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koreatimes.net/weekly/photo/bigco_pic/cop07062201.gif) | ▲ 기울어져 가는 디즈니를 회생시킨 천재 경영자 '마이클 아이스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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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너는 뉴욕 주 마운트 키스코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명문 사립학교들을 거친 뒤 오하이오 주의 데니슨 대학에 다녔다. 월트가 죽기 2년 전에 영문학과 연극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파리로 갔다. 하지만 열흘 만에 돌아와서 뉴욕 시의 NBC에 취직했다. 그 후 CBS와 ABC를 거치는 동안 그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젊고 촉망받는 간부로 성장했다. 1976년에 서른네 살이 된 그는 패러마운트 픽처스 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 후 8년이 지났을 때, 주요 업체 가운데 꼴찌를 헤아리던 패러마운트 픽처스는 업계의 선두 자리로 치고 올라왔다. 이때 신음하는 월트 디즈니 사가 그를 불렀고, 그는 이 부름에 응답하여 회장 겸 CEO로 발을 들여놓았다. 아이스너는 스튜디오 회장 제프리 캐천버그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루어서, 디즈니 사의 가장 당면한 목표를 영화로 잡았다. 그는 먼저 유명하긴 하지만 당대 최고의 흥행 배우는 아니던 벳 미들러, 리처드 드리퍼스 등을 출현시킨 주류 코미디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저예산 영화들이 상당한 수익을 올리자, 아이스너는 청소년 이상 관객을 겨냥하는 영화를 더 많이 만들기 위해 터치스톤, 할리우드 픽처스 등의 새로운 사업부를 출범시켰다. 최근까지 터치스톤은 <아마게돈>, <바이센테니얼 맨>등을 만들었고, 할리우드 픽처스는 <조이 럭 클럽>, <홀랜드 오퍼스>를 선보였다.
월트 디즈니를 존경하고 스스로에게도 그와 같은 기질이 있다고 생각한 아이스너는 그 다음 주요 목표를 비디오로 잡고, 회사의 자료실을 샅샅이 훑어서 활용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유명한 디즈니 캐릭터들이 나오는 고전적 작품들이 비디오로 재 출시되고 그에 발맞추어 어느 대규모 공연에 못지 않은 홍보가 펼쳐지자, 디즈니 사는 비디오 판매점들과 함께 예상 밖의 큰 수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이후 <라이언 킹>, <타잔>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나왔는데, 이 영화들은 모두 출시되자마자 문화적인 지표를 이루는 동시에 막대한 수입의 원천이 되었다.
영화 사운드 트랙 작업부터 신규 호텔 카펫 작업에 이르기까지 큰 일,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면밀히 신경을 쓰는 아이스너는 지난날 월트 디즈니와 마찬가지로 그 스스로 디즈니 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옛날의 <원더풀 월드 오브 컬러>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TV프로그램을 예전과 같은 일요일 밤 시간대에 다시 등장 시켰으며, 월트 디즈니처럼 직접 프로그램의 사회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창업자가 깊은 애정을 쏟은 테마 파크를 관리하는 데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서, 낡아가는 기존 공원들을 개량하고, 1992년에는 프랑스에 또 하나의 테마 파크를 열었다. 애초에 ‘유로디즈니’ 라고 이름 붙인 이 공원은 처음에는 엄청난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아이스너가 3년 후 이를 재정비하고 이름을 ‘디즈니랜드 파리’라고 바꾸자, 공원은 흑자 기반으로 돌아섰고 들끓던 비난도 잠들었다.
![](http://www.koreatimes.net/weekly/photo/bigco_pic/cop07062202.gif) | ▲ 아버지같았던 아이스너의 구두쇠 작전에 치를 떨고 나간 또 하나의 천재 제프리 캐천버그(왼쪽)는 스필버그(가운데)와 녹음감독 게펜(오른쪽)과 함께 손잡고 '드림웍스'를 설립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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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아이스너의 지도 아래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버지니아 주에 6억 5,000만 달러를 들여서 ‘미국 역사 테마 파크’를 만들려던 계획은 환경 보전을 이유로 좌절되었다. 디즈니는 이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법정 싸움과 홍보 전쟁을 벌여 나갔지만 결국 포기해야 했다.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캐천버그가 공개적인 분노를 표명하며 회사를 떠난 것은 아이스너 에게도 상처가 되었고, 디즈니의 기업 위상에도 타격을 입혔다.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디즈니의 주식은 1990년대 말의 강세 시장에서도 거의 존재가 없었다.
게다가 타임 워너 사와의 송출권 협상이 결렬되자, 디즈니 소유의 11개의 ABC 제휴사들이 2000년 5월의 시청률 조사 시기에 타임 워너 케이블 시스템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내의 약 350만 가구가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ABC를 시청하지 못했다. 타임 워너와 ABC는 애초의 계약이 1999년 12월 31일에 만료된 뒤 새로운 전국적 송출권 계약을 맺으려고 했다. 1992년에 케이블 TV 법이 하원을 통과 한 뒤로, ABC를 비롯한 지상파 TV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대가로 케이블 공급자들에게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었다. ABC는 타임 워너가 ABC네트워크 중 일부-디즈니 채널, 연속극 채널인 솝넷, 툰 디즈니-를 고급형 유료 케이블이 아닌 기본형 케이블로 송출해 주기를 원했다.
![](http://www.koreatimes.net/weekly/photo/bigco_pic/cop07062203.gif) | ▲ 전세계인의 동심을 사좁잡은 디즈니의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비록 험난한 과정을 겪어왔지만 월트 디즈니의 끝없는 상상력은 앞으로도 '동심 비즈니스'의 선두에 설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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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는 또한 타임 워너가 CNN같은 자사 소속 채널에 지불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프로그램 요금을 ABC에도 지불해달라고 요청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양측은 서로를 비난했지만, 연방 통신위원회는 최종적으로 타임 워너 측의 잘못을 판결했다. 타임 워너는 즉각 디즈니 채널들을 다시 송출했고, 양측은 재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타임 워너가 AOL에 인수된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디즈니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이 이에 반대하며, 디즈니와 타임 워너 간의 협상 과정을 독접 행위의 실례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반독점법 관련 당국은 최근에 AOL과 타임 워너의 합병을 승인하면서 프로그램 송출 임무를 맡은 케이블 운영자는 비제휴 회사-디즈니 같은-가 제작한 프로그램에 간섭할 수 없게하는 내용을 못 박았다. 하지만 물론 성공을 거둔 사례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토이 스토리>, <벅스 라이프>, <다이노서>같은 혁신적인 컴퓨터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연이어 태어났고, 텔레비전 시청률은 ABC 네트워크와 ESPN 같은 케이블 채널 양쪽을 통해 모두 선두권을 지키고 있으며, 미라맥스 스튜디오와 제휴하여 <사이더 하우스 룰즈>, <셰익스피어 인 러브> 같은 매력적인 성인 영화들을 끌어안았고, 전국적 어린이 라디오 방송을 출범시켰으며, 부모들을 위한 공예 및 여행 잡지를 창간했고, 이러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인터넷 사업부를 만들었다. 디즈니의 히트 목록은 그 어느때 못지 않게 풍성하고 알차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 모든 것을 꿈꾸고, 그 꿈을 키워낸 두 사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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