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CGV, 29일 일산점 오픈
입력 : 2007.03.26 09:59
CJ CGV17,05000.00%
기준일 주가(또는 지수) = 100으로 했을때, 종목주가와 KOSPI(또는 KOSDAQ)지수의 상대지수 그래프
[이데일리 양이랑기자] CJCGV(079160)가 오는 29일 일산 장항동에 일산점을 오픈한다. `CGV일산`은 아이맥스관, 스타관 등을 포함해 총 9개관 1957석 규모이다.

아이맥스관은 국내 멀티플렉스 중 최대 스크린(74평 규모)을 자랑한다. 스타관에는 박찬욱석·장윤현석·김원희석 등 일산 지역에 거주하는 감독과 배우들을 위한 좌석을 특별히 마련했다.

다음달 1일에는 `CGV천안`과 `CGV미아`가 동시에 문을 연다. `CGV천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인 전문회사 이노디자인이 처음으로 영화관 디자인에 참여해 화제가 되고 있다.
by 100명 2007. 3. 26. 22:53

극장에 감독 박찬욱 좌석 생긴다

CJ CGV, 3월 29일 CGV일산 오픈, 스타관에 설경구 유해진 좌석도 계획중

[ 2007-03-26 오전 11:51:31 ]

박찬욱 감독과 설경구를 위한 극장 좌석이 마련된다.

멀티플렉스 체인 CGV는 오는 29일 일산 점을 개장하면서 '스타관'에 박찬욱 감독의 고정 좌석을 마련한다. 또 장윤현 감독, 김원희 석도 마련했다. 이들은 모두 일산 일대에 거주하는 영화인들로 이들이 영화를 볼 때는 언제든지 이름이 새겨진 좌석을 제공할 예정이다.

평상시에는 이들을 존중해 비워 둔다고 CGV측은 밝혔다. 이밖에도 일산에 살고 있는 배우 설경구, 유해진 등의 좌석도 추진중이다. 지역 주민들과 역시 지역거주 영화인들간의 소통을 위한 기획이다. 실효성이 어느정도인지는 예측되지 않지만 국내 멀티플렉스 3사중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스타좌석제도다.

장항동 대형 테마 쇼핑몰 웨스턴돔 내 3층에 위치한 'CGV일산'은 IMAX관, 스타관 등을 포함해 총 9개관 1957석 규모다.

극장 안에 들어서면 마치 영화 스튜디오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한 'CGV일산'만의 독특한 인테리어도 눈길을 끄는 점.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은 지역적 특성을 고려, 자녀들에게 교육적인 체험 환경도 만들어주고 관람객들에게는 영화 속 캐릭터 등의 소품을 배치해 친숙한 느낌을 전할 예정이다.

한편 4월 1일 개장하는 'CGV천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인 전문회사 이노디자인이 처음으로 영화관 디자인에 참여해 화제가 되고 있으며 인테리어 컨셉을 ‘핑크’로 잡아 ‘색(色)다른 영화관’을 표방하고 있다.
by 100명 2007. 3. 26. 22:44
'날아라 허동구' 추억의 뱀주사위 놀이판, 극장의 계속된 주문에 싱글벙글
영화 <날아라 허동구> 뱀주사위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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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와이어) 2007년03월26일-- IQ60 아들의 초등학교 무사졸업 프로젝트로 2007년 따뜻한 흥행 봄바람을 예고하고 있는 영화 <날아라 허동구>(제공 쇼박스㈜미디어플렉스 / 제작 ㈜타이거픽쳐스 / 감독 박규태)가 이색적인 영화 홍보 전단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보통 영화의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극장에 비치된 전단들과는 색다르게 실제 뱀 주사위 게임판을 전단으로 만들어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며 벌써부터 네티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영화전단의 파격변신! 게임도 하고, 1석 2조의 재미!

극장에 비치된 전단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날아라 허동구>의 알록달록한 전단. 어린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뱀 주사위 놀이판이 맨 먼저 눈에 띈다. 최우혁과 정진영씨의 코믹한 스틸과 정겨운 캐릭터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게임판 이미지와 전단 하단에는 실제 주사위 도면이 삽입되어 있어 전단하나로 뱀 주사위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다. 또 게임판 전단은 추억 속의 딱지를 연상케 하는 두툼한 종이를 사용해 실제 주사위를 오려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되어 단순한 영화전단의 기능 뿐만 아니라 오락기능까지 갖추고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날아라 허동구> 의 게임판 전단은 4월 극장을 찾은 가족 관객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며 벌써부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전단 어디 었어요?”
네티즌 호응만발, 게임법을 직접 올리기도

극장에서 가족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게임판 전단은 오프라인의 관심을 넘어 온라인에서도 그 인기를 느낄 수 있다. <날아라 허동구>의 전단이 극장에 배포되고 얼마되지 않아 인터넷 사이트에는 하나,둘 게임판 전단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들이 올라오고 있다. 모 사이트 블로그에는 이 게임판을 이용해 여자친구와 밥값내기를 했다는 네티즌과 자신도 게임을 하고 싶은데 어디서 전단을 구해야 하는지 등 네티즌들의 요청이 속속히 등장하고 있다. 또한 극장 자체에서도 <날아라 허동구> 티져 전단에 대한 추가문의로 인하여 영화 담당자는 이례적으로 추가 제작에 들어가기로 결정, 다시 한번 전국 극장가의 관객들을 찾아 갈 예정이다. 기존 영화 전단지들과 달리 <날아라 허동구>의 전단은 정보전달이라는 영화 전단의 숙명(?)을 깨고, 두고두고 즐길 수 있을 게임 판으로 네티즌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통통 튀는 아이디어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날아라 허동구>는 치킨집 사장 아빠 진규(정진영 분)가 IQ60의 아들 동구(최우혁)를 초등학교만이라도 졸업 시키기 위해 세상과 맞서는 유쾌한 이야기로 올 봄 극장을 찾은 가족 관객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패밀리 무비로 4월 26일 관객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by 100명 2007. 3. 26. 22:43
'쏜다'이어 '수'도 '300'에 쓴잔
[노컷뉴스 2007-03-26 13:39]

주말 박스 오피스 2주연속 할리우드 판타지 전쟁영화 '300' 1위

지진희의 정통 하드보일드 '수'도 할리우드 전사 '300'앞에 무릎을 꿇었다.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과 지진희가 손잡은 색다른 느와르 '수'는 지난 22일 개봉, 23~25일 주말동안 97,083명, 전국 누계128,913명을 기록(영화 진흥위원회 자료기준)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했다.

첫 주 단숨에 103만 관객을 휘감은 고대 스파르타 '300'전사의 페르시아 대군 격퇴기 '300'은 2주차에도 532,138명을 기록해 누계 1,911,429명으로 200만 흥행을 눈앞에 두고 2주째 1위를 차지했다. 지난주 개봉한 감우성 김수로 주연의 '쏜다'(누계 34만)를 다섯배 차이로 잠재운 '300'은 이번주에는 한국 영화 '수'를 격파한 것. 더 놀라운 것은 18세 이상 관람가 이면서 비성수기 극장가에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 하지만 다른 영화에 후속 여파를 미치지 않은 것도 주목된다.

2위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원작 '향수'가 차지했다. '향수'는 주말 264,021명, 전국 누계 306,714명을 기록해 선전했다. 3위는 짐 캐리 주연의 스릴러 '넘버23'이 174,878명, 누계 206,727명으로 뒤를 이었다.

한국 영화의 부진이 3월 내내 이어지는 가운데 앞으로도 별다른 기대작이 없어 상반기 극장가는 할리우드 영화에 수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by 100명 2007. 3. 26. 17:59

일산에 74평 스크린…멀티플렉스론 국내 최대
[매일경제 2007-03-26 16:08]

국내 멀티플렉스 중 최대 크기 스크린이 일산에 들어선다.

멀티플렉스 극장체인 CJ CGV(대표 김일천)는 오는 29일 일산 장항동에 45호점인 CGV일산을 개관한다. 장항동 대형 테마 쇼핑몰 웨스턴돔 3층에 들어설 일산점은 아이맥스관과 스타관 등을 포함해 총 9개관 1957석 규모다.

특히 이곳에 들어설 아이맥스관에는 가로 21.2m, 세로 11.5m 크기(74평)의 국내 멀티플렉스 중 최대 규모 스크린이 자리잡을 예정이어서 눈길을 끈다.

기존 최대 크기였던 CGV용산 아이맥스관 스크린보다도 크다. 물론 멀티플렉스가 아닌 곳까지 포함하면 국내 최대 스크린은 서울 63빌딩에 자리잡은 아이맥스관(136평)이다.

CGV일산 아이맥스관은 70㎜ 필름을 사용해 일반 영화보다 10배 이상 선명한 화질과 6채널 디지털 음향 시스템에 의한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줄 예정이다.

by 100명 2007. 3. 26. 17:55
'300' '향수' '넘버23'..외화, 박스오피스 점령
[스타뉴스 2007-03-26 09:20]
[머니투데이 스타뉴스 김현록 기자]
할리우드 영화 '300'이 2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가운데 외화들이 주말 흥행 1∼3위를 외화가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26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245개 영화관, 1698개 스크린, 스크린 가입률 93%) 가집계에 따르면 '300'이 23일부터 25일까지 53만2138명을 불러모아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점유율은 무려 35.9%, 누적관객은 190만명을 넘어섰다.

뒤이어 파트리그 쥐스킨트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26만4021명을 불러들이며 2위를 차지했다. 점유율은 17.8%, 함께 개봉한 짐 캐리 주연의 스릴러 '넘버 23'이 17만4878명으로 3위에 올랐다. 점유율은 11.8%를 보였다.

1∼3위를 차지한 이들 세 외화의 점유율을 더하면 무려 65.5%에 달한다. 지난주 개봉한 한국영화 '쏜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두고 지난 22일 역시 첫 선을 보인 '수'가 8만7083명으로 4위에 그친 데 비교하면 외화의 선전이 더욱 돋보인다.

더욱이 '수', '쏜다'를 비롯해 '빼꼼의 머그잔 여행', '1번가의 기적' 등 흥행 10위권에 든 한국영화는 단 4편. 지난 주에는 3편에 불과했다. 이는 위기론이 팽배한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분석된다.

오는 29일 개봉하는 '이장과 군수', '뷰티풀 선데이' 등 후발 주자들이 이같은 상황 속에서 활약하며 분위기를 반전시킬지 기대가 모아진다.

by 100명 2007. 3. 26. 10:04

프리머스시네마 부산, '영화나눔' 운동 전개
[뉴시스 2007-03-24 15:32]

"휠체어 타고 친구, 가족들과 영화를 즐겨요"

멀티플렉스 상영관 프리머스시네마(www.primuscinema.com) 부산 아시아드점은 24일 부산지역 장애우 및 가족, 자원봉사자들을 초청해 '영화나눔' 행사를 가졌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 이날 행사에는 1급에서 6급까지 거동이 불편한 250여명의 장애우 등이 참석해 최근 개봉된 영화 '복면달호'를 관람했다.

이에 앞서 부산 여성장애인연대는 이 자리를 통해 매월 개최하는 정기모임을 갖고 신입회원 소개, 활동사항 보고 등의 자체행사를 개최키도 했다.

부산 여성장애인연대 김경미 간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아시아드점에서 정기모임을 지원해주고 있다"며 "상영관에서 이 같은 행사를 개최하고 영화도 볼 수 있어 우리 장애우들이 더 즐거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백정석 프리머스 부산 아시아드점장은 "지난해부터 부산지역 사회복지단체와 기업, 관공서 등과 함께 지속적으로 '영화나눔'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소외 계층을 위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더욱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by 100명 2007. 3. 25. 21:48
주말 극장가, 한국영화 예매율 모두 '한자리 수'
[OSEN 2007-03-25 10:11]

[OSEN=박준범 기자] 한국영화가 좀처럼 외화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영화는 지난 달 설 연휴 윤제균 감독의 ‘1번가의 기적’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이후 줄곧 외화에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내주고 있다.

휴 그랜트-드류 베리모어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이 3월 초 극장에서 흥행했고, 지난 주부터 영화 ‘300’의 탄탄한 근육질을 가진 스파르타 전사들이 국내 극장가를 장악하고 있다. ‘300’의 열기는 아직 사그러들지 않고 있고, 박정우 감독의 ‘쏜다’에 이어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의 ‘수’ 또한 크게 빛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영화 예매사이트 맥스무비가 집계한 주말 예매율에 따르면 한국영화의 부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3월 14일 개봉했던 ‘300’이 43.43%로 여전히 흥행돌풍을 예고하고 있고, 동명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도 19.78%로 기대 이상의 예매율을 기록했다. 로맨틱 코미디 ‘브레이크 업-이별후애’(8.06%)와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7.89%), 짐 케리의 변신이 눈에 띄는 ‘넘버23’(7.89%)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3월 22일 개봉한 ‘수’는 개봉 첫 주말이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순위는 6위지만 예매율은 3.93%로 저조하다. 개봉 2주차인 ‘쏜다’도 2.14%로 지난 주에 이어 흥행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 ‘쏜다’ ‘빼꼼의 머그잔 여행’(애니메이션) ‘1번가의 기적’ 등 한국영화의 예매율을 모두 합쳐도 10%가 넘지 못한다.

예매율이 반드시 박스오피스 집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매율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과 흥행을 예측할 수 있는 지표인 것만은 분명하다. 투자 철회와 제작편수의 감소로 예상됐던 한국영화의 극심한 침체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by 100명 2007. 3. 25. 21:47

[천안 영화업계 고객유치전 `후끈`]

충남 천안지역 멀티플렉스 영화업계의 고객 유 치전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다.

천안지역에는 2001년 야우리시네마에 이어 2005년 두정역 맞은편에 `시너스천안' (1천391석)이 개관해 지금까지 2개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시내 영화업계를 주도해 왔다.

이런 가운데 이달 말께 원도심인 대흥동 명동거리에 `CGV천안'이 8개관 1천400 석 규모로 개관을 서두르고 있다.

이 영화관은 천안역세권과 구도심 영화팬을 주 고객으로 삼아 천안시내 영화업 계의 판도를 새롭게 짠다는 복안으로 공격적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 다.

이 업체는 이미 이달부터 시내버스 광고를 시작했다.

천안 최초로 멀티플렉스 영화관 시대를 열며 지역 영화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야 우리시네마는 지난해 말 8개관에서 14개관(3천200석)으로 증축한데 이어 지난 19일 철도역인 천안역과 두정역에 무인발권기를 설치하는 등 지역 영화업계 주도력 수성 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시너스는 봄철을 맞아 내부를 새롭게 꾸미는 등 고정 영화팬 유치에 힘쓰고 있 으며 상황에 따라 새로운 마케팅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지역 영화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야우리시네마와 시너스로 양분돼온 천안지역 영화시장이 CGV의 천안입점으로 다분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지역 영화팬 확보 를 위한 영화업계의 홍보전이 치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by 100명 2007. 3. 24. 22:53
시네마테크 부산,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해설 프로그램 개최
(부산=뉴스와이어) 2007년03월24일--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부산 관객과 만나, 세계영화사 여행을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시네마테크 부산은 지난 3월 22일부터 개최중인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 - 월드시네마IV”의 관객해설 프로그램으로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떠나는 세계영화사 오디세이”를 3월 31일과 4월 1일 양일간에 걸쳐 진행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동진 씨는 자신이 추천한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암흑가의 세 사람> <벌집의 정령> <위대한 앰버슨가> 등 8편을 상영 전에 직접 관객에게 해설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돕게 된다.

이동진 씨는 지난 1월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최근 영화 콘텐츠 사이트 ‘이동진 닷컴’을 오픈하여 네이버를 통해 서비스 하고 있다.

월드시네마IV는 시네마테크 부산이 2004년부터 야심 차게 진행하고 있는 특별 기획전으로 영화 탄생 이후 작품의 내적 우수성과 대표적인 전형성으로 인해 수많은 영화인들로부터 끊임 없는 찬사를 받아 온 거장 감독들의 숨결과 공헌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4월 15일까지 진행되며, 무성영화시대의 기념비 <탐욕>(1924)에서부터 알프레드 히치콕의 걸작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무엘 풀러의 컬트 B급 영화 <충격의 복도>(1963>, SF의 전설적인 작품 <블레이드 러너>(1982)와 필립 가렐의 비애 넘치는 대표작 <밤바람>(1999)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걸작 20편을 상영한다. 관람료는 일반 4천원, 회원 3천원이다.
by 100명 2007. 3. 24. 22:52
  • ‘실내 자동차 극장’ 등장
  • 파주시 통일동산에… 시동 끄고 관람
  • 파주=최형석 기자 cogito@chosun.com
    입력 : 2007.03.24 00:31
    • 국내 처음으로 경기도 파주시에 실내 자동차극장이 생긴다. 자동차극장 업체인 로얄시네마가든은 오는 29일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 300여평에 단층(천장 높이 2.6m)으로 실내자동차극장<사진>을 개장한다.

    • 10개 부스를 차려놓고 8평 부스마다 차량 한 대씩 들어가도록 설계했다. 야외 자동차극장과 달리 실내에 냉·난방시설이 있어 온도 조절을 위해 차의 엔진을 켜놓을 필요가 없다. 공회전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와 환경 오염을 줄일 수 있다. 비가 오는 날에도 관람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부스마다 100인치 스크린(가로 2.2m×세로 1.3m)이 걸려 있어 한 영화를 정해진 시간에 봐야 했던 기존 자동차극장과 달리 자신이 고른 영화를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다. 현재는 차량 라디오로 음향을 듣는 방식이지만 극장측은 아예 스피커를 부스에 장착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벽체를 통유리로 만들어 혹시 있을지 모를 ‘퇴폐적 행위’를 사전에 방지했다는 게 회사측 설명이다. 고광도(高光度) 영사기를 사용하는 덕에 밝은 낮에도 관람이 가능하다. 24시간 운영하며, 요금은 영화 1편당 1만5000원. 예약제(전화 02-717-0700)를 기본으로 하며, 예악 없이 가더라도 빈 부스가 있을 경우 이용할 수 있다.

      장일도 대표는 “자동차극장을 10년 했는데, 요즘 매출이 감소해 이런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 by 100명 2007. 3. 24. 22:47
    덜컹~덜컹~ 시골길… 추억의 '천막극장' 떴다

    CGVㆍ경기영상위 오지순회'나눔의 영화관'

    어르신 "을매만에 영화귀경…"

    관람료 대신 달걀 한 꾸러미

    주민들 입모아 "고마운 손님"

    "이기 토종달기 난 알(유정란)이라니. 안에 비아리(병아리) 들언지 모르니 조심히 드슈야.(이게 토종닭이 낳은 계란이니, 안에 병아리가 들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 드세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의 한 탄광마을. 한 아주머니가 '영화관람료'라며 토종닭이 낳은 달걀 한 꾸러미(10알)를 꺼냈다. 건네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진다.

    극장이라곤 구경조차 하기 힘든 시골마을에 소박한 영화관이 차려졌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영화를 틀어준다는 소식을 듣고 동네 어귀에 있는 마을회관에 남녀노소 100여명이 모여들었다. 뒷짐 지고 섰던 어르신들도 스크린에 불빛이 들어오고 영사기가 소음을 내며 돌아가자 "영화귀경이 을매 만이냐"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국 관객 1억명, 서울 관객 5000만명 시대다. 8000원(주말 기준)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관람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손쉽게 찾는 문화생활 중 하나지만 아직도 전국에는 가까운 극장이 없어 1년에 한 번도 '극장 구경' 가기 힘든 곳이 부지기수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극장 하나당 스크린 수가 대여섯 개씩 되는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지어지는 것과 대조적인 풍경이다. 이른바 '컬처 디바이드(문화격차)'.

    멀티플렉스 CGV 인천점의 박노찬(36) 영사실장은 시골에서의 영화상영 경험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CGV가 사회공헌활동의 하나로 시작한 '나눔의 영화관' 행사를 통해 지난해부터 강원도 산골마을을 다니며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시네마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영사기사 일을 시작한 이후 이렇게 감동 받아보기는 처음이에요. 대도시 멀티플렉스에서 일하다 보면 좁은 영사실에서 기계적으로 영화만 틀어줄 뿐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웃는지, 우는지 알 수가 없어요. 제가 틀어주는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경기영상위원회가 마련한 '이동영화관-사랑방극장' 행사팀을 따라 경기도 연천군 백학마을을 찾아가 봤다. 이날 마을 복지회관에서 상영한 작품은 영화 '괴물'. 전국적으로 1300만명이나 본 영화라지만 백학마을에선 이 영화를 봤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부 김진희(47) 씨는 "TV에서 '괴물'이 잘된 영화라고 그래서 꼭 보고 싶었다"며 반가워했다.

    거동이 불편한 정점혜(76) 할아버지는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은 노부인의 손을 꼭 잡고 복지회관을 찾았다. 영화가 끝난 뒤 "뭔 얘긴지 못 알아듣겠다"며 멋쩍어하던 정 할아버지는 "(영화를) 생전 안 봤지. 보려면 서울꺼정 나가야 돼. 앞으로도 많이 해주면 좋겠어"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처럼 작은 마을을 다니며 영화를 상영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들까. 경기영상위원회 영상사업팀 이안숙 과장은 "스피커 등 음향장비, 프로젝터 등을 구입하는 데 1500만원 정도 들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한 번 장비를 구입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추가 비용은 덜 드는 편이다.

    그런데도 선뜻 이런 행사에 발 벗고 나서는 단체는 많지 않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마룡1리 조순행 이장은 "서울 사람들이야 주말마다 극장에도 가고 하지만, 여기서는 신작 영화 한 번 보려면 아이들하고 계획 잡아서 왕복 몇 시간 걸리는 서울까지 나가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면서 "이런 시골동네, 읍면에 좋은 영화를 많이 틀어주면 정말 좋겠다. 영화 틀어주는 사람들한테 꼭 좀 전해 달라"고 재차 당부했다.

    by 100명 2007. 3. 23. 23:13
    스크린쿼터 원상 회복 불가?

    2007.03.22/송순진 기자

    지난해 7월부터 146일에서 73일로 축소된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와 관련해, 한미 FTA 협상에서 원상 회복이 불가능한 현행 유보쪽으로 확정, 타결됐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 측은 22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FTA 고위급 회담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스크린쿼터가 현행 유보로 확정됐다"고 전하고, "이는 현지 협상단 관계자를 통해 확인된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문화관광부는 아직 이를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현행 유보'란 현재 수준의 규제를 유지하고 필요에 따라 추가로 규제를 둘 수 없어 사실상 73일 축소를 확정 짓는 셈. 문화관광부는 그동안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50% 이하로 떨어질 경우 다시 스크린쿼터 일수를 원상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미래 유보' 입장을 견지해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천영세 의원 측은 "주무부처가 빠진 고위급 회담에서 이러한 사태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것"이라며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이번 고위급 회담에서 문화관광부 담당자가 단 한명도 참석하지 못해 스크린쿼터 문제가 졸속 협상으로 처리됐다는 것.

    천영세 의원 측은 "'현행유보 방침으로 얻은 협상상의 소득은 무엇인지 공개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미국측에 선물로 바쳤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관련 사실의 공개를 촉구했다.

    by 100명 2007. 3. 23. 07:21
    천영세 의원, ‘스크린쿼터’현행유보 확정, 미래유보 운운은 역시 국내용이었나?
    (서울=뉴스와이어) 2007년03월22일-- 현재 워싱턴에서 마무리된 한미FTA 고위급 회담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스크린쿼터가 현행유보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이다. 현지 협상단 관계자를 통해 확인된 사항으로 문화관광부는 이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은 이미 보도 자료를 통해 이번 고위급 회담에서 문화관광부 담당자가 단 한명도 참석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해당 분야의 졸속 협상을 경고한 바 있다. 이런 우려가 스크린쿼터의 현행유보 방침을 통해 현실로 된 셈이다.

    이에 대한 단순한 질문은 이렇다. 스크린쿼터의 현행유보 방침으로 얻은 협상상의 소득은 무엇인가. 이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미국측에 선물로 바쳤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다음의 질문은 이렇다. 줄곧 핵심 쟁점의 미래유보 관철을 밝혀왔던 문화관광부 장관이 이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이런 노력이 불철저했다면 통상주무부처의 들러리나 서는 문화관광부는 외교통상부 문화관광국으로 편제하는 것이 옳다.

    작년 말에 공개되었던 우리 측 협상단의 문서에서 ‘스크린쿼터의 미래유보 관철 주장은 국내용’이라는 표현은 사실로 판명 났다. 정부가 주장하듯 한국영화 발전에 스크린쿼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다면, 관련 사실을 명확하게 공개하라. 그리고 스스로의 주장이 틀릴 경우,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하라. 그것이 떳떳한 길이다.

    다시 한번 스크린쿼터 현행유보 결정을 개탄한다.
    by 100명 2007. 3. 23. 07:20
    국내 첫 ‘실내 자동차 극장’ 등장

    국내 처음으로 경기도 파주시에 실내자동차극장이 등장한다.

    자동차극장업체 로얄시네마는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 3천300㎡(1천평)에 단층 규모의 실내자동차극장 '뷰카25(Viewcar25)'를 오는 29일부터 개장, 영업에 들어간다고 22일 밝혔다.

    10개의 부스에 부스마다 1대의 차량만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야외 자동차극장과 달리 실내에 냉난방 시설이 장착되어 있어 영화를 볼 때 온도조절을 위해 차의 시동을 걸 필요가 없는 점이 특징이다.

    또 한 영화를 정해진 상영시간에 보던 기존 자동차극장과 달리 자신이 고른 영화를 100인치의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

    이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최근 개봉작 가운데 비디오나 DVD로 출시되지 않은 프로그램으로 비디오방처럼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비교적 최신 영화를 볼 수 있어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상영되는 영화는 회사 중앙서버에 저장된 것을 스트리밍 방식으로 다운로드해서 보는 방식이기 때문에 여러 부스에서 같은 영화를 보는 것도 가능하다.

    로얄시네마 관계자는 "자동차극장을 운영해보니 보다 독립적인 공간에서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많았다"면서 "밤에만 운영되는 자동차극장과 달리 실내자동차극장은 24시간 운영되는 것도 장점"이라고 홍보했다.

    by 100명 2007. 3. 23. 07:15
    케이디씨, 마스터이미지와 프리머스 시네마에 대형입체 시스템 납품계약 체결
    (서울=뉴스와이어) 2007년03월22일-- 케이디씨정보통신(대표 김태섭)과 마스터이미지(대표 이영훈)는 국내 대표적 멀티플렉스 영화 체인인 프리머스 시네마에 디지털 극장용 입체영상 시스템(모델명 MI-2100) 및 특수안경 등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21일 밝혔다.

    프리머스 시네마는 전국 40개 영화관에 280개 스크린을 보유한 스크린 수 2위의 대형 멀티플렉스 사업자이다.

    국내최초, 순수 국내 독자 기술로 개발한 MI-2100은 기존 모델에 비해 Ghost(잔상)가 크게 개선되어 눈의 피로도가 감소되고, 편안해 자연스러운 고품질의 입체영상 상영이 가능하며 도입 예산 및 유지비도 외산에 비하여 50% 이상 저렴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금번 동 시스템을 공급한 양사는 지난 2004년 3D입체영상 사업에 동반 참여한 이후 3D휴대폰, 모니터, 극장용 대형입체 시스템까지 다양한 3D입체 제품을 선보여 왔으며 금번 CGV에 이어 2번째로 상용화 공급에 성공해 3D입체 시스템 분야의 선도기업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게 되었다.

    3D 입체극장은 전 세계적인 디지털 시네마 확대에 따라 보급 증가 추세에 있으며 더욱 실감나는 영상을 바라는 영화 매니아들의 눈을 더욱 즐겁게 하고 있다. 한국도 헐리우드 영화사의 디지털 입체영화 제작 증가 및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 업체들의 도입 확대로 향후 큰 시장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케이디씨정보통신의 관계자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공급을 위한 구체적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히며 그 중 디즈니의 계열사인 부에나비스타의 경우 홍콩 제2국제공항 청사내 신설되는 3D입체 영화관에 당사제품 설치를 적극 검토 중이며 조만간 공급계약이 체결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by 100명 2007. 3. 22. 13:06
    3월 외화 '초강세'…극장가 예매율 주도!
    [조이뉴스24 2007-03-21 16:24]

    <조이뉴스24>

    3월 극장가에 외화들의 예매율이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

    영화예매 사이트 맥스무비의 21일 오전 집계에 따르면 이번 주 주말예매 TOP 10순위에 외화가 7편 한국영화가 3편 올랐다.

    개봉 주말 관객 100만을 동원한 '300'을 비롯해 베스트셀러 향수를 스크린에 옮긴 '향수'등 이번 주 극장에 걸리는 외화들의 예매율은 90.56%에 달했지만 '수','쏜다','빼꼼의 머그잔 여행' 등 3편의 한국영화의 총예매점유율은 9.44%에 그치고 말았다.

    맥스무비 측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영화는 3월 예매점유율 50%대를 유지했던 것에 반해 2007년 3월은 현재까지 40%가 감소된 평균 10%대로 마이너스 성장했다"며 "이번 3월 2주차에는 역대 한국영화 3월 예매점유율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by 100명 2007. 3. 21. 20:58
    극장가 외화 점유율 90%… 한국영화 ‘빨간불’
    [세계일보 2007-03-21 17:21]

    이번 주도 외화 점유율이 90%를 넘어섰다. 한국영화는 3월 들어 2주째 총점유율 10% 미만을 기록하고 있다.

    21일 영화예매 사이트 맥스무비에 따르면 예매순위 톱 10에 개봉 1주차 100만 관객을 동원한 ‘300’을 필두로 ‘향수’, ‘브레이크업’, ‘넘버23’ 등 이번 주에 개봉하는 외화까지 상위권을 차지하며 총 7편이 포진했다. 한국영화는 개봉작인 ‘수’, ‘쏜다’, ‘빼꼼의 머그잔 여행’ 등 3편이 진입했다.

    외국영화와 한국영화의 총점유율을 집계하면 외화가 초강세다. 7편의 외국영화 총예매 점유율은 90.56%에 달했고 3편의 한국영화는 겨우 9.44%에 그쳤다.

    3월 들어 극심해진 한국영화 침체 현상은 주간 단위로 비교해보면 더 극명해진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영화가 3월 예매점유율 50%대를 유지했던 것에 반해 2007년 3월은 현재까지 40%가 감소한 평균 10%대로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3월 2주차에는 한국영화 3월 예매점유율 최저치를 기록한 바 있다.

    by 100명 2007. 3. 21. 20:56

    한국영화의 메카 단성사 그리고 박승필
    [한국영화스타10-①] 극장경영자로 우리 영화의 산파 역할 톡톡

    ▲ 한국영화 초창기의 공로자 단성사주 박승필
    서울에 있는 영화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은 단성사는 1907년 개관하여 2007년 개관 100주년을 맞았다.

    100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화재와 전란, 변화된 시대에 맞춰 수차례 신축과 수리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단성사는 2005년 3년여의 공사 끝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2005년 2월 3일, 단성사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탄생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한국영화를 빛낸 100명의 영화인을 선정하여 이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한 것이었다.

    선정된 100명의 영화인에는 임권택, 안성기, 강수연 같이 친숙한 이름에서부터 신상옥, 유현목, 최은희, 신성일 등 50~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들과 한국영화를 개척한 윤백남, 나운규까지 한국 영화의 대표 인물들이 두루 망라되었다.

    특히 이 명단에는 한국영화 탄생의 산파였으며 단성사를 한국영화의 상징 같은 존재로 만든 한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초창기 한국영화의 버팀목으로 조선 사람의 손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단성사 지배인 박승필이 바로 그이다.

    박승필의 초기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부고 기사를 통해 1875년에 출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성사에서 선전을 담당했던 이구영의 증언에 의하면 박승필은 삼형제 중 셋째 아들이었다고 하며, 촬영기사 이필우는 삼형제 중 둘째였다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형제를 비롯하여 조카들까지 박승필이 주도하던 흥행계에서 활약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제강점기 영화전문잡지인 <영화시대>를 발간한 바 있는 박누월이 있다. 박누월은 박승필의 조카이다.

    박승필이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광무대를 인수하여 구극 전용 극장으로 운용하면서부터이다. 초기 극장 중 하나인 광무대는 활동사진상영관으로 이용되던 한성전기회사의 창고를 연극 상연을 위해 개조한 것이었다. 이곳은 1903년 경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영화가 공개 상영된 곳이기도 했다. 한성전기회사 동대문 발전소 근처에 있던 광무대는 상설관으로 동대문 발전소의 전기를 이용하여 야간에 영화 상영과 연극 공연을 할 수 있었다.

    1908년 박승필은 한성전기회사의 소유주인 미국인 골브란에게 200원을 주고 광무대를 임대하였다. 그는 전국의 유명한 명창들을 광무대에 모았는데 박기홍, 이동백, 김창환, 송만갑 등이 광무대에 전속으로 활약했고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인기 명창들이 공연할 때는 많은 관객들이 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관객이 들지 않았다. 들쭉날쭉한 수지로 인해 경영난에 직면한 박승필은 지방순회에 나서기로 하고 당시 서울 인근인 뚝섬(현 서울 성동구)으로 지방공연을 나섰다. 짐꾼도 없이 일행 십여 명이 한보따리씩 짐을 들고 장터를 찾아 공연을 했으나 아침 끼니 거리도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도 쫄쫄 굶고 다음 공연을 위해 찾아간 마을에선 온 동네 사람들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날이 바로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일본에게 빼앗긴 바로 그날이었던 것이다. 박승필은 중외일보에 게재된 글에서 그날 단원들과 시장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광무대의 공연과 지방순회공연을 병행하면서 전통연희인 구극을 부흥시키며 일약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 낸 박승필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한일합방 직후 골부란이 일본인에게 한성전기회사의 소유권을 넘겼고 얼마 있지 않아 광무대는 간판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박승필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부린다.

    1913년 현재 을지로3가 근처에 있던 황금유원지 안의 일본인 소유 극장인 연기관을 임대하여 광무대로 간판을 바꿔달고 공연을 재개했으며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하고 스타를 만들어 내면서 광무대를 구극의 메카로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극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임성구, 김도산 등이 이끄는 신극 단체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새롭게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영화의 흥행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 1955년경의 단성사의 모습
    1917년 박승필은 일본인 다무라 미네가 소유한 단성사를 임대하여 활동사진과 신극 전용관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1년여의 공사 끝에 1918년 12월 21일 확장 개관한다. 광무대에 이어 단성사를 임대한 박승필은 구극과 신극, 영화를 아우르는 흥행계의 패자로 우뚝 솟아오르고 있었다.

    박승필은 자신의 극장을 풍성하게 채워줄 예술가들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면서 그 영향력을 키웠다. 신극의 개척자인 임성구와 김도산의 재정적 후원자였으며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적인 판단으로 흥행이 될 만한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박승필은 일본인 극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연쇄극의 제작을 김도산에게 권유하였다. 연쇄극은 연극의 일부 장면을 영화로 촬영하여 공연 중 상영하는 것이었다. 박승필은 김도산이 공연한 바 있는 <의리적 구토>의 몇몇 장면을 영화로 촬영하여 공연에 삽입시키게 하고 그 비용을 모두 내었다. 유명한 요릿집인 명월관, 청량리 근처의 홍릉, 장충단 공원, 한강철교 등지에서 몇몇 장면이 촬영되었다.

    1919년 10월 27일,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공연되었다. 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익숙한 조선의 풍광이 상영되었다. 관객들은 조선의 풍광 속에서 무대의 배우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신기해했으며 열광적으로 호응하였다. 단성사는 몰려드는 관객들로 연일 만원이었다. <의리적 구토>는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 상영한 최초의 영화였다. 현재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1919년 10월 27일을 한국영화의 탄생일로 삼고 있다.

    2, 3년간의 짧았던 연쇄극의 전성기가 지나갔다. 관객들은 더 이상 연쇄극에 열광하지 않았다. 극장에는 외국에서 수입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박승필은 연쇄극이 아닌 단성사에서 상영하고 있는 외국영화와 같은 진짜 영화의 제작을 원했다.

    조선극장은 단성사의 라이벌 극장으로 현재 인사동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1923년 10월, 조선극장의 소유주인 일본인 하야가와가 영화제작사인 동아문화협회를 만들어 우리의 대표적 고전인 <춘향전>을 제작, 상영했다.

    <춘향전>은 조선극장의 유명 변사 김조성이 이몽룡 역을 맡고 기생 한용이 춘향을 맡아 연기 했을 뿐 일본인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잘 알려진 조선의 고전을 영화화 한 <춘향전>은 조선극장에서 8일 동안 무려 1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구극 전용극장 광무대를 운영하면서 우리 전통연희를 지켜온다고 자부했던 박승필에게 일본인, 그것도 라이벌 극장인 조선극장의 일본인이 만든 춘향전은 큰 충격이었다.

    by 100명 2007. 3. 20. 23:32
    국내 영화관의 자존심, 단성사(團成社)
    멀티플렉스로 새롭게 나다
    김준기 - 맥스무비 극장팀장

    글을 시작하며

    기성세대에게 영화관은 어두운 슬럼(slum)을 연상시키지만, 신세대에게 그 곳은 화려한 팝콘 하우스(popcorn-house)(미국에서 영화관은 movie theater, movie house, movie palace, cinema 등으로 표현된다. 1960년대 미국에서 멀티플렉스가 들어서면서 영화관은 문화적 체험의 장소라기보다 일종의 비즈니스 장소라는 측면이 강조되면서 영화티켓의 수익보다 팝콘 수익이 워낙 큰 지라 영화관을 팝콘 하우스라는 용어로 종종 비유하여 사용된다. 국내 놀이공원에서의 팝콘의 원가는 약 155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티켓 한 장의 원가를 고려한다면 그 비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로 상징된다.

    1989년 봄, 기형도가 사랑하던 시(時)를 버리고 생을 마감한 곳은 종로 3가 파고다 극장이라는 심야영화관에서였다. 그러나, 2005년 봄 국내 멀티플렉스 영화관에는 이동통신카드로 할인을 받고 핸드폰으로 입장을 하며 디지털 상영과 고급 시트(seat)의 스크린 그리고 화려한 네온사인속에서 팝콘 냄새 가득 머금으며 영화를 즐기려는 형형색색의 젊은 연인들로 북새통이다. 너무나 단순한 도식적 비유지만 영화관은 어둡고 암울한 아웃사이더의 문화공간에서 21세기 화려한 대중문화를 이끄는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에 필자는 영화관이라는 문화적 공간을 시대의 흐름을 아우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조명하여 영화사를 바라보는 문화적 시선을 조금더 확대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록 필자의 능력이 일천하여 단지 영화관의 시대적 부침과 그 흥망성세만을 시시콜콜하게 다룰지라도, 이러한 글이 국내 영화관에 대한 또 다른 시선과 그 공간에 대하여 다양한 이론적 그물망으로 의미를 상호소통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국내 영화관의 자존심, 단성사(團成社)

    1907년에서 2005년까지, 단성사의 산 역사는 이제 100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멀티플렉스라는 광풍이 한반도 이남을 휩쓸고 있지만 국내 영화관의 자존심은 단연 단성사라는 맏형에게 돌려져야 할 것이다.

    그 배경은 1919년 10월 27일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연쇄극은 일종의 연극물에 영상이 조금씩 가미된 공연형식을 일컫는 것이다. 비록완전한 영상은 아니지만 국내 자본이 투여된 최초의 영상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한때, 일부 영화 서적에서는 이 공연의 제목을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로 잘못 표기한 적이 있었다.)의 공연과 1926년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신화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국내 영화계에서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공연일인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지정하였으며, 그것은 국내 자본이 투여된 최초의 영상을 선보인 날이기 때문이다.

    일제하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영상으로 옮긴 <아리랑>은 당시 전 민족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아리랑>의 상영이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기 떄문에 단성사라는 공간은 국내 영화관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후 단성사는 '한국 영화 상영관의 메카(mecca)' 혹은 '한국 영화관 1번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197∼80년대 한국 영화의 신기록을(197∼80년대 영화관은 필름 프린트 벌수가 제한되어 있어서 개봉작은 단 하나의 영화관에서만 상영되는 경향이 많았다. 1993년 개봉된 <서편제>는 당시 단성사에서만 154일을 상영하여 1,035,741명의 관객(서울 관객 기준)을 동원하는 흥행 신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금의 멀티플렉스 구조에서는 단관 개봉이 아닌 광역 개봉(wide release)이라는 방식의 배급을 하는데 다량의 프린트를 준비하여 여러 상영관에 동시다발적으로 상영하는 방식을 취한다. 짧은 시일 내에 많은 관람객을 동원하는 배급 방식이다. 영화 흥행의 주기가 빨라져 자본회수 기간을 줄이는 장점도 있지만 틈새시장에 있는 예술영화들이 광역개봉에 따라 영화관을 찾지 못하는 불상사도 발생한다.) 연거푸 갈아치우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서울 관객 기준으로 1977년의 <겨울여자>는 약 58만, 1990년의 <장군의 아들>은 약 67만, 1993년의 <서편제>는 약 100만으로 한국 영화 흥행의 신기록을 단성사가 상영목록으로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07년 7월 17일에 개설된 단성사의 국내 극장 1호 라는 표현은 여러 사료를 통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있다. 부산의 영화 사료 연구가 홍영철씨는 『부산 영화 100년』(2001)에서 1907년 7월 15일 일본인과의 합자로 세워진 부산좌(좌(座) - 일제시대, 청계천을 경계로 영화관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어지는데 일본인들이 주로 출입한 남촌 영화관의 명칭은 대부분 명치좌, 어성좌, 경성좌등 좌(座)라는 용어를 쓴다. 이것은 일본의 극장이 대부분 다다미 방 구조처럼 앉아서 영화나 연극을 보는 문화에 기인한 것이다.)가 단성사보다 2일 먼저 개장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955년 단성사 전경

    또한, 이용남씨의 「해방 전 조선영화극장사 연구」(2003)에 따르면 국내 극장 1호는 1907년의 단성사나 부산좌가 아닌 1895년 인천의 협률사(協律舍)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영화관은 1902년 서울의 관립극장인 협률사(協律社)와는 다른 곳으로서, 현재는 인천 애관극장이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남아있다. 이에 단성사가 국내 극장 1호 혹은 국내 최초의 영화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사료에 기반한 사실은 아닌 것이다. 다만 단성사는 한국 최초의 영화인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공연하고, 영화 <아리랑>을 통해 일제하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함께 어루만져 주었던 우리의 터전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기억하고 아로새겨야 할 대상이자 자존심인 것이다.

    2005년 2월 2일, 단성사는 7개관 153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장하면서 종로 극장의 전성시대를 다시금 만들고자 한다. 대기업들의 멀티플렉스가 국내 영화관의 지형도를 뒤흔들어 놓는 작금의 상황에서 100년의 역사를 눈앞에 둔 단성사의 자존심이 과연 지켜질 수 있을 것인지가 자뭇 궁금하다.

    단성사(團成社) 연대기

    ㅇ 1907년 7월 17일: 실업가, 유지, 동대문상인 출신인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등이 발기인이 되어 단성사를 개장. 당시 단성사는 "조선의 연예계를 발달시키고 일반 재인의 영업을 위하기도 하며 극장 운영을 통해 얻은 수익을 교육과 자선사업에 투자할 것"을 약속하며 시작하였지만 그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ㅇ 1914년: 그 후 주인이 여러 번 바뀌다 무라다라는 일본인 소유로 넘어간다. 무라다 역시 극장 흥행에 별 재미를 보지 못한다.

    ㅇ 1918년: 무라다는 단성사의 운영권을 한국인 흥행사 박승필에게 임대로 넘겨준다. 그리고 그 해 12월 21일 대대적인 개축을 통해 영화 중심 극장으로 본격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ㅇ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 연쇄극 <의리적 구토> 공연

    ㅇ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 상영

    ㅇ 1932년 1월 4일: 이런 어려움 속에서 박승필은 57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다. 오랫동안 단성사의 지배인이자 사원의 대표격인 박정현이 정상화를 모색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명치좌나 약초극장(현 스카라극장)처럼 새로운 설비와 서비스를 갖춘 새 극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배급회사들 또한 설비가 부족한 극장에 좋은 영화를 공급할 이유가 없었다. 단성사는 이래저래 흥행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ㅇ 1934년 12월: 현대식 철근 건물 신축(750석)
    ㅇ 1935년 10월 4일: 국내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상영
    ㅇ 1939년 2월: 단성사의 경영이 장기 적자를 면치 못하면서 소유권은 여러 사람을 거치게 된다. 마침내 단성사는 1939년 2월 명치좌의 소유주인 이시바시(石橋)에게 넘어갔다.

    ㅇ 1939년 8월: 단성사의 소유자인 이시바시(石橋)는 단성사라는 간판을 내리고 대륙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ㅇ 1945년 8월: 단성사는 일본인의 경영자가 손을 떼고 한국인의 소유로 넘어옴

    ㅇ 1955년 7월:1934년 현대식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

    1934년의 단성사 전경



    ㅇ 1970년대: 서울의 개봉관은 종로 3가의 단성사와 피카디리를 양대 축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아래의 대한극장, 스카라극장, 명보극장, 국도극장, 세기극장 등이 있었지만 종로 3가 극장가에 비하면 그 명성은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ㅇ 1977년: 영화 <겨울여자> 한국 영화 흥행 1위, 서울 관람객 약 58만 동원
    ㅇ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 한국 영화 흥행 1위, 서울 관람객 약 67만 동원
    ㅇ 1993년: 영화 <서편제> 한국 영화 흥행 1위, 서울 관람객 약 100만 동원

    ㅇ 1998년: 소극장 2관 완공(1관 865석, 2관 205석)

    ㅇ 2001년: 단성사 신축공사 착공

    ㅇ 2005년 2월 2일: 단성사 7개관 153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개장

    단성사의 역사는 한국 영화사를 고스란히 품어 안고 있다. 일제시대에서의 한국영화의 시작과 <아리랑>의 흥행 그리고 외국 직배 영화의 공세 속에서도 꾸준히 한국영화의 흥행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의 변신은 영화관의 산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만큼 다양한 나이테를 보유한 영화관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 영화사의 깊이와 너비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터뷰] 단성사 사료 수집의 대가, 조상림 상무를 만나다

    단성사에 관한 많은 사료들을 확보하고 계십니다. 계기가 무엇인가요?
    1966년 단성사에 입사하여 회계업무와 회사관리 등을 하면서 무심코 뒤진 창고속에서 단성사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사진을 하나 둘씩 모으게 된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단성사에서 상영된 영화 목록을 다시 정리하고 있는데 약 75%까지 IMDB등을 뒤져가면서 현대화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25%는 워낙 외화 제목이 엉뚱하여 어떤 영화인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단성사의 현재는 <아리랑>의 상영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희문 교수의 경우 <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가 아닌 일본인 스모리 히데까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요?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스모리 히데까즈는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당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설립한 충무로 모자점의 할머니 요도 도라조의 아들이 스모리 히데까즈입니다. 그가 한 작품으로 세 작품이 있지만 그는 영화도 잘 모를 뿐더러 단지 이름만 내건 것일 뿐이죠. 이건 논쟁의 가치도 없습니다.

    <아리랑> 상영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으신지요?
    단성사에는 남아있지 않구요. 신문기사 등을 통해 1953년 대구에서 상영되었다는 사료가 있습니다. 그 이후 필름의 상영여부나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에도 아마 없을 것 같아요. 후일 <아리랑>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소유하고 있다가 임수호라는 단성사 직원이 필름을 구매한 후 상영을 해왔으며 그는 아리랑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고 합니다. 또 그는 국내 배급의 1호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 외에 <아리랑>과 관련된 뒷얘기가 있는지요?
    나운규의 고향이 회령입니다. 그 외에도 친구 윤봉춘 등이 있지요. 저도 고향이 회령입니다만,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의 고향이 회령인지라 그 곳이 영화의 성지로 알려지고 있답니다. 물론, 김정일도 영화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나운규와 김정숙의 고향인 회령을 우상화에 엮는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성사는 197∼80년대 한국영화의 흥행을 주도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겨울여자> 58만, <장군의 아들> 68만, <서편제> 100만은 한국영화의 신기록을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이러한 흥행을 단성사가 주도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일제시대 국내 영화촬영기가 단 두 대였다고 합니다. 한대는 박승필이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한대는 일본인이 소유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내 영화인들은 단성사의 박승필을 통해서 영화촬영을 하였는데, 박승필은 한국영화의 촬영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상영은 항상 단성사가 해야 함을 내걸었다고 합니다. 이후 단성사가 민족의 영화관이라는 이미지가 자리잡으면서 당시 서울극장이나 대한극장 등 시설 측면에서 더 좋은 극장보다 오히려 한국영화의 흥행을 선두하는 극장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습니다.

    대기업의 멀티플렉스 확대로 인해 개인극장들의 경영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멀티플렉스 이전 단성사는 한국 영화관이라는 브랜드 포지셔닝(brand positioning)이 강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멀티플렉스 이후 단성사의 포지셔닝은 어디입니까?
    영화관은 비즈니스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업입니다. 300억 가치의 부동산에 연간 3억의 이익을 바라보는 시절도 있었는데, 이처럼 극장산업은 비즈니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단성사는 비즈니스도 중요하지만 문화사업이라는 관점에서 영화관을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아듀! 소격동, 서울아트시네마
    예술영화의 메카, 둥지를 옮기다
    김준기 _ 영화평론가
    아트선재센터
    ▲ 아트선재센터

    내가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가는 길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다. 안국역에서 풍문여고를 끼고 정독도서관 방향으로 돌담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한국 예술영화관의 메카,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 2002년 5월, 문화의 향기가 가득하던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내에 둥지를 튼 서울아트시네마가 2005년 4월 낙원상가에 위치한 허리우드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국내 시네마떼끄의 흐름

    1970~80년대 영화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프랑스문화원’이나 ‘독일문화원’ 등을 배회했고, 90년대에는 대학로에 위치하였던 ‘영화사랑’이나 ‘영화공간 1895’ 그리고 ‘문화학교 서울’ 등의 시네마떼끄를 찾아 헤매었다. 이후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으로 한국시네마떼끄협의회(최정운 대표)는 서울아트시네마라는 소중한 공간을 확보하며 국내 예술영화관의 선도자로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였다. 최근까지 60여회의 영화제를 통해 300여 감독의 800여편을 상영하며 예술영화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대만의 휴샤오시엔,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이탈리아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등의 감독전은 매진 사례가 속출하였다. 2005년 4월 14일 서울아트시네마는 ‘후원의 밤’ 행사와 함께 낙원동 시대를 시작한다. 개막전은 ‘시네필의 향연'이란 제목으로 <카사블랑카>, <정사>, <사이코>, <닥터 지바고>, <이지라이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등 194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영화사를 장식한 고전 15~18편을 상영한다(www.kotheque.org).

    서울아트시네마 - 예술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간

    흔히 예술영화관이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하는 아트플러스 소속의 예술영화관은 대부분 상업영화관에서 예술영화관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수익이 발생해야 한다. 그리고, 하이퍼텍 나다와 씨네큐브 역시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품들로 상영작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울아트시네마는 그들 영화관과는 성격이 다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영화도서관이자 영화계의 허파와 같은 역할을 행하는 곳이다. 전 세계의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를 선별하여 상영하는, 그야말로 예술로서의 영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소격동 가는길

    내 집 없는 설움

    서울아트시네마는 매년 적자 운영을 한다. 물론 영화진흥위원회가 매년 약 3억 4천만 원을 지원하지만, 임대비 1억 5천만 원과 번역자막지원 등 기획비만으로도 빠듯한 실정이다. 그래서 인건비와 운영비는 영화요금을 통해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중에서 시네마떼끄의 전용공간이라도 있다면, 자금의 여유는 생길수 있을 것이다. 이에 서울아트시네마는 임대 해약을 눈앞에 두고 끊임없이 안정적인 둥지를 찾아보려 하였으나 낙원상가의 허리우드로 결국 귀착되고 말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네마떼끄가 임대 계약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는 현실은 한국영화계의 현재를 말해주는 것이다. 영화산업은 1000만 관객 동원이라는 화려한 홍보문구를 내세우지만 그 뒤안길에서는 시네마떼끄 운영도 힘겨운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는 최초의 시네마떼끄인 ‘시네마떼끄 프랑세즈’가 그들의 미래를 밝히는 장소였다. 그들에게 시네마떼끄에서 상영하는 고전영화는 영화사를 관통하는 미학을 학습하는 기회였으며, 다시금 변형하고 재창조하는 훌륭한 교육장소였던 것이다. 이에 한국영화가 미래에도 전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영화의 기본체력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는 시네마떼끄의 안정적인 운영일 것이다.

    기업이나 공공단체의 지원

    외국 영화 감독 회고전을 할 때면 민간단체인 한국시네마떼끄협의회의 요청만으론 필름을 렌탈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때때로 영상자료원의 보증이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서면 보증 등을 요청하여 귀한 고전 필름들을 입수하게 된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약 3년간 그토록 상영하고 싶어도 상영할 수 없었던 감독 회고전이 있다.이탈리아 감독 비스콘티의 회고전이 그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그 원인이 곧 든든한 후원자가 없음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일본의 경우 <아사히신문>이 오래 전부터 예술영화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행하고 있다. 비스콘티 감독 회고전을 개최하는데 <아사히신문>의 대표가 이탈리아로 직접 가서 회고전 행사에 계약하고 필름을 가져온다. 미국의 경우 썬 마이크로 시스템즈가 예술영화관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행하기도 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할 때 기업들과 예술영화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다양한 방안들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시네마떼끄 전용 아카이브(archive) 구축

    한국영상자료원의 역할은 국내외 영화필름과 영화문헌를 발굴하고 수집, 보관, 전시 등을 행하는 문화관광부 산하 기관이다. 하지만 현재 외국필름을 모으기에는 예산이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영화 모으고 관리하기에도 역부족인 상황인 것이다. 이에 시네마떼끄는 외국감독 회고전을 개최하려면 외국으로부터 필름 렌탈료와 필름 회당 상영료 그리고 운송료까지 포함하여 영화 한 편당 약 200만원이 소요되는 실정이다. 제대로 된 아카이브가 없다는 것이 필름 상영에 드는 비용을 두세 배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국민의 혈세이기도 하다.

    시네마떼끄에 대한 법률적 지원

    아트선재센터 내부

    2004년 서울아트시네마는 스크린쿼터를 모두 채우지 못해 20일 상영정지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시네마떼끄에 대한 명확한 법률적 규정이 없어서 스크린쿼터의 적용에서부터 혼란이 생긴다.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에 적용되는 법률은 예술영화의무상영과 한국영화의무상영(스크린쿼터) 두 가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우선 예술영화를 1년에 219일 이상 상영하되 그 중 70일은 한국영화를 상영해야 한다. 그리고 1년에 총 106일의 한국영화 의무상영도 아울러 준수해야 한다. 하지만 더 우스운 것은 상영할 국내 예술영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70일을 채우기도 힘들다는 것이 각 예술영화관의 목소리이다.

    예술영화에 대한 판정은 영화진흥위원회 소분과인 예술영화 인정 심사위원회의 인정을 받거나, 서울 시장점유율이 1% 이내인 국가의 작품(2005년의 경우 한국, 미국, 홍콩, 일본 제외), 영화진흥위원회 제작배급지원작 등을 분류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법규는 현실적인 잣대없는 법률적 규정이라 서울아트시네마마저 이 법률을 위반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행히 장소를 옮긴다고 하니 20일 법률정지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제 국내에서도 시네마떼끄에 대한 법률적 지원을 규정하고 그에 대한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부산의 시네마떼끄는 부산시의 지원하에 이루어진다. 부산의 영상산업육성과도 맞물리는 사안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서울시에서도 예술영화관에 대한 관심이 미래를 위한 투자로서 가치가 있음을 인식해주었으면 한다.

    시네마떼끄여, 영원하라!

    한국영화의 힘은 곧 시네마떼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허리우드극장으로 옮겨가는 곳에는 필름포럼이라는 2개관의 예술영화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올 10월에는 서울역사에 2개관의 예술영화관이 더 들어선다고 한다. 예술영화관의 확대는 점점 활발해질 것이다. 이에 예술영화에 대한 의미와 예술영화관의 현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국제극장, 이강우 회장의 행보
    지금은 사라진 공간의 추억
    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57년 9월 28일 광화문 사거리 서남쪽에 약 1800석 규모로 개봉한 국제극장.  제임스 딘 주연의 <쟈이안트>(1956)와 <알렉산더 대왕>(1957)의 걸개 그림이 개봉박두임을 알리듯 영화관 벽면에 길게 내걸려 있다.
    ▲ 1957년 9월 28일 광화문 사거리 서남쪽에 약 1800석 규모로 개봉한 국제극장. 제임스 딘 주연의 <쟈이안트>(1956)와 <알렉산더 대왕>(1957)의 걸개 그림이 개봉박두임을 알리듯 영화관 벽면에 길게 내걸려 있다.

    재일교포 출신 이강우(李康友) 회장. 1913년 5월 18일. 밀양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해외위원. 삼아약품공업(주) 회장. 동아흥행(주) 회장. 재일 한국인 상공인 연합회 최고 고문. 그의 화려한 삶의 이력에 비해 국내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명성은 낮설기만 하다. 더군다나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극장도 지금의 2030 세대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름이다.

    국제극장은 1957년 9월 28일 광화문 사거리 서남쪽에 약 1800석 규모의 단관 영화관으로 개관하였다. 영문명으로 International Theatre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개관작으로 안소니 만 감독의 <세레나데>(1956)를 상영하였다. 제임스 딘 주연의 <쟈이안트>(1956)와 <알렉산더 대왕>(1957)의 걸개 그림이 개봉박두임을 알리듯 영화관 벽면에 길게 내걸려 있다.

    당시 국제극장 건물의 위용은 극장 앞의 넓은 광장과 대형 분수대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허리우드 극장의 하우종 상무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로서는 고급인력들이 국제극장 직원으로 채용되었으며 약 50여명의 직원들이 상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극장 상영업계로서는 드물게 직원 체육대회와 조기 축구회, 산악회등의 모임이 활성화 될 정도로 국제극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한편, 1961년 1월 18일 국제극장은 한국 최초의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 홍성기 감독, 김지미, 신귀식 주연의 <춘향전>이었는데,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신상옥 감독, 최은희, 김진규 주연의 <성춘향>과 함께 동일한 고전을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감독들의 기 싸움 또한 대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국제극장의 역사상 ‘한국 최초의 총 천연색 시네마스코프’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은 대참패를 하게 되고 신상옥감독의 <성춘향>은 공식집계 관객 150,000명, 비공식 집계 360,000명을(당시 서울인구 250만명) 동원하게 된다. 한국영화사에서 신상옥 감독의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이강우 회장은 당시 동아영화흥업(주)을 통해 영화수입과 제작에도 나섰는데 <타워링> <러브스토리> <대부> <로미오와 쥴리엣> <용쟁호투> <모비딕> <헬 라이트> 등 화려한 수입작품들을 보유하였으며, 경기도 파주에 영화제작 촬영소를 소유하면서 현재까지 약 79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68년 동아영화흥업(주)은 동아흥행(주)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74년에는 신상옥 감독의 명보실업(주)이 소유하고 있던 허리우드 극장까지 인수한다. 당시 서울의 10대 개봉관 중 동아흥행(주)이 2개를 소유한 것이다.

    제작과 수입 그리고 상영까지 이렇듯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던 국제극장은 당시 법적으로는 임시 가건물로 지어진 건축이라 후일 광화문 도심재개발 정책에 따라 1985년 4월 14일 폐관하게 된다. 마지막 작품으로 내걸린 <사막의 라이온>의 간판이 철거되는 모습은 서울시민들과 울고웃던 화려한 시대를 마감짓고 쓸쓸히 돌아서는 국제극장의 뒷모습을 보여주는듯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맘이 들게 한다.

    국제극장은 근대 건축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상황이라 근대 건축물 보존의 차원에서 그 사료를 충분히 남기지 못하였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천승(李天承)의 설계로 1957년에 세워진 이 극장은 장차의 도시계획을 감안하여 임시 가건물이라는 조건이 붙었다고는 하나, 구성면에 있어서 당시로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것이다. 즉 스틸 말리온(steel mullion)을 사용한 전면 유리면의 근대성과 거기 대조된 측면의 중후한 처리 등이 그것이며, 내부좌석도 갤러리식이 아닌 스타디움식으로는 처음의 시도였다고 한다. 1957년 9월에 준공되었다.

    - 서울특별시 서울육백년사 홈페이지(http://seoul600.visitseoul.net)

    한편, 현재 동아흥행(주)을 맡고 있는 이창무 회장은 허리우드 극장 대표로서 2001년부터 서울시극장협회 회장까지 역임하고 있다. 이창무 회장이 이강우 회장과의 연을 맺은 것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그가 일본에 있으면서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인 최배달의 수제자였다는 점과 이강우 회장 가계와의 연으로 허리우드 극장의 운영을 도맡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강우 회장은 1990년 1월 3일 동경에서 작고하게 된다. 영화상영업으로는 전국적인 규모는 아니었지만 한국영화 제작과 외국영화 수입에 있어서 그의 뚜렷한 발자취는 분명 더 깊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박정희의 근대화 시대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국내에서의 이강우 회장의 행보 또한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동아흥행(주)는 재일교포의 자본으로 국내 영화업계에 투자한 사례라는 점과, 당시 박정희는 외자 유치를 갈구했다는 점 때문에 서로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이강우 회장은 당시 일본에서도 영화업을 하였으며, 지금도 동경 신주쿠에는 동아흥행(주) 소유의 극장과, 더 나아가 대만에까지 극장을 소유한 거부였다.

    이러한 배경을 놓고 볼 때, 국제극장이라는 공간은 한국영화사 속에서 날실과 씨실처럼 얽혀있으며 이강우 회장은 일본과 한국이라는 두 국가의 영화산업을 횡단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주목하고픈 대상이다.

    애관극장, 국내 최초의 극장
    110년 역사의 풍상 속에서도 꿋꿋이
    김준기 _ 영화평론가
    1895년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
    ▲ 1895년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

    인천광역시 중구 경동 238번지, 이곳은 국내 최초의 극장 애관극장이 위치한 곳이다.인천의 애관극장은 110년의 역사를 지닌 국내 최초의 극장이다. 애관극장은 1895년 을미개혁이 단행되던 시점에 인천 경동 네거리에 협률사(協律舍)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1902년 황실에 의해 서울 정동에 세워진 협률사(協律社)보다 무려 7년이나 앞선 극장이며, 1907년에 개관한 종로의 단성사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선 것이다. 다만, 협률사에 관한 정사(正史)가 존재하지 않고 인천의 시사(市史)에만 자료가 남아있어 공식적인 기록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1895년 협률사(協律舍)는 부산 출신의 인천 갑부 정치국에 의해 단층 창고 형태로 세워졌는데, 당시에는 <흥부놀부전>과 같은 인형극에서부터 신파극이나 창극, 남사당패들의 땅재주 등 각종 공연물들이 공연되었다.

    1905년 인천 중구 사동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회전무대가 설치된 공연장 가무기좌(歌舞技座)가 세워졌다. 주로 일본 신·구극을 공연하면서, 가끔씩 마술 같은 흥행물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공연장은 1930년에 화재로 사라졌다.

    그리고 1909년 지금의 신포동 외환은행 자리에 표관(瓢觀)이란 극장이 개관하였다. 당시 표관은 주로 일본영화와 뉴스를 상영했는데, 객석은 약 800석 규모로 대형 공연장인 셈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좌석은 남좌여우(男左女右)로, 남자는 왼편 줄에, 여자는 오른편 줄에 앉도록 엄중하게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해방 후 문화관(文化觀)으로 개칭되었으며 인천시에서 운영하다가 한국전쟁 중 화재로 소실되었다.

    2층 벽돌 구조의 애관극장

    한편, 협률사는 잠시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를 따서 축항사(築港舍)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20년대부터 애관(愛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애관이라 함은 곧 ‘보는 것을 사랑한다’라는, 매혹적인 이름인 것이다.

    이름이 변화하면서 건물형태도 뒤바뀌게 된다. 초창기 단층 창고 형태에서, 왼쪽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2층 벽돌 구조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관극장은 한국전쟁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60년 9월에 재건축되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애관극장(愛觀劇場)이라는 이름은 1960년 9월 재개관 때부터 사용된 것이다. 좌석규모는 약 400석이었는데, 영화와 악극을 함께 보여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이미자, 나훈아 리사이틀이 있는 날이면 몰려드는 인천 관람객들로 인해 사고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또한, 애관극장이 위치한 인천 경동거리는 그야말로 '시네마천국'이었다. 오성극장, 피카디리극장, 명보극장, 중앙극장 등 인천의 주요 극장들이 모두 이곳에 위치했고,인근에는 제물포고와 인화여고가 있어 학생들이 주요 고객들이기도 했다. 특히 <무영의 악마>(인천건설영화사),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같은 영화는 이곳에서 직접 제작, 배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애관극장의 열기는 차츰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현재 극장 운영주인 탁경란 사장은 1960년 애관극장을 재건한 이봉열씨에게서 1972년 극장을 인수한 탁상덕씨(91년 별세)의 막내딸이다. 아버지의 별세 후 애관극장이 점점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외환 위기 때 부도를 맞자 미국에서 들어와 경매로 이 극장을 재인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99년 11월 18일 화려하고 세련된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대명사 CGV인천14(약 4000석 규모)의 개관으로 경동거리에 있던 애관극장, 씨네팝극장, 피카디리극장, 미림극장 등 기존 극장들은 시설 개보수라는 맞불카드로 맞섰다. 그러나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의 관객이탈은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그리고 중심가 상권 역시 남동구 쪽으로 옮겨가는 터라 예전의 부흥을 다시 기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현재의 애관극장

    이후 애관극장은 2004년 1월, 5개관 86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관했다. 애관극장의 탁경란 사장도 멀티플렉스라는 시대적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었을 터이다.

    현재 경동거리에는 애관극장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110년 역사의 풍상 속에서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텨준 것은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아버지의 가업을 다시금 일구어내고픈 탁경란 사장의 의지이다. 또한, 지역상권의 발전을 위해서도 동네 상인들은 애관극장이 다시 일어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국내 최초의 극장에 보내는 응원이다.

    110년 역사를 지닌 국내 최초의 극장. 아직은 비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애관극장은 우리의 극장사에서 반드시 다시 되돌아봐야 할 과제이다.

    자유당 시절의 영화 상징 ‘평화극장’
    평화극장과 임화수
    김준기 _ 영화평론가
    임화수는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 임화수는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종로 4가 5번지, 보령약국 인근에 자리한 평화극장. 지금 그 자리는 한일빌딩이라는 고층 건물로 변해 있지만, 1950년대에는 평화극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곳은 당시 한국 영화계를 좌지우지하던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 임화수가 사장으로 있었던 공간이다.

    임화수는 1924년생으로 경기도 여주군 갑천면 가야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권중각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개가하자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임화수’로 개명하였다. 1941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절도와 장물 수수죄로 복역을 하다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이후 평화극장의 전신이었던 제일극장에서 매점 일을 하며 극장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임화수의 가파른 성장은 전후를 기해서 이루어진다. 영화 <충무로 돈키호테>(1996)를 보면 부산 피란시절 도박을 하다 우연히 알게 된 부산의 거부 손종록의 조카사위가 되면서 본격적인 연예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임화수는 종로 4가 제일극장을 염가로 불하받고 1951년 8월 24일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재개관하여 당당히 극장주로 영화계에 진입한 것이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과 결탁하면서 예술과 정치를 넘나드는 줄타기를 시작하였다.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하여 영화배우, 연극배우, 악극단배우 등 연예계를 총망라하여 선거행사 등 각종 정치적 모임에 참여 시키고, 연예계 유명 여배우들을 자유당 정권의 권력자들에게 소개를 하는 로비도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졌다.

    임화수의 사업 범위는 다양하였지만 초창기에는 악극단을 통한 공연물로 재력을 쌓아나갔다. 평화극장이 종로 4가에 위치하고서도 여전히 재개봉관으로 남아있었던 이유도 1950년대 당시엔 영화보다 악극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악극단은 한국 연예 주식회사를 통해 운영되었는데 당시 김희갑, 양훈, 양석천, 김진규, 김승호 등이 전속되어 활동하였다.

    임화수 일대기 영화
    <충무로 돈키호테>(1996)

    임화수는 연예계 폭력 건으로도 유명한데 전속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김승호를 구타해 3일 간의 치료를 받게 하였고, 주선태를 연행하여 7일 간 폭행했으며, 김진규, 윤일봉, 박암이 다른 회사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둘렀다. 또, 희극배우 김희갑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벌금 3만환의 형만 받기도 했다.

    1950년대 당시 임화수의 직함은 다양하다. 전국 극장 연합회 부회장, 서울시 극장 협회장, 한국 영화 제작가 협회 부회장, 한국 연예 주식회사 사장, 반공 예술인 단체장, 평화극장 사장 등 자유당 정권과 부침을 함께 한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전국 극장 문화단체 협의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은 국내 연예계가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있었음을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훗날 그는 전국 극장 문화단체 협의회 산하에 스스로 제4대 대통령 이승만과 제5대 부통령 이기붕 당선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했으며 영화배우와 예술인들을 강제로 부정선거에 가담시켜 문교부장관의 물망에 까지 올라가기도 하였다.

    임화수가 행한 영화계 행보로는 1954년 『연예시보』를 창간해 6년 간 발행하였고, 『카오스』라는 연예 월간지를 발행해 한국 연예계의 나갈 길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1956년 영화진흥법 제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점 그리고 1957년 외국과의 첫 합작 영화 등이 그가 이룬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하여 연예계를 자유당 정권의 끄나풀로 만들었던 일들과 각종 반공 행사에 소속 연예인을 총 동원하여 부패한 권력과 밀접하게 결탁되었던 점이 곧 한국 영화를 좌지우지하던 실력자로서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임화수가 일구어낸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국내 최초의 외국 합작 영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957년 국내 최대 영화사인 임화수의 한국 연예 주식회사와 홍콩의 쇼브라더스(당시“소씨부자”)와 함께 <이국정원>이라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감독은 한국에서 전창근이 참가하였고, 홍콩에서는 도광계가 참여하였으며, 쇼브라더스의 제안으로 일본인 감독 와가수기 미츠오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인의 참여를 엄격하게 규제하였기 때문에 영화가 소개될 때 일본인 감독의 이름은 삭제되었다. 당시 합작을 추진하였던 한국연예주식회사의 대표 임화수는 “합작의 상대방이 동남아 일대 제작흥행의 절대세력자인 소씨부자인 만큼 그들의 무대인 동남아 전역에의 한국영화진출이 새로운 문화교류와 상로를 열게 될”것을 기대하였다. 쇼브라더스 역시 같은 기대를 가졌다. 막 홍콩으로 본거지를 옮겨 최초의 ‘이스트만 컬러’ 영화를 제작할 것을 결심한 쇼브라더스에게 한국이라는 미개척 시장을 덤으로 안고 가는 것은 위험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국정원>은 한국에서 크게 성공하였지만 홍콩과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 판권이 없었던 쇼브라더스는 큰 이익을 얻지 못했고, 한국연예주식회사 역시 쇼브라더스가 동남아 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로 시장을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국정원>의 한국 내에서의 성공은 다른 영화사들이 홍콩의 군소영화사들과 합작을 촉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홍콩의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국제적인 영화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 합작 역시 59년을 고비로 주춤한다. 한국 내에서의 흥행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제 9회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중에서)

    사형직전의 임화수 모습

    그 외에도 임화수는 <길 잃은 사람들>, <논산 훈련소에 가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등 3년간 15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은 자유당 정권을 위한 정치적 목적의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평화극장은 1960년 4월 26일 3.15 부정선거에 따른 분노한 시위군중들에 의해 간판이 떨어지고 극장 일부가 불에 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5.16 혁명군에 의해 임화수는 자유당 정권의 대표적인 정치 깡패를 상징하는 인물로 부패척결 대상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5.16 혁명재판은 1961년 4·18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는 고려대생 10여명을 부하 폭력배를 동원하여 무차별 폭행하도록 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도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처형 전 임화수는“나는 한국영화제작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고, 첫 홍콩 합작영화도 만들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이후 평화극장은 임화수의 부인이 운영하다 한일극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한일극장은 이후 1976년까지 종로가 2번관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다 강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천호동의 한일극장이 원래 종로 4가 평화극장 자리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당시 임화수의 몰락은 곧 새로운 영화계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60년대 군사 혁명 정부도 폭력과 반공을 통한 질서유지라는 형식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바뀌었을 뿐.

    한국 영화계의 산 역사, 스카라극장
    약초극장에서 수도극장, 그리고 스카라극장으로
    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51년 3월16일 수도극장 모습
    ▲ 1951년 3월16일 수도극장 모습

    서울 중구 초동 41번지.

    스카라극장의 출발은 일본 자본에 의해 시작되었다. 1935년 개관 당시 극장명은 약초(若草)극장 혹은 약초 동보 극장(이하 약초극장)으로 불렸다. 동보라는 명칭은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인 동보영화사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일제시대 당시, 일본 영화사들의 국내 투자가 부분적으로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극장 운영자는 일본인 오까모도로서 아현동에 있던 대정관(1913년 개관)이라는 극장을 폐관하고 약초극장 운영을 맡게 되었다. 당시에는 영화상영과 공연물 등이 극장에 함께 선보였는데 1944년 이난영의 남편이었던 김해송 씨가 약초극장 산하에 “약초가극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 약초극장 지배인이던 홍찬 씨가 극장을 인수하여 수도극장으로 극장 명을 바꾸고 이후 단성사, 국도극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59년 당시 수도극장은 1,172석을 보유한 대형극장으로서, 그 외에 서울에서 1,000석 이상을 보유한 극장으로는 국제극장(1,613석), 명보극장(1,498석), 국도극장(1,322석), 단성사(1,210석), 중앙극장(1,170석), 시공관(1,082석), 씨네마코리아(1,002석) 총 7개 극장이 있었다.

    한편, 수도극장은 한국영화사에서 끊임없이 화제를 만들었던 공간이다. 국내 최초의 키스 신이 나오는 영화상영에서부터 하길종 감독의 갑작스런 요절에 이르기까지 수도극장과 얽힌 영화계의 활동상은 다양한 사료들로 남아있다.

    1954년 12월 14일 수도극장에서는 국내 최초의 키스 신이 나오는 영화 <운명의 손>(한형모 감독)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카바레 마담으로 나오는 윤인자와 방첩단 장교역의 이향의 키스 장면은 약 2초 정도가 나온다. 하지만 당시 대중들로서는 영화 속에서의 키스일지라도 그야말로 문화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심지어 유부녀인 윤인자의 남편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한형모 감독을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6.25 전쟁 이후 미국식 문화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면서 기존의 사회적 가치관 혹은 애정관과 서구문물이 상호 갈등하고 충돌하는 시기임을 알게 한다.

    1955년 당시 수도극장은 대형극장이라 외화상영을 주로 하였는데, 수도극장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중앙극장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개봉하여 관람객들의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도극장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상영시간이 길어 중앙극장에 비해서는 관람객 수가 많지 않았다.

    1956년 3월 16일 수도극장에서는 다시 한번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영화가 상영되었다. 한형모 감독의 영화 <자유부인>이 개봉된 것이다. 1954년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이 최초의 키스 장면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면, 이 영화는 유부녀의 바람으로 한국사회를 온통 <자유부인> 논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1956년 개봉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자유부인>은 1954년 가을부터 서울신문에 약 8개월간 연재되면서 교수 부인의 외도라는 소재 때문에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한형모 감독의 상업적인 영화 감각과 어우러지면서 영화 <자유부인>은 일약 대중들의 논쟁적인 화두로 다가선 것이다. 영화 <자유부인>은 당시 서울지역에서 약 15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였다.

    1958년 7월 16일 우리나라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생명>(이강천 감독)이 수도극장에서 개봉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수도극장 대표인 홍찬 씨가 자신의 영화사인 수도영화사를 통해 제작한 것인데 시네마스코프에 대한 기술력의 부족으로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기엔 역부족이었다.

    한편, 1958년 4월 20일에는 수도극장 인근에 20세기 폭스사의 설계로 지어진 대한극장이 외화 <잊지못할 사랑>으로 개관하였다.

    1957년 수도극장 홍찬 대표는 안양 석수동 소재 3만평의 대지위에 스튜디오 2개동, 수중 촬영장, 현상소등을 갖춘 동양 최대의 안양종합촬영소를 설립하였다. 그는 수도극장, 수도영화사 그리고 안양종합촬영소까지 설립하고 더 나아가 평화신문 대표까지 역임하는 등 영화계에서 언론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였지만, 이후 사업 부진과 친일파의 행적으로 인해 영화사에서 그 자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후 수도극장은 수익악화로 1962년 4월 성업공사의 공매로 넘어가고, 결국 김근창 씨에게 낙찰되었다. 그리고 안양종합촬영소는 1961년 홍성기 씨에게 인수되었다가 1966년 신상옥 감독이 재인수하여 신필름의 주요 제작 거점으로 활용하게 된다.

    1962년 9월 13일 수도극장은 스카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개관한다. 스카라극장은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인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당시에도 스카라극장은 70미리 영사기와 대형상영관이라는 현대식 시설로 서울 10대 영화관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스카라극장 시절에도 이 공간은 영화계에 끊임없이 화제를 안겨주곤 하였다. 1979년 2월 9일 하길종 감독의 영화 <병태와 영자>가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되었다. 하길종 감독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미국 UCLA 유학파 출신이었는데, 2월 25일 자신의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스카라극장을 찾았다가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충무로의 호사가들은 하길종 감독이 몰려드는 관객을 보고 흥분하여 쓰러졌다고도 하였다. 아무튼 한국 영화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왔던 젊은 지성파 감독의 요절은 우리 영화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까지 스카라극장은 초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다. 국내 극장 중에서 단성사, 대한극장, 피카디리 등이 재개관하고 국도극장이 폐관을 하였지만 스카라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70년이라는 긴 역사를 버텨온 것이다.

    물론, 지금은 예전 10대 개봉관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하지는 못하지만 한국 영화사 곳곳에서 드러나는 약초극장과 수도극장 그리고 스카라극장과 뒤얽힌 영화계 역사들은 이 공간의 소중함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한국 영화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이 곳이 더욱 의미 있는 역사적 공간으로 되살아나길 희망해본다

    중앙시네마와 벽산그룹
    1950년대 ‘극장왕’ 벽산 김인득 회장의 발자취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벽산(碧山) 김인득 회장
    ▲ 벽산(碧山) 김인득 회장

    1915년 8월 17일,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34년 마산공립상업학교(현 마산상고) 졸업. 1951년 무역과 영화수입업을 하는 동양물산 설립. 이후 전국 주요 17개 도시에 여러 극장을 소유하며 “극장왕”으로 불리워짐. 1962년 단성사, 반도극장(현 피카디리 시네마)등을 매각하며 한국스레트공업 주식회사 인수. 1972년 자신의 아호를 딴 벽산그룹으로 사명을 바꾸며 그룹 회장에 취임. 1997년 벽산 김인득회장 타계.

    벽산 김인득 회장은 해방후 부산일보 총판국장 신분으로 신문용지 구입을 위해 일본에 갔다가 재일동포 영화사업가 이현수(李鉉琇)씨를 만나게 된다. 이현수는 당시 부산의 부산극장, 시민관, 동아극장, 봉래관 등을 소유한 부산 극장가의 거부였다. 그러나 적산기업을 경영하던 자들을 민족반역자로 치부하여 사직당국에 고발하는 사회풍조가 만연한 터라 그의 극장 실무자들 또한 탈세,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되는 등 극장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때 김인득 회장은 이현수 씨의 권유로 그의 소유였던 부산 동아극장의 지배인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흥행업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50년 흥행업에 발을 내딛게 된 김인득 회장은 외국영화를 수입하여 전국의 영화관에 배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서울에 동양물산 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1952년 5월 경영난에 직면하여 도산위기 상태에 있던 단성사를 동양물산이 인수하게 된다. 이것은 배급업에서 흥행업으로의 사업 확대를 뜻하는 것이며, 이후 단성사의 인수가 동양물산의 성장에 큰 디딤돌로 작용하게 된다.

    동양물산의 외국영화 배급이 점차 사업궤도에 오르면서 동양물산의 외화배급 물량은 전국 배급의 약 60%까지 차지하게 된다. 특히, 동양물산은 직영체제의 운영방식을 확대하기 위해 인천의 동방극장, 대구의 만경관, 부산의 명성극장, 진주의 시공관, 대전의 중앙극장 등을 임차경영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56년에는 단성사를 증축하여 객석수를 확대하고 외화상영 전문관으로 자리매김시키면서 국내 최고의 흥행수입을 거두기도 했다.

    1934년. 단관의 중앙극장

    그리고 1956년 5월 서울지역에 또 하나의 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그것이 지금 명동에 자리한 중앙극장(현 중앙시네마)이었다. 당시, 중앙극장도 경영난에 직면한 때였다. 이에 김인득 회장은 재개봉관에 머물러있던 중앙극장을 단성사와 차별화하여 멜로나 순수예술작품 전문관으로 자리매김시키며 개봉관으로 승격시킨다. 그것은 주효한 전략이었다. 당시 명동입구는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여 주로 멜로물을 상영하면서 젊은 연인들의 눈물샘을 자극시켰다. 당시 공개된 작품 중 문희 주연의 <내 몫까지 살아주>에서는 문주란의 구슬픈 노래가사로 인해 여성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기도 했다.

    한편, 김인득 회장의 극장인수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57년에는 부산의 대영극장을 인수했다. 그리고 1959년에는 서울 단성사 건너편에 반도극장(현 피카디리 시네마)과 부산에 부영극장을 신축하면서 김인득 회장은 실로 흥행업계의 ‘극장왕’으로 자리 잡아 나갔다.

    그러나 이 무렵 김인득 회장은 흥행업에서 제조업으로의 사업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김인득 회장은 1962년 한참 흥행사업의 전성기에 단성사와 반도극장을 매각하고 그 자금으로 한국스레트공업 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인수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에 따른 농가주택 개량 사업에 힘입어 사업은 날로 확대 성장세에 놓이게 된다. 바로 이것이 훗날 벽산그룹의 중추적인 기반이 되었으며, 극장 흥행업은 벽산그룹의 모태 사업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김인득 회장이 극장 흥행업에서 제조업으로 사업전환을 한 배경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영화 흥행업이 TV의 등장으로 인해 사업이 축소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 때문이기도 하다. 극장업은 일요일이 대목인데 주일을 교회에 나가는 그로서는 모순된 사업이기도 했을 것이다.

    2005년, 5개관의 중앙시네마. 중앙시네마의 역사도 시나브로 70년
    이라는 긴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후 김인득 회장은 동양물산 소유의 극장을 모두 처분하고 명동 입구에 자리한 중앙극장만을 남겨두게 된다. 1960년대 중앙극장은 단성사, 대한극장, 을지극장, 아카데미와 함께 외화관으로, 국제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 수도극장은 방화관으로 분류되었다. 중앙극장이 상영한 외화로는 아카데미 수상작들인 <록키>, <사관과 신사>, <디어 헌터>, <토요일 밤의 열기> 등으로 영화 애호가들의 발길을 끌어 모은 극장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초 삼성, 현대, 대우, 선경등 대기업의 연이은 영화업계 진출 시 벽산그룹에서도 부산에 동양영화사를 설립하며 극장 인수를 타진하였으나 그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1991년 9월 벽산그룹의 40주년 기념행사는 중앙시네마에서 개최되었다. 이 날, 김인득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김인득 회장의 장남 김희철 부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김인득 회장은 사업의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경영을 마감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픈 맘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 1997년 김인득 회장은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좌우명을 남긴 채 삶을 마감하게 된다.

    2005년 현재 중앙시네마는 청계천 복개 공사를 지켜보며 벽산그룹의 상징적인 모태 기업으로서 극장 리모델링을 논의한다고 하니 그 향방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대표 영화관’ 대한극장
    반세기 동안의 끊임없는 자기 변화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국쾌남 회장
    ▲ 국쾌남 회장

    국쾌남 회장. 1922년 전남 담양 출생.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 출신. 제 4대 전남 담양 국회의원. 세기항공 사장. 세기상사 회장. 체조협회 회장 등 역임

    1952년 국쾌남 회장은 외화수입업체인 세기상사로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한극장 개관을 이루게 된다.

    대한극장은 1956년 미국 20세기 폭스 사가 설계하여 만들어진 창문이 없는 무창 건물 제 1호였다. 1956년에 착공하여 1, 2차의 공사를 거쳐 1958년 4월 18일 좌석 수 1924석으로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 작품으로는 게리 그랜트와 데보라 카가 주연한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 이었으며, 1960년에 도입한 국내 최초의 70미리 대형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대한극장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1962년 2월 1일 대한극장은 외화 <벤허>를 7개월간 장기상영하면서 무려 70만 명이라는(당시 서울 인구 약 250만명)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였던 것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도 <벤허>는 35밀리 판으로 계열극장이었던 종로 3가의 세기극장(현 서울극장)에서 3개월을 더 상영하였고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그야말로 돈방석을 깔고 앉는 대흥행을 거두게 된다. 대한극장은 1972년, 1982년, 1997년 등 <벤허>를 여러 차례 재상영하면서 대중들에게 70미리 대형 상영관의 웅장함을 널리 알리게 된다.

    1963년 국내 영화법 개정으로 국산영화 제작업과 외화수입업의 일원화가 이루어지자 외화수입 업체였던 세기상사가 한국영화 제작에까지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 이후, 세기상사는 홍세미 주연의 영화 <춘향>으로 흥행에서도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60년대 당시의 <벤허> 광고

    세기상사는 영화제작과 흥행업 그리고 항공사업 등의 비즈니스를 통해 1968년 12월 27일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주식 상장 인가를 취득하고 공개법인 요건을 구비하여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게 된다. 현재에도 세기상사는 국쾌남 회장의 장남인 국정본 회장이 약 36% 의 주식을 소유한 대주주로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되어 있는 업체이다.

    한편, 1969년 8월 22일 세기상사의 자회사였던 세기항공이 안성 상공에서 추락하여 공화당 국회의원을 비롯한 5명의 사상자를 내는 사고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조종사였던 신문섭 씨의 보상금 처리가 지연되고 후일 보상 조치가 부도처리까지 되면서 세기상사의 사업은 정부의 감찰을 받게 된다. 급기야 정부에서는 세무사찰 등을 벌이며 국쾌남 회장의 구속에까지 이르게 된다. 보상금 부도처리에 대한 사유는 언론지상에는 명확히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보상금 지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다 3년여의 시간이 지난 1972년 7월 14일 밤 국쾌남 회장이 관세법 위반혐의로 전격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후, 1975년 세기상사마저 부도에까지 이르면서 외화수입과 영화제작, 배급 그리고 전국 6개 극장을 직영 소유한 거대 메이저 영화사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서울의 대한극장, 세기극장(현 종로의 서울극장), 부산의 문화극장, 인천의 피카디리극장 등이 세기상사의 소유였다.

    <닥터 지바고>, <도라 도라 도라>,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운드 오브 뮤직>, <남태평양> 등 70미리 대형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았던 대한극장의 웅장함과는 달리 그 뒤안길은 무척이나 신산하였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후 1990년대 충무로 극장가는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에 따라 기존 극장들의 세력재편이 이루어지는 시점이었다. 특히,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들은 극장 인수와 임대에 경쟁적으로 나서게 된다. 삼성, 대우, 현대, 제일제당 등이 당시 극장 흥행업에 진출하였던 대표적인 기업들이었다.

    현재의 대한극장

    대우는 1996년 10월 대한극장, 스카라 극장과 임대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1995년에는 이미 씨네하우스 4개관을 300억에 인수한 상황이었다. 삼성은 서울극장 1개관, 명보극장 2개관, 씨네코아 1개관을 임대하였으며, 이후 삼성생명 지하와 분당, 부산 등에 극장을 신축할 계획이었다. 또한, 현대그룹의 금강기획은 압구정에 극장을 신축하여 씨네플러스라는 극장을 개관하였다.

    마지막으로, 제일제당은 강변역에 호주의 극장전문업체인 빌리지 로드쇼와 함께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공동 개발하였다. 본격적인 멀티플렉스 시대를 알리는 영화관 1호였다. 1998년 4월 4일 개관한 제일제당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1호 CGV 강변점이 도심이 아닌 부도심 관객몰이에 성공하며 바야흐로 단관 영화관의 유효기간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하였다.

    대한극장도 이러한 흐름을 간과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2000년 5월 21일 영화 <징기스칸>을 마지막으로 대한극장의 70미리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2001년 12월 15일 8개관, 275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대한극장은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 2005년 현재 대한극장은 2개관을 추가하여 10개관 멀티플렉스로 변신하였으며, 2004년 극장의 관람객 수도 약 200만 명에 육박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한극장의 이러한 성공은 아마도 끊임없는 자기 변화의 결과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 대표 영화관, 대한극장이라는 자사의 홍보문구처럼 항상 거듭나는 영화관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대중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하길 다시 한 번 기대한다.

    by 100명 2007. 3. 20. 09:52
    부산 최고의 영화관, 최초의 멀티플렉스
    부산의 대표 '부산극장'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부산 최초의 극장 '부산극장'
    ▲ 부산 최초의 극장 '부산극장'

    1934년 11월 5일. 일본 가부끼좌의 건물양식으로 개관한 부산극장. 일본인 소유의 극장으로 현재의 남포동 5가 부산극장 위치에 일찍이 자리잡았으며 현존하는 부산지역 극장들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부산의 극장 역사는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씨의 <부산영화 100년>에는 부산항 시가지도가 나오는데, 그곳에 “행좌”와 “송정좌”가 명기되어 있다. 1903년 지도인지라 개관년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부산지역 최초의 극장으로 추론하고 있다. 1907년에는 현재의 부평동 지역에 부산좌가 개관하기도 하였다. 이후, 1910년대에는 욱관, 동양좌, 보래관 등이 개관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국제관, 태평관, 유락관, 수좌등의 극장이 개관하였다. 당시, 도심에 있던 부산좌나 보래관 등은 조선인 관객들을 홀대하는 터라 이에 조선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부산진역 주변으로 유락관과 수좌와 같은 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는 동아백화점 자리였던 곳에 소화관(동아극장)이 등장하였고, 이후 부산극장이 지금의 그 위치에 개관을 하게 된다. 1950년대에는 현대극장, 국제극장, 제일극장, 대영극장, 동보극장이 들어서면서 대형 영화관 시대를 열었다. 현대극장은 55년 최신식 영사기와 대형 시네마스코프 화면(2.35대 1)으로 극장가의 대형화, 현대화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1960년대에는 동명극장, 부영극장, 국도극장, 대한극장이 문을 열었다. 1970년대에는 서면, 동래, 영도, 사상 등지로 영화관이 확대되면서 명보, 천보, 동성, 보영, 천일, 구포극장 등이 뒤를 이었다. 1980년대에는 소극장들이 들어서면서 전체 극장수가 62개에 이르렀고 1990년대에는 외국 직배사와 제휴를 한 부산극장의 전성기가 이어지게 된다.

    부산지역의 극장가는 2005년 현재 대기업과 개인극장들 간의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케 한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프리머스와 같은 대기업 체인들은 부산지역에 2-3개씩 극장을 개관하였으며, 오투시네마와 같은 개인극장들도 다른 상권에서 2호 영화관을 개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편, 1934년 개관한 부산극장은 그 오랜 세월만큼이나 여러 극장명으로 그 이름을 달리해와왔다. 1944년 부산영화극장, 1946년 항도극장, 1947년 부산극장, 1947년 도립극장, 1950년 부산극장으로 바뀌면서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부산극장은 6.25 전쟁중에는 임시수도인 부산의 국회의사당으로도 사용되었다.

    부산 최초의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부산극장'

    1972년 12월 30일 서울지역에서 극장사업을 하던 연제흠 대표가 부산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그가 현재 부산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연제민 대표의 선친이었던 것이다. 서울 영등포 지역의 연흥극장과 대구의 한일시네마 그리고 부산의 부산극장이 그의 선친이 소유한 대표적인 극장들이었다. 그 외에도 서울지역에 재개봉관인 서울극장, 뉴서울극장 등이 있었다.

    연제민대표는 1982년 선친의 가업을 물려받으면서 그 해 12월 24일 구건물을 철거하고 현대식 건물로 재개관을 하게 된다. 1993년 8월 14일에는 3개관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건물구조를 변경하며 장차 멀티플렉스 시대를 대비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연제민 대표는 이후 부산지역의 부영극장, 대한극장도 인수하며 극장의 세를 확대하였고 마산의 연흥극장과 울산의 태화, 천도극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00년 이후 대기업 멀티플렉스들의 공략으로 인해 남포동 극장가가 예전만큼 활성화되지 못하자 부산극장의 좌석 점유율도 40% 이하로 떨어지게 되었다.

    극장경영이 점차 어려워지는 상황속에서 국내 처음으로 부산지역에 극장노조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부산, 삼성, 대한 극장의 극장 노동자 30여명이 부산지역 극장 노동조합을 결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영사기사 중심으로 결성하려 하였는데 워낙 수가 적어 극장 전체로 확대하였다. 당시 노동조합 위원장이 부산극장의 영사기사인 박상종씨였다.

    이렇게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2004년 2월에는 부산극장이 경영난으로 폐관한다는 기사까지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제민 대표는 선친의 가업을 중단해서는 안되며 가능하다면 후대에까지 물려주고 싶은 바람으로 극장을 재개관시키게 된다.동시에 마산의 연흥극장은 폐관을 하고 남부시네마라는 신축건물에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려 하고 있다.

    부산지역의 극장가 상권은 남포동에서 서면, 해운대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극장의 범람으로 인해 시장상황은 더욱 힘들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국제영화제의 PIFF 광장과 자갈치 시장이라는 구경거리, 그리고 현존하는 부산지역 최고의 영화관이자 최초의 멀티플렉스 선도자라는 타이틀은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극장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한국영화의 메카, 지금은 그 터만이
    추억과 기록의 현장, 국도극장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13년 황금정 4정목 황금연예관에서 출발해 1999년 을지로 4가에서 허물어진 국도극장
    ▲ 1913년 황금정 4정목 황금연예관에서 출발해 1999년 을지로 4가에서 허물어진 국도극장

    1913년 경성부 황금정 4가 황금연예관으로 출발한 국도극장은 전당포로 돈을 번 일본인 다무라(田村)가 목조 2층 건물로 극장을 시작하였다. 이 극장은 약 1,000여명의 관객을 수용할 정도의 대규모였으며 주로 연예물을 상연하였는데, 일본 ‘닛카스 영화사(日活暎畵史)’의 개봉관이었다.

    이후 극장 운영이 활성화되면서 목조를 콘크리트로 바꾸는 건물 개축을 진행하였다. 그러다 1917년 일본인 이찌로에게 세를 주어 동아구락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다시 황금연예관이라는 원래 이름으로 재운영을 하였다. 조선극장 사장이며 무성영화 <춘향전>을 제작한 하야까와가 1년간 경영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 흥행계를 장악하고 있던 요시모도 흥행사가 황금연예관을 인수하여, 1925년에는 경성보창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였으며, 1936년에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건축하여 황금좌로 개관하였다. 당시 황금좌 내부는 양 날개처럼 좌우로 올라가는 계단과 대형 샹들리에와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설치하였으며 전형적인 르네상스풍의 궁전식 공연장으로 재건축하였다. 당시, 명동의 대표적인 영화관인 명치좌도 같은 해에 개관(1936.10.07)을 하게된다.

    1930년대 서울의 극장은 청계천을 경계로 크게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어진다. 북촌의 대표적인 극장들은 조선극장, 우미관, 단성사 등이었으며 이 극장들은 한국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극장들이었다. 그리고 남촌의 대표적인 영화관은 황금연예관, 명치좌 등이 있었으며 일본인들을 주로 상대한 극장이었다.

    황금연예관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극장건축 전문가였던 다마타(玉田橘治)였고 다마타건축사무소를 메이지마치(明治町 2丁目 25)에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0년대까지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건축사회 경성지부 지부장도 겸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황금연예관은 1945년 3월경 무대공연을 하다 분장실에서 일어난 화재로 피해를 입게 된다.

    1955년 최고의 흥행작인 이규환 감독의<춘향전>
    / 사진제공 한국영상자료원

    1946년 5월 16일 김동렬 씨에 의해 신축되어 개관하면서 비로소 ‘국도극장’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당시 변사로 유명하였던 성동호씨가 ‘국도극장’의 상임고문을 맡으면서 개관에 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으로 사장 김동렬이 북한에 납북되고 만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잠시 개관하였으나 1.4 후퇴로 다시 문을 닫게 된다.

    1954년 4월 24일 미군위안극장으로 사용 중이던 을지로 4가에 위치한 국도극장을 미군이 명도한 뒤 수리 공사를 마무리하여 그 해 5월 14일 오후 5시 국도극장 개관식을 거행한다.
    1954년 5월 14일 김해병이 사장에 취임하면서 국도극장의 화려한 극장사가 시작된다.

    1955년 1월 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12만 명을 동원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은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 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흥행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성춘향 역에 조미령, 이몽룡 역에 이민, 방자 역에 전택이, 향단 역에 노경희 등 당대의 인기 배우들이 출연하였고,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대중들의 정서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고전의 따뜻함으로 녹아내렸다. 특히 청순한 이미지의 조미령은 남성 관객들의 애간장을 태웠고, 옥중 장면의 비극적 이미지는 여성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국도극장은 1955년 <춘향전>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지로 군림하면서 <피아골>, <애인>, <황혼열차>, <육체의 길>, <흙>, <돌아오지 않는 해병>, <미워도 다시한번>2,3,4편, <8도 강산>,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고교얄개> 등 화려한 국내작품들을 주로 상영하였다.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은 1968년 한국영화의 대명사였으며, 1970년대 한국영화의 뉴 웨이브로 널리 알려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그리고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이 상영된 곳도 다름 아닌 국도극장이었다. 1975년 4월 5일 식목일에 개봉한 영화 <삼포 가는 길>은 일주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불운한 작품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국내작품을 상영하고 많은 시민들로부터 추억과 기록을 남겨준 곳이 바로 한국영화의 메카, 국도극장이었던 것이다.

    국도극장 터는 2007년 5월경 지상21층 지하4층 규모의 관광
    호텔로 신축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후 국도극장은 1999년 10월 폐관하여 86년간의 흥행가도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당시 국도극장은 근대문화유산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건물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게 된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으면 그 건물은 시세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건물을 내놓아야 하는 사적재산 침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에 국도극장은 갑작스럽게 건물이 허물어지고 약 6년간 그 곳의 비석 터만이 국도극장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2005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인 스카라극장이 허물어지게 된 계기도 이와 유사한 배경 하에 이루어졌다. 문화재청이 스카라극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예고하면서 건물주가 신속하게 건물을 허물어뜨린 것이다. 결국 근대문화유산 지정 예고는 건물주에게 신속하게 건물을 헐게 하는 일종의 경보 사이렌이 되고만 것이다. 정부당국의 안일한 대응이 이젠 국내 문화유산을 신속하게 허물어버리는 지름길이 되고 만 것이다. 이에 하루빨리 정부당국은 문화재 보존 기금 등 국내 문화유산을 올바르게 보존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해야 할 것이다

    영화계의 백전노장, 그의 선택
    [김준기의 극장순례] 서울극장과 곽정환 회장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64년 설립된 (주)합동영화는 서울극장의 모태가 되었다.
    ▲ 1964년 설립된 (주)합동영화는 서울극장의 모태가 되었다.

    곽정환(郭貞煥) 회장. 1930년 평안남도 용강 출생. 1964년 영화제작사 (주)합동영화 설립. 1967년 영화배우 고은아씨와 결혼. 1978년 9월 종로 세기극장을 인수하여 서울극장으로 상호 변경. 1981년 전국극장연합회 회장. 1992년 서울시극장협회 회장. 현재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의정부에 5개 극장을 소유한 서울시네마타운의 회장. 서울시 극장협회 명예회장.

    한국 영화계의 풍운아 곽정환 회장의 삶은 이채롭다. 그는 평안도 이북 출신에 국내 최초의 4성 장군인 백선엽 장군의 동생 백인엽의 부관으로 군 생활을 하였다. 이후 1964년 (주)합동영화를 설립하여 영화제작에 뛰어들면서 쏠쏠한 재미를 보다 1967년 당시 방년 22세의 영화배우 고은아씨(본명 이경희)와 무려 15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결혼을 한다. 1978년 그는 세기상사(대한극장 등 소유)의 2번관 극장인 세기극장을 인수하여 극장업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시켰다.

    70-80년대에는 (주)합동영화를 통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사람의 아들>, <변강쇠>등 무려 101편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이브의 체험>, <무거운 새>등 4편은 직접 감독으로 나서서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90년대 이후에는 그는 영화제작보다는 극장업과 배급업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영화사업을 전개하였다. 한때 외국 직배사 영화를 기반으로 국내 최강의 배급 실력자로 부상하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전국 5개 극장은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다.(서울 종로의 서울극장, 부산 자갈치시장의 대영시네마, 대구 중앙로의 중앙시네마, 대전의 아카데미시네마, 의정부의 의정부극장)

    이렇듯 곽정환 회장의 영화계 인생은 무려 40여년을 넘어서고 있다. 제작과 배급 그리고 상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분蔘?다루어 본 백전노장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마저 예사롭지 않다. 아무래도 40여년을 넘어서는 곽정환 회장의 영화 인생 최대 승부수는 직배영화 반대투쟁을 둘러싼 암투에서 시작될 것이다.

    77세 영화계의 백전노장은끊임없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다.
    곽정환 회장은 1988년 9월에 UIP사가 직배영화 <위험한 정사>를 개봉하려 했을 때는 시기상조라며 직배반대투쟁에 동참했다. 그러나, 1996년 직배반대투쟁위원장이었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이었던 이일목씨가 검찰에 진실을 공개하면서 직배반대투쟁의 겉과 속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그 내용은 곽정환 회장이 88년 9월 가장 먼저 UIP와 영화수급 계약을 맺어놓고도 겉으로는 직배반대 투쟁에 앞장서는 모순된 행보를 보인 것이었다. 1990년 12월 UIP 직배영화 <사랑과 영혼>이 영화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극장에서 전격 개봉되었던 배경이 뒤늦게서야 밝혀진 것이었다. 결국, 그는 1988-90년에 직배영화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 전선에서 이중 플레이를 한 것이다. 하나는 투쟁의 선봉장으로 나선 것이고 또 하나는 외국 직배사와의 은밀한 거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여느 충무로의 영화제작자이자 극장업자에서 급기야 전국 최대, 최강의 배급업자로 위치가 바뀌면서 한국 영화계의 1인자가 되었다.

    1995년 8월 강우석 감독이 (주)강우석 프로덕션을 (주)시네마서비스로 확대 개편했는데 이는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등 흥행성공작을 만들었으나 제작사의 실익은 적었다는 것이 주된 배경이라고 한다. 결국 강우석 감독은 극장 배급과 제작 편수 확대가 대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강우석 감독은 이러한 시도를 함께 할 대상으로 곽정환 회장을 찾아간 것이었다. 이후 강우석 감독은 흥행 영화를 제공하고 곽정환 회장은 전국적인 극장 배급망을 제공하면서 부자(父子)간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강우석의 형인 강용석 씨도 곽정환 회장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끈끈한 부자지간의 모습을 보였으며 한때 곽정환 회장의 소유인 대구 중앙시네마의 대표직을 역임한 적이 있다. 현재는 대구 중앙시네마 건너편에 있는 프리머스 아카데미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1996년 영화배급업계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영화계 거물인 (주)합동영화의 곽정환 회장과 (주)태흥영화의 이태원회장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화인들의 탄원서가 연이어 제출되었음에도 1997년에서야 곽정환 회장은 가석방 된다. 그리고, 1997년 4월 곽정환 회장은 시네마서비스에 5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간의 강우석 감독과의 관계는 항상 비공식적인 지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외국 직배사들은 하나, 둘씩 곽정환 회장에게서 독립하면서 직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 성과는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예정된 수순을 밟는 과정이었다. 이에 곽정환 회장은 한국 영화의 흥행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파악하면서 강우석 감독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충무로 영화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 형성에 나선 다.

    곽정환 회장과 강우석 감독의 공식적인 제휴는 1997년 한국영화산업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자본과 기획력이 결합하면서 시네마서비스는 <올가미>, <투캅스3>, <초록물고기>, <넘버3>, <편지>, <인연> 등을 제작하였고 대부분의 작품이 연이어 흥행을 거두게 된다. 1998년에는 IMF로 대기업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곽정환 회장은 시네마서비스와 신씨네를 비롯한 충무로 영화사의 작품 7-8편에 약 2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편, 곽정환 회장은 서울극장을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전환시키면서 사업가적인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서울극장이 3개관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것은 1989년 7월이었다. 아마도 이 시점은 1990년 12월부터 개봉할 직배영화를 위한 선 조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1997년 8월 서울극장은 4개관을 더 증축하게 된다. 총 7개관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것이다. 강우석의 시네마서비스에 50억을 투자하면서 다양한 한국영화를 수급 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증축이 필요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3년 4개관을 더 증축한 것은 종로 3가에 피카디리와 단성사가 재개관하는 시점까지 대비한 것이라 판단된다.

    곽정환 회장은 서울극장을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확장시켰다.
    외국 직배사를 자신의 손안에 휘어잡고 국내 영화계 최고의 거두로 일어서던 사례와 강우석이라는 야심찬 감독을 선택할 수 있는 판단 그리고 적절한 시점에 멀티플렉스를 확장시키는 모습을 지켜보면 곽정환 회장의 사업가적인 기질과 감각적인 판단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실제 곽정환 회장은 유머와 달변의 소유자이면서도 극장업계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논리 치밀한 전략가이기도 하다.

    최근 스크린쿼터 논쟁이 사회적인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스크린쿼터 축소 시 극장업계가 자율적으로 스크린쿼터 지킴이가 되겠다고 주장한 내용이 있다. 물론 시기적으로 정부의 축소방침에 동조하는 모습으로 비춰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극장업계의 주장은 스크린쿼터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결국 극장임을 상기시키는 명확한 핵심을 찌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크린쿼터의 실행은 정부의 법령이나 영화배우의 1인 시위나 시민단체의 압력이나 영진위의 정책이 아닌 극장의 의지만으로도 가능하다 것이다. 이러한 극장업계의 움직임에는 항상 곽정환 회장이 숨겨진 야전의 지휘자로 손꼽혀왔다. 지금은 서울시극장협회의 명예회장으로 한 발짝 물러선 듯 보이지만 국내 영화산업에 대한 감각과 판단은 단연코 으뜸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이 여전히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77세. 곽정환 회장. 영화계의 백전노장에게 기대하는 것은 이제 영화인들을 위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힘이 되는 지혜와 나눔일 것이다. 2005년 1월 9일. 서울극장 2관(902석)에서 시작된 극장예배는 그 첫걸음으로 보인다. 매달 마지막주 목요일에 열린다는 이 예배는 2006년 현재에도 행해지고 있다.(곽정환 회장과 고은아 대표는 연예인 교회의 장로와 권사이다.) 또한 그는 향후 중구지역에 영화교육기관을 설립하겠다고 한다. 그 시점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실행에 옮겨져 여러 후학들에게 배움의 기회와 소기의 성과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의 영화계 삶도 의미 있는 자욱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판단한다.

    음모술수의 달인에서 영화계의 제갈공명까지,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선택일 것이다. 단지, 2류 상영관에 불과하였던 세기극장이 국내 최대 좌석수를 지닌 서울의 대표극장 서울극장이 되기까지, 그 핵심 동인은 바로 그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치열하고 변화무쌍한 한국극장가
    [극장순례]메가박스의 야심찬 움직임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동양그룹은 2000년 5월 13일 아시아 최대 규모 17개 스크린, 4336석의 메가박스 코엑스점을 개관하였다.
    ▲ 동양그룹은 2000년 5월 13일 아시아 최대 규모 17개 스크린, 4336석의 메가박스 코엑스점을 개관하였다.

    국내 대기업의 영화관 진출은 삼성, 대우, 현대로부터 시작된다. 삼성영상사업단은 씨넥스(직영), 명보극장 2,4관(임대), 시네코아(임대), 서울극장 1관(임대), 대우영상사업단은 씨네하우스(직영), 대한극장(임대), 스카라(임대), 현대는 씨네플러스(직영), 명보극장(임대)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IMF가 터지면서 대기업들의 영상사업은 모두 철수의 기로에 들어서게 된다.

    이후 제일제당, 동양그룹, 롯데쇼핑이 영상산업의 후발주자로 뛰어들게 된다. 당시 동양그룹은 대우가 소유하고 있던 강남의 씨네하우스 극장과 아셈 컨벤션센터에 건립 중이던 멀티플렉스 17개관을 인수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극장산업에 참여하게 된다. (강남의 씨네하우스는 정진우 감독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대우가 인수한 것이다.)

    동양그룹의 영화관 사업 진출에 있어서 핵심은 무엇보다도 아셈 컨벤션 센터였다. 씨네하우스는 아마도 대우 측의 끼워 팔기 매물 정도로 이해된다. 당시 아셈 컨벤션 센터의 17개관 설계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으며 그 시장성 또한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이에 국내업체로는 제일제당과 동양그룹, 외국업체로는 호이츠 시네마스라는 미국 멀티플렉스 사업자가 입찰에 참여하였으며 1년 이상의 지리한 경쟁 끝에 동양그룹이 운영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제일제당이 이곳을 운영하였다면 CGV의 강남권 입성은 더욱 순조로웠을 것이다.(CGV의 서울강남권 입성은 2006년 압구정점을 개관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강남역점은 2007년 12월경 예정이다.)

    이후 동양그룹은 미국의 세계적인 극장 체인인 로우즈 시네플렉스 인터내셔널(LCI)과 2천만 달러씩을 투자해, 2000년 5월 13일 아시아 최대 규모인 17개 스크린, 4336석으로 메가박스 코엑스점을 개관하였다.(LCI는 소니인터내셔널과 유니버설 등이 주요 주주로 미국, 유럽, 캐나다 등의 400여곳 도시에 3천여개의 스크린을 가지고 있는 세계 최대 극장사업자 로우즈 시네플렉스의 자회사이다.)

    메가박스 코엑스 점은 개관부터 공격적이고 차별화된 마케팅을 선보였다. 개관행사로 <미션 임파서블 2> 시사회를 가지면서 톰 크루즈와 오우삼을 초대하였다.

    2000년 10월 27일 메가박스는 매주 토요일 상영되던 개봉 영화를 금요일로 앞당겨 개봉하기로 하였다. 극장가의 관행을 깨뜨린 것이다. 하지만 타 극장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독단적인 행동이라는 비판이 거세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극장들 간의 서비스 경쟁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 5일제가 도입되면서 금요일 오후를 즐기는 라이프 스타일을 관행이라는 이유만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시장의 파이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요일별 앞당기기는 영화사들의 마케팅 전략에 따라 수요일 개봉까지 들어서기도 하였다.

    메가박스는 토요일 개봉되던 영화를 금요일에 개봉하고,
    입장료 차별화라는 마케팅 전략을 선보였다.

    2001년 6월 29일 메가박스는 입장료 차별화라는 마케팅 전략으로 국내 극장가에 신선함을 불러일으켰다. 경쟁극장 입장에서는 관행을 합의 없이 깨트린 터라 무척이나 못마땅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 관행이라 함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배급사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쉽게 입장료 차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을 얘기하는 것이다. 메가박스는 입장료 차별화를 요일별, 극장별, 좌석별, 시간대별, 영화별로 나누어 진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극장, 좌석, 영화별로의 차별화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다.

    한편 메가박스는 요일별, 시간대별 입장료 차별화를 이루어내면서 주말 황금시간대는 8,000원으로 입장료를 인상하고 조조는 4,000원으로 인하하는 승부수를 던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와 시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배급사들도 차례차례 메가박스의 입장료 차별화에 동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배급사와 영화관이 상호 유리한 방식이 되면서 입장료 차별화가 서울지역 타 극장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지방 극장들은 아직도 입장료 차별화를 진행하고 있지 못하다.

    메가박스는 2001년 5월 수원점과 7월 부산 서면점을 각각 2호점과 3호점으로 연이어 개관하였다.

    2001년 9월 1일, 동양그룹 영상사업 계열사들이 모그룹의 계열 분리 시책에 따라 ‘오리온 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고 모그룹으로 분리됐다. 오리온 그룹은 16개 계열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기존의 제과사업을 하는 ‘동양제과’와 메가박스를 중심으로 하는 ‘미디어플렉스’ 그리고 OCN과 투니버스등 9개 케이블 채널을 운영하는 영상지주회사 ‘온 미디어’로 구성됐다. 금융, 증권 사업을 진행하던 기존 동양그룹과 분리된 오리온 그룹은 영화, 미디어, 유통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2002년에 들어서면서 대구점과 해운대점을 각각 개관하였다. 또한, 오리온 그룹 미디어플렉스가 배급사 ‘쇼박스’를 설립하면서 10월경 영화 <중독>으로 그 첫발을 내딛기도 하였다.

    한편, 메가박스는 중, 소도시의 영화관 진출을 위해서 지역극장과 제휴를 맺어 ‘영화관 운영대행’이라는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메가라인’ 이라는 브랜드를 출발시켰다. 메가라인 영화관은 매출의 약 7%라는 운영대행 수수료를 지역 극장주들이 부담하면서 영화배급과 마케팅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입장권 매출의 7% 라는 수수료는 지역 극장주들에게 순 이익의 대부분을 지불하는 부담스러운 비율이서 극장가의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CGV와 롯데시네마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수수료는 매점 매출과 스크린 광고비 그리고 인건비까지 지역극장이 지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부담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12월 26일 메가박스는 서울 논현동의 씨네하우스를 낙후된 시설과 강남지역 극장들의 경쟁구도가 심화됨에 따라 아쉽게도 폐관을 결정짓게 된다.

    2007년형 멀티플렉스의 표준을 선보이겠다는 메가박스의
    야심찬 움직임이 2006년 4월 메가박스의 서울 목동점 개관
    으로 시작했다.
    2003년도에는 메가박스는 메가라인에 주력하면서 직영점 오픈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2004년에 들어와 전주점, 울산점을 오픈하기는 하였지만 지역 극장가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CGV와의 경쟁구도에서 점점 밀려나는 처지가 된다.

    한편 메가박스는 2005년 6월 1일 이동통신사 중에서 SKT와의 제휴가 해지되면서 CGV와의 경쟁구도에 큰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영화관의 최대 승부처가 이동통신사와의 제휴가 되어버린 작금의 극장가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이동통신사와의 제휴가 혹은 할인이 국내 극장산업을 기형적으로 성장시키는 구조는 하루빨리 시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특히, 할인요금 2,000원중에서 500원 ~ 1,000원을 극장가에 부담시키는 사례는 이동통신사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할인이라는 이유로 시작하였던 이동통신사의 정책이 점점 국내 극장의 분담금으로 넘어가서 이동통신사의 요구에 따라 장단을 맞추어야만 하는 극장가의 현실이 기막힌 노릇이다.
    2006년 4월 메가박스의 서울 목동점이 개관하였다. 2007년형 멀티플렉스의 표준을 선보이겠다는 메가박스의 야심찬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연말에는 신촌역사에 또 하나의 메가박스 직영점이 개관될 예정이다. 서울에서의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3파전이 불꽃을 튀길 것으로 예상된다. 후발주자로 시너스, 프리머스 등의 각축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메가박스 코엑스 점의 연간 600만 이상의 관람객 동원은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다고 한다. 더 나아가 국내 극장가의 마케팅은 세계 최고라고 한다. 영화관 박람회인 씨네아시아와 쇼웨스트 등에서의 국내 극장가의 선전은 그간의 변화무쌍한 국내 극장가의 움직임에 기인한 것이다.

    메가박스가 항상 그 변화의 선두에 나서길 기대한다.

    70년 역사가 계속되길
    [극장순례] 광주의 최초 민족자본 영화관, 광주극장
    [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50년 광주극장 전경 (자료출처: 박선홍의 『광주 1백년』)
    ▲ 1950년 광주극장 전경 (자료출처: 박선홍의 『광주 1백년』)

    빛고을 광주. 이곳 역시 최초의 영화상영관은 일본인 자본에 의해 시작되었다. 현재 충장로 파레스호텔 자리의 광주좌와 현재 무등극장 자리의 제국관이 바로 일본인 자본의 영화관이었다.

    광주좌는 일본인 후지가와 다다요시가 총 공사비 800원으로 1924년 4월에 착공, 1925년 11월 3일 개관을 하였다. 규모는 총 건평 120평의 목조 2층 건물이었으며 정원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입장료는 좌석에 따라 요금차이가 있었는데 1층은 20전, 2층은 25전을 받았다. 관람석은 의자가 없는 대신 다다미에 앉아서 보게 되어 있었으며 통로가 될만한 곳에 판자를 깔아 신을 신고 다녔고 관람석은 신을 벗고 들어가게 하였다.

    광주좌의 주인 후지가와는 영화나 연극이 새로 들어 오면 개관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일본 가정에 비치된 신을 모셔 놓은 작은 사당인 가미다나에 고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1931년 11월 8일 이 날도 고사를 지내다가 촛불이 넘어져 그만 삽시간에 광주좌가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곧바로 가설극장을 지어 '광남관'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했지만 별로 성황을 이루지 못 했다.

    그 이듬해 일본인 구로세 도요다가 수용인원 6백 74명 규모의 최신시설을 갖춘 제국관(지금의 무등극장 자리)을 세웠는데 이에 따라 ‘광남관’은 폐쇄되고 말았다. 제국관은 일본인 구로세 도요다가 당시 경성의 명동 명치좌 건물의 본을 따서 설립한 것으로 674명의 인원을 수용하였으며 야간에만 문을 열었다. 제국관은 일본영화나 연극흥행을 주로 하였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사인 도호(東寶)의 전속극장이었다.(박선홍저, 『광주 1백년』, 도서출판 금호문화, 1994)

    제국관은 해방 후 일본인 경영자가 물러나면서 이 극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전기섭이 불하를 받아 경영을 하였다. 처음에는 공화극장이라 하였으나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하여 동방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후일 경영주가 바뀌면서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여 오늘날의 무등극장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제국관에서 상영되는 일본영화들은 보통 일주일간 지속되었으며 광주좌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을 우선적인 관람대상으로 하는 민족차별적인 문화공간인 것이다.

    1935년 10월 1일. 광주시 동구 충장로 5가 62번지. 광주 최초의 민족자본에 의해 건립된 영화상영관 광주극장(1,250석 규모)이 개관하였다. 일제 강점기동안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상가는 충장로 1가에서 3가까지 형성된 반면에 조선인들의 상점은 충장로 4, 5가를 중심으로 몰려있었다.

    광주극장은 영화상영뿐 아니라 해방 이후 정치적인 집회와
    대중연희, 스포츠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광주극장의 창립자 유은 최선진은 전남 담양과 화순등에 토대를 둔 만석꾼이자 광주지역의 경제문화계 유지이다. 이 극장은 자본금 30만엔과 불입자본금 7만 5천엔을 투자하여 1933년에 극장 설립을 신고하였으며 1935년 10월 1일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하던 날 개관한다.

    설립 당시 임원진으로 사장에 최선진, 지배인에 대흥농장의 지배인 조응원, 그리고 법인이사로 김희성, 최준기, 조국현, 유연상, 최동문 등 광주지역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인사들이 이사로 참여하였다.


    설립자 최선진은 광주극장 이외에도 1937년에 광주지역 인근의 송정리 극장과 전라북도의 강경극장을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해방이후엔 전남 목포의 평화극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광주극장 개관 훨씬 이전인 1921년에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설립한 유은 재단은 현재의 동성중, 동성여중, 광주여상, 광주상고 등 4개 학교의 모태가 된다.

    해방 직후 광주극장은 정치적인 집회와 대중연희의 공간으로 주로 활용되었다.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라남도 위원회 결성과 8월 18일에는 광주청년단 결성이 광주극장에서 이루어진다. 이 외에도 학예회, 졸업식, 음악회, 연극 등 각종 문화교육 및 정치행사에 영화관 공간을 활용하였다. 또한 스포츠 행사도 종종 열렸는데 1948년 일본 미들급 챔피언인 문춘성의 권투 시범경기가 광주극장에서 열렸다.

    1950년대 광주지역의 개봉관 극장은 광주극장과 동방극장이 주도하는데, 광주극장은 방화 위주의 상영을, 동방극장은 외화중심의 상영을 하게된다. 광주극장에서 상영된 방화중 흥행에 성공했던 작품은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이다. 서울 국도극장에서 1955년 1월 6일 개봉하여 2개월동안 12만 관객을 동원하였던 작품이며 광주에서는 1월 30일 개봉한다. <춘향전>의 인기가 대단하여 1959년까지도 재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광주극장에서 외화를 상영하기도 하였는데 하루 입장 관객수가 약 2천 9백명에 달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대표적인 외화였다. 당시 일일 2천 9백명이라는 관람객 수는 실로 놀라운 흥행이었다.

    한편, 광주극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영화가 흥행이 되면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이 전통이었다고 한다. 보너스를 지급하던 봉투에는 항상 “만축(滿祝)”이라 쓰여져 있었으며 쉽게 말하자면 관람객 매진을 자축하는 의미로 사용되던 용어이자 봉투인 것으로 판단된다.

    광주극장은 상업 영화관과는 차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자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가입했다.

    1970년 12월 11일, 광주극장과 양대산맥이었던 동방극장 자리에 폴 뉴먼 주연의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1969)를 개관작으로 준비한 무등극장이 들어선다. 이후 광주지역에서 상업적인 위치나 관람객 규모를 고려해 볼 때 광주를 대표하는 영화관은 단연 무등극장을 손꼽게 된다. 특히 무등극장은 지방 영화관의 자본을 모아서 한국 영화 제작에 투자하기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의 간접배급까지 맡고 있어서 제작, 배급, 상영을 두루 아우르는 실세 극장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CGV와 롯데시네마 등의 대기업 멀티플렉스들이 들어서면서 지역 토착 자본의 개인 극장들은 날로 그 위세가 축소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광주극장은 시내 상권의 변모와 낙후된 시설로 인해 상업 영화관과는 차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자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가입한다. 2002년 12월 26일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지정받은 광주극장은 예술영화를 1년에 105일 이상 상영하는 조건으로 지원금과 차별적인 예술영화관으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여전히 가로 16m, 세로 9m의 대형 스크린은 광주극장만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현재에도 광주극장은 설립자인 유은 최선진 이후 최동복, 최채석, 그리고 현 사장인 최용선에 이르기까지 4대째 가업으로 극장사업을 하고 있다. 한때는 멀티플렉스로의 변신을 꾀하려 하였지만 관련 법규와의 충돌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술영화관으로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민족자본으로 일구어낸 70년 역사의 광주극장에 많은 지역민들의 관심과 보살핌이 어우러지기를 바래본다. [광주극장 홈페이지]

    두 신(申)의 충무로 전성기

    신상옥 감독, 신영균 회장과 명보극장

    1961년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 1961년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1957년 8월 25일, 서울 중구 초동 18-5 번지. 명보극장이 개관하였다. 명보극장의 설계는 우리나라 현대 건축의 선구자인 김중업 씨가 맡았다. 2, 3층 규모에 1,498석을 자랑하는 대형 단관 영화관이었다. (당시 가장 큰 좌석수의 영화관은 광화문에 위치한 국제극장의 1,613석이었다.) 그리고 개관영화로는 그레이스 켈리, 빙 크로스비 주연의 1956년도 작품 <상류사회>(High Society)였다. 그레이스 켈리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모나코의 왕비가 되었다.

    1961년 신년 초 충무로에서는 국제극장 전속 홍성기 감독과 명보극장 전속 신상옥 감독이 원작 <춘향전>의 영화 제작으로 불꽃튀는 경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1961년 1월 18일 홍성기 감독은 국제극장에서 <춘향전>을 개봉하고 열흘 후인 1월 28일에는 신상옥 감독이 명보극장에서 <성춘향>을 개봉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춘향전>의 여배우 김지미와 <성춘향>의 여배우 최은희의 자존심 건 연기 대결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은 개봉 8 일차인 1월 26일 김수용 감독의 <부부독본>에 밀리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홍성기 감독과 김지미의 대 참패였다. 반대로 신상옥 감독은 4월 7일 영화 <번지없는 주막>이 상영될 때까지 3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신필름 왕국’의 신화를 낳는 교두보가 되었다. 1961년 9월 군사정권의 강제적인 정책하에 국내 71개 영화사 통폐합시 단독으로 영화사 설립 신고를 한 유일한 영화사였다.

    결국 16개 영화사로 통폐합되었지만 신필름은 단연코 으뜸이었다. 영화 <성춘향>의 흥행 성공은 실로 신상옥 감독의 시대를 여는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영화 <성춘향>은 국내 최초로 칼라 시네마 스코프를 시도한 작품이었다.

    한편 명보극장과 신상옥 감독과의 전속 관계는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9년 명보극장은 신상옥 감독의 <자매의 화원>으로 전속 계약을 맺으며, 1960년 <로맨스 빠빠>로 상업적인 안정세를 구가하였으며, 1961년 <성춘향>의 흥행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후 <연산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등 신상옥 감독의 시대가 펼쳐지면서 한국 영화의 전성기이자 충무로 일대의 상권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1994년 명보극장은 명보프라자로 이름을 바꾼 뒤
    5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전환했다.

    1977년 8월 15일 영화배우 신영균은 명보극장을 인수하여 프란시스 코폴라(Francis Coppola)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 프랭클린 샤프너(Franklin Schaffner) 감독의 <빠삐용>(1973) 등을 상영하였다. 한국 영화로는 이문웅 감독의 <내가 버린 여자>(1978), 하길종 감독의 <속(續) 별들의 고향>(1979), 변장호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 80>(1980)을 상영하여 3년 연속 한국영화 최다관객 동원을 기록하였다.

    1987년 명보극장은 미국의 조지 루카스 감독이 개발한 THX 음향 체계를 국내 최초로 도입하여 영화관의 현대화에도 일조하였다. 영사기는 35미리, 70미리를 겸해서 영사할 수 있는 미국제 심플렉스 영사기를 도입하였다.

    1994년 명보극장은 명보프라자로 이름을 바꾼 뒤 5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 출발하였다. 좌석수는 1관 494석, 2관 379석, 3관·4관 각 432석, 5관 304석으로 총 2,041석이다. 극장설계는 1992년 대한민국 건축 대상을 수상하고 <예술의 전당> 설계를 담당했던 김석철씨가 맡았다. 김석철씨는 <명보 프라자>를 1994년 건축대상에 출품, 그 해 최고로 아름다운 건축 대상을 수상하여 실용성과 작품성을 아우르는 평가를 받았다.

    2001년 9월부터는 약 3개월에 걸쳐 극장내부의 인테리어 및 좌석간의 간격을 기존 극장보다 넓은 105∼120㎝로 넓히는 공사를 했으며, 상호를 명보극장으로 변경했다. 좌석 간격을 넓힌 탓인지 1관 378석, 2관 304석, 3관 296석, 4관 296석, 5관 291석으로 총 1,565석으로 좌석수는 감소하게 된다.

    명보극장의 신영균 회장은 서울대 치대를 나와서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운영하였던 치과의사였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연극 <삼일천하>로 무대 경험을 하였으며 이 연극을 본 조긍하 감독의 권유로 1960년 황순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과부>에 데뷔하게 된다. 그 외에도 강대진 감독의 영화 <마부>와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 <빨간 마후라>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또한 배우 시절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이 되어 시작한 사업이 동시상영관인 금호극장 운영이었다. 그에게서 극장사업의 시작은 금호극장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이 때 벌어들인 자금으로 명보극장 옆에 위치한 명보제과를 인수하였는데 당시 명보제과는 태극당, 뉴욕제과, 풍년제과와 함께 4대 제과점으로 손꼽혔다. 명보제과는 25년간 운영하였으며, 이후 명보극장까지 인수하여 신축 멀티플렉스 건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신영균 회장의 아들인 신언식씨는 현재 신맥이라는 회사의 대표이사인데 대전 이북의 맥도널드 지점을 총괄 관리하고 있다. 명보제과에서 명보극장 그리고 맥도널드까지 그의 사업은 점점 더 다채로와진다.

    신영균 회장은 황순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과부>에 데뷔한다.
    한편 그는 15, 16대 국회의원까지 역임하였으며 1999년에는 제주도에 신영영화박물관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서울증권의 지분을 인수하며 경영권 분쟁이라는 기사로 한바탕 떠들썩한 기사거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주방송 20% 지분과 서울방송 5% 지분은 신영균 회장의 방송에 대한 관심을 알게 한다.

    현재 명보극장은 대기업 멀티플렉스들의 공세에 밀려 5개관중 2개관을 MTV 측에 임대로 제공하여 3개관 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예전의 명성에 비하면 많이 빛바랜 모습이다. 대한극장, 단성사, 피카디리의 개관으로 명보극장의 입지가 많이 위축된 탓이다. 교통이나 위치등에서 애매하다. 다만 단성사에서 대한극장까지 이어지는 영화의 거리가 조성될수 있다면 명보극장의 부활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신영균 회장은 최근 고 신상옥 감독의 추모행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열정을 불태우던 영화, 영화인들과 함께 어우러졌을 모습이 그려진다. 그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명보극장과 함께 다시금 꽃 피워지길 기대한다.

    아시아의 시네마 로드를 꿈꾼다

    [김준기의 극장순례] 연재를 마치며

    부산 최초의 극장 부산극장
    ▲ 부산 최초의 극장 부산극장

    한국 영화사에서 역사의 흐름은 대부분 영화 제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배급과 상영은 그야말로 주변부적인 이야기 거리로 취급한다. 하지만 영화산업을 구성하는 제작-배급-상영이라는 세가지 영역의 역사가 그물처럼 촘촘하게 엮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긴 그물의 영화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러한 소명의식을 끝까지 글로써 이어내지 못하는 필자의 죄송함을 먼저 전달하고자 한다. 바쁜 일상이 게으른 일상에 드리워지면서 자연히 극장순례의 원고 쓰기가 힘들어졌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은 남지만 잊혀진 극장들을 인터넷이라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끄집어 올렸다는 점이 작은 보람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극장순례를 연재하면서 여러 극장 관계자 분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부산극장을 취재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부산극장은 서울 영등포의 연흥극장(현재 폐관)과 대구 한일극장의 대표와 형제지간이며 그 분들의 부친인 연제흠 회장이 서울 수도권과 대구, 부산, 마산, 울산 등 여러 곳의 극장을 가꾸어 놓으셨다. 하지만, 부산극장에서도 필자가 원하는 영화관에 관한 자료는 완벽하게 없었다. 허망한 느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부산극장 관계자는 부산에 있는 한국영화자료연구원에서 부산극장과 부산지역 영화사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건넨다.

    부산역 인근의 사무실에서 만난한국영화자료연구원장 홍영철 선생님. 그 때 처음 뵙고 그간 바쁘다는 이유로 찾아 뵙지 못한지라 홍영철 선생님의 개인 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은 없다. 다만 지금까지도 직장생활과 연구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부산지역 영화사를 낱낱이 기록에 남기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이 발간한 <부산영화 100년>은 부산 영화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책에서 부산극장의 희미한 흑백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존하는 부산지역 최고의 영화관인 부산극장의 역사가 책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여담으로 이 책을 발행하는데 있어서 부산극장이 스폰서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1957년 9월 28일 광화문 사거리 서남쪽에 약 1800석 규모로 개봉한
    국제극장. 제임스 딘 주연의 <쟈이안트>(1956)와 <알렉산더 대왕>
    (1957)의 걸개 그림이 개봉박두임을 알리듯 영화관 벽면에 길게 내
    걸려 있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은 서울 중심의 한국 영화 바라보기에서 지방 중심의 영화사 바라보기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한국 영화사를 풍성하게 하는 귀중한 지역 영화사 연구임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광주, 전주, 대전, 대구 등 한국영화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지역 영화사 연구도 시급한 과제로 남겨질 것이다.

    국제극장은 의외로 허리우드 극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허리우드 극장의 이창무 대표가 서울시극장협회장이면서 최배달의 수제자였다는 이채로운 이력에 호기심을 갖고 찾아간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허리우드 극장은 국제극장 소유였음을 알게 되었고, 국제극장에 관한 50-60년대 흑백사진들을 앨범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재일교포 이강우 회장. 광화문 사거리에 위치한 영화관 1번지 국제극장. 그 건물의 웅장함과 이강우 회장의 세련된 모습은 대중들의 기억 속에 사라진 영화 공간과 역사를 드디어 발견하여 복원할 수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이외에도 중앙극장의 자료를 구하면서 벽산건설의 김인득 회장이 중앙극장을 소유하며 1960년대 극장왕으로 불리워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강우 회장과 김인득 회장. 그들은 1950~1960년대를 주름잡던 한국 영화계의 거물급 인사였지만 대중들의 기억속이나 한국 영화사에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황무지와 같은 1950~1960년대 한국영화산업에 관한 역사 연구도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다.

    서울 최고의 영화관인 스카라 극장의 해체는 허망함이라는 표현으로도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역사적 가치로서 영화 공간을 바라보는 행정당국의 뒤늦은 문화재로서의 가치 인정은 그럼에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행정당국의 대처는 너무나 안일하였다. 문화재 지정 공시가 나자마자 건물주는 건물비용을 못 받을 것을 걱정하여 발표 직후 곧바로 건물을 해체한 것이다. 건물이 허물어지자 아무런 대처방안도 없는 행정당국. 차라리 문화재 지정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원망도 앞선다.

    해체되기 전의 스카라 극장 모습

    스카라 극장을 끝으로 서울지역 단관 영화관의 역사는 마침표를 찍게 된다. 단성사, 피카디리, 대한극장의 멀티플렉스로의 변신과 해체된 스카라 극장의 빈 자리는 단연코 대기업들의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이 꿰차고 들어섰다. 이제 극장산업의 주인공은 대기업의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이다.

    2005년 1인당 영화관람 횟수는 미국이 4.7회, 한국이 3.0회이다. 미국과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굳이 1인당 영화관람 횟수를 비교하자면 국내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성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에 국내 극장 산업의 포화는 개인극장의 소멸과 동시에 2~3년 이후를 바라보아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의외로 국내 영화시장의 파이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작금의 현실을 인정한다면 이제 행해야 할 과제는 대기업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의 상업자본을 견제하고 국내 영화시장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영화라는 것이 상품과 예술적인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한 국가의 영상문화는 상품과 예술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이러하다면 대기업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의 상품적인 속성을 견제하여 예술영화에 대한 마이너 쿼터제 등 일련의 대책이 조심스럽게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국내 극장가를 뛰어넘어 우리의 시야를 외부로 돌린다면 향후 국내 극장산업의 화두는 멀티플렉스의 외국 진출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기업 멀티플렉스에게 바라는 한가지 소망이라고 한다면 국내 영화가 아시아의 드넓은 지역을 활개치고 상영될 수 있도록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필자는 그것을 가칭 아시아의 시네마 로드라고 부르고 싶다. 2006년 말 CJ CGV의 중국 진출 등이 아시아 시네마 로드의 중요한 디딤돌이 되기를 꿈꾸고 희망한다.

    by 100명 2007. 3. 20. 09:27
    천안 극장가 '지각변동'
    이달말 CGV 개관 앞두고 영화관 고객 확보전 치열
    박상수
    천안 대흥동 명동거리에 위치한 8개관 1400석 규모의 CGV천안 영화관이 이달말 개장함에따라 기존에 영업 중인 2곳의 대형 멀티플렉스와의 고객 확보 유치전이 가열될 것으로 전망된다.

    천안지역에는 2001년 처음으로 야우리멀티플렉스가 문을 열면서 지역 영화관업계의 1인자로 군림해오다, 2005년 두정역 인근에 1391석 규모의 씨너스천안점이 문을 열면서 두 영화관의 양강체제가 이어져왔다.

    그런 와중에 두정동 상업지구에 대형 CGV관이 공사를 착공했으며, 이를 대비해 야우리멀티플렉스는 지난해 8개 관에서 14개 관(3200석)으로 시설을 대폭 확장하고 고객유치전에 나섰다.

    특히 이들 대형 멀티플렉스의 입점 위치가 시외버스와 고속터미널, 전철역, 기차역 인근으로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어서 고객 유치에 큰 장점이 있어 향후 고객확보전이 뜨거워질 전망이다.

    이와함께 CGV 천안점 인근 약 2∼3분 거리에 위치한 천안민자역사에도 대형 영화관이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 향후 천안지역 영화관 경쟁은 더욱 치열해 질 것으로 보인다.
    by 100명 2007. 3. 19. 07:04
    외화 <300> 흥행 조짐 극장가 비수기 탈출 사인? [JES]
    외화 <300>이 극장가 비수기를 비웃 듯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영화의 수입사 워너브러더스코리아는 “주말이 낀 14~18일 전국 스크린 293개에서 102만 관객이 <300>을 봤다”고 밝혔다.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점은 <300>이 상영중인 2관에서만 매진 행렬이 이어지고 있고. 압구정CGV와 롯데시네마 건대점에서도 대형관 3~4개관을 <300>이 점령하고 있다. 스타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 영화라는 걸 감안하면 이례적인 현상이다.

    16일 열린 <이장과 군수> 시사회에 나타난 주연 배우 차승원도 “<300>의 위력이 대단하다”며 “우리 영화가 2주일 늦게 개봉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을 정도다.

    <300>은 100만 페르시아 대군에 맞선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의 테르모필레 전투를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 <글래디에이터> <트로이> 등 서사액션 장르의 웅장함과 거대함. <매트릭스>가 연상되는 시각적 쾌감이 이 영화의 강점이다. 프랭크 뮐러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새벽의 저주>의 잭 스나이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오페라의 유령> 제라드 버틀러. <반지의 제왕> 데이비드 원햄. <그림형제> 레나 헤디 등이 출연했다.

    <300>의 선전은 우리나라만의 기현상이 아니다. 9일 개봉한 미국에서도 70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며 역대 3월 개봉 영화 중 사상 최고 성적을 냈다. 그리스에선 <캐리비안의 해적:망자의 함>을 깨고 역시 최고 오프닝 성적을 기록했고.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도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 중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by 100명 2007. 3. 19. 07:02
    베트남, "멀티플렉스가 뜬다"
    '미국식 문화'를 온몸으로 소비하려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

    김중희 기자 jhkim@akn.co.kr

    베트남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미국식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인기를 모으며 베트남인들의 영화관람 문화를 바꾸고 있다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일명 '복합상영관'이라고 불리는 멀티플렉스는 보통 10개 이상의 대형 상영관을 비롯 대형주차장ㆍ식당ㆍ카페ㆍ쇼핑타운, 각종 전시장 등을 한 건물 안에 부대시설로 갖추고 있는 블럭으로 한 공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원스톱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한다.

    8500만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베트남은 몇 년 사이 헐리우드를 주축으로 한 영화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 '아시아 최후의 잠재시장'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또 최근 베트남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외국 문화산업의 베트남 시장 진출이 한결 수월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미국 영화 배급사들은 베트남 젊은이들이 헐리우드 영화를 가능한 한 많이 접할 수 있도록 멀티플렉스의 문턱을 낮추고 성공적인 현지화 정착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헐리우드의 따끈따끈한 영화들을 베트남으로 날라오고 있는 이들 중 한명인 트란 카이 호앙은 컬럼비아 트리스타의 경영자였던 테드 셔그루와 손을 잡고 메가스타 미디어 조인트벤처를 설립했다.

    메가스타는 기존의 베트남 주류영화라고 할 수 있는,다분히 교육적인 사상영화나 정부의 홍보영화에서 벗어나 '미션임파서블3' '캐리비안의 해적'을 비롯한 손꼽히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성공리에 베트남 젊은이들에게 선보이며 푹신한 의자와 고소한 팝콘, 톡쏘는 펩시와 함께하는 소위 '미국식 영화관람 스타일'로 베트남 젊은이들을 열광케 했다.

    호앙 씨는 "멀티 플렉스에 매혹된 젊은이들은 더 이상 집에서 저화질의 불법 DVD를 보거나 어둡고 침침한 예전 영화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며 기존 베트남 영화관보다 세배나 비싼 티겟가격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찾는 이유는 단순한 영화관람만이 아닌 '미국식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분석했다.

    by 100명 2007. 3. 19. 06:50
    극장가는 지금, ‘한국영화 수난시대’
    한국 영화 부진, 당분간 지속될 듯
    2007-03-16 23:31:23

    ◇ 14일 개봉,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300> ⓒ 워너 브러더스

    2004년 <실미도>를 시작으로 3년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를 네 편이나 배출하는 등 한국 영화는 외적으로는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영화 위기론’ 역시 끊이지 않고 제기되어 왔다.

    박스오피스의 외적 성장과 달리 비디오, DVD 시장 등 부가산업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할 정도로 극심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등장이 극장가의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 역시 수없이 지적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영화 위기론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국 영화계가 위기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영화 산업의 외적인 성장은 스크린 쿼터 축소로 이어졌고 관객 증가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각종 할인 제도의 폐지는 최근 전체적인 관객 수의 축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외국 영화 점유율 80% 육박

    이런 틈을 타 한국 극장가에는 또 다시 허리우드 영화가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난 주(3월 9일~11일/서울 기준)에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을 필두로 한 미국영화가 박스오피스 1,2,3위를 석권함은 물론 외국영화의 점유율이 70%에 육박했다. 이는 한국 영화의 본격적인 중흥기가 시작된 2004년 이후 처음 있는 현상이다.

    이번 주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허리우드 블록버스터 <300>이 개봉한 14일에는 외국 영화의 점유율이 83.3%에 이르렀으며 맥스무비 예매 순위 1,2,3,4위를 미국 영화가 차지하고 있다. 기대를 모았던 감우성, 김수로 주연의 <쏜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5위에 머물러 있다.

    불과 한 달 전인 2월 14일의 한국 영화 점유율이 85.9%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완전히 반전된 셈이다. 이 같은 한국 영화의 부진은 이렇다 할 블록버스터 영화가 없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 영화가 몇몇 대형 영화에만 기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 <스파이더맨 3>는 5월 이후 전개 될 허리우드 블록버스터 공세의 선봉에 선다. ⓒ 소니 픽쳐스
    자극적 소재에 치우친 제작 시스템 개선해야

    영화 팬들은 점차 한국 영화에 식상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의 소재가 지나치게 조폭과 코미디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 등 깡패 역할 한번쯤 거치지 않은 정상급 배우가 없을 정도라는 지적도 나온다. 90년대 몰락의 길을 걸었던 홍콩 영화의 예를 들며 한국 영화도 몰락할지 모른다는 위기론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 이유다.

    5월 이후에는 <스파이더맨 3>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다이하드 4.0> 등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어 미국 영화의 본격적인 반격에 대한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더더욱 힘겨운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 영화가 블록버스터 영화에만 치중한 채 다양한 소재의 작은 영화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소홀히 해서는 한국 영화의 미래는 어둡다. 특히, 자극적인 소재에 몰리는 기회주의적 제작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위기론은 위기론 그 자체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료 참고 : 영화진흥위원회

    [이한철 객원기자]
    by 100명 2007. 3. 18. 16:56
    극장을 보면 시대 문화 코드가 보인다1
    » 시드니오페라하우스. 단순한 극장을 넘어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처음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됐고, 의도대로 오스트레일리의 대표 이미지가 됐다. 현대건축물로는 드물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됐다.

    우리나라든, 아니면 외국이든 우리가 여행을 떠났을 때 보러가는 곳들은 거의 예외없이 건축물들입니다. 동서양 막론하고 그나라 궁전들, 그리고 절이나 성당같은 종교 건축물, 또는 각종 기념건축물들을 보게 됩니다. 결국 여행이란 건축물과 만나는 일일 수도 있지요. 이는 건축이란 것이 나라별 정체성, 그리고 그 시대적 특성, 그리고 당대 문화의 흐름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라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여러가지 건축물들 가운데에서도 각 시대별 특징, 또는 정치적 지향성, 그리고 문화적 특징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건물은 어떤 것일까요? 시대별 정치와 문화를 가장 즉각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건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극장 입니다.

    동양권에서는 조금 다릅니다만 특히나 서양 건축에서 이 극장이란 것은 언제나 그 시대의 정치적 특성과 문화적 흐름이 담기는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양식 건축관이 지배하는 요즘에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0래서 극장을 보면 그 나라의 특성, 그리고 정치적 경향, 문화적 지향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극장이 지어진 시대 그 지역의 사회를 압축해 놓은 일종의 블랙박스인 셈입니다. 어떤 나라, 어떤 지역의 문화코드 사회코드를 읽으려면 극장을 보면 됩니다.

    시드니오페라하우스. 단순한 극장을 넘어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처음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됐고, 의도대로 오스트레일리의 대표 이미지가 됐다. 현대건축물로는 드물게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됐다.

    정말이냐구요? 그러면 각 나라별로 가장 중심지에 뭐가 있는지 보시면 알게 됩니다. 극장은 항상 중심지에 지어집니다. 그리고 항상 정권자가 국가 사업으로 짓습니다. 이는 곧 극장이 문화의 장이지만 동시에 시대적 정치적 오브제가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극에 달했을 때 지은 곳이 서울시민회관이었습니다. 이 시민회관이 불이 나 다 타버린 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가 가장 공을 들여 가장 화려하게 지은 게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입니다.

    이는 전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혁명후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 3세가 파리 정비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목해 중심부에 세운 것이 파리오페라극장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은 어떤가요. 각 지자체에서 가장 중심부에 시청, 도청 말고 또 뭐가 있나요? 문화회관, 시민회관이란 이름의 극장들이 그 옆에 있습니다.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6공 당시 국책사업이었다.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선비의 갓모양으로 꾸몄는데 미학적 평가는 엇갈린다. 바로 옆 콘서트 홀은 부채 모먕이다.

    »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6공 당시 국책사업이었다.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선비의 갓모양으로 꾸몄는데 미학적 평가는 엇갈린다. 바로 옆 콘서트 홀은 부채 모먕이다.

    때로는 해당 국가나 지자체가 자국 이미지를 드높이고 자기 국가의 상징물로 세우고자 극장을 짓기도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정부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상징물로 세운 것이 바로 시드니오페라하우스입니다.

    때로는 시민들이 직접 극장을 도시 정체성의 상징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2차대전으로 완벽하게 폐허가 된 베를린 시민들이 가장 먼저 새로 지으려고 했던 건물은? 바로 베를린의 자랑이었던 베를린필하모니의 콘서트홀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건물은 베를린의 상징입니다.

    서양건축사에서 극장은 중요한 갈래입니다. 그 시대별 특징을 반영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사조나 취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왕궁이나 관공서 등의 건물이 디자인 측면에서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반면, 극장은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혁신적이거나 추상적인 디자인을 ‘뻥 때릴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이죠. 극장이란 어차피 ‘즐거움의 신전’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언제나 그 시대의 군중들에게 무언가 볼거리를 제시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폼나는 극장, 공연장을 짓자고 나서니 극장의 생김새는 절로 시대의 거울이 되게 됩니다. 건축 양식 사조로 보면 더욱 이런 경향성은 강해집니다.

    그런데 극장이 정말 ‘정치’까지 담아내냐구요? 시대적 정치 시스템은 물론 지향점도 담아냅니다. 자, 여기 두개의 극장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위의 두 사진은 각각 서양 문화의 원류라고 하는 그리스와 로마를 상징하는 극장입니다. 앞의 것은 그리스의 에피다우로스 극장이고, 뒤에는 너무나 친숙한 로마의 콜로세움이지요.

    그리스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양 문화의 원조라고 합니다만 이 극장이런 것에서도 원조입니다. 서양 극장의 오리지날이 이 그리스에서 기원전 5세기께 생긴 원형극장, 곧 ‘앰피시어터’란 겁니다. 이런 극장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그 모습이 보존되어 전해지는 극장이 위에 보신 ‘에피다우로스의 극장’이 되겠습니다. 기원전 350년 쯤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콜로세움이 경기장이지 무슨 극장이냐구요? 콜로세움은 사실 일반명사입니다. 원형경기장이란 뜻이죠. 그런데 지금 보신 로마의 저 콜로세움이 워낙 유명해 고유명사처럼 된 겁니다. 저 로마의 콜로세움의 공식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입니다. 로마에서 극장은 동시에 경기장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두 극장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 극장은 그리스가 자국인들에겐 정치적으로 민주정이었음을 제한적으로나마 보여줍니다. 객석에는 그 구별이 없습니다.

    반면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로마는 경기장 좌석도 철저하게 나눴습니다.

    콜로세움은 객석을 모두 다섯단계로 분리해 만들었습니다. 콜로새움 객석에서 당시 명판이 발견되었는데, 그 명판을 보면 로마 사회의 엄격한 계급구조를 알 수 있습니다. 경기장 벽과 가장 가까운 몇 줄은 원로원 의원과 수행원들의 자리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사와 나머지 계층들의 자리가 순서대로 이어집니다.

    가장 나쁜 다섯 번째 좌석은? 안타깝게도 여자들 자리였다고 합니다.

    저 에피다우로스 극장은 위에서 보시면 그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위에서본 에피다우로스 극장. 전체 정원 1만4000명으로 추정된다.

    » 위에서본 에피다우로스 극장. 전체 정원 1만4000명으로 추정된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극장이 고대에 지었음에도 음향효과가 완벽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무대 앞 합창대석에서 속삭이듯 작게 소리를 내도 가장 높은 관중석에서도 잘들린다고 합니다. 낮은 쪽 좌석보다 높은 쪽 좌석을 더 가파르게 배치해 전체적으로 사발 모양이 되게 했기 때문이고, 좌석 밑에 도기 항아리 모양의 공명기를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합니다.

    이 그리스식 극장은 이후 서양 극장의 모델이 되었고, 또한 독일을 대표하는 극장인 작곡가 바그너의 바이로이트축제극장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독일 극장은 그리스극장처럼 특히 민주적 평등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뒷부분 베를린필하모니콘서트홀을 다룰 때 다시 한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19세기 이후 생긴 수많은 원형극장들과 20세기 이후 오늘날 세계 각국의 야외노천극장들이 모두 이 그리스 극장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멀리 돌아볼 것도 없이 우리나라 대학들 노천극장들 보시면 됩니다.

    콜로세움에서 실제 경기를 한 것은 무려 50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사라지고 맙니다. 서양이 ‘중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세는 극장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모여 합일하는 축제의 장, 연극의 무대로서의 극장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극장이란 요소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오랫동안 서양 건축에서 사라졌던 극장이 부활한 것은?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부활시키자던 시대, 그러니까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지는 물론 이탈리아죠. 극장이 처음 부활한 곳도 바로 이탈리아였습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가 팔라디오가 비첸차에 만든(정확하게는 도중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완성은 뒷 건축가가 했지만) 테아트로 올림피코입니다. ‘올림픽 극장’이란 뜻입니다.

    이 올림픽 극장은 ‘중세 이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며, 고대 극장을 재현한 극장입니다. 서양 중심 사고로 보면 ‘세계 최초의 실내 극장’입니다. 건축학자들에겐 ‘팔라디오 최후의 작품’이란 점도 중요할겁니다.

    팔라디오란 사람은 일반인들에겐 그닥 유명하지 않지만 건축에서는 억수로 대단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수많은 건축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기 이름을 딴 건축사조(팔라디아니즘)을 가지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지요. 전공자도 아닌 우리야 고전건축을 완성한 사람, 뭐 그정도로 알아둡시다. 좌우지간 이렇게 생겼습니다. 자 보시죠. 건축학자들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담은 건축이다, 라고들 합니다.

    르네상스와 함께 부활한 서양 극장 건축은 바로크 시대를 맞아 활짝 피어납니다. 세속권력을 상징하는 왕들이 교황과 경쟁하면서 극장을 지었고, 이 극장에서 대관식이나 왕가의 결혼식 같은 화려한 페스티벌을 열었습니다.

    이후 19세기에 접어들어 극장은 음악적으로도 비약적 발전을 합니다. 볼거리로서의 극장을 넘어서 음향학적 측면을 중시하기 시작한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그리스극장을 본받았다는 바이로이트축제극장입니다. 이 극장은 작곡가 바그너가 직접 설계한 극장입니다. 잔향 개념을 도입한 점에서 획기적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이 19세기 시기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바로 부르주아들의 등장, 시민계급의 형성 같은 것이라고 배우셨을 겁니다. 이런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이 바로 정치적 격변인 ‘혁명’으로 지고샜던 나라 프랑스의 상징 파리오페라극장입니다.

    파리를 여행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파리는 가운데 큰 대로가 중심이고, 지역 중심부에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길이 납니다. 마치 자전거 바퀴살 가운데 축에서 퍼져나가듯 하지요. 그 가운데에 개선문 같은 화끈한 기념 건축물들이 놓였습니다. 이 파리오페라극장도 이런 방사상 중심에 있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을 짓기로 한 사람은 나폴레옹3세가 임명한 도시장관 오스망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파리 시내를 자를 대고 줄을 그어 만든 양반입니다. 파리 전체 큰 그림을 그린 뒤 핵심 건물로 오페라극장을 지었습니다. 극장이 정권의 퍼포먼스가 되는 점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극장을 지을 때 건축가들 공개 경쟁을 했습니다. 우승자는 뜻밖에도 서른세살 완전 무명 초짜 신인 가르니에란 사람이었습니다. 가르니에는 이 극장을 당시 고전주의를 따르면서도 새로운 바로크, 곧 신바로크주의로 짓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을 ‘가르니에궁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자, 이 건물입니다.

    이 극장 보시니 어떻습니까? 아름답기는 한데 좀 유난스럽지 않으신가요? 너무 꾸며대서 촌스러운 측면도 있어 보이죠.

    그렇습니다. 당시 19세기 시민계층을 대표하는 장소가 바로 오페라극장이었기 때문에 당시 부르주아들의 취향을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졸부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불과 100여년전 건물인데 하도 치장해서 절대왕정 시대 건물처럼 보일 지경이지요. 뭐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고 그 시대 취향이 저랬구나 하면 됩니다.

    반면 이 건물보다 불과 1년 뒤에 지은 바이로이트축제극장은 훨씬 단순합니다. 장식도 없고, 객석도 그리스 극장처럼 단일하게 열을 지었을 뿐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그런 극장이 더 민주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를 것 같은데, 이후 대부분의 유럽 극장들은 오히려 이 파리오페라극장을 모델로 삼아 지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 극장이 새로운 문학작품을 낳기도 했습니다. 가스통 르루란 프랑스 작가가 이 극장을 소재로 쓴 소설이 바로 <오페라의 유령>입니다. 이 소설을 영국의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뮤지컬로 만들었지요.

    이처럼 극장이 그 시대 건축은 물론 사회, 정치까지 담아내는 그릇이 되는 경향은 20세기 들어 계속 이어지면서 더욱 정교해집니다. 20세기 극장들과 우리나라 극장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by 100명 2007. 3. 15. 22:20
    한국인 1년에 3번, 미국인 5번 극장간다

    한국 vs 미국 영화산업 비교해보니…

    편당제작비 韓 50억ㆍ美 1000억 ‘다윗과 골리앗’

    美誌 “한국은 할리우드 맞먹는 새 영화강국” 평가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외교 전문 격월간지 ‘포린 팔러시’는 지난 2월 온라인판 기사에서 한국을 할리우드와 새로운 라이벌 관계에 있는 영화 강국 중 하나로 꼽았다. 이 잡지는 ‘볼리우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인도 영화가 이미 영화 제작 편수와 극장시장 규모에서 미국을 넘어선 데 이어 중국 러시아 브라질 한국 등의 영화가 할리우드를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fast on its heels)’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과연 전 세계 영화산업의 ‘지배자’이자 ‘모델’인 할리우드와 ‘신흥 영화 강국’ 한국의 경쟁력ㆍ규모상 격차는 얼마나 될까. ‘스크린쿼터’ 축소와 최근 국내 극장가에서 한국 영화의 부진, 할리우드 영화의 선전 등으로 더욱 큰 관심을 받고 있는 한ㆍ미 양국의 영화산업을 비교해 봤다.

    ▶한국인은 1년에 3번, 미국인은 5번 극장 간다

    최근 미국영화협회(MPAAㆍ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지난해 1인당 평균 4.8번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은 지난해 평균 3.4회 극장을 찾았다.(영화진흥위원회 자료) 한국인의 연간 평균 관람 횟수는 2001년 1.9회에서 해마다 0.3~0.4회씩 증가한 반면 미국은 1980년 4.5회를 기록한 이후 2002년 5.7회로 최고에 올랐다가 최근 3~4년간 전반적으로 하향 곡선을 그렸다. 20여년 동안 연간 평균 5번 정도 극장에서 영화를 본 셈이다. 영화 좋아하기로 친다면 미국인들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고려할 때 한국인의 극장 관람 횟수도 5회 정도가 최대치가 될 가능성이 크고, 이를 기준으로 할 때 한국 극장시장은 앞으로도 30% 이상 성장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의 인구는 2006년 현재 2억9900만명으로 한국(4800만명)보다 6.2배가량 많고, 미국의 극장 매출 규모는 94억9000만달러(8조9910억원)로 한국(1조128억원)과 약 9배 차이가 났다. 관객 수는 미국이 14억5000만명, 한국이 1억6385만명이었다.

    ▶편당 평균 제작비 50억원 vs 1000억원

    미국에서 지난해 개봉한 신작 영화는 총 203편(MPAA회원사 기준)이었고, 해외 영화를 합쳐 총 599편이 관객들을 만났다. 한국 영화는 신작 108편이 개봉됐으며, 외화까지 총 345편이 극장에서 상영됐다. 자국산 영화의 연간 제작 편수와 국내 외화 개봉 편수는 2배 정도 차이가 나는 셈이다. 하지만 양국의 자국산 영화제작비 차이는 수십배의 격차를 보였다. 상업영화를 주로 만드는 MPAA 회원사의 편당 평균 제작비는 1억달러(947억원)에 이르는 데에 비해 한국에서 개봉한 108편 중 독립ㆍ저예산ㆍ예술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10억원 미만의 영화를 제외한 나머지 83편의 평균 제작비는 51억1000만원으로 집계됐다. 할리우드 영화 1편을 만드는 제작비로 한국 영화 18~19편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필름 프린트 및 마케팅비용이 총 제작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 35%, 한국 36%로 비슷했다.

    ▶한국인은 극장 다음으로 케이블(유선방송) 선호, 미국인은 DVD플레이어 이용

    한국인은 극장을 제외한 영화 관람매체로 TV를 선호하는 것에 비해 미국인들은 DVD플레이어를 선호했다. 영진위가 전문 조사기관에 의뢰한 한국 영화 관객 성향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관객들은 극장을 제외한 주요 이용매체로 케이블TV(유선방송)와 지상파TV를 꼽은 비율이 각각 23.2%와 22.5%로 나타나 최근 극장-TV 간 홀드백 기간(개봉과 TV 방영 간의 시차)이 짧아지는 경향을 반영했다. 미국에서는 극장보다는 DVD로 보는 것이 좋다고 대답한 영화 관객이 16%나 될 정도로 DVD 이용률이 높았다.

    지난해 박스오피스 상위 20여편을 분석한 결과, 미국에서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인 ‘R’등급 영화가 2편밖에 되지 않는 반면, 애니메이션이 4편이나 포진해 뚜렷한 ‘친가족 성향’을 보인 데에 비해 한국에서는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영화가 5편이고 애니메이션은 한 편도 없었다.

    by 100명 2007. 3. 15. 22:18
    "극장에폭발물설치했다"가짜협박전화

    어제 오후 6시반쯤 서울시 중랑구 상봉동 한 극장 건물에 폭발물이 설치됐다는 협박 전화가 112신고 센터에 걸려와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경찰은 극장에 있던 40여명을 대피시킨 뒤 탐지견 등을 동원해 두 시간여 동안 수색 작업을 벌였지만 폭발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극장 근처 공중 전화에서협박 전화를 건 40대로 추정되는 남성을 쫓고 있습니다.
    2007.03.13 08:09
    by 100명 2007. 3. 15. 09:58

    힙합댄스, 이제 영화관서도 즐긴다

    롯데시네마 힙합 댄스 배틀 공연 열어

    [ 2007-03-12 오전 10:53:24 ]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복합문화공간화를 선언한 롯데시네마가 힙합댄스 행사를 극장에서 연다.

    롯데시네마 측은 12일 전국대학 최고 힙합 동아리 팀들의 댄스 경연인 ‘힙합댄스배틀’을 오는 12일 건대입구관에서 연다고 밝혔다.

    유니버설 뮤직과 함께 오는 21일 개최하는 이날 행사는 뉴욕 브룩클린 출신의 각 나그네(MC GAK)의 사회로 단국대 NRSC, 숙명여대 MAX(맥스), 홍익대 BEATZFLOW(비츠플로우), 아주대 BEAT(비트), 호서대 KKICHUM(끼춤), 연세대 HARIE(하리), 성균관대 레퀴엠, 인하대 FLEX(플렉스)등의 팀들이 경쟁할 예정이다.

    또 DJ로는 콘(Kone, 유광일)이 등장하고 챌린지 엔터테인먼트(Challenge Ent.)의 대표이사겸 프로듀서 닐슨(Nilson)과 ‘Who is the best of Pop&Locking’대회를 주최하고 프랑스 Just Debut 및 B Boy Challenge Locking우승을 한 웅(Woong) 등이 심사위원으로 나선다.

    이날 1위를 차지하는 팀에는 상금 100만원과 해외 공연 관람의 기회가 주어지며 롯데시네마 홈페이지와 쥬크온(Juke On) 및 도시락 이벤트 페이지에서 관람 응모를 통해 입장권이 주어진다.
    by 100명 2007. 3. 12. 23:37

    롯데카드 "영화관객 500만 넘으면 구매포인트 돌려 드려요"
    13일부터 이벤트 실시

    롯데카드는 오는 4월5일 개봉하는 영화 ‘우아한 세계’ 관람권을 롯데포인트로 구매할 경우 영화 흥행실적에 따라 구매포인트를 되돌려주는 이벤트를 실시한다고 12일 밝혔다.

    롯데포인트가 5,000점 이상인 롯데카드 회원은 13일부터 31일까지 영화 관람권을 포인트로 구입할 수 있으며 영화 관람객이 500만명을 넘을 경우 관람권 구매 장수에 따라 포인트 4,000~5,000점이 환급된다. 이번 행사는 롯데카드 홈페이지와 전국 롯데시네마ㆍ롯데카드센터를 통해 선착순 20만명까지 참여할 수 있다.

    by 100명 2007. 3. 12. 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