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조선 독립’을 외치던 배우 한지민(26)이 흰 가운을 걸치고 ‘메스’를 손에 잡았다. 최근 KBS 드라마 <경성 스캔들>에서 당돌한 매력의 신여성 나여경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한지민이 12일 개봉하는 공포 영화 <해부학교실>에서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의대생 민선화 역을 맡아 ‘호러 퀸’에 도전한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만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할 것’ 이라는 예상은 씩씩한 모습의 한지민을 보는 순간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한지민은 더 밝은 표정으로 나타나 바쁜 스케줄을 되레 즐기는 듯하다. “영화 촬영 때는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고 드라마도 경남 합천 지방에서 촬영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요. 지방에서 촬영하는 틈틈이 영화 홍보를 하러 다니고, <연예가중계> MC까지 소화하려면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는 말을 실감하죠. 하지만 영화가 개봉하고 여러분과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행복해요.”
드라마와 영화 활동을 동시에 하다보니 맞홍보가 돼서 더 좋다며 활짝 웃는 한지민의 모습이 한껏 달떠 보인다. 한지민의 첫 주연 영화인 <해부학교실>은 6명의 젊은 의학도를 중심으로 카데바(해부용 시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의문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민선화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간직한 채 상처를 딛고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 드라마 <경성 스캔들>의 나여경과도 겹쳐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한지민이 연기하는 두 강한 여자는 그 느낌부터 사뭇 다르단다.
“나여경은 ‘꺼지십시오’, ‘닥치십시오’ 같은 과격한 말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캐릭터에요. 당돌하지만 그러면서도 연애에는 쑥맥인 귀여운 구석이 있는 여자죠. 여기에 비해 영화 속 민선화는 남 모르는 슬픔을 간직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억누르고 극복해 낸 인물이라고 할까. 차분하고 냉정한 느낌이 강한 인물이에요.”
같은 듯 전혀 다른 두 인물을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았을 법 하다. 하지만 한지민은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아 재미있게 촬영한 탓에 인물에 더욱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며 시원시원한 대답을 내놓는다.
“<경성 스캔들>도 배우들과 호흡이 잘 맞는 편이지만, 특히 <해부학교실>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촬영을 하는 장면이 많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공포영화라 심각한 장면이 많았는 데도 촬영 현장에서만큼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던 것 같아요.”
공포영화 촬영 현장에서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니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시체들과 함께 촬영하는 장면이 많았을 텐데 그 공포감이 크지 않았을까. 한지민은 이 역시도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탓인지 귀신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며 겁 없는 그의 성격을 다시 한번 짐작케 한다.
“사실 처음에는 시신이 무섭기도 했어요. 특히 함께 촬영하는 시신 모형들이 정말 ‘진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섬세한 거에요. 하지만 지난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시신에 대한 무서움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내가 너무나 좋아하던 할아버지였는데 단지 ‘시신’이라는 걸 의식하는 순간 할아버지가 무서워지는 거에요. 그렇게 생각해보니 시신 역시 내가 좋아하는 할아버지이고, 시신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할아버지 시신을 더 많이 안아드린 기억이 있어요.”
시체와 죽음에 대한 그의 깨달음은 영화 촬영을 계속 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영화 속 카데바의 슬픈 사연에 인간적인 공감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 실제 카데바들이 안쓰럽게 느껴진 것.
한지민은 “최근에는 가족들의 시신기증을 받는 경우가 늘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실제 카데바로 쓰이는 시신들 중에는 사고로 사망한 무연고 시신들이 많다고 한다.
저마다 사연이 있을 텐데 가족을 찾지 못하는 카데바들을 보면 가엾고 슬프다는 느낌이 든다”고 차분한 어조로 설명한다. 영화 속 의대생을 연기한 한지민은 실제 의대생들의 느낌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듯했다.
한지민은 실제 연기를 할 때도 카데바를 대하는 의대생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덧붙인다.
“의학용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메스 사용이 능숙한 의대생처럼 보이기보다는 실제 의대생들이 카데바에 느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려고 했어요.
의대생들은 대체로 해부학실습에 들어가기 전에는 카데바에 대한 심각한 공포나 긴장감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해부학실습이 진행될수록 카데바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거죠. 진짜 의대생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저도 그들의 감정을 가깝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지민은 이 같은 심리묘사를 통해 ‘조금 다른 공포영화’를 찍고 싶었다며 욕심을 내보인다. 보통의 공포영화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귀신이 나타나 관객을 놀래키기보다는 서서히 조여오는 심리적 공포감을 관객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선뜻 <해부학교실>의 출연을 결정한 것도 “이 영화라면 보통의 공포영화와는 다른 공포를 만들어낼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는데 너무 무서운 거에요. 아무런 효과음도 없고 글자만으로 쓰여져 있는 데도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심리적인 공포감이 더욱 커졌어요. 공포 이상의 무엇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전의 한국 공포영화와는 분명 다른 영화에요.”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영화에 거는 기대도 남다르다. 올 여름도 수많은 공포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지만, 각자 영화마다 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공포영화들을 굳이 경쟁작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 같은 한국영화인데 괜한 경쟁의식을 갖는 것보다, 관객들이 다른 공포영화도 많이 봤으면 좋겠단다. 한지민은 “그래도 이왕이면 관객들이 <해부학교실>이라는 좋은 작품을 알아보고 많이 찾아줬으면 더 좋지 않겠냐”며 애교 넘치는 부탁을 잊지 않는다.
“젊은 친구들이 함께 모여 정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촬영한 영화에요. 가볍지 않은, 생각할거리를 던져 줄 수 있는 영화고요. 정말 좋은 한국영화입니다. 많이들 와서 봐주세요.”
TV브라운관에서 선보인 발랄하고 당찬 연기로 인기를 얻고 있는 한지민의 매력이 스크린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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