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게임제왕'의 몰락... IT 안방공략 실패?
[오마이뉴스 2007-05-09 14:49]
[오마이뉴스 민경진 기자]
▲ 미국, 일본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닌텐도의 신개념 게임기 '위'.
ⓒ2007 Nintendo
도쿄와 뉴욕의 가전 매장은 PS3를 사려는 게이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베이에서는 이제 막 출고된 PS3 한 대가 수백달러의 웃돈을 받고 팔렸다. 심지어 PS3를 탈취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살풍경도 연출됐다.

지난해 12월의 풍경이다.

두 번에 걸친 출시 지연에도 게이머들은 PS3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 때만 해도 소니의 게임기 전략은 고진감래 끝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지난 4일 이 모든 전략을 총지휘한 '게임제왕' 구다라기 켄 게임사업본부장은 끝내 사임을 발표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매출부진이다. 소니가 반짝 인기에 그칠 것이라고 무시했던 닌텐도의 게임기 '위'가 미국 시장에서 40%에 달하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달성한데 반해 MS의 X박스360이 33%, PS3는 18%의 초라한 매출을 기록한 것. 닌텐도의 기세는 일본에서 더 대단해 60만대 이상을 팔아치우며 무려 68%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했다.

닌텐도의 압승에는 물론 다른 측면도 있다. PS3나 X박스360이 전통적인 콘솔게임 마니아들의 취향에 맞추어 개발된데 반해 닌텐도의 '위'는 주부 등 그동안 게임에 관심이 없었던 소비자층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

▲ 두 번의 출시 지연, 막대한 보조금에도 매출부진에 시달리는 소니의 PS3.
ⓒ2007 Sony
실제로 닌텐도는 주부 체험단 등을 조직해 일반 소비자들을 공략했고, 모션센서를 장착한 컨트롤러를 전후좌우 휘둘러 게임을 할 수 있는 '위'의 손 쉬운 인터페이스도 인기에 한 몫을 했다.

기존 게임콘솔이 손가락만을 집중적으로 혹사시켰던 것에 비하면 훨씬 운동량이 많은 혁신적인 작동 방식이다.

콘솔게임기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2억대라면 '위'는 이보다 훨씬 큰 가전시장을 겨냥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 물론 PS3에 기본 내장된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인기를 끌면서 향후 시장점유율이 회복될 것이라는 시장분석가들의 예측도 있다.

하지만 게임의 즐거움에만 집중해 성공한 닌텐도 '위'의 등장은, 게임콘솔을 IT업체가 거실을 공략하는 트로이목마로 활용하려던 소니와 MS의 전략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한다. 구다라기 켄의 사임은 바로 이 트로이목마 전략의 실패를 의미하는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웹TV에서 X박스, PS3, IPTV 그리고 애플TV에 이르기까지 IT업체들은 끊임없이 컴퓨터 박스를 탈출해 그 세력을 안방으로 넓히기 위해 애를 써 왔다.

MS나 소니가 막대한 적자에도 불구하고 게임콘솔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 것은 게임 타이틀 판매를 통해 후일 손실을 회수한다는 계산도 있지만, 그보다 게임콘솔이야말로 PC에 갇혀있던 IT의 촉수를 거실까지 확장하는 유력한 수단이라 보고 이를 전략적 도구로 활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닌텐도 '위'의 성공은 MS와 소니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게임콘솔이 여전히 게임마니아의 한계에 갇혀있으며 거대한 가전시장에 진입하는데는 별 효과가 없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사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하는 모든 IT기기는 근본적으로 개인용이다. PC 역시 결국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의 약자이다. 휴대폰이 그렇고 게임콘솔 역시 쌍방향 작용의 속성상 개인용 기기다.

이런 이유로 최근 '애플TV'를 출시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 역시 한 때 PC가 과연 거실의 TV가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 바 있다.

거실은 온 가족이 공유하는 공간이고 이에 따라 TV스크린에서 인기를 끄는 컨텐츠 역시 영화, 드라마 등 일방향 컨텐츠다.

반면에 PC, 휴대폰, 게임기 등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어서 사용자는 자신만의 은밀한 개인정보와 컨텐츠를 저장하고 즐기는 도구로 이를 활용하게 되고 결국에는 온 가족이 한 대씩 사게 마련이다.

결국 개인화와 쌍방향을 지향하는 IT기기가 공유를 지향하는 가족의 공간 거실에 진입하기에는 감히 넘을 수 없는 근원적 장벽이 존재한다는 뜻.

PS3와 X박스360의 부진 그리고 구다라기 켄의 사임은 지난 수 십여년 간 끊임없이 시도됐던 IT업계의 거실진출이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MS, 애플, 그리고 최근 가전업체로의 변신을 모색중인 인텔 등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볼 문제다.
by 100명 2007. 5. 9. 17:22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21) - Standard Oil(상)
스텐더드 오일 + 록펠러 = 정유업계의 골리앗?


19세에 사업확장욕망. '시추'보다 '정유'에 눈독

창업자: 존 D.록펠러, 새무얼 앤드루스, 헨리 M. 플래글러
특징: 연방 대법원의 명령을 받고 분리되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정유 업체였음
주요 제품: 등유, 연료, 윤활유, 기타 석유 부산물
창업자 겸 사장: 존 D. 록펠러
창업 지역: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
해체 전의 시장 가치: 1억 달러
주요 경쟁사: 없었음
활동 연도: 1870~1911


스탠더드 석유 회사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사람들은 ‘록펠러’와 ‘독점’ 두 가지를 동시에 떠올린다. 이들의 관계는 불가분이다. 존 D. 록펠러를 빼고는 누구도 그만한 정유업의 골리앗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며, 반독점법에 따른 제지가 아니고서는 무엇도 그것을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셋은 모두 미국의 기업계가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세계적 강자로 도약한 그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사람들에게 뒤엉킨 이미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록펠러가 이 탐욕스런 거인을 혼자 힘으로 운영한 것은 아니다. 록펠러 같은 경영의 귀재라도 한때 미국 내 석유 생산과 가공, 마케팅과 수송의 거의 전 영역을 움켜쥐고 흔든 이 정유 업계의 ‘문어’를 다루는 데는 비범한 경영 팀이 필요했다. 하지만 J.D.-록펠러의 별칭-는 이 모든 것을 통괄하고 움직여나가는 힘이었다. 그와 그의 회사가 연방 반독점법에 연루되어 결국 문을 닫게 되기 전까지는.

록펠러는 당대의 기민한 비즈니스맨의 수준을 벗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아흔일곱 살로 죽었을 때 그가 보유했던 토지의 가치는 10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요즘으로 치면 그 열 배쯤 되는 액수일 것이다. 그는 평생에 걸친 자선 활동으로 수중에 남은 것이 거의 없을때까지 돈을 풀고 또 풀었다. 스탠더드 석유를 창업한 해에는 클리브랜드 유클리드 거리 침례교회를 짓는 데 2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 뒤 70년 동안 그는 록펠러 재단과 록펠러 의학 연구소 등 수많은 자선 단체에 재정 지원을 했으며, 시카고 대학을 세우는 데 자금을 대고, 그밖에도 수많은 대학과 교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부를 했다. 일생 동안 그가 자선 사업에 쏟아부은 돈은 5억 달러로 추산된다. 그렇지만 그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정유업으로 입신한 악명 높은 거부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그런데 그의 도드라진 인생의 기록 자료들을 살펴보면, 그는 이런 모순에 별로 구애받지 않았던 듯하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1839년 뉴욕 주 북부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신앙심 깊은 어머니가 집에서 네 명의 자식을 성심껏 기르는 동안, 아버지는 마을에 나가 갖가지 사기 행각과 돌팔이 의료 처방으로 지역 사람들을 갈취했다. J.D.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정부를 강간한 혐의로 고소되었고, 가족은 도망쳤다. 그러다가 정착한 곳이 클리브랜드 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족을 팽개치고 혼자 사우스 다코타로 달아났다. J.D. 는 1855년에 휴잇&터틀 잡화 상점에서 회계 보조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급으로 받는 3.5달러 가운데 일부를 꼬박꼬박 교회에 헌금하면서도 3년 만에 800달러를 모았다. 그 돈에다 빌린 돈 약간을 더 보태서 그는 영국 출신 이주민 모리스 B. 클라크와 함께 잡화 상점을 차렸다. 건초, 양곡, 정육 등을 판매한 그의 가게는 늘 성시를 이루었다.

이 때 록펠러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지만 강렬한 사업 확장의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때는 10년 전 펜실베이니아 주의 앨러게니 산맥에서 수익성 높은 유정이 개발된 이후 석유업이 붐을 이루던 때였다. 클러크의 친구 한 명이 석유 업계에 종사했는데, 1863년 이 친구가 자금을 구하러 두 사람을 찾아왔다. 록펠러는 그에게 4,000달러를 투자하고 마침내 그의 금맥이 된 영역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석유를 탐사하고 유정을 굴착하는 것은 언제나 기복이 심한 사업이다. 그 당시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석유 가격은 배럴당 10센트에서 20달러 사이를 널뛰듯 오르락내리락했다. 록펠러가 이 무대에 뛰어 들었을 때, 석유 가격은 5달러를 중심으로 유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영민한 록펠러는 훌륭한 유정이 발견되면, 각종 석유 부산물을 생산하고 판매할 정유업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유정 개발보다는 정유업이 훨씬 더 돈벌이가 된다는 것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클라크 외에 새무얼 앤드루스라는 또 다른 동업자를 영입해서 1863년 오하이오 주에 작은 정유 회사를 차리고, ‘엑셀시어 오일 워크스’ 라고 이름 붙였다.

이 신생 회사는 원대한 성장을 꿈꾸며 기존 정유 업체들을 하나 둘 사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리브랜드 시의 50개의 업체와 피츠버그 시의 80개 업체가 이들에게 넘어왔다. 그는 공정의 전 과정을 직접 관할하면 이익이 더 커지리라는 판단 아래 창고와 입목지도 사들였으며-석유통을 직접 만들기 위해서-, 심지어는 제품 수송을 위해서 선단까지 샀다. 1865년에 록펠러는 클라크의 지분을 모두 매입해버리고, 그 2년 후에 지역 사업가인 헨리 플래글러를 영입했다. 플래글러는 돈도 있었지만, 떠오르는 새로운 운송 수단인 철도 사업-석유 수송 수단으로 배보다 훨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회사 이름을 ‘록펠러, 앤드루스&플래글러’로 바꾸었다가 3년 후 다시 스탠더드 석유 회사로 바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최대의 정유 업체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국내외에 모두 경쟁사들이 있었다. 스웨덴의 ‘노벨 브라더스’, 영국의 ‘셸 트랜스포트&트레이딩’ 같은 회사들이 맹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1880년대만 해도 미국의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스탠더드 사는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최고 수준의 화학자, 마케팅 전문가, 법률가들을 고용했다.

by 100명 2007. 5. 4. 11:46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21) - Standard Oil(하)
록펠러의 좌우명 '많이 벌고 많이 베풀자'


기자 아이다 타벨의 추적기사로 스텐더드오일 분해돼



▲ 스텐더드 오일 트러스트에서 최초로 발행한 주식의 모습. 록펠러의 사인이 선명하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이들은 필요한 회사는 비밀 계약을 맺어 끌어들였으며, 필요 없는 회사는 힘으로 눌러 없앴다. 스탠더드 석유 회사의 규모와 수익성은 눈덩이처럼 불어갔고, 마침내 이들은 3만 7,000곳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석유 제품을 공급하는 독점 업체가 되었다.

19세기 말 미국 경제계는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눈깜짝할 새에 도시들이 생겨나고, 철도가 도시들을 꿰뚫어 엮었다. 제조업이 경제의 주력으로 솟구쳐 오르고, 앤드루 카네기,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J.P. 모건, 록펠러를 비롯한 한줌의 인물들이 이 길을 선도하는 초강력 기업들을 통치했다. 하나같이 수완과 상상력의 대가였던 이들은 각자 차지한 분야에서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비열한 책략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내 대부분의 주는 지역 기업이 다른 주에 본사를 둔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지 못하게 했는데, 언제나 기업 확장에 골몰하던 록펠러는 이를 우회할 방법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1882년 스탠더드 사를 다른 지역의 제휴 회사들과 한데 묶은 스탠더드 석유 트러스트가 태어났다. 온갖 종류의 모호한 법률적 장치로 뒤얽혀 있어 그 구조를 헤아려내기가 쉽지 않았던 이 조직은 40개 가량의 회사를 록펠러 휘하에 갖다 바쳤고, 업계의 독재자로 철권 통치를 이어나갔다.

불법 리베이트, 강압 전술, 과도한 가격 책정에 대한 비난이 끊임없이 쌓여갔다. 1892년에 오하이오 주 대법원이 이 공방전에 발을 들여놓고 트러스트를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록펠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뉴욕의 본사를 통해서 계속 회사를 운영했다. 1899년에 기업 합병에 관한 법률이 느슨해지자, 그는 ‘뉴저지 스탠더드 석유 회사’라는 지주 회사를 새로 꾸려서, 모든 자산을 이 신규 법인 아래로 이전시켰다.

다른 기업가들이 이런 록펠러의 행동을 놓쳤을 리가 없다. 유사한 트러스트들이 면화, 위스키, 설탕, 담배 산업 등에서 나타났고, 어떤 기업들은 메가톤급 합병을 단행해서 제너럴 일렉트릭, AT&T, U.S. 철강과 같은 거대 기업으로 태어났다. 이로 인한 부와 권력의 집중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그리고 미래의 경쟁자들에게-불공정 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범죄적인 행위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 문제가 차츰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을 때, 아이다 M. 타벨이라는 여성 저널리스트가 스탠더드 사에 대한 정밀 조사 내용을 <매클루어즈> 잡지에 1902년부터 19회에 걸쳐 폭로했다. 스탠더드 사에 불공정한 행위는 추호도 없었다는 록펠러의 주장은 타벨에 의해 거듭 난타당했다. 그녀의 글에 따르면 스탠더드 사가 거대 기업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사기의 협잡, 특권과 불법, 뇌물과 강압, 부패와 협박, 밀정과 공공연한 폭력’의 결과였다.

이 연재 기사로 타벨은 스타덤에 올랐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그녀의 팬이 되었다. (이에 대해 록펠러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사석에서 그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연방 검찰의 수사로 이어졌고, 1906년에 이르자 정부는 16년 공포된 셔먼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스탠더드 사를 기소했다. 이로서 항간에 무수히 떠돌던 ‘스탠더드 사가 석유 산업을 독점하고 자유 경쟁을 가로막는다’는 이야기는 공식적인 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1907년에 스탠더드 사는 반독점법 위반 판결을 받아서 1억 달러에 이르는 시장 가치 가운데 1/3 가량을 벌금으로 물게 되었다. 록펠러는 이러한 처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여가 지난 1911년 5월 15일 연방 대법원이 내린 명령-스탠더드 사의 내부 구조가 ‘자유 경쟁을 저해하는 독점’이니, 이를 30여 개의 독립 기업으로 분리하라는-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엇다. 골프를 치다가 이 소식을 들은 록펠러는 골프 파트너들에게 “스탠더드 석유 회사를 사라”고 조언 했다고 한다. 이것은 현명한 조언이었다. 스탠더드 사를 이루던 부분들의 가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어떤 단일 기업보다도 커졌기 때문이다. 록펠러 자신의 엄청난 재산도 더욱 더 크게 불어났는데, 그 해 말에 그는 은퇴했다.

이 해체의 결과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한 많은 석유 기업들이 태어났다. 엑슨(Exxon), 아모코(Amoco), 모빌(Mobil), 셰브론(Chevron)등이 그것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록펠러가 좀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으면-또는 입법가들이나 고관들에게 좀더 아첨을 했으면-, 스탠더드 사가 해체의 운명을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 (실제로 업계 지배력이 비슷했던 동시대 기업 U.S. 철강은 스탠더드 사와 같은 방식으로 반독점법에 걸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록펠러는 세속적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좌우명을 져버린 일도 없다. “공정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가능한 한 많이 벌어서, 가능한 한 많이 간직하고, 가능한 한 많이 나누어 주는 것이 나의 종교적인 의무다” 라고 언젠가 그는 밝혔다. 1937년에 눈을 감을 때까지 그는 자신의 일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고,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길에서 한 발짝도 허투루 내딛지 않았다.

by 100명 2007. 5. 4. 11:46
자면서도 느는 영어
(잠재 의식을 통해 영어를 입력시키는 방법)

이번에는 ‘잠재의식을 통해 영어를 입력시키는 방법’을 알아 보기로 한다.
옛날에 내가 공부하던 얘기를 들으면서 시작하기로 하자.
삼십여년전 내가 한참 영어공부에 푹 빠져 있을 때 얘기이다.
그 때는 정말 “영어를 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것처럼 하루 종일 열심히 공부했다.
책상에 앉아서는 물론이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길을 걸어가면서도, 심지어는 화장실에도 사전을 한 권 매달아 놓고는, 아무 곳이나 펼쳐 들고 거기 나오는 단어들을 읽어보다가, 모르던 단어나 용법이 있으면 몽땅 외운 다음에야 나오곤 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화장실에서 읽는 사전처럼 재미나는 것도 없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단어 하나 하나마다 주저리주저리 열려있는 사연들을 읽는 즐거움이란 상상만 해도 상쾌하지 않은가?
여하튼 이렇게 하루종일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문제는 잠자는 시간이었다.
깨어있을 때는 가능한 모든 시간들을 이용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지만 잠자는 동안만큼은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자는 동안에도 저절로 공부가 되는, 뭐 그런 뾰족한 수가 없을까?” 하고 궁리하던 중 기막힌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바로 잠자면서도 테이프를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머리맡에 AFKN 뉴스라든가 미국영화를 녹음한 것 또는 내가 만든 단어장 녹음한 것 등을 틀어 놓고 잠을 잤는데, 기대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어떤 효과인가 하면, 평소에 그렇게 외우려고 애를 써도 잘 되지 않던 문장이나 단어들이 마치 옛날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저절로 외워져 있다든지, 또 미국영화 테이프를 들으면서 잠이 든 날은 밤새도록 ‘리차드 버튼’, ‘엘리자베스 테일러’등 외국 배우들과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칵테일 파티도 하고 데이트도 하는 그런 꿈을 ‘영어로’ 꾸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언어교수법’을 공부하다가 알게 된 것인데, 러시아의 한 ‘초월심리학 연구소’에서 개발한 ‘수면학습’이론에 의하면 사람이 잠을 잘 때는 각성시보다 몇 배 또는 몇 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학습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잠자는 동안 계속해서 학습이 되는 것은 아니고, 잠이 들락 말락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때부터 잠이 든 직후 얼마동안과, 또 잠이 깨기 전 깰락 말락 할 때부터 잠이 깨고 난 직후 얼마간까지 피암시성이 굉장히 높아지는데, 그 때에 들은 정보는 잠재의식에 깊이 새겨져서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된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이 방법으로 우주인 교육을 한다든가 또는 서방에 파견되는 스파이들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암호나 비밀정보 등을 암기시키는데 주로 사용했으며, 특히 초단기간에 외국어 학습을 시키는데 큰 효과를 얻어 어떤 경우에는 불과 4주만에 외국어 한 가지를 마스터 시켰다고 한다.
또한, 이 원리는 잠잘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잠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도, 온몸의 긴장이 완전히 풀린 릴랙스 상태에서 공부를 하면, 놀라울 정도의 ‘잠재의식 학습’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 원리를 이용한 외국어 학습법으로는 불가리아의 로자노프(Lozanov)박사가 창시한 ‘암시교수법(Suggestopaedia)’이 유명하다.

은은한 조명의 아늑한 홀에서, 편안한 안락의자에 몸을 맡긴 채, 온몸의 긴장을 풀고 충분히 릴랙스한 다음, 장중한 바로크 음악이 배경으로 흐르는 가운데, 선생이 천천히 불러주는 단어나 문장들을 듣고 있으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잠재의식에 그대로 입력되는 방식이다.
1960년대 중반에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있었던 실험에서는 이 교수법을 사용하여, 15명의 참석자 전원이 하루에 1000단어의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나중에 테스트 결과 97%의 정답률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공산국가 특유의 과장이 섞여 있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내가 직접 해본 바에 의하면 전해지는 것처럼 기적적인 효과까지는 몰라도,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 만은 사실이다.
그 원리를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온몸의 긴장이 풀린 릴랙스 상태가 되면, 평소에 머릿속에서 우리의 학습을 방해하던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이 줄어들게 되어 학습효과가 높아진다.
예를 들어서 ‘영어는 어렵다는 생각’, ‘틀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잊어버리면 어떻하나 하는 걱정’, ‘나는 늙어서 안 돼’등의 부정적인 ‘정서적 여과장치(affective filter)’가 약해지면서 흡수력이 높아지는데, ‘수면학습법’에서 말하는 ‘잠들기 직전의 상태’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 릴랙스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심리적 교수법(Psychological Method)’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Gouin교수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학습하고 나면 그것이 실제로 실행되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기간을 ‘잠복기(incubation period)’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동안에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알게 모르게 ‘되삭임질’ 같은 것이 반복되면서 새로 배운 것을 머릿속에 정착시킨다.
실제로 어렸을 때 자전거 타기를 배운다든지, ‘롤러 블레이드’같은 것을 연습했을 때, 그 당시에는 잘 안되던 것이 다음날 아침에는 신기할 정도로 잘 되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잠을 자는 동안에 잠재의식이 되삭임질을 하여 그 기술을 숙달시킨 결과이다.

잠자리에서 영어 테이프를 듣다가 잠이 들어도, 그와 비슷한 일이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밤새도록, ‘영어로’ 연설하고, 데이트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꿈을 꾸는 것이 그 예인데,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잠재의식에서는, 잠들기 직전에 귀를 통해서 머릿속에 흡수한 영어를 되삭임질 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회를 통해 잠을 자면서 머릿속에 영어를 입력하는 요령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by 100명 2007. 5. 4. 00:10

"죽음에 관한 기존 학설 깨져"
[mbn 2007-05-03 14:11]

사람의 뇌와 심장이 멎은 뒤 수 분 안에 산소 공급을 받지 못하면 세포가 파괴돼 사망하게 된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뉴스위크지는 미 펜실베니아대 응급처치학 연구팀이 산소 결핍으로 기능을 멈춘 심장 세포가 3-4시간이 지나도 살아있었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연구팀은 오히려 기존의 심폐 소생술 같은 인위적 방법으로 산소를 강제 주입시키는 것이 세포를 죽게 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따라 산소 투입을 줄여 혈액이 점차 공급되도록 조절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응급조치법이라고 권했습니다.

by 100명 2007. 5. 3. 14:23

“웹2.0이 버블2.0 될 수도”
[조선일보 2007-05-02 03:43]

미국 동영상 사이트 구바(Guba)의 공동창업자 토마스 맥이너니(Mclnerney)는 작년 말 회사를 떠났다. 구바는 작년 여름 거대 미디어 기업 워너브러더스 및 소니픽처스와 연달아 콘텐트 배급 계약을 맺어 화제를 모은 사이트다.

하지만 맥이너니는 유튜브(You Tube) 등 선발 주자들이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한 시장에서 ‘백기’를 들었다. 그는 “회사 가치가 폭락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팔아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동영상 사업에 벤처 자금이 몰려들면서, 자유로운 정보 공유와 사용자 생산 콘텐트(UCC)로 대표되는 ‘웹2.0(Web2.0)’이 자칫 ‘버블2.0(Bubble2.0)’이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1일 보도했다.

FT는 적자를 내면서도 투자 공모를 받는 인터넷 벤처기업들과 몇몇 성공 사례 모방에 급급한 ‘너도나도식(me- too-ism)’ 신규 사이트 현황을 소개하면서, 이런 흐름은 1990년대 말 벤처기업 몰락을 가져왔던 ‘닷컴(dotcom) 버블’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했다. 특히 웹2.0 시대의 ‘뜨거운 감자’인 동영상은 이런 현상의 중심에 놓여 있다.

버블 현상의 최대 원인은 ‘승자 독식’ 방식. 사이트를 새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 소개로 기존의 인기 있는 사이트로 몰려가는 이른바 ‘네트워크’ 효과와, 기존 사이트에 이미 공을 들인 사용자들이 새 사이트에 다시 자료를 올리기 귀찮아 하는 특성이 후발 주자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by 100명 2007. 5. 2. 23:28
모토로라 '날개없는 추락'…왜?
[한국경제 2007-05-02 09:40]

휴대폰 '레이저'로 비상하던 모토로라가 갑자기 추락하고 있다.

지난 1분기 3년 만에 적자를 기록하고 시장점유율도 22.2%에서 17.5%로 미끄러지면서 모토로라의 미래에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레이저 후속 모델과 3G 기술개발 보다는 레이저 판매 극대화에 집착해 더 높이 오르려는 우(遇)를 범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가장 성공적일 때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정상에 올라서면 잊어먹기 십상인가 보다.

레이저가 나온 지 약 1년반이 지난 작년 4월의 컨퍼런스콜(전화로 진행하는 기업실적 설명회)에서 에드워드 잰더 최고경영자(CEO)는 이런 말을 했다.

"많은 분들이 레이저 다음 제품은 무엇이나고 물어보는데 나는 더많은 레이저 폰들이 될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작년 1분기에 모토로라 실적이 30%나 뛰었기 때문에 자신만만했던 것이다.

그래도 모토로라의 경우는 좀 심했다.

스타택이 히트친 이후 사세가 기운 과거를 너무도 빨리 잊었다.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잰더이지만 '단일 모델 1억개 판매'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레이저가 수립하자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잰더는 2004년 1월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사장에서 모토로라 CEO로 옮겨오면서 새로운 경영기풍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

모토로라의 관료주의적이고 내부지향적인 기업문화를 타파하고 실리콘밸리의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임원실도 개방구조로 바꿔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도록 했다.

그러나 휴대폰 사업을 장악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유럽지역 영업 책임자였던 론 개릭스를 휴대폰 사업부 대표로 앉히면서 그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것이다.

개릭스는 3G 플랫폼과 후속모델 개발을 중단시키고 회사의 모든 자원을 레이저 폰 생산에 집중토록 했다.

판매가격을 낮추고 테니스 스타 마리아 샤라포바를 모델로 해 판매증대에만 힘썼다.

그리고 애플과 손잡고 음악기능이 뛰어난 휴대폰 로커(Rokr)를 개발하는 등 3G 이전 기술에 집착했다.

회사 내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은 디지털 기술로 옮겨가는 산업 내 조류를 따라가지 못하고 실패한 스타택의 전철을 다시 밟는 게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흐름을 돌이키진 못했다.

모토로라는 작년 말까지 3G 서비스를 출시하려던 미국 이동통신회사 싱귤러 와이어리스에 3G 단말기를 공급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모토로라에서 분사한 반도체 회사에서만 3G 휴대폰 칩을 공급받기로 한 모토로라의 '자식 사랑'이 자승자박이 됐다.

이 회사가 3G 칩 개발을 제때에 완료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싱귤러는 삼성전자로부터 3G 휴대폰을 공급받기에 이르렀다.

새 제품을 개발하는 데 2~3년이 걸리는 휴대폰 비즈니스에서 신제품 타이밍을 놓치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 때부터 모토로라의 추락은 예견되고 있었다.

by 100명 2007. 5. 2. 23:27

"국산 웹 브라우저 써보세요"
[전자신문 2007-05-02 18:11

‘토종 웹 브라우저 써보세요.’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익스플로러가 웹 브라우저 시장을 독식하고 있는 가운데 국산 웹 브라우저가 속속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웹마(webma)’와 ‘jw브라우저’가 그 주인공. 두 프로그램은 모두 기존 인터넷익스플로러의 불편함에서 벗어나 좀 더 편리한 웹 브라우징 환경을 제공한다는 목표로 개인에 의해 개발됐다.

 웹마와 jw브라우저는 요즘 각광받고 있는 멀티탭 브라우징 기능을 제공한다. 탭 브라우징은 여러 사이트를 동시에 보기 쉽게 도와주는 것으로 모질라 파이어폭스에서 지원하는 기능이다.

 이들 두 브라우저는 또 메모리 사용량이 매우 작은 것이 특징이다.

 프로그래머 김대정 씨가 만든 웹마(http://mdiwebma.com)는 플래시와 광고 차단, 자동 로그인, 페이지 스크롤캡처, RSS 리더 탑재, 드래그와 오른쪽 클릭 제한 해제, 마우스를 흔들어 이전 페이지로 이동하기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장길석 씨가 만든 jw브라우저는 방문한 웹사이트 기록을 주나 월 단위로 구분해 목록별로 볼 수 있고 팝업이나 원하지 않는 사이트는 블랙리스트로 등록해 차단해 준다. 또 플래시 제어 버튼 이미지 변경과 자동 로그인 기능 수정, 보기 메뉴에서 플래시 출력 항목도 추가했다.

 이 프로그램은 인터넷상에서 욕설과 비방 등 네티켓을 준수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매너웨어(mannerware)라는 특이한 조건도 붙어있다.

by 100명 2007. 5. 2. 23:21
DSLR 대표제품 5개 실전 체험 해보니…
[파이낸셜뉴스 2007-05-02 20:39]





초등학교 교사인 김지선씨(31)는 요즘 아기사진 찍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러나 2년 전 구입한 디지털카메라로는 행복한 순간을 평생 간직하기에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다. 고민 끝에 김씨는 디지털일안반사식카메라(DSLR)를 하나 장만키로 했다. 하지만 DSLR 구매 경험이 없는 김씨에게 카메라를 고르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100만원대 이하로 내려온 가격, 이미지 중심의 블로그·미니홈피의 활성화가 보급형 DSLR카메라 확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여기에 발맞춰 디지털카메라 업체들도 신제품을 쏟아내고 있지만 비전문가들로서는 디자인을 제외한 성능대비 가격, 기능 등의 차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독자들의 DSLR 선택을 돕기 위해 파이낸셜뉴스 사진기자와 ‘300DCLUB’ 사진동호회 회원 10명이 인기 보급형 DSLR 5종을 2주 이상 직접 사용해본 실전 체험기를 게재한다.

■어느 제품을 선택했나

이번 비교 체험 평가에선 캐논 400D, 소니 알파100, 삼성테크윈 GX10, 니콘 D40X, 올림푸스 E410 등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보급형 DSLR 5종을 선택했다.

이들 제품의 가격은 D40X, E410, 400D 등 3종이 기본 렌즈 포함, 80만원선에 구매가 가능했다. 알파100과 GX10은 90만원이 약간 넘었다.

유효화소수는 1000만∼1020만화소로 대동소이했다. 이미지 센서 크기도 대부분 비슷했지만 올림푸스의 E410은 독자적인 포서즈 시스템 채용으로 크기가 작았다. 렌즈를 제외한 본체의 무게는 E410이 375g으로 가장 가벼웠고 삼성테크윈의 GX10이 710g으로 가장 무거웠다.

■그립감(카메라를 잡았을 때 손의 느낌)과 무게

그립감은 D40X가 안정적이었고 400D는 무난했다. E410은 작은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있었지만 성인 남성이 사용할 때 오른손 약지가 따로 놀았다. GX10은 그립이 너무 커서 손이 작은 사람이 사용하기에 불편했다. 알파100은 다른 기종에 비해 미끄러웠다.

무게는 올림푸스 E410이 가장 가벼웠다. 반면 삼성의 GX10은 묵직하다는 느낌을 넘어 무거웠다. 장시간 촬영할 때 다른 기종들에 비해 피곤함이 더했다.

인터페이스(기능조작 환경)는 400D와 E410이 좋은 평을 받았다. 반면 D40X는 화이트밸런스, 감도, 파라미터 등을 설정할 때 다소 불편했다. GX10의 경우 메뉴가 텍스트가 아닌 그래픽으로 이루어져 있어 처음 사용자에게 쉽게 느껴지는 반면 반복 사용시 400D에 비해 한번 더 설정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 아쉽다.

■화질은 5기종 모두 좋았다

가장 민감한 분야인 화질은 DSLR답게 5기종 모두 우수했다. 초기 설정치 그대로 촬영할 때 D40X는 약간 노란빛이 감지됐지만 색상을 담백하게 표현했다. 400D는 다른 기종에 비해 색이 좀더 화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인물사진의 경우 약간 붉은 빛을 띠는 느낌이 들었다.

알파100은 인물사진에서 다른 기종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원본으로 봤을때 인물의 피부톤에 잡색이 스며들었다.

GX10은 선예도(경계가 뚜렷한 정도)나 콘트라스트(명암의 대비)는 좋았지만 사진이 전반적으로 붉은 색이 진하게 표현됐다.

E410은 피부톤을 부드럽고 파스텔톤처럼 표현해 여성 인물사진에 적합했지만 풍경이나 정물사진은 다른 기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콘트라스트가 낮았다. 야경촬영시 노이즈 억제를 할 때 400D가 가장 우수했다.

■부가 기능은 대동소이

모든 기종이 보급형 보디(본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우수한 성능을 보여줬다. GX10과 알파100은 손떨림방지 기능이 보디에 내장되어 있어 어두운 곳에서 뿐만 아니라 망원렌즈를 사용해 촬영할 때 위력을 발휘했다.

캐논이나 니콘은 기술력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체에 손떨림방지기능을 탑재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또한 알파100의 경우 뷰파인더에 눈을 대면 즉시 촬영준비를 할 수 있는 기능은 유저를 배려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터리는 모두 1기가 메모리를 기준으로 할때 메모리를 전부 사용할 때까지 사용이 가능했다.
by 100명 2007. 5. 2. 23:11
USA투데이, 한인 1.5세 소설 대서특필
이민자 정체성 다룬 ‘백만장자-’

한인 1.5세 재미교포가 쓴 이민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 버지니아공대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과 맞물려 미국 언론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의 전국지인 유에스에이(USA) 투데이는 28일 변호사 출신의 재미교포 작가인 이민자씨의 소설 `백만장자들을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의 내용을 요약한 기사와 함께 이씨와의 인터뷰를 크게 실었다.

이씨의 소설은 독립서적협회의 5월의 우수서적으로 선정돼 워너 북스에서 다음달 출간될 예정이다.

신문은 이씨의 작품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들의 내적인 삶을 들여볼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라면서 우연치고는 대단한 일치라고 소개했다.

이씨는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버지니아 공대 희생자들 때문에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면서 “며칠 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또 책 출간시기까지 겹쳐 너무 힘들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씨는 또 “아시아계 미국민들의 내적인 감정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우리의 인간적인 진면모가 표현되기를 원했다”고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소개하기도 했다.

워너 북스 편집인 에이미 에인혼씨는 “이 책의 출간이 버지니아공대 사건과 우연히 맞물렸지만 이 소설은 오래전부터 출간이 추진돼 왔다”면서 상업주의 관점에서 이 책의 출간을 바라보는 시각을 경계했다.

이씨는 조승희씨가 거의 비슷한 나이인 7살에 서울에서 미국 뉴욕으로 건너와 이민 초기에 세탁업을 했던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예일대 역사학과를 졸업한 뒤 2년간 변호사로 일하다가 전업작가로 전향한 그는 논픽션 부문 라이트 상과 픽션 부문 비치상, 신인작가를 위한 내러티브상을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다.

by 100명 2007. 5. 2. 10:39

인생의 목표, 美“가정” 日“친구” 中“부자” 한국은“즐기기”
[동아일보 2007-04-26 04:29]

[동아일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싶다.”

한국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꿈꾸는 인생의 장기 목표다. 이와 달리 미국 청소년은 ‘원만한 가정 꾸리기’, 일본 청소년은 ‘친구 많이 사귀기’, 중국 청소년은 ‘부자 되기’를 각각 삶의 긴 목표로 꿈꾸는 경우가 많다는 국제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일본청소년연구소는 지난해 10∼12월 한국 미국 일본 중국 고교생 567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고교생의 의욕에 관한 조사 결과 보고서’를 25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청소년들은 ‘자립심’과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에서 다른 3개국 청소년들보다 눈에 띄게 뒤떨어진 모습을 나타냈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이 한국은 18.5%였으나 중-미-일은 각각 34.2%, 29.2%, 22.9%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의 비율도 한국은 5.8%로 미국(36.7%)의 6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일본은 16.3%, 중국은 10.0%였다.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을 강하게 긍정한 청소년의 비율은 미국이 55.4%로 가장 높았고 이어 중국 36.2%, 일본 34.3%, 한국 23.5%의 순이었다.

청소년들이 ‘젊을 때 꼭 해 두고 싶은 일’로 꼽은 항목들의 응답 비율은 인생의 장기 목표와는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이 부문에서 한국 청소년이 나머지 3개국의 청소년보다 높은 응답률을 보인 항목은 ‘평생 사귈 친구를 얻고 싶다’(80.0%), ‘좋은 결혼 상대를 찾고 싶다’(54.2%), ‘돈을 벌고 싶다’(75.2%)였다.

모험심, 독창성, 사회 기여, 견문 넓히기 같은 진취적인 의식 측면에서 한국 청소년들은 미국과 중국의 청소년들에게 뒤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픽 참조

학습 의욕도 한국 청소년들이 미국과 중국의 청소년들에 비해 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에 전념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미국과 중국 고교생들은 각각 53.1%와 50.1%가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응답했으나 한국과 일본 고교생들은 22.7%와 19.6%만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답변했다.

고교 졸업 후 일류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의 비율은 중국이 37.8%로 가장 높았다. 한국은 28.5%, 미국은 24.7%, 일본은 20.4%였다.

그러나 ‘일류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의식은 미국 청소년들이 73.3%로 가장 강했다. 한국은 54.0%로 중국의 62.3%보다도 크게 낮았다.

장래 희망하는 직업으로 한국 학생들은 초중고교 교사(33.4%)를 가장 많이 꼽았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35.0%, 일본에서는 영업·판매·서비스직이 21.1%, 중국에서는 기업의 경영·관리자가 39.1%로 1위였다. 인생 목표와 장래 희망 모두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청소년들이 가장 자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인 것으로 나타나 흥미롭다.

by 100명 2007. 4. 26. 08:12

“한국 IT, 원천기술 없으면 곧 시든다”
[조선일보 2007-04-26 03:17]

IBM 보고서 “선진국 모방해선 못 이겨”

“한국이 현재처럼 선진국을 모방하는 전략에 머무른다면 원천기술로 무장한 미국과 일본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25일 한국 진출 40주년을 맞은 IBM이 우리나라의 IT(정보기술) 산업에 대해 고언(苦言)을 했다. 세계 최대의 IT 서비스·컨설팅 회사인 IBM은 최근 출간한 ‘한국 보고서’를 통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타결로 한국의 모든 기업은 선진국과 치열한 기술전쟁을 벌여야 한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보고서는 한국이 지난 10년 동안 IT분야에서 ‘신기술 전진기지’ ‘IT 모범생’으로 불릴 정도로 우수한 성과를 이뤄낸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원천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뤄낸 급성장은 고(高)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부족함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한국이 향후에도 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노동력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브릭스 국가에 추월당할 것으로 전망했다. 보고서는 특히 한국 경제의 주요 문제점으로 20년 동안 정체된 성장동력을 지적하기도 했다. 보고서는 “원천기술을 확보하려면 정부가 과감하고 직접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샘 팔미사노 IBM 본사 회장은 “한국의 모든 기업이 개방을 향한 조치를 받아들이면 산업과 한국인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줄 것으로 확신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국IBM은 지난 1967년 설립돼 경제기획원(현 재정경제부)에 인구통계 조사용으로 국내 최초의 컴퓨터인 ‘IBM 1401’을 도입, 컴퓨터 시대를 열었다.

by 100명 2007. 4. 26. 08:05
"땅값 비싸 이익 못낸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등돌려
◆망국병 비싼 땅값 / ④ 투자유치 발목 잡아◆

"땅값 때문에 모든 게 틀어졌습니다 ."

지난해 독일 태양광 발전 선도업체인 `쇼이텐 솔라`의 한국 투자유치건을 담당했던 이태목 경기도 투자유치자문관이 한 말이다.

현재 경기도의 어지간한 땅은 평당 200만~300만원을 훌쩍 넘는다.

50만평이라면 땅값만 1조~1조5000억원 이상 든다는 얘기다.

삼성전자와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올해 생각하고 있는 설비투자 금액이 9조원 안팎이다.

땅값만 1조원이 넘는 국외투자를 특화 기업인 `쇼이텐 솔라`가 추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경기도는 궁리 끝에 서해안을 메운 매립지를 활용해 땅값을 줄이는 방안도 연구했다.

이 자문관은 "바다를 메워서 공짜로 생긴 땅도 평당 200만원이 넘더라"며 "땅값이 이렇게 비싸니 아무리 다른 조건이 좋아도 외국 기업은 발길을 돌리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고(高)지가가 국가ㆍ기업 경쟁력을 좀먹는 사례는 많다.

특히 비싼 땅값에 놀라 한국을 등진 외국 기업들은 부지기수다.

유니버설스튜디오가 2003년 인천 청라지구 진출을 검토했다가 무산된 데도 비싼 땅값이 한몫했다.

유니버설스튜디오가 희망했던 청라지구 내 용지는 총 26만평. 여기에 최근 분양된 인천 청라지구 상업용지 평균 낙찰가(평당 1755만원)를 적용하면 땅값만 무려 4조5630억원(49억달러)에 달한다는 계산이다.

당시 예상했던 연간 매출액은 1억9600만달러 수준이었다.

상업지와 테마파크 용지를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땅을 사지 않고 빌리기만 하더라도 임차료 부담은 버티기 힘든 수준이다.

토지공사 관계자는 "당시 유니버설스튜디오가 생각했던 투자 규모는 10억달러였다"며 "저렴한 테마파크 유치용 유보지까지 따로 지정해 놨지만 소용없었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연합회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용지 가격은 일본 대만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아시아 다른 국가보다 2~6배 높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공단 분양가가 중국과 말레이시아 공장 단지의 3배가 넘고, 영국보다 2배 이상이 높다는 통계치도 있다.

하지만 국내 기업은 비싼 땅값뿐만 아니라 토지규제라는 짐까지 져야 한다.

경기도 ○○시 공단지역에 96년 입주한 H사는 종업원 600명, 연매출 4000억원 규모인 중견기업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매출과 수출이 15~37%씩 신장되자 공장 증설 필요성이 대두됐다.

하지만 H사는 자연보전지역 내 신ㆍ증설 면적 규제, 도시지역 지정에 따른 건폐율 축소 등 규제 때문에 추가적인 생산라인 확보에 실패했다.

H사 선택은 `중국행`이었다.

기존에 운영중이던 중국 공장으로 생산라인 1개를 이전했다.

이로 인해 ○○시는 종사원 100명의 일자리를 잃었고, 연간 500억원의 매출액을 중국에 빼앗겼다.

문제는 H사 같은 업체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by 100명 2007. 4. 26. 07:54

신세계 "백화점 덕", 롯데 "할인점 덕"
경쟁업태서 매출성장 효과 `톡톡`

[이데일리 이태호기자] 신세계(004170)롯데쇼핑(023530)이 지난 1분기 소비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모두 양호한 외형 성장세를 이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만한 점은 대형마트업계 `지존` 신세계는 백화점 부문에서, 백화점업계의 `제왕` 롯데는대형마트 부문에서 눈에 띄는 성장을 이끌어 낸 것.

각자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한 공격적인 출점이 매출증대로 이어진 덕분이다.

25일 롯데쇼핑은 지난 1분기 총매출액이 2조4288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7% 증가했다고 밝혔다. 매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대형마트 부문. 공격적인 롯데마트 출점 덕에 마트 부문 총매출이 18.8% 급증했다.

롯데쇼핑은 "1분기 소매경기의 둔화와 이상고온 등으로 백화점 사업부문의 실적이 다소 부진했다"면서 "다만 대형마트 부문은 지속적인 점포확장 전략으로 큰 폭의 매출신장과 양호한 영업이익을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에비해 신세계의 1분기 매출액 증가에는 백화점이 `효자` 역할을 했다.

월별로 실적을 발표하는 신세계가 지난 9일 발표한 1~3월 총매출액 합계는 2조4406억원. 지난해 동기보다 6.1% 증가했다.

이와 관련, 신세계는 부문별 실적을 따로 공개하지 않았지만 "지난 2월 신세계 백화점 본점의 재개점과 3월대형쇼핑몰죽전점의 오픈으로 백화점 부문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고 밝혀 백화점이 외형성장의 1등 공신임을 시인했다.

한편 이익성장 측면은 양사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롯데쇼핑의 1분기 영업이익은 1837억원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2.1% 감소했고, 신세계의 영업이익은 1660억원으로 같은 기간 1.9% 증가하는 데 그쳤다.

by 100명 2007. 4. 26. 07:26

‘참여와 공유’로 대변되는 웹2.0, 진정한 기회인가?

웹의 진화는 사용자에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포탈이나 IT 벤더들에게는 기술적인 접근과 UCC 등을 활용한 신규 수익 모델을 창출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웹2.0이 진정으로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UCC에 대한 오해, 어디부터 웹2.0인가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는 가운데 업계 관계자부터 사용자, 나아가 기업에 이르기까지 웹2.0 환경에서 기회를 찾기 위해 분주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웹상에서 사용자의 참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로 인해 기존의 웹과의 차이를 두는 개념이 생겼고, 그것이 웹2.0이다. 2.0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웹과는 차이가 있는 차세대 웹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웹2.0의 가장 큰 핵심은 사용자의 참여와 공유다.

소위 말하는 웹1.0 시대에는 포탈이나 인터넷 서비스 업체에서 제공한 정보를 사용자들이 받아들이는 단순한 한 방향 서비스에 불과했다면 웹2.0은 서비스에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변화한다는 개념으로 이미 진행 중에 있다. 결국 웹2.0은 사용자 요구를 반영한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다.

웹2.0을 가장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UCC(User Created Contents)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그러나 UCC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

UCC는 말 그대로 사용자가 만든 모든 컨텐츠를 의미하고 있음에도 단순히 동영상에 한정해서 의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종종 발견된다. 이는 포탈 등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의 무분별한 마케팅 메시지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다. 웹1.0 시대에도 게시판 등 사용자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에 다양한 형태로 UCC가 존재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텍스트나 이미지에 국한된 컨텐츠를 만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인식된다. 최근 UCC가 각광 받는 이유는 사용자가 다양한 형태의 컨텐츠를 제작, 공유할 수 있는 인프라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UCC의 최초 형태인 텍스트에서 이미지, 동영상 등으로 그 형태가 다양해 졌을 뿐만 아니라 블로그, 지식 공유 서비스 등을 통한 활발한 공유의 장도 마련됐기 때문이다.

포탈에서 바라보는 웹의 진화
차세대 웹으로 각광받고 있는 웹2.0은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웹 환경이 변화하는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이는 웹이 향후에도 사용자 중심으로 끊임없이 진화될 것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현재 NHN, 다음커뮤니케이션 SK커뮤니케이션즈, 야후, 구글 등 포탈 업체들은 새로운 트렌드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며, IT 벤더들 역시 시대적 요구 속에서 솔루션이나 새로운 전략을 근간으로 신규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NHN은 웹2.0의 시초로 아마존을 꼽았다. 아마존에서 사용자가 책에 대한 리뷰를 하면서 사용자 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열려 사용자 참여가 활발히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NHN 지식IN 김윤호 프로젝트 매니저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웹 환경이 어느 정도 웹2.0이 가시화 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향후에는 넘쳐나는 데이터를 어떻게 가공하고 유통할 수 있는지가 웹 진화의 핵심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NHN은 웹2.0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현재 높은 점유율을 선점하고 있는 블로그와 지식IN 서비스를 강화한다는 복안으로 향후 전략적으로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s, 응용프로그램환경) 공개를 더욱 확대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API 공개가 가속화 될 경우 내부 데이터가 외부로 제공되기 때문에 사용자 간 정보교류가 더욱 활발히 이뤄질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UCC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을 환영하면서 향후 컨텐츠의 질이 중요해 질 것이라면서 컨텐츠의 유통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NHN 카페블로그팀 정현주 팀장은 “UCC가 텍스트 기반에서 이미지, 동영상으로 범위가 확대되고 있으며, 한 명의 사용자가 생성한 UCC가 현재의 형태라면, 앞으로 UCC가 커뮤니티 형태로 발전되고 더욱 활성화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즉, 관심이 있는 UCC가 한 명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형태에서 탈피해 네트워크를 통해 더욱 뛰어난 UCC 생성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는 설명. 이는 위키피디아의 공동 집필 형태로 확장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기존 폐쇄적이던 웹 서비스에서 사용자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개방성과 자율성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네티즌의 참여형 서비스로 스스로 컨텐츠와 프로그램 등을 생산, 공유, 재창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 특히 사용자의 관심이 높은 UCC는 사용자 편의성을 대폭 강화한 블로그 테마 서비스를 통해 고객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또한 사용자의 취향대로 블로그를 제작, 수정할 수 있는 개방형 블로그 ‘티스토리닷컴’을 통한 블로그 강화와 API 공개를 통해 서비스 개발과 사용자 도구를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고객몰이에 나섰다.

그밖에 많은 포탈 업체들도 웹2.0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고, 특히 UCC에 대해 전략적인 접근을 강화하고 있다.

웹2.0으로 각광받는 신기술들
비단 포탈과 인터넷 서비스 업체에서만 웹2.0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RSS, SOAP, RIA, Ajax, 플렉스, 위젯, 플래시, 매쉬업 등 웹2.0을 구현하기 위한 기술적 요소는 IT 벤더들에게 있어서 큰 관심을 갖게 하기 충분하다. 그 중 한국어도비시스템즈는 RIA를 통해 웹2.0을 완성할 수 있다는 설명. RIA는 단일 인터페이스 웹에서 볼 수 없었던 역동적이고 편리한 고객 중심의 웹페이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웹2.0의 핵심 기술로 각광받고 있다.

이런 추세와 함께 RIA에 대한 웹 개발자들의 수요가 발생할 것이라고 관측하면서 API의 공개가 활성화되면 이를 활용한 손쉬운 웹 개발이 가능해 그 수요는 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어도비시스템즈 옥상훈 차장은 “RIA가 향후 웹에서 데스크톱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어도비 아폴로를 통해 데스크톱에서도 RIA를 실현할 수 있다”고 전했다. 아폴로는 웹 브라우저를 사용하지 않고 데스크톱에서 웹을 실행하는 기술로 플래시를 백그라운드 프로세스로 돌릴 수 있어 개발자들의 편의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 어도비의 설명.

또한 아폴로는 HTML, 플래시, AJAX, 자바스크립트 등을 이용해 RIA를 웹브라우저 없이 데스크톱에서 실행할 수 있어 웹 개발자들이 다양한 웹 기술로 OS별 플랫폼을 뛰어넘는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어도비는 웹2.0 수요에 맞춰 아폴로에 대한 영업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다이퀘스트, 코리아와이즈넛, 코난테크놀로지 등 검색 업체들도 웹2.0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코리아와이즈넛은 웹2.0 시대에는 검색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으로 분석하고, 사용자들의 참여에 의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컨텐츠 속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컨텐츠를 선별, 수용할 수 있도록 검색을 강화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기존의 검색보다 한 단계 확장된 개인화 검색으로 발전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뜻이다.

웹2.0의 확장, 엔터프라이즈2.0
마이크로소프트, IBM, BEA시스템즈의 경우 웹2.0이 기업 사용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하고 엔터프라이즈2.0이라는 개념에서 접근하고 있다. 웹에서 일어났던 사용자 요구가 향후 기업에서도 발생된다는 것. 이는 기업 내 협업에 관한 이슈와 맞물려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웹2.0이 웹 사용자의 요구로 발생된 개념이지만, 대부분의 기업용 솔루션이 웹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결국 기업 차원에도 문화적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과거 일방적 서비스에서 양방향 서비스로 형태가 변화된 것이 웹2.0이라면 엔터프라이즈2.0은 IT부서와 솔루션 공급자들및 현업의 협업이 강조됨을 의미한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는 IT부서가 다양한 현업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이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는 현업의 요구가 다양해 하나의 단일 시스템만으로 모든 요구를 처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결국 엔터프라이즈2.0은 IT에서 현업이 원하는 애플리케이션들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현업이 다양한 플랫폼 하에서 활용하는 환경을 만든다는 개념으로 MS는 조만간 이런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비즈니스&마케팅 본부 이국희 차장은 “현재 많은 기업들이 MS 오피스 제품군을 활용하고 있어 친숙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MS의 경쟁우위 확보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오피스 제품군이 단순한 PC 애플리케이션이 아닌 서버 애플리케이션이 돼야 할 것”으로 설명하고 MS는 익스체인지, 쉐어포인트 서버 근간의 하나의 통합 플랫폼을 통해 웹2.0의 화두인 풍부한 사용자 환경, 데이터 기반과 사용자 중심 애플리케이션, 사용자 참여, 집단 지성을 이룬다는 전략이다.

한국IBM도 비슷한 맥락에서 엔터프라이즈2.0을 준비하고 있다. 협업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전자우편 등의 그룹웨어에서 비디오, 오디오, 데이터가 통합되는 UC(Unified Communication)를 완성한다는 구상이다. 또, 정보의 공유를 위한 환경, 통합된 단순한 서비스와 애플리케이션의 조합 등으로 협업을 완성할 것이라는 의미다.

올해 로터스 커넥션을 출시할 예정인 한국IBM은 이미 자사 내부 인트라넷인 ODW(On Demand Workplace)에서 이 제품이 베스트 프랙티스로 구현됐다고 밝히고, 이미 도이치방크를 비롯한 100여 개의 고객사를 대상으로 파일럿 프로젝트를 완료했다고 설명했다.

엔터프라이즈2.0은 웹2.0이 단순한 웹 사용자에게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닌 사회 전반의 문화 변화라는 관점으로 접근해 향후 기업내 현업과 IT 부서간 협업에 있어서 새로운 장이 열릴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는데 의미가 크다.

웹2.0과 함께 새롭게 열리는 비즈니스 기회들
웹2.0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벤더와 포탈 사이에 많은 관심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실제로 이를 활용한 비즈니스 모델은 거의 전무한 상태다. 기껏해야 광고를 통한 비즈니스 모델이 대부분일 뿐 웹2.0의 등장만큼 혁신적인 비즈니스 기회가 창출돼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업들은 웹2.0을 통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UCC를 활용한 비즈니스 가치 창출에 열을 올리는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포탈뿐만 아니라 편집 관련 솔루션 업체 등은 UCC를 호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작년 창립 16주년에 첫 선을 보인 한글과컴퓨터의 크레팟 서비스는 디지털 컨텐츠 유통을 모토로 사용자가 직접 텍스트나 동영상, 음악, 사진 등의 디지털 컨텐츠를 생산, 유통, 공유할 수 있게 한 서비스다. 크레팟 서비스 기획을 총괄하고 있는 김재훈 전략사업본부장은 “수많은 시장조사와 기획을 통해 향후 크레팟을 캐시카우로 키울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다음도 블로그 서비스를 강화하면서 양질의 UCC를 손쉽게 생산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대폭 강화한다는 방침으로 현재 비교적 선전하고 있다는 자체 분석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 포탈의 경우 NHN의 점유율이 비약적으로 높은 점을 감안한다면 여러 가지 서비스나 편의성 증대 노력보다는 많은 사용자층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당면 과제인 것으로 생각된다.

웹2.0이 부각된 것은 아마존과 이베이 등 쇼핑몰의 역할도 컸다. 국내에서도 이를 벤치마크해 새로운 기회 창출에 나선 업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웹2.0 열린 벼룩시장을 표방하는 오픈베이가 대표적 사례다.
오픈베이 최병민 대표는 “오픈마켓이 판매자 중심으로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오픈베이는 판매자와 구매자 간 연결고리를 제공하는데 있어서 사용자 중심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오픈베이는 직거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는 서비스가 전부이기 때문에 현재 수익 모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후 블로그를 통한 제품판매와 사이트들과의 제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이렇듯 차세대 웹인 웹2.0을 기회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회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남에 따라 IT 벤더들도 웹2.0과 연관된 기술개발과 함께 웹2.0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그럼에도 웹2.0에 대한 오해와 편협한 접근으로 차세대 웹이 구현될지에 대한 것은 미지수다. 많은 포탈들이 단순한 마케팅 메시지 전달을 위해 웹2.0을 UCC에 국한해 단순히 접근한다면 오히려 웹2.0에 대한 이해를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웹2.0 의 이해가 선결되야 기회 창출 가능
시맨틱웹과 웹2.0이 합쳐진 웹3.0이라는 3세대 웹이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제기되는 가운데 IT 벤더,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뿐만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도 사용자 중심으로 환경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웹2.0의 등장은 통신의 발달로 IT 인프라가 구축돼 사용자의 참여가 가능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현재 웹2.0으로 인식해도 무방할 정도로 웹에 참여하는 사용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그로 인해 사용자 중심으로 웹 환경이 변화하는 속도는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웹2.0에 대해 정확한 개념 이해와 함께 그에 맞는 전략 수립은 새로운 기회를 찾는 기업과 벤더들에게 꼭 필요하다. 비단 웹 사용자뿐만 아니라 기업도 사용자 중심 환경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엔터프라이즈2.0도 주목을 받고 있다.

웹2.0, 엔터프라이즈2.0 등 차세대 키워드가 자리를 잡고 있는 가운데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선 웹2.0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결돼야 할 것으로 분석된다.

인터뷰 | NHN 카페블로그팀 정현주 팀장
웹2.0의 핵심은 “오픈 API”

웹2.0 구현을 위한 기술은 무엇인가.

오픈 API가 대두될 것으로 생각된다. 오픈 API는 내부의 데이터를 외부로 제공하는 개념으로 API가 공개될 경우 양방향으로 정보가 제공돼 사용자간 정보교류가 보다 활발히 이뤄질 것으로 생각한다. 네이버도 이런 기류에 발맞춰 전사적으로 오픈 API를 고민 중에 있고 현재 오픈 API 베타 서비스를 진행중에 있다.

현재 새로 서비스를 시작한 블로그 시즌2는 기존 블로그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눈에 띄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개인화된 인터페이스를 둘 수 있다. 기존에는 블로그 화면이 일괄적이었고, 꾸민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스타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으나, 시즌2에서는 각각의 요소를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다. 또한, 몇 가지 구성요소가 추가돼 위젯의 형태로 원하는 정보를 한 눈에 볼 수도 있다.

지식IN 서비스가 사용자 간 지식 공유의 장이 되고 있듯이, 앞으로 사용자에 의한 더욱 활발한 참여와 공유가 예상되고 있다. 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나.
현재 새롭게 지식IN이 발전할 수 있는 형태의 프로세스를 만들고 있다. 사용자 시스템도 변경할 예정이다. 기존에 지식IN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네티즌이 활동에 의한 자신만의 명예를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지식IN을 게임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사용자들이 파워유저로 성장하면서 서로 경쟁했다. 그러나 향후 신뢰성 있는 사용자를 많이 추출할 수 있는 형태로 발달, 개편하려는 생각이다. <규>

인터뷰 I 오픈베이 최병민 대표
웹2.0을 통한 “신개념 오픈마켓”

오픈베이가 웹2.0을 구현한 사이트인 이유와 다른 오픈마켓과 갖는 가장 큰 차별점은 무엇인가.

기존 웹1.0이 폐쇄적이었다면 웹2.0은 정보를 공유하는 개념으로 사용자의 참여가 보다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이다. 일반 오픈마켓은 판매자 중심이지만 오픈베이의 경우 사용자 중심으로 판매자와 구매자 구분없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또한 타 오픈마켓이 회사 중심의 상거래 컨텐츠로 운영해 왔다면 오픈베이는 철저한 사용자 중심 운영을 한다는 점이 차별점이다.

오픈베이에서 RSS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있는가.
오픈베이의 가장 큰 특징은 RSS의 활용이다. RSS를 통해 원하는 물품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카메라를 살 생각이 있는 소비자가 이와 관련한 RSS를 실행하게 되면 판매자가 카메라를 등록할 때마다 알려주는 것으로 소비자와 판매자간 보다 손쉬운 거래가 가능해진다.

현재 판매자와 사용자가 직거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고 결제 서비스도 없어 수익 모델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현재 판매자와 소비자의 거래에 운영자의 개입이 없지만, 많은 사용자들이 운영자가 중간에 개입해 중재하기를 원하고 있다. 향후 결제 서비스를 추가할 예정으로 이는 보통 오픈마켓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다른 오픈마켓과 다른 점은 블로그의 태그를 통해 전문 블로그에 필요한 정보를 올리는 형태로 정보를 공유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by 100명 2007. 4. 26. 07:24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20) - Hewlett-Packard(하)
성장세 멈춘곳에 기업통합, 다운 사이징


여류간판스타 칼라 피오리나의 부각과 몰락은 경영계의 미스테리



▲ 세계시장을 강타한 HP9100프로그램기능 탁상용 계산기.
21세기가 다가오면서 휴렛 팩커드(HP)사는 중대한 딜레마에 부딪혔다. 실리콘 밸리의 터줏대감으로 유명한 이들은 말 그대로 차고에서 시작해서 누구나 공인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컴퓨터 회사로 성장했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가 이들의 오디오 발진기를 채택해서 원판 <팬터지아>를 만든 1939년 이래, 이들은 언제나 업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첨단 전자 제품들을 생산했다. 그 최초의 발진기에서 시작해서 계산기, 컴퓨터, 프린터, 이미지 처리 주변 장치들까지, 휴렛 팩커드의 제품은 언제나 주목할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HP는 종업원들에게도 훌륭한 직장이었다. HP의 창업자들은 선구적인 ‘움직이는 경영(Management by Walking Around)’ 원칙을 확립해서 회사 지도자들이 언제나 종업원들이 언제나 종업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출퇴근 기록기를 없애고 유연한 작업 스케줄을 도입했다. 당시 미국의 대기업 가운데 HP처럼 운영 권한을 분권화하고 노동자들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곳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이들은 월등한 임금과 복지 혜택을 제공했다. 더 나아가 이런 자랑스런 기업 전통을 명문화하기 위해 믿음과 개방성을 강조하는 회사 공식 문서 ‘HP방식(HP Way)’을 채택하기도 했다. HP를 겨냥한 비난이라면 단 하나, 예전부터 고위 경영진에 여자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를 준비해가는 도안 이 모든 것이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실험성을 자랑하던 회사 구조는 네트워크 시대에 잘 들어맞지 않았다. 특이한 관행들-지금이라면 HP에 고용하지 않을 유형의 노동자들에게 87시간 분의 임금을 주던 것과 같은-은 계속해서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켰다. 소프트웨어 등 여러 핵심 분야에서 일으킨 기술적 혁신이 사람들에게-일반 대중뿐 아니라 중요한 투자 집단의 인물들에게도-잘 알려지지 않았다. 경쟁사들은 수면으로 떠오르고, 인터넷 사업은 지지부진 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1999년 중반, 휴렛 팩커드는 다시 한 번 파격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칼턴 S. 피오리나(칼리 피오리나)를 사장 겸 CEO로 임명한 것이다. 여성 최초로 다우존스 산업 지수를 이루는 기업을 이끌게 된-그리고 최초로 HP 외부에서 영입된 CEO인-마흔다섯 살의 칼리 피오리나는 AT&T의 자회사인 루슨트 사 출신의 베테랑이었는데, 취임과 더불어 대대적인 기업 개편에 착수했다. “우리는 회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당당히 선언했다. 그런 뒤 피오리나가 단행한 일련의 조치들은 HP의 전통에 익숙해져 있던 많은 사람들을 아연케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종업원, 고객, 투자자들을 포함해서-가운데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차고에서 시작한 실리콘 밸리 대기업의 신화가 아직 사람들에게 낯설던 50년전, 스물여섯 살 동갑내기인 두 엔지니어가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그만 차고에서 전자 제품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연이은 실망 끝에 마침내 ‘HP 200A 저항 흡수 오디오 발진기’라는 혁신적인 제품이 태어났을 때, 공동 개발자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의 수중에 남은 돈은 겨우 538달러뿐이었다. HP 200A는 사운드 장비를 테스트 하는 도구였는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를 주문 계약하면서 특허까지 사버렸다. 월트 디즈니는 여덟 대의 HP 200A를 주문했고, 이 장비가 디즈니의 획기적인 영화 <팬터지아>의 제작에 중요한 구실을 함에 따라, 휴렛 팩커드는 혁신적인 전자 기업의 길 위에 성큼 올라서게 되었다.

휴렛과 팩커드는 처음부터 종업원들과 맺는 관계를 매우 중시해서, 이 분야에도 제품 개발 못지 않은 창의적 에너지를 쏟았다. 업무 공간 자체를 개방적으로 꾸몄으며-임원들의 사무실도 문이 없었다-, ‘오픈 도어 정책(Open Door Policy)’을 공식화해서 전 영역에 상호 신뢰의 분위기를 정착시켰다. 거기다 이제는 유명해진 ‘움직이는 경영’ 원칙을 통해서 관리자와 노동자들이 훨씬 더 깊이 있고도 효과적인 관계를 맺도록 했다.

1950년대에는 제품과 인력 분야 양쪽에서 모두 중대한 전환이 이어졌다. ‘HP 524A 고속 주파수 계수기’와 같은 제품들이-라디오 방송국들이 연방 정부의 규정에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연속적으로 성공을 거둠에 따라 HP의 공장은 점점 바빠졌다. 이익은 연구 개발에 재투자 되었고, 공동 경영자들은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에게서 얻은 빚에서 놓여났다. 게다가 이들은 플로터(선박이나 비행기의 위치 등을 지도나 종이에 찍어 표시하는 도구: 역자주) 제조 회사까지 인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프린터 사업의 토대이자 기업 공개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 시대를 앞선 HP의 경영 원칙은 최고 수준의 젊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광범위하게 끌어 모았다. 1957년에 이들은 회사의 독특한 목적과 경영 스타일을 ‘HP 방식’이라는 이름으로 공식화했다. 다음 해에 HP는 회사를 독자적인 손익 책임성을 갖는 몇 개의 개별 부문으로 나누어 팰러앨토의 본사 바깥으로 떠나 보냈다. 이 개별 부문들은 맡은 제품을 독자적으로 개발, 제조, 마케팅하고, 실적에 따라 차후 R&D 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1959년에 HP는 세계로 발을 넓혀 독일에 생산 공장을 세우고, 스위스에 유럽 본사를 열었다. 이들은 또한 스톡옵션 계획을 종업원 후생 복지 제도에 포함시켰으며, 최초로 현금 이익 분배 프로그램을 제도화했다.

1960년대는 ‘자유 근무제’와 ‘계산기’의 시대였다. 자유 근무제는 1967년 독일의 공장에서 처음 시행되었는데, 그 후 5년여 만에 회사 전역에서 출퇴근 기록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by 100명 2007. 4. 25. 22:32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9) - Boeing(하)
시련으로 단련된 항공계 일인자


사업다각화와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도전자 따돌려



▲ 비행기가 편리한 여행수단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보잉사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보잉이 비행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에 그는 파일럿 한 명과 함께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에서 시애틀로 60통의 편지를 싣고 날아왔다. 이것은 미국으로 배달된 최초의 국제 항공 우편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민간 항공기 모델을 만들었고, 그 중에는 최초로 레이니어 산을 넘은 것도 있다. 육군 항공부도 전투용 복엽기를 상당량 주문했지만, 보잉은 다양한 분야의 고객을 확보해서 비행기를 꾸준히 만들고 팔지 않으면 회사를 지탱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그는 캔자스 주에 있는 ‘스티어먼 에어크래프트 회사’를 매입했고, ‘보잉 비행학교’를 열었다. 찰스 린드버그가 최초로 ‘뉴욕 파리’ 간 대서양 횡단 단독 비행에 성공한 1927년에 보잉은 미국 우체국과 계약을 맺고, 그 동안 눈독들여온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간 우편 항로를 운항하기 시작했다.

▲ 전략 폭격기로 불리우는 B-29는 2차대전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어느덧 비행기 운항과 판매 양쪽 분야가 모두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는 승객과 우편물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송하기 위해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의 전신인 ‘보잉 에어 트랜스포트’를 설립했다. 이 시기에는 금주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보잉의 부인 버사는 오렌지 맛 탄산 음료수로 운항 출범식을 치렀다. 그 다음 해, 100만 파운드에 이르는 우편물 및 속달 소포와 1,900명 가까운 승객이 이 22.5시간의 항공 여행을 했다. 사람들은 차츰 비행기 여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뒤이어 촉발 된 수요는 보잉 사를 이후 수십 년 동안 정상의 위치에 머물게 했다. (물론 이에는 군납 수요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우주 개발 산업도 큰 몫을 했다.)

그 후로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보잉 사는 끊임없는 제품 라인 확장으로 언제나 업계를 지배했다. 이들은 비행기를 건조했으며, 엔진, 프로펠러 등의 부품도 만들었다. 우편물도 배달했다. 공항도 관리하고, 항공사도 운영했다. 복엽기가 사라지고 단엽 비행기 시대가 열렸을 때도 변화를 주도한 것은 보잉 사였다. 이들의 양키 클리퍼 기는 최초의 대서양 횡단 정기 우편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호사스런 스트라토라이너 기는 진주만 공격 이후 군용 C-75기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B-29기 이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 계약들이 다시 취소되면서 대량 해고가 뒤따랐지만, 이번에는 광범위한 민간 비행기 주문이 그 자리를 메꾸어 주었고, 보잉 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제트 비행기가 개발되고 국방부 주문이 밀려들면서, 보잉 사는 생산 시설을 전력으로 가동할 때가 많았다. 1956년 윌리엄 보잉이 죽었을 때, 보잉 사의 비행기들은 지구 일주도 할 수 있는 성능을 갖추었다. 그리고 통근 승객들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항공기 승객이 기차 승객을 추월하게 되었다.

▲ 보잉 747이 스페이스 셔틀을 싣고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이륙하고 있다. 보잉사는 우주운송분야에 없어서 안될 독보적인 존재다.
1960년대에 미국과 보잉 사는 함께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케네디 대통령은 유인 달 탐사 계획을 발표했고, 보잉 사는 정부에 2,000명의 실무 인력을 지원해주었다. 보잉 사의 달 궤도 선회 우주선은 적절한 착륙 장소를 탐색했고, 월면차는 달의 대지를 탐험했다. 새턴 V 1단계 부스터는 아폴로 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보잉 707기는 오랫동안 정부 요원들의 이동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에어 포스 원’ 이라는 호출 부호를 썼다. 1962년에 두 대의 707기가 대통령 전용기로 지정된 뒤, 이들 비행기는 공식적으로 ‘에어 포스 원’을 영구 호출 부호로 삼게 되었다. 이 비행기들은 1990년 까지 대통령 전용기로 이용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것도 역시 보잉 사의 747기였다.

그러나 신기술 비행기들이 계속 개발되는 중에도-그 가운데는 490명의 승객을 대서양 너머로 운송할 수 있는 747 점보 제트기도 있었다-보잉 사에는 대량 해고가 빈번했다. 1970년 미 정부가 초음속 운송 프로그램을 돌연 중단하자, 5만 명에 이르는 직원이 해고되었다. 보잉 사는 다시 한 번 사업 다각화 전략으로 이에 맞섰다. 컴퓨터 서비스 회사를 만들고, 오리건 주 동부에 관개 사업을 실시하고, 버진 아일랜드에 바닷물 염분 제거 공장을 세우는 것 등이 그 방책이었다. 이들은 또 컬럼비아 강가에 세 대의 대규모 풍력 터빈을 세우고, 경찰 업무용 음성 변조기를 만들었으며, 몇몇 자치 단체에서 쓰는 경전철 차량을 제조했다. 이렇듯이 변하는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 또한 많았다.

하지만 이런 사업 다각화 전략에도 불구하고 보잉 사의 핵심은 언제나 민간 항공기, 군수 제품, 우주 산업 관련 용품들이었다. 보잉 사의 지도자들은 모든 사업 부문에서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오랜 계명을 따라 1996년 로크웰 인터내셔널, 1997년 맥도넬 더글라스, 2000년 초에 휴즈 일렉트로닉스의 통신 위성 사업부와 같은 주요 경쟁사들을 흡수했다. 그러나 몇 달 후에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이 벌인 전례없는 40일 간의 파업은 보잉의 민간 부문과 군수 부문 양쪽에 모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더불어 회사 가치도 53억 달러나 하락되었다.

동맹 파업은 노사 양측에 쓰라린 결과를 안겨주었지만, 파업 종식 후에는 회사도 종업원들도 다시 힘차게 뛰어올랐다. 파업 후 몇 주일 지나지 않아 보잉 사는 승객들이 비행중에 소지한 노트북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과 이메일 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그 후 곧 최대 경쟁사 에어버스 인더스트리즈가 신규 비행기 수주 건수에서 처음으로 보잉 사를 추월했다고 발표하자, 보잉 사는 다시 한 번 흔들렸다. 게다가 에어버스의 새 슈퍼점보 제트기는 이전까지 보잉 사의 대형 대서양 횡단 기종들로 향하던 관심과 매출을 광범위하게 끌어가고 있다.

그 동안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보잉 사는 얼른 그 해결책을 내놓았다. 초대형 ‘747x스트레치’가 그것이다. 스트레치 기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 스스로 민간 항공의 세계를 열어젖힌 이래 1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잉 사는 이보다 더한 어려움도 수없이 극복했기 때문이다.

by 100명 2007. 4. 25. 22:31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20) - Hewlett-Packard(상)
움직이는 경영, 오픈도어정책으로 성공


가상창의적인 컴퓨터, 이미지 영상관련기업

창업자:빌 휴렛, 데이비드 팩커드
특징:첨단 기술 및 첨단 산업의 선도자
주요 제품:컴퓨터, 프린터 및 이미지 처리 장치, 관련 서비스
연간 매출:423억 7,000만 달러
종업원 수:8만 4,400명
주요 경쟁사:컴팩, IBM, 제록스
회장 겸 CEO 겸 사장:칼턴 S. 피오리나(칼리 피오리나)
본사:캘리포니아 주 팰러앨토
창업 연도:1939년
웹사이트:www.hp.com


21세기가 다가오면서 휴렛 팩커드(HP)사는 중대한 딜레마에 부딪혔다. 실리콘 밸리의 터줏대감으로 유명한 이들은 말 그대로 차고에서 시작해서 누구나 공인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컴퓨터 회사로 성장했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가 이들의 오디오 발진기를 채택해서 원판 <팬터지아>를 만든 1939년 이래, 이들은 언제나 업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첨단 전자 제품들을 생산했다. 그 최초의 발진기에서 시작해서 계산기, 컴퓨터, 프린터, 이미지 처리 주변 장치들까지, 휴렛 팩커드의 제품은 언제나 주목할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HP는 종업원들에게도 훌륭한 직장이었다. HP의 창업자들은 선구적인 ‘움직이는 경영(Management by Walking Around)’ 원칙을 확립해서 회사 지도자들이 언제나 종업원들이 언제나 종업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출퇴근 기록기를 없애고 유연한 작업 스케줄을 도입했다. 당시 미국의 대기업 가운데 HP처럼 운영 권한을 분권화하고 노동자들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곳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이들은 월등한 임금과 복지 혜택을 제공했다. 더 나아가 이런 자랑스런 기업 전통을 명문화하기 위해 믿음과 개방성을 강조하는 회사 공식 문서 ‘HP방식(HP Way)’을 채택하기도 했다. HP를 겨냥한 비난이라면 단 하나, 예전부터 고위 경영진에 여자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를 준비해가는 도안 이 모든 것이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실험성을 자랑하던 회사 구조는 네트워크 시대에 잘 들어맞지 않았다. 특이한 관행들-지금이라면 HP에 고용하지 않을 유형의 노동자들에게 87시간 분의 임금을 주던 것과 같은-은 계속해서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켰다. 소프트웨어 등 여러 핵심 분야에서 일으킨 기술적 혁신이 사람들에게-일반 대중뿐 아니라 중요한 투자 집단의 인물들에게도-잘 알려지지 않았다. 경쟁사들은 수면으로 떠오르고, 인터넷 사업은 지지부진 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1999년 중반, 휴렛 팩커드는 다시 한 번 파격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칼턴 S. 피오리나(칼리 피오리나)를 사장 겸 CEO로 임명한 것이다. 여성 최초로 다우존스 산업 지수를 이루는 기업을 이끌게 된-그리고 최초로 HP 외부에서 영입된 CEO인-마흔다섯 살의 칼리 피오리나는 AT&T의 자회사인 루슨트 사 출신의 베테랑이었는데, 취임과 더불어 대대적인 기업 개편에 착수했다. “우리는 회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당당히 선언했다. 그런 뒤 피오리나가 단행한 일련의 조치들은 HP의 전통에 익숙해져 있던 많은 사람들을 아연케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종업원, 고객, 투자자들을 포함해서-가운데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차고에서 시작한 실리콘 밸리 대기업의 신화가 아직 사람들에게 낯설던 50년전, 스물여섯 살 동갑내기인 두 엔지니어가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그만 차고에서 전자 제품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연이은 실망 끝에 마침내 ‘HP 200A 저항 흡수 오디오 발진기’라는 혁신적인 제품이 태어났을 때, 공동 개발자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의 수중에 남은 돈은 겨우 538달러뿐이었다. HP 200A는 사운드 장비를 테스트 하는 도구였는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를 주문 계약하면서 특허까지 사버렸다. 월트 디즈니는 여덟 대의 HP 200A를 주문했고, 이 장비가 디즈니의 획기적인 영화 <팬터지아>의 제작에 중요한 구실을 함에 따라, 휴렛 팩커드는 혁신적인 전자 기업의 길 위에 성큼 올라서게 되었다.

휴렛과 팩커드는 처음부터 종업원들과 맺는 관계를 매우 중시해서, 이 분야에도 제품 개발 못지 않은 창의적 에너지를 쏟았다. 업무 공간 자체를 개방적으로 꾸몄으며-임원들의 사무실도 문이 없었다-, ‘오픈 도어 정책(Open Door Policy)’을 공식화해서 전 영역에 상호 신뢰의 분위기를 정착시켰다. 거기다 이제는 유명해진 ‘움직이는 경영’ 원칙을 통해서 관리자와 노동자들이 훨씬 더 깊이 있고도 효과적인 관계를 맺도록 했다.

1950년대에는 제품과 인력 분야 양쪽에서 모두 중대한 전환이 이어졌다. ‘HP 524A 고속 주파수 계수기’와 같은 제품들이-라디오 방송국들이 연방 정부의 규정에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연속적으로 성공을 거둠에 따라 HP의 공장은 점점 바빠졌다. 이익은 연구 개발에 재투자 되었고, 공동 경영자들은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에게서 얻은 빚에서 놓여났다. 게다가 이들은 플로터(선박이나 비행기의 위치 등을 지도나 종이에 찍어 표시하는 도구: 역자주) 제조 회사까지 인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프린터 사업의 토대이자 기업 공개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 시대를 앞선 HP의 경영 원칙은 최고 수준의 젊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광범위하게 끌어 모았다. 1957년에 이들은 회사의 독특한 목적과 경영 스타일을 ‘HP 방식’이라는 이름으로 공식화했다. 다음 해에 HP는 회사를 독자적인 손익 책임성을 갖는 몇 개의 개별 부문으로 나누어 팰러앨토의 본사 바깥으로 떠나 보냈다. 이 개별 부문들은 맡은 제품을 독자적으로 개발, 제조, 마케팅하고, 실적에 따라 차후 R&D 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1959년에 HP는 세계로 발을 넓혀 독일에 생산 공장을 세우고, 스위스에 유럽 본사를 열었다. 이들은 또한 스톡옵션 계획을 종업원 후생 복지 제도에 포함시켰으며, 최초로 현금 이익 분배 프로그램을 제도화했다.

1960년대는 ‘자유 근무제’와 ‘계산기’의 시대였다. 자유 근무제는 1967년 독일의 공장에서 처음 시행되었는데, 그 후 5년여 만에 회사 전역에서 출퇴근 기록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by 100명 2007. 4. 25. 22:31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8) - CNN(하)
수많은 시행착오로 잔뼈 굵어지다


'폭스'등 경쟁사들 등장해도 여전히 NO.1 뉴스채널



▲ <래리 킹라이브>를 이끄는 CNN의 간판 앵커 래리 킹. CNN은 이외에도 신뢰도 높은 전문 앵커들과 뉴스 리포터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수많은 기술적 실책들, 무명 인물들 발탁, 거기다 기존 뉴스 채널들이 내보이는 공공연한 의구심 등으로 인해서, 초기에 CNN은 별다른 인지도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장비를 개량해서 사고를 줄이고, 뉴스캐스터들이 확고한 역할 모델을 확립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을 감동적으로 담아내기 시작하자, 마침내 어둠은 걷혔다. 1980년의 존 레넌 피살, 1981년의 이란 인질 석방, 1982년의 에어 플로리다 제트기 사고들은 이 24시간 뉴스 채널이 미국인들에게도 보도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최초의 전국적 사건들이 되었다. 1986년의 챌린저호 폭발 사고와 1987년의 아기 제시카 구출 사건이 일어났을 때, CNN은 생생한 현장 화면을 상시적으로 전달할 능력과 더불어 사건을 지켜보는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깊은 연대감을 전해줄 능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1989년 중국 천안문 광장에 탱크가 밀고 들어왔을 때, 1991년 스커드 미사일이 바그다드 상공을 가를 때, CNN은 전 세계의 뉴스 채널이 되었다.

그러나 모험적 기업가로 이름이 높아진 터너의 발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85년에는 올림픽의 대안이라며 굿윌 경기대회를 만들더니, 다음해에는 MGM/UA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보유한 4,000편 이상의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째로 구입했다. 이를 통해서 CNN산하 채널들은 라이선스 비용을 지급하지 않고 독점적 프로그램들을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터너는 이때 사들인 고전적 흑백 영화들을 ‘컬러화’한 일로 할리우드 사람들의 분노의 표적이 되었으며, 이 두 가지 매입 건이 야기한 부채 때문에 몇몇 자산을 팔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확장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1988년에는 터너 네트워크 텔레비전(TNT)을, 1992년에는 카툰 네트워크를 열었다. 두 채널 모두 이전에 사들인 영화와 TV 프로그램에 크게 의존하는 편성을 갖추었다. 그러더니 1996년이 되자 터너는 돌연 모든 것을 타임 워너 사에 75억 달러에 팔았다. 이로써 CNN은 세계 최대의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 그룹인 타임 워너의 자회사가 되었고, 터너는 통합 회사의 부회장-또한 최대 주주-이자 케이블 네트워크 부문의 대표가 되었다.

물론 터너와 CNN에게 언제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시청자들의 요구에 대응하느라 노력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과잉된 행동들이 있었다. O.J. 심슨 재판과 클린턴 탄핵 사건, 쿠바 소년 엘리안 곤잘레스 사건 때 CNN은 황색 신문들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악의 사건은 1998년에 이들이 ‘뉴스 스탠드’ 프로그램을 통해서 1970년대에 미군이 라오스에서 탈영병들에게 신경 가스를 마시게 했다는 오보를 한 것이다. (CNN은 후에 보도를 철회하고 담당 임원들을 해고했다. 터너 또한 이 사건이 자신과 방송국에 끔찍한 수모를 안겨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매번 어려움을 이기고 다시 일어났으며, 새 천년에 접어들면서 공신력 있는 뉴스 매체로서의 명성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2000년 6월 1일 창립 20주년을 맞은 CNN은 애틀랜타 본사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최고의 영예를 누린 순간들을 비디오로 상영했다. 이들은 새로운 주인을 맞게 되었다. 2000년이 밝기 직전에, 타임 워너는 아메리카 온라인과 합병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터너는 새로 태어나는 AOL 타임 워너의 부회장이 되어서, 케이블 네트워크 부문과 터너 소유의 자산들, 그리고 HBO, 시네맥스, 워너 브라더스 인터내셔널 네트워크 사를 감독하고, 코미디 센트럴과 코트TV 내 타임 워너 지분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사업들에 대한 직접적 관할권은 잃었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이 사실에 매우 분개했다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화려한 기념 행사가 벌어질 때, CNN은 9년 만에 최저의 월간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 원인으로 가장 크게 꼽히는 것은 케이블 TV 업계에 CNBC, MSNBC, 폭스 뉴스 채널 같은 새로운 경쟁자들이 나타나서 예전에 CNN밖에 모르던 시청자들을 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청률을 다시금 끌어올리고 일회성 대규모 사건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 CNN은 좀더 규칙적인 편성과 다큐멘터리 및 특집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이들은 또한 AOL과 그에 속한 2,200만 회원이 CNN의 옛 영광 회복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이 자축할 만한 것은 많다. CNN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뉴스 네트워크이며, 미국 내 기본 케이블 TV 뉴스 시청률 10위 안에 아홉 개 프로그램을 올려놓고 있는 데다, 다양한 웹사이트를 통해 연간 67역 회가 넘는 페이지 방문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뉴스 공급망을 보유하고 있으며, 더불어 제휴사는 미국과 캐나다에 600여개, 전 세계적으로는 800개에 이른다. 이런 제휴의 결과 CNN은 출범 초기의 세 채널과 더불어 현재 CNNfn-경제, 재정 문제 전문으로 1995년 발족-, CNN/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스포츠 전문 채널로 1996년 발족-, CNN 엔 에스파뇰-8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 스페인어 방송-, CNN 에어포트 네트워크-미국 내 27개 공항에서 여행자를 위한 프로그램 제공-, CNN라디오 등등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텔레비전 뉴스의 지평을 번화 시켰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진실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by 100명 2007. 4. 25. 22:30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9) - Boeing(상)
항공.우주비행산업의 선구자


거침없는 상상력과 사업다각화를 통해 난관 돌파

창업자:윌리엄 E. 보잉
특징:복엽기에서 시작하여 달 궤도 선회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항공 산업과 역사를 같이 함
주요 제품:민간 항공기 및 군용 전투기, 로켓, 인공위성
연간 매출:579억 9,300만 달러
종업원 수:19만 7,000명
주요 경쟁사:에어버스 인더스트리즈, EADS, 록히드 마틴
회장 겸 CEO:필립 M. 콘딧
본사:워싱턴 주 시애틀
창업 연도:1916년
웹사이트:www.boeing.com


▲ 1916년 윌리엄 보잉은 조선소를 사들여 '보잉 에어플레인'사를 설립하고 비행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항공 산업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보잉의 이름은 항상 그 한 구석을 지켜왔다. 라이트 형제가 키티호크 해변에서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한 지 몇 년 후, 윌리엄 보잉은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에어 쇼에 참가했다. 그 자리에서 항공 산업의 미래를 직감한 그는 몇 년 동안 계속 이 흥미진진한 신종 산업의 면면을 탐구해나갔다. 그는 복엽기 날개에 앉아 비행도 해보고, 초기의 비행 곡예사에게서 비행 수업도 받았으며, 비행정의 설계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가 1916년 시애틀 시의 낡은 조선소를 사서 이를 비행기 제조 공장으로 탈바꿈시켰을 때, 이런 오랜 관심과 노력은 공식적인 사업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그 후 8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잉 사는 아무리 강성했던 경쟁자들도 우수수 탈락시킨 오랜 세월의 풍파를 꿋꿋이 버텨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비결은 이들이 업계에 떠오르는 모든 기회-국내 항공 우편의 개시부터 대규모 군용 계약, 민간 항공의 약진, 우주 탐사 프로그램의 시발까지-를 거의 남김 없이 움켜쥐고 활용한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민간 제트기 생산 분야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으며, 다양한 인수 합병의 결과 항공 우주선 분야에서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오고 가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비행기 회사와 우주선 기업들이 차례차례 날개를 접고 사라졌지만, 보잉 사는 거침없는 상상력과 사업 다각화를 통해 눈앞에 닥친 난관들을 매번 돌파해냈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출범시켰을 때, 이들은 업계 최초로 기내에 여성 승무원들을 배치했다. 이들은 또한 초기의 다국적 기업 가운데 하나로서, 145개 나라에서 고객을 창출했다. 이들의 방대한 기술 혁신 목록에는 유명한 B-52 폭격기도 들어 있으며, 737 여객기-항공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제트 여객기다-와 달 궤도 선회 우주선 및 새턴 V 부스터-아폴로 우주선을 달로 떠나 보낸 발사기-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시절 이룬 이런 빛나는 위업들이 오늘날 보잉 사에 닥친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실제로 21세기가 시작 되면서 유럽의 한 경쟁사가 슈퍼점보 제트기를 내놓고 세간의 이목은 물론, 보잉 사로 향하던 구매의 손길을 강력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업계 잡지나 시애틀 지역 신문들은 과감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보잉이 항공기 업계 2위 자리로 주저앉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예견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회사 안팎의 진단에 보잉은 다시 한 번 파도와 맞서 싸울 준비를 갖추고 있다.

▲ 1916년에 최초로 개발한 복엽식 비행정 B&W호 앞에 서있는 웨스터벨트(왼쪽)와 보잉.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역사적인 첫 동력 비행에 성공했을 때, 디트로이트 태생의 예일 공과대학 졸업생 윌리엄 보잉은 부를 찾아서 태평양 연안 서북부 지역으로 갔다. 당시는 벌목업이 한창 성행했는데, 스물두 살의 젊은 보잉은 워싱턴 주 그레이즈 하버 근처의 울창한 삼림을 개발해서 금세 큰돈을 벌었다. 그뒤 시애틀에 정착한 보잉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에어 쇼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에어 쇼는 그를 매혹시켰고, 그는 시애틀로 돌아오자마자 해군 소속 엔지니어 조지 콘래드 웨스터벨트를 만나 함께 비행기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MIT에서 항공학 코스를 이수한 웨스터벨트는 항공 여행에 대한 보잉의 열정에 공감했다. 두 사람은 함께 초기형 복엽 비행기를 타고 날았고-파일럿과 승객이 하나의 날개 위에 앉아야 하는 모델이었다-, 시애틀의 유니버시티 클럽에서 다른 여러 기종들을 살펴보았다. 보잉은 1915년에 캘리포니아로 가서 비행 수업을 받았는데, 떠나기 전에 친구에게 좀더 실용적인 비행기를 설계해볼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웨스터벨트는 쌍부주 비행정-두사람의 성을 따서 B&W라 이름 붙은-을 설계했고, 보잉이 돌아오자 함께 건조 작업에 착수했다.

보잉은 유니언 호수 근처에 격납고를 짓고, 1916년 초에 두 대의 B&W 비행정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웨스터벨트가 해군의 명령에 따라 동부로 전출되자 보잉은 혼자 힘으로 비행기 제작을 마무리지었다. 6월 15일, 약속한 파일럿이 시간에 늦자 그는 ‘블루빌’이라는 애칭의 비행기를 직접 몰고 처녀 비행을 시도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 ‘퍼시픽 에어로 프로덕츠 회사’라는 이름으로 정식 비행기 제조 회사를 출범 시켰다. 그는 회사 주식 1,000주 가운데 998주를 산 뒤, 제조 시설을 듀워미시 강가에 있는 구 헬스 조선소로 옮겼다. 1년 뒤 그는 회사 이름을 보잉 에어플레인 회사로 바꿨다.

기대와 자신감이 가득했던 보잉은 파일럿, 목수, 재봉사 등 스물 여덟 명의 직원을 뽑았다. B&W는 팔리지 않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처음으로 전투에 비행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잉은 해군에도 훈련용 비행기가 필요할 것이며, 자신의 모델 C가 그에 아주 적합할 것이라고 믿었다. 플로리다 주에서 시범 비행이 벌어졌고, 이를 본 해군 관리들은 50대의 비행기를 주문했다. 보잉은 이 계약을 맞추기 위해 종업원을 337명으로 늘렸지만, 전쟁이 끝나자 주문이 반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런 패턴은 이후로도 심심찮게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낙담하지 않고 지역 상점에 판매할 가구를 만들고, 또 일명 바다 썰매라고 하는 편평 바닥의 배도 만들며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by 100명 2007. 4. 25. 22:30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8) - CNN(상)
전세계의 뉴스, 24시간 전달한다


걸프전등 현장중계로 시청자 사로잡다

회사 개요
창업자:테드터너
특징:세계최초의 24시간 생방송 뉴스 전문 텔레비전
주요제품:TV, 라디오, 인터넷 뉴스 프로그램
연간매출: 미공개
종업원 수:4000명
주요 경쟁사:CNBC, MSNBC, 폭스 뉴스채널
회장 겸 CEO:월터 아이잭슨
본사:조지아 주 애틀랜타
창업연도:1980년
웹사이트:www.cnn.com


▲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침공을 생방송하는 CNN. 이로 인해 현대전은 전쟁놀이같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미국 사람들이 케이블 뉴스 네트워크(CNN)에 처음 눈길을 돌린 것은 1980년 12월, 전 비틀즈 멤버였던 존 레넌이 뉴욕에서 총에 맞아 쓰러질 때였다. 이때 CNN은 개국하고 정확히 6개월이 지난 뒤였다. 충격에 사로잡힌 팬들은-그 가운데 적으도 이 뉴스 전문 방송의 170만 시청 가구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TV만 켜면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 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뉴스라고는 오직 거대 방송국과 그 제휴 방송사들이 정해놓은 시간에만 보는 것으로 알았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짜릿하고도 매혹적인 세계였다.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이 신생 방송국-애틀랜타 시에 본사를 두고 미국 내 여덟 개 지역에 지역 사무실을 설치한-이 대번에 업계의 앞자리로 뛰어오른 것은 아니다. 아직 방송계에 이름이 없던 이들이 대중적 신인도를 얻는다는 것은 멀고도 힘겨운 싸움이었다. 경비 지출이 극도로 제한되어서, 생방송 중에 천장 패널이 떨어져내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염가로 구입한 전자 장비들은 고장이 잦았고, 사람들은 이 세상에 CNN이 있다는 것도 잘 몰랐다. 그러나 CNN이 인력과 자원을 확충한 뒤, 몇 가지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터지면서 사람들에게 강력한 뉴스 수요를 일으키자, 이 모든 상황이 변하게 되었다.

이란에서 인질로 잡혔던 미국인들이 풀려난 사건, 에어 플로리다 항공사의 제트기가 워싱턴 시의 얼어붙은 포토맥 강에 빠진 사건, 플로리다 주 상공에서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가 폭발한 사건 등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CNN으로 채널을 돌렸고, CNN은 차츰 화제 사건들을 24시간 집중 보도하는 믿을 만한 방송국으로 명성을 얻었다. 1987년에 18개월 된 아기 제시카가 텍사스 주의 한 우물에 빠졌다가 58시간 후에 구출된 사건이 전 미국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때, 사람들은 너도나도 CNN을 틀었다. 그 4년 후 사막의 폭풍 작전이 벌어져 미국의 F-117 기들이 바그다드를 맹폭격할 때, 포위된 이라크의 수도나 전투 지역 인근에서 송신되는 CNN의 생생한 소식들은 1,150만 시청자들의 눈을 TV에 고정시켰다. 오늘날 CNN은 세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텔레비전 뉴스 보도 매체 가운데 하나다.

헤드라인 뉴스, 경제, 스포츠 등에 집중한 전문 부속 채널들이 생겨났고, 스페인어와 터키어 등의 외국어 채널도 만들어졌다. 라디오 방송국들과 다양한 웹사이트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미국 내 7,800만 가구, 전 세계 1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CNN의 다양한 서비스 중 한 개 이상을 제공받고 있다. CNN은 이제 모기업이 세계 최대의 인터넷 회사에 흡수되고, 미디어 업계의 경쟁이 더욱 공격적으로 펼쳐지는 환경에서 새로운 전투를 치르고 있다. 1980년 6월 1일에 첫 방송을 한 CNN은 무명 기업가 테드 터너의 비전과 새로이 떠오르는 신기술이 결합해서 탄생한 작품이다. CNN이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은 뉴욕에 있는 3대 방송사가 정해놓은 시간에만 뉴스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CNN이 등장함에 따라 시청자들은 하루 중 어느때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뉴스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테드 터너-본래 이름은 로버트 에드워드 터너 3세-는 1938년 신시내티 시에서 태어났다. 9년 후 그의 가족은 조지아 주로 이사했고, 거기서 그의 아버지 로버트 에드워드 터너 2세는 옥외 광고 회사를 운영했다. 젊은 터너는 브라운 대학을 졸업한 뒤-대학 시절 그는 토론 클럽의 부회장과 대학 요트 팀의 주장을 맡았다-,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 회계 간부로 일했다. 1960년에는 한 지사에서 총 관리자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3년 후 아버지가 사업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자, 아들 터너가 회사를 떠맡아야 했다. 터너는 그 후 33년간 사장 겸 최고 운영자로 일하면서 회사를 다시 수익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터너는 1970년에 애틀랜타 주의 채널 17을 사들였다. 매입 후 3년도 지나지 않아, 그는 이 비틀거리던 UHF 채널을 미국 내에서 얼마 되지 않는 수익성 있는 독립 방송국으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터너가 아니었다. 통신 위성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는 이것이 미국 TV 시청자들의 생활에 혁신을 가져올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채널 17의 이름을 WTBS-Turner Broadcasting System의 약자-로 바꾸고, 1976년 12월 17일, 통신 위성 신기술을 이용한 ‘슈퍼스테이션’ 방송을 시작해서 참신한 콘텐츠에 목말라하던 미국 전역의 케이블 시청자들에게 다가갔다. 또한 그 해에 더 많은 인기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야구 팀을 인수했다. 1977년에 그는 ‘커레이저스 호’를 이끌고 미국 컵 요트 대회에서 우승해서 전국적 명성을 얻는데, 이 해에 브레이브스를 인수할 때와 같은 목표로 애틀랜타 호크스 농구 팀도 매입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들로 터너의 TV는 애초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익을 올렸고, 이를 통해 터너는 더 많은 케이블 채널을 보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전국적인 뉴스 채널이 없다는 것에 착안하여 1980년 CNN을 설립했다. 2년 후 그는 30분마다 그 날의 주요 소식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전해주는 서비스를 개시하고, 이에 ‘헤드라인 뉴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1985년에는 CNN 인터내셔널을 통해 세계로 진출했다. 케이블 TV가 미국 내 거의 모든 가정에 보급되자, 터너의 다양한 채널은 광범위한 시청자 군을 형성해갔다.

by 100명 2007. 4. 25. 22:29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7)
인텔 (Intel) (하)-초고속 성장에도 복병은 있다..
현재 활로개척에 안간힘






▲ 2000년 6월 펜티엄4를 발표하는 인텔CEO 크레이그 배릿. 인텔은 내외의 도전에 중대한 시련을 맞고 있다.
1972년에는 이전 제품보다 성능이 두 배 높은 8008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출시되었다. 각종 장치들이 이를 응용하기 시작해서, 8008은 어느새 식품점의 저울, 식당의 재고 관리 장치, 자동차 정지등 따위에도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엘테어에도 적용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날아오르면서, 인텔도 함께 고공 질주를 시작했다. 몇 년 후 <포춘>지는 인텔을 '70년대 기업계의 개가'중 하나로 지목했다.

1981년에 이르자,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제품은 8086과 8088로 이어졌다. 이 제품들은 비밀리에 개인용 컴퓨터 개발을 준비하던 IBM의 눈길을 끌었다. 당시 인텔은 연간 1만 건의 주문만으로도 행복해하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8088을 채택해서 개발된 IBM-PC는 8088에 1000을 곱한 것보다도 많은 수의 매출을 달성했고, 인텔은 유명 기업의 대열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물론 인텔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982년에 이들은 다른 마이크로프로세서보다 성능이 세 배 정도 우수한 286칩을 출시했다. 이어 1985년에 나온 386칩은 초당 500만 개가 넘는 명령을 수행할 수 있었다. 1989년에 나온 486은 처리 속도가 첫 제품 4004의 50배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메인프레임 컴퓨터와도 대등한 성능을 자랑했다. 그런 뒤 1993년에 인텔은 펜티엄을 출시했다. 310만 개의 트랜지스터로 초당 9,000만 개의 지시어를 수행하는 펜티엄 프로세서는 그 성능이 4004 모델의 1,500배에 이르렀다. 이 제품이 인텔 역사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리라는 것을 깨달은 그로브- 당시 인텔의 사장 겸 CEO-는 이를 적극 홍보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케팅 캠페인에 1억 달러가 배정되었고, TV와 신문 잡지를 통해 광범위한 광고가 집행되었다. 사람들은 그로브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비자가 아무리 인텔을 좋아하기로서니, 상점에 가서 직접 인텔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어쨌건 앤디 그로브는 '인텔 인사이드' 캠페인을 통해 강력한 마케팅을 전개했다. 인텔은 당시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의 1위 업체였지만, 저가의 모조품들에게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었다. 광고의 목적은 소비자들에게 인텔 칩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것이었지만, 인텔과 협력하는 컴퓨터 제조업체들을 간접적으로 보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인텔 제품을 사용하는 PC 제조업체에게 6퍼센트의 리베이트를 주는 협동 광고프로그램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상당한 액수의 돈을 추가로 주어 인텔 제품 사용을 광고에 알리게 했다.) 그로브가 CEO가 된 1987년, 인텔은 소비자 시장을 대상으로 한 광고 예산이 없었다. 그러나 1990년 말에 이르렀을 때, 그 예산은 연간 1억 달러를 초과했다. 1999년 펜티엄Ⅲ칩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러한 전략은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실행되었다. 펜티엄Ⅲ의 전 세계 광고 비용은 1억 5,000만 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이 광고의 목적은 인텔을 최고의 닷컴 기업으로 자리매기고, 동시에 이들의 새 제품이 인터넷 생활을 훨씬 즐겁고 편리하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인텔의 브랜드 인지도가 급격하게 상승해서, 소비자들은 '인텔 인사이드' 마크가 달린 컴퓨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세간에는 윈도우 운영 체제로 시장을 지배하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을 한데 묶어서 '윈 텔' 쌍두마차가 개인용 컴퓨터 세계를 끌고 간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로브는 1997년에 회장이 되었고, 취임 몇 달 후에는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에 뽑혔다. 그로브는 다른 고위 직책들을 점차 크레이그 배릿에게 넘겨주었다. 인텔은 PC의 멀티미디어 기능을 강화시키는 신기술을 선보였고, 광고로 유명해진 원색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제고시켰다. 그뿐 아니라 업계의 시장 세분화 경향에 대처하기 위해 회사를 세 개의 부문-전문가급, 우수 성능, 기본 성능 PC-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10년에 걸친 그칠 줄 모르던 성장 끝에 이들이 맞닥뜨린 것은 갑작스런 추동력의 상실이었다. 화상 회의 같은 신규 분야로 진출하려던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소비자들은 월드와이드웹에 접속하는 데 그다지 복잡한 장치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이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연방 공정거래위원회(FTC)가 인텔이 경쟁을 억압한다며 이들을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제소한 것이다. (하지만 인텔은 마이크로소프트와는 달리 FTC와 합의를 이루어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는 동안 시릭스 및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즈 같은 신생 기업들이 시장에 진입했으며, 1998년에는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수입이 감소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배릿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인텔의 중앙집권화된 경영 시스템을 분산시켰으며, 현금을 풀어서 일련의 인수를 단행했다. PC 마이크로프로세서에만 힘을 집중하던 시절은 끝났고, 배릿은 인텔의 역량을 컴퓨터 칩뿐 아니라 네트워크 장비와 정보 기기용 반도체 생산에도 고루 분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전자 상거래 및 소비자 가전과 같은 새로운 분야의 문도 두드렸다.

21세기로 넘어온 뒤에도 배릿은 인수와 확장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PC 영역은 여전히 인텔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90퍼센트를 이루었으며, 이익의 10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의 첫 무기였던 컴퓨터 칩의 성능을 강력하게 개선해나가는 노력도 멈추지 않고 있다. 공동 창업자로서 지금은 명예 회장의 자리에 있는 고든 무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자동차 산업이 반도체 산업과 같은 속도로 발전했다면 롤스로이스는 연비가 1갤런당 100만 마일 정도 되었을 것이고, 주차비를 내느니 차라리 버리는 게 돈이 덜 들었을 것이다." 만약 인텔이 그때 거기 있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무어는 그렇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by 100명 2007. 4. 25. 22:28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7)
인텔 (Intel)(상) -'두뇌'를 만드는 인텔, 미래 가능성 예견




회사 개요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
특징: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발명하여 컴퓨터 혁명의 길을 닦음
주요제품: 컴퓨터 칩, 네트워크 및 커뮤니케이션 장비
연간 매출: 293억 8,900만 달러
종업원 수: 7만 200명
주요 경쟁사: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즈, IBM, 모토롤라
명예회장: 고든 무어, 회장: 앤드루 S. 그로브, 사장 겸 CEO: 크레이그 R. 배릿
본사: 캘리포니아 주 샌타 클라라
창업 연도: 1968년
웹사이트: www.intel.com


▲ 인텔의 창업자들. 왼쪽부터 앤드류 그로브, 로버트노이스, 고든 무어.
인텔이 세계 최고의 컴퓨터 칩 생산자가 된 것은 이들이 오늘날 컴퓨터와 휴대폰, 장난감 및 온도조절 장치 등 온갖 물건에 쓰이는 극도로 작은 칩을 발명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들이 업계 1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지난 30여 년 간 완벽에 가까운 제품을 수백만 개나 만들어낸 탁월한 제조 능력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첨단 기술이 유행의 물결을 타기 전에 한발 앞서 회사를 세우고, 그 후로도 계속 기술적 선도성을 유지하게 한 뛰어난 경영진이 그 핵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거기에는 이들이 실행한 혁명적 광고 캠페인이 어느것 못지 않게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광고의 핵심이 된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짧은 문구는 존재가 희미하던 한 기업을 일약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인텔은 컴퓨터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비전통적인 제품을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마케팅 함으로써, 그들의 제품이 소비 세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전자제품-컴퓨터-의 핵심을 이룬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각시켰다. 발빠른 업계진출, 극도로 효율적인 생산 기술, 비범한 경영 능력도 모두 인텔의 급부상에 중요한 몫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 그 광고 -원색의 토끼 옷을 입은 기술자들이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이제는 회사의 로고 사운드가 된 네개의 음정으로 끝나는-가 없었으면, 인텔은 지금처럼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이 되니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성공적이 광고와 더불어 인텔은 오늘날 컴퓨터들을 움직이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의 80퍼센트 이상을 장악했다. 인텔의 손끝에서 이 장치는 오늘날 안 쓰이는 곳이 없을 만큼 널리 대중화되었고, 성능은 그 옛날 미국이 우주선을 날리는 데 사용했던 집채만한 장치들보다도 더 높아졌다. 게다가 이러한 성과는 다른 가전 제품들에도 응용되기 시작해서, 결국 인텔이 이 세상에 일으킨 변화는 이들이 1960년대의 정치 사회적 격동 속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꿈꾸었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마이크로프로세서란 상호 연결된 수천, 혹은 수백만 개의 트랜지스터로 이루어진 조그만 전자 회로로서, 다양한 목적을 위해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일을 한다. 오늘날 개인용 컴퓨터의 두뇌 역할로 널리 쓰이지만, 그밖에 전화기의 단축 다이얼, 알람 시계의 자동 작동, 더 나아가 자동차의 전자 브레이크 및 도어 록 시스템도 이를 통해 움직이는 것들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발명되기 전에 후자의 기능은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고, 컴퓨터들은 크기가 집채만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인텔의 공동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자, 이 모든 것이 확 바뀌게 되었다.

두 사람이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직접 회로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서 마침내 하나의 실리콘 칩 위에 올라갈 만큼 크기가 작아졌다. 동료들은 이것의 실용성에 의문을 품었지만, 노이스와 무어는 이 기술이 가속화되는 속도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간파했다. 실제로 무어는 1965년에 직접 회로 기술은 기하급수적이기는 하지만 예측 가능한 페이스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나중에 '무어의 법칙'이라고 불리게 된 그의 견해는 18~24개월마다 직전 제품의 두 배 성능을 갖춘 칩이 나온다는 것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판단은 놀라울 만큼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노이스와 무어는 이 첨단 직접 회로를 생산하기 위해 1968년 페어차일드를 떠난 뒤 켈리포니아 주 마운틴뷰에 'NM 일렉트로닉스'라는 회사를 세웠다. 이들과 비전을 같이 한 열두 명의 과학자가 함께 결합했는데, 그 가운데 앤드루 그로브라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 과학자가 운영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얼마 후 이들은 회사 이름을 '인테그레이티드 일레트로닉스(integrated electronics, 집적 전자공학)'를 줄인 '인텔'로 바꾸고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인텔은 처음부터 제품의 상용화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당시 주도 기술보다 비용이 백 배 이상 더 드는 일이었지만, 노이스, 무어, 그로브 세 사람은 크기가 작고 수행 능력이 뛰어나며 에너지 요구량이 적은 인텔의 회로가 곧 컴퓨터 제조업체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확신했다. 첫해에 이들의 수입은 2,700달러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차츰 소문이 나면서 업계의 관심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일본 회사에서 프로그램 가능 전자 계산기에 실을 칩을 설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엔지니어 테드 호프는 이에 필요한 칩들을 하나의 플랫폼 위에 배열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고, 이렇게 해서 세상에는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것이 태어났다. 이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인텔에도, 또 이들이 일으킨 산업의 미래에도- 이 구조가 다른 응용 분야에 수정 없이 그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후 인텔에게는 약진의 날들이 이어졌다. 1970년에 개발된 '다이내믹 랜덤 액서스 메모리' 약칭 DRAM 칩은 세계 반도체 기기 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미래의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샌타클라라 시 부근 26에이커 규모의 배 과수원에 넓은 사무실과 공장을 지은 뒤 그리로 이주했다. 이주 몇 달 후 인텔은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출시했다. 이 놀라운 기기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인 에이악과 동일한 수준의 컴퓨팅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에이악은 3,000평방피트 면적위에 1만 8,000개의 진공관을 배열해서 만든 거인으로, 초당 6만 개의 명령 -당시로서는 놀라운-을 수행했다. 하지만 인텔의 제품은 엄지손톱보다 작은 공간에 들어찬 2,800갱의 트랜지스터를 가지고 똑 같은 일을 수행해냈으며, 가격은 20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4004 마이크로 프로세서 출시와 더불어 인텔과 컴퓨터 혁명은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활주로에 올라섰다.

by 100명 2007. 4. 25. 22:27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6)
나이키 (Nike) (상)




회사 개요
창업자: 빌 보어먼, 필 나이트
특징: 스포츠 슈즈를 문화적 아이콘으로 탄생시킴
주요 제품: 스포츠 신발류, 의류, 장비, 액세서리
연간 매출 87억 7,700만 달러
종업원 수: 2만 700명
주요 경쟁사: 아디다스-살로몬, 필라, 리복
회장 겸 CEO: 필립 나이트
본사: 오리건 주 비버턴
창업 연도: 1962년
웹사이트: www.nike.com


▲ 마이클 조던의 전성기에 '에어조던'이란 제품을 출시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진은 에어조던광고.
마이클 조던이 코트를 지배할 때 스포츠 슈즈 또한 세계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 시장의 제왕은 의문의 여지 없이 나이키였다. 오리건 주에 기반한 이 회사는 소박한 운동화를 패션 감각 스포츠 용품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이들은 극히 한정된 활동을 목적으로 디자인된 고기능 신 모델들을, 해가 갈수록 더 요란하고 기발해지는 광고 캠페인과 기능과 이름에 실어서 쉴새없이 내놓았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중장년층 소비자들은 조깅, 에어로빅, 걷기, 골프 등 각자 좋아하는 운동을 즐기기 위해 나이키로 달려가서 원하는 신발을 골랐다. 게다가 나이키가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을 광고 모델로 삼기 시작하자, 마치 전 세계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마이클 조던, 미아 햄, 타이거 우즈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처럼 보였다.

나이키는 스포츠 목적에 부합하면서도 패션 감각을 갖춘 신발이라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냈지만, 이것을 실제로 만들어내고 보급하는 일에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 까닭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이들은 때때로 뜨거운 비난의 표적이 되었는데-때로는 타당하고 때로는 그렇지 못한-, 해외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는 점, 브랜드 이미지를 예술 형식처럼 만든다는 점,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매긴다는 점, TV 전파를-경기장의 사이드라인을 빼고라도-그 ‘갈고리’ 로고로 뒤덮는다는 점 등등이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유명 운동 선수들을 사방팔방의 광고 홍보에 지나치게 팔아먹는다는 점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빌 보어먼은 아내의 와플기계러 신발 밑창을 찍어 아스트로 그래버(사진)란 제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최초츼 히트작이 됐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나이키는 현장 수행 능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이키는 열광의 대상 자체였다. 1994년에서 1997년 사이에-이미 회사가 상당한 성숙 단계에 있던-나이키의 매출은 92억 달러로 150퍼센트 가까운 성장을 이루었다. 사이클링 장비 등 여러 분야의 신규 브랜드가 계속 도입되었다. 사람들 눈이 닿는 모든 곳에 갈고리 로고가 있었다. 한동안 나이키는 전 연령층이 가장 애호하는 액세서리였다. 그런데 돌연 다른 신발이 투하되었다. 하이킹 부츠와 캐주얼 가죽 신발이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열광은 주춤하고, 경쟁사들은 틈새를 파고들었다. 나이키는 ‘인기’ 목록에서 삭제되었고, 조던은 은퇴했다.

그렇지만 나이키는 여전히 업계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힘이다. 이들이 현재 시장에 내놓은-그리고 대체로 호평을 받는-신발 모델은 500종에 이르며, 의류는 그보다도 더 종류가 많다. 이들은 대형 쇼핑몰 ‘나이키타운’을 운영하고 있으며, 조던을 주제로 한 몇 개의 특별 아웃렛 매장도 열었다. 그리고 여전히 백여 개 나라에서 해마다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나이키가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언제나 1위 자리에 익숙해 있던 나이키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상황이다.

1962년에 오리건 주 유진 시가 혁명의 발상지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오리건 대학 캠퍼스는 오래 전부터 꽤 이름난 육상 활동의 본거지였다. 모든 것은 빌 보어먼이-1948년부터 수석 코치로 일한-깊은 생각 없이 필 나이트와 팀을 이루어 일본 운동화 타이거를 BRS(블루 리번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1964년까지 1,800켤레의 신발을 팔았다. 그러다가 4년 후에 보어먼이 직접 신발 디자인을 해서 내놓았더니, 전체 신발 가운데 그 모델이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자신감과 아이디어로 충만해진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직접 신발을 디자인해서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라텍스와 가죽으로 만든 이 신발은 유난히 가벼운 밑창이 특징이었는데, 이것은 보어먼 아내의 와플 기계로 만든 것이었다.켤레당 3.3달러의 가격에 젠체 물량 330켤레를 싹 판매한 뒤, 두 사람은 마침내 회사를 차리고 혁명을 시작했다.

▲ 육상선수로 이름을 날린 스티브 프리폰테인(왼쪽)은 나이키의 명성을 끌어 오리는데 큰 힘이 됐다. 오른쪽은 창업자 빌 보어먼.
보어먼 밑에서 훈련을 받은 뒤 스탠퍼드 대학에서 M.B.A.를 받은 나이트는 이 재미난 모양의 신발들을 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서 육상 경기가 열리는 곳을 찾아단니며 판매했다. 두 사람의 대담함과 독창성은 곧 주목을 받았고 사업은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들은 1971년에 갈고리 로고를 선보였고, 다음 해에 유진 시에서 열린 올림픽 미국 대표 선발전에서 처음으로 나이키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그러자 세계 최고 수준의 육상 선수들이-1972년 올림픽 마라톤 경기 상위 입상자 일곱 명 가운데 네 명을 포함해서-나이키를 착용하기 시작했고, 회사는 탄탄대로를 달려나갔다. 1974년이 되자 종업원은 250명으로 불었고, 캐나다와 호주에 영업 지부를 열었으며, 뉴햄프셔 주에 공장을 차렸다. 수익은 480만 달러에 이르렀다.

올림픽 육상 선수 스티브 프리폰테인-보어먼의 제자 중 한명으로, 좋은 스포츠 장비와 스포츠 자체의 진흥을 위해 노력한-의 활동은 그가 1975년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 전까지 나이키의 전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스포츠 선수들에서 나이키 제품을 신겨서 홍보 역할로 삼은 뒤, 회사의 행보는 더욱 빨라졌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이름을 딴 이들의 회사는 신발 디자인과 비즈니스 양쪽에서 모두 연전연승이었다. 선수들에게 나이키는 신는 즐거움을 주었고, 소매 상인들에게는 파는 즐거움이 되었다. 프로 선수 가운데는 테니스 스타 존 매켄로가 처음으로 나이키와 계약을 맺었다. 1970년대 말 종업원이 2,700명에 이르고 시장의 50퍼센트를 점유하게 되자, 이들은 기업을 공개했다.

by 100명 2007. 4. 25. 22:26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6)
나이키 (Nike) (하)






▲ 나이키의 모델들은 항상 당대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들이었다. 왼쪽부터 테니스의 존 메켄로, 육상의 칼 루이스, 농구의 마이클 조던.
1980년대 초반은 제품 라인 확대, 시장 침투력 증대, 소비자 평판 제고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였다. 이들이 의류 제품을 처음 출시할 무렵, 나이키의 갈고리 로고는 세계 40여 개국에 퍼져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는 존 베노잇과 칼 루이스를 포함한 48명의 선수가 나이키 신발을 신고 65개의 메달을 거머쥐었다. 그에 뒤이어 1985년 나이키가 시카고 불스 농구팀의 신인 마이클 조던과 계약을 맺고 ‘에어 조던’ 라인의 농구화 및 관련 스포츠 의류를 생산하기로 한 것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결과를 안겨준 기업 대 개인 간 계약 사례가 되었다. 이 기념비적인 제휴를 맺고 1년 후, 나이키의 연간 매출은 마법의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하지만 조던 제품이 스포츠 용품 산업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가운데에도 나이키는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 유통과 영업 부서의 난점들이 집결되어-한편으로는 급격한 성장에 따른 고통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 나이키 사의 악명 높은 고립주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마침내는 일련의 수입 하락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은 내부 사정을 심각하게 검토해본 뒤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유명한 “저스트 두 잇(Just Do It)” 캠페인과 P.L.A.Y.(Participate in the Lives of America’s Youth)라고 명명된 도시 지역 레크레이션 프로그램이 다양한 환경 보호 활동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이키가 오래 전부터 정평을 얻고 있던 기술적 선도성은 계속 유지되었다. 이런 노력들은 5년 안쪽에 효과를 발휘했고, 수익은 다시 회복되어 30억 달러를 넘어섰다. 1990년대에 들자 나이키는 더욱 우수한 품질의 종목별 스포츠 의류를 추가로 출시하고 골프의 기대주 타이거 우즈와 계약함으로써 전설적 기업의 영역으로 더 깊이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파도는 잠들지 않았다. 해외 노동자들의 착취 문제를 둘러싼 비난 여론은 나이키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신발에 대한 취향은 나이키의 강점들과는 멀어졌고, 떠오르는 트렌드는 완전히 간과되었다. 나이키의 전통적 강점이던 광고마저 밋밋해졌다. 게다가 이들은 월드와이드웹 무대에 때맞춰 진출하는 일에도 실패했다. 크로스컨트리에서 치어리딩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스포츠를 목적으로 디자인된 나이키의 고품질 제품들은 여전히 스포츠 신발 시장의 강자로 군림했지만, 세계적 인지도의 브랜드를 향유하던 이 거함은 벽에 부딪힌 것이 분명했다.

강인한 비즈니스맨인 동시에 이단아적 개성의 소유자이기도 한 필 나이트는 이제 한가한 놀이를 끝낼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타이거 우즈와 함께 골프를 치거나, NIKEMN 명판을 단 검은색 애큐라 차를 타고 드라이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해외 진출을 너무 성급하게 밀고나갔고, 그 결과 역량이 과도하게 분산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리고는 대규모의 구조 조정에 착수해서 1,900명의 직원을 해고하고, 나이키 로고가 박힌 제품의 생산을 대폭 축소시켰다. 종래에 한 시간이면 끝나던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교육을 이틀로 늘려서, 직원들에게 나이키의 오늘을 이룬 역사적 배경을 집중적으로 이해시켰다. (기술 담당 직원들은 9일을 온전히 오리엔테이션에만 바친다. 여기에는 보어먼의 트랙을 달려보고 프리폰테인의 교통사고 현장을 방문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또한 핵심 스포츠 의류 라인이던 올컨디션 기어(ACG)를 독자적인 직원, 예산, 마케팅 계획 아래 운영되도록 독립시켰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나이트가 저개발국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정책을 재검토하겠노라고 밝힌 사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비롯해서 나이키 사 전체가 과거에 그 문제를 그다지 잘 풀지 못했음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마리아 아이텔을 영입해서 기업 윤리 담당 부사장으로 삼았다. 아이텔과 휘하 직원 95명의 노력은-그 가운데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에게 문자 해독 교육을 시키고, 대부분의 생산 라인에서 유해 용제 톨루엔 사용을 줄이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그 동안 나이키에게 가장 험악한 비난을 퍼붓던 사람들에게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 나이키의 기업이미지 제고를 위해 거액을 들여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와 계약을 맺었다. 사진은 우즈의 미소와 나이키의 갈고리를 연결한 이미지 광고.
나이키는 ACG를 이용해서 최근에 다른 경쟁 업체로 발길을 돌렸던 예전의 고객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힘쓰고 있다. 또한 과거에는 다른 제품을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던 활동적인 젊은이들을 끌어당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거기에 인터넷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TV 및 인쇄 광고들도 전보다 한층 예리해지고 있다. 디자인 주기와 제조 주기를 단축해서 새로운 트렌드를 좀 더 빨리 반영하는 방법과 공급 라인을 개선해서 최종 소비자의 요구에 좀더 잘 부응하는 방법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각종 비용 절감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조치를 통해 나이트는 나이키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경쟁사들은 결승선까지 전력을 다해 달려야 하리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다.

세상은 이제 운동화에 대한 열광을 접었는지도 모른다. 또 나이키는 전 같은 사랑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포츠 신발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듯이, 그 혁명을 주도했던 나이키는 언제나 무리의 맨 앞자리에서 길을 이끌 것이다.

by 100명 2007. 4. 25. 22:26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5)
RCA (하)






▲ 라디오로 승승장구한 사노프는 록펠러센터(사진)와 라디오시티를 지었는데 나중에 RCA와 NBC의 본사로 활용되었다.
NBC의 방송 프로그램 가운데 중요했던 최초의 프로그램은 1927년 1월 1일의 로즈볼 경기(대학 미식축구 챔피언 결정전: 역자주)였다. 6년 전 권투 중계와 마찬가지로 로즈볼 중계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에 힘입어 라디오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그때까지 RCA는 GE와 웨스팅하우스가 만든 라디오 수신기를 관매하는 역할만 했으나, 마침내 연구 개발, 생산, 판매 사업부를 모두 인수하고서GE에서 분리되었다. 그런 뒤 이들은 빅터 토킹 머신 회사를 매입하여 축음기도 함께 생산했다. 이때의 인수를 통해 ‘RCA 빅터’로 거듭난 이 회사는 빅터 사의 유명 트레이드마크인 폭스 테리어 개 ‘니퍼’-옛날식 축음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도 함께 가져올 수 있었다. 나중에 이 트레이드마크는 회사의 어떤 제품보다도 더 유명해졌다.

1929년의 주식 시장 폭락은 RCA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소비자들이 라디오 같은 제품을 구매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노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생산 시설을 더 늘리는 한편, 한 서민 극장 체인과 결합해서-여기에는 NBC의 연예인 군단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RKO 영화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는 또 뉴욕 시에 록펠러 센터와 라디오 시티를 지었는데, 이 건물들은 나중에 RCA와 NBC의 본사로 활용되었다. 사노프의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사례는 그가 블라디미르 즈보리킨이라는 엔지니어를 고용해서 라디오를 앞지르는 새로운 기술, 즉 텔레비전의 개발을 맡겼다는 것이다.

사노프는 1920년에 이미 TV의 가능성을 예견했으며, 거친 화질의 화면들은 RCA가 방송 영역에 첫 걸음을 내디뎠을 때 이미 송신되고 있었다. 이 분야의 개척자 중 한 명이던 즈보리킨은 사노프에게 텔레비전을 개발하는 데는 18개월의 시간과 10만 달러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년의 시간과 5,000만 달러의 돈이 들었다. 어쨌건 두 사람은 1939년에 열린 뉴욕 세계 박람회에 RCA 텔레비전을 출품할 수 있었다. 박람회의 개회사를 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RCA가 태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NBC 라디오에도 자주 목소리를 실어보낸-이 개회식이 중계됨에 따라 전 세계 국가 원수 중 가장 먼저 텔레비전에 출연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자 TV의 상업적 개발은 중단되었다. RCA 공장들은 폭탄 퓨즈, 지뢰 탐지기들을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군인 위문용 여흥 프로그램들도 제작했다. “ 우리의 모든 시설과 인력은 준비가 완료되어 있으며, 각하께 즉각 봉사할 것입니다.”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노프는 이렇게 썼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곧바로 TV 생산을 재개해서, 1946년에 10인치 텔레비전을 375달러 가격에 출시했다. 다음해에 NBC는 라디오 방송의 스타들을 텔레비전으로 이동시켰고, 사노프는 RCA 이사회의 회장이 되었다.

1950년대에 TV가 불길처럼 번져가는 동안 RCA와 NBC는 이 신생 매체의 이점을 한껏 누렸다. 이들은 컬러 방송 초기에도 업계 표준으로 채택된 기술을 내놓음으로써, 정작 컬러 방송을 처음 도입한 CBS를 누르고 앞서가게 되었다. 1954년 NBC가 최초의 컬러 생방송 프로그램인 <토너먼트 오브 로지즈 퍼레이드(Tournament of Roses Parade)>를 내보낸 지 몇 달 뒤에 RCA는 컬러 TV 수상기를 출시했다. 12인치 모델의 가격이 1,000달러에 이르렀지만 그 흡인력은 강력했다. 5년도 지나지 않아 RCA는 50만 대의 수상기를 팔아치웠고, NBC는 당시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던 <보난자(Bonanza)>를 컬러로 방송했다. 1962년에는 TV 프로그램의 2/3가 컬러로 방송되었다.

▲ '오 헤이 오헤이'라는 독특한 음률의 주제곡과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말 달리는 사나이로 상징되는 1960년대 미국 서부극 드라마의 대명사였던 <보난자>의 한장면. TV보급은 영상문화에 혁명을 가져다 주었다.
1970년에 이르자 텔레비전은 없는 곳이 없게 되었고 컬러 TV도 흔해졌다. 이때 RCA는 미국의 우주 비행 실황을 방송함으로써 집에서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 이들은 프랑스에 자리잡은 옛 친구 톰슨 사와 조인트 벤처를 이루어서 혁신적인 수상관(受像管)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 데이비드 사노프가 여든 살을 일기로 눈을 감자, RCA는 전혀 예기지 못한 길로 달려나가게 된다.

기술 개발은 1970년대에도 계속되어서, 컬러트랙 TV와 네 시간짜리 가정용 VCR 등이 탄생했다. 컬러 방송 25주년이 되었을 때 RCA는 마치 이를 자축이라도 하는 듯이 1억 대째의 수상관을 생산했다. 그런데 먼 옛날 RCA의 조상 중 하나였던 톰슨 사는 이 무렵 프랑스에서 톰슨 S.A.라는 이름의 국영 기업이 되어 있었다. 톰슨 S.A.는 115개 이상의 자회사를 거느린 지주 회사였는데, 매출의 절반 이상을 첨단 기술 제품을 통해 올리고 있었다.

1986년에 GE는 다시 RCA를(NBC 포함) 인수했다. 당시 64억 달러의 인수 가격은 비석유 회사의 합병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RCA 생산 제품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GE의 마스터 플랜과 들어맞지 않자, 다음 해에 GE는 RCA와 GE의 소비자 가전 부문을 톰슨에게 팔았다. 톰슨은 이를 운영하기 위해 ‘톰슨 컨수머 일렉트로닉스’라는 자회사를 세웠다. 이들은 1990년대 초반 인디애나폴리스에 미국 본부를 차리고, 1995년에 이름을 ‘톰슨 멀티미디어’로 바꿨다.

한동안 슬럼프를 겪던 RCA의 미국 내 TV 매출이 새로운 경영권 아래서 소폭 상승했다. 이들은 음악 CD의 인기가 상승하는데 주목하여 오디오 라인을 도입했는데,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이 분야에서 소니에 이어 2위 업체가 되었다. 56인치 텔레비전이나 고성능 캠코더, 고화질 TV 같은 제품들이 속속 제품 라인에 추가되었다.

빛나는 전통 위에 이렇듯 기술 혁신을 더하는 데도, 톰슨 멀티미디어는 초창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고, 이들의 모회사는 이들을 떼어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는 기미를 보인다. 1999년에 미국 사업부-RCA와 GE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는 2억 2,400만 달러 수익을 기록했다. 이는 전해에 비해 무려 1,400퍼센트가 뛰어오른 수치다. 그 원인을 찾자면 이들이 지난 몇 년 간의 침체기를 딛고 일어서서 계속 매력적인 신제품들을 출시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다시 짚어보면 이는 RCA의 옛 주인이자 미래의 주인인 톰슨이 RCA를 애초에 시장의 강자로 만들었던 개척 정신을 새로이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by 100명 2007. 4. 25. 22:25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5)
RCA (상)




회사 개요
창업자: 토머스 A. 에디슨, 엘리후 톰슨, 에드윈 휴스턴
특징: 미국인의 가정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보급함
주요 제품: 텔레비전, 캠코더, 기타 소비자 가전 제품
연간 매출: 45억 달러
종업원 수: 2만 2,800명
주요 경쟁사: 마츠시타, 필립스, 소니
S.A. 톰슨, 톰슨 멀티미디어 회장 겸 CEO: 시어리 브레턴
본사: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
창업 연도: 1960년
웹사이트: www.rca.com

▲ 라디오를 최초로 개발한 러시아계 이민자 데이비드 사노프. 그는 방송, 통신 분야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R.M.S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충돌한 1912년 4월 14일, 마르코니 무선전신 회사에 근무하던 스물한 살의 라디오 기사는 맨해튼의 사무실에서 이들이 보내는 조난 신호를 받았다. 데이비드 사노프라는 이름의 이 러시아계 이주민 청년은 그 후 72시간 동안 워너메이커 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점점 끔찍해져가는 바다의 정황을 회사 전신망을 통해 사방으로 중계했다. 그가 배의 침몰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건을 전 세계에 중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상상력에 고통스러운 자극을 가했다.

그 후 마르코니 회사에서 7년을 근무하며 승진을 거듭하는 동안, 그는 이런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을 일반인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16년이 되자 그의 이런 생각은 마침내 상업적 무선 신호 수신기-그는 이것을 ‘라디오 뮤직 박스’라고 불렀다-라는 확고한 아이디어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기계를 통해서 음악을 비롯, 뉴스나 다른 여러 프로그램을 송신할 수 있다는 것이 사노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이나 사람 목소리가 집집마다 뿌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노프와 동료들이 이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 후 이들은 마침내 라디오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RCA)라는 회사를 차려서 이 일을 실현해냈고, 사노프는 당연히 거기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사노프는 죽을 때까지 RCA의 핵심이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거인으로 자라난 RCA는 양차 대전을 지원하고, 현장 라디오 생방송의 길을 열고, 방송 송신기와 수신기를 생산하고, 축음기를 제조하고, 활동사진을 만들고, NBC 방송망을 구축하고, 뉴욕 시에 록펠러 센터와 라디오 시티 뮤직 홀을 짓고, 텔레비전을 출시하고, 컬러 TV의 표준을 창출하고, 최초의 컬러 방송 수상기를 생산하고, 그리고 마침내는 우주 여행의 장면들을 미국인들의 안방에 송신하는 역할까지 해냈다.

▲ RCA가 인수한 Victor Taking Machine Co의 신문광고는 '주인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개의 그림으로 유명해져 RCA 축음기의 상표가 되어버렸다.
1971년 사노프가 죽은 뒤, RCA는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몹시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때 라디오와 텔레비전 분야의 절대 강자였던 이들이 시장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급기야 프랑스 기반의 한 회사에게-이 회사는 60여 년 전 RCA의 창업에 도움을 준 역사가 있다-매각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의 RCA는 여전히 전자분야의 유력 기업으로 남아 있으며, 소비자들에게도 친숙하고 신뢰할만한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RCA의 뿌리는 토머스 에디슨과 엘리후 톰슨에게로 거슬로 올라간다. 에디슨과 같은 시대 인물인 톰슨은 필라델피아 소재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였는데, 전기 현상에 매혹된 나머지 동료 교사 에드윈 휴스턴과 함께 전기 회사를 차렸다. 그 시기 에디슨은 뉴저지 주에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를 꾸리고 있었다. 톰슨 휴스턴 사는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이 행사를 위해 에펠탑이 세워졌다-에서 큰 상을 받았고, 3년 후에는 에디슨 제너럴과 합병되어 제너럴 일렉트릭이 되었다. 그러자 톰슨 휴스턴의 두 대표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비슷한 기업을 새로이 만들었다.

▲ 1922년 최초로 만들어진 RCA 라디오
이 무렵 이탈리아의 전기 기사 굴리엘모 마르코니의 손에서 무선 전신이 탄생했고, 이 발명의 위업은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는 1899년에 미국에 지사를 세웠는데, 그 후 20년 동안 대서양 관통 전신을 보낼 수 있는 집단은 오직 이들밖에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해군 차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무선 기술을 미국인의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제너럴 일렉트릭(GE)에 맡겼다. 이에 따라 GE는 1919년 RCA를 세워서 아메리칸 마르코니 사를 인수하고 무선 전신 관련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RCA가 태어났을 때 미국에 보급된 무선 수신기(라디오) 수는 5,000대 가량이었으며, 상업적 방송을 하는 곳은 웨스팅하우스뿐이었다. 그러나 1921년 이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마르코니 사에 있다가 RCA로 옮겨온 데이비드 사노프가 최초로 라디오 스포츠 중계를 실시한 것이다. 잭 뎀프시와 조지 카펜티어 사이에 벌어졌던 이 권투 헤비급 챔피언 전은 30만 명의 청취자를 끌어모았다. 몇 달 뒤에는 월드 시리즈 야구 경기가 최초로 방송되었고, 이러한 수요를 끌어당기기 위해 전국 각지에 방송국들이 생겨났다. 1924년이 되자 라디오 보급 대수는 250만을 넘어섰는데, 그 대부분이 RCA 제품이었다. 찰스 린드버그가 역사적인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1927년에는 600만 명 가량의 사람들이 라디오로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라디오의 잠재 가치를 정확히 인식한 사노프는 뉴욕 시의 WEAF 방송국을 사서 전국적 방송을 위한 중앙 방송국으로 만든 뒤, 여기 내셔널 브로드캐스팅 컴퍼니(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NBC)라는 이름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 대륙 곳곳에 산재된 25개의 방송국이 NBC의 회원이 되었다.

by 100명 2007. 4. 25. 22:24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4)
J.P.모건 (J.P. Morgan) (상)




회사 개요
창업자: J. 피어폰트 모건
특징: 미국 금융 시스템을 보전하고 확장함
주요 제품: 시중 은행 업무 및 투자 서비스
연간 매출: 181억 1,000만 달러
종업원 수: 1만 5,512명
주요 경쟁사: 도이체 방크, 골드먼 삭스, 메릴 린치
회장 겸 CEO: 더글라스 A. 워너 3세(샌디 워너)
본사: 뉴욕 주 뉴욕 시
창업 연도 : 1854년
웹사이트: www.jpmorgan.com

전설의 모건 가가 금융계의 파워 집단으로 떠오른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이들은 U.S. 철강이라든가 제너럴 일렉트릭 같은 기업계의 큰 별을 키워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한때는 미국 철도의 상당 부분들에 수백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으며, 미국 통화 체계가 여러 번 붕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를 회복시켰다. 이들은 대공황과 양차 대전의 참화도 버티어냈으며, 연방 규제 당국이 이들에게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사업을 떼어냈을 때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토록 막대한 역할을 담당하는 핵심 주자라는 사실로도 최근에 기업계에 불어닥친 거대한 변화의 바람만큼은 이겨낼 수 없었다.

▲ J.P.모건의 최초 설립자 조지 피바디(왼쪽)는 주니어스 스펜서(오른쪽)과 동업으로 시작했다. 주니어스는 뒤에 회사를 인수해 J.S. 모건으로 바꾸었고, 피바디는 대학을 세워 미국 굴지의 음악학교로 성장시켰다.
1830년대에 런던에서 문을 연 한 머천트 뱅크(merchant bank, 증권 업무와 어음 인수 등을 주 업무로 하는 영국의 은행 형태: 역자주)를 모태로 해서 태어난 J.P. 모건 사는 모건 가 3대의 손을 거치며 자라나는 동안 이미 오래 전부터 고만고만한 금융 기관의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이들은 월 가에 있는 본사뿐 아니라 세계 30여 개국에 자리잡은 지역 사무실을 통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저명 인사들과 권력자들에게 재무 상담 역할을 했다. 이들은 몇 차례에 걸쳐 최대 규모의 공모 주식들을 인수했으며, 역시 최대 규모의 기업 합병들을 주도했다. 게다가 한때 이들은 미국 정부의 제 1 자금 조달 원천으로도 활약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건 가 하면 자동적으로 현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른 금융업자 집단으로 인식했다.

그렇다고 모건 가 사람들의 평판이 언제나 좋았던 것은 아니다. 탐욕과 책략에 관한 한 어느 한 쪽도 부족하지 않았던 이들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희생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많은 미국인들이 최저 생활 수준에서 허덕이던 시절, 이들은 별다른 죄의식 없이 대중 앞에서 엄청난 부를 과시했다. 아름다운 여인과 값비싼 시가, 거대한 요트, 세계 수준의 미술 작품에 대한 이들의 애호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들은 미국의 경제계가 자신들의 놀이터인 양 행동함으로써, 종국에는 스스로 도움을 베푼 미국 정부나 개인들에게서조차 지지를 잃는 결과를 빚었다.

J.P. 모건 사는 지난 50년 간 태도며 사업 방식이 크게 달라졌지만, 금융 시장의 변화는 그보다 더 속도가 빨랐다. 그 결과 이들은 2000년 가을, 다른 금융 회사에 인수된다는 사실을 발표해야 했다. 이들을 인수한 회사는 명성과 영향력 면에서는 이들보다 떨어졌지만, 그 뿌리만큼은 모건 사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 자리잡은 곳이었다.

▲ J.P.모건은 맥킴하우스를 사들여 당시로선 거금인 120만불을 들여 도서관과 박물관으로 꾸몄다. 고미술품 수집가인 그는 메트로폴리탄 등 미국 유수한 박물관에 많은 유물을 기증했고 하버드대학 등 여러 대학에 도서관을 많이 지어 사회의 악평을 무마하려 애썼다.
1838년에 미국의 사업가 조지 피바디는 런던에 한 머천트 뱅크를 열었다. 몇 년 후 그는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을 동업자로 맞아들였다. 뉴잉글랜드의 유력한 사업가 집안 출신인 모건은 1854년에 회사를 넘겨받고, 이름을 J.S. 모건 사로 바꾸었다. 그 뒤 모건은 30년도 넘게 회사를 경영하면서 영국과 미국 사이의 중요한 재정적 연결고리 역할을 했고,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때는 프랑스 정부에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앞날에 이들이 펼칠 국제적인 역할을 예고했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모건은 아들을 얻었다. 어린 J. 피어폰트 모건은 보스턴, 스위스, 독일을 거치며 학업을 마친 뒤 뉴욕으로 돌아와, 아버지 회사의 대리 법인에서 회계원으로 근무했다. 1860년대와 70년대에는 몇 건의 투자에도 관여했는데, 파리의 드렉셀 하제스 회사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1890년에 아버지 모건이 죽자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 모건은 회사 이름을 J.P. 모건 사로 바꾸고 유럽과 미국에 나뉘어 있던 지분을 통합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금융계에 큼직한 발자국을 하나 찍었다. 미 연방 정부가 고갈된 금 준비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대량 구매함으로써, 정부의 재정난을 경감시켜 준 것이다.

본사를 뉴욕으로 옮긴 뒤, J.P. 모건은 미국 경제계를 키우는 데 힘을 집중했다. 첫 무대는 철도 사업이었다. 모건은 2대 경쟁사-뉴욕 센트럴 철도와 펜실베이니아 철도-사이에 요금 협정을 이끌어내고, 서던, 이리, 노던 퍼시픽 등 다른 철도 회사들을 재조직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덕분에 그는 여러 철도 회사의 주식을 받았고 이사회에도 소속되었는데, 그 결과 그의 부와 영향력은 막대하게 팽창했다. 1902년에 이르자 미국 전체 철도 가운데 1/6이 그의 통제 하에 있었다.

by 100명 2007. 4. 25. 22:23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4)
J.P.모건 (J.P. Morgan) (하)




그런데 이런 통합 건들은 흔히 자본 가치가 실제 가치보다 훨씬 부풀러진 채 이루어져서, 모건에게 수백만 달러의 투자 중개 수수료 및 주식 인수 수익을 추가로 안겨주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어쨌건 이런 행동-그의 이름을 따서 ‘모거나이징’이라 불린-을 통해서 J.P. 모건은 미국 내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개인 은행업자가 되었다. 미국의 소규모 경제를 산업적 규모로 재편한 사람이 존 D. 록펠러와 앤드루 카네기라면, 그러한 변신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모건이었다는 것이 사람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보기에도 위압적인 붉은 주먹코와 우렁찬 목소리를 지녔던 그는 뉴욕 증권거래소에 인접한 널찍한 집무실이나 뉴욕 앞바다를 순항하는 300피트 길이의 요트 ‘코세어 호’에 앉아서 세상을 주물렀다. 개인적으로 그는 낭비벽이 심한 편이었지만, 고객과 친구들을 고를 때는 부나 권력보다 인격과 성실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안목을 지녔다.

▲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으로 실직한 사람들이 죽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사람들은 J.P.모건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모건은 몇 차례에 걸쳐 심각한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 ‘머캔타일 머린 해운 카르텔’을 구성하여 결국 실패로 끝난 일이나, 자동차의 부상을 간과한 것-그 결과 그의 철도 사업은 쇠퇴로 이어졌다-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여전히 번영을 계속했고, 경제 위기를 막아내는 데도 힘을 보탰다. 예를 들면 1907년의 증시 공황 때 모건은 뉴욕의 은행가들을 설득해서 구조 자금을 모았고, 그 결과 전체적인 재정 파탄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일을 지켜본 연방 정부는 앞으로 이러한 개인적 중재를 피하려면 중앙 은행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1913년에 연방 준비법이 통과되었다. 그 해에 J.P. 모건은 로마에서 사망했다.

J.P. 모건의 아들로 흔히 잭 모건이라 불리는 J.P. 모건 2세는 1892년부터 회사 일에 참여했고, 얼마 안 가 총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그 후 30년 동안 거의 일관된 패턴으로 모건 사를 이끌며, 번영과 불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타고 넘는 경제적 혼돈 시기를 견뎌냈다. 이 시기에 모건 사는 프랑스와 영국 정부의 재정 대리인이 되어서 미국 기업들이 생산하는 수십억 달러 어치의 군수 용품과 기타 물자를 수입해 주었고, 전쟁 종식 후에는 국가 재건에 필요한 재정 비용을 상당 부분 제공했다. 아버지만한 권위를 지닌 대 금융업자는 아니었지만, 잭 모건 또한 당대에 으뜸가는 은행업자가 되었다.

1929년에 미국 증시가 붕괴하자-미국 내에 1,300만 명의 실업자를 낳고 수천 개의 투자 회사를 도산시킨-, J.P. 모건 사는 이를 초래한 장본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었다. 그 결과 정부 규제가 새로운 수준으로 올라섰고, 이는 경제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조치는 글래스 스티걸 법령이라고 불리는 1933년의 은행법이었다. 이 법령이 통과됨에 따라 모건 사를 비롯한 많은 회사가 은행업과 증권업을 분리시켜야 했다. 이와 더불어 잭의 아들 해리는 스무 명 남짓한 직원을 이끌고 회사를 떠나 모건 스탠리 투자 은행을 세웠다. 시중 은행 기능만을 갖게 된 J.P. 모건 사는 1945년에 기업을 공개했다.

다음 해에 잭 모건이 플로리다 주 보가 그랜데에서 죽자, 토머스 라몬트라는 이름의 동업자가 회장이 되었다. 이로써 모건 사의 한 시대는 완전히 저물고, 거의 100년 만에 처음으로 모건 가 출신이 아닌 사람이 모건 사의 대표가 되었다.

업계에서 좀 더 확고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모건 사는 1959년 다른 대규모 시중 은행과 합병했다. 1960년대에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유럽의 주식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이들은 미국에서도 이 사업을 재개할 꿈을 버리지 않았다.

모건 사가 채권 발행을 통해 멕시코 정부의 부채 구조를 양성화시키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나서 1년이 지났을 때, 이들의 오랜 소망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모건 사는 이 멕시코 프로그램을 러시아 등 여러 발전 도상국을 돕는 데도 활용했다.) 연방 준비 위원회가 기존의 규제를 풀고 1989년에 모건 사에게 기업 인수 시장 재진입을 허용한 것이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사업을 재개했고, 모건 사의 주가는 미국 내 은행 가운데 최고액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에는 알맹이가 빠져 있었다.

1990년대에 모건 사는 미국 내 증권 업무를 활성화시키고, 아메리칸 센추리 상호 기금의 45퍼센트 지분을 매입했다. 이에 따라 순수입은 증가했지만, 모건 사의 위치는 수익성 있는 최초 주식 공모나 기타 영리성 거래를 인수하는 금융 기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중간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모건 사는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투자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전기 통신, 첨단 기술, 인터넷 기업들에 힘을 집중하고, 랩모건(LabMorgan)이라는 부서를 만들어서 전자 상거래 서비스 개발에 나섰다. 또한 전통적 고객 기반이던 부유층 이외에 서민층을 대상으로 한 상품들도 개발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숨가쁘게 변모한 업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2000년 9월, 모건 사는 310억 달러 인수 계약을 체결해서 체이스 맨해튼 사에 회사를 넘겼다. 1799년에 세워진 체이스 사는 세계적인 거대 은행으로 거듭나기 위해 정력적으로 인수 합병을 추진해가던 중이었다. 모건 사와 하나가 됨으로써 체이스는 업계 2위의 기업이 되었다.

애초의 모건 가는 이제 공식적으로 깃발을 내렸다. 하지만 모건사를 인수한 회사는 이름을 ‘J.P. 모건 체이스’로 바꿈으로써, 그들이 이어받은 유산에 대한 긍지를 선명하게 내보이고 있다.

by 100명 2007. 4. 25. 22:23
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3)
제네랄 모터스 (General Motors) (하)








그러나 GM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강렬했던 듀랜트는 먼저 GM의 주식을 매점했다. 그런 뒤 1918년에 경영권을 회복하자 셰브롤레 사를-하이어트 롤러 베어링 회사 등 다른 여러 회사와 함께-GM의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다시금 확장에 착수해서 기존 공장을 증축하고, 신규 연구소를 세우는 한편, 디트로이트 시에 15층짜리 사옥을 지었으며, 피셔 바디를 비롯해서 전보다 더 많은 회사를 인수했다. 1919년에는 ‘제너럴 모터스 어음인수 회사’를 세워서 금융 업계로도 진출했는데, 이 해에 GM은 40만 대에 육박하는 자동차를 팔아서 6,000만 달러가 넘는 매출 이익을 올렸다. 그러나 듀랜트의 원대한 계획은 다시금 대형 재정 위기를 초래했다. GM의 주가는 일곱 달 만에 42달러에서 14달러로 곤두박질쳤고, 듀랜트는 재정적으로 파산했다. 회사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은행가들이 소집되었고, 1920년에 그는 다시 한 번 GM에서 물러나야 했다.

▲ 1932년 당대를 주름잡던 자동차3사의 거두가 모였다. 왼쪽으로부터 E.포드, A 슬론(GM), W. 클라이슬러
이 위기 중에 취한 조치들 가운데 가장 현명했던 것은 바로 앨프레드 슬론을 수석 부사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하이어트 사의 간부였던 슬론은 기업이 인수되면서 GM과 결합했다. 그는 곧장 혁명적인 경영 시스템을 도입했다. 슬론의 원칙은 중압집권적 관리와 예산 통제, 거기다 위원회를 통해 의사 결정을 내리고, 일상 업무 관장 권한을 적절한 부서로 이양하는 것 등으로 요약되었다. 또한 그는 자동차 사업부들을 독립시켜서 각 사업부별로 서로 다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정한 자동차를 생산하도록 했다. 그러면 소비자들은 처지와 취향이 변화해도 언제나 GM 제품 안에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셰브롤레는 대중용 승용차가 되었으며, 캐딜락은 고급 승용차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올즈모빌과 뷰익은 나름의 특징적 고객을 구축했고, 오클랜드는 나중에 폰티액으로 개명되어 역시 스스로의 틈새 시장을 열었다.

1923년에 슬론은 GM의 사장이 되었다. 그 8년 후 GM은 세계 자동차 업계의 선두 자리로 올라섰으며, 그 자리는 아직까지도 중단 없이 유지되고 있다. 슬론은 1956년까지 회사를 통솔했고, 그 뒤에는 명예회장의 자리로 물러나 있다가 1966년 아흔한 살로 사망했다.

자동차가 소비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GM의 성장은 더욱 가속되었다. 1940년 이들의 총 차량 매출은 2,500만 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닥치자 GM의 공장들은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재조정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GM의 공장들에서는 123억 달러 어치가 넘는 비행기 부품, 트럭, 탱크, 대포, 포탄을 비롯한 각종 군수 용품이 줄지어 뿜어져나왔다. 1946년 정상 조업이 재개되자 팩커드, 스터드베이커, 내시 같은 신생 업체들이 자동차 업계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얼마 못 버티고 시장에서 사라졌다.

파워 스티어링, 파워 브레이크 같은 신기술을 도입하고 디자인에 혁신을 이룸으로써-이는 특히 코빗의 출시에서 빛을 발했다-, GM은 1950년대에 마침내 10억 달러 이익을 기록했다. 1960년대가 되자, 이들의 자동차 총 생산량은 1억 대를 넘어서게 되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 도요타나 닛산 같은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시장의 2, 3위까지 치고 올라올 때도 GM의 1위 자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총 생산량이 미국 기업들을 앞지른 1980년, 제너럴 모터스는 동맹으로 반격을 취했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에서 도요타를 합작 생산하기로 협정을 맺고, 이스즈에 대규모 투자를 했으며, 스즈키 사로 하여금 미국 판매용 소형차를 만들게 했다.

그렇지만 1980년대를 지나는 동안 GM의 시장 점유율은 44퍼센트에서 35퍼센트로 떨어졌다. 종업원 70만 명에, 미국 내에 149동의 공장, 캐나다에 13개 시설, 그 외 29개 나라에 사업 지부를 거느린 GM은 여전히 세계 최대의 자동차 업체였다. 하지만 불길한 징조는 사방에서 포착되었고, 수구적인 경영진은 대처 방도를 알지 못했다. 몇몇 아이디어들은 유망했지만-‘새턴’ 라인과 전기 차 ‘임팩트’-, 공장 운영의 비효율성이 수익을 잠식했고, 자동차 디자인은 창의성을 잃었으며, 제품의 품질은 저하되었다. 당연히 소비자들은 줄줄이 빠져나갔다.

GM은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동의 공장을 닫아야 했다. 이는 대중의 인식에 큰 악재가 되었고, 마이클 무어라는 사람은 1989년에 <로저와 나>라는 영화를 통해 이를 신랄하게 비꼬았다. 이 예리한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무어는 GM의 회장 로저 스미스의 행동을 추적하고, 그가 바로 이 모든 문제를 초래한 장본인이라 지목했다. 저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복수 희극’이라고 이름 붙인 이 영화는-그는 이 영화에 별 네 개를 주었다-GM의 평판 하락과 매출 추락을 부추겼다.

여전히 GM의 매출은 2위를 크게 앞선 선두 자리를 고수했지만, 1990년과 1991년에는 수십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이사회는 회장을 갈고 사장을 바꾸고 부회장, 수석 부사장을 교체해가며 법석을 떨었다. 그러다가 잭 스미스가 최고 경영권자의 자리에 올랐다. 1995년에 이르자 그의 노력에 힘입어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 해에 GM은 사상 최대의 순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1998년의 대규모 파업과 외국 경쟁 업체들의 줄기찬 공세로 인해 GM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27.7퍼센트로 떨어졌다. 이것은 슬론 이후 최저 수치였다. 스미스는 스스로 이사회로 물러나고 마흔일곱 살의 워거너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훌륭한 평판을 바탕으로 GM의 차기 인재로 주목받던 워거너는 23년 동안 GM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직무를 수행한 사람이었다. 워거너의 임무는 분명했다. 비용을 더욱 절감하고, 차량의 설계 수준을 오늘날 고객의 구미에 맞게끔 업그레이드 하는 것,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해내는 것이다.

워거너가 안팎의 기대에 부응해서, 이 산업 시대의 거인 GM을 날렵한 첨단기술 시대의 승자로 만들어줄 것인가? GM의 기나긴 역사가 그와 함께 있지만, 미래는 오직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2002년 6월 3일, 잭 스미스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정기 주총에서 2003년 봄에 회장직을 포함한 모든 직책에서 은퇴한다고 선언했다: 역자주)

by 100명 2007. 4. 25. 2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