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80>터키 부르사
[세계일보 2006-11-17 09:24]

부르사는 이스탄불만큼 매력적이지만, 우리에겐 낯선 도시다. 부르사는 한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였다.

기원전 2세기경 로마가 이곳에 성벽을 구축했고, 이후 제정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면서 동로마 제국 하에서 번영했는데,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326년 부르사를 점령한 후 수도로 삼았다. 그때부터 오스만투르크가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스탄불로 천도한 1453년까지 127년간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 부르사다.

이곳에는 오스만투르크의 초기 유적지가 많이 있다. 우선 초대 황제인 오스만과 그의 아들 오르한의 묘가 있다. 높은 언덕에 지붕이 모스크처럼 둥근 돔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있는데, 안에는 오스만의 관이 안치되어 있고 맞은편에는 아들 오르한의 관이 있다. 이 관을 뒤덮은 천은 비단이다.

부르사는 원래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비단 생산지였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비단 제품은 물론 페르시아, 시리아 등지에서 수많은 낙타와 말에 실려온 견직물로 시장이 흥청거렸다. 베네치아나 피렌체의 상인들도 비단을 사러 모여들어 도시 전체가 언제나 북새통을 이뤘다.

그 상인들이 묵던 곳이 코자한이었다. 터키어로 ‘코자’는 누에고치, ‘한’은 집을 말하니 ‘누에고치의 집’이란 뜻이다. 1491년 만들어진 정방형의 2층 석조건물로, 한가운데 넓은 뜰이 있고 중앙에 팔각형 탑 모양을 한 모스크가 있다. 건물 1층은 낙타나 말의 휴식처 또는 상품 창고로 쓰였고 2층은 상인들 숙소로 쓰였다. 근래까지 6월 한 달간 누에고치 거래소로 번성했지만, 현재는 각종 비단 제품을 파는 고급 상점들이 들어서 있고 안뜰에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노천 카페가 성업 중이다.

◇(왼쪽부터)코자한 안뜰의 노천 카페, 터키의 빵 ‘시미트’를 팔러 다니는 소년, 코자한 건물 2층의 비단 가게

부르사에는 또 ‘녹색 모스크’란 뜻의 ‘예실 자미’가 있다. 15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붕이 녹색인데 원래 터키의 모스크는 페르시아 양식이었으나, 이 모스크부터 터키 양식으로 바뀌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외에도 근처에 오스만투르크 5대 황제 메흐메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녹색 묘’란 뜻의 ‘예실 튀르베’가 있다.

건물 안의 메흐메트 관은 조금 특이하다. 가로 약 2.5m, 세로 4.5m, 높이 1m 정도이며, 그 위에 다시 사람 몸의 두배 정도 되는 크기의 관이 얹혀 있다. 그리고 관의 맨 앞에는 돔 형태로 솟아오른 돌기에 하얀 천이 감겨 있어 마치 모자처럼 보이며, 관에는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꽃·이파리 무늬가 현란하게 새겨져 있어 매우 특이하고 아름답다.

또 부르사에는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멋진 에미르 술탄 자미라는 모스크도 있고, 무기 카펫 의상 등이 전시된 박물관도 있다.

이렇게 많은 모스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4세기 말에 세워진 ‘울루자미’다. 울루자미는 부르사의 대표적인 모스크로, 양파를 얹어 놓은 듯한 돔이 스무 개나 솟아 있어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의 풍경은 자못 환상적이다.

부르사의 분위기도 이런 유적지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원래 ‘예실 부르사(녹색의 부르사)’로 불릴 만큼 여름에는 푸른 나무로 뒤덮이고, 겨울에는 자욱한 지중해의 안개가 온 도시를 감싼다. 이스탄불과 마찬가지로 언덕이 많은 이 도시 곳곳에는 예쁜 돌이 깔린 고즈넉한 골목길들이 뻗어 있고, 골목길마다 고풍스러운 목조 하맘(증기탕)들과 오스만투르크풍의 예쁜 건물, 현대식 레스토랑, 찻집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르사는 아름다운 여인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며, 사람들의 인심도 좋고 예의도 바르다. 길거리나 상점에서 길을 물어보면 매우 친절한데, 이스탄불처럼 외국 관광객이 흔치 않아서인지 대개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어한다. 유적지나 모스크보다도 이렇게 수줍은 미소를 띤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여행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부르사는 현란하지는 않지만 중년 여인의 품처럼 아늑하고 넉넉해서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사랑스러운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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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부르사에 갔을 때, 미용실에 들렀다. 서로 말이 안 통해 아내는 머리 모양 사진이 실린 잡지에서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그런데 미용사는 머리를 다듬다가 5분쯤 지나자 ‘차이(차)?’ 하면서 물어보았다. 내가 다른 도시의 이발소에서 겪은 상황과 비슷했다. 그때도 이발을 하다가 중간에 차를 배달시킨 후 월드컵, 이을용 선수 등 축구 얘기를 한동안 한 후 다시 머리를 깎은 적이 있었다. 남자 종업원이 차를 배달해 왔고 미용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이런 과정에서 맛보는 터키인들의 푸근한 인심과 여유가 무척이나 정겨웠다.

또 부르사에서 기억나는 사람은 1991년 우연히 만났던 어느 책방 주인이다. 60대 노인이었는데, 내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알자 ‘남산, 밥산, 보이다, 찹찹, 이리와’ 등 어색한 한국어를 나열하며 흥분했고, 전화로 차를 배달시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노인은 영어를 못했지만 나는 그가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50년대 그 비참한 나라에서 청춘을 바쳤던 노인은 마치 잃어버린 자식을 만난 듯 눈물을 글썽거려 내 가슴까지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터키에서는 이런 사람을 종종 만날 수 있었는데, 10년 후 다시 갔을 때 나는 그 서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 노인은 살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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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부르사까지는 버스가 자주 다니는데, 육로로 가는 버스가 있고 페리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는 버스가 있다. 페리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시간이 단축된다. 약 3시간 소요. 6달러 정도. 배낭 여행자들의 숙소는 공동 욕실을 사용하는 더블 룸이 13달러 정도. 관광지답게 고급부터 중급까지 숙소는 다양한데, 관광안내소는 코자한에 있으므로 여길 이용하면 편리하다.

by 100명 2007. 4. 13. 11:28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81>터키 안타키아·타르수스
[세계일보 2006-11-24 09:03]

예전에 소아시아로 불렸던 터키 땅에는 기독교 초기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지중해와 접한 남부 해안의 안디옥이란 마을은 기독교 초대교회가 있던 곳이다. 현재는 안타키아라고 불리는데, 이곳에 가려면 우선 아다나로 가야 한다.

아다나는 터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여기서 버스를 타고 지중해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 보면 이스켄데룬이란 도시가 나온다. 구약 성서에 큰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냈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곳이다. 예언자 요나는 여호와로부터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그곳이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명을 회피하고 배를 타고 바다로 달아나다 태풍을 만나고 사공들에 의해 바다 속으로 던져진다. 요나는 큰 물고기에 먹혀 뱃속에서 3일을 지내다 육지로 토해진 후에야 여호와의 계시를 실행한다. 기사회생한 요나의 전설이 서려 있는 이스켄데룬은 현재 평화롭고 아름다운 해변 도시다.

거기서 한두 시간 더 동쪽으로 달리면 안타키아가 나온다.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기독교 초대교회인 성 베드로 교회는 시내에서 약 2㎞ 떨어진 바위산 밑에 있다. 너비 9.5m, 길이 7m인 그리 크지 않은 동굴에는 나무 벤치 대여섯 개가 놓여 있으며, 앞에는 돌제단이 있고 정면에는 베드로의 조각이 있다. 초창기 기독교 신자들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로 세례를 받았고, 집회를 진행하다 로마 병정들이 들이닥치면 위로 파인 작은 굴을 통해 바위산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동굴 교회 주변에는 집들과 밭, 목초지가 평화롭게 펼쳐지고, 위쪽으로는 험준한 바위산이 하늘 중간까지 치솟아 있다.

베드로는 이 동굴에 와서 신도들을 만났는데, 그 당시까지 종교와 모임의 이름이 없던 그들은 여기서 비로소 자신들을 크리스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후 7, 8세기에 동굴 앞부분을 신축해서 교회로 사용했다. 지금 이 동굴 교회에서는 매년 성 베드로 축제일인 6월29일 안타키아 고고학박물관에서 주최하는 의식이 열린다.

◇(왼쪽부터)타르수스의 바울의 집, 동부 지방의 양 시장, 타르수스의 인심 좋은 배추장수

터키 남부 해안에는 기독교를 이방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한 사도 바울의 고향인 타르수스도 있다. 신약 성서에 나오는 닷소가 바로 이곳으로, 아다나에서 서쪽으로 약 40㎞ 정도 떨어져 있다. 도시 한가운데에 하반신은 뱀이고 상반신은 사람인 뱀의 왕 ‘샤흐메란’의 동상과 못이 있다. 옛날 이곳을 통치하던 왕이 병들자 샤흐메란을 잡아 먹었는데, 아직도 그들의 왕이 죽었는지 모르는 이곳의 뱀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모두 타르수스를 공격하게 되며, 지금도 샤흐메란의 피가 욕조의 대리석 밑으로 흐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문도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왕국을 살리기 위해 소아시아(터키)와 이집트를 지배하던 안토니우스 편에 붙는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군대를 이끌고 온 곳이 바로 타르수스였는데, 전쟁에서 패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가슴을 독사가 물게 하여 자살하고 만다. 이 클레오파트라의 문은 바울의 고향에 있다고 해서 언제부턴가 ‘바울의 문’으로 불려 왔다고 한다.

바울의 집은 그곳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인 ‘예니 자미’란 모스크 근처에 있다. 철문 안에 매표소가 있고 40∼50평쯤 되어 보이는 정원이 깔끔하게 가꿔져 있는데, 집 안에는 바울이 사용했다는 조그만 우물과 하얀 수염이 그려진 바울의 초상화도 보인다. 지름이 1m도 안 되는 우물은 깊이가 35m로, 수천 년 동안 마르지 않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나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다. 사울은 유대교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는데, 예수가 바리새파를 가혹하게 비판했다. 사울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예수와 그 신도들을 잡는 데 앞장섰는데, 어느 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3일 동안 눈이 멀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후 바울로 이름을 바꾼 그는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약 20년 동안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베드로와 신자들은 바울이 자신들을 잡아넣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고 판단해 그를 쫓아냈다. 결국 그는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와 기도하고 사색하며 10년 동안을 외톨이로 지내다가 안타키아(안디옥)로 가서 일년을 머물렀고, 마침내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이방인 선교사역을 인정받게 된다.

젊은 바울은 한때 자신의 세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채 십 년이란 세월을 고향 타르수스에서 보냈다. 그 고독한 세월을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보냈을까? 타르수스의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딘가에 바울의 발걸음과 숨소리가 배어 있는 것 같아 문득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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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키아의 기독교 초대교회를 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허름한 토담집 안에서 웬 아줌마가 난(밀개떡)을 화덕에 굽고 있어, 우두커니 구경을 했다.

한동안 구경을 해도 경계심을 품지 않는 것 같아 카메라를 빼어 들자 여인은 “노” 하며 몸을 돌렸다. 매우 놀라거나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내 사과하고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이 황급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뛰어가는 게 아닌가. 분명히, 누가 와서 자기 엄마를 괴롭힌다고 알리러 가는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봉변당할까 봐 잰걸음으로 버스터미널로 걸어가는데, 이 같은 나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터키는 서부 쪽은 개방적이지만, 동부 쪽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조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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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키아와 타르수스를 모두 돌아보려면 아다나에 숙소를 잡고 2일 정도를 예상하면 된다. 소풍 가듯이 하루는 타르수스, 하루는 아다나를 갔다 올 수 있다. 버스로 타르수스까지는 40분 정도 걸리고, 안타키아까지는 서너 시간 걸리는데 중간에 이스켄데룬을 들를 수 있다.

by 100명 2007. 4. 13. 11:26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82>설인 ''예티''는 어디쯤 살고 있을까
[세계일보 2006-12-01 09:00]

누구나 히말라야의 장엄한 자태 앞에 서면 경건해진다.

산스크리트어로 ‘히마(Hima)’는 눈, ‘알라야(Alaya)’는 보금자리라는 뜻이니 히말라야는 ‘눈이 머무는 곳’을 의미한다. 히말라야는 인도 중국 네팔 파키스탄 부탄 등 5개 국 영토에 걸쳐 있는데, 세계 최고봉에 속하는 14개 봉우리 중 9개가 네팔 땅에 있다.

널리 알려진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등의 봉우리는 일반인들도 산 중턱까지는 트레킹하며 자연을 즐기고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코스 중 하나는 왕복 8∼9일 정도 소요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으로, 먼저 아름다운 페와 호수가 있는 포카라까지 가야 한다. 트레킹 코스는 약간씩 다르지만 대개는 차를 타고 트레킹을 시작할 수 있는 지점까지 간 후 본격적으로 산을 오른다. 산비탈에는 다랑논이 펼쳐지는데, 이런 곳에서는 경치보다도 네팔인들의 생활에 더욱 눈길이 간다. 네팔 젊은이들은 ‘남로’라고 하는 커다란 광주리를 등에 메고 끈을 이어서 이마에 대고 나르는데, 이 광주리는 보통 30㎏에 달한다. 대개 산속 산장에서 쓸 식량, 배추, 무, 휴지 등을 운반하며, 이들의 하루 일당은 한국 돈으로 1000∼2000원 정도다.

네팔에서는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궁핍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약 180달러인 이 나라 전체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지만 자급자족이 안 되며, 관광산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차 한 잔 마시고 오전 10시쯤에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오후 5, 6시가 되면 저녁을 일찍 먹고 배가 꺼지기 전에 일찍 잔다. 이같이 경제난이 심각하다 보니 공산주의가 광범위하게 세력을 떨쳐 중국에서도 사라진 ‘마오쩌둥주의자’들 역시 적지 않다. 정정(政情)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 가이드나 짐꾼을 데리고 유유자적하며 트레킹을 즐기고 히말라야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여행자의 마음은 늘 미안하고 불편하지만, 그래도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서면 잠시 현실을 잊게 된다.

◇다랑논(왼쪽), 트레킹 중의 풍경

간드룽이나 란드룽을 거쳐 촘롱까지 가는 동안 점점 고도가 높아지자 발걸음도 늦어진다. 40분 정도 걷고 20분 정도 쉬면서 걷는데, 네팔인들은 “비스타레(천천히)”, “알리알리(조금씩, 조금씩)”라고 속삭이며 급하게 가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늦춘다. 점차 하얀 눈으로 뒤덮인 안나푸르나의 봉들과 지나가던 구름이 산 중턱에 걸린 멋진 풍경에 심취하게 된다. 새카만 밤하늘에는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별들이 입으로 “후” 불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낮게 떠 있다.

트레킹 3일째 여행자들은 해발 2050m인 촘롱이란 곳에 도착해서 멀리 안나푸르나봉과 마차푸차르봉을 바라보며 느긋한 휴식을 즐긴다. 이 마을에는 토담집으로 지어진 학교가 있는데 학생 수는 50명 정도, 교실 5개. 칠판이 없어 벽에다 판서를 하는 열악한 상태다. 이런 가난한 상황에서도 네팔 국민의 절대 다수인 힌두교인들은 자연을 경배한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지붕에 올라가 절을 하고 꽃을 뿌리며 기도하는 노인을 보는 순간, 여행자들도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데우랄리(해발 3000m)라는 곳을 지나며 서서히 고산증이 나타나고 숨이 가빠지며 머리가 쿡쿡 쑤신다. 이런 상태에서 천천히 오르다 보면 드디어 5일째 마차푸차르 베이스 캠프(해발 3700m)에 도달한다. 여기에 짐을 풀고 한두 시간을 더 걸으면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해발 4130m)에 도달하고 거대한 절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절벽 건너편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거대한 설산이 치솟아 있다. 어디선가 쩍쩍거리며 얼음 부서지는 소리, 또는 우르릉거리는 천둥 소리가 들려와 온몸에 공포감이 밀려든다. 그리고 산 정상에서 몰려오는 구름 속에 파묻히면 잠시 신선이 된 듯한 묘한 기분도 느끼게 된다.

안나푸르나는 봉우리 하나가 아닌 연봉이다. 해발 7000∼8000m 정도인 안나푸르나 1봉부터 4봉 그리고 안나푸르나 남봉이 계속 이어져 있고, 오른쪽 옆에는 마차푸차르봉이 보인다. 마차푸차르(Machhapuchhare)는 물고기(machha) 꼬리(puchhare)라는 뜻인데, 실제로 물고기가 거꾸로 서서 꼬리를 세운 모습이다. 예전에 인간과 동물의 중간인 설인(雪人) ‘예티’가 안나푸르나 1봉에 살다가 워낙 사람들이 많이 등반해서 요즘은 마차푸차르로 도망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믿기 힘든 얘기지만, 하얗고 거대한 산 앞에서 휘몰아치는 광풍과 구름 속에 파묻혀 신비감을 느끼는 여행자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자연 속에서 현실과 환상이 모호해지는 그 순간이야말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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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을 하다 촘롱의 산장에서 묵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일본인 젊은 커플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2년 전, 방콕의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알은 체하자, 그때 한국인을 만난 기억은 있지만 당신이 아니라 매우 젊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게 바로 납니다”라고 강조했지만, 그들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란 나를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무척이나 반가웠는데 그들은 홋카이도에서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었고,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는 문을 닫고 동남아, 네팔, 인도 등지를 여행한다고 했다. 그들은 애 키우기가 힘들다며 애 낳기를 포기하고 여행하는 낙으로 살고 있었는데, 그때가 벌써 16년 전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애 없는 가족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니 그만큼 살기가 힘들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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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에 좋은 시기는 10, 11월. 낮은 가을 날씨고 밤은 초겨울 날씨다. 12월에는 눈이 많이 와 부분적으로 폐쇄되는 곳이 있지만 트레킹은 할 수 있다. 코스마다 산장들이 있어 숙식이 가능하므로 버너나 텐트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한국 겨울 산행처럼 준비해야 하고, 자외선이 강하므로 선글라스와 선크림 등이 필요하다. 트레킹에 필요한 허가증과 가이드, 짐꾼 등은 포카라의 현지 여행사를 이용하면 쉽게 해결된다. 고산병은 두통이나 구토증을 동반하는데, 300∼400m만 내려와도 금세 좋아진다.

by 100명 2007. 4. 13. 11:25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83>온천과 영화가 어우러진 도시
[세계일보 2006-12-08 09:48]

프라하에서 서쪽으로 약 125㎞ 떨어진 이곳은 프라하 출신으로 신성 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 4세가 14세기에 개발한 도시로, ‘카를 온천’이라는 뜻이다. 16세기 들어서 200개가 넘은 온천이 개발됐고, 19세기에는 유럽 각국의 황후와 귀족이 방문했다. 베토벤, 비스마르크, 괴테, 리스트, 톨스토이, 마르크스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이 마을의 중심지 양쪽에는 산이 솟아 있고, 그 중간에는 폭이 좁은 테플라강이 흐른다. 강 주변에는 중세풍의 아름다운 집과 벤치들이 있는데, 연간 900만명 정도가 이곳을 다녀간다. 관광객 못지않게 온천에서 병을 치료하는 환자나 휴양객들도 눈에 많이 띈다. 온천탕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최초로 개발된 브리들로(Vridlo)는 섭씨 73도의 온천수가 매분 2000ℓ 분출된다. 카를로비 바리의 온천수는 위장병이나 간질환, 당뇨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카를로비 바리는 영화제로도 유명하다. 1948년부터 시작된 영화제는 매년 7월에 열리는데, 동유럽을 넘어서 이제 유럽의 대표적인 영화제로 자리를 잡았다. 7월이면 수많은 영화 포스터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영화인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이 도시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고,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이 경쟁부문에 초청됐으며, 홍상수 감독의 특별전 등이 열렸다. 또 올해는 이윤기 감독의 ‘러브 토크’가 경쟁부분에 진출했고, 김기덕 감독의 ‘타임’이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카를로비 바리는 온천과 영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도시로 세계인의 시선을 끌고 있다.

프라하에 왔다면 체코 제2의 도시인 브르노도 빼놓기 아깝다. 프라하에서 열차를 타고 서남쪽으로 약 3시간3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이 도시는 일찍이 모라비아 공국의 수도였다. 예전에 이 일대는 서부의 보헤미아(중심지 프라하), 중부의 모라비아(〃 브르노), 동부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는 1차 대전 전까지 헝가리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반면 10세기 초부터 강대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했던 보헤미아 왕국은 카를 4세 때 크게 융성했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되었다. 1918년부터 이 3개 지역이 연합하여 체코 공화국을 탄생했으나, 공산주의 체제가 패망하면서 다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됐다.

◇온천수(왼쪽), 연주하는 학생들

모라비아 왕국의 중심지였던 브르노는 현재도 체코에 속해 있다. 브르노에서는 14세기에 창건된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 성 야곱 교회 그리고 13세기에 건립된 슈필베르크 성과 그 안의 지하실, 고문실 등이 대표적인 볼거리다. 그러나 브르노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은 역시 멘델의 법칙으로 유명한 멘델 수도원이다.

멘들로보 나메스티(멘델 광장) 근처에 있는 멘델 수도원에 들어가면 넓은 뜰이 있고 멘델의 동상도 보인다. 조그만 정원에는 완두콩들이 심어져 있으며 앞에 p1, f1, f2, f3라고 쓰인 팻말들이 보인다. 바로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푸른색, 노란색 등등의 완두콩 색깔을 따져 가며 배웠던 유전법칙이 여기서 발견된 것이다. 멘델은 원래 과학자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수도사인 그는 수도원 한구석에서 완두콩을 심어 놓고 홀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비전공자의 연구 결과가 처음에는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옆의 전시관에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설명해 놓은 글과 실험기구, 의자와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견한 것은 약 130년 전의 일인데, 지금은 생명을 복제할 수준이 되었다. 현기증 나는 과학의 발전 속도다. 과학도가 아닌 평범한 여행자이지만 이런 곳을 돌아보면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위대한 인물의 자취, 거대한 사건의 현장도 실제로 직접 접해 보면 너무도 평범하다. 이때 큰 기대가 깨지는 실망감도 있지만, 동시에 모든 위대한 것은 기실 평범함과 사소함 속에서 시작된다는 작은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 작은 정원에 앉아 싹이 돋아나는 완두콩을 지켜보던 수도사 멘델의 가슴속은 생명의 신비를 발견해 가는 희열로 가득 찼을 것이다.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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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비 바리 거리를 걷다 보니 사람들이 납작한 컵을 하나씩 들고 다니며 주전자 주둥이처럼 생긴 컵의 끝에서 뭔가를 홀짝홀짝 빨아 마시고 있었다. 저게 뭘까? 호기심이 발동한 나도 가겟집에서 똑같은 것을 샀는데, 알고 보니 온천 물을 받아 마시는 그릇이었다.

카를로비 바리에는 거리 곳곳마다 따스한 온천수가 나오는 수도가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걸 받아서 마치 차 마시듯이 계속 마셨다. 온천수를 마시면 당뇨나 소화기 질환에 좋다는데, 미지근한 온천수 맛은 짭짤했다.

또 사람들은 모두 상자를 하나씩 들고 다녔다. 호기심에 또 사서 뭐가 들었나 열어보니 커다랗고 둥근 웨하스 과자였다. 아마도 천안의 ‘호두과자’처럼 카를로비 바리의 특산물 같았다. 벤치에 앉아 짭짤한 온천 물에 단 웨하스 과자를 먹는 맛은 묘했지만 건강에 좋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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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플로렌스 터미널에서 카를로비 바리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터미널의 관광 안내소에서 시내 지도와 온천에 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브르노의 멘델 수도원은 멘들로보 나메스티 근처에 있으며, 중심지에서 걸어서 갈 수 있다.

by 100명 2007. 4. 13. 11:24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84>로마군에 항거한 유대인들의 비극이…
[세계일보 2006-12-15 10:21]

기원전 1세기경 이스라엘은 요동치고 있었다.

로마제국 지배 하에서 예수가 탄생했고, 종교적으로는 전통적인 제의를 중시하고 구약성서 글자 하나하나에 집착하던 사두개파, 평신도 운동으로 율법학자들이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바리새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금욕적인 공동생활을 하던 에세네파가 있었으며, 로마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급진 과격파 열심당원(Zealot)들도 생겨났다.

주로 유대교 하급 사제인 열심당원들은 폭력에 호소하는 열광적 애국자들이었는데, 로마뿐 아니라 로마에 타협적인 유대인 권력층·특권층도 공격을 했으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속에도 섞여 들었다고 한다.

이런 격변기에 헤롯이 죽고 얼마 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이나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 진정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던 유대교인들 모두 유대 땅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의 폭군 황제 네로는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를 유대인들이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탄압을 가했다. 늘 소요를 일으키고 메시아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로마로서는 항상 위험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서기 66년 이스라엘 땅에서 로마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로마군은 군대를 보내 진압했고, 서기 70년 마침내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다. 유대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로마군이 오랫동안 성을 포위하자 기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가족의 시신을 보고도 눈물을 흘릴 여력이 없었고, 너나 할 것 없이 도둑과 강도로 돌변했으며, 심지어 자기 아이를 구워 먹는 사람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결국 개전 당시 60만명이었던 예루살렘 인구 중 3개월 동안 죽은 자가 약 11만6000명이었고 포로가 약 9만7000명이었다. 그러나 열심당원을 비롯한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은 마사다(Masada) 요새로 후퇴해 저항을 계속했다.

마사다는 사해 옆에 우뚝 솟은 험한 요새다. 마사다는 해발 약 40m이지만 근처 땅 자체가 해발 -400m 정도이므로, 땅에서 보면 440m나 치솟은 절벽 위에 자리잡은 하늘의 요새다. 히브리어로 ‘바위의 성채’라는 뜻의 마사다는 기원전 2세기경 하스몬 왕조 때에 처음 요새로 사용되다가 헤롯왕이 기원전 37년에 재건했다.

◇사해 근처의 팔레스타인인들(왼쪽), 사해

이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등산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험하다. 거대한 절벽에 구불구불 이어져 ‘뱀의 길’이라 불리는 조그만 길을 따라 1시간 동안 걸어 오르면 정상이 나온다. 정상은 남북이 약 600m, 동서가 약 300m, 전체 둘레가 1300m 정도의 꽤 넓은 평원이다. 헤롯은 이곳에 창고를 만들어 포도주·기름·대추야자 등을 저장해 놓았으며, 각종 프레스코화로 장식되고 목욕탕 시설이 갖춰진 멋진 궁궐을 지어 놓았다. 또 중앙의 땅은 비둘기 배설물과 인분을 이용해 경작했고, 마사다의 서쪽 골짜기에는 흘러드는 빗물 저장소를 12개나 만들었다. 물이 다 모이면 약 4000만ℓ나 되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열심당원을 비롯한 유대인들 약 1000명 정도는 마사다 요새에 올라가 항전하다가 서기 72년 로마군 약 1만명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험한 절벽길을 기어오를 수 없었던 로마군은 7개월에 걸쳐 서쪽 계곡을 메운 후 서서히 압박해 들어간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저항군 사령관은 “이 세상에 노예가 되는 것만큼 참기 힘든 벌은 없다. 스스로 용감하게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라며 집단 자결을 선언했다. 병사들은 자신의 가족을 먼저 죽인 후 제비로 뽑힌 열 명이 나머지 병사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열 명 중에서 또 제비로 뽑힌 한 명이 나머지 아홉 명을 죽인 후 마지막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두 960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이후에 로마 군인들이 마사다 요새에 올라와 이 기막힌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 참상은 지하 동굴에 몸을 숨겨 살아난 두 여인과 다섯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이 사실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전해진다. 그러나 그 진위에 대해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요세푸스는 처음에 유대편에서 전쟁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로마에 투항했다. ‘유대 전쟁사’ 저술 목적도 로마 측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설득하려는 데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극소수의 분파적 유대인과 일부 부패한 로마인 박해자에게 전쟁의 책임을 지웠다. 그렇다면 마사다 전투에서 실제는 로마군의 살육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요세푸스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끝까지 저항한 이들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저항을 극적으로 미화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기록에 의해 마사다 투쟁은 전 이스라엘인들에게 각인되었고, 더 이상 마사다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학생,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이 마사다를 찾고 있다.

여행작가 (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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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근처에는 사해가 있다. 사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호수로 해발 -400m다. 염분 함유율이 35% 정도여서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사실은 호수지만 고대 히브리어에 호수란 말이 없어서 바다라 불리고, 염분이 높아 몸을 뉘어도 그냥 둥둥 뜰 정도라고 했다. 예전에 신문 해외토픽란에서 누워서 신문 보는 사람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사실일까?

마사다 구경을 마친 후 사해로 가자마자 수영복을 입고 호수로 걸어 들어갔는데 갑자기 밑이 푹 꺼져서 당황했다. 하지만 재빨리 몸을 누여 길게 뻗으니 신기하게도 몸이 둥둥 떴다. 고개를 약간 들어도 계속 뜨니, 베개라도 있으면 잠이라도 자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편안했다. 그러나 마음놓고 있다가 바람에 휩쓸려서 요르단 쪽으로 흘러가 국경 무단침입죄로 체포되는 이도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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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사해를 거쳐 마사다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약 1시간30분 소요. 사해, 마사다, 쿰란, 제리코 등지를 돌아보는 투어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마사다 정상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by 100명 2007. 4. 13. 11:22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85>동방 박사들이 큰 별을 따라 온 곳
[세계일보 2006-12-22 08:51]

2000년 전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동남쪽으로 약 10㎞ 떨어져 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 20분도 채 안 되는데, 차창 밖으로는 황량한 사막 풍경이 펼쳐진다. 베들레헴은 예전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었다.

구약성경에도 종종 등장하는 이 도시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가 된다. 유대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은 기원전 1900년경 우르라는 곳에서 현재 이스라엘 땅인 가나안 지방으로 떠난다. 우르는 현재 터키 동부의 우르파라는 설도 있고, 이라크 남부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가나안 지방에 터를 잡고 살던 아브라함의 자손은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이주했고, 그 후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한 이들을 기원전 13세기경에 탈출시킨 이가 모세였다. 이들은 시나이 반도를 거쳐 예전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살고 있던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기원전 1000년경에 사울을 최초의 왕으로 삼는다. 사울 다음에 왕이 된 이가 다윗이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돌팔매질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는 최초로 여러 지파를 통합한 통일 왕국을 세웠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유대인들에게 다윗은 지금까지도 존경의 대상이다.

◇베들레헴 탄생교회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

이 베들레헴이 다윗의 고향이어서 예전부터 ‘다윗의 도시’로 불려 왔다. 그의 아들 솔로몬왕 때 이스라엘은 크게 번성했으나 그후 남쪽의 유다 왕국과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두 왕국은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모두 아수르(아시리아)에 멸망했고, 유대인들은 바빌론 등지로 끌려간다. 약 100년 후 고향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설움을 받다가 초강대국인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그 지배 속에서 ‘메시아(구세주)’가 다윗 왕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해방을 갈망하였다. 이럴 때 선지자 미가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고, 기원전 7년경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원래 나사렛에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로마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고향에서 호적을 등록하라고 명령했고, 다윗의 자손인 요셉은 고향이 베들레헴이었기에 그곳으로 갔다가 숙소를 정하지 못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는다. 기독교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에는 유대민족의 족보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하는 식으로 계속 열거되다 마지막에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라고 끝을 맺는다. 이같이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그가 다윗의 자손이고 메시아며,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재의 베들레헴에 유대인들은 눈길을 주지 않고 있으며, 고립과 빈곤 속에서 사는 팔레스타인 현지 주민들도 강한 반유대, 반기독교 정서를 보인다. 다만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성지’로 찾고 있으며, 특히 크리스마스 때면 예수 탄생을 기리는 순례객들이 몰린다.

◇베들레헴 탄생교회 내의 예수 탄생지.

◇이스라엘의 이슬람교도들.

이곳에는 ‘탄생교회’가 있다. 예수 탄생 약 330년 후인 서기 325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웠고 200년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개축했다. 현재의 모습은 12세기 초 십자군이 탈환한 후 요새형으로 수리했는데, 교회 정문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보이고 그 밑의 동굴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다. 어둠침침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동굴 한 구석에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위에 큰 별 표시가 있는데, 이곳이 예수의 탄생지라고 알려져 있다. 그 시절에는 가축 우리가 대부분 동굴에 있었는데, 마리아가 바로 이런 지하 동굴의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많은 순례자들은 이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를 보며 눈물을 닦는다.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빛이 되어 역사를 바꾼 현장 앞에 서면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그 당시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채 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우선 이 교회부터 분열되어 있다. 교회 오른쪽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왼쪽은 아르메니아 정교회에서 관리하며 그 옆에 따로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당에서 크리스마스 미사가 생중계된다.

이스라엘 땅에 평화가 온다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배척받는다는 예수의 말대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고 팔레스타인 역시 기독교를 거부하며,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핍박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한 십자군전쟁 때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은 테러와 이라크 침공 등으로 폭발했다. 세계 곳곳에서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지만, 정작 사랑의 말씀이 탄생한 이 땅의 사람들은 눈물 흘리며 한숨짓고 있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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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용하는 버스터미널이 따로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용하는 버스는 깨끗하고 조용하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용하는 버스는 낡고 시끄럽지만, 차장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차비도 안 받는 분위기여서 더 마음이 편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용하는 버스를 탔는데, 베들레헴에서 내리자 옆자리에 앉았다가 같이 내렸던 사내가 일부러 따라와 ‘탄생교회’ 가는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것을 알고는 “웰컴 투…”하는데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입장에서 “웰컴 투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달리 붙일 말도 없던 것이다. 한때 나라를 잃었던 우리 민족의 설움을 잘 아는 나로서는 이 같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참 안되고 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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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 있다. 예루살렘의 다마스쿠스 게이트 앞에 있는 아랍 버스터미널에서 22번 버스를 타면 베들레헴으로 간다. 다마스쿠스 문 앞에서 합승 택시를 타도 된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는 마지막 버스를 잘 확인해야 한다. 워낙 반유대 정서가 강하고 이스라엘 군인들의 통제가 심하므로 버스를 놓쳤을 경우 매우 난감하다.

by 100명 2007. 4. 13. 11:21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86> 중국 태산
[세계일보 2007-01-05 11:24]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태산은 시경에서부터 칭송하는 시가 나오는 중국 최고의 명산이다. 최초로 태산에 올라가 봉선의식을 거행한 이는 진시황이었다. 그후 역대 72명의 황제들이 올랐던 태산은 중국인들은 물론 바다 건너 한국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렸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도다.

학창시절부터 이런 시조를 외우고 자란 우리는 태산을 매우 높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태산은 해발 1545m로 지리산이나 백두산보다 낮다. 오르기도 어렵지 않다.

태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산둥성의 타이안(泰安)으로 가야 한다. 태산 기슭까지 주택가와 상점이 들어선 풍경은 한국의 북한산이나 도봉산과 비슷하다. 태산 등반은 간단하다. 일천문(一天門)에서부터 정상까지 난 7412개의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면 된다.

◇남천문에서 내려다본 계단.

◇하늘의 거리, 천가(天街)의 입구.

단조로운 이 길을 흥미롭게 해주는 것은 도교의 유적과 중국 역사의 발자취다. 도교 사원인 두모궁(斗母宮), 서왕모(西王母)를 모시는 만선루(萬仙樓) 등이 있다. 주나라 목왕이 천산산맥에 있는 천지(天池)에서 보았다는 전설이 서린 서왕모는 처음에는 죽음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반인반수의 흉칙한 모습이었으나 후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고, 불사의 약을 지닌 선녀가 됐다. 계속 한 두시간을 걸어 올라가면 태산 중턱의 중천문(中天門)이 나오는데 여기서 정상 부근의 남천문(南天門)까지는 케이블카가 있다. 그러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이라는 시조를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은 걷기를 계속한다.

매점들과 사진 찍어 주는 사람들을 지나치다 보면 오대부송(五大夫松)이 나온다. 진시황이 태산에 오르다 비를 피했다 하여 오대부란 관직을 부여받은 소나무이며,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가파른 계단이 시작된다. 숨이 차지만, 중간에 18개의 널찍한 판이 있어 잠시 쉴 수 있다. 여름 성수기 때는 가마꾼들이 돈을 받고 사람을 실어나르기도 한다.

◇정상에 있는 옥황정 가는 길.

◇정상 부근의 태산 풍경.

이 가파른 계단의 끝에 남천문이 있다. 하늘에 거의 다다른 듯한 분위기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동남쪽 절벽 끝에 첨노대(瞻魯臺)가 보인다. 멀리 노(魯)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불치의 병에 걸린 부모님의 치유를 기원하며 몸을 던지는 이가 있어 명나라 때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여길 지나면 ‘하늘의 거리’인 천가(天街)가 시작된다. 현재 하늘의 거리에는 숙소와 기념품 판매소,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천가에서부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넓은 들판과도 같다. 종종 구름이 끼면 마치 하늘의 세계를 거니는 것만 같다.

정상 부근에는 태산의 주신을 받드는 도교 사원인 벽하사(碧霞祠)와 거대한 돌에 글씨를 새겨 놓은 대관봉(大觀峰)이 있으며, 정상인 천주봉(天柱峰)에는 옥황정(玉皇頂)이 보인다. 그 부근의 무자비(無字碑)란 비석은 원래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 한무제가 2100년 전에 세웠다. 태산의 위대한 풍광에 겸손한 마음으로 아무 것도 적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고, 후세인들이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무자비를 지나면 바로 옥황상제를 모셨다는 옥황정인데, 여기서 역대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멋진 자연과 함께 이처럼 수많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가 깃든 문화 유적지에서도 태산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

◇태산의 저녁노을 풍경.

◇첨노대

태산은 중국 5대 명산인 오악 중에서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며, 그 중에서도 으뜸이라 하여 오악독존(五岳獨尊)이라 일컬어졌다. 동쪽은 모든 만물이 생성되는 방향이기에 태산은 가장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

현재 중국 5위안(元) 지폐의 앞면에는 마오쩌둥의 그림이 있고, 뒷면에는 태산과 오악독존이라 쓰여진 비석의 그림이 있다. 뒷면의 이 그림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이데올로기와 권력 못지않게 민심과 하늘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른 황제들조차 자신을 낮추고 하늘을 두려워한 것을 보면, 세상사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기운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 기운은 예나 지금이나 민심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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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산둥성을 여행하다 보니 호텔 종업원들이나 택시기사들이나 모두 ‘한궈런(한국인)’이라고 하면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왜 그럴까. 중국을 여러 차례 여행했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인터넷을 보니, 내가 여행하기 일주일 전쯤인 2006년 11월22일, 한국인 이군익씨가 특수 제작한 지게에 92세의 아버지를 지고 태산을 올랐는데, 이 사실이 산둥성 TV에 크게 보도되었다고 한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 있으며, 태산이 자리 잡은 산둥성의 사람들이 그의 효심에 크게 감동받았던 것 같다. 덕택에 한국인인 나도 대접을 잘 받은 것 같아 흐뭇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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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산둥성의 성도 지난(濟南)까지 대한항공 직항편이 있다. 지난에서 타이안까지는 버스로 1시간30분. 태산을 일천문에서 걸어 올라가면 4∼6시간 소요된다. 빠르게 오르려면 기차역에서 3로(路) 버스를 타고 일단 천외촌(天外村) 종점까지 간다. 10분 정도 소요된다. 거기서 태산의 중턱인 중천문까지는 버스로 약 30분. 요금은 122위안.(태산입장료 100위안+차비 22위안) 중천문에서 남천문까지 가는 케이블카는 50위안. 걸어 올라가면 1시간30분∼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정상을 돌아보는 데는 약 2시간 정도 소요되고, 정상에서 중천문까지 내려오는 케이블카는 오후 5시까지 운행한다. 중천문에서 천외촌까지 내려오는 버스는 오후 6시가 막차.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면 태산 정상의 숙소에 묵으면 된다. 중급 숙소는 한국돈으로 2만∼5만원. 고급 호텔은 10만원 정도. 타이안 시내에는 역대 황제들이 태산에 오르기 전에 제를 올렸던 대묘(垈廟)와 조선 사람인 만공(滿空) 스님이 세운 보조사(普照寺)라는 절도 있다.

by 100명 2007. 4. 13. 11:20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87> 영국 바스
[세계일보 2007-01-12 09:39]

이런 일화가 전해질 만큼 목욕은 로마인들에게 중요했기에 로마인들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근사한 목욕탕들이 만들어졌다. 영국 잉글랜드 지방의 바스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55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는 잉글랜드 지방을 점령한 후 약 100년이 지난 서기 43년에 런던에서 서쪽으로 173㎞ 떨어진 유황 온천지에 커다란 목욕탕을 건설했고, 그로 인해 도시 이름도 목욕탕이란 뜻의 바스(Bath)가 되었다.

최초로 만들어진 로마 욕장(Roman Bath)은 바스를 감싸고 도는 에이번(Avon) 강 근처에 있다. 주변에서부터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영국 상류층들이 광천수를 맛보며 사교를 즐겼다는 펌프 룸(Pump Room)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 김이 서린 커다란 욕탕이 나온다. 탕 주변에는 그 당시 목욕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들과 함께 로마 시절 기둥과 조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러나 이곳은 로마인들이 오기 전부터 현지인 켈트족에게도 잘 알려진 온천지였다. 약 2400년 전, 유럽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건너온 켈트족은 수많은 부족국가로 나뉘어 살았는데, 그 중의 하나인 바스 지방의 도부니(Dobunni)족은 이 온천을 지하에서 강과 온천을 지배하는 치료의 여신 술리스(Sulis)와 소통할 수 있는 장소라고 믿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에 나오는 리어왕은 실존 인물인데, 전설에 따르면 리어왕의 아버지 블래더드(Bladud)는 왕자 시절에 한센병을 앓다가 기원전 863년에 이 온천의 물로 병을 고쳤다고 한다.

이같이 성스러운 온천을 대중 목욕탕으로 바꾼 게 로마인이었다. 로마인은 땅굴을 파서 통로와 방을 만들었으며, 온천을 이용한 중앙난방 시스템도 구축했다. 그리고 현지 부족들을 위해 거대한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사지를 받고 휴식을 취하며 철학적 토론을 즐겼다. 1세기쯤까지 남녀가 혼욕을 했지만, 2세기부터는 법으로 금지해서 남녀의 목욕 시간을 달리했다고 한다.

◇에이번강(왼쪽), 로마 욕장의 밀랍인형

이같이 평화스러운 풍경은 서기 60년쯤 현지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한때 사라졌다. 로마 군인들이 현지인 수천명을 죽였고 온천도 황폐됐다. 그 후 화해의 뜻으로 온천탕을 재건했으나 4세기 초 로마군이 철수한 이후 온천은 쇠락했고, 로마 침입 시 북쪽으로 쫓겨 갔던 켈트족 일파인 스콧족이 이곳을 공격하면서 서기 367년 바스는 초토화되었다. 그 후 부분적으로 복구되었으나 계속되는 침략과 인구 유입으로 바스의 욕탕도 진흙으로 뒤덮여 갔다. 중세에 수도사들이 다시 목욕을 즐기긴 했으나, 이 온천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옛 명성을 되찾게 된 것은 18세기부터다. 욕탕이 재건되면서 영국 상류층의 유흥지가 되었고 현재는 전 세계 여행자들이 찾아드는 관광지가 되었다.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온천수는 1만년 전의 빗물이 지하 약 4300m 정도까지 스며들어 그곳에서 가열된 후 천천히 솟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온천물은 1초에 13ℓ가 솟고 있으며, 43가지의 미네랄을 함유한 광천수로 관광객들에게 판매되고 있다.

바스의 매력은 온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지안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아름다워 18세기에는 영국에서 가장 멋있고 품위 있는 도시로 손꼽혔다. 바스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은 걷는 것이다. 도보 관광의 출발점은 로마 욕장이다. 로마 욕장에서 나오면 바로 근처에 바스 사원이 보이고, 북쪽 길을 따라 걸으면 그 당시 사교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무도회장(어셈블리 룸)이 있으며, 16세기부터의 의상을 전시한 의상 박물관(뮤지엄 오브 코스튬)이 있다. 또한 17세기에 만들어진 집들이 초승달 모양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로열 크레슨트(Royal Crescent)도 볼 만한 구경거리다.

걷다가 피곤하면 에이번 강변의 벤치에 앉아서 쉬기도 하고, 벼룩시장에서 사람들의 체취가 서린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사원 앞에서 젊은 연주자들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다. 그 순간, 바스는 단순히 보는 관광지를 넘어서 온갖 것을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온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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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를 찾았을 때는 6월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춥고 축축한 6월의 영국 날씨에 주눅이 들었던 나는 목욕탕을 연상시키는 바스에 가며 기대에 부풀었다. 이름에서부터 뜨근뜨근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러나 바스도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를 맞고 골목길 끝에 있는 낡은 유스호스텔을 찾아 한숨 자고 났을 때도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서머싯 몸의 소설 제목을 딴 ‘달과 6펜스’란 레스토랑에 갔다. 특색 없는 스테이크였지만 위스키를 마시다 문득 영국에서 왜 셰익스피어가 탄생했으며 뮤지컬·추리 소설·환상적인 동화 등이 꽃피웠는가를 깨달았다. 비가 오는 음산한 날씨에 난로를 쬐면서 위스키 한잔 마시다 보면 온갖 이야깃거리가 생각나지 않을까? 비 내리는 바스의 밤에는 이 같은 낭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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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까지는 런던의 패딩턴역에서 고속열차로 1시간30분 소요된다. 버스로는 약 3시간 걸린다. 저렴한 숙소를 원하는 여행자들은 바스 백패커스 호텔(Bath Backpackers Hotel)이란 곳으로 많이 간다. 기차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이며, 도미토리(집단숙소)가 9.5파운드(약 1만7000원)다. YMCA 인터내셔널 하우스는 중심지에 있는데, 싱글룸은 12.50파운드, 더블룸은 23파운드다. 도미토리는 10파운드. 식당은 여러 군데가 있는데 ‘달과 6펜스’에서는 5파운드 정도면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다.

by 100명 2007. 4. 13. 11:18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88> 영국 스톤헨지
[세계일보 2007-01-19 09:12]

영국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130㎞ 떨어진 솔즈베리 평원을 달리다 보면 스톤헨지가 나온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 거대한 고대 유적지는 5000∼4000년 전에 건설되었으며 큰 돌기둥의 높이는 8m, 가장 무거운 돌은 50t이나 된다.

인적 없는 푸른 초원 한가운데 우뚝 선 거석들의 모습은 꽤 낭만적이지만, 이 거대한 유적들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기원전 2400년쯤부터 영국으로 들어온 켈트족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이 없어 확실치는 않다. 거석 기념물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기원전 4000년쯤에 등장한 서남아시아의 거석문화가 지중해와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북프랑스와 영국까지 전해졌다는 학설도 있다.

스톤헨지를 공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넓은 벌판에 거대한 원형 도랑이 파여 있다. 이 원을 따라 안쪽에 둥글게 82개의 입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안의 거대한 선돌들은 둥근 모양으로 이어진 환상열석(環狀列石)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두 개의 선돌 위에 가로로 돌이 놓인 삼석탑(三石塔, Trilithon)들이 있고, 중앙의 제단석에서 동북쪽으로 약 80m 떨어진 곳에는 힐스톤이라는 돌이 있다.

스톤헨지는 한 번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기원전 3100년쯤 지름 110m 정도의 원형 도랑을 판 후 거기에 사슴 뼈나 황소 뼈를 묻었다고 한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다시 안쪽에 지름 1m의 구덩이 56개를 팠는데 여기에는 인간을 화장하고 난 후의 뼈를 묻었다. 목조 건축물의 버팀목이 세워진 구덩이들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스톤헨지 주변의 거석(왼쪽), 솔즈베리 평원의 풍경

둘째 단계에서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다가 셋째 단계인 기원전 2600년쯤부터 목재 대신 돌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선돌 82개가 세워졌고, 그 중 43개는 250㎞ 떨어진 프레셀리 언덕(Preseli Hills) 언덕에서 가져온 블루스톤이라는 청회색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힐스톤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0㎞ 정도 떨어진 말버러 고원(Marlborough Downs)에서 가져온 30개 정도의 거대한 사슨석(sarsen)으로 원형 석조물을 세우고, 그 안쪽에 5개의 삼석탑을 말발굽형으로 만들었다. 그 후 약간씩 변하다가 기원전 1600년경에 현재의 모습이 된다.

그런데 이 무거운 돌들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40㎞ 떨어진 말버러 고원에서 운반한 사슨석 중에는 무게가 50t이나 되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굴림대나 밧줄을 이용해 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평균 무게가 4t 정도 되는 블루스톤을 250㎞나 떨어진 웨일스 서남부의 프레셀리 언덕에서 운반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이 무거운 돌들을 뗏목에 실어 풍랑이 매우 심한 브리스톨 해협을 어떻게 건넜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거석 기념물을 만든 목적을 놓고는 여러 가설들이 나오고 있다. 우선 돌 자체에 초자연적인 힘이 내재한다는 믿음, 혹은 돌에 조상의 영혼이나 신령 등 영적인 존재가 강림한다는 생각에서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태양이 하지에 스톤헨지 동북쪽의 힐스톤 위로 떠올라서 중앙 제단을 비췄던 시기를 천문학적으로 계산해 보니 기원전 2123년에서 기원전 1573년 사이일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삼석탑과 중앙제단, 그리고 힐스톤의 건조 연대와 비슷하다. 이 점에 착안해 스톤헨지가 천체관측소였다는 주장이 있다. 태양을 숭배하는 고대 신앙으로 스톤헨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농경을 위해 수백년에 걸쳐 만들며 하늘을 관측했다는 주장도 있다.

반대로 하지가 아니라 동짓날 태양이 지는 방향에 관심이 있어 스톤헨지에서 어떤 의식을 치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며, 장례식을 치르는 장소였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또 농경사회에서 인구가 증가해 사회를 조직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지배계급에서 이 같은 거대 구조물을 통해 사회를 결속시켰다는 설도 있다.

그런가 하면 프레셀리 지방에 병을 고치게 하는 샘들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고대의 성지 참배자들이 방문하는 순례지였을 것이란 얘기도 있다. 또 근래에는 스톤헨지가 여성의 성기 모양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대지의 어머니’를 숭배하기 위한 상징물이라고 주장하는 산부인과 의사도 있었다. 고대 문명은 이같이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수많은 가설이 난무하기 때문에 더욱 흥미를 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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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에피소드

바스에서 스톤헨지까지 가는 길은 매우 아름다웠다. 잔디 깔린 구릉에 목조 가옥들이 점점이 들어선 영국 전원 풍경에 빠져 들었는데, 한 가지 흠이라면 비가 왔다는 점이다. 솔즈베리 평원의 스톤헨지 유적지에 도착했을 때 비가 억수로 쏟아졌고, 스톤헨지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금방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그치자 안내자는 버스를 벌판에 세우고 승객들에게 잠시 전원 풍경을 둘러볼 시간을 주었다. 내려서 사진을 한참 찍다 보니 버스가 떠나고 있는 게 아닌가. 달려가서 문을 두드려 겨우 탔는데 만약 거기서 버스를 놓쳤다면 어두워지는 벌판에 그냥 혼자 남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여행정보

스톤헨지는 일단 바스까지 가서 도시 구경을 마친 후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투어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안내원이 자세한 설명도 곁들여 준다. 요금은 10.5파운드.

by 100명 2007. 4. 13. 11:17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89>영국 스털링
[세계일보 2007-01-26 11:45]

런던에서 북쪽 스코틀랜드로 가는 길은 꽤 낭만적이다. 전원풍의 예쁜 집들과 양떼가 노니는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올라갈수록 문화와 언어는 생소해진다.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에서도 억센 악센트가 어색하게 들리고,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에 도착하면 알아듣기조차 힘들어진다.

잘 알려진 대로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가 합쳐진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다. 그 중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현재의 잉글랜드 사람들과 종족이 다르고, 과거에 길고 긴 투쟁도 했기에 사이도 좋지 않다.

그들의 대표적인 독립투쟁 현장은 스털링(Sterling)이다. 에든버러에서 기차를 타고 약 30분 걸려 도착하는 스털링은 현재는 인구 4만명도 안 되는 중소도시지만,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에서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전략적 요충이었고 그 중심은 스털링 성이다.

스털링 시내에서 위가 트인 투어 버스를 타고 푸른 초원과 구릉 그리고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전원 풍경 속으로 푹 빠져들다 보면 갑자기 멀리 바위산 위에 우뚝 솟은 스털링 성이 보인다. 천천히 발길을 옮기다 보면 성 근처에 감옥도 보이는데, 현재는 관광지가 되었다. 밀랍인형으로 예전의 죄수들이 형벌을 받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고, 가이드는 마치 간수처럼 연극을 하며 관광객들을 놀라게 하면서도 즐겁게 해준다.

◇스코틀랜드 민속춤 공연

성은 거대한 바위산 위에 있다. 돌길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면 튼튼한 외곽 방어벽이 보이고, 그 앞에는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의 영웅인 로버트 브루스의 동상이 서 있다. 성 안으로 들어가 몇 개의 방어벽을 통과하면 안쪽에 왕궁이 보이고 예배당과 연회실, 부엌 등의 건물이 나타난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성벽에서 바라보는 아래 세상은 평화롭지만, 수백년 전 이곳은 잉글랜드군과 스코틀랜드군이 격전을 벌였던 전쟁터였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역사적으로 오랜 앙숙이었다. 기원전 325년경 그리스의 탐험가 피테아스가 현재 잉글랜드 지방에 ‘프레타니카이(Pretanikai, 몸에 그림을 그린 사람들)’들이 살고 있다고 얘기했는데, 이 말이 브리타니아(Bretania)로 변해 현재의 브리튼(Britain)이란 이름이 됐다. 여기 살던 사람들은 인도유럽인에 속하는 켈트족으로 유럽 대륙에서 기원전 400년경부터 영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로마가 기원전 55년 잉글랜드 지방을 점령하면서 북쪽 산악지대인 스코틀랜드로 쫓겨났다.

반면 잉글랜드 지방에 남은 켈트족들은 로마에 의해 문명화되었고, 후일 로마군이 철수하자 그 힘의 공백을 뚫고 잉글랜드 지방을 점령한 사람들이 독일과 덴마크 지방에 살던 앵글로족과 색슨족이었다. 그 후 이들의 피가 서로 섞인 앵글로색슨족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서 건너온 노르만족에게 지배당하고, 1066년에는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영국 왕(윌리엄 1세)이 된다. 그 후 윌리엄 1세의 손자 헨리 2세는 영토를 넓히며 스코틀랜드 지방을 침공했고, 에드워드 1세 때는 스털링 성을 중심으로 거대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297년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엄 월리스는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큰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그는 결국 1305년 체포돼 런던에서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월리스는 사지가 묶인 채 배에서 창자가 꺼내지고, 찢긴 사지는 거리에 내걸렸다. 그의 죽음은 스코틀랜드인들을 더욱 공고히 단결시켰고, 귀족 출신인 로버트 브루스는 1314년 배녹번 전투(Bannockburn)에서 잉글랜드군에 대승을 거둬 스코틀랜드를 독립시킨다.

그후 왕실 혈연관계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까지 겸하게 됨으로써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한 나라가 되었지만, 17세기 중반에 종교 문제로 다시 갈라선다. 그러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8세기 초에 하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지금도 이 같은 투쟁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며 강한 자존심을 갖고 있고, 스털링 성은 자존심을 되새기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라는 영화로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결합된 이 영화 속에서 처형당하는 멜 깁슨이 “프리덤” 하고 외치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스코틀랜드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영화를 본 수많은 관객이 관광객이 되어 스털링 성을 찾고 있다.

성도 장엄하고 주변 풍광도 아름답지만, 그 성에 올라가 수많은 관광객 사이를 거니노라면 영화 한 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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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인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반감과 자존심은 대단했다. 에든버러의 한 호텔에서 스코틀랜드 전통 음악과 춤 공연을 즐겼는데, 공연 시작 전 사회자가 관중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를 물어보았다. 독일, 덴마크, 프랑스, 스페인 등 세계 각국의 이름이 나왔고, 나도 손을 들어 “코리아”라고 외쳤다. 이에 사회자는 그렇게 먼 데서 왔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반가운 몸짓을 했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 있던 어느 여자가 “잉글랜드!”라고 외치자, 사회자와 무대 위 연주자 대여섯이 모두 벌떡 일어나 과장된 몸짓과 짐짓 성난 표정으로 “잉글랜드!!”를 외쳐 온 관중이 웃고 말았다. 그 여인은 공연 내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같이 과장스러운 스코틀랜드인들의 반응에는 분명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나왔지만, 참혹한 고문과 처형 과정에서도 윌리엄 월리스가 “프리덤”이라고 외치는 장면을 기억하는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민족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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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털링은 에든버러에서 기차를 타면 약 30분 정도 걸리므로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 있다. 스털링을 돌아보는 데는 위가 트인 이층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by 100명 2007. 4. 13. 11:15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90>이탈리아 로마
[세계일보 2007-02-02 11:12]

로마의 영광은 콜로세움부터 시작된다. 약 2000년 전 로마의 독재자 네로 황제가 몰락한 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인공 호수가 있던 자리에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을 세웠다. 높이 50m, 둘레 527m인 타원형의 거대한 경기장은 약 5만명을 수용하는데, 서기 72년에 히브리에서 데려온 노예 1만2000명을 투입하여 8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비가 올 때는 거대한 천막을 쳤고, 5만 관중이 정해진 출구로 빠져 나가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물을 가득 채운 후 모의해전까지 즐겼다고 한다.

가장 많이 벌어졌던 행사는 목숨을 건 검투사 경기였다. 그러나 지금 콜로세움에 들어서면 바닥이 다 파헤쳐지고 지하공간 대부분이 드러나 앙상한 해골 같은 느낌을 준다. 지하공간은 검투사 대기실, 맹수 우리, 도구 보관 창고로 사용됐다.

로마 공회장을 뜻하는 ‘포로 로마노’는 콜로세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는 근처에 살던 사비니 왕국의 여인들을 강탈한 후 추격해 온 군사들과 대치한다. 캄피돌리오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의 습한 저지대였는데, 로물루스는 사비니군과 화해한 후 이 저지대를 백성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이곳에서 물물교환을 하고 정치집회를 가졌으며 수많은 신전과 기념물을 세웠다.

로마 공회장은 훗날 이민족의 침략으로 철저히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신전과 감옥, 로마 최고의 정치기관 원로원 건물, 키케로 등의 웅변가가 연설했다는 연단, 그리고 카이사르(시저)가 암살된 후 화장된 곳에 세워진 카이사르 신전 등이 남아 있다.

◇나보나 광장의 분수대(왼쪽), 스페인 계단

로마의 유적지는 거대하다. 중부 유럽의 아기자기한 유적지에 익숙해진 관광객들은 로마에 오는 순간 거대한 규모에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서기 217년, 카라칼라 황제는 한번에 1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동 목욕탕을 만들었다. 목욕탕 바닥의 화려한 모자이크, 현란한 조각들은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이 얼마나 사치했는가를 보여준다. 로마 시민들은 일과를 끝낸 후 이 카라칼라 욕탕에 와서 무료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로마 멸망 원인 중의 하나가 목욕 문화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목욕을 좋아했다.

로마에는 거대한 유적지뿐 아니라 거리 곳곳에 숨어 있는 아기자기한 광장, 분수대, 조각들 그리고 넘쳐 흐르는 낭만들이 있다. 나보나 광장에는 밤이 되면 레스토랑과 카페의 불빛이 밝혀지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쇼를 보여주는 사람 등이 나타난다. 16세기 중엽 바로크 예술의 대가인 베르니니가 만든 분수대에는 체격이 우람한 네 개의 인물상이 있는데, 이는 인도의 갠지스강과 아프리카의 나일강, 남미의 플라타 강, 유럽의 다뉴브 강들을 각각 의인화한 것이다.

나보나 광장만큼 낭만이 넘쳐 흐르는 곳은 스페인 계단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장소로, 지금도 수많은 여행자들은 오드리 헵번처럼 스페인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근처에는 18세기의 아름다운 조각들로 둘러싸인 트레비 분수가 있다. 돌아서서 동전을 오른손으로 쥐고 왼쪽 어깨 넘어로 던져 분수에 넣으면 다시 로마를 찾아오게 된다는 전설 때문에 수많은 여행자들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있다. 또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입구에는 ‘진실의 입’이라고 알려진 얼굴 조각이 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이 조각의 입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 때문에, 손을 넣고 흥분하며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로마 외곽의 지하 묘지인 카타콤베에는 탄압받던 기독교도들의 신앙심이 서려 있고, 바티칸 시티의 거대한 산 피에트로 광장, 산 피에트로 성당, 바티칸 박물관에서는 활짝 피어났던 로마의 기독교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로마의 매력이 눈에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웅장한 유적지와 아름다운 예술품에 감탄하다가 문득 그 너머에 서린 역사와 신화, 전설에 눈을 돌리면 우리의 시야는 수천년 전까지 확장되며 작은 희열이 온 몸을 덮쳐 온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존재보다도 그 존재에 어린 흔적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곳이 로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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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지하 무덤인 카타콤베에 들른 적이 있다. 이곳엔 혼자 들어갈 수 없어 할 수 없이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을 따라 들어갔다. 지하 무덤은 으스스했고 미로처럼 펼쳐져 있었다. 일본인 가이드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저만치 홀로 떨어져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돌아보니 몇 분 사이에 사람들이 감쪽같이 다 사라져 버렸다.

불이 밝혀져 있어 ‘금방 찾겠지’ 하고 황급히 그 장소로 돌아갔으나 이리저리 펼쳐진 동굴에서 그들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고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3년 전 단체관광을 왔던 일본인 커플이 정전이 되는 바람에 일행과 헤어지고 입구를 찾지 못해 며칠 후에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나로서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잠시 헤매다 입구를 발견하고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예전에 로마 병사들이 이 안에서 예배를 올리던 기독교 신자들을 쫓아 들어왔다 길을 잃어 죽기도 했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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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까지 직항이 있다. 로마는 유적지 하나를 보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일정을 넉넉하게 잡는 것이 좋다. 특히 로마에서는 도둑이나 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

by 100명 2007. 4. 13. 11:14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91>이탈리아 폼페이
[세계일보 2007-02-09 10:27]

지금으로부터 1928년 전인 서기 79년, 폼페이 근처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하늘로 치솟으며 세상을 덮은 화산재와 분화구에서 솟구쳐 오른 시뻘건 용암이 평화롭던 도시를 덮치는 순간 폼페이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당대에는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폼페이의 비극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끔찍한 현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1700년 정도가 지난 후였다.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는데, 이것만으로도 당시 로마인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폼페이는 나폴리에서 얼마 안 떨어진 휴양지여서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을 살펴보면, 돌로 만들어진 집들은 웅장하고 정원은 널찍하다. 벽에는 프레스코 벽화가 보이고 대리석 바닥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그림들이 박혀 있다. 도시 중심부에는 시민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던 널찍한 광장과 아폴론 신전, 유피테르(제우스·주피터) 신전이 있다. 하늘의 신, 번개의 신인 유피테르는 유노(하늘의 여신, 다산의 여신), 미네르바(지혜와 예술의 여신)와 함께 로마인들의 3대 신. 신전에는 지금도 기둥들과 조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화산재에 파묻혀 화석이 된 시신.

로마인들은 신을 숭배했지만 금욕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었으며, 쾌락도 즐겼다. 이리저리 뻗은 골목길에는 화덕이 설치된 식당 터, 술 항아리가 갖춰진 술집들이 보인다. 온수와 냉수는 물론 증기까지 나오는 목욕탕도 있었으며, 공중 화장실도 있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술과 고기와 빵을 먹고 사치스러운 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긴 후 가끔은 창녀촌도 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침대가 있는 창녀의 집터가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현대인 못지않은 문화 생활도 누렸다. 연극과 음악회를 즐겼던 대극장과 소극장, 운동 경기를 하던 원형경기장도 있었다고 한다.

폼페이 유적지를 터벅터벅 걷다 보면 그때가 살기 좋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인구가 2만명밖에 안 되었으니 생활 환경도 쾌적했을 것이다. 먹고 마시며 운동하고 즐기다 신전에서 신을 향해 기도도 드렸을 것이다. 도시에는 이런 생활을 위한 시설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광장에서 발견된 동상.

그러나 구석 공터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인간 화석 앞에 서면 사람들은 말문이 막혀 버린다. 화산재에 질식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쓰러진 후 뜨거운 용암에 파묻혀 화석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서기 79년, 그 당시의 순간에 멈춰져 있다. 드러누운 사람, 엎어진 사람, 웅크린 사람…. 발버둥치다 쓰러진 그들의 모습에서 그날의 비참함을 상상하게 된다.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을까?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산재와 물밀듯이 밀려오는 붉은 용암을 보며 세상의 종말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가뜩이나 세상의 종말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도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건물들이 무너지고 거대한 쓰나미가 우리를 덮친다면, 혹은 난데없이 거대한 혜성이 날아와 지구에 부딪친다면 우리들 역시 갑자기 사라질 게 아닌가? 약 7000만년 전 순식간에 멸종해 버린 공룡들처럼 인간도 언젠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폼페이 유적지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풍요로운 인간의 삶도 자연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고, 갑자기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우리의 삶을 숙연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유적지가 이제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그때처럼 자연 재해가 아니라 수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에 의해 파손되고 있다 하니, 폼페이는 예나 지금이나 바람 잘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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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발견된 동상.

이탈리아는 북부와 남부의 사이가 좋지 않다. 일찌감치 공업이 발달한 북부는 소득이 높고, 사람들도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반면 농업이 주산업인 남부는 소득이 낮고 실업률도 높다. 또 가족들의 유대가 강한 편이다.

이같이 기질과 사회 환경이 다른 데다 통일 과정에서 북부 사람들이 나폴리 왕국을 비롯한 남부 사람들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서로 간 감정의 골이 상당히 깊다. 남부 사람들은 북부 사람들이 차고 건방지다고 싫어하고, 북부 사람들은 남부 사람들이 가난하고 거짓말을 잘 한다고 멀리한다. 밀라노 출신의 어떤 이탈리아인이 나폴리에 가면 도둑을 조심하라며 외국인인 나에게 동포를 흉볼 정도였다.

이 때문에 로마에서 나폴리로 가는 기차를 탄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기차 안의 풍경도 북이탈리아와 달랐다. 기차의 차장은 술 한 잔을 걸친 붉은 얼굴에다 제복의 윗 단추를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그는 웬 중년 사내와 마주 앉아 계속 즐겁게 얘기했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해 중년 사내에게 유스호스텔을 물어보자, 그 사내는 나를 먼저 에스프레소 커피점으로 데려갔다. 서서 마시는 서민적인 곳이었는데, 자기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에스프레소 커피를 대접한 후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유스호스텔에서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었기에 따라가지 않았지만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폴리는 다소 치안이 불안했지만, 이처럼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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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에서 폼페이까지는 기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폼페이를 구경한 후 기차를 타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로 유명한 해변 소렌토도 구경할 수 있다. 나폴리에서 일찍 떠나면 폼페이, 소렌토를 당일치기로 구경할 수 있다.

by 100명 2007. 4. 13. 10:44
[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92> 공자의 고향 취푸
[세계일보 2007-02-16 09:45]

대부분의 나라에서 새해나 추수를 기념하는 의식의 중심에는 신(神)이 있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유교 문화권에서는 조상이 신을 대신한다. 유교에서 유독 효를 강조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열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던 공자(孔子)도 부모를 애절하게 그렸다. 공자 사당은 현재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 있다. 취푸는 노나라의 수도.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취푸에서 약 30㎞ 정도 떨어진 창평(昌平)의 취(聚)읍을 다스렸다. 숙량흘에게는 딸 아홉과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이 다리를 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새로운 아들을 원했던 숙량흘은 안씨(顔氏) 여자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야합이란 혼례를 올리지 않고 정을 통했다는 뜻이다. 당시 숙량흘의 나이는 66세였고, 안씨 집안의 여인 안징재(安徵在)는 채 20세가 되기 전이었다. 숙량흘과 안씨 여인은 취읍에서 2㎞ 정도 떨어진 니구산(尼丘山 해발 340m)에 가서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산의 조그만 동굴에서 공자를 낳는다. 기원전 551년의 일이었다.

◇공자묘(왼쪽), 공부가주

니구산은 취푸에서 동남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다. 가는 길에는 논길과 황량한 돌산이 보인다. 비교적 숲이 울창한 니구산에는 공자를 기리는 니산서원(尼山書院)과 관천정(觀川亭)이란 정자가 있다. 산 아래로 지원계(智源溪)라는 냇물이 흐르고, 멀리 기수(沂水)라는 강물도 지나간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산이지만 일설에는 숙량흘이 니구산의 이름을 따 공자의 이름을 구(丘)라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공자의 머리가 정수리 부분은 낮고 둘레는 높은 짱구 모양인데, 니구산의 형태가 이와 비슷하다는 게 이유였다고 한다.

니구산 밑에는 부자동(夫子洞)이란 조그만 동굴이 있는데, 중국 정부는 이곳이 공자의 출생지라며 주변 정비 작업을 벌이고 있다.

공자는 어린 시절을 외갓집이 있는 취푸에서 보내며 제사 놀이를 좋아했다. 17살이 되던 무렵 어머니를 여읜 공자는 19살에 결혼한다. 그는 노나라의 관리로 근무하며 끝없이 학문을 연마했고, 주나라의 문물과 제도, 예와 악에 대해서도 묻고 배웠다. 그러다가 55세 되던 해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다. 13년 동안 72명의 군주를 만나 설득했지만 ‘상갓집 개’처럼 박대를 받고 죽음의 위협에도 시달리다 68세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힘을 바탕으로 먹고 먹히는 춘추전국시대에 공자가 내세운 인(仁)의 철학은 설 곳이 없었다. 그는 저술에 힘쓰고 제자를 가르쳤으나 사랑하던 제자 안회(顔回)와 자로(子路)가 죽자 애통해하다가 5년 만인 기원전 479년에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우물

◇취푸 시내의 야시장

취푸에서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곳 중 하나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공묘(孔廟)다.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처음에 세웠고, 역대 제왕들이 건물들을 추가로 만들어 매우 웅장하다. 베이징의 자금성, 허베이(河北)성 청더(承德)의 피서산장과 함께 중국의 3대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불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형상화한 4개의 기둥과 영성문이 나온다. 여러 시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문을 계속 통과하다 보면 13개 비와 대성문(大成門)이 나오고,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것을 기념해서 세운 행단(杏壇)이란 정자가 나타난다. 그 뒤쪽에 있는 것이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구름과 승천하는 용이 새겨진 거대한 돌기둥이 있으며, 내부에 공자의 형상이 안치되어 있다.

대성전 오른쪽에는 공자가 원래 살던 집인 시례당(詩禮堂)이 있다. 이곳에서 공자는 아들에게 시와 예를 가르쳤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공자가 마셨다는 우물도 있고 그 옆에는 노벽(魯壁)도 있다. 진시황이 유생을 생매장하고 유교 경전들을 모두 불살랐을 당시 이 집에 살던 공자의 9대손이 몰래 유교 경전들을 이 벽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지금 있는 노벽은 그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든 것이다.

◇취푸 시내 풍경

공묘 오른쪽에는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던 공부(孔府)가 있고,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공림(孔林)이 있다. 울창한 숲길 옆에 있는 공자의 무덤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생각을 지배한 거인의 무덤답지 않게 단출하기 그지없다. 무덤 위로는 나무가 무성하고, 문화혁명 당시 수난을 당한 묘비에는 금이 가 있다. 왼쪽 옆에는 공자 사후 6년간 시묘살이를 한 제자 자공(子貢)을 기리는 집이 있고, 공자 묘의 오른쪽에는 아들인 공리(孔鯉)의 묘가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아래쪽에는 공자의 손자이며 ‘중용’의 저자인 자사(子思)의 묘가 있다.

공자의 무덤 앞에 서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생전에는 공자의 삶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고 세상의 박대를 당했으며 말년엔 애제자들을 둘이나 잃고 자신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사후에 많은 명성을 얻었고 그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해 살아 남았으니, 공자의 사상 못지않게 삶 자체도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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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집안의 제사용 술 ‘공부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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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푸에는 공자 집안에서 제사용으로 썼던 공부가주(孔府家酒)라는 술이 있다. 39도짜리와 52도짜리가 있다. 대중음식점에서 두 가지를 마셔보니 39도짜리는 고량주 정도로 독했지만 술술 넘어갔다. 52도짜리는 목이 탔지만 약간 달콤한 맛이 났다. 39도짜리는 160㎖ 한 병이 한국 돈으로 1200원 정도, 52도짜리는 1800원 정도였다. 한번에 마시질 않고 여행 중 밤에 조금씩 마셨는데 뒤끝도 좋았다. 취푸를 비롯한 산둥성 전체에서 유명한 술이니 그 지역에 가면 한번 마셔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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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성의 성도 지난(濟南)까지 인천에서 직항이 있다. 지난에서 취푸까지는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취푸에서 니구산까지 택시비는 왕복 140위안(약 1만7000원) 정도. 시내에서 공묘, 공부 등은 걸어갈 수 있으나 공림까지는 미터기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 취푸 시내에는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를 기리는 사당인 안묘(顔廟), 공자가 흠모한 주나라 주공(周公)을 기리는 주공묘(周公廟)도 있다.

by 100명 2007. 4. 13. 10:43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93>맹자의 고향 맹자고리
[세계일보 2007-02-23 10:06]

만약 맹자가 없었다면 공자의 사상이 이토록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공자의 사상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바로 맹자다.

맹자(기원전 372년∼289년)는 공자가 세상을 뜬 지 107년 후에 태어나서 같은 시대를 살지는 못했으나, 그의 고향은 공자가 가르침을 펴던 취푸(曲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취푸에서 쩌우현(騶縣) 방향으로 약 13㎞ 정도 거리여서 버스를 타고 약 15분 정도 가면 도달한다. 맹자고리(孟子故里)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 기둥이 보이는데, 이는 맹자의 옛 마을, 즉 고향이란 뜻이다.

◇맹자 초상화

이곳 풍경은 잔뜩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 준다. 더러운 개천물이 흐르고 낡은 가옥들과 푸성귀를 키우는 텃밭이 보이는데, 진창길로 가끔 수레와 자전거가 지나갈 뿐 행인도 별로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길거리에는 허름한 식당과 가게가 있을 뿐,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시설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마을 안에는 맹자 어머니가 사용했다는 맹모정(孟母井)이란 우물이 보존된 집이 있을 뿐이다.

맹자고리에서 길을 건너면 석조 기둥에 맹모림(孟母林)이라 쓰여진 현판이 보이고, 이곳을 통과하면 밭과 민가 몇 채가 들어선 조용한 마을이 나온다. 10분 정도 길을 따라 걷다 왼쪽 길로 접어 들면 이름 없는 무덤들이 군데군데 들어선 허름한 공동묘지가 나오고, 한쪽에 맹자 어머니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앞에 맹씨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없다면 쉽게 구별조차 할 수 없는 평범한 묘일 뿐이다.

이곳은 맹자가 태어난 시절에도 공동묘지였다. 맹자는 그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곡하면서 장례 놀이를 했다고 한다. 자식의 앞날을 걱정한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간다. 맹자고리에서 약 7㎞ 떨어진 그곳에는 현재 기차역이 있다. 시장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번잡한 거리에 음식점과 상점들도 많이 들어서 있다.

맹자가 이곳에서 장사하는 흉내를 내며 공부를 게을리 하자 맹자 어머니는 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를 한다. 새로 이사를 간 곳은 약 2㎞ 떨어진 곳이었다. 맹자가 이곳에서 글을 배우는데 재미를 붙여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맹자는 대학자로 성장한 후 당대의 유명 사상가들과 학문적 논쟁을 전개한다. 그 시절에 가장 유행한 학설은 노자의 제자로 알려진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이었다. 양주는 세상 일에 너무 나서지 말고 자기의 털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이기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이와 정반대로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라며 이타주의를 내세운 묵자(墨子)의 겸애설(兼愛說)도 인기가 있었다.

◇맹모림(맹자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마을)

◇맹자 어머니 무덤

◇맹자묘(사당)

맹자는 이들의 극단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지금 천하는 양묵(楊墨)의 말들로 가득 차 있다. 앞으로의 사상계는 양주에게로 기울지 않으면 묵적(墨翟, 묵자의 본명)에게로 기울 것이다”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맹자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내세우며 네 가지 선한 마음씨인 4단(四端)이 있다고 주장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 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남을 공경하고 사양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갖고 태어나는데 이 마음을 배양하여 4덕(四德), 즉 군자가 행하여야 할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도달하는 것을 교육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 같은 마음을 갖고 정치하는 것을 왕도(王道) 정치라 했고, 군주가 왕도 정치를 하지 못할 때에는 백성이 군주를 쫓아낼 수도 있다고 했다.

◇맹자소학(맹자초등학교)

◇쩌우현 기차역 부근(옛 시장 동네)

맹자는 학문을 익힌 후, 약 15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공자처럼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려 했으나 군주들은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맹자도 스승 공자처럼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키우며 만년을 보낸다.

맹자가 학문을 닦았던 마을에는 현재 그를 모시는 사당인 맹묘(孟廟)가 있고, 그 옆에는 후손들이 살았던 맹부(孟府)가 있다. 지금도 맹묘 근처에는 ‘맹자소학(孟子小學)’이라는 초등학교가 있는데, 학교에 드나드는 아이들을 지켜보노라면 약 2400년 전 이곳에서 서당에 다녔던 어린 맹자의 모습이 절로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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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어머니처럼 야단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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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묘 근처에 갔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다. 맹자소학교 아이들이 나와 소나무를 기어오르고, 딱지치기를 하고, 문방구점에서 구경을 하는 등 다들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학교 앞 반듯한 돌 위에 책과 공책을 놓고 뭔가를 하는 아이가 있었다.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야단치며 미처 하지 못한 숙제를 시키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다가가 사진을 찍는 나를 아이가 발견했으나, 힐끔힐끔 보면서 엄마가 시키는 숙제를 계속했다. 맹자의 어머니도 공부는 하지 않고 늘 상여꾼이나 장사치를 흉내 내는 맹자를 꽤나 야단쳤을 것이다. 그들 모자의 모습을 보며 맹자의 어머니도 저 여인처럼 맹자의 공부를 돌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맹자의 자취가 서린 곳에 왔다는 감상 때문일까, 이곳의 교육열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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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고리는 공자의 고향인 취푸의 버스터미널에서 쩌우현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약 15분쯤 가면 된다. 정류장이 따로 있는 곳이 아니므로 버스 차장에게 미리 행선지를 말해야 한다. 맹자 어머니의 무덤은 맹자고리에서 길을 건너 20분쯤 걸어 들어간다. 이곳을 구경하고 도로에서 다시 쩌우현 방향으로 버스를 타면 약 10분 후 기차역 근방에 도착한다. 맹묘는 여기서 택시를 타고 5분 정도 걸린다. 쩌우현은 취푸에서 머물며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 맹자의 무덤이 있는 맹림은 북쪽으로 약 25㎞ 떨어진 사기산(四基山)에 있다.

by 100명 2007. 4. 13. 10:36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94) 중국 지난
[세계일보 2007-03-02 09:24]

중국 산둥(山東)성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산둥성에는 공자·맹자·묵자의 고향이 있고, 오악 중 으뜸이며 역대 제왕들이 봉선 의식을 거행하던 태산(泰山)이 있다.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요·순 임금이 다스리던 지역도 산둥성에 있었다. 현재 한국에 있는 화교 대부분이 산둥성 출신이기도 하다.

신화에 따르면 반고(盤古)라는 신이 우주를 창조한 후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가 펼쳐진다. 삼황은 여와씨, 신농씨, 복희씨 등으로 알려져 있다. 여와씨는 인간을 만들었고, 신농씨는 농사 기술을, 복희씨는 목축과 사냥 기술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삼황 시대를 신화로 간주하고, 오제 시대부터 역사로 다룬다. 오제는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다섯 성인으로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을 말한다. 기원전 3000년경에 황하 유역에 모여 살던 부족을 황제(黃帝), 즉 황하를 닮은 누른빛의 지도자가 다스렸고, 그 뒤 전욱과 제곡을 거쳐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에 태평성대를 이룬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순임금이 밭갈이를 했다는 역산(歷山)이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濟南)에 있다. 역산은 현재 첸포산(千佛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지난 시내 남쪽에 있다. 4000년 전 순임금이 밭을 갈던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첸포산 기슭에는 순임금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도교 성인들의 조각들도 전시되어 있다.

◇대명호

◇흑호천

요임금과 그를 계승한 순임금은 천성이 어질고 지혜로워 임금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백성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그런데 맹자에 따르면 순임금은 동방의 동이족이다. 순임금을 마지막으로 오제시대가 끝나며, 서쪽의 화하족이 일으킨 상나라가 세워지고, 은나라가 뒤를 잇는다. 그 뒤를 주나라가 이어받으니 중국 고대사의 정통성은 동이족이 아닌 화하족을 중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요·순임금의 정신은 중국인들에게 여전히 살아 남아 후대까지 전해오고 있다.

현재 첸포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에는 수많은 계단이 놓여 있고 정상까지 리프트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심장이 약한 사람은 타지 않는 게 좋다. 걸개를 대충 걸치고 수백 미터의 허공을 가르며 산을 올라가노라면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리프트를 타든, 계단을 걸어 올라가든 무척 힘든 길이다. 첸포산 정상에는 불교 사원과 도교 사원들이 많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먼 옛날 순임금의 자취를 돌아보기보다는 향을 피우고 현세의 복과 재물을 염원하는 기도에 열중해 있다.

◇표돌천 안의 누각에 새겨진 동판화

◇표돌천 안의 찻집

첸포산 옆에는 산둥성에서 발견된 도자기와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기원전 16세기에서 11세기에 제작된 상나라 시대의 동항아리, 주전자,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유물들과 고대 화폐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사용된 칼자루 모양의 화폐 등 귀한 유물들이 많다.

지난은 예로부터 물이 많아 살기 좋았다. 지금도 시내에는 대명호라는 큰 호수가 남아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와 놀이터가 되고 있다. 당나라 시인 이백과 두보도 이곳을 거닐며 시를 읊었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이 외에도 72개의 샘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샘은 표돌천(豹突泉·바오투취안)이다. 청나라 고종은 표돌천을 천하제일천이라 평했고, 이청조(李淸照)라는 송나라 때 지난 출신 여성 문인과 현대 문인인 궈모뤄(郭沫若), 라오서(老舍) 등이 표돌천에 머물며 글을 썼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도 물이 풍부하게 솟고 있으며, 정원처럼 꾸며진 호수 주변에는 정자와 찻집들이 있어 정취를 돋운다. 또 누각의 벽에는 옛사람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새긴 동판화들이 남아 있어 그 시절을 쉽게 상상하게 한다.

◇산둥성 박물관의 유물들

표돌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흑호천이 있다. 표돌천이 호수 같은 샘이라면 흑호천(黑虎泉·헤이후취안)은 도심지를 흐르는 천으로, 한국의 청계천 같은 풍경이다. 천변에 만들어진 세 마리 검은 호랑이 조각의 입에서는 샘물이 흘러나오고, 그 위에는 약수터가 있어 시민들이 늘 애용하고 있다. 흑호천은 한때 매우 더럽고 오염되었으나 지금은 많이 정비되어서 꽤 맑다. 시민들이 오리처럼 생긴 배를 띄우며 놀 정도로 깊기도 하다.

지난은 근세에 독일이 지배한 적도 있어 100년 전에 만들어진 독일풍의 건물들도 간간이 보이지만 그리 예스러운 도시는 아니다.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은 태산이나 공자의 고향인 취푸에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근대화를 향해 전진하는 매우 활기찬 도시다.

여행 작가(blog.naver.com/roadjisang)

고속버스의 ‘고객 감동 서비스’

>>여행 에피소드

지난에서 칭다오(靑島)로 가느라 고속버스를 탔는데 서비스가 대단했다. 제복 입은 안내원이 둘이나 탔고, 버스 안에는 TV 두 대와 화장실도 갖춰져 있었다. 안내원들은 먼저 뜨거운 물을 주었다. 잠시 후 과자를 주었고 무말랭이 같은 야채도 내왔다. 이어 땅콩과 표돌천 캔맥주도 돌렸다. 물론 모두 무료였다.

서비스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간에 5분 정도 휴식시간을 가진 후 버스에 오르니 이번에는 커피를 돌렸다. 비행기 기내 서비스 같아서 기분이 좋았는데, 예전에 감동했던 터키의 버스 서비스보다도 더 융숭한 대접인 것 같았다. 게다가 2006년이 다 끝나가는 시점이라고 2007년도 새해 달력까지 주는 게 아닌가. 또 둥근 비닐봉지를 갖고 다니며 일일이 달력을 넣어줄 정도로 안내원들은 매우 친절했다.

처음 버스에 탈 때는 안내원이 있었던 한국의 1970, 80년대 고속버스와 비슷한 풍경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상상을 뛰어넘는 ‘고객 감동’ 서비스였다. 예전엔 볼 수 없었던 광경으로, 중국이 모든 면에서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 정보

인천에서 지난까지는 비행기로 갈 수도, 칭다오로 들어가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칭다오에서 지난까지는 버스로 약 5시간 걸리고, 요금은 1만2000원 정도. 숙소로는 7만, 8만원 하는 4성급 호텔인 지루빈관(齊魯賓館)이 첸포산 입구에 있고, 버스터미널이나 역 부근에도 3만, 4만원 정도 하는 빈관들이 있다.

by 100명 2007. 4. 13. 10:35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95) 터키 코니아
[세계일보 2007-03-09 09:42]

한 손엔 코란, 다른 한 손에는 칼 또는 폭탄을 안고 돌진하는 테러범. 우리가 이슬람교인(무슬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슬림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테러범 이미지는 서방 세계에서 만들어 낸 편견이며, 중세 십자군전쟁 때 이교도들에게 행한 만행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니듯이 무슬림도 마찬가지라고 항변한다. 유일신을 섬기지만 인류는 모두 형제란 게 자신들의 종교철학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종교적인 대립과 정치적인 이유에서 발생하는 테러 사건들로 서방 세계의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러나 메블라나 루미(Mevlana Rumi)의 회전무를 보고 나면, 이슬람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다. 메블라나 루미는 ‘우리의 스승’이란 뜻이다. 13세기 초 터키의 코니아에서 활동한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인 루미의 주장은 이렇다.

“사랑이야말로 정신적인 구원을 위한 가장 위대하고 신비한 길이다. 삶은 곧 사랑이다.”

그는 철학자였으나 철학을 거부했다. 사상은 사랑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또한 시인이면서 말과 글을 거부했다. 말과 글은 포도밭에 둘린 울타리일 뿐, 포도 즉 사랑 그 자체는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사상과 말을 버리고 신과 합일하는 수행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이 바로 회전무였다. 빙글빙글 도는 춤이라 하여 서양 사람들은 ‘수피 훨링(Sufi whirling)’이라고도 한다.

◇터키 여학생들(왼쪽), 코니아의 초등학교 학생들

중앙아시아 유목민이었던 터키인들은 원래 이슬람교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슬람 수니파를 받아들인 것은 8, 9세기쯤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주하면서부터다. 그 후 이단으로 취급받는 신비주의 수피즘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수피들은 기도와 춤과 노래 등을 통해 절대자와의 합일을 꿈꾸었다.

활달한 유목민이었던 터키인들은 딱딱한 교리보다 이같이 역동적인 종교의식(세마·Sema)을 좋아했다. 회전무는 14세기부터 이란, 파키스탄, 인도, 아프가니스탄으로 전해졌고, 19세기 중반 독일 학자에 의해 유럽에 소개된 후 전 세계로 널리 퍼지게 된다.

현재 이런 춤은 이스탄불 등의 관광지에서 공연처럼 행해지지만, 코니아에 가면 더 장엄한 의식으로 진행된다. 메블라나 루미가 세상을 뜬 1273년 12월17일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2월10일부터 17일까지 그의 고향인 터키 중부 코니아에서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12세기쯤 셀주크터키 제국의 수도였던 코니아는 아직도 검은 차도르를 두르고 다니는 중년 여인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중세풍의 보수적인 도시다. 아름다운 모스크, 중세풍의 건물과 메블라나 루미의 무덤, 박물관 등이 있어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축제가 열릴 때쯤이면 엄청난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게 된다. 이 축제는 체육관에서 하루에 두 번씩 열리는데, 유럽에 널리 소개되어 유럽 관광객들 특히 독일인들이 많이 찾는다.

축제의 1부는 합창으로 시작된다. 남자 합창단원들이 부르는 조용하고 경건한 종교적 노래가 힘차게 이어지다가 “라 일라하 일랄라(알라 외에는 신이 없도다)”를 외치며 절정에 달한다. 2부는 회전무다. 남자 데르비슈(수피 수행자들) 십여 명이 머리에 둥근 모자를 쓰고 나와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다가 여러 차례 인사한다. 첫 번째 인사는 진리를 향한 인간의 탄생을 의미하며, 두 번째 인사는 전지전능한 신의 위대함을 찬미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 인사는 신에 대한 인식이 사랑 속에서 녹아버리는 것을, 네 번째 인사는 자아가 소멸하고 신과 하나가 된 후 창조를 향한 의무감에 충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사를 마친 그들은 감미로운 음악에 맞춰 왼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무대 전체를 둥글게 돌기 시작한다. 이 광경에 관객들은 모두 탄성을 지른다. 하얀 가운 밑바닥을 넓게 벌리며 회전하는 무용수들은 마치 거꾸로 피어난 백장미들처럼 보인다. 무아지경에 빠져 수백 번을 돌다 잠시 멈추고 주변 사람들과 두셋씩 모여 어깨를 부딪친 채 한참을 쉰다. 잠시 후 다시 반대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데 수백 번의 회전 속에서 무용수들은 신의 감미로운 입맞춤에 도취한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처음에 이 춤을 추는 사람은 환희에 차 기쁨의 눈물을 흘릴 정도라고 한다.

각 종교에는 나름대로 여러 수행 방법이 있지만 이 회전무만큼 황홀한 방법은 없을 것 같다. 한국에서도 공연했지만 마침 2000년 6월 중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시기여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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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아에는 관광객이 많다 보니 이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장삿속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카펫 가게 호객꾼이 많아 좀 귀찮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단히 순박했다. 길을 가다가 어느 허름한 찻집에 들어갔는데 주인은 먼 나라에서 온 손님이라고 찻값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

또 우연히 초등학교에 들렀을 때는 학교 선생님들이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대접하고 말을 건넸다. 얘기를 마치고 나오다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하는 아이들을 보고 사진을 찍었는데 이게 실수였다. 아이들이 수업하다 말고 모두 나에게 달려오는 바람에 수업이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결국, 체육 선생님도 수업을 포기하고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비르(하나), 이키(둘), 위치(셋)” 하며 내가 사진을 찍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교문까지 따라와 나에게 두 손 모아 합장하고 무릎을 약간 굽히며 공손하게 인사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샛길이나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같이 정이 넘쳐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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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아까지 가는 방법은 많다. 모두 버스를 이용하는데 앙카라에서는 3시간, 이스탄불에서는 10시간 정도 걸린다.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유명 관광지 카파도키아와 연계해서 돌아봐도 좋다.

by 100명 2007. 4. 13. 10:34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96) 일본 다자이후
[세계일보 2007-03-16 08:54]

후쿠오카(福岡)는 우리와 매우 가깝다. 후쿠오카 사람들이 “여기는 기후나 기질이 도쿄보다도 부산과 더 비슷해요”라고 말할 정도다. 부산에서 고속여객선인 비틀호나 코비호를 타면 2시간5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워낙 많이 찾아 곳곳에 한글 안내판도 보인다.

후쿠오카에서는 하카타역 혹은 하카타 우동 등 하카타(博多)라는 말도 많이 쓰인다. 원래 후쿠오카와 하카타는 다른 도시였다.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나카가와강 동쪽의 하카타에는 상인들이 많이 살았고, 강 서쪽인 후쿠오카에는 무사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두 도시가 1889년 후쿠오카라는 이름으로 합쳐지면서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됐다.

후쿠오카 근처에는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곳이 있다. 전철을 타고 50분 정도 남쪽으로 가다 보면 전원 풍경과 주택지가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을 주는 다자이후(大宰府)란 도시가 나온다.

◇덴만구 신사 입구

서기 660년쯤 이곳은 엄청난 긴장에 쌓여 있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하면서 많은 유민들이 규슈 북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일본을 다스리던 사이메(齊明) 여왕은 백제를 구원하려고 긴키(近畿) 지방에 있던 수도 아스카(飛鳥)에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규슈로 진군한다. 그러나 사이메 여왕은 661년 병으로 죽고, 아들 나카노오에(中大兄) 태자가 유언을 받들어 하카타에 도착한 후 백제에 구원군을 보낸다. 663년에 2만7000여명의 병력이 백제 부흥군과 연합해 백촌강(白村江, 금강 하구)에서 대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만다.

왜 그들은 이렇게까지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을까?

“이제 백제가 망해서 조상들에게 절할 곳이 없어졌다”며 일본 귀족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 등 수많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일왕과 지배계급이 백제에서 건너왔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또한 백제가 멸망한 후에 일본(日本)이란 국호가 등장했는데, 이때부터 일본은 한반도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해가 뜨는 곳, 즉 ‘해의 근본’은 일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인식이 아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가 뜨는 곳이 되므로, ‘해의 근본’이라는 인식의 주체는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합격을 기원하는 부적을 사는 이들

◇소원을 적은 팻말들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성을 쌓았는데, 그 터가 다자이후에 남아 있다. 백제 유민들과 일본인들은 평지에 수성(水城)을 쌓았다. 백제식 토성으로 성 밑에 수로(水路)를 설치했기에 수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현재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풍납토성처럼 주택가와 도로변에 흔적이 남아 있다. 다자이후로 가는 길 양쪽에 있는 험한 산은 천연 방어막이었기에 일본인과 백제 유민들은 적군이 침입할 수 있는 산 사이의 활짝 트인 평야에 약 1.2㎞의 토성을 쌓았는데, 현재 성터는 남아 있지 않고 나무가 무성한 수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수성은 1차 방어선이었고, 이것이 무너졌을 때를 대비한 성이 대야성(大野城)이었다. 다자이후역에서 규슈 산책로를 따라 가파른 등산로를 약 한 시간 정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후쿠오카 시내가 잘 내려다보이는 확 트인 고원이 나온다. 둥글게 휜 절벽 밑으로는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근처에는 창고 터도 보인다.

일본식 성은 평지에 세워지고 주변은 해자라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여기에 남아 있는 대야성 같은 성을 일본인들은 조선식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한 나당 연합군의 침공은 없었다. 그후 이곳에 사왕사(四王寺)가 들어서면서 대야산은 사왕사산으로 불렸으며, 다자이후는 나라나 교토처럼 바둑판같이 계획된 도시로 발전했다. 그 흔적이 이곳을 다스리던 다자이후 정청의 초석이다.

이보다도 더 인기를 끄는 것은 다자이후 덴만구(大帝府天滿宮)로 스가와라 미치자네라는 인물을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신사다. 130종 6000그루의 매화 등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로 매우 아름다운 곳인데, 입시철인 2월이면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찾아 학문의 신에게 기도하며 합격을 기원한다. 근처에는 규슈 역사자료관도 있어서 다자이후는 후쿠오카에 왔다면 꼭 한 번 들러 역사와 자연을 즐겨 볼 만한 곳이다.

여행 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여행 정보

후쿠오카의 덴진(天紳)에 있는 니시테쓰(西鐵) 덴진역에서 갈 수 있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다자이후까지 한 번에 가는 완행열차를 타는 방법으로 50분 정도 걸린다. 더 빨리 가려면 오무타까지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후쓰카이치시(二日市)에서 내려 바로 대기하고 있는 다자이후행 열차를 타면 23분 정도에 갈 수 있다. 요금은 편도 390엔. 다자이후에는 유스호스텔이 있지만, 후쿠오카에서 당일치기로 찾는 사람들이 많다.

◇기모노를 입고 나들이 나온 어린이

대야성 산성터는 예전에 차를 타고 간 적이 있었으나, 올 2월 중순에 갔을 때는 규슈 자연보도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다자이후역에서 다자이후 유스호스텔 방향으로 가는 길은 언덕길이었다.

한적한 주택가였고 어딜 가나 깔끔했으며,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다른 차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주차해 놓아 보기에도 좋았다. 계속 언덕길을 오르다 산으로 접어들었는데 갑자기 가팔라지며 등산로처럼 변했다. 생각 외로 힘든 길이었다.

가면서 제대로 가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종종 중간에 만나는 등산객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서툰 일본어로 ‘대야성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고, 다만 ‘미기(오른쪽), 히다리(왼쪽)’ 등의 말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서툰 대화 속에서 사람들의 친절과 미소를 만날 수 있는 즐거운 길이었다. 대야성 구경을 마치고 차도를 따라 내려와 덴만구로 가니 마침 입시철이라 인산인해였다. 주변 상가에서는 떡이나 오뎅(어묵)을 파는데 오뎅에 ‘합격(合格)’이라는 도장을 찍어 팔고 있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입시 열기는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by 100명 2007. 4. 13. 10:33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97) 일본 아스카
[세계일보 2007-03-23 10:09]

아스카(飛鳥)는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다. 거대한 유적지는 많지 않지만, 곳곳에 일본 고대 국가 형성기의 자취가 남아 있어 한국의 부여와 비슷한 분위기다. 아스카는 교토나 나라에서 전철을 타면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시골이다. 전철역에 내리는 순간 한적한 분위기가 정겹게 다가오는데, 주변이 산들로 둘러싸인 동서 약 6㎞, 남북 약 8㎞의 분지에 크고 작은 언덕이 많다.

이곳은 794년 교토로 천도하기까지 야마토(大和) 정권의 요람이었다. 야마토 정권의 시작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였다. 이때는 한반도에서 백제 문명이 융성했던 시기로, 정치·종교·문화적으로 백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선 언어에서 그 기원을 찾는 학자들이 있다. 일본에서는 비조(飛鳥)라는 말을 그들 식대로 ‘도부도리’라 읽지 않고 ‘아스카’라고 읽는다. 일본의 고문헌에는 아스카라는 지역이 비조뿐 아니라 명일향(明日香), 안숙(安宿)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는데, 아스카란 말은 안숙에서 나왔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은 ‘비상한 새가 여기까지 날아 와서 비로소 안심하고 쉴 수 있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그 주체는 바로 풍랑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와 이곳에 정착한 백제인들이 아니었을까? 비조란 지명은 이 근방에 많이 나타나는데, 백제 사람들이 오사카 지방에 상륙한 후 흩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지방의 고분에서 그 당시 일본에는 없었던 말과 관련된 장비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귀신에 관한 전설이 얽힌 돌(왼쪽), 다카마쓰즈카 고분

아스카에는 유적지들이 널리 퍼져 있다. 좁은 길은 차를 타고 다닐 수가 없고 걷기에도 멀어, 많은 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즐기듯이 돌아본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아스카데라(飛鳥寺)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이 절은 596년에 세워졌다. 이 시기에 야마토 정권은 종교적인 문제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6세기 중엽 백제 성왕은 일본에 불상과 경론을 보냈는데, 이걸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를 놓고 국론이 분열된 것이다. 숭불파는 소가(蘇我)씨였고 배불파는 모노노베(物部)씨였는데 숭불파가 승리한 후 이 절을 만들었다. 그후 일본에서는 불교가 크게 흥하게 되니 이 절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각별한 곳이다. 안에는 건장한 청년같이 힘이 넘치는 불상이 있는데, 이곳 주지 스님이 매우 성실하게 불상에 대해 설명해 준다. 이 불상은 특이하게도 한쪽에서 보면 고구려 불상처럼 씩씩한 기상이 엿보이고, 다른 한쪽에서 보면 백제 불상처럼 온화한 기운이 넘쳐 흐른다.

이 아스카사 부근에는 수총(首塚)이란 곳이 있다. 소가 이루카의 머리가 묻혔다는 자리에 세운 석탑으로, 이곳에 얽힌 역사는 비참하다. 불교를 받아들일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소가 우마코는 그후 외척으로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소가 집안은 일본 고대사에서 매우 흥미를 끄는 세력으로, 백제계로 추정된다. 그들은 권력이 집중될수록 점점 횡포를 부렸고 그 자손인 소가 이루카 때 와서 극치를 이뤘다. 이에 나카노오에 (中大兄) 왕자는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소가 이루카의 목을 쳤다. 그 이루카의 목이 날아온 곳이 바로 수총 자리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자전거를 타고 즐기는 여행자들

나카노오에 왕자가 후일 왕이 될 무렵 한반도에서는 백제가 멸망했고, 일본에서 보낸 구원군도 패배했다. 그 후 야마토 정권은 교토로 천도하면서 한반도와 밀접했던 아스카 시대를 끝내고 일본이란 국호를 내세우며 새로운 나라로 출발을 하게 된다.

아스카에는 수수께끼 돌들이 많다. 거북과 비슷한 돌,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 귀신이 도마에서 요리를 했다는 전설이 서린 귀신의 칼도마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석무대(石舞臺)라는 거대한 돌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길이 12.5m, 폭 17.9m로 일본에서 가장 큰 바위 무덤이다. 축조 시기를 알 수 없고 부장품이 도굴되어 주인공은 분명치 않다. 권력자였던 소가 우마코의 무덤으로 보이는데, 석무대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여우가 밤마다 이곳에서 춤을 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다카마쓰즈카(高松塚) 고분이 있다. 1970년 죽순을 캐던 농부가 처음으로 발견한 이 석실 안 부장품은 다 도굴돼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분 벽화가 한반도에서 발굴된 것과 비슷해서 백제계나 고구려계 귀족일 것이라는 설도 있고 일본의 왕족이라는 설도 있다.

아스카는 이런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며, 한국인의 눈에도 왠지 모르게 푸근하게 느껴진다. 약 1300년 전 먼 바닷길을 헤치고 이곳에 도착한 백제인들의 눈에도 틀림없이 그렇게 느껴졌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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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에피소드

아스카에는 여러 번 가보았는데 걸어다닌 적도 있고 차를 타고 다닌 적도 있다. 그 중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 때가 가장 좋았다. 역사 앞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유적지를 돌아보다 가끔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마시고, 또 가을이면 아무도 없는 무인 판매대에서 빨간 홍시를 사먹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한번은 큰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저녁나절 자전거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가다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안경이 벗겨지고 턱은 아스팔트에 부딪쳤는데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손바닥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도움을 주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자칫하면 얼굴이나 머리가 크게 다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스카의 비탈길을 달릴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 여행 정보

아스카는 오사카, 교토, 나라 등에서 갈 수 있다. 중간에 가시하라 진구마에역에서 내려 아스카역까지 가는 전철을 갈아탄다. 대략 1시간에서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아스카 유적지를 걸어서 보려면 대략 10㎞ 정도를 걸어야 된다. 아스카역사 앞에서 자전거를 빌려 준다. 오사카, 교토, 나라 등지에 숙소를 정해 놓고 당일치기로 돌아보면 좋다.

by 100명 2007. 4. 13. 10:32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98> 중국 상하이
[세계일보 2007-03-30 10:06]

상하이의 매력은 다양하다. 경제에 관심이 있다면 동양에 세워진 미래의 뉴욕을 연상할 수 있고, 역사에 관심 있다면 아편전쟁과 서구열강에 의해서 조각난 조계지를 떠올릴 것이며, 사람들의 질펀한 삶에 눈길이 간다면 주성치의 영화 ‘쿵푸 허슬’에 나오는 1930년대풍의 목조건물과 뒷골목 그리고 거리에 넘쳐 흐르는 음식점을 먼저 연상할 것 같다. 이처럼 상하이에는 대단한 유적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쉽게 싫증 나지 않는 다양한 매력이 있다.

상하이는 원래 조그만 어촌에 불과했다. 양쯔강 이남에서 생산된 쌀을 북쪽에 운반하는 기지였고 17, 18세기에는 비단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그러다 1842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한 후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외국에 개방되었고 그때부터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후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이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를 설치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상하이는 중국 땅이면서도 중국 땅이 아닌 곳이 되어 버렸다.

◇아침에 와이탄에서 태극권 하는 사람들(왼쪽), 아침에 와이탄에서 묘기를 펼치는 노인.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와이탄(外灘)이다. 와이탄은 황푸강변을 따라 약 1.5㎞ 정도 이어진 해안길을 말하는데, 여기에 있는 황푸공원은 ‘개와 중국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이 붙어 있던 치욕스러운 현장이다. 그러나 현재는 수많은 중국인들과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건너편 푸둥지구에 높이 치솟은 동방명주 TV 수신탑과 주변의 고층빌딩을 보며 감탄하고, 중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외국 요인들을 이 과거의 치욕스런 현장에 데리고 와 건너편에 솟아오른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보게 한다.

이곳에서 역사를 회상하면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재 이 공원에서는 아침이면 수많은 시민이 나와 단체로 태극권을 연마하고, 롤러 스케이트를 타며 묘기를 연마하는 할아버지도 볼 수 있다. 조계지 시절,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 문화대혁명을 거친 나이 든 사람들은 이제 평화스럽고 번영하는 상하이의 풍경을 보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왼쪽), 예원.

와이탄공원에서 고개를 돌려 중산둥로(中山東路)와 난징둥로(南京東路) 쪽을 보면 고풍스러운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영국 조계지였던 곳으로 아직까지 그 분위기가 남아 있는데, 이 거리를 걷다 보면 진짜 중국에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 가도가도 밀려드는 사람들의 행렬은 그야말로 사람 산, 사람 바다인 인산인해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사람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이 거리에는 온갖 쇼핑센터와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하루 유동인구가 1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혼잡스러운 거리가 흥겨운 분위기로 느껴지는 것은 보행자 거리이기 때문이다. 길이 너무 길다 보니 관광객이나 쇼핑객을 위해 거리 한복판에 장난감 열차 같은 것을 설치했는데 꽤 낭만적인 분위기다.

눈길을 더하는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로,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중 13년 동안 이곳을 청사로 사용했다. 한때 프랑스 조계지였던 이 지역 주변에는 프랑스풍의 건물과 카페가 들어서 있어 화려한 분위기인데, 골목길로 들어서면 허름한 목조건물들 사이에 임시정부 청사가 있다. 청사라는 말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낡은 목조건물은 개인집처럼 조그맣다. 1층에는 회의실과 주방, 2층에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요인들이 사용하던 집무실, 3층에는 침실이 있으며 임시정부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현장에서 한때 나라를 잃었던 유민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우리가 일으킨 나라의 소중함을 절로 느끼게 된다.

상하이에 온 여행자들이 빠트리지 않는 곳이 예원이다. 예원은 상하이에 하나밖에 없는 정원으로, 명나라 때인 16세기 중엽 상하이 출신 고위 관리가 아버지의 노후를 위해 만든 저택이었다. 개인 저택으로는 너무도 큰 이곳에는 40개의 정자와 누각, 연못 등이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1000여개의 상점이 밀집된 상하이의 대표적인 시장인 예원상장이 있다. 수많은 가게를 들러보는 재미도 있지만 명·청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로 분위기가 더 인상적이다.

그외에도 루쉰공원과 쑨원고거, 위포사(玉佛寺), 룽화사(龍華寺) 등의 볼거리가 있는데 나이트 라이프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에서 1930년대의 분위기를 맛보고 싶은 사람은 난징둥로의 화평빈관(和平賓館)에 있는 올드 재즈 바로 가 그 시절 유행했던 스윙 재즈를 즐긴다. 이곳은 음악만 오래된 것이 아니라 연주자도 70대 이상의 노인들이어서 흘러간 과거에 푹 젖게 된다. 상하이는 공간 여행 못지않게 시간 여행을 즐기기에 매우 좋은 매력적인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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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 서린 거품을 말하며 위험성을 얘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겉보기로는 분명히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시민들의 의식도 변하고 있으며, 특히 택시기사들의 친절과 정직성에 감탄하는 이들이 많다. 베이징에서 뺑뺑이를 돌리는 택시기사를 만났던 나는 상하이에서도 그럴까 걱정했는데 몇번 타봐도 그런 기사들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발전 가운데도 예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잠옷 바람으로 거리를 활보한다는 소리를 예전부터 들은 적이 있는데 실제로 목격한 것이다. 오전에 황푸공원에 갔을 때 웬 노인이 잠옷 바람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유유자적 걷고 있는데 노인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만, 임시정부 청사에 찾아가던 늦은 아침에 잠옷 바람으로 거리의 가게에서 뭔가를 산 후 손잡고 활보하는 청춘남녀를 보면서 약간 충격을 받았다. 글쎄 이걸 보고 우리 기준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남의 시선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중국인들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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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청사를 가려면 택시부터 버스까지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지만, 지하철 1호선을 타고 황피난로(黃陂南路)에서 3번 출구로 나온 후 오른쪽으로 꺾어져 약 500m 정도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by 100명 2007. 4. 13. 10:30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99> 중국 쑤저우
"하늘엔 천당 땅에는 쑤저우가…”
◇쑤저우의 운하(왼쪽), 운하 옆의 집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쑤저우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특히 쑤저우는 운하와 아름다운 정원, 미인들로 유명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대단한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쑤저우는 매우 크고 훌륭한 도시다. 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고 지폐를 사용한다. 사람들은 교역과 수공업으로 살아가며, 비단이 대단히 많이 생산돼 옷을 지어 입는다. 도시가 얼마나 큰지 둘레가 40마일에 이르며, 이 도시에는 돌로 만든 다리가 6000개나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은 1260년에 시작해 1295년에 끝났으니, 이 이야기는 13세기 후반의 일이다.

당시 기록에 따른 이미지를 떠올리며 잔뜩 기대감을 갖고 쑤저우에 들어서는 순간 실망하게 된다. 돌로 만든 다리 6000개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번화한 ‘동양의 베네치아’는 좁고 낡은 운하와 초라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급한 마음으로 휘돌아보는 관광객의 눈에 쑤저우는 마치 초췌한 노인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잠시 여유를 갖고 퇴락한 도시의 고즈넉한 정원과 뒷골목을 천천히 거닐고 그 정취 속에서 과거를 회상한다면 쑤저우는 푸근한 고도로 다가오기도 한다.

쑤저우는 춘추시대 오나라 수도로 오왕 합려의 무덤이 근교에 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수 간이었는데, 합려는 이곳에서 월왕 구천에게 죽는다. 합려의 장례를 지낸 지 사흘째 되던 날 백호가 나타나 무덤 위에 꿇어앉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이곳은 호구(虎丘)라 불린다. 합려가 칼로 잘랐다는 바위 시검석도 근처에 있다. 합려가 귀중하게 여겼던 검 3000자루를 묻은 후 호수가 된 검지(劍池)도 있고, 고대에 쑤저우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호구탑(虎丘塔)도 볼 수 있다.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는 가시나무에서 잠을 자며 복수의 칼을 간 끝에 월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오왕 부차는 마땅히 부친의 원수인 구천을 죽여야 했으나, 미녀를 상납받은 후 그의 목숨을 살려준다. 이에 구천은 쓰디쓴 쓸개를 핥아 가며 힘을 길러 오나라에 복수하게 되니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오게 된다.

쑤저우에는 남북조시대인 6세기에 세워진 한산사란 절이 있다. 7세기에 당나라 시인이자 승려인 한산(寒山)이 머물러 이 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고, 당나라 시인 장계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에서 이 절을 언급함으로써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쑤저우는 마르코 폴로가 얘기했던 대로 예로부터 비단의 집산지여서 지금도 시내 비단박물관에 가면 시대별로 구분해 놓은 비단과 누에를 기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쑤저우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정원들이다. 쑤저우 정원들의 특징은 다른 도시에서처럼 왕의 것이 아니라 부호들의 개인 정원이라는 점이다.

◇창랑정의 대나무숲(왼쪽), 유원의 정자

도심지에는 네 개의 정원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정원은 창랑정이다. 원래 오월 광릉왕의 정원이었으나, 북송 때 시인 소순흠이 정원 내에 누각을 세운 뒤 그 이름을 따 창랑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유난히 대나무숲이 많은 이 정원은 다른 정원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사자림은 원나라 때 사찰로 지어졌다가 훗날 정원으로 바뀌었는데, 사자 모양의 돌을 많이 써서 그 같은 이름이 붙었다.

졸정원은 명나라 때인 15세기 초 어사 왕헌신이 지은 정원으로 연못이 매우 많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유원은 아름다운 누각들과 그 누각 사이에 길게 뻗은 회랑들이 아름답다.

쑤저우에서는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운하도 빠트릴 수 없다. 카메라 뷰파인더에 찍히는 주변 집들과 어우러진 운하와 다리의 풍경은 탁하고 초라하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약 700년 전에 묘사했던 방금 지은 화려한 집들과 투명한 운하 물 그리고 맑은 공기와 풍요로운 물자들을 상상하면 그 시절에는 정말로 아름다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쑤저우에 과거의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번화가에는 온갖 음식점과 상점, 유럽풍 바, 헤어숍 등이 보이고 한류의 물결을 타고 한국 식당들도 등장했다. 저녁이면 뱀, 개구리, 생선 등을 요리하는 간이 포장마차가 들어선다.

쑤저우는 이제 예전의 명성을 뒤로하고 변하고 있으며, 현대화 물결에 발맞춰 도시 전체가 공사 중이다. 낡은 풍경들이 해체되고 새로운 건물들이 치솟는 쑤저우가 과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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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열풍은 쑤저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몇 년 전 상하이에서 버스를 타고 쑤저우로 가는데 라디오방송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HOT 멤버들이 얘기하고 옆에서 중국어 통역이 돕고 있었다. 이제 한류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중국을 처음 여행했던 1991년도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이같이 양국은 문화 교류 속에서 많이 닮아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잘 이해되지 않는 풍경도 목격됐다. 쑤저우에서 운하를 따라 걷다가 다리 부근에서 웬 젊은 남녀가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대로변이어서 많은 차들이 지나다녔고, 뒤편에는 공사 중 무너진 건물 잔해가 널려 있었다. 행인들도 간간이 보였지만 두 젊은 남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특히 남자가 자신의 엉덩이를 여자의 몸에 쿵쿵 부딪치는 동작을 계속하고 있어서 보기가 영 민망스러웠다. 남의 사생활이고 지나가는 여행자였기에 그저 구경하는 기분으로 바라만 보았지만, 중국이 한국보다 더 개방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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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상하이에서 기차를 타면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버스도 꽤 자주 가므로 상하이에서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여유 있게 보려면 1박을 하는 것이 낫다.

by 100명 2007. 4. 13. 10:29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100>인도 암리차르
[세계일보 2007-04-13 10:21]

인도 북서부 펀자브(Punjab)주에는 암리차르(Amritsar)란 도시가 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상하게도 시크교도들의 골격은 엄청나게 크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코는 주먹만하고 주먹은 아이 머리만하며 어깨는 철판 같고 다리는 무쇠처럼 보인다.

인도에는 약 1800만명의 시크교도들이 있는데, 그 근거지가 바로 펀자브주이며 암리차르는 그들의 성지다. 구루(빛을 주는 스승) 나낙이 16세기 초에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초월하고 통합하고자 시크교를 만들었는데, 그는 현재 파키스탄에 속해 있는 라호르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암리차르가 성지가 된다.

시크교도는 하나의 신을 믿으며 우상숭배에 반대한다. 그들은 관용과 사랑을 실천하고 그들을 찾아온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시크교는 한때 순조롭게 성장했으나 이슬람교를 믿던 무굴제국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되자 항쟁을 하면서 강건한 조직과 독특한 계율을 갖게 된다.

◇황금사원

◇황금사원 내의 무료식당

◇무료식당의 음식

이들에게는 케쉬(자르지 않는 머리·깊은 신앙심을 의미), 캉가(나무 혹은 상아로 만든 빗·청결을 의미), 쿠차(반바지·경계를 의미), 카라(쇠로 만든 팔찌·결단을 의미), 키르판(칼·방어를 의미) 등 케이(K)로 시작되는 5가지의 계율이 있다.

현재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은 케쉬로, 이들은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를 터번으로 감추고 있다. 이 때문에 흔히 시크교도를 생각하면 터번을 연상하는데, 시크교도들은 기계를 잘 다루고 용감무쌍해서 군인, 운전사, 경비원들이 많다.

시크교도의 성지인 황금사원의 입구로 들어가면, 대리석으로 만든 인공호수가 있고 그 중앙에 사원이 보인다. 시크교도들은 들어오자마자 호숫가에서 황금사원을 향해 절과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하기도 한다. 일반 여행자들도 들어갈 수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긴 다리를 건너 황금사원으로 향한다. 1802년에 사원의 지붕이 약 400㎏의 황금으로 뒤덮인 이후부터 황금사원이라 부르는데, 이 사원을 더욱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시크교도들의 믿음과 시크교 경전 낭독 소리다.

◇와가보더의 풍경

◇와가보더 국기하강식의 군인

지금은 평화로운 곳이지만, 이곳은 한때 유혈이 낭자한 현장이었다. 인도로부터 분리독립을 원하며 1980년대 초부터 무장투쟁을 벌인 시크교도 강경파들은 황금사원을 장악한 후 항거했다. 이에 1984년 그 당시 여자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는 군대를 동원해 시크교도를 제압했고, 그 보복으로 인디라 간디 총리의 시크교도 경호원들이 간디 총리를 암살하고 만다. 그 후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암리차르는 한때 여행하기 힘든 곳이었지만 지금은 매우 평화롭다.

황금사원 근처에는 1919년 평화적인 집회를 위해 모인 군중에 영국군이 발포를 해서 약 400명이 희생당한 잘리안왈라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총탄 자국이 나 있는 벽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날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도시에는 다른 비극의 역사도 서려 있다. 영국으로부터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하게 되자 파키스탄 쪽에 살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인도로 오고, 인도에 살던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으로 가며 약 100만명이 이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약 25만명의 사람들이 죽는 엄청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국경도시인 암리차르도 그 사태를 비켜갈 수가 없었다.

◇시크교도

◇와가보더의 짐꾼

시크교도들은 빈민구제사업을 많이 벌이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베푸는 보시를 많이 하는데, 황금사원의 경내에는 구루 카 랑카라는 매우 큰 식당이 있다. 하루에 5만여명 정도가 이용한다는데 순례자들뿐만 아니라 여행자들도 들어가 밥을 먹을 수 있다. 식판 하나를 갖고 앉아 있으면 사원에서 일하는 이들이 음식을 나눠 준다.

밀개떡인 ‘차파티’와 콩수프인 ‘달’ 그리고 망고 장아찌 등 간단한 음식인데,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준다. 음식을 받을 때는 모두 두 손으로 받고 경건한 표정을 짓는다.

시크교도 중에는 성공한 비즈니스맨들이 많은데, 그들이 고향에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암리차르는 다른 도시에 비해 발전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도록 황금사원에 헌금도 두둑이 내고 있다.

시크교의 창시자 구루 나낙은 평생 헐벗은 채로 탁발 수행을 하며 얻어먹었기에 배고픔이 어떤 것임을 잘 알았다. 얻어먹고 또 보시하는 경험 속에서 베풂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 같은 시설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자에게는 황금사원의 황금 못지않게 이런 무료식당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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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차르에서 차를 타고 파키스탄과의 국경으로 가면 ‘와가보더’가 나온다. 바로 국경선이 지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국기하강식이 진행되는 오후 5시쯤부터 진풍경이 벌어진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군인들은 상대편보다 더 멋진 국기하강식을 연출하기 위해 경쟁하고, 구경 온 양국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사기를 북돋운다. 국경선의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라 양측 군인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화려한 복장을 한 군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행진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의식을 벌이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외국인 여행자들로서는 양국 국민들이 흥분해서 응원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들이 ‘즐거운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한국의 판문점을 떠올리며, 우리와 상관없는 외국인들이 그곳에 와서 느끼는 감정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경계를 벗어나 들여다보면 아무리 심각한 상황도 가끔은 즐거운 유희처럼 보이게 된다.

>> 여행 정보

암리차르는 뉴델리에서 기차로 8시간 정도, 바라나시에서는 약 24시간 정도 걸린다. 암리차르에서 와가보더를 넘어서 파키스탄으로 갈 수도 있다. 와가보더의 국기하강식을 보려면 차를 대절하는게 좋다. 숙소에서 차를 대절할 경우 차 한 대에 600루피(1만8000원 정도)가 든다.

by 100명 2007. 4. 13. 10:28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선정한 사진들











by 100명 2006. 9. 7. 08:21
태양계 '행성' 12개로 늘어난다
[한국일보 2006-08-17 01:27]
수-금-지-화-세레스-목-토-천-해-명-카론-제나

명왕성이 행성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신 새로운 분류체계가 도입돼 태양계 행성이 현재의 9개에서 12개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년간 ‘행성’과 혜성ㆍ소행성이 속하는 ‘태양계 소형 천체’의 정의 문제를 연구해온 국제천문연맹(IAU) 산하 행성정의위원회(PDC)는 16일 프라하에서 75개국 2,500여 천문학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는 IAU 총회에 이런 내용의 ‘행성 정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천문학자와 과학저술가, 역사가 등 7명으로 구성된 PDC가 내놓은 이 안은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 8개 행성을 ‘고전 행성’으로 분류하고, 명왕성 등 3개 천체를 ‘명왕성형 행성’을 뜻하는 ‘플루톤(Pluton)’이라는 새 행성 범주에 넣고 소행성인 ‘세레스(Ceres)’도 행성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로써 그 동안 논란의 대상이 돼온 명왕성은 플루톤이라는 새 행성 범주를 통해 행성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됐고 그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 명왕성의 최대 위성 카론과 2003년 발견돼 행성 논란에 기폭제가 된 ‘2003 UB313(일명 제나)’도 행성으로 인정 받을 수 있게 됐다.

행성은 ‘크고 둥근 천체’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크기와 형태의 기준을 따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하늘에 고정돼 있는 별을 배경으로 태양을 회전하는 천체’라는 행성의 정의도 기술 발달로 태양계 외곽에서 새 천체들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거센 도전을 받아왔다.

이 초안은 행성의 조건으로 ▦충분히 큰 질량과 중력을 가지고 있어 정역학적(靜力學的)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거의) 원형에 가까운 천체일 것 ▦ 별을 중심으로 회전할 것 ▦별이 아니고 다른 행성의 위성도 아닐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새 행성 범주인 플루톤은 태양을 한바퀴 도는데 200년 이상 걸리고 이들의 공전궤도 면이 고전적 행성들의 공전궤도 면에서 크게 기울어져 있는 점, 공전궤도가 원형보다는 많이 찌그러진 타원형이라는 점 등이 특징이다.

이날 공개된 결의안은 24일 열리는 2차 전체회의에서 투표에 붙여질 예정이다. 결의안이 통과되면 태양계의 행성은 '수ㆍ금ㆍ지ㆍ화ㆍ목ㆍ토ㆍ천ㆍ해ㆍ명’에서 ‘수ㆍ금ㆍ지ㆍ화ㆍ세레스ㆍ목ㆍ토ㆍ천ㆍ해ㆍ명ㆍ카론ㆍ2003UB313’으로 바뀌게 된다.
by 100명 2006. 8. 17. 07:09

점을 바라보신 후 시선을 앞뒤로 움직여 보세요!
앗! 원이 돌아갑니다.


가운데를 뚫어져라 보시다가 몸을 앞뒤로 흔들어 주쎄용

최근 인터넷에는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서면 얼굴 모습이 서로 뒤바뀌는 기이한 사진 2장이 올라와 화제가 되고있다.

'마귀할멈과 미녀' 라는 제목의 착시현상을 유발하는 이 사진들은 실제로 모니터에서 뒤로 물러서면 마녀 같은 얼굴이 미녀가 되고 미녀가 마녀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에 대해 많은 네티즌들은 얼굴 화장에 따라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져 보이는지 강조하는 사진이라며 신기해 했는데 또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는 미녀들의 참모습이 마귀할멈 같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위의 도형 그림에 나타난 검은색과 노란색 교차 지점 색깔이 같은 색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왼쪽 그림의 교차 지점은 분명 검은색으로 보이고 오른쪽 그림의 교차지점은 노란색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둘 다 같은 짙은 회색이다.

포토샵이나 페인트샵 등으로 두 그림의 중앙 부위를 잘라서 보면 같은 색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위의 그림 역시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가 아닐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by 100명 2005. 7. 31. 20:53

by 100명 2005. 7. 31. 20:49

무슨 그림 일까요? ( 2가지 일수도 있고 그 이상일수도 있지요)

1.

2.

by 100명 2005. 7. 31. 20:44
by 100명 2005. 7. 31. 20:42
by 100명 2005. 7. 31. 20:41
by 100명 2005. 7. 31. 20:38
수박 속이 예술~
[헤럴드 생생뉴스 2005-07-28 13:26]

전통회화에서나 봄직한 문양의 신기한 수박 속. 일부러 파놓은 건 아닐까?

몇일 전 과일가게에서 위(餘) 모씨(여)가 샀다는 무게 20㎏ 가량의 이 수박은 겉보기에는 다른 수박과 다른 점이 없어보인다. 그러나 수박 속은 어느 수박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한 모습이다. 수박 가운데를 중심으로 세 갈래로 갈라진 모습은 마치 전통회화에 등장하는 구름 모양과도 흡사해 보인다.

베이징천바오(北京晨報)와의 인터뷰에서 쉬 씨는 “세상에 이런 수박이 또 있겠어요?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그냥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과연 자연적인 환경에서 이런 수박 속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할까? 혹자는 탈수 현상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수박은 수확한지 상당 시간이 흐른 것으로, 날씨가 무더워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이런 신기한 모습으로 갈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윤희진 기자(yunheejin@heraldm.com)

by 100명 2005. 7. 31. 2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