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5)
사회의 공복(公復), 교사 토마스 쇼야마(Thomas Shoyama(1916-2006)


트뤼도, 죤 터너, 장 크레치앵 등 3명의 연방수상 고문역


토마스 쇼야마는 ‘왜놈’, 즉 ‘잽’(Jap: 일본인 Japanese를 경멸해 부르는 말)이란 소리 속에서 자랐다. 평범한 회계사 지망생이었으나 30년대 브리티쉬 컬럼비아주(B.C.)에서는 이런 모욕이 문제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캐나다교육을 받았건 안 받았건, 중국인이거나 일본인 종자면 주류사회, 정계나 정부에서 그들은 ‘잽스’, ‘차이나맨’이었다. 신문제목조차도 그랬다.

▲ 교수시절의 쇼야마. 세계2차대전의 와중에 수용소에 수용되면서도 일본인의 자긍심을 잃지 않았고, 그후 캐나다의 경제부흥과 사회복지의 확대를 위해 크게 기여했다. 말년에는 교수로서 명성을 날리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보통 아시안들의 생활수준은 백인들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백인보다 낮은 급료를 받아도 편안하게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주의회는 그들이 우리 주에 더 이상 유입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한다”고 BC주 의회는 35년 결의했다. 그땐 이민자들이나, 특히 극동지역(중국, 일본)에서 온 이민자들의 캐나다 태생 자손이더라도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업인이 될 수 없었다. 막일꾼, 하인들, 가게경영 같은 일들만 그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쇼야마는 회계사가 될 수 없었다. 대신 그의 인내심은 온갖 역경에 불구, 그를 뛰어난 인물로 만들었다. 타미 다그러스(Tommy Douglas: 사스카치완 주수상, 후에 캐나다연방의 의료보험, 국민연금, 실직수당 제도 등을 수립한 서민의 ‘아버지’)의 최측근 고문, 트뤼도 수상 밑에서 차관, 빅토리아대학교(BC주 빅토리아 소재) 교수 등을 지낸 훌륭한 인물이 됐다. 그는 자기 종족들을 불법적이고 천박하게 대한 국가에 크게 공헌했다.

1870년대 일본이 계급에 따른 특혜제도를 없애자 그의 사무라이 선조들은 조국을 등지고 살 곳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 쿠니타로는 BC주 캠루프에서 빵가게를 경영했다. 이 가게는 20-30년대 철도공사 인부들 간에 인기가 높았다. 이 중 한 사람이 뱅쿠버에서 온 앤디 존슨이었다. 쿠니타로는 존슨과 계약을 맺었다. 아들 쇼야마가 뱅쿠버에서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존슨의 집에서 무료로 하숙한다. 대신 쇼야마는 존슨의 집안일을 거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매년 여름 쇼야마는 펄프공장을 포함, ‘투 잡’을 뛰면서 학비를 벌었고 38년 UBC를 졸업했다. 경제학과 회계학의 복수 전공이었다. 만약 그가 백인이었다면 그만한 학력이라면 즉시 취직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취직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39년 그는 인종차별의 쓰라림을 어루만지며 ‘뉴 Canadian’(한국어 토씨 pls)이라는 막 창간된 일본계 신문의 영어편집장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누리던 평범한 생활은 41년12월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다음해 일본인들의 재산은 모두 압류되고 모두 특별수용소에 강제수용됐다. 나치에 쫓긴 유태인 신세, 다만 아우슈비츠 같은 죽음의 캠프가 없었을 뿐이었다. 일본은 적국이고 캐나다의 일본인들은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경계대상이라는 이유였다. 그의 신문은 BC주 카스로(Kaslo)라는 황량한 집단수용소로 옮겨졌다. 쇼야마는 정부검열관들의 폐간 협박 속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신문을 중단없이 찍어냈다. 이들은 캐나다의 전쟁상태를 절대 지지해서 충성을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을 맹렬히 비난했다. 또한 신문은 일본 교민들이 희망을 잃지 말라고 강조했다.

“당시 우리는 교민들의 사기진작을 위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는 교민들에게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지만 낙담하지 맙시다. 우리가 가진 힘, 자존심, 일본인의 위신을 유지합시다.”고 신문은 주장했다.

전쟁 말기 그는 캐나다 육군으로 입대, 1년간 정보부대에서 근무하다가 46년 제대하면서 르자이너에 사는 친구 조지 타마키를 방문했다. 그땐 몰랐지만 이것이 그의 인생 코스를 변경시켰다.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타마키는 사스카치완주의 CCF(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 정당) 사회주의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타마키는 쇼야마와 함께 타미 다그러스 수상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 갓 제대한 젊은 청년은 수상 연설에 감복, 주정부에서 일하기를 소원했다. 타마키는 정부집행위원회의 경제고문 탐 매크라우드(McLeod)와의 인터뷰를 주선했다. 매크라우드는 BC주 당 간부들의 반대에 불구, 그를 즉시 채용했다. 1947년 뱅쿠버 선 신문은 사스카츄완의 상태를 간결 명료하게 표현했다; ‘CCF 당 주정부가 ‘잽’들에게 직장을 준다(‘CCF Government Opens Posts to Japs')

“쇼야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정부 여러 분야에서 즉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영어구사력은 뛰어났다. 그는 각료들에게 보내는 메모나 다른 중요문서 작성을 자주 부탁 받았다. 누구도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었다.”

역동적이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더그러스 수상 밑에서 주정부의 효율성과 경제성은 전국에서 소문났다. 경제조사원 정도로 주정부에서 일을 시작한 후 점점 많은 책임을 맡은 쇼야마는 50년 경제자문위원회 겸 기획위원회 장(장관급)으로 피임, 주의회 쪽 관료조직의 최고책임자가 됐다. 정부쪽을 담당하는 재무위원회(Treasury Board: 주정부 공무원의 임면, 봉급사정 담당) 장관은 알 존슨. 이들의 우정은 그 후 30여 년간 계속됐다.

“‘우리는 분야가 달랐지만 언제나 따로 일하지 않고 함께 했다.” 오타와 거주 존슨의 말이다. 쇼야마의 능력은 국영기업체의 효율적 운영을 유도하고 이윤창출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59-61년에 다시 한번 명성을 날렸다. 47년에 시행된 주정부 건강보험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다. 더그러스 수상은 전면에서 정치적으로 싸우는 뒤에서 쇼야마와 존슨은 분과위원회나 입법과정의 문제점을 조용히 해결했다. 더그라스 수상은 그를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냉정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동정하는 따듯한 마음을 가졌다”고 평했다. 다재다능하며 융통성 있는 성격은 더그러스가 막 창당된 신민당(NDP)의 전국당수가 됐을 때도 드러났다. 다른 정치가들이 보란 듯이 비행기를 임대, 선거운동 할 때 당의 금고는 11만6천달러가 전부였다. 그는 일반인처럼 줄서서 상업비행기를 탔고 수행원으로는 한 사람 뿐이었다. 바로 쇼야마였다. 그는 선거운동 전략가이자 공보관 겸 짐가방 챙기는 비서였다. 오타와에 온 쇼야마는 4년만에 재무부(Dep't of Finance) 차관보조관으로 승진했고, 74년에는 3명의 유명한 재무부 장관; 존 터너(후에 연방수상), 도날드 맥도날드, 장 크레치앙(연방수상) 밑에서 차관을 지냈다. 트뤼도수상의 특별고문도 지냈고 캐나다원자력위원회(AECL) 회장을 거쳐 80년에 은퇴했다.

은퇴는 그에겐 새로운 시작이었다. 고향 BC주로 돌아가 빅토리아대학교의 아시아 태평양 학과의 방문교수가 됐다. 대개 1-2년 만에 끝나는 방문교수(Visiting professor)관례에서 벗어나 그의 ‘방문’은 91년까지, 10여년 간이나 계속됐다. 교수로서도 비범했던 것이다. 대가는 연봉 1달러와 연구실 1개. 그는 98년까지 논문을 지도했다.

by 100명 2007. 5. 22. 07:50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6)
피부색이란 무엇인가?
영화관조차 ‘브라운’’옐로우’들 지정석으로 차별


푼잡 태생 스푸니 싱Spoony Singh (1922-2006), 왝스 박물관으로 갑부대열


스푸니 싱은 황금색 캐딜락을 몰면서도 자켓에 넥타이 차림대신 인도 네루(Nehru)수상이 입던 네루자켓을 즐겨 입었다. 헐리웃 왝스(Wax)박물관 주인인 그는 머리에 터반을 둘렀고 신앙심은 없으면서도 돈독한 시크교도처럼 수염을 길렀다. 때때로 방문자들은 그를 하나의 밀납(왝스) 조형물로 오해하곤 했다.

▲ 스푸니 싱이 마리린 몬로 상을 만지고 있다. 몬로는 영화 ‘7년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에서 흰 스커트가 지하철 바람에 날리자 이를 내리 누르고 있다. 그는 늘 뿌리를 의식, 터반을 쓰고 네루복장을 했다.
65년1월 반 마일에 뻗친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첫 문을 연 박물관은 실물크기의 대통령, 영화배우, 종교계 인물과 역사 속의 저명인사들을 진열했다. 이중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을 본 딴 인물상들은 가장 인기가 높았다. 손님이 전시인물 중 유태인계가 없는 것을 지적하자 싱은 즉시 영화 ‘10계명(The Ten Commandments)’의 주연 찰톤 헤스톤 상을 주문하는 기지를 보였다.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끼 있는 사람이었다. 해가 갈수록 그의 인기는 높아져 전시인물 만큼 유명해졌다. 거리 파레이드에서는 코끼리를 타고 등장했고 잡지 까십칼럼의 단골 메뉴였다.

“우리 가족은 먹을 것을 찾아 인도를 떠났다. 그런데 이젠 내 살을 빼달라고 의사에게 돈을 주는 신세다.” 그의 말에는 감탄과 한탄이 반반씩 섞였다. “진정한 스타는 먼저 내 왝스상점의 전시물이 되어야 진짜 헐리웃 스타로 탄생하는 것이다.”고 떠들기도 했다. 그의 떠들썩한 선전은 그의 박물관을 크게 성공시켰다. 그는 농장과 금광, 창고업을 했고 맥시코와 헐리웃 근교 태평양 바닷가 변의 말리부(Malibu) 부자동네에 집을 지어 파는 건축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그의 집도 거기에 있었다. “난 지금 아주 신이 납니다.”그는 인터뷰서 주저 없이 말했다. 그의 성공은 그가 가난한 인도에서 왔다는 점 때문에 더욱 각광을 받았다. 그는 뱅쿠버 아일랜드에서 자라면서 돈을 조금 벌었다가 다 잃었다. 그의 실패와 성공은 왝스박물관 부자가 될 때까지 여러 번 반복됐다. 그의 인생자체가 한편의 영화였다.

인도인들, 일본, 중국인보다 더 한 차별대우 받아
뱅쿠버 상륙거절로 2개월간 배에서 살아
“브라운 침략을 막자”, 한때 전국이 떠들썩

샘퓨러 싱(Sampuran Singh Sundher)은 영국이 지배하던 시절, 인도의 푼잡(Punjab)지역 산골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지지리 가난한 고장이었다. 이상하게도 3년후 주민들은 이 집안을 캐나다에 보내기 위해서 모금을 했다. 당시도 지금처럼 정치적, 종교적으로 소란스러운 이 지역에서 왜 주민들이 모금했는지는 지금 분명치 않다. 하여튼 그들 가족은 푼잡을 떠났으나 뱅쿠버에 상륙한 것은 무려 11년 후였다. 이들을 포함, 일단의 시크인들을 실은 ‘코마가타 마루’선박은 상륙허가를 못 받아 2개월간을 바다에서 지내다가 끝내 뱅쿠버를 떠나야했다. 다행히 싱 가족은 빅토리아에 상륙이 허락되어 그의 아버지는 제재소에서 일했고 아들 샘퓨러는 급우들이 지어준 별명 스푸니라는 이름으로 그곳서 중고교를 나왔다. 주정부나 연방법은 이들을 공공장소에서 격리했고 공무원도, 선생도, 회계사, 변호사, 약사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인, 중국인이 받은 차별 그대로였다. 당시 캐나다는 인도인이 몰려오는 것을 ‘브라운 침략(Brown invasion)' 또는 ’힌두 침략‘이라 부르면서 알러지 반응이었다. 갈색이라는 뜻의 ’브라운‘은 한국, 중국, 일본인들을 ’노랑이(Yellow)‘라고 하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도인들은 극동인들보다 더 한 차별을 받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에 들어오려면 1인당 200달러를 내야했다. 당시 인도인들은 하루 평균 10센트를 벌던 때였다. 1907년 캐나다는 특별법을 제정, 국내거주 극소수의 인도인들에게서 투표권마저 박탈했다. 이것이 기독교를 믿으며 ’천국‘소리를 듣던 캐나다의 참모습이었다.

이런 와중에 싱 가족이 백인일색의 빅토리아에 나타난 것이다.

스푸니는 빅토리아 극장에서 영화를 즐겼다. 그는 ‘브라운’이기 때문에 인디안 원주민이나 중국인들 틈에 끼어 발코니 좌석에 앉아야 했다. 1층석은 모두 백인 전용이었다. 마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90년대까지 어디가나 흑백인 좌석이 따로 있던 것이나 같았다.

스푸니가 학교를 졸업할 때 아버지는 사업도 실패했고 천식을 앓아 거동을 못하게 됐다. 17살 된 그는 6가족을 먹여살려야하는 소년가장이 됐다. 그러나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곧 지붕재료 싱글을 만드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땔 나무를 가정집에 배달해주는 사업을 위해 트럭을 사려고 어려운 중에서도 열심히 저금했다.

그가 공장에서 조장(foreman)이 되자 일꾼들은 당장 보따리를 싸고 나갔다. ‘힌두’ 밑에선 일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스푸니는 밤 반으로 옮겼고 그는 작업개선을 통해 실적을 크게 올렸다. 생산량이 늘어 봉급이 늘자 낮 반 일꾼들은 힌두라고 배척하던 스푸니 가 있는 밤 반에서 일하겠다고 제의했다.

스푸니는 점차 사업을 넓혀나갔다. 그는 자신이 제재소를 설립했고 벌목회사를 운영했다. 결과적으로 여러 번 파산선고를 받았지만 54년에는 4 베드룸 큰 집을 지을 만큼의 돈을 모았다. 이때쯤 그는 가족중매로 배우자를 만났다. 그는 보호자가 따라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데이트라도 해서 서로 알기 전에는 결혼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임업은 변덕이 심해 잘 되다가도 망하기도 하는 사업이었다. 그는 사업을 다변화 시켰다. 놀이터 파크를 사서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후에 박물관을 차린 후 기자들과 자주 인터뷰, 공짜 광고를 얻곤 했다. 그는 타고 난 선전꾼이었다. 당시 날리던 재즈맨 루이 암스트롱을 초청, 박물관 안에서 트럼펫을 불게 했다. 이 사진이 여러 신문에 게재되자 박물관의 인기는 더 올라갔다. 박물관은 영화배우 크락 케이블, 진 해로우, 찰리 차프린, 루돌프 발렌티노를 전시했다. 후에는 소니 앤드 쉐어 등 TV와 팝 음악계의 유명인들을 추가했다. 68년 마틴 루터 킹이 암살 당하자 그의 초상을 불과 몇 주 만에 세웠다. 이런 점이 다른 동업자들과 달랐다. 그는 생각과 행동이 빨랐다. 그는 영화 찍을 때 쓰던 소품들도 사들여 전시했다. 이중에는 ‘플레이보이’ 잡지 창간자 휴 헤프너의 파자마도 있었다. 방문객들은 물건을 수도 없이 훔쳐갔다. 이중에는 간디의 안경, 윈스톤 처칠이 피던 시가, 육체파 여배우 라켈 웰치의 브라지어도 있었다. 드러머 링고 스타(Ringo Starr)의 오른팔도 없어졌다. 이 소식이 미디어로 전해지자 효과가 좋은 공짜 선전이 됐다. 비틀즈 상에는 늘 립스틱이 묻어있어서 종업원들이 자주 닦던 시절이었다. 그는 박물관 외에 멕시코 금광개발권, 칼리포니아 농장 등을 샀다. 헐리웃에 극장도 사고 두 번째의 왝스 박물관도 열었다.

좁고 더럽고 먹을 것도 없는 배에 목숨을 의지하고 태평양을 건넜고 뱅쿠버에 도착해서도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2개월간 배안에 갇혀 있던 싱은 어려서 동경하던 많은 배우들과 친해졌고 재산도 일궜다. 인간승리였다.

스푸니 싱: 1922년 인도 푼잡 태생.
작년 10월, 84회 생일을 이틀 앞두고 심장질환으로 사망.
63년간을 함께 한 부인과 4남2녀를 남겼다.

by 100명 2007. 5. 22. 07:50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3)
소울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 (James Brown), 1933-2006


약물복용, 총기등 거친 사생활불구 영원한 음악인


제임스 브라운은 스스로를 ‘연예계에서 최고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 자칭하며 50년이 넘도록 음악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미스터 다이나마이트’, ‘소울 브라더 넘버원’, ‘슈퍼 헤비 펑크의 전도사’, ‘소울음악의 대부’로 통했다. 그의 음악은 열정적이면서 복잡하고, 절제되어있으면서 거침없고, 호색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 깨어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불후의 히트곡을 가진 브라운은 팝문화의 초석으로 탄탄히 자리잡아갔다.

▲ 우리시대의 진정한 소울가수이자 뮤직 아이콘 제임스 브라운이 작년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났다. 다소 험난한 삶을 살았음에도 아티스트로서의 그의 삶은 너무도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는 치과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종합검사를 받아보라는 치과의사의 권유를 받고 토요일에 입원했고 그때 자신이 폐렴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건강상태는 사망할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다. 주중에 잡힌 공연 스케줄은 모두 취소했지만 뉴욕 비비킹 나이트클럽과 뉴저지의 새해맞이 공연을 강행하고자 의사의 특별허락을 받았다. 아쉽게도 1월에는 캐나다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 계획이 있었다.

그는 늘 ‘나는 연예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야. 나는 결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아’라고 팬을 향한 헌신의 마음을 전했다.

1965년 앨범 ‘Papa’s Got a Brand New Bag’를 히트시키면서 펑크음악을 대중적으로 소개했는데 그의 음악은 아프리카와 미국문화에 동시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I Got You(I Feel Good), Cold Sweat, Get Up(I Feel Like Being) Sex Machine’과 ‘Hot Pants’와 같은 노래는 모든 악기를 타악기로 사용, 대조적인 리듬을 가지고 재즈를 연주하여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춤추도록 했다. 그의 새로운 음악은 1970년대의 소울, 리듬 엔 블루스와 그 이후 대대적인 인기를 끈 힙합음악으로 발전되어갔다. 1970년 그가 유행시켰던 펑크 드럼비트는 힙합 리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믹 재거(Mick Jagger)와 마이클 잭슨은 그의 현란하고 빠른 발동작, 무릎 낙하, 다리를 찢는 춤동작을 모방했고, 많은 가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는 1960년대 대중에게 정치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1968년 노래 ‘Say It Loud-I’m Black and I’m Proud’로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부각시켰다. 하지만 1972년 그는 리차드 닉슨 대통령의 재임을 지지하는 등 그의 정치적 입장은 다소 짐작하기 어려웠다.

브라운은 거친 삶을 살았다. 청소년 때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감옥에 수 차례 들어갔다. 그는 구두를 깨끗하게 닦지 않거나 노트를 잃어버리는 밴드 멤버에게 벌금을 과할 만큼 일 처리가 엄격한 사람이었다. 1960년대 말, 그는 자신의 출판사와 3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는 경영자였다. 그 와중에도 일년에 51주를 넘게 공연을 해왔다.

그는 1933년 5월3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반웰의 판자 집에서 태어났다. 산파의 말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모두 사산아로 생각했다는 것. 그러나 그의 몸은 점점 따뜻해졌고 그는 결국 건강하게 살아 남았다. 4년 뒤, 그의 부모가 별거를 시작 하면서 그는 아우구스타에서 매춘업소를 운영하는 친척에게 보내졌다. 어린 나이에 군인 앞에서 춤을 춰 푼돈을 벌었고 구두를 닦고 천 쪼가리를 주웠다. 옷이 너무 낡고 더러워서 학교로부터 퇴학 당하기도 했다.

그는 1949년 차문을 따 물건을 훔친 이유로 3년형 선고를 받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불렀고 출감 후, 그는 바비 버드가 이끄는 교회음악모임 ‘가스펠 스타라이터’에 가입했다. 모임은 ‘프레임’으로 이름을 바꿨고 브라운은 드럼을 쳤다. 그러나 그의 파워풀한 목소리와 광적인 댄스 때문에 바로 리드 싱어로 발탁되었다.

1963년 브라운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발라드곡 ‘Prisoner of Love’로 팝차트 20위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제임스 브라운과 프레임은 1960년대 내내 쉬지 않고 투어공연을 했다. 그들은 1965년에 ‘The T.A.M.I Show’에 참여했고 믹 재거가 이를 보고 그의 댄스를 배웠다고 한다.

1960년대 시민운동이 한창 벌어질 때, 브라운은 그의 음악과 명성을 이용하여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1966년 그는 앨범 ‘Don’t Be a Dropout’을 발표하고 퇴학방지관련 발의권을 통과시키기 위해 부통령 허버트 험프리를 만났다. 2년 후, 노래 ‘Say It Loud-I’m Black and I’m Proud’에서 “우리가 가치를 인정 받을 때까지 결코 우리의 행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68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총살당했을 때, 브라운은 보스턴에서 공연약속이 잡혀있었다. 그는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대신 생방송중계를 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60년대 말까지 그의 음악은 팝, R&B, 재즈의 한 부분으로 ‘Sly’, ‘패밀리 스톤’, ‘템테이션’, ‘마일즈 데비스’의 음악에 영향을 끼쳤고, 아프리카 리듬을 이용한 펑크뮤직은 음악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70년대 초, 그의 음악으로 댄스홀이 가득 찼고 그는 직접 흑인영화음악도 제작했다. 1974년 자이르에서 열린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어맨의 복싱 경기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디스코음악의 출현은 그의 음악을 40위권 밖으로 내몰았지만 1980년 ‘블루스 브라더스’의 데뷔로 또다시 재기했다. 1985년 그는 팝히트송 ‘Living in America’로 4위를 차지했고 영화 ‘로키4’에 그의 노래가 삽입됐다. 그 해, 그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의 공연자 부분에 선정 되었다. 당시 힙합이 생겨나고 그의 음악은 L.L. 쿨 J와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음악 비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난잡한 사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공연을 해왔다. 1970년대 450만 달러의 세금을 횡령 했고 결국 제트기와 라디오 방송국이 팔렸다. 1973년 장남 테디는 차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87년 그는 PCP약물을 복용한 상태로 아우구스타 자신의 사무실 근처에 가는 중, 경찰에 의해 남부 캐롤라이아 경계까지 추격당했다. 그는 공공장소에 위험한 총기를 소지했고 약물복용상태로 운전하며 경찰을 피해 도망한 이유로 교도소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1991년 출감했다. 1998년 그는 또 라이플총을 발사하고 경찰의 추격에 쫓겨 90일간의 약물재활 프로그램에 보내졌다. 2003년 그는 사면되었으나 2004년 전직 대리가수인 네 번째 부인 토미 래 하이니를 폭력한 혐의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약물복용과 범죄사실에도 불구하고 음악 아이콘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1992년에 그래미 평생공로상, 2003년에 캐네디센터 명예상을 수상했다.

1990년 제임스 브라운은 뉴욕 타임즈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현재보다 25년을 앞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1933년 5월3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반웰 태생
2006년 12월25일 폐렴으로 인한 충혈성 심장마비로 사망
유가족 넷째 부인 토미 하이니와 다섯명의 자녀

by 100명 2007. 5. 22. 07:49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2)
기업전략가 - 얼 주드리 Earl Joudrie(1934-2006)


기업에선 이름난 구조전략가, 결혼생활은 F학점


외부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결혼생활이 있다. 비즈니스맨 얼 주드리와 그의 아내 도로시의 사생활은 1995년 캘거리 주택가를 놀라게 한 6발의 총소리와 함께 전면 공개됐다. 도로시는 남편의 오랜 학대와 폭력을 폭로,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 탁월한 기업전략가였던 얼 주드리는 부인과의 원만하지 못한 결혼생활로 고통을 받았지만 재혼 후 평온을 찾았고 캐나다 기업사에 남을 업적을 남겼다.
거의 40년이 넘은 그들의 결혼생활 뒤편에 무엇이 숨겨져 있었을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살인혐의로 사건이 재판에서 논란될 때 주드리는 도로시와 주장을 다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로시는 남편의 앞이 아니라 등을 향해 총을 쐈다. 이유는 주드리가 폭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와 이혼을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주드리는 자식들이 부모의 싸움으로 입을 피해를 걱정해서 도로시가 유죄판결을 받지 않도록 그녀를 최대한 변호했다. 도로시가 쏜 4발의 총알이 몸에 박혀 있으면서도.

캘거리 출신의 주드리는 ‘캐네디언 타이어’, ‘알고마 제철(Algoma Steel)’, '돔(Dome)석유회사' 등 대기업이 재정적 난관에 처했을 때 그들을 구해낸 기업전략가요, 회사운영을 반전시킨 ‘마스터 비지내스 맨’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판결 후, 그는 부인을 학대한 남편으로 낙인 찍혔으나 업계에서의 그의 지위는 변함없었다. 친구들 말에 의하면 그는 신체적, 도덕적으로 강인한 사람이었고 보통 리더들에서 볼 수 없는 세심함과 재능도 가졌다. 그는 늘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전면적으로 싸우는 것은 가급적 피했다. ‘걸프 캐나다’와 ‘캐네디언 타이어’의 이사였던 모린 사비아 역시 “그는 아량이 넓은 멘토였고 지혜롭고 명석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비록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는 기업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과 확고한 신념,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얼 주드리는 가난한 농가에서 자랐다. 아버지 하버트 주드리는 사스캐추완의 농부였다. 아내가 급성폐렴으로 죽고 어린 딸까지 잃은 후, 하버트는 일자리를 찾아 에드먼튼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선생이었던 도리스 쉬믹을 만나 결혼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얼과 그의 동생 케이스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열성적인 교육인이었다. 이들은 자주 부부싸움을 했고 결국 별거했다. 그의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어서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기 일쑤였다. 그의 동생은 14살 때 아버지와 싸운 후 가출했고 얼은 16살에 집을 나왔다.

주드리는 당시 15살이던 도로시 조나슨을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4년 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약혼 했고 알버타 대학에서 함께 학위를 받은 후 결혼했다. 얼은 에드먼턴 심포니에서 파트타임으로 바이올린을 하며 학비를 벌었고 여름에는 탄광이나 석유채굴장에서 일했다.

1960년 그들은 에드몬턴서 캘거리로 이사했고 부인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들은 함께 교회를 가고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는 겉보기에 완벽한 커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가 없다는 사실에서 언쟁이 잦았고 때로는 육체적인 싸움까지 했다.

1963년 딸 케롤린과 아들 콜린, 게이가 해를 이어 태어났다. 그러나 1971년 주드리는 임파선 암 호지킨병에 걸렸고 6개월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 의과대학에서 치료를 받았다. 건강을 되찾은 주드리는 토론토로 이사해 몇 년을 살다가 ‘에쉬랜드 오일’의 부사장으로 발령 나서 미국 캔터키로 이주했다. 그는 비즈니스 때문에 계속 옮겨 다녔고 그때부터 주드리 부인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의 삶은 게릴라 전쟁 같았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캘거리로 이사해 가정에 충실 하려고 노력했다. 1979년 그는 뛰어난 비즈니스 수완으로 ‘보이저 석유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어떤 비즈니스이던 간에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다. 1990년 ‘캐네디언 타이어’의 이사로 선임되었다가 결국 이사장이 되었다. 그는 비즈니스계에서는 크게 인정 받았으나 사생활은 비참했다. 집안에서 부부싸움은 계속되었다. 1989년 결국 집을 나왔지만 공식적으로 결혼생활은 문제 없는 척했다.

1992년 ‘알고마 제철’의 회장이 된 주드리는 토론토로 거처를 옮겼고 다음해 먼 친척이던 이혼녀 린 매닝과 함께 살면서 도로시와의 이혼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1995년 1월20일, 그는 캘거리로 가서 이혼장을 내밀었다. 도로시는 “이젠 정말 결혼생활이 끝났구나” 생각하는 순간 숨겨둔 총을 꺼내 그를 향해 6발 쏘았다. 차고에서 총을 맞고 쓸어진 그를 보면서 도로시는 그가 죽은 후 얼마나 많은 상속금을 받을 수 있을까, 시체를 어디다 버릴까 등 여러 생각을 했다. 피바다 속에서 허우적대는 주드리는 빨리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간청했지만 도로시는 그와 흥정을 시작했다. “살려주면 나를 좋게 증언해주겠는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주겠는가”등을 교섭했다. 주드리의 확답을 받고나서야 그녀는 911을 불렀다. 그의 목숨은 이렇게 구조됐다. 살인미수 재판에서 주드리는 극한상황 속의 약속이었지만 약속을 지켜서 피고에게 유리하게 증언했다. 물론 자녀들의 장래를 걱정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용서였다.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이혼수속은 마무리되었다. 도로시는 불과 190만 달러와 함께 2년 동안 매달 2천 달러를 받는 조건이었다. 법정에서 두 아들은 엄마의 음주와 부모의 잦은 싸움을 증언했다. 그들은 아빠가 결혼 20년간 엄마를 심하게 때려 코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나가고 멍이 들었다는 엄마의 주장을 변호하지 않았다. 법정은 당시의 정황을 인정, 도로시를 형무소가 아니라 알버타병원 재활원으로 보내는 경미한 형을 내렸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렸다. 7명의 자식과 9명의 손자는 가족으로 끈끈하게 묶였다”고 현재 부인 매닝은 말했다. 6년전부터 암을 앓은 주드리가 지난달 사망하기 전 날, 그의 가족은 그가 총을 맞았으면서도 어떻게 흥정해서 목숨을 건졌는가 등 숨은 비밀을 ‘글로브 엔 메일’에 공개했다.

Earl Joudrie
1934년 3월27일 에드먼턴 태생
2006년 11월29일 사망
(향년 72세)
유가족 부인 린, 4명의 자녀,
3명의 의붓자녀, 9명의 손주

by 100명 2007. 5. 22. 07:48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9)
나치에 쫓기면서도 휴식 거부한 결핵연구가

에디뜨 멘키에비츠 Edith Mankiewicz(1910-2006)



▲ 제2차 세계대전 때 얻은 결핵으로 평생 고생하면서도 90세까지 결핵퇴치 사업 및 미생물학 분야의 교수이자 연구가로써 일생을 보낸 에디뜨 멘키에비치 (1953년 당시 사진).
1930년 두 명의 여성이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왔다. 한 명은 젊은 의대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화재에 눈이 먼 결핵 환자였다. “나는 죽기 싫어요. 죽을 수 없어요. 키워야 할 아이가 있어요.” 여인은 울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의대생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위험부담을 생각하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눈물에 환자의 침을 섞으며 연구를 시작했다. “의사로써 나는 실험실에서 일했지만 언제든지 결핵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멘키에비츠 박사는 미생물학과 폐결핵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였다. 그녀는 의학도를 가르쳤고 프랑스와 중국, 캐나다에서 연구했다. 몬트리올 병원에서 일하며 100편이 넘는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녀는 평생 결핵 예방과 치료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독일 나치가 유태인을 탄압 할 때, 그녀는 프랑스와 샹하이로 몸을 피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폭격과 생필품 결핍에 시달렸고 연구실에서 옮은 결핵으로 두 번이나 입원했다.

그녀는 의학 연구와 삶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뛰어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몬트리올 병원에서 미생물학을 연구할 때 상관이었던 제럴드 베리 박사는 “그녀는 체구가 작았지만 강인한 사람” 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녀의 백신 연구는 결핵을 예방하는데 직접적으로 쓰였다. 처음 그녀의 연구가 발표되었을 때 그녀의 백신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널리 사용되며 전염병을 치료하는데 다시 이용되고 있다. 폴란드 면역학 교수 안드레 고스키의 최근 연구는 1960년대 ‘네이쳐(Nature)’ 잡지에 실린 멘키에비츠 와 리박 박사의 연구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의사였던 맥시밀리언 메이어와 간호사 게르트루트 카울의 딸인 어린 에디뜨와 언니 마가레트가 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33년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판사 해럴드 멘키에비츠와 결혼했다. 두 달 후, 그들은 남편이 나치당원에게 중형을 선고한 이유로 위협을 받아 프랑스로 도피해야 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다시 공부했고 에디뜨는 리옹 대학에서 다시 의대 학위를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그녀는 어린이 병원에서 내과의사로 일했고 1940년 딸 제클린을 낳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독일인이 직업을 갖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나찌를 보고 몇몇 아이들이 “독일 병사들이 온다”고 소리지르자 나치병사들은 단순히 경고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은 죄 없는 아이들에게 총을 쏘았다. 그녀는 아이들이 무참히 쓰러져 갔던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회상했다.

▲ 세계대전중 중국 상하이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며 학생들과 함께. 가운데가 에디뜨
프랑스에서 요주의 인물로 몰리자 그들은 샹하이에 있는 프랑스인 거주지로 피신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오로르 대학에서 미생물학 교수로, 파스퇴르 학원에서 임시 책임자로 일했다. 그녀는 일본병사에 의해 강간당한 여성을 위한 부인병 서비스 센터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입양 서비스 센터를 설립했다. 또한 유태인 의사 양성을 위한 개인 의학 연구실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샹하이가 일본의 지배아래 있을 때, 그들은 폭격과 정전, 물자부족으로 시달렸다. 딸 제클린 스미스는 “사이렌이 멈추면, 어머니의 일은 시작됐어요. 어머니는 밖으로 뛰어나가 부상자를 치료해주었지요. 저의 아버지 역시 숨은 영웅이었어요. 엄마와 함께 어려운 일을 다 감당해 내셨지요.”

전쟁이 끝나고 멘키에비츠 가족은 몬트리올로 이주했다. 그곳에 에디뜨의 부모와 언니 마가렛 쿤슬러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에서 그녀는 또다시 의학 공부를 했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맥길 대학 미생물학과 연구에 참여한 멘키에비츠는 또다시 결핵환자 요양소에서 일년 동안 일했다. 또한 1951년부터 1976년까지 로얄 에드워드 체스트 병원(현 몬트리올 체스트 병원)의 연구소 책임자로 있으면서 효모 세포가 결핵 진단에 필요한 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또 다른 연구에서 그녀는 암조직 속에서 균세포를 발견하기도 했다.

은퇴할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레이크쇼어 제네랄 병원의 미생물 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어 15년 동안 일을 계속 했다.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맥길대학에서 미생물학을 강의하며 많은 젊은이들에게 학문적 조언을 해 주었다. “그녀는 항상 바빴지만 항상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남편은 수년간 국제 민간항공협회(IATA)의 법률가로 일했고 맥길과 몬트리올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그는 1993년에 사망했다.

80세에 은퇴를 하고도 그녀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학생들을 격려했고 과학전문서적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종교와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갇힌 샹하이 여성을 위한 보호소 설치를 도왔다. 그러나 1993년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이 매우 컸다. 멘키에비츠 박사는 영화감독 이었던 아들의 죽음을 추모, 어린이를 위한 비영리재단을 설립했다.

그녀는 90세에도 꾸준히 활동했다. 매일 책을 읽었고 철학을 주제로 끊임없이 토론 했다. “그녀는 아침식사를 할 때 밤새 생각해두었던 철학적 질문을 우리에게 했다.” 손녀 크리스탈 스미스는 “할머니는 정의를 위해 고집스럽게 싸워왔다”고 회상했다. 멘케비츠 박사는 나치당이 빼앗아간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보상을 받기 위해 독일 정부를 고소했고 프랑스 정부는 전쟁당시 그녀가 했던 많은 일을 기념하여 로랭의 십자가(Cross of Lorraine)상을 주었다.

Edith Mankiewicz
1910년 5월 16일 독일
라이프치히 태생
2006년 9월 21일 몬트리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향년 96세)
유가족 딸 제클린 스미스,
다섯 명의 손자/손녀

by 100명 2007. 5. 22. 07:47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1)
나치 사냥꾼 - 엘리어트 웰즈 Elliot Welles(1927-2006)


우리가 본받아야할 나치전범 사냥꾼


우리의 부모, 부모의 부모를 못살게 굴고 학대, 참살한 일본인 범죄자들은 다 어디 갔나? 그들을 추적하는 집요한 탐정은 왜 없는가? 유태인들과 너무 비교되지 않는가?

▲ 엘리어트 웰즈의 끈질긴 노력으로 수많은 나치들은 법정에 서야했다.
엘리어트 웰즈는 유태인 대학살의 생존자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머니를 죽인 나치당원을 추적해 왔다. 웰즈는 2003년 은퇴하는 날까지 브나이 브리스(B’nai Brith) 반인종주의 연맹의 감독으로 지내면서 나치 범죄자를 색출하는데 힘썼다. 그는 미국에 정착한 나치당원을 찾아내 추방하고 국제재판에 세우는 일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웰즈는 수년간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의 먼지 쌓인 자료보관소에서 실낱 같은 정보를 찾아내어 조용히 묻혀 지내기 원하는 나치당원들의 행방을 끈질기게 추적해갔다. 그는 여러 나라의 정부가 비밀정보를 공개하고 용의자를 찾아 체포, 재판에 송부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웰즈는 볼레슬라프 마이코브스키(Boleslav Maikovskis)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이코브스키는 전쟁당시 라트비아인의 체포를 명령해200명을 죽음으로 이끈 사람이다. 마이코브스키는 1965년 소련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 후 1987년 독일로 도주하기 전까지 뉴욕시 롱 아일랜드에 정착해 살았다.

웰즈는 그가 86세 되던 해인 1990년 그를 독일 재판에 기소했다. 그러나 1994년 건강상 문제로 집행유예를 받고 2년 후 사망했다.

나치당 노동자 캠프 지휘자였던 죠셉 쉬암버거는 40년간 아르헨티나에 숨어살았다. 독일정부로 인도된 죠셉은 1992년 종신형을 선고 받고 2004년 감옥에서 숨졌다.

오스트리아 쿠르트에서 태어난 웰즈와 그의 어머니 애나는 나치에 의해 리가로 추방당했다. 애나는 붙잡혀 버스에 태워졌고 그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이틀 후, 웰즈는 어머니의 옷을 전해 받았다.

그는 독일에게 점령당한 폴란드의 슈트호프 집결 캠프에 보내지기 전까지 몇 년 동안 리가의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지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수용자들은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캠프에 보내졌다. 그는 이동 중에 도망쳐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리투아니아 코소보의 유대인 거주지의 생존자였던 씰 체이컨을 만나 결혼했다. 3년 후, 웰즈 가족은 미국에 도착했고 그는 이름을 바꿨다. ‘엘리어트’는 히브리 이름 엘리(Eliyahu)에서 따왔다.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오슨 웰즈를 좋아해 성은 웰즈(Wells)로 선택했다.

1949년 뉴욕에 정착한 웰즈는 여러 가지 고된 직업에 종사했다. 그는 햄공장에서 고기를, 설탕공장에서 설탕부대를 나르는 일을 했다. 그는 마침내 맨하튼에 있는 음식점 ‘로렐라이’에서 웨이터로 일하게 되었고 두 명의 파트너와 함께 음식점을 살 만큼 큰 돈을 벌었다.

웰즈는 그의 어머니를 끌고 간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특별수사대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독일, 오스트리아 영사관 관계자와 함께 그 사람을 수색했다. 그는 독일 정부가 기록을 공개하도록 요구했고 결국 독일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그를 찾아냈다. 1976년 그는 재판에 넘겨졌다. 일부 죄는 밝혀졌지만 전체 죄를 밝혀낼 증인이 충분치 않아 그는 단지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비록 판결이 났지만 엘리어트 웰즈는 끊임없이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1970년 후반, 그는 반인종주의 연맹 뉴욕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세계곳곳의 나치당원을 찾아 다녔다.

그는 유태인 신문에 광고를 내며 사실을 증명해줄 유태인 대학살의 생존자, 목격자를 수소문했다.

“정부당국자는 생존자들과 쉽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죠. 그러나 그들은 엘리어트 웰즈를 믿었습니다.”

1927년 9월 18일 비엔나 출생
2006년 12월 5일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향년 79세)
유가족 부인, 아들과 딸

by 100명 2007. 5. 22. 07:47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7)
BC주 CBC의 전설적 방송인 - 수잔 잉글버트
Susan Englebert (1946-2006)


비서로부터 프로듀서, 최고 경영자까지


▲ 비서로 출발한 수잔 잉글버트는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CBC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발견했다. 걸출한 방송인으로, 고위 행정관으로 일한 그녀는 문제가 닥쳤을 때 항상 긍정적으로 해결해 나간 유능한 경영자였다.
수잔 잉글버트는 CBC에서 30년 넘게 일한 열정적인 방송인이었다.

프로듀서에서 고위급 관리가 되기까지 긴 여정에서 잉글버트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동료들의 숨겨진 재능을 키워주었다. 그녀는 존경 받는 동시에 사랑 받은 보기 드문 매니저였다.

수잔 잉글버트의 가족은 영국에서 이민해 빅토리아에서 살다가 1950년 온타리오 남부에 정착했다. 아버지 레니는 잉글랜드 출신이고 어머니 위니프레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작가였다. 17년간 회계사 잡지사에서 일한 그녀의 어머니는 CBC극본을 썼을 뿐 아니라 때때로 연기도 했다.

수잔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부모는 그녀가 기술을 익혀 전문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설득해 비서가 되는 훈련을 받기로 결정했다. 1961년, 그녀는 헴스테드(Hampstead)에 있는 세인트 고드릭(St. Godric) 비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났다.

스윙이 유행하던 60년대의 런던은 모든 문화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잉글버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모두 너무 젊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그녀의 평생 친구였던 린다 스파이커만이 그 때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수잔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예술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페미니스트 시몬 보브아르(Simone de Beau-voir)와 색소폰 연주자 소니 롤린즈(Sonny Rollins)를 나에게 소개 시켜줬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돌아오기 전까지 런던에 머물며 가디언 신문사에서 비서로 일했다. 그 후, 그녀는 CBC 음악국 비서로 취직하여 토론토로 이주하게 됐고 캐나다 최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와 함께 일했다.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열정은 더욱 커져 보다 전문적 기술을 얻기 위해서 변호사 비서가 되기로 결심했다. 1970년 초, 래드너 다운스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하여 벤쿠버로 이주했다. 그러나 국내 음악가이자 프로듀서인 클레어 로렌스는 그녀를 방송국으로 영입했고 제작자 테리 멀리건과 함께 프로그램 ‘The Great Canadian Gold Rush’를 맡아 일하게 되었다.

“수잔이 프로듀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진짜로 빛을 발했다”며 그녀의 남동생인 마이클 잉글버트가 말했다. “그녀는 당시 락음악을 즐겨 들었지만 사실은 재즈를 더 좋아했다.”

‘The Great Canadian Goldrush’는 가수들이 함께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유명한 크리스마스 쇼였다. 로이 포브스(Roy Forbes)는 그의 힛트송 ‘Mince Meat Tart’를 소개해 준 것에 감사해 웹사이트에 감사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수잔과 비키 가베로(Vicki Gabereau)는 오랜 기간 동안 회사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잉글버트는 비키와 함께 프로그램 ‘버라이어티 투나잇’과 2시간 토크쇼 ‘가베로’를 제작했다. “수잔은 방송계에 없어서는 안될 감초와 같았다. 밝고 선명한 목소리와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든지 시도했다. 또한 그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누구를 인터뷰하던지 그것을 최고의 것으로 만들라고 늘 강조했다” 며 가베로는 말했다.

1991년, 잉글버트는 두 차례 B.C지역 CBC라디오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라디오 음악국의 총책임자로 일했고 토론토와 벤쿠버를 오가며 벤쿠버 지역을 담당하는 CBC 고위 행정관으로 일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그녀는 라디오 3국과 뉴미디어부서를 담당했다. 그녀의 한결 같은 열정과 새로운 재능은 라디오 3국이 상을 받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CBC 커뮤니케이션 매니저인 캐시 헌트는 1991년부터 2000까지 잉글버트의 보조원이었다. 수잔은 고위 관리자의 허세가 창조적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다. 캐시 헌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예산과 의정서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완충제의 역할을 했고 아래 직원을 잘 지도했다. 주로 사무실에서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있는 잉글버트는 인턴사원과 만날 때나 중역 회의실에 있을 때나 동일한 모습이었다.

잉글버트는 문제의 실마리를 신속하게 풀어가는 기술이 있었다. “그녀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난 후 앞으로 다가 앉아 ‘아, 그래요, 앞으로 우리가 그것을 해야겠네요’ 라고 말했다”고 캐시 헌트는 회상했다.

2001년, 잉글버트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기술 발전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 수여하는 YWCA 여성 특별상을 받았다.

그녀는 2002년 은퇴하고 2005년 7월 빅토리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야구 게임 보는 것을 즐겼다. 잉글버트는 부모의 옛 집을 고치기로 결정하고 건축가를 선정했다. 그러나 집이 완공된 몇 주 후, 그녀는 암 말기로 진단 받았다.

잉글버트의 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어갔다. 암으로 진단 받고 6주 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나는 아무 후회가 없습니다. 나는 인생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비키 가베로는 그녀의 심플하고 명쾌한 성격에 비추어 잉글버트가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할 것이라 상상했다; “그래, 이것은 단지 나의 막이 내린 것 뿐이야”라고.

Susan Englebert
1946년5월 7일 빅토리아 태생
2006년10월 19일 암으로 사망
(향년 60세)
유가족: 남동생 마이클

by 100명 2007. 5. 22. 07:46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8)
열정적인 사회주의 교육자 - 릴리안 로빈슨
Lillian Robinson(1941-2006)


'여성가치'창조한 학자.행동가.교육자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가 좌우명



▲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평등하게 존중한 릴리안 로빈슨은 캐나다 제일의 여성학 교수였고 사회주의적 패미니스트였다.
릴리안 로빈슨은 콩코디아 시몬느 드 보브아르 대학(Simone de Beauvoir Institute)의 학장으로 있을 당시 일어난 작은 사건을 이야기했다. 집에서 문서작업을 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도둑이 창을 깨고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누구세요?"
"피터요."
"여기에 왜 들어 왔나요?"
"나는 20달러가 필요해요."

그녀는 현금이 없어서 그에게 수표를 써주었다. 남자는 얼떨결에 수표를 받아 들고 밖으로 다시 나가려고 창문 쪽으로 걸어 갔다. 그러나 그녀는 비록 그가 집을 침입해 들어온 도둑이지만 정정당당하게 정문으로 나가도록 배려했다.

이 이야기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학자 로빈슨의 성향을 잘 드러내주는 에피소드이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의 물건을 훔칠 도둑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크고 둥근 안경, 느슨하게 묶은 회색 머리의 그녀는 적극적인 여성 운동가였다.

그녀에게 좌우명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Bring it on)”이었을 거라고 친구들은 말했다. 2001년 11월, 캐나다의 가장 오래된 여성학 프로그램의 학장으로 임명 받고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그 후, 로빈슨은 이스라엘 영사관 앞에서 매주 금요일 데모를 주최했던 유태인 연합(Jewish Alliance Against the Occupation)의 설립을 도왔다. 2002년 9월, 그녀는 이스라엘 총리 벤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의 연설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에 참가한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처리를 당한 학생들을 지지한 몇 명 안 되는 대학 행정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동기생의 대부분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릴리안은 그녀의 제자들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듯 했다. 그것은 가족 그 이상의 관계처럼 보였다”고 그녀의 제자 에밀리 비팅은 말했다. “이들은 나의 친자식은 아니지만 나의 친구이자, 지원자이고, 동지”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릴리안 사라 로빈슨은 유태인 거주가 허용된 러시아 서쪽 국경 지대에서 온 이민자의 딸이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그녀의 부모는 뉴욕에 정착했다. 그녀의 아버지 어빙은 사진 프레임 공장의 감독이었고 어머니 파니는 경리직원으로 일했다. 삶은 힘들었다. 그러나 릴리안의 아버지가 위궤양 수술을 받고 병이 악화하여 사망한 1945년, 생활은 더욱 더 어려워져 갔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그녀의 쌍둥이 자매가족과 함께 방 두 개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사실, 이모 릴리안은 과부의 딸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여성 운동을 시작하면서 많은 동지를 얻게 되었고 큰 가족을 이루게 됨을 행복해 했다”며 퀘벡 몬트리올 대학 역사학 교수인 조카 그렉 로빈슨은 회상했다.

릴리안은 엘리트 뉴욕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곳에서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브라운 대학 장학금을 탔다. 릴리안은 총명하고 카리스마가 넘쳤으며 젓가락처럼 말랐었다.

로빈슨은 뉴욕 대학에서 예술역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6세기 서사시 문학에 나타나는 여성 기사를 연구한 그녀의 논문은 나중에 책 ‘괴수정부(Monstrous Regiment)’로 발간되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그녀는 행동파 그룹(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모임)에 가입하여 반전 운동을 펼쳤다. 사회 정의와 인권 문제에 관련한 그녀의 적극적인 개입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또한 그녀는 필리핀 여자 간병인들이 이주 노동자 센터에 가입하도록 격려했다. 파업을 할 때도 자금이 여유롭지 못한 필리핀 노동자를 도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녀는 ‘체다카(tzedakah, 자선)’라는 유태인 개념을 삶으로 실천했다”고 그녀의 조카 그레그는 말했다.

로빈슨은 1969년 메사츄세스 공과대학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대학원생 데이비드 길든과 사랑에 빠졌고 바로 결혼하여 아들 알렉스 로빈슨-길든을 낳았다.

20년간의 결혼기간 동안 뉴욕-버팔로와 파리를 오가며 일했고 샌프란시스코의 “황무지 같은 대학”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 비록 그녀는 15년 이상 정규직 일을 찾지 못했지만, 그녀는 항상 바빴다. 그녀는 계속 임시직으로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법원 통역원으로, 시인으로, 추리소설 작가로 일했다. 1998년 추리소설 ‘Murder Most Puzzling’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혼을 한 로빈슨은 고독했지만 더 이상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았다. 조카 그렉은 그녀가 택시에 스카프, 지갑, 모자 등 물건을 놓고 내리는데 이는 모두 공허한 마음에서 오는 습관이라고 했다.

그녀의 제자였던 마니 켈리슨이 연극 ‘버자이나 모놀로그’의 무대감독으로 있을 때, 로빈슨은 상처 깊은 인생을 산 늙은 부인의 역할을 맡기 위해 오디션장에 왔다. “릴리언의 뛰어난 재치와 절묘한 센스에 관객은 감동했다”며 켈리슨은 말했다.

“그녀는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여성으로서 가치가 얼마나 큰 지 깨닫게 했다. 나는 무언가 도전할 때마다 그녀를 생각할 것이다.”

1941년4월 18일 뉴욕 태생 2006년9월 20일 난소암으로 몬트리올에서 사망(향년 65세) 유가족: 아들 알렉스, 형제: 에드 로빈슨, 프리다 포스트 조카: 그렉 로빈슨

by 100명 2007. 5. 22. 07:46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6)
정치인이자 니스가아 추장이었던 - 프랭크 콜더
Frank Calder (1915-2006)





▲ 원주민의 권리향상을 위해 공헌한 공로로 프랭크 콜더가 2001년 11월 원주민추장회의 의장으로부터 ‘우리시대의 영웅상’을 수상하고 있다.
작은 키에 높은 이상을 가졌던 프랭크 콜더, 스스로를 ‘작은 추장’이라고 불렀던 그는 니스가아(Nisga’a)족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캐나다뿐 아니라 각 나라가 원주민 토지 반환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치적으로 변화하도록 도왔다.

프랭크 콜더는 태어나기 전부터 임무를 가진 사람이었다. 1913년, 아더 콜더 (나-쿠아-온, 니스가아의 ‘늑대족’의 추장)와 아내 루이자는 연어 통조림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나스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동안 그들의 작은 아들이 카누에서 떨어져 익사했다. 18개월 후, 징고스 마을의 노인이 꿈을 꾸었는데, 루이자의 어린 여동생 에밀리의 아들의 몸에 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영혼이 들어가는 꿈이었다. 1915년 아서와 루이자는 전통적인 입양의식을 치루고 에밀리의 셋째 아들을 입양했다. 그가 프랭크 콜더였다.

니스가아족이 토지 반환 문제로 토론을 벌일 때, 대다수의 추장들은 이 싸움은 산을 옮기는 것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나-쿠아-온은 “비전”을 가진 그의 아들을 선보이며 말했다: “나는 이 아이를 백인이 사는 쿰시완 학교에 보낼 것이다. 또한 백인들이 어떻게 먹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배우게 할 것이다. 이 아이는 다시 돌아와 저 산을 움직일 것이다.”

그는 13년 동안 브리티시 콜롬비아주 칠리왁(Chilliwack) 가까이에 있는 사디스의 성공회 코퀄리짜(Coqualeetza)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다. 학교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콜더는 학교의 생존자에게 지급되는 배상금 $8,000을 받았지만, 그의 경험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법적 싸움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필요한 기술을 배웠고, 원주민 지도자로 성장할 똑똑한 사람들을 만났다.

학교에서 나온 후, 콜더는 칠리왁 고등학교를 거쳐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성공회 신학 대학의 첫 원주민 졸업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직자로 임명되는 것을 거부하고 정치계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정확하고 똑똑하며 참을성이 많은 그는 1950년 그의 첫 연설에서 원주민 권리를 선언했다. 1927년 연방정부가 독단적으로 맺었던 토지반환 요구안 법령이 1951년에 끝내 폐지되었다. 이 법은 원주민들의 토지반환 요구에 쐐기를 박은 법이었다. 콜더는 "드디어 절망과 암흑의 시간이 끝났다”고 평했다.

그는 연방정부에 원주민 권리를 요구하는 동시에, 니스가아족이 토지 반환 투쟁에 참여하도록 격려했다. 1955년, 그는 니스가아에 토지 반환 요구를 위한 위원회를 다시 만들었다. 그는 나-쿠아-온에게서 칭호 ‘긴 팔 추장’을 받고 니스가아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토마스 버거라는 젊은 백인 변호사가 니스가아를 대표하여 법적으로 싸우도록 한 것이다. 1965년, 버거는 원주민이 주인 없는 땅에서 사냥할 수 있음을 대심원 앞에서 성공적으로 변론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대표해주길 원합니다. 우리는 원주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소송을 제기할 것입니다" 라고 콜더는 말했다. 니스가아는 1967년 9월 소송을 제기했고 1969년 4월 재판을 시작했다. 니스가아는 첫재판에서 패소하자 대법원에 상고했다.

1973년 2월, 법원은 판결을 내렸다. 7명의 재판관 중 6명은 유럽인이 정복하기 전에는 원주민에게 모든 권리가 있었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윌프레드 져슨’을 포함한 세 명의 재판관은 유럽에게 정복당한 후 그들의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주장했고, ‘에멧 홀’을 포함한 세 명의 재판관은 원주민 권리를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결국 법원은 원주민 권리회복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사건을 기각했다.

비록 상고가 기각되었지만 정치적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피에르 트뤼도(Pierre Elliott Trudeau)와 당시 원주민 담당 장관 장 크레티엥(Jean Chretien)은 재판관 ‘에멧 홀’의 주장(원주민 권리 지지하는)에 영향을 받았다. 보수당과 NDP도 연방 정부가 원주민 요구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3년 8월, 크레티엥은 니스가아 조약(2000년에 비로소 비준된 조약) 협의 시작을 공표했다.

1972년, 콜더는 데이빗 바렛의 뒤를 이어 첫 원주민 장관이 될 사람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콜더는 1973년 7월, 여자와 술 문제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유죄판결은 면했지만, 그는 내각에서 해임되었다. 니스가아 사람들도 지도자의 수치스러운 행동에 실망하여 더 이상 콜더를 원주민 대표로 지지하려 하지 않았다. 콜더는 NDP에서 탈퇴하고 빌 베넷의 소셜 크레딧(Social Credit) 정당 소속으로 입후보했다. NDP 후보자에게 1표차로 지고 그는 정치계를 떠났다. 그 해 그는 60세였다.

정책 사상가였던 콜더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지는 니스가아 조약 협상에 끈질기게 참여했다. "내가 지도자였다면, 나는 토지 문제와 관련된 이슈에 전념했을 것입니다. 나는 자치 정부가 원주민만의 권리가 아니라 캐나다인 전체의 공민권이라고 생각합니다.” 1975년, 그는 일본인 타마키 코시베와 결혼했고 아들 에릭을 얻었다. 현재 24세인 에릭은 킹스턴의 퀸즈 대학을 졸업했다.

콜더는 로스 베이 묘지의 가족 묘지터를 샀다. 왜 묘지로 나스 강변 니스가아 땅을 선택하지 않고 주 소재지를 선택했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 나의 비석을 보고 ‘저 사람은 누굴까? 무엇을 한 사람일까?’ 묻고 이를 통해 니스가아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Frank Calder
1915년 8월 3일 태생
복부암 합병증으로 11월4일 사망
(향년 91세)
유가족: 아내 타마키, 아들 에릭,
형제 필립 클라크, 도로시 스미스,
버지니아 오버홀트.

* 니스가아(Nisga'a)족 브리티시 콜롬비아 북서쪽 나스강 계곡에 산다.(약 6000명 중 2천5백명이 니스가아 마을에 거주) 가나다(Ganada), 기스카스트(Gisk'aast), 락스기부(Laxgibuu), 락스긱(Laxsgiik) 4부족으로 이루어짐. 토지 반환를 지속적으로 요구, 사냥과 낚시로 경제활동할 뿐 아니라 변호사, 정치가, 교육자, 경영인, 예술인, 기술자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북미에서 가장 풍부한 문화를 가진 부족으로 인식됨.

by 100명 2007. 5. 22. 07:45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4)
진보주의 경제학의 대가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년)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는 루스벨트와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의 경제자문을 맡았던 진보주의 경제학의 대가다. 하버드대 교수로 말년에는 경제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경제학으로 유명한 사람들 중 캐나다가 낳은 세계적인 경제 역사학자 헤롤드 이니스(Harold Innis), 작가로 알려진 경제문학가 스테판 리콕(Stephen Leacock), 그리고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있다.

갤브레이스의 명성은 작가로서 그의 재능과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등 대통령 자문관으로서 그의 영향력, 실용적인 자유 경제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재치 있고 세련되며 정치, 문학, 외교 등 다방면으로 지식이 풍부했던 그는 1937년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두 나라의 시민권을 동시에 갖는 것이 불가능했다). 정치 경제학자 스테판 클락슨(Stephen Clarkson)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인도대사로 부임했던 갈브레이드를 “미국 자본주의를 크게 진보시킨 캐나다인”으로 묘사했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1952), ‘풍요한 사회’(1958)등 40권이 넘는 책을 발표했고 30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온타리오 남서부 작은 마을 이오나 스테이션(Iona station)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학교 선생이자 농부였던 아버지 윌리엄과 어머니 사라의 셋째 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아버지 윌리엄은 민주당 지지의 정치적 입장을 굳건히 지켰으며 온타리오 농부 연합의 조직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먼 길을 다녀야 했기에 지각하기 일쑤였고 학교 성적은 계속 떨어졌다. 192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아버지의 결정에 의해 온타리오 농업 학교(현 구엘프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충분치 못했던 고등학교 교육 레벨과 건강문제 때문에(‘결핵초기’로 진단 받음) 5년 동안 대학을 다녀야 했다. 그 후 1933년에 미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석사를 1934년에는 농업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스파이크(Spike)’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학교의 유명인사가 된 그는 프리랜서로 지역신문에 농업 관련 글들을 기고했다. 성 토마스 타임즈 저널과 스트렛포드 비컨 헤럴드로부터 한 칼럼 당 5달러를 받아 1930년 시카고에서 열린 ‘국제 가축 전시회’에 갈 자금을 벌었다. 그는 그 당시를 “대학생활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1929년 발발한 대공황은 그를 농업경제학자에서 정부 개입주의자로 바꾼 운명적 계기가 됐다. 1937년 그는 대공황 대처론을 제시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수요 이론’을 학습하기 위해 시카고대에 특별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34년부터 39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5년간 계약직 교수로 지냈고 39년부터 42년까지는 프린스턴대 교수로 제자를 키웠다. 미국 농업국에서 일하기 위해서 시카고로 거처를 옮긴 그는 1941년 전쟁 시 일어나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미국 시세를 조절하고 군 조달품 생산을 장려하는 시세 담당 행정 보좌관이 되었다.

갤브레이스는 1960년 인도대사로 부임했다가 3년 뒤에 다시 하버드대에 복귀하여 1975년 은퇴할 때까지 제자를 양성했다. 1956년 가난에 시달리는 인도를 방문하던 중에 그는 광고의 현혹이 소비자들의 욕구를 과도하게 자극해 불필요한 상품을 소비하게 한다고 지적하면서 과점(寡占) 기업들의 폐해를 비판했다.

존 F 케네디의 경제 자문관으로 일했던 그는 린든 존슨 대통령 재임시에 가난과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입안하는 등 신뢰가 두터웠으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견해가 상반되면서 결별했다.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주류 경제학을 비판했고 미국 경제의 치부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냈다. 1996년 저서 ‘좋은 사회’에서 사회전반은 정치적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95세 되던 2004년 그는 관료주의 기업이 소비자와 정부를 기만한다고 비판한 에세이 ‘결백한 사기의 경제학’을 발표했다.

John Kenneth Galbraith
1908년 10월 15일 온타리오 아이오나 스테이션 태생
2006년 4월 29일 97세 일기로 케임브리지에서 사망
유가족; 부인 Kitty, 세 아들 John Alan, Peter, and James, 여동생 캐서린(토론토)

by 100명 2007. 5. 22. 07:44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5)
캐네디언 전화발명가 그레이엄 벨의 손녀 - 메이블 그로브너
Mabel Grosvenor (1905-2006년)





▲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오른쪽 사진)의 마지막 남은 손녀(앞에 손을 자고 있는 아이)였던 메이블 그로브너 소아과 의사. 온화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101세까지 장수했다. 그녀는 의사이기 이전에 할아버지에겐 없어서 안될 유능한 비서였다.
메이블 그로브너는 유명한 전화 발명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의 마지막 손녀였고 최초의 존스 홉킨스 의과 대학 여자 졸업생이었다. 아동기(兒童期) 병으로 사망률이 높았던 1930년대, 그녀는 워싱턴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 쉽게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지만 조카딸과 그들의 자손을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폈다. “그녀는 저에게 어머니 같은 분이며 가족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분이었다”고 조카의 아들 조셉 블레어는 말했다.

블레어는 “그에게 있어서 삶의 주제는 사랑이었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사려 깊고 사랑이 많은 분이며 우리들의 멘토이기도 했습니다. 벧덱(그녀가 태어난 노바스코샤 지역)을 사랑했고 가족 모두를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우리는 그녀의 뒤를 이어 조부모의 소유지이며 캐나다의 중요 유산 중 하나인 베인 브레아(Beinn Bhreagh)를 계속 관리, 유지할 것입니다”

유명한 발명가 벨과 친밀했던 마지막 사람으로서 메이블은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것을 기록한 전기 작가와 저널리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1994년 벧덱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벨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할아버지는 키가 6피트였고(그 당시에는 큰 키였다) 날카로운 적갈색 눈과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머리카락도 곧았다”.

2003년, 전기작가 샬럿 그레이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양로원을 방문했다. 98세의 그녀는 거의 앞을 보지 못했으며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부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행복해 했다. 그녀는 할머니가 귀머거리라는 것을 10살이 되어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말할 때 반드시 할머니 얼굴을 보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먼 곳에서 할머니를 부르지 않았다. 이것이 예의 바른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노바스코샤 벧덱에서 태어난 그녀는 워싱톤, 듀퐁 서클 근처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부모가 종종 멀리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름을 캐나다에 있는 조부모와 함께 보내야 했다. 벨은 10명의 손주를 몹시 사랑했다. 전기작가 로버트 V. 브루스씨는 벨은 “모세의 근엄함과 산타클로스의 인자함”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그녀는 ‘탐 셀프릿지’라는 젊은이가 탄 빨간 실크 연, ‘시크넷(아기 백조)’이 50미터를 날고 7분간 아슬아슬하게 공중을 선회한 후 물에 살며시 떨어졌던 그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있었다. 후에 벨은 이 실험에 대해 글을 남겼다: ‘이 사건을 가장 오래 토록 증언할 사람은 당시 두 살이었던 손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그곳에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몸이 얼듯이 추웠지만 그곳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때 당시 나는 왜 다들 흥분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할아버지의 놀라운 실험들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14세의 똑똑한 아이 메이블은 할아버지의 비공식 비서로 유전학, 계보학, 증기선 기계 설계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어린 나이에 접했다. 그녀는 할아버지 벨과 함께 가족 계보를 찾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족보 기록을 찾기 위해 행정사무소와 묘지를 방문했고 그 기회를 통해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던 사촌들을 찾아냈다”고 회고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메이블은 마운트 홀 욕대학에 들어갔다. 1927년 졸업한 후, 그녀는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그녀는 7명의 의대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그 중 한 명은 결핵으로 진단받고 중퇴함). 1931년 졸업 후, 뉴욕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했고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와 불우한 아동을 위한 진료소를 열어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35년간 의사로 일한 후 일찍 은퇴했다. 은퇴 후, 1960년대 중반부터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부모를 돌보았다. 또한 그녀는 가족 소유지의 관리인이 되었다. 그녀는 작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때때로 은색 컨버터블 차를 몰고 시외로 나가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고 정원을 가꾸기를 즐겨했다. 한때 알렉산더 벨 클럽(캐나다에 있는 가장 오래된 여성 클럽)의 명예 회장으로 회의를 관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워싱턴과 벧덱을 오가며 많은 일들을 했다. 후에 그녀는 울혈성 심부전을 앓게 되어 벧덱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다. 증손 조카 블레어는 “그녀는 벧덱의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곳에 머무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Mabel Grosvenor
1905년7월28일 노바스코샤 Baddeck Beinn Bhreagh에서 태어남.
2006년10월30일(월) 사망.
향년 101세.
유가족으로 60명의 조카딸, 조카가 있다.

by 100명 2007. 5. 22. 07:44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이자 스승 - 얼 우즈
Earl Woods (1932-2006년)





▲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란 실증을 보여준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 얼 우즈. 그는 아들을 골프 신동으로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코 강제적으로 하진 않았다. 그의 영재교육법이 큰교훈을 주고 있다.
“내가 유아용의자 벨트를 풀어주면 타이거는 의자에서 내려와 골프채를 잡고 공을 쳐 홀 안으로 집어 넣었다.”

얼 우즈는 보통 아버지가 아니다. 아들의 성공에 대리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아버지도 아니다. 그는 켄자스주의 첫 흑인 야구선수 였으며 베트남 전쟁 때 게릴라 특전부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은 아들 타이거 우즈를 훈련시켜 최연소자 프로 골프선수이자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운동선수로 키우는 것이었다.

타이거의 본명은 엘드릭. 우즈씨는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와 그의 막내 아들에게 타이거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현재 30세가 된 타이거 우즈는 세계 골프 랭킹 1위를 334주 동안 지켰고 10번의 주요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했다. 타이거 우즈는 1997년 어가스타 국내 골프 클럽의 마스터 토너먼트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 아버지 우즈는 “나는 타이거가 태어난 날, 그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골퍼로 키울 생각보다는 좋은 사람으로 성장시키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얼 우즈는 아들에게 강제로 골프를 시키지 않고 스스로 골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연습을 할 때는 정신적으로 강해지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타이거 우즈는 프로선수로써 단지 10년의 경력이지만 10개의 프로골프 선수권대회에서 이미 48번 우승을 했고 연속 142 게임에서 기록을 갱신했다. 얼 우즈 책 서문에 타이거 우즈는 “아버지는 내가 성공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는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조언과 격려로 함께 했습니다”라고 기록했다.

6형제 중 막내인 얼 우즈는 켄사스에서 자랐다. 얼 우즈가 13세 되던 해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가 켄사스 시티의 흑인리그에서 뛰기를 원했고 어머니는 공부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1953년 대학에서 사회학 전공으로 졸업한 얼 우즈는 미국 특별 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그는 태국에서 접수원으로 일하던 쿨티다를 만나 1969년 결혼했다. 베트남전쟁에서 워낙 용감하고 용맹스러워서 별명이 ‘타이거’였던 중령 친구 구엔 퐁과 함께 깊은 우정을 나눈 우즈는 나중에 아들에게 그 이름을 주기로 퐁과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엘드릭(타이거) 우즈는 1975년 12월 30일에 태어났다. 얼 우즈는 캘리포니아 사이프레스로 이사했고 차고에 매트와 네트를 설치하여 아들에게 자연스럽게 골프를 가르쳤다. “나는 정신적으로 그를 강하게 단련시키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늘 “오른쪽엔 물구덩이, 왼쪽엔 장애물”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가르쳤다.

얼 우즈는 2004년 12월 타겟 월드 챌린지 대회에 마지막으로 아들과 함께 참여했고 대회 우승금 125만불은 그가 설립한 ‘타이거우즈 재단’에 기증했다.

Earl Woods
1932년 3월 5일 맨하탄 출생
2006년 5월 3일 74세 일기로 사망
1998년 전립선 암 선고, 방사선 치료 받았으나 2004년 암 재발
유가족으로 미망인, 아들 타이거 우즈, 전처와의 사이에 자녀 세 명이 있다.

by 100명 2007. 5. 22. 07:43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3)
철학적이고 영적인 사업가 IGA 회장 - 버트람 로브
Bertram Leob (1916-2006년)





▲ 창고에서의 버트람 로브. 로브는 오타와 여러 단체들에게는 수백만 달러를 주는 업체로 인식됐다.
버트람 로브의 아버지는 아들이 랍비(유태인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군인매점의 매니저로 복무하면서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를 더 크게 확장할 계획을 가졌다.

IGA(International Grocery Association) 체인의 대표였던 로브는 시장의 움직임에 강제로 맞추기 보다는 철학적인 사고를 따라 사업을 확장해갔다. 때로는 경제적인 요인을 무시해서 결국 그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큰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다.

1966년 M. Loeb는 어려서부터 “가문의 이름이 영원히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 돈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 아버지에게 늘 이야기를 들었다.

오타와 출신의 버트람 로브는 러시안계 유대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 모세 로브는 스탈린 독재정권의 군인으로 징집되는 것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러시아의 겨울을 그리워하다가 오타와로 이사하게 됐고 그곳에서 사탕과 담배를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 가게는 오타와 기차역과 가까이 있어 정차시간에만 장사가 잘 되었다.

어린 버트람은 허드렛일을 하며 부모를 도왔다. 버트람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마늘에 시럽을 바르고 ‘초코렛 묻힌 아몬드’라고 속여 친구에게 먹이곤 했다고 한다. 그는 4년간 뉴욕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그리고 뉴욕의 유대 신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했다. 그 후, 그는 히브리어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1940년 그는 캐나다군에 입대, 페타와와에서 하사관으로 복역했다. 1945년 오타와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랍비가 되려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경영하던 사업을 도왔다. 그 사업은 도매업체 M. Loeb Ltd.로 성장했다. 그의 딸은 “여러 면에서 아버지는 비즈니스의 세계에 걸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업에 관심은 많았지만 제대로 비즈니스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다” 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소규모 가게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버트람은 패밀리 비즈니스를 국제적인 업체로 성장시킬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모세가 사망한 1951년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빠르게 성장하는 새로운 체인스토어에 맞서 싸우는 개인 식료품점 협회(IGA)를 둘러보았다. IGA의 컨셉을 캐나다로 적용시켜 오타와 식료품점을 하나 둘씩 설득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IGA 프렌차이즈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1952년 말, 체인은 34개 스토어를 포함했고 이들의 판매수입은 350만 달러에 달했다. 그는 인센티브 시스템을 적용하여 고객이 매번 10센트 이상으로 구입하면 도장을 찍어줘 다양한 제품으로 바꿀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자기 방식대로 해나갔어요”.

1950년대, 많은 돈을 유대인 자선단체에 보낸 후,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 데이비드 벤 구리온의 초대를 받아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벤 구리온 수상은 “이스라엘은 로브씨와 같은 사업가를 필요로 한다. 국내에서 슈퍼마켓 체인을 운영해 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1958년 ‘슈퍼솔’이라는 이름의 이스라엘 첫 체인 스토어를 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통 유대교의 반대에 부딪혔다. 종교적인 규율을 어기지 않고 어떻게 같은 카트 안에 유제품과 소고기를 함께 넣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쇼핑 카트 안에 유제품을 놓고 고기는 카트 위의 바구니 안에 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IGA 캐나다는 지속적으로 성장해갔다. 1962년 1억4천만 달러의 매상고를 기록했고 체인은 항공기와 컴퓨터를 구입할 만큼 규모가 커졌다. 그러나 1964년부터 어려움이 시작됐다, 체인의 매니저가 130만 달러를 횡령했고, 찰스 브론프만이 회장인 이사회는 로브를 사장 자리에서 해임했다.

그 후 1965년, 그는 45만 달러를 오타와 시립 병원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시장이었던 샬롯 위턴은 기부금을 거절했다. 그녀는 반 유대인파로 알려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돈을 칼튼 대학의 사회학부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도록 제공했다. 수십 년이 지나고 그는 오타와 시립병원의 연구센터 설립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수익금을 사회에 다시 환원해서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즈니스와는 양립할 수 없는 철학적이고 영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굉장히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멋진 계획서 보다는 단지 ‘비전, 추진력, 그리고 목표’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고 랍비 불카는 회상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당시 M. Loeb 주식회사의 판매는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그는 시카고 IGA 프렌차이즈를 매매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돌발적인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Loblaws와 Provigo와 같은 경쟁업체가 지분을 매입, IGA를 인수할 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형제들은 이미 그들 주식의 대부분을 팔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15%를 넘지 않았다. 미국 경제는 주가를 떨어뜨렸고 1977년 이사회는 그를 회장에서 몰아냈다.

그는 정치권에 잠시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1979년 연방선거에서 오타와 자유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권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1980년 초, 주유소 Sunys Petroleum에 투자할 것을 권유 받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업은 빠르게 성장하여 온타리오와 퀘벡에 250여곳이 넘는 주유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는 저만치 물러나서 지켜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로브씨는 1996년 80세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사업을 경영했고 동시에 사회에 지속적으로 기부했다. 가장 최근 그는 오타와 대학 버트람 로브 신체 조직 연구소에 백만 불을 기증했다.

Bertram Leob
1916년 2월6일 오타와에서 출생
2006년 9월11일 오타와에서
골수암으로 사망. 90세.
유가족 2명의 자녀 (나오미, 다이아나), 손자(사무엘),
형제(율, 데이비드)

by 100명 2007. 5. 22. 07:43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
일레인 미낙스, 캐나다가 자랑하는 고졸출신 사업가


ELAINE MINACS (1945-2006년), 백만장자 CEO


▲ 일레인 미낙스(Elain Minacs)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여류 사업가로 일개 주부에서 백만장자로 자수성가, 성공적인 삶을 살다 지난 5월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레인 미낙스(Elaine Minacs)는 집에서 시작한 비즈니스를 다국적 회사로 성장시켜 백만장자가 된 주부사업가였다.

세계적인 콜센터(Call Centre) 회사 Minacs Worldwide Inc. 의 창시자인 그녀는 대기업 회사들이 작은 전문회사에게 하청을 주기 시작할 당시, 그 틈새를 이용해 서비스 산업을 확장시켰다. 그것은 전화와 인터넷을 통한 고객관리, 기술지원분야였다.

오늘날, Minacs Worldwide는 자동차, 금융 서비스, 통신기술, 공기업 및 소비자 제품 산업의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서비스를 제공한다. BPO는 회사 업무 처리 전과정을 외부 업체에 맡기는 아웃소싱 방식이다. 그녀는 타 회사와의 경쟁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해 갔다. 1994년 인터뷰에서 그녀는 “중요한 것은 고객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파트너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소비자 서비스의 기본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온타리오 오샤와의 집에서 시작한 회사를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1999년 매상고(수입) 3,950만불, 2005년에는 2억9천만불. 캐나다, 미국 및 유럽에 20개의 사무실을 가졌고 5천명의 직원을 고용했다.

그녀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된 노르만 베츠씨는 ‘그녀는 의지가 강한 자수성가타입의 여성사업가이다’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성공의 열쇠는 고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또한 회사직원에게 잘 해주는 것이 곧 고객관리의 시작임을 강조했다. 또 다른 성공의 비결은 그녀를 보여주는 방법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스스로 만들었고 치약 광고에서 보이는 깨끗한 미소를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그녀의 가족은 전쟁직후 영국에서 윗비(Whitby)로 이민을 왔다. 맏딸이었던 18세의 그녀는 천을 짜르고 꿰매는 일로 오사와에 있는GM사에 취직했다. 1964년 GM사에서 남편 줄리어스를 만났고 두 사람은 다음해에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었다. 첫 딸이 1973년에 태어나고 그녀는 1970년 후반까지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냈다. 1981년, 저축한 예금, 은행 대출, 부모님에게서 받은 자금을 가지고 임시회사를 세웠다. 그녀는 운전사, 사무원, 작은 사업을 위한 세탁기술자 등 일꾼을 찾고 고용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자신의 고용주였던 GM사로부터 도움을 받아 소비자 서비스를 담당하는 센터를 설치했다. 3년 동안 인력을 배치하고 연결시켜주는 센터를 운영했다. 보다 전문적인 일에 집중할 필요를 깨달은 그녀는 ‘임시적인 서비스 센터는 사양 사업이다’라고 토론토 썬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하면서 ‘사업에 일찍 몸을 담으면 그 사업의 선두주자가 되는 기회를 얻고 미래를 디자인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였다.

1989년 Minacs Group Inc.을 설립했고 고객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업무를 맡았다. 우편물 관리, 급여와 각종 보조금을 관리하는 팀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늘 고민했다. ‘나는 대학 학위가 없다. 또한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불이익을 보는 것이 없는지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녀는 비록 대학학위가 없었고 남녀차별의 현실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 모든 사실이 그녀가 일을 해나가는 것을 방해하진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큰 꿈을 꾸는 것은 진짜 멋지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능력을 갖고, 장애물을 만났을 때 물러서지 않고 틈새를 찾아내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여성 사업가로 자리 잡아갔다. 2002년에 토론토 YWCA 훌륭한 여성기업가상, 2001년 캐네디언 전문판매협회의 다이아몬드 상, 1993년 캐네디언 여성 기업가를 위한 상을 받았다. 그녀는 또한 어린이 자선단체의 열렬한 후원자였으며 아이들을 돕는 전화를 개설, 운영했다.

Elaine Minacs
1945년3월 8일 영국 출생.
2006년5월 17일 61세.
유가족: 남편 줄리어스, 딸
Andrea, 형제 및 3명의 자매.

by 100명 2007. 5. 22. 07:42
한치 어긋남 없는 타고난 장사꾼 [조인스]
신입사원 연수 때 ‘이게 뭡니까?’ 회사 비판… 휴대전화 세계 1위 ‘특명’
최지성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
이코노미스트

▶1977년 삼성물산 입사
85∼91년 삼성반도체 구주법인장
98년 삼성전자 반도체판매사업부 전무
2000년 삼성전자 정보가전총괄 디스플레이사업부 부사장
2003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DM)총괄 부사장
2004년 삼성전자 DM 총괄 겸 디자인경영센터장
2005년 삼성전자 DM 총괄 겸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사장
2007년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

지난 16일 발표된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사람 중 한 명이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에 임명된 최지성(56) 사장이다. 디지털미디어(DM)총괄을 이끌면서 삼성을 세계 TV 매출·판매 1위에 올려놓은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삼성이 TV부문 1위에 오른 것은 사업에 진출한 지 34년 만이었다.

최 사장은 삼성물산에서 반도체 영업을 담당했고, 삼성전자 DM총괄에 이어 정보통신총괄로 이동하면서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부문을 두루 거친 경영자로 부각됐다. 이기태 부회장이나 황창규 반도체총괄 사장과 함께 최 사장도 ‘포스트 윤종용’을 노릴 만한 자리에 올랐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기태 부회장은 선이 굵은 보스형 리더였다. 굵직한 핵심 위주로 현안을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최 사장은 매우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스타일이라는 게 그와 함께 일했던 DM총괄 쪽의 평가다. 하나에서 열까지 세밀하게 챙기면서도 실수가 없다는 것이다.

(삼성 해외 출장 시 TV제품만 둘러보는 게 아니라 뜬금없이 도자기를 사들고 와서 개발자를 당혹스럽게 한 적도 있다. “도자기 같은 질감과 느낌이 오는 제품을 개발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최 사장은 언뜻 보면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있어 한없이 선량하게만 보인다. 이런 외모만 보고 부드러운 리더십을 예상하면 한참 빗나간 것이다.

‘딸깍발이’ 청년시절=최 사장은 195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춘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춘천고를 1년 정도 다니다가 서울로 가기 위해 다시 서울고 시험을 봤다. 고교 시절 별명은 ‘딸깍발이’였다. 꼬장꼬장한 자존심 하나로 사는 가난한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어릴 때부터 고집도 세고 매사에 잘 따지고 드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1971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들어갔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딸깍발이의 눈에 박정희 독재정권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교련 반대 시위를 하며 거리로 내달렸다.

삼성그룹 신입사원 때도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77년 경기도 용인의 삼성그룹 연수원 대강당. 4주 간의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 ‘새내기’들이 돌아가며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번쩍 손을 들고 일어선 한 사원의 발언에 강당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솔직히 말해 삼성의 신입사원 교육에 실망했습니다. 경쟁 그룹인 현대에선 정주영 회장까지 직접 나와 신입사원들과 씨름을 한다는데, 우리는 이게 뭡니까?”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신입사원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갔다. 이 당돌한 청년이 30년 뒤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에 오른 최 사장이다.

‘유럽의 보부상’으로 뜨다=삼성물산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80년대 중반 반도체 해외영업을 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룹 비서실에서 신규 사업을 검토하는 업무를 하던 중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문)으로 발령이 났다. (엔지니어가 아닌 비전문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반도체 기술자들이 읽는 1000쪽짜리 교재를 달달 외우고 다녔다.)

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1인 지사장’으로 나갔다. 외국에서 ‘삼성’ 이나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막막한 시절이었다. 64KD램을 팔기 위해 전화번호부에서 ‘전자’와 ‘PC’라는 상호만 나오면 무조건 찾아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 곳곳으로 ‘무박 2일’ 출장도 많이 떠났다. 밤길에 알프스산맥을 넘기도 했다.

(‘유럽의 보부상(褓負商)’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행군을 거듭한 끝에 최 사장은 유럽 진출 첫해인 85년 혼자서 100만 달러어치의 반도체를 팔았다.) 86년 500만 달러, 87년 2500만 달러, 88년 1억2500만 달러어치를 팔아 해마다 500%씩 판매를 늘렸다. 91년 귀국한 그는 삼성전자 관리팀장에 올랐다. 영업맨 출신으론 최초였다.

장사꾼 최지성의 경영 스타일=최 사장을 아는 이들은 그를 ‘타고난 장사꾼’이라고 평한다. (그가 부르짖고 주문(呪文)을 외우면 현실이 된다. 그는 지난해 업계 최초로 100억 달러 이상의 TV를 팔겠다고 했다. 그는 디지털 기술이 가전산업을 부활시키고 있다며 ‘디지털 르네상스’라는 말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목표를 달성했다.)

DM총괄 사장 시절 한 해 100일 이상을 해외로 다녔다. 삼성물산 시절부터 정확한 일 솜씨와 절도 있는 생활 덕분에 ‘독일병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출장 일정을 짤 때도 그는 남달랐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서 최 사장은 자신의 전형적인 남미 출장 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일요일 인천 출발→같은 날 저녁 뉴욕 도착, 주재원들과 저녁→다음날 오전 사무실에서 업무보고→점심 먹고 상점 시찰→오후에 마이애미행 비행기 탑승→공항 도착 즉시 식당으로 직행, 주재원들과 저녁식사를 하며 업무보고→새벽 1시 비행기 탑승→새벽 4시 반 브라질 마나우스 도착→샤워 후 오전 7시 조찬→오전 8시30분부터 현지 공장 현황 보고 및 현장 시찰→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4시간30분 걸리는 상파울루로 이동→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칠레 산티아고·페루 리마·콜롬비아 보고타 등에서 하루씩 체류하며 비슷한 일정 소화→멕시코 멕시코시티에 저녁 도착→다음날 아침 티후아나로 이동해 공장 방문→오후 차량을 이용,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로 옮겨 주재원과 저녁→밤 10시 LA 공항으로 이동해 다음날 0시50분 귀국편 탑승→다음날 인천공항 도착’.

총 9박10일의 숨가쁜 일정이 사내에 알려지면서 최지성(CHOI GEE-SUNG) 사장의 이니셜을 따 ‘GS루트’라는 이름의 ‘표준적인’ 남미 출장 일정표가 생겼다고 한다.

‘보르도 휴대전화’ 나올까=애니콜 성공신화를 만든 정보통신총괄은 요즘 여건이 썩 좋지는 않다. 노키아와 모토로라의 저가폰 공세와 소니에릭슨의 고가폰 시장 잠식 탓이다. 게다가 애플까지 뛰어들고 중국 업체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휴대전화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소니에릭슨의 약진은 눈길을 끈다. 소니에릭슨의 선전은 뮤직폰과 카메라폰 등 고가 프리미엄 시장에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휴대전화 3200만 대를 판매했지만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7% 감소했다. 매출은 4조6500억원. 달러로 계산하면 45억9000만 달러다. 삼성전자 측은 “소니가 해외법인의 매출을 포함한 것과 달리 우리는 본사(국내) 매출만 발표하고 있어 실제로는 삼성전자가 소니에릭슨보다 여전히 매출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니에릭슨의 평균단가가 약 188달러인데 반해 삼성전자의 평균단가가 176달러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고가 시장에서 소니에릭슨이 더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삼성 휴대전화 사령탑을 맡은 최지성 사장이 저가폰이나 디자인 면에서 애니콜의 전략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주목된다. 평판TV 히트작인 ‘보르도 TV’ 같은 제품이 휴대전화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최 사장이 이번에도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을 겸임하기로 해 애플의 ‘아이폰’처럼 파격적인 디자인을 내놓을 것이라는 성급한 관측이 벌써 나오고 있다.

“기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마케팅”이라고 말하는 최 사장은 스스로 장돌뱅이라고 칭할 정도로 마케팅을 강조한다. 최 사장 특유의 마케팅과 디자인 감각이 TV처럼 삼성 휴대전화를 세계 1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by 100명 2007. 1. 29. 08:04

사업다각화 성공&실패 사례
[매경이코노미 2006-03-22 13:41]

지난 92년 진로가 맥주회사인 쿠어스와 합작했을 때 주류업계는 바싹 긴장했다. 당 시 진로는 소주업계의 부동의 1위. 소주와 맥주를 동시에 팔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전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진로쿠어스맥주는 1000억원이 넘는 누적적자를 기록하고 매각됐다. 진로의 무리한 사업 확장과 투자가 큰 문제였지만 맥주와 소주의 소비 계층이 엄연히 달랐고, 영업사원들의 역량과 도·소매상 간에 관계 등도 문제가 됐다.

성공한 케이스도 있다. 현재 오리온을 순수 제과업체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오리 온은 사업 뿌리인 제과에서 업계 선두를 다툴 뿐 아니라 영화(쇼박스), 극장(메가 박스), 유통(바이더웨이), 케이블 TV(온미디어), 외식(베니건스) 등의 분야에서 두 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제과 부문 점유율 28%를 차지하는 오리온제과는 2003년 5000억원을 돌파했고 지난해 7000억원(해외판매 포함) 매출을 기록해 그룹 내 가장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제과 다음으로 영화(1000억원), 미디어(2600억원), 극장(500억원) 부문 등의 매출을 합산하면 약 4100억원에 달해 확실한 수익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밖에 편 의점과 외식 사업도 지난해 각각 4000억원과 9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89년 당시 고작 매출액 1300억원에 불과했던 오리온(당시 동양제과)은 현재는 매출 2조원을 바라보는 어엿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성장했다.

이현정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CJ와 오리온은 식품 주력에서 영화, 엔터테인 먼트 부문으로 다각화에 성공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특히 “오리온은 내부 자금 이 많았던 CJ와 달리 선택과 집중을 통해 신성장동력을 찾은 경우”라고 말했다. 오리온이 ‘먹는 즐거움’에서 ‘보고 느끼는 즐거움’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 던 이유는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을 비롯한 젊은 전문경영인들의 역할이 컸다.

오리온그룹의 사업 다각화 시작은 91년 신규사업 아이디어뱅크팀인 ‘에이펙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온미디어를 이끌고 있는 김성수 대표를 비롯, 김 우택 쇼박스 미디어플렉스 대표, 베니건스를 들여온 문영주 롸이즈온 대표 등이 모두 에이펙스 출신. 특히 문 대표는 직접 미국에 가서 현지조사를 하고 1년이 가까 이 접시 닦기, 청소 등을 하면서 95년 베니건스를 직접 갖고 들어왔다.

당시 담 회장은 에이펙스 팀원들에게 “사업 실패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원하는 사업을 추진 하라”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리온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사업 추진 시 출 장비 정도의 경비만 주는 게 고작인데 당시 담 회장은 부하 직원들을 독려하면서 드물게 50억원에 이르는 투자비를 직접 지원해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IMF 외 환위기 이전 다각화와 체질개선을 끝낸 오리온은 IMF 외환위기 이후 부도와 심각한 구조조정을 겪은 국내 기업들과 달리 탄탄한 성장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by 100명 2007. 1. 22. 13:16

정진구 CJ 식품서비스 총괄대표

외식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하는 정진구(鄭鎭九-59) CJ 식품서비스군 총괄 대표의 스토리는 나환자들과 같이 먹고자며 뒹굴던 사회초년병 시절의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1972년의 일이다.

삼립식품 구매부 신입사원이던 그는 계란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나환자 촌에 직접 뛰어들었다.

당시 삼립식품의 주력제품은 계란을 주원료로 하는 카스테라.소비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나 봄 가을 소풍철만 어김없이 재연되는 "계란파동" 으로 원료 확보에 애를먹었다.

소위 4대 메이저로 불리던 남대문과 동대문의 계란 도매상들이 값을 올리기위해 교묘하게 출하량을 조정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대형 양계장들이 널려있지만 그 때는 국내 계란 공급의 70%를 경북 안동,칠곡 등에 산재한 나환자촌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방법은 그들과의 직거래를 트는 것 밖에 없었다.

정 대표는 짐을 싸들고 나환자 촌으로 내려갔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지만 그는 업무보고를 위해 서울에 올라오는 기간을 빼고는 나환자들과 같이 지냈다. 손가락이 없는 환자들을 위해 목욕도 시켜주고 밤에는 함께 소주도 마셨다. 잔 한개로 돌아가며 마시는 나환자촌 특유의 주법(酒法)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상거래의 가장 큰 밑천은 신뢰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나환자들은 서울 도매상들과의 거래를 일부 끊으면서까지 삼립식품이 직거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어요."

회사는 중간마진이 붙지 않은 싼 가격에 계란을 구매해 성수기에도 공장을 풀가동할 수 있게됐지만 그는 무시무시한 협박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왔어요. 저 때문에 장사를 망친 계란 도매상들이지요. 한동안은 그들이 몰려있는 남대문 동대문 등을 피해다녀야 했습니다."

2003년말 부터 CJ그룹 식품서비스군을 총괄하고 있는 정진구 대표. 국내 대기업 CEO 가운데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삼립식품에 몸담았던 2년9개월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다국적 식품기업에서 대부분의 직장생활을 보냈다.

한때는 고달픈 이민자로서 미국 편의점의 말단 점원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 그의 꿈은 농사꾼이었다. 삼미사 부회장을 지냈고 평소 농사에 관심이 많던 부친 정용모씨(81년 작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서울 사대부고를 졸업한 뒤 65년 서울대 농학과에 진학했고 71년6월 삼립식품에 취업을 한 것도 농사와 식품에 대한 남다른 관심 때문이었다.

실제 정 대표가 군복무를 마쳤을 때는 부친이 과천 일대에 상당한 규모의 농지와 과수원 터를 매입해둔 상태였다.

74년3월 그는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형식만 '이민'이지 선진식품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학군장교(ROTC 7기)로 근무했던 부대가 미 1군단의 작전지시를 받아 일명 '보리 카투사'라고 불리던 공병대대 였어요. 그곳에서 기름지고 맛깔난 미군 식단을 들여다보며 서방 식품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지요."

단돈 2백달러를 들고 부인과 함께 정착한 곳은 미국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무작정 떠난 이민이니 먹고 살 길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US Gypsum'이라는 조그만 건축자재 생산회사에 공정 관리인으로 취직을 했다. 하루 3교대로 돌아가는 공정의 단계별 생산성을 체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연봉 3만달러의 수준급 일자리 였지만 76년6월 회사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그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종업원 모집 공고를 보고 집 근처의 24시간 편의점인 '세븐 일레븐'을 들어갔다. 세븐 일레븐의 보수는 시간당 3달러.전 직장과는 비교도 되지않을 정도로 적었다. 반면 업무는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로 더없이 고된 일이었다.

그는 매장에 비치돼 있는 편의점 운영 매뉴얼을 달달 외운 뒤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과거 나환자촌과의 계란 직거래를 성사시켰던 때처럼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 3교대 근무에 일일 보고가 하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맨 먼저 눈에 띄었다. 각 근무 교대자들이 올리는 매출의 합계와 실제 금고에 들어있는 돈이 매일 달랐다.

정 대표는 금전등록기를 들여놓을 것을 제안했다. 매출이 발생할 때마다 금전등록기에 입력을 하고 이를 토대로 시간대별 매출 합계를 기록토록 했다.

볼티모어의 작은 편의점에 들여놓은 금전등록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내 6천8백개의 전 점포에 확산됐다.

정 대표는 점원 생활 4개월만에 부점장으로 승진했다. 부점장이 되고나서도 그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다. 밤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노트에 빼곡하게 썼다.

정 대표는 강도 예방법에 대한 매뉴얼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당시 전국 세븐 일레븐에는 하루평균 1.5건의 강도사고가 발생하고 있었다.

정 대표는 신제품 선전물로 가득차 있는 점포 겉유리 포스터들 중 계산대 앞의 포스트는 없애야한다고 생각했다. 점포 밖에서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또 20달러 이상의 지폐는 받지 않는다는 공고문을 외부에 써붙여한다고 주장했다.

현금 계산기에 돈이 많지 않으면 강도들이 '범죄'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어느날 본사의 워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사장이 손님으로 가장해 암행 감찰을 나왔다가 정 대표의 노트를 보게 됐다.

그 길로 정 대표의 '강도 예방법'은 미국 전역에 전파됐고 그는 6개월만에 점장으로 다시 올라섰다.

점장 생활을 한지 6년쯤 지나 그는 마침내 세븐 일레븐 본사의 간부가 됐다. 텍사스주내 8개 점포를 관리하는 매니저가 된 것. 그는 완전히 미국 생활에 적응한 것 같았다.

본인에겐 안된 얘기지만 77년말 자신의 터전이라고 생각했던 과천의 농지는 종합청사부지로 수용당해 돌아갈 땅도 없었다.

귀국의 꿈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85년.미국의 아이스크림 전문브랜드인 배스킨 라빈스는 한국 진출을 앞두고 마케팅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

그는 배스킨 라빈스 코리아의 총괄이사로 85년8월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오랜만에 밟아본 고국 땅의 감회를 즐길 틈도 없이 곧장 배스킨 라빈스의 한국시장 연착륙에 매달렸다.

86년8월 충북 음성에 공장을 세우고 1백% 천연재료를 이용해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94년까지 전국에 1백개의 점포를 내며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정 대표의 다음 직장은 파파이스였다.

파파이스는 세븐 일레븐과 배스킨 라빈스를 거치며 이미 미국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정 대표를 아시아 총괄 CEO로 영입했다.

만 5년만에 전국에 1백50개의 점포를 내며 선발주자였던 KFC 버커킹 등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는 서울에 고작 2명의 직원을 데리고 움직였지만 아시아권 내 점포 개설과 운영에 대한 영향력은 말 그대로 '언터처블'이었다.

다국적 브랜드인 스타벅스 코리아 사장을 맡고나서도 그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2002년말 그만둘 때까지 60개 점포를 열며 국내 커피숍 시장을 석권했다. 그는 어느새 신규 브랜드 런칭의 천재로 불리고 있었다.

"나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경영자를 모셔오라"는 이재현 회장의 특명을 받아 외식사업의 헤게모니 장악을 꿈꾸던 CJ가 그를 영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 대표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연봉 3만달러를 받던 전문 직장인에서 시간당 3달러짜리 점원으로의 변신도 마다하지 않았다.

헛된 공상으로 보내기 쉬운 한밤중의 조그만 가게에서 스스로 문제점과 개선책을 찾아 세계 최대 편의점의 운영 매뉴얼을 바꿔놓았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일을 홀로 치밀하게 준비해 이뤄냈다.

평범한 이민자의 삶을 거부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이제 세계 식품시장을 향해 도전장을 던진 국내 토종기업 CJ푸드빌의 대표 자리다.

6년전 위암 수술을 받아 많이 여윈 몸이지만 서울 강남의 뚜레쥬르 매장에서 만난 그의 눈빛만은 형형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정진구 대표가 CJ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은 것은 2002년말.스타벅스 코리아 사장을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을 때다.

당시 그는 '퇴임후 1년동안 동종업계에 진출하지 못한다'는 스타벅스 측의 내규에 따라 바로 CJ로 옮기지 못했다.

그런데도 CJ측은 1년치 연봉(2억4천만원)을 일시불로 지급했으며 놀랍게도 그는 전액을 사회단체에 기부했다.

그는 지금까지 다국적 기업을 옮겨다니며 50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지만 모은 재산은 많지 않다. 아직 경기도 분당에서 전세생활을 하고 있다.

판공비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는다. 한달에 3백만원이 넘게 드는 활동비도 자비로 부담하고 있다.

정 대표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성취감"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브랜드의 컨셉트와 타깃을 설정해 놓고 열정을 가진 젊은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보람이라고 한다.

"제겐 기존 비즈니스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일보다 새로운 일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훨씬 수월했습니다. 하나의 목표에 모든 구성원들을 단결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성공시킨 브랜드 업체들이 혹시 초기 성공에 도취돼 안일함에 빠져들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하고 있다.

모 회사를 그만둘 때 "일부 해이해진 젊은 직원들에게 자극을 주기위해 그랬다"고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by 100명 2007. 1. 16. 09:03

"6년간 잠못자고 고생, 성공적인 발사 기쁘다"


‘아리랑 2호’ 개발을 진두지휘한 이주진 항공우주연구원 위성총괄사업단장(사진)은 28일 아리랑 2호 발사 직후 “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되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이 단장과의 일문일답.

―개발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위성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무결점 과학이다. 발사 일정이 정해졌기 때문에 그 계획에 맞추기 위해 압력을 많이 받는다. 아리랑 2호는 카메라 탑재체 부분을 이스라엘과 협력했는데 그쪽에서는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해주지 않으니 속이 탔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고칠 점은.

▲위성 첨단기술은 금방 개발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리랑 2호는 1호가 발사완료된 후 개발을 시작해 약 5년 정도 걸렸다. 한 위성이 끝나고 다음 위성으로 넘어가지 말고 순차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지금은 3호 개발을 동시에 하고 있다. 위성의 플랫폼(본체)의 공유 부품을 60%가량 공유함으로써 개발 비용을 700억원 정도 절약하고 있다.

―위성이 날아가는 것을 본 심정은.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다. 지난 6년반 동안 밤잠 못자고 피가 마르는 고심을 했다. 위성이 올라가서 정상 작동을 하게 되면 세계 6∼7위의 기술수준이 될 수 있다. 러시아에서 작업할 때도 태극기를 먼저 걸고 작업을 했다.
by 100명 2006. 7. 29. 20:22

"새로운 일은 무조건 도전해라"

[머니투데이 박창욱기자]중국의 명문 칭화대의 주요 교육이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문리삼투(文理渗透)'다. 문과적인 것과 이과적인 것이 서로 반응하고 교감하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것.

특히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이같이 유연한 사고와 다양한 경험을 가져야 경영자의 위치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 MSN사업부를 총괄하고 있는 이구환(43.사진) 상무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 PC의 세상

이 상무는 경북대 수학교육과를 나왔다. "부전공으로 경영학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마케팅 인사관리 등 과목을 열심히 들었죠. 2학년때부터는 공민학교에서 야학 교사로도 활동했습니다. 덕분에 가르치고 여러 사람을 만나 이해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학부를 마친 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들어갔다. "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응용수학을 좀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먼저 졸업했던 KAIST 선배가 '앞으로 PC의 세상이 온다'며 한국MS에서 같이 일해보자고 권유를 하더군요."

그 선배가 바로 현재 엔씨소프트의 김화선 부사장이었다. 이 상무는 1988년 한국 MS에 입사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소프트웨어(S/W) 시장이 거의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도 훌륭한 선배 덕분에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게 됐지요. 저는 한국MS에 입사해서도 여러 좋은 선배들의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그것들이 모두 저를 한층 더 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초창기 한국 MS는 대부분 개발인력으로만 구성돼 있었다. 프로그램 개발에 더해 기술지원에다 심지어 S/W 제품 포장까지도 직접 할 정도였다. 그러다 국내의 본격적인 S/W 시장형성을 앞두고 90년대초 새로 마케팅팀이 발족했다.

"새로운 부서에 자원했습니다. 당연히 마케팅 서적도 찾아 열심히 공부도 했구요. 회사에서 새로운 일이 나오면 용기있게 도전해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서 저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구요."

# 인터넷 전도사

그는 컴퓨터 서버 프로그램 제품의 마케팅 매니저로 활동하다 다시 새롭게 변신했다.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MS가 만드는 제품군을 모두 겪어봤습니다.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인터넷 시대를 맞아, 저희 제품이 인터넷 환경에서 얼마나 우수한지를 널리 전파하는 '이벤졀리스트(Evangelist)'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또 아예 97년도부터 인터넷 서비스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다. "5년간 두루넷 서비스를 함께 수행했습니다. 사실 국내에 초고속 인터넷이 급속히 퍼지게 된 데는 저희 MS의 공이 매우 크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99년도부터 현재 MSN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특히 MSN 메신저 마케팅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가장 인기있는 메신저의 하나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지요." 그런 그의 노력을 회사도 인정해줬다. 2001년 이사로 승진하면서 MSN 사업부 전체를 총괄하게 됐다. 하지만 현재 MSN은 국내 포털업체들의 강력한 위세에 눌려 있는 상태다.

"모 업체는 검색이 강하고 저희는 메신저가 강한 것처럼 각자 잘 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또 잘 하고, 못하느냐는 시점마다 항상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용자의 요구를 잘 파악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부적으로 된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바탕으로 열심히 활동하면 기회는 언제든지 옵니다."

# 나만의 성

사회 후배들을 위해 들려줄 이야기를 부탁했다. "사실 제가 지금의 위치까지 승진한 것은 결코 제가 뛰어났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제 인생을 이끌어준 훌륭한 선배를 비롯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난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구요. 그래서 전 제가 만나온 사람들, 만날 사람들이 가장 큰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을 물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성을 쌓아 나갑니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제가 쌓아온 성이 정말 훌륭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훌륭한 삶의 기본은 역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물론 제 자신부터 언행을 일치시켜 신뢰를 높혀야 겠지요."
by 100명 2006. 7. 10. 12:30

새로운 시장영역을 창출하는 방안

W. CHAN KIM/RENEE MAUBORGNE/서창적

대부분의 기업들은 그들의 경쟁자와 싸워서 이기려는데 중점을 둔 나머지 기업전략이 경쟁의 동일한 기본적 차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그러한 기업들은 '우리가 전략그룹 내에서 또는 산업 내에서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에 관한 맹목적인 신념을 공유한다.기업이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에 대한 전통적인 지혜를 더 많이 공유하면 공유할수록 경쟁의 집중은 더욱 커진다.

새로운 시장공간의 창출은 전략적 사고의 다릉 패턴을 필요로 한다.경쟁하는 방법을 정의한 기존의 틀 안에서 바라보는 대신에 경영자는 맞은 편에서 그 틀을 체계적으로 볼 수 있다.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가치면에서 실질적인 커다란 약진을 나타내는 미개척 분야를 발견할 수 있응 것이다.

기업이 전통적으로 정의된 경쟁의 영역들,즉 대체산업,전략적 집단,구매자 집단,보완적인 제품과 서비스 제공,산업의 기능적 감성적인 지향,그리고 더 나아가 시간까지를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가치혁신을 체계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새로운 가치곡선의 창출: 한 기업이나 산업의 고객에게 제공물을 설명하는그래픽 묘사방법인가치곡선은 새로운 시장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좋은 도구이다.새로운 가치곡선을 발견하기 위한 열쇠는 네가지의 기본적인 질문에 놓여 있다.

감소(어떤 요인들이 산업표준 이하로

| 잘 감소되어야 하는가?)

|

v

제거--------------> 새로운<----------------창조

(어떤 요인들이 당연히 가치곡선 (어떤 요인들이 산업에서 결코 제공된

산업에서 제거되어야 하는가?) ^ 적이 없어서 새로이 창출되어야 하는가?)

|

|

올림(어떤 요인들이 산업표준 이상으로

잘 끌어 올려져야 하는가?)

대체산업을 살펴봄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기업은 동종산업 내의 다른 기업뿐만 아니라 대체상품 또는 서비스를 생산하는 다른 산업에 속한 기업과도 역시 경쟁을 한다.모든 구매의사 결정에서 구매자들은 종종 대체상품과 은연중에 비교를 해본다.그러나 우리는 판매자가 될때 이러한 직관적인 사고를 종종 포기한다.판매자는 소비자가 대체산업 간에 어떻게 흥정하는가에 관해 좀처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무역잡지,무역박람회,소비자 등급 보고서들은 한 산업과 다른 산업간에 놓여 있는 높은 장벽을 강화한다.그러나 종종 대체산업사이의 공간은 가치혁신을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홈 디포사;북아메리카의 DIY(do-it-yourself)

-인튜이트사:큌큰(Quicken)소프트웨어로 재무관리 방식을 변화시킨 기업

-페더럴 익스프레스와 유나이티드 파슬 서비스

-사우스웨스트 에어라인:항공사

산업내 전략집단을 살펴봄

전략집단은 비슷한 전략을 추구하는 산업내 기업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다.대부분의 산업에서 산업 경쟁자들 사이의 모든 근본적인 전략적 차이는 소수의 전랴집단에 의해 공략된다.일반적으로 전략집단들은 가격과 성과라는 두 가지 차원에 입각해서 개략적으로 계층적 순위가 매겨질 수 있다.가격의 상승은 성과차원에서의 동반상승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대부분의 기업들은 한 전략집단내에서 그들의 경쟁적 위치를 개선하는데 초점을 둔다.전략집단들 사이의 새로운 시장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열쇠는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옮기는 구매자의 의사를 결정짓는 요인들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폴로 랄프 로렌사:유행을 타지 않는 고급 패션의 의류부문

-도요다:고급 자동차 시장에서 렉서스

-소니:워크맨

-챔피언사:조립식 주택

구매자 사슬을 살펴봄

어느 구매자 집단이 표적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태의연한 지헤에의 도전은 새로운 시장공간의 발견을 이끌어낼 수 있다.구매자 집단을 살펴봄으로써 기업은전에 간과했던 고객들에 중점을 두기 위해 가치곡선을 어떻게 재디자인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많은 산업들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유사한 기회를 갖는다.기업들은 누가 표적고객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에 의문을 던짐으로써,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브롬버그사:수익성 있는 사업정보를 제공하는 기업

-필립스 라이팅사:필립스 전자의 북아메리카 지사

보완적인 제품과 서비스 제공을 살펴봄

다른 어떠한 것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사용되는 제품과 서비스는 거의 없다.대부분의 경우에,여타 제품과 서비스는 그것들의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그러나 대부분의 산업에서 경쟁자들은 그들 산업의 제품과 서비스 제공의 울타리 내에서 집중한다.미개발 가치는 종종 보완적인 제품과 서비스 속에 감추어진다. 그 열쇠는 구매자들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선택할 때 그들이 추구하는 총체적인 해결책을 정의하는 것이다.그렇게 하기 위한 단순한 방법은 제품이 사용되기 전,사용되는 도중,그리고 사용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기업들은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보완물에 노력을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시장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보더스 북스 앤드 뮤직사와 반즈 앤드 노블사:대형서점

-버진 엔터테인먼트:오락기기

-다이슨:진공청소기

-제네카 살릭 암센터:암치료 서비스

구매자의 기능적 감성적인 매력을 살펴봄

대부분의 제품들 가운데 서비스의 매력이 어느 한쪽에 잇는 것은 본질적으로 드물다.이 현상은 기업이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소비자에게 무의식적으로 교육해 왔던 과거 경쟁방법의 결과다.그동안 기능적 측면을 지향한 산업들은 더욱 기능지향적이 된다.감성적으로 지향한 산업들은 더욱 감성지향적이 된다.기업은 자체 산업의 기능적-감성적 지향성에 도전하려고 할 때 종종 새로운 시장을 발견한다.감성지향적 산업들은 기능성의 강화없이 가격만을 높이는 많은 부수적인 것들을 제공한다.이런 부수적인 제거함으로써 고객들이 환영할 기능적으로 더 단순하고,좀도 저가이며,저비용의 사업모델을 창출할 수 있다.그 반대로 기능지향적 산업들은 감성적인 내용을 조금 추가함으로써 종종 일용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

-스터벅스:커피전문점

-스와치:염가시계

-보디숍:화장품

-다이렉트 라인 보험사:중개인 없는 보험사

-밴가드 그룹:미국에서 지표채 사업

-찰스 스왑사:중개인 서비스

시간을 살펴봄

모든 산업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체 산업에 영향을 주는 외적인 추세를 따르게 된다.시간에 따른 추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원칙이 중요하다. 새로운 가치곡선의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이러한 추세들은 반드시 사업에 결정적이어야하고,역행할 수 없으며,궤도가 분명해야 한다. 많은 추세들이 어느 한 시점에서 관측된다.에를 들어 기술의 단절,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도래,또는 규정이나 사회적 환경의 변화 등이다.그러나 대개 한두 가지 정도가 특정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그래서 그 방향의 예측없이도 추세나 주요 사건을 보는 것이다.

-재무서비스:1998년에 발생한 아시아의 위기

-엔론:에너지회사

-시스코 시스템스사:고속데이터 전송

-

대기업의 재건

새로운 시장공간을 창출하는 것은 사업을 시작하는 기업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세계적으로 가장 큰 기업들의 번영과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하다.전세계적으로 기업선도자들이 다가오는 10년안에 자신의 조직의 중심적인 전략적 도전으로 시장창출을 보는 것은 놀랄 일이 안니다.그들은 혼잡하고 수요 부족의 경제하에서 수익의 증가는 시장의 창출과 재창출없이는 유지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그것은 소규모 기업을 대기업이 될 수 있게 하고,대기업들로 하여금 자신을 재건할 수 있게 해준다.

* 전략초점의 전환:치열한 경쟁으로부터 새로운 시장공간의 창출

전통적인치열한 경쟁새로운 시장공간의 창출

경쟁의 틀

산업산업내 경쟁자에 초점 ======>대체산업을 살펴봄

전략집단전략집단내 경쟁적 위치에 ======>산업의 전략집단을 살펴봄

초점

구매자 집단 구매자집단에 보다 잘 서빙======>산업의 구매자집단을 재정의함

하는데초점

제품과 서비스산업내 범위에서 제품 및 서비스 ======>산업의 범위를 벗어나는 보완적인

제공의 범위제공가치의 극대화에 초점제품및 서비스를 살펴봄

산업의 기능적산업내 기능적-감성적 지향과======>산업의 기능적-감성적 지향을 재고함

-감성적 지향조화를이룬 가격-성과향상에 초점

시간 발생하고 있는 외적 추세에의======>시간의 흐름에 따른 외적 추세의 구현

적응에 초점에참여함

by 100명 2005. 7. 27. 15:09

성공적인 사업 아이디어를 선별하는 법

김위찬/REN'EE MAUBORGNE/이장호

경영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도전 중의 하나는 어떤 사업 아이디어가 진정으로 상용화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정확히 식별해 내는 것이다.

신제품은 매력적인 가격대에서 특별한 효용을 고객들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하며 기업은 신제품을 고객에게 공급함으로써 적절한 이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제품시장의 종류를 불문하고 경영자들이 유망한 사업 아이디어를 식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세가지 분석 도구를 만들어 냈다.

첫번째 도구인 '구매자 효용지도'는 고객들이 혁신기업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호응할 가능성을 나타낸다.두번째 도구인 '대중가격대'는 가격을 어떤 수준으로 정하며 가장 많은 고객을 끌어 모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세번째 도구인'사업모델 가이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목표가격에서 적절한 이익을 실현하면서 활용할 수 있는지 여부와 활용방법을 제시한다.

특별한 효용의 창조:구매자 효용지도

이리디엄 사업을 책임진 모토로라 경영진들은 가장 흔한 실수를 저질렀다.그것은 신기술에 도취되어 넋이 나간 것이다.혁신에 성공하는 기업들은 기술이 아니라 제품의 효용에 초점을 맞춘다.

구매자 효용지도는 경영자들이 올바른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도움을 주는 역활을 하며 고객이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경험들 뿐만 아니라 회사가 고객들에게 효용을 제공함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대한 욘곽도 제공한다.또한 경영자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제공할 수 있는모든 효용가치를 시별할 수 있게 된다.

6단계 고객 경험 사이클:고객의 경험은 대략 구매,배달,사용,보충,수리,처분에 이르는 여섯 단계로 구분할수 있다.각 단계는 여러 가지 특정한 경험들을 포함한다.

여섯 가지 효용 지렛대:우리들이 효용 지레대라고 부르는 고객 생산성,단순함,편리함,위험,재미와 이미지,환경친화성은 고객경험의 각 단계들을 관통하고 있다.

여기서 혁신에 성공한 기업들이 구매자 효용지도상의 새로운 칸에 해당하는 효용들을 어떻게 개발했는가를 살펴보자.

동일단계에서의 새로운 지렜대 사용:스타벅스

새로운 단계에서의 동일한 효용지렜대 사용:델 컴퓨터

새로운 단계에서의 새로운 효용지렛대 사용:필립스

구매자 효용지도는 진정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단지 기존 제품을 수정하는 것에 불과한 아이디어간의 차이를 드러내는데 유효할 뿐 아니라 경영자들에게 아직도 많은 혁신 가능성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상기시키는 역활도 한다.

전략적 가격 설정:대중 가격대

기업이 제품에 대해 설정하는 가격은 고객을 대규모로 유치할 수 있는 가격이어야 할 뿐 아니라 한 번 유치한 고객은 놓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가격이어야 한다.적절한 신제품 가격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 가격대,즉 최대로 확보할 수 있는 가격폭을 식별해야 한다.그 다음에는 기업이 특허권 등에 의한 법률상의 보호나 자원상의 잇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경쟁기업들이 모방제품을 가지고 뛰어들지 못할 정도의 가격수준이 어떤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대중가격대는 뚜렷이 구분되지만 상호관련이 있는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1단계:대중가격대 식별.신제품을 시장에 내놓았을 때 경영자들로 하여금 자사가 속한 사업의경 계를 뛰어넘어 고객을 찾게 하는 좋은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다음 두 가지 범주에 속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목록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

같은 기능을 수행하나 형태가 다른 경우.인튜이트사의 재무관리 소프트웨어 패키지인 퀴큰

형태와 기능은 다르나 사용 목적이 같은 경우.유럽의 영화체인점인 키네폴리스,사우스웨스트

항공사

2단계:가격대 내에서 특정 수준을 정함.분석도구의 두번째 부분은 경영자들이 가격대 내에서 모방제품을 경쟁에 끌어들이지 않는 가격수준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수익성 있는 사업모델 구축:사업모델 가이드

제품개발에 있어 효용과 가격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닷컴기업을 포함한 모든 기업들은 결국은 이익을 내야 한다.성공적인 혁신기업들은 처음부터 간단하고 수익성 있는 사업모델을 가지고 있다.

세번째 분석도구인 사업모델 가이드는 경영자들로 하여금 생산 및 분배 방법,자기 회사의 역량,제품 가격 결정구조에 대해 생각하도록 고안된 일련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우리가 목표로 하는 비용은 무엇인가?"하는 질문과'우리는 누구와 파트너가 될 수 있나?"하는 질문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그 이유는 기업의 비용 목표는 기업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역량을 획득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며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역량은 자신의 비용 구조를 바꾸는 기업의 능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기업은 일단 전략적 가격이 요구하는 비용목표에 맞춰 비용과 역량을 최적화한 다음에는 보다 많은 고객을 유지하고 수익율을 높이기 위해 산업의 기존 가격결정모델에 도전해야 한다.

비용목표는 어느 정도인가?성공적인 혁신기업의 경영자들은 비용을 시장지향적인 전략적 가격에 맞춤으로서 조직 구성원들이 재료,디자인 및 제조에 관한 거의 모든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케하며 그러한 경영자들의 자세는 흔히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시계회사인 스위스의스워치사

우리는 누구와 파트너가 될 수 있나?현명한 혁신 기업들은 자사 조직의 비대화를 회피하는 경향이 늘고 있으며 대신 다른 기업들과 제휴하거나 다른 기업들을 매입함으로써 부족한 역량을 보충한다.그렇게 함으로써그들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다.의료장비인 CAT를 개발한EMI사

어떤 가격 모델을 우리가 사용해야 하나? 성공적인 혁신기업들은 제품 가격을 정하는 방법이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가정은 결코 하지 않는다.예컨대 블록버스터 비디오사는 비디오 가격결정모델을 비디오 판매로부터 대여로 바꿈으로써 비용 가격 딜레마를 극복했다.

장애물 극복을 위한 다양한 노력

훌륭한 가치 제공과 실패할 수 없는 사업 모델조차도 제품 성공을 보장하기에 충분치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혁신은 그 자체가 현상에 대한 위협익 때문에 기업의 중요한 이해관계인들,즉 종업원,사업파트너,일반대중의 제3자로부터 공포와 저항의 대상이 된다.

종업원.혁신이 종업원들의 생활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종업원들이 갖게 되는 우려를 충분히 배려하지 않으면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미국의 증권회사 메릴린치사

사업파트너.조업원들의 불만보다 회사에 잠재적으로 더 큰 손해를 끼칠수 있는 것은 자기 회사의 수익 흐름이나 시장위치가 혁신기업의 아이디어에 의해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사업 파트너들의 저항이다.

일반대중.혁신에 대한 반대는 일반대중에게까지 확산될 수 있다.혁신이 기존의 사회적,정치적 규범을 위협하는 기술혁신의 결과일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유전자 변형 식품을 만드는 몬산토사

by 100명 2005. 7. 27. 15:05
ㅇ 프로젝트가 목표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ㅇ 프로젝트 착수와 계획수립 및 위험관리에 대처해야 한다
ㅇ 프로젝트 포트폴리오에 대한 검토 및 조정이 필요하다
ㅇ 프로젝트 검토 및 감사를 수행하여야 한다
ㅇ 보유자원의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ㅇ 프로젝트 관리자의 개발 및 식별
ㅇ 프로젝트관리 프로세스를 수립하고 강화해야 한다
우리가 교훈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당해 프로젝트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프로젝트오피스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조직으로 어떤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프로젝트오피스의 장기적인 비전은 조직을 통하여 프로젝트관리 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프로젝트관리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다. 한때 프로젝트오피스는 경영층에서 즉각적인 결과를 요구할 때 수립되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 도달하기 까지는 부정적이고 간과되는 수년간이 걸려야 했다. 현실은 프로젝트오피스가 프로젝트 조직의 욕구에 높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욕구는 오래가지 못하고 곧바로 똑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비록 프로젝트오피스가 당해 프로젝트관리에 있어서 안정된 조직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장기적인 비전을 유지하기 까지는 즉각적인 결과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장기적인 비전을 유지하는 반면 빠른 결과를 제공하기 위한 7가지 비법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ㅇ 프로젝트가 목표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ㅇ 프로젝트 착수와 계획수립 및 위험관리에 대처해야 한다
ㅇ 프로젝트 포트폴리오에 대한 검토 및 조정이 필요하다
ㅇ 프로젝트 검토 및 감사를 수행하여야 한다
ㅇ 보유자원의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ㅇ 프로젝트 관리자의 발탁 및 개발이 필요하다
ㅇ 프로젝트관리 프로세스를 수립하고 시행해야 한다

<표 1. 목표를 이탈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경고사항>
ㅇ 부 적절한 프로젝트 계획
ㅇ 잘못된 업무분류 및 관리
ㅇ 보고 및 의사소통의 미흡
ㅇ 비 주기적인 프로젝트 회의
ㅇ 불 충분한 문서화
ㅇ 돌연한 프로젝트 일정 변경
ㅇ 혼란스런 조직
ㅇ 불 분명한 사업 목표
ㅇ 극도로 복잡한 프로젝트
ㅇ 증가하는 원가
ㅇ 너무 많은 프로젝트 회의
여기서 말하는 7가지 프로젝트관리 비법을 통해 프로젝트오피스가 가지는 철학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 단순함은 강함이요. 표준은 유연성을 제공하고. 일관성은 성공과 같다.
이들 원칙은 모순이 아니며 사실이다. 단순한 아이디어가 복잡한 것 보다 사용하기가 쉽다. 프로세스의 표준화는 프로젝트관리자가 중요한 사항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하며, 일관적으로 수행되는 훌륭한 프로젝트 관리는 프로젝트의 성공과 궁극적으로 조직의 성공을 가져온다. 7가지 기법 모두가 장기적인 비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행 되어야 한다. 그들 모두가 서로 연관관계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동시에 착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그 중 한가지를 시작해 보고, 이를 통해 프로젝트오피스에 대한 좋은 명성을 얻어 보자.
ㅇ 프로젝트가 목표를 이탈하지 않도록 한다
단기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프로젝트오피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첫번째 활동은 프로젝트가 목표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조직은 프로젝트가 목표를 이탈하게 하고 있다 : 어떤 조직은 그것을 알고 있는 반면, 어떤 조직은 그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정상에서 이탈한 프로젝트를 정상궤도로 되돌리는 것이야 말로 프로젝트오피스의 명예를 한층 더 드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조직에서 프로젝트가 목표를 이탈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면 표1의 프로젝트 이탈에 대한 경고사항을 알려준다.
어떤 프로젝트에 대해 프로젝트오피스가 목표이탈 프로젝트로 판정하였다면, 다음단계는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 이상의 목표이탈 프로젝트가 존재한다면, 프로젝트오피스는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 해야 할 프로젝트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주요 사업목표로 부과되어 있는 프로젝트는 경영층의 주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프로젝트가 어떤 문제에 처해 있다는 것만으로 프로젝트관리자가 프로젝트오피스의 도움을 반길 것이라든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대다수의 프로젝트관리자들은 프로젝트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일시적이거나 곧 해결 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들의 독단적이면서도 때때로 오만한 태도는 가끔 프로젝트를 실패로 이끄는 주역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우 프로젝트오피스가 관여하지 않는다면 많은 목표이탈 프로젝트는 회복이 불가능 해지고, 프로젝트는 재구성되거나 재 계획되어야 한다.
또한 프로젝트오피스는 목표이탈 프로젝트에 대한 상황과 분위기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많은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즉 프로젝트 내부의 의사소통 미흡, 사기 저하, 상위레벨의 업무수행 담당자들의 이직, 납기 지연, 통제 불가능한 범위, 원가 상승, 적용 불가능한 계획, 계속적으로 회의만 일관하는 프로젝트 조직원들, 불확신 상태에서 더욱더 상세한 자료만 요구하는 고객 등이다.
목표이탈 프로젝트를 정상 프로세스로 되 돌리기 위해서 프로젝트오피스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 첫째, 프로젝트오피스는 그 프로젝트를 평가해야 하며, 평가결과의 조치를 위해 프로젝트관리자에게 관련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간청도 하고 다소 위협을 주어도 프로젝트팀은 대체적으로 지쳐 있음으로 평가결과의 조치가 잘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둘째, 프로젝트오피스는 프로젝트팀이 만회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시행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컨설턴트나 전문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회계획은 다른 프로젝트의 업무를 고려하여야 하는바, 예정납기를 더욱 지연시킨다든가, 프로젝트 이해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지않도록 일정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이와 같은 해결방안이 성공할 수 있을 지라도 가끔 프로젝트는 어떤 시점에서 재그룹이라든가, 재 구성 및 재 계획을 위해 중지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
ㅇ 프로젝트 착수와 계획수립 및 위험관리에 대처해야 한다
많은 조직들은 이 세 가지 제약조건 하에서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목표이탈 프로젝트는 예외 라기 보다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1 온스의 예방이 1 파운드의 치료보다 더 가치 있다” 즉 프로젝트오피스는 만회가 요구되는, 향후 실패를 피하기 위해 무언가 하려고 하는 프로젝트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프로젝트는 밤 사이에 갑자기 실패하지 않는다. 그들은 통상 하루 정도는 걸려 실패한다. 가끔 프로젝트가 표류 되는 원인을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가벼울 수 있다. 프로젝트오피스는 어떤 징후를 계속해서 추적하기를 원하지 않고, 프로젝트 실패의 근원적인 원인을 찾으려 할 것이다.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출발한다면 성공의 가능성이 높다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치 있는 서비스를 통해 명성을 얻기 위해서라도 프로젝트오피스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즉시 착수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초기에 프로젝트오피스는 모든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서 프로젝트 산정과 위험관리를 포함하되단순한 프로젝트관리 프로세스를 제시해야 한다. 프로젝트오피스는 프로젝트관리자가 프로젝트 통제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 도구 및 기법을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제시한다. 프로젝트를 통제하고 또 조기 경고를 위한 도구는 프로젝트 계획단계에서 개발되어 지속적으로 회의 등을 통해 검토되어야 한다. 프로젝트 계획단계에서 개발된 것은 어떤 것도 프로젝트 시행단계에서 무시되어서는 아니 된다. 성공의 열쇠는 프로젝트 통제에 적용되는 필수도구의 최소화와 단순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젝트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잘못되고 모순된 프로젝트 산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상향식 산정방식에 따른 WBS의 사용은 프로젝트에 대한 일관된 산정이 가능한 단순한 방법이다. 프로젝트 산정 프로세스에 따라 프로젝트오피스는 위험발생 확률과 발생결과를 비교할 수 있는 단순한 위험관리 프로세스를 제시해야 한다. 프로젝트 초기단계에서 프로젝트 위험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일이다. RAID 란 약어를 사용하는 것은 프로젝트관리자에게 위험(Risk), 가정(Assumptions), 사건(Issue), 정의(Definition)를 생각하게 한다. 더욱이 프로젝트오피스는 프로젝트 조직으로 하여금 프로젝트 산정과 위험관리에 사용할 S/W 패키지를 조사하고 또 적용을 유도해야 한다.
ㅇ 프로젝트 포트폴리오에 대한 검토 및 조정이 필요하다
프로젝트오피스는 프로젝트 포트폴리오에 대해 주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다수 프로젝트관리의 주요 포인트로서 포트폴리오는 프로젝트 발의단계부터 완료단계까지 프로젝트오피스 업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프로젝트오피스는 전체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프로세스를 개발하던가, 아니면 현재의 프로세스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야 된다.
포트폴리오 관리 프로세스에는 두 분야가 있는데 프로젝트 선정과 포트폴리오 검토이다.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프로세스를 개발하기 위한 첫번째 도전은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가 존재하고 있으며, 어떻게 발의 되었는가를 아는 것이다. 프로젝트 우선순위 선정에 있어서 프로젝트가 어떻게 선정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장 좋은 사례에 따라 보완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한 신중한 방법중의 하나이다. 또한 프로젝트오피스는 프로젝트 선정에 대해 어떤 대안과 IT조직이나 사업 운영부서의 고참직원으로 구성된 검토위원회 등을 제시해야 한다. 프로젝트 선정 및 검토분야는 가끔 정책적일 수 있다, 따라서 프로젝트오피스는 신중하게 이 도전에 접근해야 한다.
대부분의 조직은 프로젝트 선정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일관된 검토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프로젝트오피스는 행정적인 지원을 해야 하며, 프로젝트오피스 책임자는 포트폴리오 검토회의를 분기별로 주관해야 한다. 이와 같은 회의에서 각각의 프로젝트관리자는 프로젝트 정보를 수집하고 요약하여 검토위원회에 발표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계획 대비 현황을 확인하여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전체적인 프로젝트 포트폴리오는 그 조직에 가장 큰 투자회수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될 수 없다면, 검토위원회는 프로젝트를 연기 또는 종료하든가, 아니면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프로젝트의 종료 또는 연기에 따라 포트폴리오에서 진행 프로젝트 수를 감소 시키는 것은 다른 프로젝트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조직의 명예를 개선 시킬 수 있다.
ㅇ 프로젝트 검토 및 감사를 수행하여야 한다
프로젝트 검토 및 감사는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검토와 다르다. 프로젝트오피스는 프로젝트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해 프로젝트 검토 및 감사의 제안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프로젝트오피스는 잠재적인 재난에 대해 조기 경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실패에 대해 운명적인 것처럼 틀에 박힌 행동을하는 것은 프로젝트관리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1996년, 영국의 Stephen Flowers가 발간한 “SW 실패 : 관리실패 ? 놀랄만한 이야기와 주의사항” 참조)
프로젝트 검토는 계획단계에서 시작하여 프로젝트 추진과정에서 계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계획단계에서, 당해 프로젝트에 직접 관여하고 있지 않는 전문가로 구성된 검토팀은 가치 있는 식견과 방향을 제시 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로젝트 검토 및 감사는 프로젝트의 취약성이 있는 초기단계에서 더욱 빈번히 시행되어 저야 하며, 이것은 프로젝트계획에 포함되어 프로젝트에서 시간을 할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들 검토는 프로젝트관리자를 핍박하려 해서는 아니되며, 그를 도와 주도록 되어야 한다. 경험에 따르면, 몇몇 조직에서는 과거 프로젝트 교훈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지 않음으로, 결과적으로 계속적인 오류와 전철을 밟게 된다. 프로젝트가 진행됨에 따라 그 검토는 월 단위에서 분기 단위로 변경 될 수 있다. 검토 및 감사로부터 얻어지는 교훈은 다른 프로젝트 관리자들에게도 전파되어 져야 하며, 프로젝트관리 과정이나 교육과정 및 교육훈련 계획에서 보완되어야 한다. 덧붙여, 프로젝트오피스는 이들 교훈을 홈페이지에 띠워야 한다.
ㅇ 보유자원의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조직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딜레마는 프로젝트 계획에 따라 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술인력의 부족이다. 이것은 특히 IT조직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프로젝트 수의 증가와 숙달된 프로젝트관리자의 부족으로 더욱 더 악화상태에 있다. Y2K문제에 대한 솔루션으로 IT 지원을 포함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대부분 이었다. 많은 조직에서 각 조직원은 그들의 IT조직에 대한 확신에 참기 어려운 곤혹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그들의 프로젝트가 왜 완수될 수 없는 지에 대한 원인 보다는 결과를 원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관리자는 요구되는 기술을 보유한 충분한 자원이 적기에 수급 되지 못하는 것이 프로젝트 실패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로젝트의 주요 비용은 인건비로서, 그것은 조직원 확보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정보 주간지에 발표된 연구보고서에서는 IT 프로젝트 예산의 75%가 인건비라고 말하고 있다. 비록 직원 인건비가 건축이나 비행기 제작 프로젝트에 비해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다 잘 관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매트릭스 조직관리는 부족한 인적자원에 대한 조치방안으로 제공되었으나, 그것은 중요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수 프로젝트 환경에서, 매트릭스 조직관리는 인적자원에 대한 중앙집중 통제 없이 적용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조합해 보면, IT조직의 40%가 사업 목표와 무관하게 일하고 있었다는 최근 Cutter Group의 조사 결과에서 알 수 있다(Cutter IT Alignment Survey, June 1998).
요약해 보면, 대다수의 조직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굉장한 수의 자원이 그 조직에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는 반면, 인적자원의 부족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보다 좋은 통제의 필요설을 지적해 주고 있다.
다수 프로젝트 환경에서 그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하다.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인한 경쟁은 매우 예민해 질 수 있다 ; 어떤 프로젝트관리자는 자원을 비축하려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프로젝트관리자는 기술인력을 찾기 위해 허둥지둥하거나 필요한 기술인력 없이 그대로 수행하기도 한다. 프로젝트오피스는 프로젝트 업무에 유용한 인적자원을 중앙적 견지에서 통제함으로 인해 그 조직에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유용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통제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적인 업무이다. 회사의 정책은 실질적인 쟁점들을 희석 시킬 수 있으며, 그것은 잠재적인 문제로 발전 될 수 있다. 프로젝트오피스는 정확하고 확실한 사실을 가지고 상위 경영층을 설득하여 중앙집중 관리되고 있는 프로젝트 보유자원이 신중하게 결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표 2는 프로젝트오피스가 수립한 절차를 나타내고 있으며, 어떤 결정은 중앙적으로 통제되는 인력 DB를 가지고 진행하게 된다. 유용한 인적자원의 분석 없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정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할 수 있다.
ㅇ 프로젝트 관리자의 발탁 및 개발이 필요하다
일관된 프로젝트관리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프로젝트오피스는 기존의 프로젝트관리자와 미래 프로젝트관리자의 개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프로젝트오피스는 장기적인 비젼을 유지하고 단기적인 결과를 얻음므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프로젝트오피스는 우선적으로 프로젝트관리자의 발탁에, 다음에 그들의 개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프로젝트관리자의 발탁과 개발은 일지기 진행되어야 하는 장기적인 비젼이다. 프로젝트관리자를 발탁하고 그들의 개발에 관심을 두는 것은 대다수의 프로젝트관리자가 사업단위에 속해 있는 어떤 조직에 있어서는 또 다른 정책으로 굉장한 쟁점이 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인력 및 교육부서에서도 잠정적인 쟁점으로 될 수 있다.
많은 조직은 문제 있는 프로젝트관리자는 너무나 비용을 발생시켜 회사의 재정이 안정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교육계획과 작업장 현실에는 어떤 갭(Gap)이 있다. 이와 같은 갭을 없애기 위해 많은 회사는 프로젝트관리자가 단기간에 프로젝트관리 학습곡선을 급상승 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프로젝트오피스는 교육을 제공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교육지도자는 개개인의 개발욕구가 달성될 수 있도록 교육계획을 강화한다. 얼마나 많은 교육이 요구되는가 하는 것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교육에는 공식적 및 비공식적인 과정이 있다. 비공식적인 교육과정은 프로젝트관리자와 1 : 1 토의 방식이다. 또한 공식적인 교육과정은 모든 프로젝트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어떤 과제를 토의하는 클래스와 유사한 형태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프로젝트과정과 훈련을 강화하게 되고, 주기적으로 프로젝트 관리자들을 평가할 수 있게 된다. 프로젝트오피스는 경영층에 교육결과 보고서를 제출한다.
Project Manager Development Program
OJT
OJT
Job Mastery
PMP Certification
Basic PM Course
OJT
OJT
OJT
OJT
Advanced PM Trainning
PM Simulation

Pre-Certification Trainning
Mentoring
Project Manager Trainning
Project Team Trainning
Tool Trainning












Exhibit 3 Here’s a progressive project manager development program that is
managed by the project office

프로젝트오피스는 진도보고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식의 교육이 되지 않도록 계속 감시를 해야 한다. 교육을 하고 있는 곳을 확인하는 것은 효과적이다. 주기적으로 프로젝트오피스는 프로젝트관리자에게 그들의 교육에 대한 효과 및 개선분야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프로젝트오피스는 인력이 많지 않거나, 훈련부서가 없는 조직에서는 프로젝트관리자 개발 활동에 더욱 크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표 3은 진보적인 훈련과 개발계획의 예이다.
덧붙여, 프로젝트오피스는 조직에서 직원들의 프로젝트관리 훈련을 시행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프로젝트오피스는 이와 같은 역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행한다. 예를 들어, 교육훈련은 교육훈련부서에서 제공되는 교육과정을 개발하기 위해 훈련부서와 같이 일을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대안으로 외부의 기관에 과정개발 및 교육자료를 의뢰 활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프로젝트오피스는 조직에서 프로젝트관리자가 성공의 열쇠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그것은 그냥 방치할 것이 아니며, 공동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대부분의 회사는 그들의 프오젝트관리자가 회사 성공의 열쇠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즉 그들은 프로젝트관리자에게 적정 대가를 지급하지 아니하던가, 또는 필요한 보상을 하지 않던가, 아니면 프로젝트관리자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Fortune誌(Thomas Stewart’s ‘Planning a Career in a world Without Managers’ 20 March 1995)는 프로젝트관리를 경력경로 중의 하나로 선택 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 Tom Peters는 그의 저서 ‘Liberation Management(Knopf, 1992)’에서 프로젝트관리는 21세기의 성공과 조직생존의 열쇠라고 암시하고 있다. 명백히 프로젝트관리는 오늘날 혼돈의 시대에서 효과적인 경영의 굉장한 접근방식을 제공하고 있다. 프로젝트오피스는 그들이 살아 남기 위해 고군 분투하는 것과 소용돌이 속에서도 성공하여 올바르게 될 수 있도록 그 조직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ㅇ 프로젝트관리 프로세스를 수립하고 강화해야 한다
프로젝트오피스에 의해 감리된 효과적인 프로세스는 조직의 프로젝트관리 환경의 돛이 될 수 있다. 그 프로세스는 프로젝트의 선정, 발의, 계획, 시행, 및 완료를 포함하고 있다. 이 프로세스는 교육과정 및 교육계획의 기준이 된다. 그것은 조직개선의 최고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프로세스로서 프로젝트를 통제하는 주요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당면한 문제점들에 대한 조기 경고를 줄 수 있어야 한다.
프로젝트관리자는 400페이지의 프로세스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프로젝트관리 도구 및 기법은 단순하다. 그것을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원인이 될 것이다. 이들은 복합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단순한 도구이다. 프로젝트관리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은 그 첫번째 단계이며,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다. 그 프로세스의 시행은 프로젝트관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상위 경영층의 지원이 요구된다. 모든 프로젝트관리자가 프로젝트오피스와 함께 그들의 프로젝트를 조정하고 그 프로세스에 따라 보고하기 위해 요구하는 것은 시행에 대한 장기적인 방향인 것이다.
프로젝트오피스는 단순 프로세스의 반복적용이 결과적으로 더 좋은 프로젝트 결과를 가져 오도록 지속적으로 독려해야 한다. 또한 프로젝트오피스는 모든 프로젝트팀이 프로세스 시행을 위해 요구되는 S/W 및 H/W를 보유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프로젝트오피스가 다수 프로젝트를 지원토록 책임을 지고 있다면 아주 주요한 일이다. 프로젝트오피스는 사전에 의사소통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프로젝트오피스 정보를 포함하는 프로젝트 Web Page를 수립하는 정도으로 충분하지 않다. 의사소통계획이 일관된 프로세스 및 교훈의 가치가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프로젝트오피스는 모든 프로젝트관리자에 대한 방송망을 구축하고, 새로운 정보와 교훈 그리고 템플릿과 도구를 제공해야 한다.
프로젝트오피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그 프로세스의 사용을 주장해야 한다. 그것은 프로세스를 위한 프로세스가 되어서는 아니 되며, 산출물 및 결과에 초점을 둔 프로세스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Gartner Group 연구보고서 “Gartner’s Richard Hunter at the 1997 ABT Leadership Conference in Chicago”는 프로젝트관리를 엄격하게 함으로서 프로젝트 재난의 발생 확률이 떨어진다고 하였다. 그 연구보고서는 프로젝트관리 프로세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많은 조직들은 프로젝트오피스를 설립하기 위한 노력과 논쟁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한 프로젝트관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개선을 지속적으로 시행코자 노력하고 있다. 이 논문이 나타내고 있는 대부분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7가지의 비법이 내부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프로젝트오피스는 사전에 장,단기 계획을 수립하여 조직으로 하여금 그의 전략적인 사업목표를 수행토록 하는 동시에 프로젝트관리를 개선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방법으로 이 7가지 비법을 실행하는 것은 사업단위와 IT 조직 및 프로젝트오피스를 위한 “Win-Win”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by 100명 2005. 7. 26. 22:39
신사업 추진의 성공방안

김창현 / 주간경제 762호 2004.01.14

디지털 컨버전스가 산업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에 따라 신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도전없이는, 기존 사업의 연속성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선점하지 않으면 낯선 경쟁자가 기존 시장을 잠식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컨버전스 시대의 생존 요건인 신사업 추진의 성공 방안을 살펴본다.

게임기 만드는 노키아, TV 만드는 HP, 인터넷에서 음반을 파는 Dell, 영화 제작자 소니 까지... 기업들의 변신이 대단하다. 왜 이들 기업들이 이전과는 성격이 상이한 사업으로의 진입을 선언하게 된 것일까?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 같이 기존 사업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하면 기존 명성에 흠집을 낼 수도 있는 생소한 부문에 대한 사업 추진의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신사업 추진을 일상적 경영 활동으로

그러나, 막상 이런 결정을 내린 기업들은 결코 이러한 신사업 추진이 기존 사업 방향과 궤를 달리하는 돌연변이적 선택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HP사는 TV 시장 진출을 신사업 개시의 의미보다는 자사의 디지털 전략을 보완하기 위한 차원의 변화로 해석해 달라고 주문했다. 디지털화라는 큰 흐름에 몸을 싣기 위한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 결코, 본업과 관계 없는 사업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노키아의 N-Gage(게임기) 사업이나 소니의 콘텐츠 사업도 무리한 신사업 추진 보다는, 휴대폰의 멀티미디어화와 방송의 양방향화라는 기술 변화를 주도하기 위한 기존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되는 분위기다.

이들 기업들의 변화를 보면서 다각화가 좋은 것이냐 집중화가 좋은 것이냐는 문제로 논쟁을 다시 벌이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디지털 컨버전스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기존 사업과 신사업, 관련 사업과 비관련 사업의 구분 자체가 의미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신사업 추진의 역량이 기업의 획기적 성장을 위해 추가적으로 보유해야 하는 역량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신사업 추진과 이를 위한 역량 확보가 기존 사업의 유지, 더 나아가 생존을 위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고 기업의 DNA로 체화 되어야 하는 필수적 역량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사업 추진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기존 시장에 안정적 지위를 구축하고 있는 대기업 일수록 신사업 추진이 더 어려울 수 있다. 기존 사업을 통해 체득된 성공 경험이 오히려 신사업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사업 추진에 있어 실수를 피할 수는 없지만, 실패의 확률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인가?


사업의 본질을 파악하라 - 사업 모델의 재검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사업의 본질을 철저히 파악하는 것이다. 기존 사업 경험이 신사업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선입견으로 작용해 신사업이 실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 전자 업체의 게임기 사업 진출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마쯔시타, 산요 등 대표적인 일본 전자 기업들은 게임 산업을 미래의 성장산업으로 인식하고 게임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을 제외하면 일본 전자업체의 게임 사업은 대부분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마쯔시타와 산요의 3-DO, NEC 가전의 PC-FX 기술, 히타치의 하이-새턴은 모두 일본 전자 기업들이 게임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도전했지만 실패한 제품들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 전자 기업이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게임사업에 적용했다는 데에 있다. 전통적으로 전자 메이커들은 비용을 토대로 가격을 산정하고 하드웨어 판매에서 이익을 내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게임 사업의 논리는 달랐다. 비용을 토대로 하드웨어 가격을 산정하면 실패하는 것이 게임 사업의 속성이었다. 하드웨어는 무료로 주고서라도 시장을 넓히고, 그 기반위에서 소프트웨어 판매에서 이익을 내는 비즈니스 모델이 게임 사업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완전한 성공이라고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 달랐던 점도 여기에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출시한지 6달여 만에 399달러에 이르던 하드웨어 가격을 299불로 인하하는 결정을 내렸다. 6달 동안에 폭발적인 매출 성장으로 고정비를 회수 했기 때문에 가격 인하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상황은 오히려 반대였다. 400불 가까운 비용을 지불하고 하드웨어를 살 수 있는 매니아 층의 소비가 소진되고 나자 플레이 스테이션의 판매는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기 있는 소프트웨어가 출시되었지만 그것이 판매를 촉진시킬 수는 없었다. 이때, 구타라기 겐을 비롯한 소니의 이단아들은 전격적인 가격 인하 결정을 내렸다. 문제가 발생한 곳은 소니의 본사였다. 현재 적자인 사업에서 가격을 또 인하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시뮬레이션이나 돌려보고 그런 결정을 내렸냐는 성토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판매 중인 모델을 제품 변경 없이 가격을 내리는 것은 소니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구타라기를 비롯한 신사업 추진 주체의 의지는 확고했다. 플레이 스테이션을 밑지고 파는 것은 초기 단계이기 때문이며,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주저하다 시장을 놓치면 더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되고 사업의 미래가 송두리째 날라간다는 것이었다. 결국, 기존 모델과 성능을 달리하여 저가 모델을 내고 가격을 인하하는 데서 합의점을 찾았고 플레이 스테이션은 새로운 성장의 모멘텀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게임 산업에서 하드웨어의 가격은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수익 모델의 관점이 아니라, 비즈니스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결정하는 인프라 구축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 접근방법 이었던 것이다.


차별화 - 게임룰을 바꿔라

그러나, 신사업의 본질을 철저히 파악하고 이를 따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만으로는 기존 경쟁 업체와 차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업의 본질을 파악했다면 후발 사업자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게임룰을 바꾸어야만 한다.

사실, 사업의 본질을 철저히 파악하는 것과 게임룰을 바꾸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명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업의 본질을 파악하다 보면 새로운 혁신의 가능성이 소실되고, 적응하는데 급급해 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업과 고객에 대한 이해 없는 성급한 차별화는 가치가 없는 차별화, 비용만을 증가시키는 차별화로 전락될 가능성이 크다. 사업과 고객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고민 속에서 변화가 시도되어야만 고객이 가치를 느끼는 차별화가 가능한 것이다.

한국 휴대폰의 성공은 게임룰을 바꾸어 경쟁 구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한 대표적인 예이자 한국 기업에게 훌륭한 성공 체험이다.

한국 휴대폰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 모두 국내에서는 튼튼한 사업 기반을 가지고 있는 종합 가전 기업이었다. 그러나, 휴대폰 부문에서는 경험이 일천한 신참자였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시장은 휴대폰 부문에서 세계 최강자 중의 하나인 모토로라가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또한, 세계 시장은 뛰어난 연구개발력과 브랜드력을 바탕으로 에릭슨, 노키아, 모토로라와 같은 정보통신 전문 업체들이 3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위상이 약하고 원천 기술 부문에서 역량이 떨어지는 한국 기업이 선택한 카드가 바로 통신 서비스 사업자 전용 단말기였다. 노키아나 모토로라와 같은 대형 휴대폰 업체들이 자신들의 수익 극대화를 위해 개별 통신 서비스 사업자의 니즈에 일일이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을 활용한 차별화 정책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B2C 마켓 성격이 강했던 휴대폰 시장의 게임룰을 대형 기업 고객에 대한 밀착 서비스와 빠른 제품 개발력이 중요한 B2B 마켓의 그것으로 바꾸는 혁신적인 카드였다. 이는 이미 반도체나 LCD와 같은 핵심 부품 사업에서 한국 전자 기업이 성공 체험을 확보했던 경쟁과 유사하게 게임룰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 결과, 정보통신 부문에서 소비자 인지도가 낮았던 한국 휴대폰 기업들이 세계적인 통신 서비스 사업자와의 공동 마케팅으로 세계 시장에서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일반 소비자에게 까지 인정 받는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높은 로열티를 물고, 통신 사업자별로 별도의 단말기를 개발하는 비용을 부담하면서 어떻게 수익성을 확보하느냐였다. 즉, 대형 사업자들을 위한 매스 커스터마이제이션 (Mass customi-zation)의 경제성을 담보하는 수익 모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부분에서 한국 기업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진전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으로 저가로 시장에 진입해 대량 생산으로 코스트 구조를 차별화해 수익을 내던 기존 방식과 확실히 다른 접근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표준화와 대형화로 저 비용 구조를 만들기 보다는 한발 앞선 제품 출시로 평균 판매가격(ASP)을 높임으로써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동시에 수익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Set 기기에서 일본 기업보다 높은 가격을 받는 제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Critical Mass를 확보하라 - 가능성 있는 변방을 노려라

하지만, 신사업 추진에 있어 이러한 전략을 펼치기 전에 가장 먼저 부닥치는 문제는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고객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고객 확보는 경쟁력 확보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경쟁력 확보의 전제가 되기도 한다. 고객이 확보되지 않으면 부품 업체나 장비 업체 누구도 확실한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선행 기술이 적용된 부품을 경쟁 업체보다 먼저 제시해 줄 가능성도 없다.

그런 상황에선, 차별화 된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된다. 핵심 부품 업체나 주요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모두 자기들의 고객을 평가하는 냉정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잣대의 핵심은 고객의 고객 구조이다. 사업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확실한 잣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객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뒤늦게 뛰어든 후발 업체들이 어떻게 단기간에 최소 규모 이상의 고객 구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디서부터 고객 개척을 시작해야 할까?

몸집이 크고 단번에 업계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대형 고객을 잡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집이 큰 고객들에게는 이미 강력한 경쟁자들이 한발 앞선 제품과 서비스로 강한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 검증되지 않은 신흥 업체가 대형 고객을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차별화 된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하더라도 대형 고객이 기술과 제품을 평가하고 인증하는 기간은 통상 몇 년씩 걸려 사업 초기 임계 물량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오히려 대형 업체가 간과하고 있는 변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디지털 셋탑 박스를 판매하고 있는 휴맥스는 방송사와의 오랜 파트너십을 통해 노키아나 필립스와 같은 대형 현지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방송사 유통 셋탑 박스 시장 대신 시장 규모가 훨씬 작은 소비자 유통 시장을 휴맥스의 브랜드로 적극 공략했다. 시장 규모가 소규모 여서 경쟁자들의 견제가 약해 초기 시장 확보가 용이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소비자 유통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예전에는 만나주지도 않았던 대형 방송사들이 찾아와서 사업 상담을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변방의 시장을 공략할 때 유의할 점은 규모는 작더라도 기술적으로는 앞서나가는 고객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이다. 변방은 본격적인 전투를 펼쳐나가기 위한 훈련 무대 이다. 변방에서의 경험을 통해 중앙에서의 전투를 치룰 수 있는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나 제품 평가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까다로운 고객을 선택해 충분한 훈련 기간을 쌓는 것이 신사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업계에서 명성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초기 한국 휴대폰도 시장 규모가 소규모인 CDMA 서비스에 집중함으로써 노키아와 같은 대형 업체의 견제를 덜 받으면서 사업기반 확보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동시에, CDMA 표준을 따르는 한국 이동 통신 시장의 빠른 제품 개발 주기와 첨단 기술 흡수 속도 덕분에 폴더폰 이라는 새로운 컨셉을 고안해 낼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휴대폰 시장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너지 - 전제가 아닌 결과로

신사업을 추진하면서 특히 대기업이 빠지기 쉬운 함정중의 하나가 초기부터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를 전제로 사업을 전개해나가는 것이다. 기존의 유통망을 활용하거나, 기존 기술 기반 위에서 새로운 기술을 덧붙이는 형태로 사업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너지 활용방안이 자칫하면 오히려 소비자를 실망시키고 기존 사업과 신사업간의 브랜드 이미지 충돌 등으로 사업 실패로 이어지는 결정적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일례로, 중국의 대표적인 가전 기업인 하이얼과 TCL은 신사업이라 할 수 있는 휴대폰 사업 유통망 구축에 있어 다른 접근 방법을 선택했다. 하이얼은 신사업을 빨리 안정화 시키기 위해 기존 가전 유통망 위에 휴대폰을 추가하는 방식의 유통 전략을 펼쳤다. 하이얼의 브랜드 이미지를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방안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TCL의 방향은 달랐다. 휴대폰은 패션 상품이고 첨단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상황에서 가전 유통망을 활용하는 것이 사업초기 이미지 구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기존 가전망에 휴대폰을 얹을 경우 최종 판매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아직은 물량이 작은 휴대폰 판매에 주력하기 보다는 덩치가 큰 가전 제품 판매에 주력하는 결과를 초래해 오히려 신사업 안정화에 방해가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아직까지, 중국 로컬 휴대폰 업체들의 최종 성과를 판단하기는 이른 감이 있지만 현재까지는 TCL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최종 판매원에 대한 파격적 인센티브와 소비자에 대한 적극적인 추천, 시장으로부터의 빠른 정보 입수 등에 힘입어 TCL이 로컬 업체 중에서는 1,2위의 지위를 다툴 정도로 확실히 성장했기 때문이다. 반면, 하이얼은 아직 중국 로컬 업체 중에서도 7~8위권 정도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전자업체의 게임기 진출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가 그대로 보여진다. 1994년 일본 전자 업체의 게임기가 출시될 무렵 전자 업계의 관심사는 멀티미디어 였다. 차세대 게임기는 늘 그 중심에 있었다. 게임기가 멀티미디어로 가는 관문으로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본 전자 업체는 공공연히 자신들의 제품을 ‘멀티미디어 기계’로 선전했다. 마쯔시타는 3-DO 게임기를 공공연히 멀티미디어 기계라고 소개했다. NEC도 PC/FX의 장기 마케팅 전략의 핵심이 멀티미디어 PC 라는 점을 강조했다. 분명히, 게임기는 고성능의 컴퓨터이다. 엄청난 정보 처리 능력 때문에 멀티미디어 기계로도 팔 수 있다는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 기계들은 게임기로서 자리를 잡는데 실패했다. 문제는, 이들 업체들이 게임 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게임 매니아 들의 욕구를 잘못 파악 했다는 데에 있다. 새로운 하드웨어를 구입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시험해 보고 이를 평가하는 매니아 들이 원하는 것은 멀티미디어가 가능한 게임기가 아니라 최고의 게임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반면, 소니의 접근 전략은 달랐다. 소니는 플레이 스테이션이 오직 게임기임을 강조하면서 소비자와 관련 업계의 신뢰를 얻으려는 전략을 펼쳤다. 결국, 게임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최고의 게임기를 제공하면 팔릴 수 있다는 게 소니의 전략이었다. 소니가 게임 사업 추진 주체를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하였고, 게임 부문에서 성장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물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진화하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3에는 막강한 하드드라이브가 장착될 것이고, 영화와 음악을 저장하고 이를 시현할 수 있는 기능까지 갖추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플레이스테이션3를 엔터테인먼트의 센터가 되게 한다는 것이 가전 왕국 소니의 복안임에는 틀림없다. 중요한 것은, 신사업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이다. 신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이상 신사업 자체가 사업의 중심이며 거기서 승부를 내야 하는 것이다. 시너지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개별 사업이 경쟁력을 확보한 상황 속에서 추가적인 고객밀착과 진입장벽의 수단은 될 수 있으나, 결코 사업 추진의 전제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프론티어’정신을 되찾아라

사실, 한국 기업만큼 신사업 추진에 의욕적이고 그 성공률이 높은 기업도 드물다. 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고 끝까지 밀어붙여서 성공시키고야 마는 한국 기업의 ‘프론티어’정신이야 말로 한국 기업이 가진 장점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빠른 기술 변화와 함께 그 파급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전에 비해 다음 세대의 주력 상품에 대한 그림이 쉽게 잡히지 않게 되고, 한국 기업도 대형화 조직화 되면서 이전 같은 도전적 신사업 추진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또한, 자본 시장의 세계화로 섣부른 신사업 추진이 투자자들의 동의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컨버전스의 가속화로 지속적인 신사업 추진 없이 기업의 연속적인 성장을 기대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전처럼 누군가 해 놓은 것을 모방 하는 것으로 신사업을 추진하던 시대도 지나갔다.

우리 스스로의 눈으로 시장을 읽어내고 사업기회를 찾아내는 감각과 이를 행동으로 실현할 수 있는 ‘프론티어’정신을 회복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변화된 환경에 맞게 사업모델을 재구축하고, 현상을 넘어서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해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도전적 인재를 찾아내고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제공하고 전체 차원에서 이를 관리하는 경영 시스템을 갖추어 나가는 준비가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LG경제연구원]
by 100명 2005. 3. 14. 17:54
新사업 성공 기업 5選
새 사람들에 신사업 맡겨
젊은 COO들 ‘강력한 2등’ 전략으로 효율성 높여


오리온-과자에서 엔터테인먼트로

초코파이로 유명한 오리온은 제과업뿐 아니라 유통·미디어·영화·엔터테인먼트 등 16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이다. 그 모태는 1956년 창업주인 고(故) 이양구 회장이 설립한 동양제과. 담철곤 회장이 진두지휘하는 이 회사는 이제 ‘먹는 즐거움에서 보는 즐거움까지’ 추구하는 토털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탈바꿈했다.

오리온은 2001년 9월 이전까지 동양그룹에 속했다가 사업 확대를 위해 분리되면서 지금의 그룹 이름으로 새출발을 했다. 90년대 초 2천억∼3천억원대에 불과하던 외형이 2002년 말 기준으로 매출 1조2천여억원에 달하는 중견그룹이 됐다.

오리온은 90년 편의점 바이더웨이를 시작하면서 유통 사업에 뛰어들었고, 94년에는 케이블TV 투니버스로 미디어 사업에 참여했다. 이후 95년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인 베니건스, 99년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메가박스, 2001년에는 공연사업에도 손을 댔다.

최근에는 스포츠토토까지 인수해 토털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모양새를 갖췄다. 지난해 신사업에서 일어난 매출은 2천억원이 넘는다. 본업인 동양제과의 매출 5천억원에는 못 미치지만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금은 오리온 그룹의 양대 축이 제과와 엔터테인먼트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지만 처음 신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전통적인 과자회사가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오리온의 최고경영자(CEO)인 담회장이나 이화경 사장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신규사업을 위해 아예 기존 조직과는 무관한 새 사람을 썼다. 현재 신사업 부문을 맡고 있는 김성수(온미디어·41), 문영주(롸이즈온·40), 김우택(메가박스·39) 본부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젊은 본부장들로 하여금 새 사업을 주도하게 했다. 회장이나 사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젊은 본부장들이 낸 아이디어가 오리온의 신사업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젊은 본부장을 중심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들 신사업이 시작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90년대 중반 신규사업팀에 소속돼 새 아이템을 모색하면서 20여억원을 소비했다.

연예 매니지먼트·커피숍·레스토랑 등은 대표적으로 실패한 사업들이다. 그러나 담회장은 이를 질책하지 않고 담담하게 수용했다. 허비한 돈과 경험은 고스란히 사람에게 쌓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제대로 되는 일도 없이 돈만 낭비했지만 회장님과 사장님이 크게 문제삼지 않았어요. 지나고 보니 그것들이 신사업의 자양분이 된 것 같습니다.” 롸이즈온 문영주 대표의 회상이다.

신사업이 비교적 안착한 지금까지도 오리온에서 지켜지는 규칙이 하나 있다. 제과 인력과 신사업 인력 간의 교류가 없다는 것. 관리나 지원 쪽을 제외하고는 제과 인력이 신사업부문으로 간 예가 없다. 비즈니스의 성격이 워낙 다르기 때문이다. 담회장도 “그룹의 통합 정체성보다 개별회사의 개성을 살려야 그룹이 살아난다”는 점을 늘 강조하고 있다.

외형적 1등보다는 내실 있는 ‘강력한 2등 전략’을 쓴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시청률과 광고 수주액 분야에서 케이블 TV업계 1위인 온미디어를 제외하면 메가박스나 베니건스는 규모 면에서 모두 업계 2∼3위권이다.

하지만 좋은 위치 선정과 고급스런 인테리어로 둘 다 멀티플렉스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가지게 됐다. 오리온보다 자금력이 뛰어난 CJ나 롯데를 상대로 경쟁하기 위한 전략이다.


신사업의 주역들

김성수 본부장과 문영주 본부장은 둘 다 제일기획 출신. 1991년 신규사업 아이디어 뱅크팀에 입사하면서 오리온그룹과 인연을 맺게 됐다. 김본부장은 오리온의 첫 케이블TV 채널인 만화채널 ‘투니버스’ 설립을 시작으로 미디어 브랜드 ‘온미디어’를 발족했다.

미국 캐피탈 그룹과 타임워너로부터 대규모 외자를 유치해 온미디어가 국내 최대 프로그램 공급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9개의 채널을 갖춘 온미디어는 케이블TV 채널 점유율 35%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문본부장은 95년부터 오리온 신규사업부 외식사업 담당 팀장을 맡아 미국 베니건스 브랜드를 도입하고, 이후 사업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총 18개 매장을 오픈했으며, 2002년에는 매출액 6백20여억원을 기록했다. 2001년에 총 1백억원을 투자한 ‘오페라의 유령’ 공연으로 매출액 2백억원을 기록하며, 한국 뮤지컬을 산업화의 단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오리온그룹의 영화 관련 사업을 총책임지고 있는 김우택(오른쪽) 본부장은 오리온그룹의 최연소 임원이다. 96년 종합상사 동양글로벌에서 근무하다 97년 케이블 만화채널 투니버스 부장으로 오리온 그룹과 첫 인연을 맺었다. 미디어플렉스 본부장 시절 세계 최대의 영화관 체인업체인 LCI로부터 2천만 달러의 외자를 유치, 메가박스 씨네플렉스를 설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실패 딛고 ‘딤채’ 탄생

경영자 신뢰가 큰 힘… 김치 알려고 1만 포기 담기도

위니아만도-차량 부품에서 가전으로

위니아만도는 사람들에게 김치냉장고와 에어컨으로 잘 알려진 회사다. 특히 ‘딤채’의 경우 김치냉장고 시장 점유율 1위일 뿐만 아니라 브랜드 파워에서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전신인 만도기계 시절에는 상용차 에어컨이나 히터·라디에이터 등을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는 차량용 공조부품 전문회사였다.

알짜 회사였지만 위니아만도에도 고민거리가 있었다. 부품을 생산하는 하청회사였기 때문에 자동차 산업이 ‘기침’을 하면 ‘감기몸살’을 앓아야 했다. 또 최종 생산품(end item)을 생산하는 회사가 아니라서 브랜드를 알리거나 주가를 관리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경영진에서는 고민 끝에 업종 변경을 시도했다. 일단 신사업 ‘1번 타자’는 에어컨으로 잡았다. 공조회사의 핵심기술을 그대로 응용할 수 있었기 때문. ‘위니아’라는 브랜드로 출발한 에어컨 사업은 그런대로 순항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에어컨이 여름 상품이기 때문에 1년 중 반은 공장을 놀려야 했던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겨울용 아이템 개발에 들어갔다. 온풍기·가습기·보일러·식기세척기·자판기 기계 등 여러 아이템을 개발하고 판매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한국 문화에 맞지 않거나 기존 업체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곱명의 본부장 중 한사람으로 김치냉장고 사업을 맡고 있던 황한규 사장은 “실패했을 때 경영자의 신뢰가 큰 힘이 됐다”고 회상한다.

김치냉장고는 틈새 제품이라 경쟁자도 별로 없었다. 김치라면 국민적인 음식이기 때문에 소비층도 두터운 편이었다. 문제는 김치의 맛을 어떻게 살리는가였다. 이때부터 김치냉장고가 아니라 김치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1만 포기 이상 김치를 담았고, 점심 때마다 김치 반찬에 라면을 먹기도 했다.

95년 제품을 개발했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부품회사였던 탓에 마케팅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마케팅 부서조차도 없었고, 마케팅에 드는 비용에도 인색했다. 일반 소비자를 상대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마케팅 부서를 만들고 외부에서 마케팅 인력들을 수혈했다. 컨설팅도 받았다. 부족한 역량은 과감히 외부에서 수혈한 것이 주효한 셈이다.

[인터뷰 황한규 사장]“아파트 부녀회장 통해 테스트 마케팅”

신사업으로 가전을 생산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위니아만도는 원래 부품회사였기 때문에 마케팅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다. 일반 소비자들을 상대하는 제품은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파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다행히 김치냉장고는 우리가 선발주자여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기존에 없던 제품이라 설명하기 어렵지 않았나.

“그래서 테스트 마케팅을 했다. 일단 써보고 마음에 들면 사라는 것이다. 수도권의 소비자 단체, 요리사, 정·재계 여성 인사와 서울 시내 대단지 아파트 부녀회장까지 포함시키니 3천명 정도 됐다. 이들을 대상으로 승부를 걸었다.”

실패도 했을 텐데, 회사 내에서 눈총을 받지는 않았나.

“‘딤채’를 내놓기까지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다. 조직 내에서도 나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사장님이 내 말을 끝까지 믿어줘서 좋은 결과를 이룬 것 같다.”

‘딤채’ 는 출시하자마자 잘 팔렸나.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정용보다 업소용으로 생각하고 대용량으로 제작했다. 하지만 주방아줌마를 두고 있는 업소에서는 그때그때 담아 먹는 것이 비용상으로도 저렴했기 때문에 굳이 김치냉장고를 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가정용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문제 개선하니 돈 돼”


건물의 ‘숨통’ 창문 공략… 조직·법인 별도 구성

이건산업-목재에서 창호로

한국에 ‘시스템 창호’라는 새로운 개념의 창문을 선보인 곳이 바로 이건창호다. 경쟁업체들도 지금은 다들 시스템 창문을 생산하고 있다. 창호 제품을 한단계 끌어올린 이건창호는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이 처음 시작한 사업이다.

합판가공 등 건자재 사업을 하는 이건산업은 88년 창호사업에 손을 댄다. 당시 이건산업은 건축자재 중에서 가장 낙후된 것이 바로 창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창문은 건물의 ‘숨통’에 해당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도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틈새를 공략키로 한 것이다.

이한우 이건창호 부장은 “회사 내에서 신사업에 대해 고민하면서 ‘건자재 중에서 가장 문제 있는 분야를 찾아 개선하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창호를 신사업으로 설정하면서 조직과 법인도 별도로 구성했다. 중간재 산업인 이건산업의 인력으로는 트렌드에 맞는 디자인이 생명인 창호사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장은 “그때만 해도 이건산업에는 임학과 출신들이 많았다. 하지만 창호사업은 건축이나 디자인이 꼭 필요해 아예 인력도 따로 뽑았다”고 기억했다.

이건창호 역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셈이다. 초기 시장 진입은 순탄한 편이었지만 90년이 지나 주택건설이 주춤해지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때 이건창호는 주택 외에 빌딩용 시스템 창호 쪽에 눈을 돌렸다.

다행히 93년 대전 엑스포를 기점으로 95년까지는 빌딩용 창호 시장이 살아났고, 그 뒤 3년 주기로 주택과 빌딩 시장이 번갈아 살아났다. 이부장은 “신사업이 성공적으로 런칭하더라도 몇번의 변곡점이 있다. 그때 어떻게 불씨를 살리느냐가 안착 여부를 좌우한다”며 지속적인 성장동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빵 매출 ‘본업’에 육박”

특급호텔의 노하우와 벤처 같은 유연함 결합

조선호텔-베이커리 사업 확대

지난해 조선호텔은 외식사업부문을 외식사업부와 베이커리사업부로 분리했다. 베이커리사업부의 외형이 커졌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에 베이커리사업부는 3백19억원의 매출 실적을 올렸다.

외형만 놓고 보면 ‘본업’인 객실부문(3백30억원)에 육박한다. 이 회사 박성호 베어커리사업부 마케팅팀장은 “베이커리사업부의 연말까지 매출 목표를 7백80억원에서 8백50억원으로 상향조정했다”고 말했다.

조선호텔이 베이커리사업에 적극 뛰어든 것은 96년 이마트 분당점에 ‘데이앤데이’를 입점하면서부터다. 객실과 외식사업이라는 호텔의 기존 비즈니스가 외형적인 한계에 봉착하면서 다양한 수익원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 관계사인 신세계와 손잡고 이마트에는 ‘데이앤데이’를, 신세계백화점에는 ‘달로와요’를 오픈했다.

베이커리사업부의 호조에 힘입어 최근 경기도 용인 1, 2 공장에 이어 충남 천안에 제3공장 기공식을 가졌을 만큼 활발한 투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과감한 인력 투자도 한몫 했다. 조선호텔은 국내 제빵기술사 1호인 김원복씨를 고려당에서 스카우트해 사업부장(상무)에 임명할 정도로 ‘새 식구 찾기’에 성의를 보였다. 김상무는 보란 듯이 불과 3년 만에 조선호텔 제과부문의 매출을 4배로 성장시켜 회사 측의 성의에 보답했다.

조선호텔이 ‘방’이 아닌 ‘빵’ 사업에서 이렇게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김상무는 올해 크게 히트한 찰개빵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으면서 “특급호텔의 전문적인 노하우와 벤처기업 같은 유연함이 결합됐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유행하는 것을 도입해 우리 입맛에 맞는 신상품을 내놓기까지 불과 3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정도면 대기업이지만 벤처기업 같은 유연함을 갖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고급 밀가루와 버터를 고집하는 특급호텔의 노하우를 살려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입맛을 잡았다.”


‘히트 CEO’ 만나 기사회생

기존 설비 이용할 수 있는 아이템 찾다 ‘곡물음료’ 착안

웅진식품-인삼음료에서 곡물음료로

‘아침햇살’ ‘초록매실’ 등 곡물음료로 유명한 웅진식품은 1976년에 태어난 회사다. 당시의 사명은 ‘미보산업’. 섬유를 제조하는 조그만 회사를 웅진그룹에서 인수했으며, 이듬해 웅진인삼으로 사명을 바꾸게 된다. 사명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의 주력 사업은 인삼관련 제품 판매였다. 그러나 시장규모가 미미해 인삼으로는 더 이상의 수익을 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당시 웅진인삼의 한해 매출 규모는 60억원대에 불과했다.

“공장 설비를 변경하지 않은 채 새롭게 개발할 수 있는 아이템은 없을까.” 웅진식품의 구원투수로 투입된 당시 조운호 웅진그룹 기획실장(현 사장)의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서양에서 병과 캔을 먼저 만들어 커피를 담아 팔았듯 우리도 병과 캔에 숭늉이나 매실차를 담아 팔면 그것이 음료 아닌가”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조사장 특유의 ‘용기론’(用器論)이다.

전통 마실거리에 대한 고민은 95년 10월 ‘가을대추’ 출시로 이어졌고, 이듬해에는 아예 회사 이름을 웅진식품으로 바꾸었다. 99년 1월 선보인 아침햇살은 제품을 출시한 지 10개월 만에 단일 브랜드로는 국내 음료사상 최단기 1억병 판매라는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회사 조규철 기업문화팀장은 “현재 웅진인삼 시절 판매하던 제품은 모두 철수했고, 당시 인삼제조기술을 적용한 ‘장쾌삼’과 ‘용홍삼’ 등이 명맥을 잇는 정도”라고 말했다. ‘곡물음료’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면서 60억원대 회사를 3천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중견 음료회사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대표 브랜드의 컨셉트와 이름이 대부분 조사장의 머릿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업계에서도 유명한 얘기다. 그는 일단 ‘판’을 벌이면 앞뒤 재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10년 안에 연 매출액 20조원을 돌파하겠다는 게 조사장의 포부다.


* 출처: Economist 706 호 2003년 09월 29일 (월)
by 100명 2005. 2. 23. 17:17
대학편입은 김영’ 이라는 말을 편입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정도로 김영학원은 현재 편입학원시장을 이끌어가는 선구자의 위치로까지 발돋음하였으며 ‘편입을 통해 희망을 만들고 희망이 이 사회발전의 기본이 된다’는 모토를 기본적인 사명으로 하여 편입 엑스퍼트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김영학원의 성장비결과 다양한 전략들을 SWOT분석을 통해 살펴보자.



2. 김영학원 강점(Stength)분석



김영학원이 현재의 인기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구체적인 비결들은 무엇일까? 김영학원만이 구사하고 있는 독특한 마케팅 전략과 강점들을 알아보자.



(1) 높은 브랜드 인지도(Brand awareness)




현재 편입학원 시장에는 김영학원을 비롯하여 대학로, 동성사, 이찬이, 강남, 박문각, 조기종, 유니넷, 동숭, 중앙, 체인지업, 탑 파이브, 21c 배형구 대학편입사 등 총 13 개 학원이 편입학원 시장에 진입해 있는 상태이며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근 4개 년간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편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가 될 정도로 김영편입학원은 편입학원시장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그동안 다른 편입학원이 구사할 수 없었던 김영만의 적극적인 Promotion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Promotion 효과는 단기적으로 머물지 아니하고 주로 Mouth to mouth 효과에 의해서 전달되는 정보들에 의존하여 구매의사를 결정하게 되는 학원가의 소비자들 특성상 좀 더 커다란 범위의 잠재고객들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브랜드 파워를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높은 합격율이다. 편입학모집에서 매 학기 전체 합격생의 약 80%를 김영 출신의 수험생들이 차지하고 있고, 창조(김영편입학원 산하 미대편입전문학원) 역시 수도권 편입합격생 3명 중 2명꼴로 자사의 합격생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이러한 높은 합격율은 학원선택시 소비자의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으로써 브랜드 인지도 향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장소를 가리지 않는 홍보전략이다. “ WITH KIMYOUNG ”이라는 문구를 레이 아웃(Lay - out)으로 하는 김영의 광고는 홈페이지 뿐만 아니라 학원광고로서는 보기 드물게 지하철 안, 대학내 게시판 등 다양한 장소에서 접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주요 대학(고려대, 서강대 등)들의 편입학 모집시 인터넷 원서 대리업무를 수행하여 김영편입학원은 편입학 수험생으로서 비켜갈 수 없는 과정이 되어 버렸다.



셋째, 다양하고 유익한 정보의 제공이다. 수험생 대부분이 수능 시험에 비해 편입에 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그들의 needs에 맞춰 시시각각 변화하는 편입학 변경사항, 각 대학별 편입모집 요강안내, 편입준비요령, 출제시험 경향 분석, 최근 기출 문제 등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매우 유용한 정보들을 홈 페이지, 월간 편입뉴스 등을 통하여 많은 수험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넷째, 언론을 통한 간접광고이다. TV나 신문 등 언론매체가 편입학 관련 기사를 다룰 경우 이에 관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제공함으로써 편입학원시장에서의 자사에 대한 신뢰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높은 브랜드 인지도 형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by 100명 2005. 2. 22. 15:58
대표적인 지식 거래 사이트는 무엇이 있나?



해피캠퍼스(http://www.happycampus.com)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에서 경영정보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2000년 3월 오픈한 해피캠퍼스는 대학 논문 및 레포트의 거래를 전문적으로 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대표적인 지식거래 사이트이다.



처음에는 포인트 제도를 도입한 무료 서비스로 시작한 해피캠퍼스는 2001년 초부터는 포인트를 현금환산 단위인 원으로 현금화하여 누적 포인트를 현금으로 거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요 고객이 대학생인 점을 감안해 신용카드 거래 이외에도 다날, 인포허브 등의 휴대전화 및 ARS 결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해피캠퍼스는 유료화를 단행하는 데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학술 지식 콘텐츠의 수집 및 거래량, 가입 회원수는 다른 경쟁 사이트를 압도했고 콘텐츠가 무료로 제공되기는 했지만 유료 거래와 비슷한 포인트 거래 방식을 취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심리적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특히 유료화에 돛을 단 결정적 조건은 대학생들의 구매 동기였다. 돈으로 사서라도 괜찮은 리포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객의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자료에 대한 가격은 처음에는 올리는 사람이 책정하지만 이후에는 거래량에 따라 자동으로 가격이 책정되는 시스템으로 자료의 가격은 건당 몇 백원에서 만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저작권, 자료의 정확성 및 전문성 등 자료와 관련해서 제기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해 놓았다.



우선 새로운 자료가 올라오면 10여명의 자료 검색원들이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쳐 해당 자료가 저작권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등록할 수 있게 해준다. 각종 연구소와 포털등에 비슷한 자료가 올라와 있으면 등록할 수 없으며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자료를 올리는 것도 제한하고 있다. 한 명이 1백건 이상 자료를 올릴 경우에도 등록을 일단 보류한다. 한 개인이 생산할 수 있는 지식의 분량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어느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지식은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해피캠퍼스의 진입 초기 마케팅 수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검색 포털에서 해당 키워드를 치면 상위에 등록될 수 있도록 콘텐츠를 좀 더 풍부하게 가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포스터를 곳곳에 붙이거나 전단지를 돌리는 일이었다. 타깃을 명확히 한 뒤, 돈 안 드는 게릴라 홍보를 전개한 것이다.



해피캠퍼스는 운도 좋았다. 2001년 에는 지식 경영이 기업을 중심으로 붐을 일으키던 때였고, 휴대전화 결제가 매우 흥미로운 거래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때였다. 게다가 학술 지식 콘텐츠를 인터넷으로 판매한다는 것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결국 해피캠퍼스는 이상의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하여2002년 12억원의 매출을 올린 데 이어2003년에 3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2004년에도 40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해피캠퍼스의 현재 취약점인 전문적인 자료를 강화하기 위해 삼성경제 연구소와 국립중앙 도서관, 대법원, 한국노동 연구원 등 전문기관 등과 제휴를 맺었으며, 향후 계속적인 제휴기관과 업체들을 확대해 갈 방침이다.







또한 해외시장 공략에도 적극적이다. 이미 중국과 일본에도 진출하여 중국 사이트는 회원수가 30만명으로 유사 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3개월 전부터는 유료화를 진행하여 수익 창출을 모색하고 있다. 앞으로는 사이트를 개편해 사진, 영상, 디자인 등 디지털로 표현되는 모든 정보를 거래할 수 있는 지식거래의 파워 시장을 형성할 계획이며 한·중·일 3개국의 지식교류가 가능한 ‘동북 아시아 지식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by 100명 2005. 2. 2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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