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그런드페스트 미국 스탠퍼드대 법학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외계인들이 이사회 이사들을 모두 납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나 할까. 회사는 이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얼마나 돈을 쓸까. 또는 이사들을 돌려보내지 말아달라고 돈을 내놓지는 않으려나.”

‘비즈니스 에틱스’ 편집장 출신의 마조리 켈리가 쓴 ‘주식회사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론상으로는 이사회의 이사는 주주가 선출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CEO(최고경영자)와 이전 이사회의 이사가 새로운 이사를 선별하고 주주는 승인 도장을 찍을 뿐이다. 이사회는 주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업을 통치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CEO를 고르거나 CEO가 나머지를 다 처리한다. 어쩌다 한 번 인수나 합병 제안에 대해 의결하기도 하지만 그 뿐이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풍경 아닌가.

만약 외계인들이 KT 이사회 이사들을 한꺼번에 납치했다고 해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 하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이석채 전 회장의 배임·횡령 의혹이 숱하게 보도됐을 때 KT 이사회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멀쩡한 사옥을 내다 팔고 그 사옥에 임대로 들어앉을 때도 KT 노동자들의 자살 사건이 계속되고 있을 때도 아무런 내부 비판이 없었고 심지어 이 전 회장은 지난해 연임까지 했다.

   
영화 '황당한 외계인 폴'의 한 장면.
 
켈리는 이렇게 말한다.

“외계인들이 이사들을 전부 납치해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모든 중요한 통치는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다 이뤄지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사회가 통치하는 게 아니라 이사회가 구현하는 사상이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주식시장이 구현하는 사상이 기업을 통치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주식시장이 기업 사회를 통치하는 진짜 힘이다.”

민영화 이후 KT를 흔히 ‘주인 없는 기업’이라고 말하지만 진짜 주인은 이석채였다. 그런데 그 이석채의 권력은 주주들에게 나왔다. 직원들을 자르든 말든 비관련 다각화를 하든 말든 주가가 계속해서 오르는 이상 상당수 주주들이 이석채를 지지하거나 적어도 묵인했다. 타워팰리스에 회장 사택을 마련하고 심지어 회장 친인척 회사에 수상쩍은 투자를 해도 주가가 오르고 두둑이 배당을 주면 모두 오케이였다.

흔히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을 때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가 발생한다고 하지만 KT의 경우를 보면 오히려 대리인들이 주주들과 적극적으로 결탁하는 양상을 보였다. 지배주주가 없기 때문에 상당수 주주들이 단기 실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멀쩡한 사옥을 헐값에 내다 팔아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데도 당장 현금이 들어오고 배당이 늘어날 거라는 기대로 주가가 뛰어오르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이 전 회장은 취임 첫 해인 2009년 주당 순이익 2353원에 주당 2000원을 현금 배당, 배당 성향이 94.2%까지 치솟기도 했다. KT는 3분기 영업이익이 지난 분기 대비 11.6%나 줄어들었다. 통신부문만 놓고 보면 영업이익이 지난해 1분기 5230억원에서 올해 1분기에는 2360억원으로, 3분기에는 1470억원으로 급감하고 있다. KT는 지난해에도 주당 순이익이 2953원 밖에 안 됐는데 2000원을 배당해 고액 배당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연임에 성공하면서 “향후 3년 동안 주당 2000원 이상 배당을 유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KT는 한국 주식시장에서 가장 높은 배당을 주는 기업으로 꼽힌다. 최근 이 전 회장 낙마 이후 KT 주가가 크게 흔들렸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KT는 지난 1일 실적 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배당 정책은 이미 이 회장이 말했던 것과 같이 유지된다”고 밝힌 바 있으나 실행 여부는 불확실한 상태다.

   
이석채 KT 회장.
@이치열
 
장하준 영국 캐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해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주주들의 이해와 경영진의 이해가 일치하는 지점이 바로 고액 연봉과 스톡옵션”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임금을 동결하거나 노동자들을 자르고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설비투자를 미루면서 이익을 늘리고 시세차익과 배당의 형태로 나눠 갖는다”는 지적이다. 장 교수는 “단기 실적을 노리고 장기적인 성장성을 희생하는 일도 벌어지는데 그게 주주 자본주의의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KT는 2010년부터 전화국 건물 38개를 내다 팔아 4330억원을 벌어들였는데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KT 내부문건에 따르면 KT는 27개 건물을 감정가보다 869억원 가까이 싸게 판 것으로 드러났다. 이 회장은 줄어드는 영업이익을 만회하기 위해 자산을 내다 팔아 영업외 이익을 늘려왔다. 멀쩡한 건물을 내다 팔고 월세로 들어앉은 덕분에 10개 전화국이 지불하는 임대료만 해마다 19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 이 전 회장의 연봉은 22억원을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KT는 2006년까지만 해도 이사 보수 한도가 35억원 수준이었는데 2008년 50억원으로 늘어났고 그 이듬해 늘어났다. KT 안팎에서는 이 회장이 챙겨가는 돈이 1년에 70억원도 넘을 거라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검찰에서는 KT가 사외이사들 연봉을 올려준 뒤 되돌려 받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을 의혹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 전 회장이 주주들과 결탁을 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면서 “오히려 제대로 된 주식시장이라면 장기적으로 주주 가치가 훼손되는 상황에서 주가가 떨어져야 옳고 주주들이 계속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면 적대적 인수합병(M&A)이 일어나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현실적으로는 그런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전 교수는 KT의 경우 주주 자본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주주 자본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문제라는 입장이다. 이 전 회장이 경영을 잘못해서 KT의 주주 가치가 떨어졌다면 그 결과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게 주주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주주들이 주주총회를 통해 심판을 해야 했지만 이 전 회장은 지난해 3월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거쳐 당당히 연임에 성공했다.

조태욱 KT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은 “KT의 특수성을 봐야 한다”면서 “외국인 주주들이 외국인 지분 한도 49%를 거의 가득 채우고 있는 상황에서 자사주 6.8%는 의결권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외국인 주주들이 의결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조 위원장은 “통신 공공성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지분 한도를 강제로 낮추고 정부 지분을 다시 늘리는 방안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개혁연대에서 활동하는 이지수 변호사는 “KT를 흔히 주인 없는 기업이라고 부르지만 지배 주주가 없고 주식이 분포돼 있는 기업들이 모두 이렇지는 않다”면서 “KT의 경우 이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아무리 이석채가 뽑은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집행임원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사회 이사들은 이석채에게 유리하고 주주들에게 불리한 사안에 명확하게 반대를 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이석채가 주주들과 결탁했다기 보다는 이사회가 이석채와 결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주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특히 주주들이 자기 권리를 찾는 문화가 없고 국내 기관 투자자들도 대부분 재벌 대기업 계열이기 때문에 경영권 개입을 꺼리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있는 것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 변호사는 “KT의 경우는 정부가 뒤를 봐준다는 인식 때문에 특히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이 있는 것 같다”면서 “기관 투자자들도 KT는 정권과 함께 갈 거라고 보기 때문에 낙하산 회장의 전횡을 방치하고 장기적으로 주주 가치 개선을 요구하는 데 소홀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이런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이상 어떤 사람이 낙하산으로 내려오더라도 이 전 회장의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측근 중의 측근 표현명 사장, 이석채 후임 노리나.
“외부 인사 안 된다” 분위기에 추대설 확산, 이석채 수령청정 우려도.


KT 이사회는 사내 이사 2명과 사외이사 7명으로 구성돼 있다. 사내 이사는 표현명 회장 직무대행(T&C 부문 사장)과 김일영 코퍼레이트 센터장(사장)이고 사외이사는 이사회 의장인 김응한 변호사와 박병원 은행연합회 회장, 차상균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 성극제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현락 세종대 석좌교수, 이춘호 EBS 이사장, 송도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등이다.

이석채 전 회장의 후임을 뽑게 될 KT CEO(최고경영자)추천위원회는 7명의 사외이사 전원과 1명의 사외이사로 구성된다. 이번에는 표현명 사장이 회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기 때문에 김일영 사장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김 사장은 이 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사람으로 지난달 26일 르완다로 출장을 떠날 때 출국 금지에 걸려 동행하지 못했다. 검찰 수사 대상에 올라있는 사람이 후임 회장 인선에 참여하는 게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외이사들도 대부분 이 전 회장과 개인적인 친분으로 엮인 사람들이거나 이명박 정부에서 꽂은 낙하산 인사들이다. 김응한 이사회 의장은 이 전 회장의 고등학교 동문이고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이현락 이사는 이 전 회장의 대학 동문이고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던 성극제 이사는 이 전 회장의 대학 동문이다. 송도균 이사는 이 전 회장과 함께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고문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춘호 이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씨의 오랜 친구다. 역시 이 전 회장이 꽂은 낙하산이다. 차상균 이사는 KT의 협력회사인 SAP코리아 한국연구소 소장 출신이다. 재정경제부 차관 출신의 박병원 은행연합회 회장도 이명박 정부 낙하산 사외이사 가운데 한 명이다. 결국 7명의 사외이사 전원과 1명의 사내이사까지 CEO 추천위원회 전원이 이 전 회장의 측근들로 구성돼 있다는 이야기다.

KT 안팎에서는 표현명 회장 직무대행이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표 사장이 이 때문에 추천위원회 합류를 고사했다는 소문도 있고 KT 내부에서도 한국통신 시절 입사해 KTF를 거쳐 15년 이상 재직하면서 내부 승진으로 사장까지 올라온 표 사장 추대설에 힘을 싣는 분위기가 있다. 결국 청와대의 의중이 결정적이겠지만 표 사장이 물려받을 경우 낙하산 사장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 때문이다.

KT 관계자는 “표 사장이 후임 회장으로 선임될 경우 이 전 회장이 수렴청정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고 말했다. 표 사장은 이 전 회장의 고등학교 후배로 김 사장과 함께 측근 중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다른 KT 관계자는 “외부 인사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많은데 이 전 회장이 뽑은 낙하산 인사들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표 사장을 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CEO추천위원회는 위원장을 제외한 재적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후보를 확정하고 주주총회를 거쳐 최종 선출된다. 위원장은 이현락 이사가 맡게 됐다. 2008년처럼 회장 공모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단독 후보를 추천하는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 이르면 올해 안에 회장 선출 절차가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든 현재 위원회 구성으로는 어떤 인사를 추천하든 밀실 추천과 외압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회장 후보자로는 이상훈 KT 전 사장과 방석호 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원장, 형태근 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김동수 전 정통부 차관, 이기태 삼성전자 전 부회장, 황창규 삼성전자 전 사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삼성전자 출신 인사들이 여럿 눈에 띄지만 대부분 통신 전문가가 아니라 내부 반발이 거센 상황이다. 상대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장관을 지냈던 진대제 전 장관이 유력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이 내려올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형태근 전 위원이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을 통해 청와대 의사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청와대에서는 좀 더 중량감 있는 인사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KT 내부 인사로는 최두환 전 SD부문장과 이상훈 전 G&E부문장, 김영환 전 KT네트웍스 대표 등이 자천타천으로 거론된다.

이정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