계였다.

비록 현재 그곳에 사람은 살고 있지 않지만, 핵 전쟁이 일어나도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거대한 지하세계를 보기 위해 오늘도 전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여행작가

■여행 정보

이스탄불에서 오후 8시쯤 버스를 타면 다음날 오전 8시쯤 괴레메에 도착한다. 여기서는 좋은 호텔보다도 동굴 숙소에서 묵어볼 만하다. 동굴 안에 욕실이 갖춰져 있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포근하다. 또 커다란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아난 마을 풍경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감상할 수 있다. 그 중에 사리헨 펜션은 숙박비가 더블 18달러, 싱글 9달러 정도로 싼 편이다.

야외 박물관은 괴레메에서 2㎞쯤 떨어져 걸어갈 수 있다. 반면 데린쿠유 동굴과 파샤바, 도자기 공장 등은 멀리 떨어져 있고 공공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에 현지 여행사의 투어를 이용해야 한다. 하루 일정이 1인당 25달러 정도.

■에피소드

영화 20도 추위에도 동굴펜션 안은 포근

괴레메는 이스탄불의 해양성 기후와는 달리 겨울에는 매우 춥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10여년 전 겨울에 처음 갔을 때 괴레메는 영하 20도를 밑돌았고 30년 만의 폭설로 뒤덮여 있었다.

당시 우연히 알게 된 숙소가 사리헨 펜션인데, 동굴 속에 지어 겨울인데도 포근했다. 다른 여행자들이 없어 쓸쓸했던 나는 그 집 아이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0년 후 여름에 다시 그곳에 가보았다. 집주인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내가 그 집 아이들에 대해 묻자 아들은 이미 군대를 갔고 딸은 시집을 갔다며 내 손을 잡았다.

마침내 내가 떠나던 날, 단지 예전에 잠시 들렀다는 인연만으로 포도주 한 병을 선물하려던 집주인의 따스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동굴 숙소는 어떤 곳보다도 아늑했다.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보는 여행자.

by 100명 2007. 4. 13. 23:03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터키 도구베야지트
[세계일보 2004-09-02 16:42]

13세기 후반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대아르메니아의 높은 산에 노아의 방주가 있다. ‘노아 방주의 산’이라 불리는 이 산꼭대기에는 늘 엄청난 양의 눈이 쌓여 있어 아무도 올라갈 수 없다.”

마르코 폴로가 기술한 그 산은 현재 터키 동부에 있는 해발 5185m의 아라라트 산을 가리킨다. 이 기록을 본 많은 서양 사람들은 가슴을 설렜고 19세기에는 노아의 방주를 보았다는 이도 나타났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러다 1985년에 미국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파솔드는 “노아의 방주를 아라라트산이 아닌, 그 근처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 현장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다. 서부의 이스탄불에서 버스를 타고 갈 경우 터키를 동서로 횡단하게 되는 셈이다. 동부의 에르주룸이란 도시까지 약 20시간이 걸리고,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5시간 정도 더 동쪽으로 가야 한다. 길은 멀지만 풍경은 환상적이다. 물결처럼 끝없이 굽이치는 구릉과 초원을 따라 하염없이 가다보면 갑자기 하얀 눈으로 뒤덮인 거대한 아라라트산 봉우리가 나타난다.

그 장엄한 모습을 보는 순간 ‘드디어 왔구나’라는 감동이 밀려온다.

아라라트 산 근처에 도구베야지트란 국경 도시가 있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30쯤 더 가면 이란 영토와 맞물리는 국경이 나오니 터키의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라라트 산 근처를 돌아보려면 자동차를 대절해야 했다. 노아의 방주로 가는 길에 절벽 위 우뚝 솟은 이삭파샤 궁이란 곳에 들렀다. 이 궁은 17세기 무렵 이 지방을 다스리던 쿠르드족의 왕이 건립했는데, 절벽 앞에 서서 황량한 벌판과 멀리 솟구친 산을 바라보니 마치 세상의 끝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노아의 방주 흔적은 세상의 끝 언저리에 있었다. 이삭파샤 궁에서 산길을 돌고 돌자 ‘노아의 방주 국립공원’이란 영어 팻말 옆에 조그만 전망대가 나왔고 건너편 언덕에 현장이 있었다. 조금 실망스러운 풍경이었다. 배가 아니라 흙이 도드라져서 거대한 배모양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삭파샤궁과 주변의 풍경.

구약 창세기에 나오듯이, 노아가 자신의 가족과 세상의 동물들 한 쌍과 식물들을 싣기 위해 만들었던 방주는 과연 얼마나 컸을까?

성경에는 길이가 300큐빗, 너비가 50큐빗, 높이가 30큐빗이라고 나오는데 큐빗이란 손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말한다. 정확히 계산하기 힘들지만, 1큐빗을 45㎝쯤으로 계산하면 길이는 135m, 폭은 22.5m, 높이는 13.5m가 되며 이곳에서 발견된 흔적과 비슷한 크기라고 한다. 탐사단은 그곳의 흙에 섞인 금속과 나무 성분이 주변의 흙에 비해 3배나 높다고 주장하며, 각종 가설과 상상도를 전시하고 있었다. 또한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트 산에 있지 않고 이곳에 있게 된 연유는 물이 빠지면서 미끄러져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것을 노아의 방주라 믿고 현장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판자들은 노아의 방주는 아마도 거대한 나무 상자 같은 형태의 배였을 것이고 5000∼6000년 전의 기술로 저런 유선형의 배를 만들 수 없다고 의심한다. 또한 5000∼6000년 정도의 세월이라면, 배의 흔적이 더 남았어야지 저렇게 흙무더기만 남을 리는 없다고 비판한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쿠르드족인데 그들의 의견도 갈리고 있었다. 이슬람을 믿는 이들은 그들의 경전 ‘쿠란’에도 대홍수 얘기가 실려 있고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은 ‘주디산’이라고 적혀 있다. 그 산이 아라라트 산을 말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모두 믿고 있는 것은 한때 이 지역이 물에 잠겼으며 노아의 방주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믿음이 아니더라도 영국의 인류학자 프레이저에 의하면 세상의 수많은 문화권과 종족들의 신화에는 대홍수 얘기가 공통으로 나타난다고 하니 대홍수는 분명히 이 세상에 있었던 재앙이었음에 틀림없다.

◇노아의 방주 흔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곳.

오늘도 탐사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몇 달 전, 미국의 탐사단이 빙하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노아의 방주를 찾아 아라라트 산으로 떠났다는데 과연 그들은 온전한 노아의 방주를 발견할 수 있을까?

여행작가

이스탄불에서 여행을 시작할 경우, 도구베야지트만 보기 위한 목적이라면 버스보다는 비행기가 낫다. 비행기로 일단 에르주룸이나 흑해 연안 도시 트라브존까지 간 후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도구베야지트까지 가면 된다.

트라브존에서 에르주룸까지는 버스로 약 6시간, 에르주룸에서 도구베야지트까지는 약 5시간 소요. 도구베야지트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터키와 이란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많이 드나들어 숙소와 음식점들이 많다. 아라라트산 트레킹도 여행사를 통해 할 수 있다.

■ 에피소드

터키의 버스 여행은 세상에서 가장 쾌적한 버스 여행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터키는 기차보다 버스 산업을 육성시켜서 버스터미널이 마치 공항 대합실 같다. 멋진 버스터미널에서 휴식을 취하다 유럽에서 수입한 쾌적한 벤츠 버스에 올라타면 남자 차장들이 ‘코라니아’라는 알코올성분이 강한 향수를 손에 뿌려 준다. 손과 얼굴에 이걸 바르면 기분이 산뜻해지는데, 처음엔 낯설어서 어리둥절하다가도 익숙해지면 은근히 기다려지는 서비스다. 그리고 커피와 차, 콜라 대접이 이어지고, 흥겹고 매력적인 터키 음악이 흘러나온다. 비스듬히 의자에 누워 차 한잔 마시면서 차창 밖의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은 행복하기 그지 없다.

도구베야지트는 군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민들이 쿠르드족이다. 독립을 원하는 그들과 터키 정부 사이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으니, 가급적이면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한때 충돌이 있었지만 지금은 평화롭다.

by 100명 2007. 4. 13. 23:03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터키 파묵칼레·캉갈
[세계일보 2004-09-16 16:27]

세상의 수많은 온천 중에서 터키의 파묵칼레만큼 경이로운 온천도 없을 것이다. 터키 관광엽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파묵칼레 온천은 터키의 서남부 지방에 있다. 일단 데니즐리란 중소 도시까지 가서 돌무슈(미니버스)를 타고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후텁지근한 여름 바람을 맞으며 창 밖의 야자나무들을 바라보면 마치 열대지방에 온 것 같은데, 20분쯤 지나면 난데없이 남극의 거대한 빙산처럼 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듯한 산이 나타난다.

원래 파묵칼레는 ‘목화’란 뜻으로 예전에는 하얀 산이 목화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무더운 여름임에도 빙산처럼 보여 서늘한 느낌을 주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온천욕을 즐기고 있다.

그 묘한 풍경은 바로 자연의 경이로운 연출에서 왔다. 산을 흘러내리는 온천수에는 석회질이 많고 긴 세월 석회가 침전돼 하얀 석회가 산을 뒤덮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석회암은 크고 작은 계단을 만들었고 그 사이사이 온천수가 괴었다. 파묵칼레의 온천수는 섭씨 35도의 탄산수로 특히 신경통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서 로마 황제들도 이곳을 종종 방문했다고 한다.

파묵칼레에는 온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꼭대기에는 히에라폴리스 유적지가 있다. 이곳은 기원전 3세기부터 시리아와 페르가몬 왕국의 지배를 잠시 받다가 로마 치하에 크게 발전했는데, 지금도 서기 2세기에 만들어진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원형극장이 잘 보존돼 있다.

히에라폴리스는 한때 인구 8만명에 이르는 도시였으나 오스만투르크와 비잔틴 제국의 전쟁으로 인해 12세기부터는 폐허로 변했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발굴됐다. 아쉬운 것은 온천수의 양이 점점 적어져서 야외 계단에 고여 있는 온천의 깊이가 무릎 정도밖에 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온천욕을 하고 싶으면 산 정상의 호텔로 가면 된다.

이 호텔에서는 유적지의 무너진 대리석 기둥을 그대로 두고 온천탕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대리석 기둥 사이를 물고기처럼 헤엄쳐 다니며 옛 로마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터키는 온천이 많다. 전국에 300여개의 온천이 있는데 아주 신기한 온천이 또 있다.

터키 중부의 캉갈이란 소도시 근처에 있는 물고기 온천의 정식 명칭은 ‘발리클리 카플리자’. 발리클리는 물고기란 뜻인데, 이곳은 섭씨 30여도의 온천물에 사는 물고기가 사람들의 피부병을 고쳐준다 해서 매우 유명하다. 이곳은 별로 화려하지 않고 관광객보다는 피부병 환자들이 많이 오고 있다.

숲이 우거진 넓고 아늑한 단지를 지나 허름한 건물로 들어가면 샤워장이 나온다. 일단 이곳에서 샤워를 하고 통과하면 탕이 나오는데, 모두 6개가 있다. 관광객을 위한 수영장이 있고, 피부병 환자들을 위한 남탕·여탕이 두 개씩 나뉘어 있다. 한 개의 탕에는 송사리 같은 조그만 물고기들이 있고, 또 한 개의 탕에는 손가락만한 조금 큰 물고기들이 있다. 물고기들은 사람들이 키운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이 온천수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한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병원에서도 치료가 안 되는 몹시 심한 마른버짐을 앓았는데, 이곳에 와서 이틀 만에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캉갈의 물고기 온천에서 피부병을 치료하는 사람.

“와, 처음에는 조그만 물고기가 있는 탕에 들어갔는데 한 300마리가 내 몸에 모여들어 상처를 쪼았어요. 그런데, 묘하게도 효과가 있더라고요. 그러고 며칠이 지난 뒤 조금 큰 물고기들이 있는 탕으로 왔는데, 요놈들은 상처 부스러기를 살살 핥아먹어서 간지럽고요.”

그는 하루 8시간씩 온천 안에 있는데 3주일 정도 더 있다 갈 예정이라며 건성피부염에 효과가 좋다고 했다. 세계 각국의 환자가 오는데 이란에서 온 피부과 의사는 자기 피부병을 못 고쳐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허허, 의사가 물고기 의사한데 치료받고 있소이다.” 피부과 의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용한 온천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로마시대의 원형극장.

■에피소드

목욕탕선 수영복 입어… 누드로 들어간뒤 ‘아뿔싸’

한때 ‘터키탕(증기탕)’이 퇴폐적인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원래 터키의 하맘(목욕탕)은 뜨끈하게 달궈진 대리석으로 만든 단에 누워서 피로를 풀고 목욕하며 휴식을 취하는 건전한 곳이다. 처음 하맘에 갔을 때 나는 옷을 훌훌 다 벗고 수건 하나만 갖고 들어갔다. 그런데, 아뿔싸 사람들은 대부분 수영복을 입었거나 커다란 타월로 치부를 가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황급히 조그만 수건으로 가릴 곳을 가리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대충 씻을 수밖에 없었다. 터키에서는 온천이든 하맘이든 대개 수영복을 입는다. 터키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나라의 목욕탕에서 그러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곳이 아닌 전통적인 하맘은 남탕과 여탕이 구별돼 있지 않고, 같은 탕을 이용하되 대략 2시간씩 교대로 입장시킨다. 처음에 이런 사정을 모르고 여탕 시간대에 갔다가 못 들어가게 해서 몹시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여행정보

데니즐리에서 파묵칼레까지는 돌무슈로 약 20분 소요. 데니즐리는 주요 도시에서 장거리 버스가 많이 왕래한다. 파묵칼레의 여행자 숙소들은 깨끗하고 조그만 온천 수영장도 딸려 있어 권할 만하다. 2인실이 대략 8∼12달러. 산 정상의 호텔에 있는 멋진 온천수영장은 입장료가 6달러 정도.

캉갈의 물고기 온천을 가려면 먼저 시바스로 가야 한다. 시바스는 버스로 앙카라에서 7시간, 이스탄불에서는 13시간 정도 걸린다. 시바스에서 캉갈까지는 미니버스로 약 1시간 걸린다. 캉갈에서 택시를 타고 20분쯤 달리면 발리클리 카플리자가 나오는데 택시비로는 왕복 14달러 정도 요구한다. 온천 입구의 사무실에서 피부병 상담도 받을 수 있고 일반관광객은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면 된다. 온천 주변에 숙소가 있는데, 만약 당일치기 방문이라면 시바스 버스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호텔에 묵는 것이 편하다.

여행작가

by 100명 2007. 4. 13. 13:47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터키 에페스
[세계일보 2004-09-30 16:18]

터키 서부의 에게해안에 에페스란 곳이 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로, 성경에서는 에베소로 일컬어지며,사도 바울이 전도한 곳으로 훗날 7대 교회 중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에페스(고대도시명 에페수스)에 가려면 우선 셀주크란 도시로 가야 한다. 에페스는 셀주크에서 약 3㎞ 떨어져 있는데, 그 중간 벌판에 우뚝 솟은 기둥이 있다. 바로 세계 7대 불가사의라 불리는 아르테미스 신전 터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들은 에페스를 아테네 다음 가는 도시로 발전시키며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을 지었다. 하지만 기원전 356년 ‘헤로스트라투스’가 신전을 불태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마어마하게 나쁜 짓을 하면 세상에서 유명해질 수 있다는 속셈에서였다고 한다.

그후 에페스인들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두 배나 큰 신전을 짓겠다며 대리석으로 높이 18m짜리 기둥을 127개나 만들었다. 그러나 거대한 신전은 서기 3세기의 침략자 고트인들에 의해 파괴됐고 현재는 달랑 기둥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들이 숭배하던 아르테미스 여신은 제우스신의 딸이다. 달과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그녀의 가슴에는 수많은 유방이 달려 있는데 현재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신전 터에서 찾을 수 없고 셀주크의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에페스는 쿠사다시 가는 길을 따라 가다 중간에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온다. 현재 유적지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로마 시대의 흔적인데, 들어가자마자 왼쪽으로 거대한 원형극장이 나온다. 원형극장 꼭대기에서 밑을 바라보면 쿠사다시 쪽으로 뻗어나간 길이 훤하게 보인다.

바로 이 길은 에게해안의 쿠사다시 항까지 뚫린 예전의 고속도로였다. 마차들은 해안에 도착한 물건들을 싣고 이 길을 따라 에페스로 왔다.

극장을 나와 대리석의 길을 따라 가면 길바닥에 새겨진 발과 여인의 상체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터키 전통복장으로 나르길레(물담배) 피우는 모습.

이것은 ‘세계 최초의 광고’라 일컫는 집창촌 광고다. 이 발보다 큰 사람, 즉 성인만 오라는 표시였다고 한다. 집창촌은 바로 그 위쪽의 아고라 터 맞은편에 있는데 가로 세로 각각 20.5m의 터에 정원이 있고 방들은 모자이크 벽화들로 장식돼 있다. 그 당시 윤락녀들은 교육 수준이 높았고 각자 자기 소유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맞은편에는 에페스 유적지에서 가장 잘 보존된 건축물인 2층짜리 셀수스 도서관이 있는데 한창 때에는 1만2000권의 책이 있었다. 계속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름다운 신전과 집터, 분수대, 극장, 목욕탕 터가 있고 넓은 평야에는 그외에도 수많은 유적지가 나온다.

이렇듯 서기 1세기쯤 약 20만명의 인구가 살았던 에페스에는 당시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번성했던 에페스가 비잔틴 시대에 망한 이유는 말라리아였다고 한다.

유적지 후문을 나오면 산이 있고, 그 산 정상에 성모 마리아의 집이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사도 요한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는 곳인데, 그렇게 알려진 것은 꿈 때문이었다. 1878년 독일의 어느 수녀는 꿈속에서 성모 마리아가 머물렀던 집을 보고 계시를 받는다. 그리고 그 꿈에 관해 책을 냈는데, 후일 탐사반이 와보니 책에서 묘사한 집터와 이곳이 너무도 일치했다. 물론 수녀는 고향을 떠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후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이곳을 성지로 선포했다. 현재 집안에는 성모 마리아상과 촛대가 놓여져 있고 관광객들 중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에페스 유적지에는 2세기쯤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 교회도 있다. 당시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라는 파가 있었고, 인간 예수의 어머니지 신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파도 있었다. 서기 431년 이 교회에서 열린 3차 종교회의에서 패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몰려 추방됐고, 451년 리비아의 사막에서 죽었다고 한다.

또한 셀주크에는 사도 요한의 유골을 묻은 후 그 위에 만들었다는 사도 요한의 교회가 있으니, 터키의 에페스는 로마의 유적지와 함께 기독교의 자취를 찾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여행작가

■에피소드

에페스를 구경하기 위해 셀주크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 묵을 때였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말하기를 한국 여자가 아이 둘과 여행하는데 몹시 아파 2층 방에 누워 있다는 얘기였다. 같은 동포로서 걱정이 돼 그 방에 가보니 중년 여인은 더운 여름인데도 점퍼를 입은 채 덜덜 떨고 있었고 초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여행하다 종종 앓아 본 나였기에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열도 있고 설사도 한다는 말을 듣고, 그때 같이 여행하던 아내가 마침 챙겨왔던 포도당 분말과 항생제를 주었다.

다음날 아침 조금 회복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터키 여행 2주일째였는데 너무 강행군을 해서 탈이 난 것 같다고 했다. 원래 여행 3주일 전후가 고비다. 일주일은 긴장해서 잘 다니고, 2주째는 누적된 피로 때문에 힘들어하다 3주째 많이 앓게 된다.

아이들을 데리고 낯선 곳을 용감히 다니고 있는 중년 여인이 대단해 보였다. 옆에 있는 아이들도 듬직해 보였다. 두 아이와 엄마. 그들은 평생 그 여행길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용감한 사람들만이 길을 떠나는 법이다.

■여행 정보

에페스에는 숙소가 없어서 셀주크에 많이 묵는다. 버스터미널 건너편에 박물관이 있고 그 뒷골목에 비교적 저렴하고 쾌적한 여행자 숙소가 많다. 보통 방 하나에 6∼7 달러 정도면 된다.

셀주크에서 에페스 가는 방법은 3가지다. 우선 걸으면 30분 정도 걸린다. 다음으로 에페스까지 직접 들어가는 미니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다. 아니면 쿠사다시행 미니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 에페스 유적지까지 걸어가도 된다.

오전에 에페스 유적지를 구경한 후 오후에 쿠사다시에 가서 해변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훌륭한 일일코스가 된다. 셀주크∼에페스 구간은 미니버스가 자주 다니고 마지막 버스는 자정 무렵까지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

■여행 정보

에페스에는 숙소가 없어서 셀추크에 많이 묵는다. 버스터미널 건너편에 박물관이 있고 그 뒷골목에 비교적 저렴하고 쾌적한 여행자 숙소가 많다. 보통 방 하나에 6∼7 달러 정도면 된다. 셀추크에서 에페스 가는 방법은 3가지다. 우선 걸으면 30분 정도 걸린다. 다음으로 에페스까지 직접 들어가는 미니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다. 아니면 쿠사다시행 미니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 에페스 유적지까지 걸어가도 된다.

오전에 에페스 유적지를 구경한 후 오후에 쿠사다시에 가서 해변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훌륭한 일일코스가 된다. 셀추크∼에페스 구간은 미니버스가 자주 다니고 마지막 버스는 자정 무렵까지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

by 100명 2007. 4. 13. 13:43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터키 트로이
[세계일보 2004-10-07 16:18]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13세기의 지중해안은 비상시국이었다. 인구는 생산력에 비해 과잉이었고 가뭄과 기근이 휩쓸었다. 재물을 약탈하고 노예와 여자를 탈취하는 것이 관행이었던 이 시절, 정세는 극도로 불안했다.

그 당시 강대국은 이집트와 히타이트였다. 이집트의 왕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큰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히타이트 왕국은 현재 터키의 중부 지방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 본토 남부에 근거지를 둔 미케네 문명이 새롭게 떠올랐고, 아케아인으로 일컬어지는 그들은 시장 확대와 무역을 위해 주변의 섬과 나라들을 공격했다.

해상세력인 미케네 문명과 대륙 세력인 히타이트 문명의 접경에 있던 트로이는 전통적으로 히타이트 왕국과 동맹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쳤을 때 히타이트는 트로이에 동맹군을 보냈는데, 그 바람에 전쟁이 10년이나 걸렸다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렇듯 트로이 전쟁은 해상무역의 주도권 쟁탈전이었으나,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에 의해 신과 여인이 어우러진 찬란한 문학으로 재탄생했다.

그가 쓴 대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그러자 메넬라오스의 형인 미케네왕 아가멤논이 그리스 연합군을 형성해 트로이로 원정을 떠났고,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 10년째 되는 해의 기록이다.

트로이의 자취로 추정되는 유적은 터키 서북부 지역의 에게해 인근에 있다. 우선 차나칼레란 도시로 간 후, 그곳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벌판을 달리면 트로이 유적지가 나온다.

트로이 유적지 입구에는 상상력을 동원해 만든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가 세워져 있고 목마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트로이 성터가 있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간 사람들은 갑자기 펼쳐지는 폐허 같은 풍경에 실망감을 금치 못하게 된다. 원래 가로 200m, 세로 150m 정도라는 성벽은 사라지고, 호메로스가 묘사한 ‘높은 탑, 거대한 성벽’ 등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화로만 여기던 트로이 전쟁을 역사 속으로 편입시킨 사람은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그는 히사를리크 언덕에 트로이의 성터가 있음을 확신하고 집요하게 발굴을 했다. 발굴을 해보니 매우 복잡했다. 기원전 3000년쯤부터 로마시대를 거치는 동안 건설됐던 9개의 성터가 연이어 나왔다.

이 중에서 기원전 1900년에서 1240년 사이에 건설된 여섯 번째의 도시가 트로이 전쟁 당시의 성터로 추정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페르시아 왕과 알렉산더 대왕, 카이사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등이 이곳을 방문했다는데 언덕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파리스, 헥토르 등의 영웅들이 싸웠다는 드넓은 평원이 해안과 함께 보인다.

발길을 돌려 서쪽 문 근방으로 오면 허물어진 성벽을 급하게 막은 흔적이 보인다. 다른 곳처럼 돌이 반듯하지 않고 이쪽저쪽에서 모은 볼품없는 돌이어서 아마도 트로이 목마를 안으로 들여온 후 급하게 막은 것이 아닐지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 오면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였던 남문이 나온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친척의 복수를 위해 트로이의 장군 헥토르를 죽인 후 시신을 마차에 매달고 울분을 토했던 바로 그 장소다. 그러나 현재 성문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폭이 10m 정도고 흩어진 돌무더기가 쌓여 있을 뿐이다.

트로이 유적지에서는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느끼며 실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추악한 전쟁을 낭만적 대서사시로 승화시킨 시인의 무한한 상상력에 대해 감탄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삶의 토대인 현실은 중요하지만 만약 현실에만 집착해서 세상을 본다면, 인간의 역사는 얼마나 비참하고 삭막할 것인가. 호메로스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인간에게 꿈을 주었고, 그 꿈은 21세기 초에 와서 ‘트로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엄청난 부를 창출하기도 했다. 현실 속에서 꿈이 만들어지고, 그 꿈을 토대로 다시 새로운 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것이 우리의 꿈 같은 현실일지도 모른다.

여행작가

■유적 발굴 뒷 얘기

1870년에서 1873년 사이, 트로이를 발굴했던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은 자신의 꿈을 실현한 사람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영국의 BBC 다큐멘터리 작가 마이클 우드가 쓴 책을 보니 다른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슐리만은 허풍과 과장이 심했고 사기도 쳤으며, 심지어 자신조차 속였다고 한다. 그가 어린 시절 트로이를 발굴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얘기는 자신의 발굴 성과를 좀더 극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소급해서 만든 그 자신의 ‘창작품’이고, 그가 발굴한 유물조차 자신의 목적에 맞추려고 조작했다는 비판론이 끊임없이 대두됐다. 그는 실제로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협잡꾼, 사기꾼이란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기꾼으로 지목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트로이 문명을 발굴하는 데 슐리만의 집념은 큰 역할을 했고 그의 전 재산을 털어 넣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년은 행복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어느 거리를 걷다 발작을 일으켜 죽었는데 당시 무일푼이었다고 한다.

과연 슐리만은 말년에 자신의 업적에 대해 행복해했을까, 아니면 허망함을 느꼈을까

■여행정보

트로이 주변에는 숙소가 없고 근처 도시 차나칼레에 저렴한 숙소부터 고급 호텔까지 많이 있다. 트로이까지는 차나칼레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개인적으로 가도 좋고, 여행사의 투어에 참가해도 된다. 투어비는 15∼20달러다. 이스탄불에서 여행사의 투어에 참가해도 되는데 교통비와 식비까지 포함해 30∼40달러 든다. 이 투어에서는 트로이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갈리폴리 전적지를 돌아보는데, 전적지는 당시 독일군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이 영국과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차나칼레는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걸리는데 페리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는 30분 코스도 포함된다.

by 100명 2007. 4. 13. 13:42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터키 이스탄불
[세계일보 2004-10-14 16:33]

대개 문명과 문명의 접경지대는 변방이다. 그래서 한 문명이 멸망하는 경우, 변방부터 허물어지면서 차차 위축되다가 마침내 중심부가 몰락하게 된다.

그러나 15세기경의 이스탄불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접경지대인 동시에 기독교 중심부이기도 했다. 당시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플로 불렸으며 1000년간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투르크족은 몇 세기에 걸쳐 서쪽으로 영역을 넓혀 드디어 비잔틴제국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비잔틴제국은 투르크 해군을 막으려고 바다에 장애물을 설치했고 육지에 성벽을 쌓았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묘한 전략을 짜 냈다. 기름을 두른 판과 통나무를 이용해 엉뚱한 곳에서 배 72척을 산으로 끌어올린 후, 갑자기 비잔틴제국 영토 안의 바다인 금각만(Golden Horn·할리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453년 5월 29일 비잔틴제국은 허무하게 무너졌고 수도의 이름은 이스탄불로 바뀐다. 하지만 기독교 문명이 말살된 것은 아니었다.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는 잘 융합되어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고, 역사학자 토인비가 언급한 것처럼 ‘인류문명의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됐다.

거대한 야외박물관을 돌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성 소피아 사원을 중심으로 반경 약 1㎞ 안에 수많은 유적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성 소피아 사원은 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라고 부르는데, 하기아는 ‘성스럽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이다. 서기 537년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사원을 만든 후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능가했노라”라고 외쳤을 정도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이것을 허물지 않고 내부에 ‘미흐라브’(메카를 향한 벽감)를 만들어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했다.

그 맞은편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광인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있다.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모스크의 내부는 99가지 파란색 타일 2만1000여장으로 장식돼 흔히 블루 모스크라고도 부르는데, 특히 야경이 황홀하다.

◇갈라타 대교, 터키 전통 복장의 무희들.(왼쪽부터)

그 외에도 근처에 이집트 룩소르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솟아 있고,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서 가져온 뱀기둥도 있으며, 비잔틴제국 시절의 거대한 지하 식수 저장고도 있다. 또한 성 소피아 사원 옆 언덕에는 오스만투르크 정치·종교의 우두머리 술탄이 살던 톱카피 궁이 있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칼과 예수의 제자인 성 요한의 유골,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마호메트)의 머리카락과 콧수염 등의 진기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또한 남자들의 접근이 불가능했던 술탄의 후궁들이 살던 하렘이 관광객의 발길을 끈다.

톱카피 궁 근처에는 고고학 박물관이 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석관이 있다. 또한 기원전 13세기 터키 중부에 있었던 히타이트 왕국과 이집트 간의 카데슈 전투에서 체결됐던 평화 협정문이 새겨진 설형 점토판도 전시되어 있다.

조금 발길을 멀리하면 아름다운 술레이마니예 모스크, 예니 모스크 등 크고 작은 3000여개의 모스크를 볼 수 있으며 시내 중심부에는 그랜드 바자르가 있다. 카팔리 차르시(지붕이 있는 건물이란 뜻)라 불리는 이 거대한 옥내 시장 안에는 3300개 정도의 상점이 있는데, 금은 보석과 촛대, 조명기구, 기념품, 접시, 도자기, 각종 의류 상점들을 구경하다 보면 누구나 길을 잃게 되니 아라비안나이트의 세계가 따로 없다.

이스탄불은 밤도 즐겁다.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지만 이들의 생활은 세속적이다. 술을 마실 수 있고 피로를 풀 수 있는 하맘(증기탕)이 있으며 가슴을 설레게 하는 터키 무희들의 벨리 댄스가 있다. 또한 중국·프랑스와 함께 세계 3대 음식 중의 하나라는 터키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이스탄불이다.

◇예니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모습.

흔히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서 매력적이라지만, 숭고한 종교적 이상과 현세적인 욕망이 묘하게 결합된 분위기는 더욱 매력적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감탄하고, 즐기고, 먹고 마실 것이 매우 풍부한 이스탄불은 풍성한 인류의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이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카페서 피운 물파이프 담배맛 몽롱

평소에 담배를 안 피우지만 이스탄불에 와서 물파이프 담배, 즉 나르길레를 안 피울 수는 없었다. 내가 처음 그것을 펴본 곳은 술탄 아흐메트 광장 근처의 노천 카페였다. 사과향이 나는 나르길레를 피웠는데 호스가 달린 호리병 같은 나르길레를 가져온 종업원은 집게로 벌건 숯덩어리를 몇 개 집어 호리병 위의 움푹 파인 곳에 넣었다. 처음에 담배를 피우듯이 빨았으나 빨아지지 않았다.

다시 작심을 하고 깊게 빨자 호리병 속에서 뽀르륵 물소리가 나면서 연기가 입 안에 차는데, 제어가 안 되고 그만 가슴속 깊이까지 연기가 들어가서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냥 나르길레는 니코틴이 있지만 사과 향기 나는 것은 니코틴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별로 어지럽지도 않고 기분 좋을 정도로 몽롱해졌는데, 어쨌거나 나는 담배보다 분위기를 즐겼다. 이런 노천 카페도 좋았지만 갈라타대교의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물파이프를 빨고, 파란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는 순간들이야말로 이스탄불 여행의 멋진 낭만이었다.

■여행정보

한국인은 3개월 동안 비자 없이 입국 가능하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터키 돈의 액면 크기에 놀라기 십상이다. 근래에 1달러에 약 140만터키리라(TL) 정도였다. 100달러를 바꾸면 무려 1억4000만TL이 생겨 갑부가 된 느낌이 들 정도. 그러나 웬만한 대중식당에서 식사 한끼에 600만TL 정도니 좋아할 수만은 없다. 뒤의 0 세 개를 떼고 보면 1달러에 1400TL처럼 보여 식별하기가 편리하다.

여행하기 좋은 때는 5월에서 10월 사이.

이스탄불에는 최고의 호텔부터 배낭 여행자들이 묵는 게스트 하우스까지 숙소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개인 여행자들은 대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부근에서 많이 묵는데, 깔끔하고 쾌적한 펜션의 더블 베드가 40∼50달러고, 배낭 여행자들은 도미터리에서 7∼8달러에 자기도 한다.

by 100명 2007. 4. 13. 13:41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루마니아 브란성·시기쇼아라
[세계일보 2004-10-22 13:15]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은 15세기에 실재했던 왈라키아 공국의 왕자 블라드 드라큘 테페스였다. 왈라키아 공국은 현재 루마니아의 트란슬바니아 평원에 있었는데, 그는 한때 브란성에 유폐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두어 시간 올라가면 중세풍의 도시 브라쇼브가 나온다. 이곳에서 버스를 갈아 타고 서남쪽으로 달리면 드넓은 트란슬바니아 평원이 펼쳐지다가 40분쯤 후 예쁜 목조 가옥들이 들어선 브란성 주변의 마을이 나온다.

현재 브란성 주변에는 작은 호수와 울창한 숲, 낭만적인 옛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언덕에 오르면 오른쪽으로 비켜난 절벽 위에 음산한 브란성이 떡 버티고 서 있다. 성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짙게 밴 왕족들의 방과 거실 등이 있고 곳곳에 고풍스러운 침대와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5층까지 오르는 동안 거대한 바위 속을 뚫어 만든 좁은 계단도 있는데, 여기를 오를 때는 드라큘라 백작이 튀어나와 목에 이빨을 들이댈 것만 같다. 5층에서 계속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탑이 나온다. 이 탑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산과 언덕, 그리고 뱀처럼 구불구불 휘어진 도로가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과연 블라드 드라큘 테페스는 이곳에 유폐되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원래 이 성은 1377년 브라쇼브 상인들이 쌓았고 14세기 말 블라드 드라큘 테페스의 조부가 한때 살았을 뿐이지 그가 유폐되었다는 것은 한낱 근거 없는 전설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그런 소문이 퍼졌고, 후일 그는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이 된 것일까.

그것은 그의 잔학함 때문이었다. 15세기에 그는 오스만투르크와 용감하게 싸웠으나 잡힌 투르크 포로들의 몸을 날카로운 말뚝으로 뚫어 공중에 매달아놓을 만큼 잔인했다. 또한 자기 왕국 내의 가난한 자와 병자들에게 성대한 잔치를 베푼 후 그들을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 모두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다. 테페스는 ‘말뚝으로 박는 자’, 드라큘라는 ‘악마 또는 용’을 의미하니 그의 이름과 걸맞은 행위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위만으로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이 된 것은 아니다.

중세 기독교의 논리에 따르면 흡혈귀는 산 자의 세상에도 죽은 자의 세상에도 속하지 않는 ‘고통받는 영혼’이었다.

◇시기쇼아라의 드라큘라 백작 생가.

11세기에 들어서면서 흡혈귀들이 무덤에서 나와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떠돌았고, 그런 미신은 특히 산맥으로 둘러싸인 오지에다 문맹률이 높았던 동유럽 지역이 심했다. 바로 이런 풍토 속에서 블라드 드라큘 테페스에 관한 나쁜 소문도 가세했다. 그리고 18세기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흡혈귀에 대한 소문은 전 유럽에 퍼졌으나 계몽주의가 나타나면서 소동이 가라앉았다.

이 사라져가는 흡혈귀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19세기의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흡혈귀를 부활시켰고,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897년 발표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였다.

브람 스토커는 트란슬바니아의 역사와 풍습, 전설 등을 연구한 후 블라드 드라큘 테페스를 모델로 작품을 썼다. 그 후 드라큘라는 흡혈귀의 대명사가 됐고 영화화되면서 우리에게 각인됐다.

또한 브라쇼브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2시간 정도 올라가면 시기쇼아라라는 도시가 나온다. 블라드 드라큘 테페스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그는 이곳에서 1431년에 태어나 4년 동안 살았는데 지금 그의 생가는 레스토랑으로 바뀌어 있고 그 앞의 조그만 광장에 그의 두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중세풍의 집들이 들어선 마을은 한적하고 여유롭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좁은 골목길을 걷노라면 나팔꽃 피어난 담장 너머로 파라솔과 의자 몇 개가 들어선 예쁜 카페들이 종종 보인다. 이런 소박한 마을 풍경과 푸근한 인심에 취한 여행자들에게는 음산한 드라큘라의 이미지조차 아련한 낭만이 되고, 그 낭만 속에서 바라본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때문일까. 현재 시기쇼아라는 루마니아 최고의 인기 관광지다.

/여행작가

◇시기쇼아라에서 본 결혼식 풍경.

■여행 에피소드

시기쇼아라에서 결혼식을 본 적이 있다. 토요일이었는데 한국의 1960∼70년대처럼 풍선을 매단 차 몇대가 나타나더니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예복을 입은 신랑이 내렸다. 그리고 많은 친구와 친척들, 아이들이 줄을 지어 걸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나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 들어가 보니 시청 건물 같았다. 웬 방으로 들어가자 주례 선생 앞에 신랑 신부 그리고 부모들이 섰다. 긴 주례의 말씀도 없었고 하객들도 20여명 정도였다.

주례 선생이 뭐라고 묻자 신랑 신부는 “다(예)”라고 대답한 후 장부에 사인을 했다. 그것으로 결혼식은 끝이었다. 사람들은 신랑과 신부가 키스하자 축하하며 샴페인을 마셨다. 약 30분 정도 다과를 나누던 그들은 밖으로 나와 꽃으로 아치를 만들었고 신랑 신부가 그곳을 통과하는 동안 쌀을 던지며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들이 옆에서 신나는 곡을 연주했다. 물어보니, 피로연은 다른 곳에서 한다는데 이렇게 결혼식이 검소하면서도 흥겨워서 부러울 정도였다.

■여행정보

▷교통:브라쇼브에서 브란성에 가려면 일단 시내버스를 타고 바르톨로메우 역까지 가서 여기서 브란성 가는 버스를 갈아타면 된다. 시기쇼아라에서 드라큘라 백작의 생가는 걸어서 갈 수 있다.

▷숙소:브라쇼브와 시기쇼아라에는 고급 호텔부터 1박에 10여달러 하는 저렴한 숙소까지 있는데, 1박에 10달러 하는 민박집도 많다. 현지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 권할 만하다.

▷음식:루마니아 사람들의 주식은 옥수수죽인 ‘마마리가’다. 또 다진 돼지고기를 포도잎으로 싼 ‘사르말레’가 전통 음식이다. 관광객 상대의 식당에서 마마리가, 사르말레, 옥수수 수프, 샐러드, 오렌지 주스 등을 먹으면 약 4달러 정도 나온다.

by 100명 2007. 4. 13. 13:39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체코-체스케 부데요비체·체스키 크룸로프
[세계일보 2004-10-28 16:33]
체코를 위아래 절반으로 잘랐을 때 왼쪽으로 프라하를 포함한 서부 5개주를 보헤미아 지방이라 부른다. 사방이 산과 숲으로 싸인 분지로 이곳의 주인은 원래 집시들이었다. 그런 연유로 프랑스인들은 집시들을 보헤미안이라 하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자유분방한 예술가, 방랑자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유와 낭만의 이미지가 넘쳐 흐르는 땅, 그 중에서도 남부 보헤미아 지방에는 매우 고풍스러운 도시들이 있다. 체스케 부데요비체와 체스키 크룸로프인데, 이곳으로 가는 길, 특히 오스트리아 빈에서 올라가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국경에서부터 두 량짜리 장난감 같은 기차를 타면 저수지, 예쁜 목조 가옥, 한가로이 노니는 젖소들, 사과나무들이 어울어진 보헤미아 평원이 차창 밖으로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다 그 끝에서 체스케 부데요비체라는 중세풍의 도시가 나타난다.

체스케 부데요비체는 인구가 10만명 정도로 19세기부터 남부 보헤미아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에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프르제미슬 오타카라 II 광장이 있고 보헤미안 양식인 팔(八)자 모양의 박공지붕(gable roof·맞배지붕)들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이곳은 ‘버드와이저’의 원조인 체코의 유명한 ‘부드바’맥주의 원산지여서 값싸고 맛있는 피보(pivo·체코어로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체스케 부데요비체에서 약 25㎞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도시는 S자형으로 구불구불 흐르는 블타바강이 감싸고 있는데, 블타바 강은 보헤미아 삼림에서부터 시작해 북쪽으로 흐르다 체스키 크룸로프를 지나 수도 프라하를 거쳐 독일의 엘베강과 합수한다. 독일에서는 블타바강을 몰다우강이라 불러왔다.

◇체스케 부데요비체의 프르제미슬 오타카라Ⅱ 광장.

블타바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 도시로 들어서면 예쁜 중세풍의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려면 13세기에 만들어진 탑 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 160여개의 계단을 올라가 전망대에 서는 순간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블타바강, 도시를 한가득 메운 붉고 뾰족한 중세풍의 지붕들,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대저택과 파란 하늘을 떠가는 하얀 구름들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 앞에서 누구나 넋을 잃게 된다.

체스키 크룸로프가 마을의 모습을 갖춘 것은 8세기에서 12세기경이었다. 이곳을 처음에 다스리던 가문은 비텍 가문이었다. 그리고 1302년, 그들의 뒤를 이어 친척인 로젠베르크 가문이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16세기에 남부 보헤미아의 중심지가 된다. 그 영주들이 살던 곳이 대저택이었다. 대저택 안에는 그 당시 귀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화려한 벽화, 가구들, 금빛 마차, 극장, 정원들이 있는데 그것 못지않게 여행자들을 감탄시키는 것은 주변의 자연이다. 파란 하늘과 강물, 하얀 햇살, 그 밑에서 카약을 타는 이들…. 그 한적한 평화 속에 푹 젖어 있다 마을 중심지로 가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체스키 크룸로프의 인구는 1만5000명이지만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의 발길로 어딜 가나 붐빈다. 한때,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에 와서 그림을 그렸던 체코의 유명한 화가 에곤 실레 박물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구경에 지친 사람들은 아담한 카페에 앉아 중앙의 넓은 스보르노스티 광장 주변에 들어선 고딕·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과 교회를 감상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로부터 벗어난 체스키 크룸로프는 1992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현재는 프라하 다음 가는 체코의 관광지다. 이곳 건물들은 모두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건축된 것이니, 한국으로 말하면 조선시대 세종 무렵부터 정조 무렵까지다. 한국도 그 시절의 건축물이 잘 보존돼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 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도 문득 우리 생각을 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허름한 목로주점에 사람들 북적

부드바 생맥주맛 값싸고도 좋아

◇체스키 크롬로프의 숙소와 음식점.

2002년 8월 홍수가 난 직후여서 관광객이 드문 탓도 있었겠지만, 체스케 부데요비체는 오후 5시만 돼도 인적이 드물었다. 저녁을 먹으려 해도 문을 연 음식점도 잘 안 보였다. 이리저리 헤매다 발견한 곳이 허름한 목로주점이었는데, 들어가보니 웬걸 어딜 갔나 했던 사람들이 다 주점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피보를 시켰다. 부드바 생맥주 맛은 쌉쌀하고 시원한 게 기가 막혔다. 웨이터는 레슬링 선수처럼 몸집이 큰 사내였는데, 별로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매우 성실해 보였다. 생맥주 석 잔에 소고기 요리를 먹고 나니 계산서에 적힌 금액은 204코루나, 약 8000원 정도였다.

별로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계산서 위에 따로 적힌 30코루나, 1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은 뭘까? 웨이터에게 묻자 “팁 오케이?”라며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팁을 주려고 했기에 서슴없이 주었지만 조금 황당했다. 이런 현상은 후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도 겪었는데, 공산주의가 멸망한 직후인 1992년에 왔을 때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서양의 팁 개념이 동유럽에서는 이렇게 바뀌고 있었다.

■여행정보

▷교통:체스케 부데요비체는 프라하에서 기차로 2시간30분 소요. 오스트리아 빈에서 기차를 타면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오스트리아 빈의 프란츠 요세프 역에서 국경도시 그뮌트뇌에 도착해서 기차를 갈아 타고 체코의 국경 도시 체스케 벨레니체에 도착해 다시 기차를 갈아타면 체스케 부데요비체에 도착한다. 기차표를 끊을 때 체스케 부데요비체 표를 달라면 몇 장을 함께 끊어준다. 체스케 부데요비체에서 체스키 크룸로프까지는 기차나 버스로 약 1시간 정도 소요.

▷숙소:체스케 부데요비체의 깔끔한 펜션은 33유로(약 5만원) 정도. 체스키 크룸로프에는 값싼 숙소에서부터 고급 숙소까지 훨씬 다양한 숙소가 많이 있다.

by 100명 2007. 4. 13. 13:38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프라하(Praha)
[세계일보 2004-11-04 16:06]

프라하에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숨어 있다. 달콤한 솜사탕처럼 포근한가 하면, 우울하고 알 수 없는 상징들이 도시 곳곳에 웅크리고 있다. 고색창연한 좁은 골목길에서 바라본 세상은 탈출구 없는 미로처럼 우울하나, 아름다운 구시가지의 광장이나 카를교에서 바라본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감미롭다.

또한 프라하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참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 엇갈리는 경계선들이 있다. 몸과 마음이 그 경계선을 넘나들 때 견고한 현실 세계는 슬며시 허물어지면서 프라하는 뿌연 안개 속에서 환상이 된다. 그 아름답고 모호한 프라하의 정경들은 완벽한 예술품이다. 파리가 아름답되 너무 넓어 품에 안을 수 없다면 프라하는 품안에 꼭 안기는 작고 귀여운 소녀 같다.

물론 너무 환상적인 기대를 갖고 가는 여행자는 프라하역에서부터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초라한 역과 도시 외곽의 우중충한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관광객에 지친 현지인들의 쌀쌀맞은 시선, 밤이 되면 가로등의 부족으로 어두컴컴해지는 거리를 보며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블타바 강변의 구시가지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시 프라하야” 하는 탄성을 지르게 된다.

프라하 여행은 대개 바츨라프 광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광장의 언덕 정상에는 웅장한 국립박물관이 있고 부근에는 체코를 구해낸 영웅인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1968년 반소 운동 당시 희생되었던 이들을 추모하는 사진들과 꽃다발이 놓여져 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구시가지다. 확 트인 광장, 파란 하늘 밑에서 뾰족하게 솟구친 틴 교회, 그 옆의 고풍스러운 킨스키 궁전, 화려한 구 시청사의 천문시계, 얀 후스의 동상 그리고 낭만적인 노천카페들이 들어선 그곳은 딴세상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구 시청사에 있는 천문시계다. 1410년 미쿨라스라는 시계공에 의해 처음 만들어지고, 1490년 하누스라는 학자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개량된 시계인데, 매 시마다 종이 울리면 예수의 열두 제자 인형이 나타난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것을 보러 몰려들고 그 틈을 타 소매치기들도 바빠진다.

◇구 시청사의 천문시계.(사진왼쪽), 새로운 명물인 ''댄싱빌딩''

구시가지 광장 근처의 블타바 강변에는 카를교가 있다.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난간에는 수많은 기독교 성상들이 있고, 거리의 예술가들은 그 밑에서 그림을 팔고 노래를 부른다.

다리를 건너 흐라드차니 언덕을 오르면 프라하성이 나온다. 지금도 대통령이 살고 있는 성 근처에는 성 비트와 성 이지 교회가 있으며 그 근처에 황금소로가 있다. 예전부터 황금 세공사들이 살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데, 울퉁불퉁하게 포장된 30여m의 좁은 길에는 16세기 풍경 그대로 게딱지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 중에 주황색 담벼락에 22라고 쓰인 곳이 카프카가 1916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머물렀던 작업실이다. 누이동생이 마련해준 그 집에서 카프카는 외롭게 글을 썼고, 지금 그 집은 관광 명소가 되어 있다.

프라하에서는 늘 음악회가 열리고, 특히 여름철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공연된다. 또 교외로 나가면 1787년 모차르트가 머물며 돈 조반니를 작곡한 정원이 딸린 아름다운 빌라가 있고, 그곳에는 모차르트의 편지와 악보, 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프라하에서는 죽음의 흔적도 낭만적으로 보인다. 블타바 강변의 언덕에는 비셰흐라드 성터가 있고 그 근처에 체코의 예술인들을 위한 묘지가 있다. 묘지 입구에는 체코의 위대한 시인 얀 네루다와 교향시 ‘나의 조국’으로 유명한 체코 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의 묘가 있으며,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드보르자크가 평화 속에 안식을 취하고 있다.

프라하에는 이렇듯 예술과 문화의 향기가 넘쳐 흐르고 그것은 과거에만 연관되어 있지 않다. 춤을 추는 것처럼 비틀어진 현재의 ‘댄싱빌딩’은 머지않아 미래의 명물이 될 것이니, 예술과 문화는 프라하에서 늘 현재진행형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프라하의 매력이 아닐까?

by 100명 2007. 4. 13. 13:37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오스트리아 빈
[세계일보 2004-11-11 16:36]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한때 세상의 중심이었다. 16세기 초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 황제가 된 후 결혼 정책을 통해 영토를 헝가리와 스페인까지 넓혔다. 그 후 1차 세계대전 때 제국은 해체되었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세 중립국이 되었지만, 빈에는 전성기의 영광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구시가지의 한가운데 둥글게 원을 그린 도로, 즉 링크 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고 주변에는 왕궁, 국회의사당, 오페라하우스, 수많은 박물관·미술관들이 있다. 그리고 파란 잔디와 숲이 어우러진 시립공원, 케른트너 보행자 거리, 외곽의 낭만적인 도나우강과 교외의 화려한 쇤브룬 궁전을 보려는 관광객들의 발길로 빈은 언제나 북적거린다.

그러나 빈의 진정한 매력은 화려한 건축물 사이에 배어 있는 예술가들의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음악 도시 빈의 황금기는 18∼19세기였다. 수많은 음악가가 빈으로 모여들었고, 지금도 거리 곳곳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등의 동상과 그들의 흔적이 서린 박물관들이 늘어서 있다.

모차르트의 흔적은 우선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찾을 수 있다. 뾰족한 첨탑의 높이가 139m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대성당에서 213년 전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나왔지만, 장례식을 치른 후 비가 오는 바람에 그의 시신은 자루에 담겨 공동묘지의 구덩이에 내던져졌다. 후일 인부들이 매장하려 했지만 시신을 찾지 못해 현재 그의 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새처럼 훌쩍 날아간 천재 모차르트의 나이는 당시 36세였다.

시내 중심지에는 베토벤 하우스가 있다. 고풍스러운 건물의 좁은 계단을 오르면 4층에 한때 베토벤이 머물렀던 방이 있다. 그 방에는 베토벤이 쓰던 피아노와 편지,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가 이곳에서 작곡한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헤드폰까지 설치되어 있다. 그는 이곳에서 교향곡 4, 5, 7, 8번을 작곡했다고 한다. 헤드폰을 쓰고 누구나 한번쯤은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5번 교향곡 ‘운명’을 듣는다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베토벤 하우스에 보존된 피아노.

◇관광객을 태우고 달리는 마차.

빈의 근교 하일리겐슈타트에는 베토벤이 유서를 썼던 집도 있다. 뜰이 있고 큰 나무가 하늘 높이 뻗어오른 집 2층에는 베토벤의 두상과 악보들, 그리고 1802년 10월 6일자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그가 쓴 유서다.

“나는 고독하다. 참으로 고독하다…. 내 옆의 사람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든가, 또 그 사람들은 양치는 목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데 내게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적에, 그 굴욕감은 어떠하였으랴. 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다…. 죽음이여, 오고 싶은 때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를 맞으리라. 그러면 잘들 있거라….”

그는 유서를 쓴 후에도 25년이나 더 살며 합창교향곡 등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전원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집도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

한때 빈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음악가는 죽어서 한데 모였다. 빈의 교외로 가면 중앙묘지가 있는데 입구에서 대로를 따라가다 왼쪽으로 가면 32A 블록이 있다. 그곳이 바로 음악가 묘역이다.

중앙에 여인이 악보를 들고 서 있는 동상은 모차르트의 기념비고, 그 뒤 왼편에 베토벤의 묘가 있다. 베토벤은 58년간 이 세상에 머물다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천지를 울리던 어느 날 밤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눈을 감겨준 것은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의 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베토벤의 묘 옆에는 서른두 살이란 이른 나이에 죽으며 베토벤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던 슈베르트의 묘가 있다. 그 외에도 주변에는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 등 유명한 음악가들의 묘가 있어 그곳을 거니노라면 고요한 정적 속에서 귓가에 아름다운 선율들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빈 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매력이 아닐까?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동양인들에 불친절

달라진 인심에 당혹

1992년 빈에 처음 갔을 때, 여행자를 배려해주는 인심에 감사했다. 그러나 2002년 다시 갔을 때 달라진 풍경에 당혹스러웠다.

빈의 남부 기차역 안내창구에서 교통편을 물어볼 때였다. 앞에서 웬 서양인이 물어볼 때까지 친절하게 대답해주던 남자 안내원은 내 차례가 되자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인사를 해도 쌀쌀맞게 대하고 몇 가지 질문을 해도 시큰둥하게 대답했는데, 거의 경멸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어 더 큰 문제였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이 없었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내 옆의 다른 줄에 있던 한국 여자도 그런 대접을 받고 있었고, 다른 역의 안내창구에서도 유독 일본인이나 한국인 등 동양인들에게는 매우 노골적으로 불친절하고 깔보는 표정들을 내비치고 있었다.

물론 친절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1992년에는 볼 수 없었던 살벌한 풍경이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낯선 곳에 와서 언어와 관습에 서투른 동양인들이 실수를 한 탓에 나쁜 편견을 가졌을 수도 있고,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심하다는 외국인 혐오증(특히 동양인·아랍인들에 대한)이 전 유럽에 퍼지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뿐 아니라 많은 한국인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씁쓸하기만 했다.

동시에 그런 사건은 한국에 와서 일하는 동남아, 서남아인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바르게 대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정보

빈의 오페라 극장은 좌석에 앉아 보려면 정장을 해야 한다. 그러나 복장이 자유로운 여행자들도 입장할 수 있는 입석표를 판다. 요금은 3.5유로(약 5000원) 정도. 공연시간 약 2시간 전에 가면 입석표를 구할 수 있다. 운동화 차림은 괜찮지만 샌들은 문제가 된다. 오페라 감상은 음악의 도시 빈에서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감동적인 기회다.

by 100명 2007. 4. 13. 1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